소설리스트

7권 제24장 혁명의 태동胎動 (25/84)

제24장 혁명의 태동胎動

1

그라임 왕국 남부에 위치한 연금술사들의 도시, 알켄부르크.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5층 타워, ‘산타라의 눈물’ 본부에서 한 무리의 연금술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소?”

상석에 앉은 노인이 한심한 듯 물었다. 길드장, 오룬마이드였다. 맞은편의 중년 연금술사가 쩔쩔매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그들은 지금 길드의 남부 지구를 궤멸시킨 범인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칼티잔 시의 소식을 접한 ‘산타라의 눈물’은 처음에는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에게 지부를 습격당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상아어금니를 붙잡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었으니,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진상을 조사하고 나니, 이번 사건은 여태와는 좀 달랐다. 살아남은 카피르 일행 덕에 다른 이들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오룬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상아어금니, 그 저주받을 마물이야 자연재해 같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치겠소. 하지만 인간이 개입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길드의 권위를 위해서도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중년 연금술사가 서류를 펼치며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의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사하다 보니 범인의 윤곽이 조금씩 잡히긴 했다. 카피르 일행 덕분에 범인에 대한 인상착의도 손에 넣었다. 범인이 거느리고 있던 오크와 엘프 역시 주요 증거 중 하나였다.

억울하게 말려든 카피르 일행이었지만, 연금술사들의 피해가 워낙 크다 보니 차마 성질을 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사기 친 디플 본인은 이미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화를 풀고 조사에 협조해 주었다.

모든 정황을 조합하니 한 사람이 결정적인 용의자로 떠올랐다. 요 근래 대륙을 떠도는 소문의 주인공, 안타레스 백국의 지배자, 권왕 레펜하르트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권왕 레펜하르트의 황금빛 오러는 그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러나 남부 지부를 습격한 범인은 결코 오러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 마룬드의 증언에 따르면 능숙하게 마법을 구사했다고 합니다.”

분명 인상착의가 비슷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범인으로 확정하기엔 정황이 영 맞지 않는 것이다.

다른 연금술사가 발언을 이었다.

“그리고 날짜도 맞지 않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레펜하르트가 화재가 일어났던 그 시기에 백왕성을 비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고작해야 보름이 채 되지 않았다.

대륙 동부에 위치한 안타레스 백국에서 대륙 서쪽 끝인 할라인 왕국은 일반적인 여행자가 도보로 여행하면 두 달이 넘게 걸리는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빠른 말로 쉴 새 없이 달려도 족히 한 달은 걸린다. 도저히 보름 만에 왕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룬마이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대역을 쓴 것이 아닐까?”

“글쎄요, 대역 좀 세웠다고 못 알아볼 만큼 흔한 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인상이 아니라 근상筋狀(근육의 형상)이겠지만…… 하여튼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은 대역 좀 세웠다고 착각할 만큼 평범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고민이었다. 분명 레펜하르트가 의심스럽기는 한데, 대놓고 항의를 할 만큼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

“상대가 일반인이었다면 일단 잡아와서 고문하며 실토를 시키겠지만…… 상대는 명성 높은 권왕이자 일국의 지배자입니다. 증거도 없는데 함부로 범인 취급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난처한 듯 다른 연금술사 하나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바깥에는 권왕 레펜하르트가 트롤들을 구해 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길드의 권위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의자를 범인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연금술사들이 이리저리 조사하며 들쑤시고 다닌 덕분에, 세인들은 권왕 레펜하르트가 트롤들을 구했다고 믿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이종족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미 소문이 퍼졌기에 저 이야기 역시 꽤나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오룬마이드가 미간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제길, 골치 아프군. 정황으로 보나 평소 행적으로 보나 분명 그 작자인 것 같은데…….”

☆ ☆ ☆

같은 시각, 안타레스 백왕성의 집무실.

레펜하르트는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문득 그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연금술사 놈들은 속이 타겠군.’

그가 안타레스 백국으로 돌아온 지도 슬슬 두 달이 넘었다. 그런데도 연금술사들은 여태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산했던 대로였다.

이러려고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애매하게 드러냈다. 자신이 행한 일이라 소문이 퍼지되, 정작 당사자들은 뭐라 할 수 없도록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예상했던 대로 권왕 레펜하르트가 이종족들을 비호한다는 소문은 점점 더 퍼져만 갔다. 슬슬 인간의 노예로 사는 오크나 엘프들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리라. 추후로 계속 이종족들의 협력을 얻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인식이다.

반면, 연금술사들은 뻔히 짐작을 하면서도 대놓고 적대하지 못하고 있다.

‘공간 포털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아무리 의심이 가도 이쪽은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일부러 백왕성에 돌아오자마자 외부 상인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퍼포먼스도 했다. 무술 수행을 하는 척하면서 황금빛 오러로 하늘을 찌른다든가, 기사들과 대련하며 맨살로 칼 튕기거나 하는 식으로. 이러면 대역을 세웠다는 혐의도 벗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고 의심만 하면서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이것으로 족하다.

“초반에 힘을 키우는 동안, 인간들의 협공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레펜하르트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완연히 가을이 되었는지 하늘이 실로 높고 푸르렀다. 그 아래, 러스와 타시드의 전용 연무장이 보였다. 그들은 오늘도 여느 때처럼 오러를 뿜어 대며 대련에 열중이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그들 곁에 수십 가닥의 땋은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린 푸른 피부의 트롤 역시 서 있다는 점이었다.

러스와 한바탕 대련을 끝낸 타시드가 트롤을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후우, 좋아. 그럼 아틸카! 그대도 한판 붙어 보지?”

“좋소, 타시드. 준비하시오.”

