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상아어금니, 아틸카
1
할라인 왕국 남부의 해안 도시, 칼티잔.
역사 깊은 항구 도시인 이 칼티잔 시는 수많은 선박과 인구가 오가는 할라인 왕국의 중추 중 하나다. 선원들과 모험가들, 상인과 여행객들이 항시 상주하는, 할라인 왕국뿐 아니라 대륙 남부를 통틀어서 손꼽히는 거대한 교역 도시다.
그런 대도시이니만큼 칼티잔 시에는 온갖 세력이 밀집해 있었다.
마법학파가 건립한 마탑도 세 개나 되고 주신 세이어를 비롯, 각종 신전들의 숫자도 일곱이나 된다. 길드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던전 탐사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모험가 길드, 마물 사냥꾼들이 모이는 헌터 길드, 각종 의뢰를 도맡아 하는 용병 길드는 물론 온갖 뛰어난 약품을 제작하는 연금술사들의 길드 역시 칼티잔 시에 지부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할라인 왕국과 그라임 왕국에 세력을 떨치고 있는 거대 연금술사 길드, 산타나의 눈물.
그 남부 지부는 칼티잔 시 서쪽에 위치한 3층 높이의 커다란 석조 저택이었다.
어지간한 귀족가를 능가하는 이 대규모 저택 곳곳에는 수많은 실험실과 약품 제조실로 가득했다. 연금술사들의 약품 조합법은 기밀 중의 기밀이니, 대부분이 공개가 되지 않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엄중히 관리되는 장소가 바로 지하실이었다.
흐릿한 화톳불 아래 커다란 지하 석실의 모습이 비친다. 각종 플라스크와 유리병, 그리고 정체 모를 파이프들이 잔뜩 비치된 석실 안에서 암울한 신음이 아우성친다.
“우우우…….”
“아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이들은 모두 푸른 피부에 깡마른 육체, 주걱턱을 지닌 흉악한 외모의 트롤들이었다. 열 마리의 트롤이 두꺼운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커다란 강철 우리에 갇혀 있었다.
강철 우리 사이를 오가며 트롤들의 상태를 살피던 연금술사 한 명이 문득 입을 열었다.
“3호의 상태가 조금 좋지 않은데?”
“식사량을 조금 늘리지. 최소한 한 달은 더 살려 둬야 하는데.”
연금술사 중 하나가 양동이를 들고 3호라 불린 트롤에게 다가갔다.
우리에 갇힌 모든 트롤들의 입은 기구에 의해 강제로 벌려져 있고, 목구멍까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다. 연금술사가 파이프 끝에 이어진 깔때기에 양동이를 기울였다.
“옜다, 밥이다.”
양동이에 담긴 것은 길드에서 나온 온갖 음식 쓰레기들이었다. 연금술사 하나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트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니까. 배탈 따위 나지 않으니 먹다 남긴 음식을 처리할 수도 있고.”
“쓰레기도 처리하고 돈도 벌고. 효율적이지, 암.”
썩은 오물 덩어리가 트롤의 목구멍으로 꿀럭꿀럭 넘어간다. 구역질을 느끼며 3호 트롤이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아아아…….”
하지만 식도와 직접 연결된 파이프를 스스로의 힘으로 빼낼 수가 없다. 굴욕감과 비참함 속에서 3호 트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 다른 놈들도 밥 줘야지.”
연금술사들이 양동이를 들고 다른 트롤들에게 차례차례 들이부었다. 나직한 신음이 어두운 지하실을 가득 울렸다.
“우우우우…….”
참지 못한 트롤 여인 하나가 눈물을 흘렸지만 연금술사들은 그저 지나칠 뿐이다. 지하실 가득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들리지 않는 비명과 절규 속에서, 연금술사들이 대화를 나눴다.
“이번 달 말까지 500병 더 납품하라는군.”
“그럼 슬슬 한 마리 더 잡아야겠네.”
트롤들이 갇힌 강철 우리에는 저마다 레버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연금술사가 그중 하나를 골라 레버를 당겼다.
챙챙챙챙!
쇠사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트롤의 식도까지 박혀 있던 파이프가 뽑혔다. 간신히 목이 해방된 트롤이 통한의 포효를 터트리려던 차였다.
덜컹!
우리 바닥이 열리며 묶여 있던 트롤이 그 상태로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는 이미 수십 개의 칼날이 어지러이 교차한 채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마법진을 설치해 만든 일명 ‘트롤 분해 설비’였다.
“으아아아악!”
칼날의 폭풍 속으로 트롤이 떨어지며 비명을 터트렸다. 그 비명은 이내 요란한 쇳소리 속에 묻혀 버렸다. 칼날이 트롤의 전신을 산산이 찢어발겼다.
그야말로 ‘회 쳐진’ 트롤의 육편이 사방으로 날리는 걸 보며 연금술사들이 도로 레버를 밀었다.
“잘 처리됐네.”
“그러게.”