대답하는 아틸카의 입가에는 그의 가장 큰 특징인 상아처럼 긴 어금니가 보이지 않았다. 상아어금니의 흉명이 워낙 자자하기에 레펜하르트가 마법으로 보이지 않게 감춘 것이다. 그래서 안타레스 백국의 인간들은 그저 아틸카가 평범한 트롤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타시드가 참마도를 들어 올려 그를 겨누었다. 아틸카도 단봉을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허업!”

“타앗!”

타시드와 아틸카가 서로에게 몸을 날렸다. 연무장 옆의 회랑을 지나가던 백왕성의 시종인 두 명이 아틸카를 보고 흠칫 놀라다가 이내 신경을 끄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슬슬 딴 사람들도 트롤에 대해 적응한 모양이군.”

레펜하르트의 뜻에 찬동한 아틸카는 결국 그와 함께하기로 뜻을 굳혔다. 그리고 구출한 트롤들과 함께 안타레스 백국에 투신했다. 구출한 아홉 명의 트롤들은 미리 마련된 숲 속에 새로이 거처를 꾸몄지만 아틸카는 레펜하르트와 함께 백왕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틸카의 출현에 카를이며 아스레일 등, 백왕성의 인간들도 처음엔 꽤나 당황했다. 아무래도 트롤은 몬스터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야생의 오크도 인간들에게 몬스터 취급 받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다양한 이종족들을 겪은 이들이라, 이제 와서 트롤 하나쯤 늘어 봤자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

레펜하르트는 시선을 옮겼다. 연무장 반대편에서는 어느새 러스와 시리스가 정신없이 대련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켈린과 실란이 사이좋게 마주 보고 앉아 뭔가 열띤 토론을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글로텐 산맥의 클로이 다이만 포털이 활성화된 이래, 마켈린은 수시로 그랜드 포지와 안타레스 백국을 오가며 드워프들을 돌보고 있었다.

“시리스, 타시드, 아틸카, 마켈린…….”

저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절로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 왔다.

“모든 준비를 갖췄다…….”

창가를 떠난 레펜하르트가 다시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행정은 재상인 카를이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어 그가 딱히 손을 댈 필요가 없다. 이 서류 역시 백국 행정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서류에는 대륙 각지의 거대 규모의 오크 농장과 투기장, 드워프 광산촌, 트롤을 사육하는 연금술사 길드 지부, 그리고 엘프 노예를 거느리는 귀족들의 명단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서류를 들여다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까?”

2

쿵! 쿵! 쿵!

어두운 땅굴 속에 곡괭이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는 이들은 작은 키에 건장한 체구, 수북한 수염을 달고 있는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었다. 다들 웃통을 벗은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는데, 강인한 체력으로 유명한 드워프답지 않게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들 뒤에서 가죽 갑옷을 입은 인간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게으름 피우지 말란 말이다, 이 땅강아지들!”

짜악!

날카로운 채찍이 비틀거리는 한 드워프의 등짝을 후려갈긴다. 혈선이 생기며 핏물이 튀어 오른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채찍을 맞은 드워프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드워프들이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관리관이 다시 채찍을 날리자 움찔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땅굴은 세텔라드 산맥 서남쪽에 위치한 철광이었다. 그라임 왕국의 귀족, 켈베른 자작이 경영하는 곳이다. 이 드워프들은 자작의 노예인 스틸해머 일족이었다.

“쉬고 싶으면 일을 끝내란 말이다! 일을!”

관리관의 호통을 들으며 드워프들이 이를 갈았다.

“크으…….”

벌써 이틀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쉬지도 못하고 땅을 파고 있다. 아무리 강인한 그들이라 해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원래 켈베른 자작도 자신의 노예 드워프들을 이렇게까지 학대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올해 초의 겨울, 켈베른 자작성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권왕 레펜하르트가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적대하며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켈베른 성을 거의 반파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때의 전투로 성벽 한쪽이 모조리 무너지고 건물 일곱 채가 박살 났으며 정원과 마당은 봄날 보리밭처럼 잔뜩 갈아엎어졌다. 피해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이후, 피해액을 보충하기 위해 켈베른 자작은 평소보다 훨씬 가혹하게 드워프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엘류시온 유적에서 건진 유물이라도 받았으면 피해를 좀 메울 수 있었을 텐데, 허세 부린다고 거절했던 것이 문제였다. 평소의 유서스라면 아무리 자작이 거절했다 해도 저 정도 피해를 보았으니 유물을 나누어 주었겠지만, 당시 그는 레펜하르트와 러스에게 연달아 충격을 받은 후였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챙긴 유물 홀랑 다 들고 가 버린 것이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스틸해머 일족뿐이었다.

“빌어먹을 인간들…….”

“제기랄…….”

땅을 파던 드워프들이 문득 증오의 눈으로 감시하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놈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곡괭이 등 광산 도구는 훌륭한 무기도 된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드워프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관리관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어쭈? 이것들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앙!”

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그들의 소중한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일족의 노인과 여자, 아이들은 켈베른 성 인근의 지하에서 철통같은 감시하에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간 바로 저들의 생명이 위태로우리라.

그리고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아다만티움은 발견되지 않았나?”

탄광 입구에서 로브를 걸친 30대 중반의 사내가 나타나 관리관들을 닦달해 댔다. 관리관들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법사 파블. 열심히 독촉은 하고 있지만 아직…….”

진금眞金 엘드릴, 진은眞銀 미스릴, 진동眞銅 오리하르콘, 진철眞鐵 아다만티움.

이 네 종류의 마법금속은 각자 금광과 은광, 동광과 철광에서 극히 소량만 발견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 가격도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히 철만을 계속 캐어서는 도저히 단시간에 피해액을 메울 수 없으니, 켈베른 자작은 소유 광산에서 오리하르콘이나 아다만티움이 발견되길 기대하며 쉴 새 없이 드워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대지의 소리를 듣는 드워프들이 계속 이 광산에는 더 이상의 아다만티움이 없다고 설명을 했지만 믿지를 않았다.

파블이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작님께서 많이 노하셨네. 좀 더 진행을 빨리 하게!”

마법사를 바라보며 드워프들이 우울한 눈으로 목을 만졌다. 그들의 목에는 금속으로 된 개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이 개목걸이에 부여된 폭파 마법은 저 마법사가 간단한 시동어만 외워도 바로 발동한다.

‘할 수 없지, 우리의 생명이 저들에게 달렸으니…….’

포기하며 드워프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반항할 여지가 없다. 숨을 헐떡이며 드워프들이 다시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에휴, 구원자께서 좀 살살 싸우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 갑자기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악!”

인간의 비명이었다. 드워프들이 놀라며 광산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켈베른 자작가의 병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른 것이다.

“응?”

“무슨 일이지?”

☆ ☆ ☆

“뭐야, 이놈들은!”

병사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육중한 배틀 해머가 병사의 복부를 가격하며 그 외침을 막아 버렸다.

퍽!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병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배틀 해머의 주인, 슬로이틀이 굳은 얼굴로 병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고용인일 뿐일 터. 생명까지 빼앗지는 않겠다.”

이미 슬로이틀의 주위엔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혼절한 채 땅바닥과 키스하고 있었다. 모두 켈베른 자작가의 병사들이다. 함께 온 그랜드 포지의 다섯 전사들 역시 서른 명 정도의 인간 병사들을 상대로 가차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기도 마저 처리해야겠군.”

슬로이틀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육중한 배틀 해머가 병사들 사이를 요란하게 오갔다. 상대는 고작해야 시골 귀족의 병사들, 굳이 오러를 구현하지 않아도 상대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망치가 스치는 곳마다 무기가 박살 나고 뼈가 부러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으아악!”

병사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하나같이 바닥에 엎어져 좀비처럼 희미한 신음을 흘린다. 슬로이틀과 드워프 전사들이 손에 사정을 둔 덕에 사망자는 없었다. 하지만 저 정도 부상이면 앞으로 칼 밥 먹고 살기는 영 힘들 것이다.

“무슨 일이냐!”

뒤늦게 광산 안에 있던 두 명의 관리관과 마법사 파블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슬로이틀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망치를 던졌다.

휘이이익~ 퍽! 퍽!

“꽥!”

“꾸에엑!”

앞장섰던 관리관들이 사이좋게 망치에 얻어맞고 대자로 뻗어 버렸다. 파블이 주위를 둘러보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 드워프들은 뭐지? 어디서 이런 놈들이 튀어나온 거야?”

배틀 해머를 회수하며 슬로이틀이 앞으로 나섰다. 차가운 음성이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흘러나왔다.

“동족들을 압제에서 구하러 왔다, 인간 마법사여.”

“뭐, 뭐?”

파블이 황당해하며 슬로이틀과 드워프 전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작 땅강아지 따위가 감히 반란을 일으키다니?’

하지만 우스워하기에는 주위에 널브러진 병사들의 참상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파블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우, 움직이지 마라! 내가 손만 까닥해도 저들의 목은 모조리 날아간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파블이 손가락을 들었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시동어를 외칠 생각이었다.

‘흥! 한 열 마리쯤 목을 날리고 나면 저것들도 감히 덤비지 못할 터!’

슬로이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함부로 손을 쓰지 못했지.”

“응?”

지나치게 태연자약한 반응에 파블은 인상을 썼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슬로이틀의 등 뒤로 또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 보였다. 전사들과 달리 짜리몽땅한 몸을 로브로 가린 다섯 명의 드워프들이었다.

나타난 드워프들이 일제히 손을 앞으로 뻗으며 입을 열었다.

"프니아 아를하이드 에가스트…….“

“정명한 흐름이여…….”

“내 손에 임하라, 내 뜻에 따르라…….”

“뚫린 것을 막고…….”

“풀려진 것을 다시 가둘지니!”

파블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드, 드워프가 마법을?”

예전 레펜하르트가 그랜드 포지에서 머물 때, 재능 있어 보이는 드워프들을 뽑아 마법의 기초를 닦아 준 적이 있었다. 바로 그랜드 포지 마법병단이었다.

그 후 이들은 틈날 때마다 안타레스 백국에 유학(?)을 와서 레펜하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기량을 높이곤 했다. 드워프들이 배움이 느리긴 하지만, 워낙 스승이 좋다 보니 다들 슬슬 2서클의 경지에는 들어선 상태였다.

드워프들이 일제히 시동어를 외쳤다.

“룬 오프레션rune oppression!”

억제의 마력이 파블을 향해 쏘아졌다. 파블이 놀라며 개목걸이에 걸린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어느새 드워프들이 그의 마력장을 누르며 발동을 억눌러 버렸다. 파블도 고작 4서클 초반의 시골 마법사일 뿐이라서, 비록 개개인의 경지는 낮지만 다섯 명이 힘을 모으니 파블의 마력장을 제압할 정도 위력은 나와 주고 있었다.

“으으윽!”

마법이 억눌린 파블이 신음을 흘렸다. 슬로이틀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퍼억!

두꺼운 주먹이 명치에 파고들자 파블은 이내 정신을 놓았다. 기절한 파블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슬로이틀이 광산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 그대들을 구하러 왔소, 스틸해머 일족이여!”