이제 저 박살 난 트롤은 정제용 설비로 향한 뒤, 체내의 모든 혈액이 남김없이 뽑힐 것이다. 트롤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더 뽑기 위해 고안해낸 이 설비라면 트롤 한 마리당 500병어치의 힐링 포션 재료를 채취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석실 한 편에 설치된 거대한 플라스크 속으로 트롤의 피가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똑, 똑, 똑…….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연금술사들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 트롤 살해는 몇 년째 계속해 온 일상이었다. 그들에게 이 트롤들은 어디까지나 힐링 포션을 제조하기 위한 재료의 ‘일부’일 뿐이다.
힐링 포션은 수많은 모험가, 여행자들이 애용하는 물건이며, 그것이 트롤의 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그 힐링 포션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용한 결과물이라면,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거쳐서 생산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저토록 처참하고 고통 가득한 과정일지라도 그저 힐링 포션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값이 싸져서 다행이라며 좋아할 뿐이다.
문득 묶여 있는 트롤 사내와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연금술사가 입맛을 다셨다.
“아, 이놈들을 번식시킬 수 있으면 참 편할 텐데.”
“그러게. 본부에서는 아직도 그 방법을 개발하지 못한 건가?”
트롤처럼 가치 높은 ‘가축’을 번식시킬 수 있다면 안정적으로 힐링 포션을 공급할 수 있으니 실로 유용할 터였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트롤 번식에 힘을 써 왔다. 강력한 마법이나 독으로 정신을 마비시킨 뒤 암수를 한 방에 넣고 교미시키는 시도도 수차례 해 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암컷이 새끼를 잉태하는 족족 유산해 버리는 것이다.
“분명 저것들이 야생에서 번식을 하니, 방법이 있기는 할 텐데 말이야.”
“그러게. 뭔가 모자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뭔지를 모르겠어.”
아무리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지만, 이 연금술사들은 저런 지독한 말을 너무도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 따윈 전혀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연금술사들도 저 광경이 너무 잔인해 보인다는 것쯤은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굳이 이 설비를 극비 중의 극비로 감추겠는가? 소나 말을 죽이는 도축장도 훤히 공개되어 있는데.
짐승들을 도축하는 것과 트롤을 갈아 버리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계속 트롤을 관리하는 연금술사들이, 트롤이 평범한 짐승이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다.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트롤이 사실은 인간처럼 지성을 지니고 감정을 지닌 이들이란 걸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꼴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무시한다. 뭔가 아니란 느낌을 받으면서도 애써 현실을 부인한다.
익숙함은 무섭다.
스스로에 대한 세뇌는 어느새 진실이 된다.
이제 이들에게 트롤은 원숭이처럼 인간을 닮은, 마물일 뿐이다. 결코 사악한 자들이 아니건만, 이 연금술사들은 태연하게 자신의 업무를 행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소문 사실일까?”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연금술사 하나가 동료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 런든 일행 말인가?”
남부 밀림에서 트롤 하나를 생포했다가 놓친 마물 사냥꾼들의 소문을 떠올리며 연금술사가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지부장님도 실망이 크다더군. 생생한 트롤 하나 들어온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난 상아어금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세. 그거, 진짜일까?”
“상아어금니라…….”
연금술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
세상에는 미신처럼 알려진 일이지만, 적어도 트롤과 관련된 일을 하는 연금술사들에게 상아어금니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수많은 연금술사 길드가 저 상아어금니의 습격을 받아 지부를 잃고 트롤들을 빼앗겼다. 산타나의 눈물 역시 그 피해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만으로도 지난 4년간 세 개의 지부가 상아어금니에 의해 불타 폐허가 되었다.
체면 때문에 그 존재를 미신처럼 꾸며 내긴 했지만, 당사자인 연금술사 길드들은 저 괴물 트롤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연금술사 하나가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으, 설마 이곳에도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칼티잔 시는 할라인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다. 설마 아무리 그 트롤이 신출귀몰하다지만 이런 인간들의 세상 한복판에 나타날까?
“하지만 이제까지 상아어금니가 모습을 드러내고 인근 지부들이 피해를 보지 않은 적이 없었잖아?”
“안 그래도 디플 지부장님도 꽤 걱정하시는 것 같더군. 그래서 이번에 귀한 손님도 모셨다더라.”
“귀한 손님? 상아어금니를 상대할 만큼 강한 자가 칼티잔 시에 있던가?”
이야기를 들은 연금술사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들은 상아어금니의 소문 중에는 이름난 기사단 하나를 통째로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 한들 과연 그 괴물 트롤의 상대가 될 지?
“그게 말일세. 새로운 오러 능력자 카피르 경께서 이 도시에 오셨다는 소문, 혹시 들었나?”
☆ ☆ ☆
산타라의 노래 남부 지부 저택, 3층.
수많은 요리가 차려진 화려한 식탁에서 세 명의 사내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화려한 인테리어 아래 시종들이 예를 갖추어 식사 시중을 든다. 맞은편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중늙은이가 연신 와인을 따라 주며 미소를 지었다.