학대받던 드워프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드워프 마법사들이 그들에게 손짓했다.

“차례대로 오시오! 목에 걸린 마법의 족쇄를 해제해 주겠소!”

스틸해머 일족의 사내들이 반색을 하며 줄을 섰다. 드워프 마법사들이 손에 작은 양피지 하나를 든 채, 계속 그것을 곁눈질하며 순서대로 개목걸이를 풀기 시작했다.

“에, 이렇게 하는 거군. 하룬 바이드 타카라…….”

“나는 가둔 흐름을 푸는 자…….”

“풀고 뚫고 흐르게 하리…….”

양피지에 적힌 것은 레펜하르트가 마련해 준 전용 해제 마법이었다. 족쇄에 걸린 마법은 4서클의 것이었지만 이렇게 해답을 알고 있으면 2서클 수준으로도 그럭저럭 해지할 수가 있다.

철컹! 철컹! 철컹철컹!

여기저기서 풀린 개목걸이가 금속성을 내며 땅에 떨어졌다. 저주받을 운명의 족쇄가 드디어 풀린 것을 보며 스틸해머 일족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오오오!”

“드디어!”

모두들 감격의 표정을 지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문득 감격하던 드워프 사내, 러타이크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슬로이틀에게 말했다.

“아, 하지만 우리에겐 인질이 있습니다! 이들을 해치운 사실이 들통 나면…….”

슬로이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 걱정 마시오, 동족이여. 그쪽에도 이미 동료가 가 있으니.”

☆ ☆ ☆

켈베른 성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커다란 지하 동굴 입구.

작은 소녀가 체구에 걸맞지 않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타아앗!”

두꺼운 도끼날이 두 병사의 뺨을 연달아 강타한다. 강철의 따귀를 맞은 병사들이 이빨을 내뱉으며 일거에 기절해 버린다. 뒤이어 소녀가 도끼를 휘두르며 다른 병사들에게 몸을 날렸다. 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폭풍이 불며 병사들이 쓰러져 간다.

“아으으…….”

최후의 한 명이 비명조차 채 흘리지 못하고 바닥에 자빠진다. 그제야 도끼를 거두며 작은 소녀, 틸라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좋아, 다 처리했다.”

이걸로 주변의 감시 병력은 모두 해치웠다. 틸라는 서둘러 동굴 안쪽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니 이내 40미터 높이의 거대한 공동이 보였다. 그녀의 집이자 고향, 스틸해머 일족의 거주지였다.

문득 틸라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

떠난 지 고작 1년이 채 안 되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다. 감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틸라의 귀에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틸라가 소리쳤다.

“헤토스 할아버지!”

머리가 새하얗게 선 드워프 노인이 그녀를 보더니 놀라 외쳤다.

“틸라?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레펜하르트 님이 저를 보내셨어요. 모두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오오! 구원자께서!”

늙은 드워프의 갈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드디어 이곳을 떠날 때가 왔구나.”

헤토스가 허둥대며 발길을 돌렸다.

“참, 그렇지. 어서 겔파이드 신관님께 연락을 해야겠구나.”

뒤따르며 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빨리 사람들을 모아 주세요.”

“알았다!”

틸라를 만난 겔파이드 신관이 빠르게 온 마을에 전갈을 알렸다. 별로 넓지 않은 마을이라 이내 모든 노인과 아낙,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기본적인 생필품 몇 개만을 챙긴 가벼운 차림이었다.

일족을 향해 틸라가 손짓했다.

“강으로 가요.”

스틸해머 일족의 마을에는 강과 통하는 비밀스러운 땅굴이 있다. 레펜하르트가 동동 떠내려 왔던 바로 그 굴이다. 틸라의 인도에 따라 예순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땅굴을 통해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는 이미 백여 명의 드워프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랜드 포지에서 온 드워프들과, 그들이 구출한 스틸해머 일족의 사내들이었다. 가족을 만난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향한다.

“오오! 파멜라!”

“여보!”

“프리모!”

“아빠!”

상봉의 기쁨으로 여기저기서 눈물과 웃음이 흐른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은 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틸라!”

구출된 드워프 사내 하나가 그녀를 보며 놀라 외쳤다. 틸라가 반색을 하며 사내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빠!”

“하하하하!”

사랑스러운 딸을 품 안에 안고 러타이크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틸라의 풍만한 가슴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우리 딸, 정말 많이 컸구나. 이제 시집가도 되겠는데?”

인간 아버지가 딸의 특정 부위를 보며 이런 소릴 했다면 당장 잡아 가둬야겠지만, 드워프들에겐 이쪽이 정상이다. 눈물을 닦으며 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한편 슬로이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그토록 꿈꿔 왔던 장면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늙은 드워프 신관이 다가왔다.

“겔파이드라 하오. 그랜드 포지의 전사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신관님. 슬로이틀입니다.”

다른 이들은 재회의 기쁨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겔파이드는 신관답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제 어찌할 것이오? 이 주위는 온통 인간들의 마을로 가득하니, 이 많은 숫자가 움직이다간 이내 잡히고 말 텐데.”

“걱정 마십시오. 안 그래도 슬슬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간?”

의아해하는 겔파이드를 뒤로한 채 슬로이틀이 강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망치를 들더니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연녹색 오러가 밤하늘을 밝히며 솟구친다. 그대로 슬로이틀이 망치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자 어둠이 짙게 깔린 강 저편에서 희미한 등불이 반짝였다.

겔파이드가 의아해하며 노안을 크게 떴다.

“저건?”

등불이 점점 강변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라 불빛 뒤로 커다란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하천용 선박이었다. 십여 척의 선박이 강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그랜드 포지에서 배까지 준비를 했소?”

겔파이드의 질문에 슬로이틀이 고개를 저었다.

“그랜드 포지에서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점점 가까워지며 선박의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노를 젖는 선원의 모습을 보고 드워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헤토스가 놀라 물었다.

“저건 인간이 아닌가?”

선박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재상님! 배를 강변에 댔습니다요!”

“수고했다.”

경쾌한 음성과 함께 갑판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얼굴 가득 검은 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인간 사내였다. 강변에 오른 남자가 드워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안심하시오! 우리는 그대들의 동지요! 그대들이 이곳을 떠나는 걸 돕기 위해 배를 몰고 왔소!”

드워프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동지라고?”

“인간이 우리의?”

믿기지 않지만 저자가 드워프들을 도우러 왔다는 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당황하면서도 드워프들이 하나 둘 호의를 가지고 사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틸라가 러타이크 곁을 떠나 인간 사내에게 달려갔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외쳤다.

“카를!”

“틸라!”

카를이 활짝 웃으며 틸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틸라가 폴짝 뛰어 사내 품에 안겼다. 두 남녀의 신장 차이는 자그마치 40센티미터,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품에 안으니 눈높이가 맞는다.

틸라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카를이 부드럽게 웃었다.

“무사했구려, 걱정했다오.”

배시시 웃으며 틸라가 카를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입술을 뗀 뒤 감동한 얼굴로 그녀가 속삭였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수하들만 보내지 그랬어요?”

“하하, 당신의 가족들을 만나는 일인데 어찌 빠질 수 있겠소?”

……그리고, 러타이크는 경악한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저, 저, 저, 저!”

뭐냐, 저 인간은? 아니, 저 사내놈은? 저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대체?

잠시 못 본 사이 귀한 딸에게 웬 벌레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틸라가 러타이크에게 다가와 둘을 소개했다.

“카를, 이분이 저의 아버지예요. 아버지, 제 연인 카를이에요.”

물론 러타이크는 그때까지도 혼백이 반쯤 빠져나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카를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인어른.”

순간 빠져나가려던 혼백이 쏙 들어왔다. 러타이크가 버럭 호통을 쳤다.

“누, 누가 당신 장인이야아아아앗!”

3

할라인 왕국 서부 최대의 도시, 디알로.

디알로 시는 제지製紙와 직조織造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도시다. 할라인 왕국의 주요 수출품목인 종이와 할라인 옷감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종이와 옷감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약품을 생산하는 것이 바로 연금술사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이곳에도 연금술사들의 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산타라의 눈물’ 디알로 지부.

그 거대한 건물은 지금 폭연 속에 파묻혀 있었다.

“상아어금니가 저기 있다!”

“화염탄을 던져!”

앞마당에 도열한 연금술사들이 일제히 손에 든 도자기병을 던져 댔다. 건물 앞마당에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쾅! 쾅! 콰앙!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지나간다. 푸른 피부의 트롤이 연기 속을 헤치고 나오며 연금술사들을 노리고 달려간다. 그 앞을 서른 명이 넘는 전사들이 가로막았다. 모두 길드 소속 전사들이었다.

“이 괴물 같은 놈!”

“어림없다!”

전사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트롤을 몰아붙였다. 트롤이 괴이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듯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 툼후이 라바 포린치 문도 나만타치…….”

섬뜩한 어금니를 드러내며 풍차처럼 연신 몸을 회전해 전사들을 걷어차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들의 몸을 그어 댄다.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큭!”

“으윽!”

하지만 죽은 이는 없었다. 하나같이 값비싼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장비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가차 없이 날려 가면서도 전사들은 트롤의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막고 있었다.

틈을 타 전사 하나가 소리쳤다.

“다시 화염탄을!”

또다시 수많은 도자기병이 트롤에게 쏘아졌다. 폭발이 정원 여기저기 터지며 일렁이는 화염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불꽃이 두려운지 트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연금술사 중 하나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어떠냐, 상아어금니! 화염탄의 위력이!”

칼티잔 남부 지부의 궤멸 이후, ‘산타라의 눈물’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경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든 저 마물, 상아어금니가 트롤을 탈취하려 나타난다 해도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든 전사들에게 비싼 전신 갑옷을 입혀 놓고 화염탄도 잔뜩 출하해 연금술사들을 무장시킨 것이다.

던지기만 하면 반경 10여 미터를 불바다로 만드는 이 화염탄은, 사실 위력에 비해 그리 널리 쓰이는 무기는 아니었다. 전문 연금술사가 아니고서는 감히 다룰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취급법이 까다로웠다. 워낙 상태가 불안정해 잘못 다루면 오히려 자신이 폭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처음 화염탄이 개발되었을 때는 각국의 군대도 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정식 병기로 채택하길 포기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면, 어차피 마법이 존재하는 이상 굳이 화염탄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상아어금니에게는 이 화염탄이 제대로 먹혔다. 저 괴물 트롤은 어지간한 마법은 모두 무시하는 특이한 술수를 부리는 것이다. 반면, 화염탄의 불꽃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피하고만 있다.

사방이 불바다가 되자 트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

트롤어로 중얼거린 탓에 아무도 알아들은 이는 없었다. 잠시 후, 트롤이 몸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사와 연금술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상아어금니가 도망간다!”

“저 마물을 무찔렀다!”

건물 입구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서부 지부장, 롬드란이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나는 디플 같은 무능한 놈이랑은 다르다. 아무리 상아어금니라도 내 트롤들을 건드리지는 못해!”

그렇게 한참 롬드란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건물 안쪽에서 두 명의 연금술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로, 롬드란 님!”

“지부장니이임!”

표정에 경악이 가득하다. 롬드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연금술사들이 헐떡이며 외쳤다.