“허허, 명성 높으신 카피르 경을 만나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가문의 영광은 무슨. 디플 지부장이 별 볼 일 없는 이 무부에게 너무 금칠을 하시는군.”
50대의 건장한 사내가 술잔을 받아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카피르 폰 스한.
그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국, 할라인 왕국에서도 일곱 명밖에 없다는 오러 유저 중 하나였다. 검의 명가로 이름 높은 스한 자작가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마물 사냥과 기사 수행을 통해 실력을 쌓은 카피르는 1년 전 결국 오러를 각성해 할라인 왕국의 최강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나이에 비해서는 꽤나 늦게 오러 능력자가 된 케이스다.
디플이 곁에 앉은 동년배의 노인 두 명을 보며 마저 인사를 건넸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 마룬드님과 블레이 신관님마저 왕림해 주셨으니 정말 평생에 남을 기억이 아니겠습니까?”
카피르와 함께 식사 중인 이 50대의 사내들은 스한 자작가에 소속된 7서클의 마법사 마룬드와, 카피르와 평소 친분이 있던 주신 세이어의 신관 블레이였다.
모두 젊은 시절부터 카피르와 함께 이런저런 모험을 함께 하던 이들로, 나이를 먹고 자리를 잡았음에도 여전히 젊을 적의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번에 칼티잔 시에 온 이유는 다들 나이도 먹었고 제자들도 키워 삶이 안정이 되니, 휴식도 취하고 바다 구경도 할 겸 여행을 온 것이다.
딱히 공무로 온 것이 아니니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 가문으로 돌아갈 셈이었는데, 디플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을 초대하며 자신이 모시고 싶다고 아부를 해 댄 것이다. 공짜로 재워 주고 밥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어 셋 다 별생각 없이 이 저택에 묵고 있었다.
“그럼 편안히 쉬시기를.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면 시종들에게 말씀하십시오. 이 디플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 지금도 이미 지나치게 대접을 받고 있소. 불편할 리가 있나.”
“다행입니다.”
카피르가 고개를 젓자 디플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디플의 입가에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이거라면 만약 상아어금니가 이곳을 덮친다 해도 아무 문제 없겠지!’
디플은 저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가 얼마나 강력한 마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괴물 트롤을 확실하게 상대하려면 적어도 오러 능력자나 8서클의 대마법사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돈 잘 버는 연금술사라 해도 저 정도의 강자를 고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 강한 오러 유저들은 일국의 위기에나 모습을 드러내지, 고작 용병이나 모험가처럼 의뢰를 받아 움직일 리가 없다. 8서클의 마법사 역시 오러 유저와 맞먹는 강자, 일국의 황궁 마법사 자리를 차지하거나 자신의 마탑을 세우고 떵떵거리는 이들이다.
돈으로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설사 가능하다 한들 그들에게 고작 ‘트롤’ 따위를 상대하라고 했다간 불호성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마물에 불과한 트롤이 오러 능력자와 맞먹는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말 따위 아무도 믿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디플이 선택한 것이 바로 ‘초대’였다.
카피르 일행이 칼티잔 시에 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디플은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달려가 명성 높으신 오러 유저를 모시고 싶다며 남부 지부로 데려와 극진한 대접을 했다.
혹시나 상아어금니가 나타난다면 기사의 명예를 염두에 둔 카피르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래도 손해 볼 것은 없지.’
그러면 그냥 오러 유저 카피르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인맥을 쌓게 되는 것뿐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그럼 마저 드십시오. 저는 잠시 일이 있어서…….”
디플이 방을 떠나자 카피르 일행도 식사에 열중했다. 고기를 썰어 입에 가져가며 카피르가 빙그레 웃었다.
“이것 참, 저 디플이란 양반, 사람 볼 줄 아는구먼.”
이들은 디플의 속내에 대해서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아어금니가 실존한다는 사실은 연금술사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비밀 중의 비밀,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카피르 일행이라도 설마 저런 목적으로 자신들을 초대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흐흐, 오러에 각성하고 나니 참 세상이 바뀐 기분이란 말이야? 마룬드, 자네도 8서클에 들게 되면 내 기분을 알걸세.”
짐짓 거만한 척 턱을 빼들며 카피르가 말했다. 물론 진짜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친구 앞에서 농담을 던지는 것이다.
삐친 얼굴로 마룬드가 포크로 카피르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잘났다, 정말. 아직 7서클인 인간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한심하다는 듯 블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아이고, 지금 자네들 나이가 몇인가? 어서 밥이나 처먹게.”
☆ ☆ ☆
검푸른 밤바다 수많은 선박들이 정박한 선착장 사이로 두 명의 병사가 창을 든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지루한 지 문득 병사 한 명이 늘어져라 입을 벌린다.
“하아아암.”
하품을 한 뒤 중년 병사, 스미드가 저 멀리 항만에 정박한 범선들을 바라보았다. 돛이 여러 개씩 달린 큰 배들이었다. 스미드가 문득 아련한 눈빛을 지었다.
“나도 저렇게 배나 타고 멀리 떠나 볼까?”
고참병을 향해 젊은 병사, 빈스가 물었다.
“스미드 씨도 선원에 뜻을 품은 적이 있습니까?”
“젊을 적에는. 하지만 선원들 이야기 듣고 관뒀지. 저게 좋아 보여도 막상 타면 개고생이라더라.”
“그래도 봉급이 세잖습니까?”
빈스가 아쉬운 눈으로 선박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젊은 빈스에게는 술집에서 떠드는 선원들의 모험담이 꽤나 매력적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스미드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 이래서 젊은 것들은. 세면 뭘 해? 가면 반은 죽어서 돌아오는데.”
저런 큰 배들은 근해가 아닌 대륙 남쪽의 해안 군도까지 향하는 배들이다. 원거리를 나서는 무역선이나 어선들은 수확물도 많지만, 그만큼 위험도도 크다.
“얼마 전 자이언트 크랩 잡으러 가서 전멸한 이루만 호 이야기 못 들었어?”
“전 살아 돌아올 자신이 있어요.”
“보통 그 소리 하는 놈들이 제일 먼저 죽더라.”
핀잔을 던진 뒤 스미드가 창에 몸을 기대었다.
“해안 경비도 봉급 짜지 않잖아? 그저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최고라고.”
“그렇지만…….”
뭔가 불만스러운 듯 빈스가 표정을 구긴다.
스미드는 말없이 웃었다. 젊은이에게 생명의 귀중함과 인생의 소중함을 떠들어 봐야 먹힐 리가 없다.
‘너도 나이 먹어 봐라. 내 말이 진리임을 알게 될 거다.’
그렇게 한가하게 부두를 순찰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빈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 갑자기 안개가 끼네요?”
스미드의 안색이 굳었다.
“어라? 안개가 낄 날씨가 아니었는데?”
해안 경비대로 잔뼈가 굵은 스미드였다. 적어도 해안가의 날씨를 파악하는 수준은 어지간한 선원 못지않은 경험을 쌓은 그였다.
그런 스미드가 보기에 오늘의 밤바다는 맑아야 했다. 밤안개는 예고 없이 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전조가 있다. 이렇게 느닷없이 안개가 일어 오를 리 없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긴장하며 스미드가 창을 고쳐 쥐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동시에 묘한 노랫가락 같은 것이 들렸다.
“어스름한 황혼의 호수, 구름의 여울로부터 검은 홍수가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스미드와 빈스는 그 노래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뭐지, 이 괴상한 소리는?”
당황하는 두 사람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날렵한 근육질 체구에 전신에 문양을 그린 트롤이 새하얀 어금니를 드러내며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으에엑!”
“흐익!”
놀란 두 사람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트롤이 양손을 뻗어 두 사람의 눈앞을 흔들었다. 손가락을 연달아 튕기며 트롤이 뇌까렸다.
딱, 따닥!
“솜구름 실려 오는 양귀비의 밤.”
줄 끊어진 인형처럼 두 병사가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수십 가닥의 땋은 머리칼을 흔들며 트롤이 쓰러지는 두 사람을 받아 들었다.
조심스레 병사들을 근처에 눕히며 트롤이 중얼거렸다.
“죄 없는 이들은 해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눈감아 주길 바랄 뿐.”
그렇게 잠의 주술로 이들을 잠재운 뒤 트롤이 고개를 들었다.
안개가 점점 밀려가 칼티잔 시 전체를 뒤덮어 간다. 하늘을 보며 트롤이 한탄을 흘렸다.
“통곡이 암천을 떠도는구나.”
둥, 둥, 둥둥둥…….
트롤이 양 허벅지에 매달린 작은 북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그의 입에서 주술적 가락이 흘러나왔다.
“나는 안개, 스며드는 어둠, 바람처럼 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
은신의 주술을 일으켜 주변의 안개와 합일시킨 뒤 트롤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구답게 곳곳에 내려놓은 짐들이 있었다. 수많은 상자들 위에 덮인 방수포 하나를 벗겨 낸 뒤 망토 삼아 머리 위로 두른다. 그렇게 전신을 감추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자 겉보기엔 인간과 크게 차이 없어 보였다.
“일족이여,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
방수포를 덮은 트롤이 빠르게 걸음을 놀려 인간의 도시를 향해 달려갔다. 이내 그의 모습이 자욱한 안개 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소등이오! 소등이오!”
야경꾼들이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항구 도시인 칼티잔 시는 해가 져도 돌아다니는 인구가 상당하기에, 주요 거리에는 기름을 태우는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다. 자정이 되자 기름을 아끼기 위해 가로등을 끄는 것이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시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레펜하르트 님. 그 아틸카인가 하는 트롤, 대체 언제쯤 나타나는 거예요?”
그녀는 지금 창문 너머로 비치는 산타라의 눈물 남부 지부 건물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저 거대한 3층 저택은 그들이 묵고 있는 웨이스톤 여관과 정확히 대로를 마주하고 있어 이렇게 2층 창문에 서 있기만 해도 대부분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실란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무리 봐도 아무 일 안 생길 것 같은데…… 확실한 거예요, 그 정보?”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머리를 긁었다.