“트롤들이 도망쳤습니다!”

“응? 상아어금니는 방금 우리가 물리쳤는데?”

“상아어금니가 아닙니다! 정체 모를 놈들이었습니다! 상아어금니에 정신이 팔린 사이 놈들이 트롤을 탈취해 갔다고요!”

롬드란이 기겁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 하는 게냐? 그쪽에도 다 병력을 배치해 놓았잖아?”

칼티잔 지부 궤멸 사건으로 인해 연금술사들은 상어 어금니에게 협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롬드란도 만일을 대비해 저택 뒤쪽과 트롤이 있는 지하실 역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아어금니를 상대하는 내내 다른 쪽에선 아무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기우라고만 여겼었는데…….

“전부 당했습니다!”

연금술사가 원통하다는 듯 소리쳤다. 멍하니 서 있던 롬드란이 갑자기 허겁지겁 지하실로 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설사 오러 유저라도 그렇게 은밀하게 그 많은 병력을 다 해치울 수 있을 리가…….”

도착해 보니, 진짜로 트롤용 우리가 텅 비어 있고 달빛이 흐릿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롬드란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지하실, 달빛이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다.

역시나…… 천정이 동그랗게 뻥 뚫려 지상까지 이어진 것이 보였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언제?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 ☆ ☆

그믐달이 희미하게 어둠을 밝히는 밤하늘.

푸른 피부의 트롤이 지붕으로 뛰어넘으며 디알로 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참을 이동한 아틸카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내려왔다. 그가 품에서 팔찌 하나를 꺼내 차며 시동어를 외웠다.

“일루전.”

그러자 아틸카의 어금니가 흐릿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만들어 준 마법기로 어금니를 숨긴 뒤 골목 구석에 미리 숨겨 놓은 천으로 전신을 가린다. 완벽하게 정체를 숨긴 뒤 아틸카가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코너를 돌아 으슥한 곳까지 도달하니 강인한 인상의 오크 여인과 20대 후반의 인간 청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탈라와 러스였다.

스탈라가 아틸카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고생했구려, 아틸카.”

고개를 끄덕이며 아틸카가 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탈라. 저의 일족들은 무사합니까?”

스탈라가 옆을 곁눈질했다. 탈진한 듯 보이는 십여 명의 트롤들이 벽에 기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저택 앞에서 난동을 부릴 때 저들이 몰래 트롤들을 빼낸 것이다. 아틸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계획대로 되었군요.”

아틸카는 주술을 펼쳐 트롤들에게 활기를 넣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러스가 눈을 빛내며 스탈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스탈라 씨, 대체 아까 그 기술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응? 무엇 말인가, 카루가 러스?”

“왜, 그 지하실까지 땅 판 기술요.”

둘이서 트롤이 잡혀 있는 지하실로 갈 때의 일이었다.

러스가 주위 경비병들을 기절시키는 동안 스탈라가 땅을 슥 노려보더니 대뜸 단검을 던진 것이다. 그러자 오러를 발현한 것도 아닌데 땅 일부가 푹 꺼져 버렸다. 심지어 붕괴하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오러도 발현 안 하고 어떻게 그런 위력이 나옵니까? 게다가 소리는 또 어떻게 지우고?”

스탈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벽에 쿡 꽂으며 말했다.

“아, 이거?”

빛도 소리도 없이 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은밀했는지, 벽이 무너졌음에도 주거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설명 한마디 없었는데 러스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게 하는 거였군요.”

그리고 그 역시 롱 소드를 뽑은 뒤 벽에 쿡 꽂았다. 또다시 은밀하게 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누가 천재 아니랄까봐 시연 한 번 더 보더니 바로 용법을 파악한 것이었다.

스탈라가 흐뭇해하며 웃었다.

“한번 보여 주면 바로바로 이해하니 예쁘기도 하지. 타시드, 그 둔한 녀석은 한 대여섯 번은 보여 줘야 하는데.”

“하하…….”

대여섯 번 본 것만으로 따라 할 정도면 타시드도 충분히 천재는 천재다. 왠지 친구 욕 먹인 기분이 들어 러스는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어쨌거나 또 좋은 거 배웠다. 아, 역시 스탈라 씨 따라오길 잘했지!’

그렇게 러스가 싱글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골목 저편에서 늙은 드워프 하나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었다. 그는 골목 주위에 은밀한 신성 결계를 쳐 디알로의 시민들이 혹시나 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마켈린이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애꿎은 남의 집 담벼락은 왜들 부수고 있소?”

스탈라와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틸카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마켈린. 이들의 치유를 부탁합니다.”

“맡겨 두시게.”

마켈린이 트롤들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알 포트시여, 이들을 보살피사 모든 상처를 치유하소서.”

찬란한 은빛 성광이 트롤들을 감싸며 그들의 안색이 놀라울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트롤들이 눈을 뜨더니 저마다 손을 내려다보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키, 키탈……?”

놀란 트롤들이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크렐트?”

놀랍게도 완벽하게 나아 버렸다. 단순히 상처가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심신이 모두 숲 속을 뛰어다닐 때의 가장 건강했던 상태로 돌아갔다.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굉장한 권능이군.’

아무리 강한 재생력을 가진 트롤이라지만 그동안 당한 고초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틸카의 활기의 주술이나 실란의 치유술로도 다들 간신히 기운이나 좀 차릴 뿐 바로 회복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마켈린은 그런 이들을 단 한 방에 완치시켜 버린 것이다. 과연, 알 포트의 지상 대리자다운 어마어마한 신성력이다.

마켈린이 손짓을 했다.

“자, 그럼 어서 이 도시를 떠나세.”