“으음, 오늘은 분명 나타날 거야, 아마…… 아마도?”
묘하게 자신 없는 듯한 목소리에 타시드와 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타시드가 슬그머니 러스에게 귓속말을 흘렸다.
‘어째 은인이 이번엔 꽤나 자신 없어 하시는데?’
‘그렇지? 언제나 세상만사 다 아는 것처럼 굴던 양반이 말이야.’
“어이, 다 들리거든?”
뚱한 레펜하르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뜨끔하며 딴청을 피운다. 잘도 죽이 맞는 러스와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에잉, 벌써 사흘째 이러고 있으니 다들 지겨워하는 것도 어쩔 수 없나…….’
일주일 전, 아틸카의 소식을 들은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동료들을 데리고 안타레스 백국을 출발했다. 물론 백왕성의 인간들에겐 영지 시찰을 다녀온다고만 알려 두었다. 테스론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의 행적을 아무에게나 드러내지 않았다.
할라인 왕국은 단하임 일족의 고향인 스펠라트 사막 근처에 위치하기에 티다엔 다이만 포털을 통해 금세 이동할 수 있었다. 나흘 만에 레펜하르트 일행은 상아어금니의 소문이 퍼진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칼티잔에 도착했다. 이후 연금술사 길드 근처에 여관을 잡고 계속 아틸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레펜하르트도 언제 아틸카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사흘 내내 하루 종일 여관방에 처박혀 밤새도록 저택을 감시하고 낮에 자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일행을 달래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 줘. 트롤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아틸카의 존재가 꼭 필요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시리스가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저택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러스가 칼티잔 시 전도를 펼치고 계획을 점검했다.
“일단 아틸카란 그 트롤이 나타나면 저랑 실란은 미리 성문으로 가서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타시드와 시리스는 형님과 함께 움직인다, 이거죠?”
“그래. 아무래도 아틸카 입장에서는 인간보다는, 함께 학대받는 오크나 엘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더 말 섞기 편할 테니까.”
뭐, 계획이라 봐야 별로 복잡할 것도 없었다. 아틸카가 나타나면 재빨리 저택으로 달려가 트롤 구출을 돕고, 그와 함께 후딱 이 도시를 탈출하는 것이 전부다.
어깨 너머로 지도를 훔쳐보던 타시드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은인이여, 그 트롤은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시오?”
오크들도 레펜하르트와 신뢰를 쌓기 위해 한바탕 호투의 의식을 벌여야 했었다. 트롤이라고 인간인 레펜하르트를 순순히 믿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만약 아틸카를 만나게 된다면 전투 도중이 될 텐데, 흥분한 상태에서 과연 말이 통하기나 할지 걱정도 됐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열심히 설득하는 수밖에 없긴 해. 그래도 내가 트롤어를 할 줄 아는 데다가 타시드와 시리스를 대동할 테니까,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분명 진심이 통할 거다.”
너무 낙관적인 생각처럼도 들리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아틸카는 인간을 증오하는 와중에도 죄 없는 이에게는 결코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항시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는 현명한 트롤이었다. 일단 트롤 구출에 도움을 준다면 비록 경계는 할지언정 대놓고 적의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대화하다 보면 아틸카의 혜안이 레펜하르트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아, 어쨌거나 아틸카가 나타나야 뭐가 되는데 이것 참…….”
레펜하르트가 침대에 벌렁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시리스가 문득 툴툴거렸다.
“그나저나 오늘 밤은 왜 이리 안개가 짙게 끼나 모르겠네요? 감시하기 힘들게…….”
2
밤안개가 짙게 드리워진 커다란 3층 저택.
저택 주위를 길게 두른 높은 담장 아래 세 명의 보초가 한 조가 되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열심히 경계를 곤두세우며 벽을 따라 걷던 중이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그들의 머리 바로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압!”
거대한 그림자가 동료를 덮친다. 쓰러진 동료가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며 피를 토한다. 다른 경비들이 당황하며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향해 창을 들었다.
“뭐, 뭐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담벼락에는 혹시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 뇌격이며 화염이 발동하는 온갖 함정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 그림자는 분명 저택 부지 내로 침입했거늘 아무 마법진도 발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림자가 허리를 펴고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 아래 여실히 드러나는 푸른 몸체를 본 순간 경비들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으엑?”
“트롤? 왜 트롤이 여기에?”
한낱 경비병인 그들에겐 상아어금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도시 한복판에서 몬스터와 조우할 줄은 생각도 못한 경비들이 일순 굳었다.
뒤이어 아틸카의 수도가 좌우로 날아가 경비들의 목을 땄다. 피분수가 솟구치며 두 개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후두둑!
쏟아지는 혈우 속으로 아틸카가 달려 나갔다.
‘속전속결!’
아무리 기척을 죽였다지만 경비를 죽였으니 이내 들킬 터였다. 서둘러야 했다. 넓은 곳에서 인간들에게 포위를 당하면 골치 아프다. 복잡한 구조물 내에서 싸우는 것이 효율적이다.
푸른 트롤이 달빛 아래 놀라운 속도로 정원을 가로지른다. 전신을 맴도는 주술력 때문에 그 많은 방어 마법 중 어느 것 하나 발동되는 것이 없었다.
저택 현관으로 달려가며 아틸카가 괴이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호로로로로로…….”
굳게 잠겨 있던 현관문이 저절로 잠금쇠가 풀리며 벌컥 열린다. 아틸카가 안으로 뛰어들자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병이 경악해 두 눈을 떴다.
“으억? 뭐야?”
그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아틸카의 오른손이 경비병의 목을 가볍게 비트니 비명조차 없이 절명해 버린다. 그때 저택 복도에서 순찰을 돌던 갑옷 차림의 사내 두 명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헉!”
“왔다! 상아어금니다!”
이들은 일개 경비와 달리 길드에서 정식으로 키운 전사들이었다. 당연히 상아어금니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사내 하나가 잽싸게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퍼엉!
연기가 피어오르며 요란한 폭음이 일어난다. 연락용 폭약이었다.
이제 이걸로 저택의 모든 이들에게 침입 사실이 알려지리라.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덕에 이내 복도 여기저기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틸카가 혀를 찼다.
“쳇, 결국 들켰나.”
하지만 그리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택까지 돌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적 달성은 했다.
“오너라! 간악한 인간들아!”
아틸카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물론 트롤어로 외쳤기에 인간들이 듣기엔 광포한 포효로 들릴 뿐이다.
“저 괴물을 잡아!”
“저 괴물의 목을 베는 자에게 금화 천 닢의 포상이 기다리고 있다!”
“으아아아!”
탐욕과 공포가 어우러진 채, 길드의 전사들이 창과 검을 빼 들고 아틸카에게 돌격하기 시작했다.
☆ ☆ ☆
저택 전체가 소란스럽다. 식사 중이던 카피르가 인상을 썼다.
“무슨 난리지?”
카피르가 슬쩍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아직 오러를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감만으로 눈에 보이는 것처럼 주변을 모두 인식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대충 저택 1층에서 수많은 이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블레이도 입맛이 떨어진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디플이 들어왔다. 그가 땀을 흘리며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귀한 분을 모셨는데 하필 이런 일이…….”
“대체 무슨 일이오?”
“그게, 키우고 있던 트롤 중 하나가 탈출해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상아어금니의 존재를 외부에 알릴 수는 없다. 그래서 디플은 거짓말로 이들에게 핑계를 댔다.
“생각보다 난폭해서 소동이 좀 길어지는군요. 물론 우리 전사들이 계속 싸우고 있으니 곧 진정될 것입니다만 제법 피해가 커서…….”
은근슬쩍 자신들의 힘겨움을 피력하는 디플의 모습에 카피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그렇다면 우리가 좀 도울 부분이 있겠소?”
“그야 오러 유저이신 카피르 경께서 나서시면 트롤 따위야 순식간에 제압이 되겠지요. 하지만 귀한 손님에게 어찌 그런 부탁을…….”
신관 블레이와 마법사 마룬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레이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우리도 밥값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허허허.”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디플이 고개를 숙였다.
“명성 높은 세 분께서 마침 이 자리에 계시니 실로 하늘의 도움입니다. 감사합니다!”
☆ ☆ ☆
지하실로 향하는 저택 1층 복도, 그곳에서 지금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압!”
밀려오는 전사들의 머리 위로 아틸카가 날아오른다. 실로 놀라운 점프력이다. 낙하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날카로운 푸른 손톱이 선두에 선 전사의 머리통을 으깨 버렸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사들이 치를 떨며 외쳤다.
“젠장!”
“빌어먹을 괴물 같으니!”
욕설을 내뱉으며 전사들은 창을 들어 아틸카의 사방을 에워쌌다. 십여 개의 창날이 일제히 아틸카를 노리고 날아왔다.
“흥!”
코웃음을 치며 아틸카는 허리를 굽혀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바닥에 양손을 짚은 채 물구나무를 서며 풍차처럼 양다리를 휘둘렀다.
부우웅!
바람이 일며 창대가 일제히 튕겨 나갔다. 아틸카의 공격이 이어졌다. 공중제비를 넘으며 드롭킥으로 왼쪽 전사의 가슴을 걷어차고 이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허리를 비틀어 반대편을 두들긴다.
퍽! 퍼퍽!
춤을 추는 듯한 화려한 공격 앞에 전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다들 가격당한 가슴이며 두부頭部가 움푹 파인 것이 보나 마나 즉사였다.
죽어 간 동료들의 참상을 보며 전사들이 분노를 터트렸다.
“자, 잔인한 놈!”
“역시 마물이로구나!”
아틸카의 입에서 싸늘한 공용어가 흘러나왔다.
“우습구나. 너희들이 잔인을 논하느냐?”