트롤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에 힘이 넘쳐 나는 지금이라면 인간이 세운 성벽쯤은 간단히 타고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굳이 마켈린이 이 자리에 온 이유였다. 트롤들이 두 다리로 뛸 수 있기만 해도 탈출 난이도가 팍 떨어지는 것이다.

활기찬 일족의 모습을 보며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이리도 쉽게 일이 풀리다니…….’

예전에는 절대 이렇게 쉽게 일족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였고 인간의 힘은 강했다. 아무리 지부를 습격해도 일족을 구출하는 경우는 다섯에 한 번 정도였다. 게다가 지친 일족을 인간의 도시 바깥으로 탈출시키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종족의 조력을 얻으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간단히 일족을 구하고, 간단히 그들을 치유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다.

‘정말 이대로라면, 모든 일족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마켈린이 멍하니 서 있는 아틸카를 보며 의아해했다.

“뭐하나, 아틸카? 갈 준비 안 하고?”

“음? 아, 네…….”

정신을 차린 아틸카가 바로 주술을 발동, 은신의 안개를 피웠다. 안개가 피어올라 골목 너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흐릿해진 시야를 확인한 뒤 아틸카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비됐소, 갑시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인간과 트롤, 오크와 드워프가 어깨를 마주 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4

라스틸 공국 북부, 켄트리 시.

대부분의 큰 도시들이 그렇듯, 켄트리 시 역시 거대한 투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크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결투는 민중들에게 인기 높은 구경거리였고 그에 관련된 도박도 대단히 성행했다. 한 도시의 챔피언쯤 되는 오크 검투사를 가지고 있는 노예 주인은 그 배당금만으로도 엄청난 액수를 챙길 수 있었다.

그래서 오거스트는 눈앞의 오크 수컷을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대, 대박이다!’

오거스트는 켄트리 시의 유력 인사 중 하나로, 와일드베인이란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오크 검투사를 다루어 온 만큼 오크들을 보는 안목도 높았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볼 때, 이 녹색 피부의 오크는 실로 완전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오크들을 보았지만 이 정도 자질을 지닌 놈은 처음이야!’

전신의 균형도, 근육의 짜임새도 완벽하다. 덩치도 다른 오크 검투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이런 놈을 고작 하인으로나 썼었다니!’

내심 혀를 차며 오거스트는 오크 곁에 서 있는 흑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낡은 녹색 드레스 차림에 단정하게 양손을 앞으로 포갠, 꽤나 기품 있어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켄트리 시 외곽의 작은 농장주라 자신을 소개하며 오거스트를 찾아왔다. 요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데리고 있던 오크 노예 몇 명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오크 노예들은 근처 농장에 팔았지만, 이 녹색 오크는 힘도 세고 싸움도 자주 해서 혹시 검투사로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를 찾았다고 했다.

소녀가 초조해하며 물었다.

“저기, 혹시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오거스트가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 같군요.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그럼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보통 오크 노예들의 적정 가격은 금화 다섯 닢 정도지만…….”

표정을 관리하며 오거스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소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평소 이런 거래를 해 본 적이 없는지, 내심이 아주 표정에 여실히 드러난다.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보니 절로 조소가 나왔다.

“……검투사로 써먹을 수 있는 놈들은 좀 다르죠. 금화 일곱 닢 쳐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실제 오크 검투사의 가격은 평균 금화 열 닢 정도, 오거스트는 슬그머니 값을 깎으며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것도 모르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조, 좋아요!”

“그럼 바로 거래를 하지요. 자, 여기 계약서에 사인을.”

계약서를 건네며 오거스트는 사인을 종용했다. 소녀가 계약서에 농장 이름을 적고 서명을 했다.

처음 들어 보는 농장이었지만 오거스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켄트리 시 외곽에 소규모 농장들은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보다는 이 녹색 오크를 어서 챙기는 것이 중요했다.

오거스트가 계약서를 거두고, 소녀가 금화 일곱 닢을 받아 소중히 품에 넣음으로써 거래가 끝났다. 오거스트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으하하! 이런 놈을 얻게 될 줄이야.’

이 오크가 만약 켄트리 시의 챔피언이라도 된다면 그 배당금만도 금화 수백 닢에 달할 것이다. 그런 놈을 고작 일곱 닢에 사들이다니?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소녀가 녹색 오크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슬픈 듯 중얼거렸다.

“이 아이가 이래 봬도 굉장히 착해요. 가끔 다른 오크들과 싸우기는 했지만 제 말은 얼마나 잘 듣는데요? 그러니 많이 예뻐해 주세요.”

순간 오거스트는 실소했다. 제 딴에는 칭찬한답시고 한 말인가 본데, 성격이 온순하다는 것은 검투사 입장에서는 마이너스 요소일 뿐이다.

녹색 오크가 슬픈 얼굴로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님, 나 더 열심히 일한다. 나 팔지 마라.”

소녀도 울상을 지으며 눈가를 훔쳤다.

“미안해, 새 주인 밑에서 열심히 살아가렴. 말 잘 듣고.”

아주 둘이서 신파극을 찍고 있다. 오거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여자애 혼자서 데리고 다닐 정도면 정말 성격은 순한가 보군. 아무래도 혹독하게 성격 개조를 시켜야겠어.’

모든 검투사 양성소가 그렇지만, 와일드베인은 특히나 오크들을 혹독하게 대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한 달 정도만 지내게 되면 저 양처럼 순한 오크도 미친 황소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실라 양.”

“네, 오거스트 씨.”

소녀를 밖으로 안내한 뒤 오거스트가 경비병을 불러 녹색 오크를 데려가게 했다. 경비병 두 명이 오크의 손목에 족쇄를 채우고 안으로 끌고 갔다.