항구의 병사들과 달리 이 전사들은 연금술사 길드 소속, 아틸카도 이들에겐 결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트롤의 고혈을 짠 황금으로 봉급을 받는 자들.
“그렇다면 그 피에 물든 돈의 대가 역시 각오해야 할 터다!”
아틸카의 신형이 전사들 사이를 빠르게 누볐다. 창칼을 찔러 오는 이들을 향해 달려가며 북을 두들긴다.
둥둥둥!
독특한 가락이 그의 어금니 사이로 흘러나왔다.
“드러난 핏줄 펄떡이니 그 짐 무거워 뒤뚱거린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전사들 몇 명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무기를 던졌다. 보이지 않는 기이한 힘이 그들의 몸을 멋대로 조종한 것이다.
“으헉!”
“으헤헥!”
“뭐냐, 이 사술은?”
당황한 전사들을 향해 아틸카의 발차기가 연달아 퍼부어진다. 연신 돌려차기를 날리며 아틸카는 무장 해제된 전사들을 걷어찼다. 킥이 명중될 때마다 철퇴로 맞은 것처럼 피부가 찢어지고 뼈가 부러져 사방으로 선혈이 튀어 오른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복도 좌우 벽이 인간의 피로 시뻘겋게 도색되었다. 시산혈해 속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이 공포에 질려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이건 미친 짓이야!”
도주하는 전사들의 등을 향해 아틸카가 양 손가락을 연달아 튕겼다.
딱! 딱! 딱! 딱!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바람의 칼날이 쏘아져 전사들의 등을 베어 냈다. 쩍 벌어진 상처를 드러내며 모든 전사들이 채 도망도 가지 못하고 죽어 갔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마흔 명이 넘는 단련된 전사들이 아틸카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죽은 것이다.
자욱한 피 웅덩이 속에서 아틸카가 고개를 돌렸다. 바람을 느끼니 이내 지하로 통하는 비밀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주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아틸카는 조심스레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 끝에 위치한 거대한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안에서 일에 열중이던 연금술사 두 명이 멀뚱히 아틸카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뭐야?”
“트, 트롤?”
지하실이 워낙 깊숙한 곳에 위치하다 보니, 이들은 위에서 그 난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이 멍청한 얼굴로 아틸카를 바라보더니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사, 상아어금니!”
아틸카의 시선이 석실 안으로 향했다. 온갖 기괴한 연금술사들의 기구, 그 한쪽에 거대한 강철 우리가 줄지어 놓인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실로 비참하게 묶여 있는 동족들의 모습도.
“아아…….”
분노에 찬 신음이 아틸카로부터 흘러나왔다. 연금술사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치려는 찰나.
“어림없다!”
바람이 일며 순식간에 아틸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분노와 증오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연금술사들을 내려다본다.
“으아아아…….”
공포에 질린 이들의 머리통을 커다란 푸른 손이 하나씩 붙잡았다. 트롤의 괴력이 손아귀를 타고 연금술사들의 머리통을 옥죄어 갔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연금술사들이 버둥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사, 살려…….”
그 상태로 둘을 들어 올리며 아틸카가 이를 갈았다.
“고통스럽게 죽어 마땅한 자들!”
우드드득!
인간의 머리통이 두부처럼 으깨지며 뇌수를 토해 냈다. 시뻘건 혈액이 푸른 손가락을 따라 흐른다.
시체를 팽개친 뒤 아틸카는 강철 우리로 다가갔다. 어서 빨리 저들을 저 지옥으로부터 구해야 했다.
그때였다.
“뭐야? 저거 그냥 트롤이 아니잖아?”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강렬한 기운이 아틸카의 전신을 바늘처럼 찔러 왔다. 아틸카가 긴장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을 품는 이라니?’
세 명의 인간이 지하실 입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카피르는 긴장한 얼굴로 눈앞의 트롤을 바라보았다.
이미 이곳을 내려오며 참상을 본 터였다. 일개 트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대화를 했나 싶었는데 정작 보니 그것도 아니다.
“저거…… 상아어금니잖아?”
“응? 그 마물 사냥꾼들의 미신 말이야?”
카피르의 말에 마룬드와 블레이도 인상을 쓰며 아틸카를 바라보았다.
디플은 이들을 너무 무시했다. 지금이야 자리 잡고 요직에 앉아 있지만, 젊을 적엔 대륙 각지를 떠돌며 기량을 키우고 모험을 하던 이들이었다. 상아어금니에 대한 소문도 못 들었을 정도로 경험 없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저거 진짜 있는 거였어?”
카피르가 혀를 찼다. 저 미신 속의 존재가 눈앞에 당당히 서 있는 것을 보니, 디플이 왜 굳이 자신들을 초대했는지 짐작이 갔다.
마룬드가 인상을 구기며 욕설을 뱉었다.
“으음, 어쩐지 잘 대해 준다 했다. 디플, 이 음흉한 놈 같으니.”
블레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공짜 없다더니 맞는 말이군.”
마룬드가 카피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쩔 텐가, 자네는?”