화려한 저택을 지나 옆에 위치한 허름한 석조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회반죽벽으로 둘러싸인 투박한 공간이 나왔다. 사방에 쇠창살이 쳐 있고, 그 안에서 수십 명의 우락부락한 오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창살을 열고 녹색 오크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경비병이 외쳤다.

“신참이다! 이 짐승 놈들아!”

경비병이 다시 창살을 잠그고 위로 올라갔다. 녹색 오크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없이 구석으로 가 앉았다. 오크 검투사들이 눈을 빛내며 오크어로 외쳤다.

“새로운 놈이 왔군.”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애송아! 크크큭!”

조롱 섞인 목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지만 녹색 오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회색 피부의 오크 검투사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자네도 참 못 올 곳에 왔군. 이름이 뭔가, 젊은이?”

녹색 오크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중년 오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까의 양순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 차가운 표정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크로타의 아들이자 칼켄의 검을 물려받은 자, 타시드라 하오.”

☆ ☆ ☆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달빛이 검투사 숙소 내부를 흐릿하게 비췄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오크 검투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주사위를 돌리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남았군.”

“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아, 버릭이 죽었을 때 이야기 혹시 들었나? 우리의 주인님 오거스트가 했던 개소리 말이야.”

“뭐라고 했기에?”

“죽은 버릭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더군.”

오크 검투사가 고개를 들고 오거스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외쳤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갑옷을 피해서 칼을 맞았어야지! 아까운 갑옷 하나를 날리지 않았느냐!”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놈.”

“빌어먹을 새끼…….”

힘없는 분노를 터트린 오크 검투사들이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장 며칠 뒤에, 자신의 처지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저주받은 운명, 저주받은 생애, 결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

문득 오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처지가 서글프구나. 세상에는 투혼의 축복을 받아 인간들과도 대등하게 맞서는 오크들도 있다던데…….”

“그거 안타레스 백국 이야기지? 그 권왕 레펜하르트가 세웠다던…….”

다들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레스의 오크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며 인간들에게 멸시받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맞선다는 그 소문은 이들 역시 들었다.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망상을 품은 적도 있다.

“그들은 진짜 전사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던데…….”

“진정한 오크로서의 영혼을 품은 자들이라던데…….”

나이 든 오크 검투사가 버럭 호통을 쳤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처자, 이것들아! 어차피 우리와는 관계도 없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때 숙소 구석에서 진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관계가 있다면 어찌하시겠소?”

오크들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질문을 던진 것은 오늘 들어온 신참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안타레스의 오크들, 그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어찌하겠냐는 말이오.”

“무슨 소리 하는 겐가, 타시드?”

나이 든 오크의 말에 녹색 오크, 타시드가 족쇄 찬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족쇄에서 청록색 광채가 솟구쳤다.

콰앙!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강철 족쇄가 단숨에 산산이 박살 나 바닥으로 흩어졌다. 오크들이 경악해 소리쳤다.

“오, 오러?”

“맙소사! 투사다!”

당황이 물결처럼 숙소 전체로 퍼진다. 데굴거리고 있던 다른 오크들도 놀라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이 든 오크가 놀라 외쳤다.

“누, 누구요? 당신은?”

타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안타레스에서 온 자, 형제들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왔소.”

“우리를 가두고 있는 이 벽은 내가 부술 수 있소. 그 이후 무기고로 달려가 모두 무장을 하면 저택 경비병쯤은 상대가 되지 않지. 그 후 도시를 빠져나가면 되오. 길은 내가 알고 있소. 안내만 잘 따르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거요.”

타시드는 차분히 탈출 계획을 설명했다. 오크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간다고? 이곳을?”

“이 지옥을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상상을 안 해 본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노예로 살아왔고, 평생 인간의 명령을 들어 온 그들이었다.

“마, 만약 그랬다가 인간들에게 붙잡히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마수에게 먹히게 될 텐데…….”

뼛속까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되었으니, 결코 쉽게 그것을 떨쳐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주저하는 오크들을 본 타시드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오크들의 머리 위로 타시드의 호통이 떨어졌다.

“그대들은 전사인가? 아니면 말하는 가축인가? 지금 뛰고 있는 그 심장에 전사의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단 말이냐!”

분노와 한탄, 슬픔이 뒤섞인 외침이었다. 서서히 오크들의 얼굴 위로 수치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평생 겪어온 노예로서의 삶, 그 위로 핏속에 흐르는 위대한 조상들의 영혼이 덧씌워진다.

오크들이 하나 둘 결심하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나, 나는…….”

“물론 전사다……!”

타시드가 등을 꼿꼿이 세우며 가슴을 활짝 폈다. 오러가 이글거리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수십 명의 오크 검투사들을 마주 보며 외쳤다.

“진정 전사라 자부한다면 일어나라! 일어나 무기를 쥐고 싸워라!”

오크들은 강자를 숭상한다. 그리고 타시드는 투혼의 축복을 얻은, 그들이 상상조차 못 했던 힘을 지닌 진정한 강자였다. 위대한 투사가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라 외치고 있었다. 흥분이 전염되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전사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진정한 전사다!”

“그대를 따르겠소! 투사 타시드!”

대다수의 오크 검투사들이 타시드의 뜻에 동조해 소리를 질렀다. 몇몇 오크는 여전히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니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형제들이여, 이제 길을 열겠다.”

타시드가 달빛이 흘러들어 오는 창가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외침을 터트렸다.

“오라! 나의 맹우, 다카르!”

휘이이익!

바람 소리가 울리며 무엇인가가 벽을 강타했다.

콰아앙!

굉음이 울렸다. 두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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