“괘씸하긴 하군. 한 소리 해야겠어. 기껏 밥 한 끼 얻어먹고 우리 셋이 힘을 쓰면 크게 적자잖아?”
블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도 없지 않소?”
이용당한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많은 인명이 죽어 갔는데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다. 카피르가 허리에서 커다란 브로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마룬드와 블레이도 각자 마법과 기도를 준비했다.
긴장한 얼굴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아틸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강한 자들이군.”
“어? 트롤이 말도 하네?”
카피르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오크나 엘프, 드워프처럼 인간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과 달리 트롤은 그저 힐링 포션의 재료로나 인식될 뿐이다. 거의 조우할 일이 없으니 대부분의 인간들이 트롤은 오우거나 놀처럼 지성이 없는 저급한 몬스터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놈일세.”
혀를 내두르며 카피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리 아래로 늘어트린 브로드 소드, 그 검날을 따라 붉은 광채가 흘러내렸다. 오러 능력자의 상징, 블레이드 오러였다.
“그럼 후딱 끝내고 디플 그 작자에게 잔소리 하러 가지!”
긴장감 없는 표정으로 카피르가 몸을 날렸다. 오러 능력자다운 스피드로, 단숨에 아틸카의 정면으로 쇄도하며 검을 내리쳤다.
“죽어라!”
순간 아틸카가 몸을 틀며 공격을 피해 냈다. 카피르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단순한 일격이지만 오러 유저가 휘두른 검이었다. 설마 트롤이 이 공격을 피할 거라곤 생각도 못한 것이다.
“어?”
아틸카가 몸을 낮게 숙이며 바닥을 쓸듯이 돌려찼다. 하체를 노리고 들어오는 킥에 카피르가 화들짝 놀라 뒤로 뛰었다. 이어서 아틸카가 몸을 비틀어 돌리며 연달아 발차기를 날렸다.
“트롤 주제에 감히 내 검을 피해?”
흥분한 카피르가 제대로 검술을 펼치며 반격에 들어갔다. 아까의 단순한 일격과는 차원이 다른 검격이 아틸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통째로 베어 주마!”
카피르의 블레이드 오러가 아틸카의 사방을 점유하며 쇄도해 온다. 역시 오러 유저다운 공격,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궤도였다. 이대로 저 트롤의 사지를 절단하리라 카피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이었다.
아틸카가 등 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블레이드 오러를 막았다.
파앙!
가로막힌 오러가 흩어지며 붉은 파문이 사방으로 퍼진다. 상황을 지켜보던 마룬드와 블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뭐야, 저거?”
붉은 블레이드 오러, 그것이 교차한 두 자루 단봉에 가로막혀 있었다.
분명 오러도 무엇도 감싸지 않은 단봉이었다. 단봉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그냥 나뭇가지 두 개를 꺾은 것처럼 보이는 조잡한 작대기에 지금 블레이드 오러가 가로막힌 것이다.
아틸카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은혜는 하해와 같아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으니!”
이 두 자루 단봉은 아틸카의 고향에 위치한 신목, ‘어머니 은혜’의 가지였다. 정기 가득한 나뭇가지 일부를 용서의 의식을 벌인 뒤 꺾고 나서, 천일 기도를 올리며 주술력을 깃들인 그만의 애병. 겉보기엔 조잡해도 그 위력은 이름난 명검 못지않은 것이다.
단봉 두 자루를 서로 두들기며 아틸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찼도다.”
난타하는 리듬 속에 흐르는 노랫가락이 주술이 되어 전신으로 스며든다. 전신이 대자연의 정기로 가득 찬다.
기합을 터트리며 아틸카가 반격에 나섰다.
“흐아아앗!”
두 자루 단봉이 회오리치며 카피르의 좌우를 연달아 날아든다. 브로드 소드를 휘둘러 방어에 나서며 카피르가 안색을 굳혔다.
‘빠, 빠르다?’
오러 유저인 그보다도 오히려 눈앞의 이 트롤이 더더욱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신체 능력이었다. 거대화한 트롤보다도 더한 괴력에 가공할 스피드, 단봉술 역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어 전신 급소를 사정없이 파고드는데 반격은 고사하고 방어하기도 버겁다.
“크윽!”
굴욕감에 이를 갈며 카피르가 뒤로 물러섰다. 일단 뒤로 물러서서 어떻게든 상황을 좀 뒤집을 필요가 있었다.
후퇴하는 카피르가 연달아 검광을 흩뿌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늘어나 뒤따르는 아틸카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쾅! 콰콰쾅!
오러의 채찍이 석실 바닥을 파헤치며 거대한 고랑을 남긴다. 순식간에 석실 바닥이 갈아엎은 밭처럼 초토화되었다. 카피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일단 거리를 벌렸으니…….’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전진하지 못한 아틸카가 대신 두 단봉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퉁! 퉁! 퉁!
박자에 맞춰 단봉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아틸카가 괴이한 외침을 터트렸다.
“마파람에 새싹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
단봉 끝에서 수십 개의 가는 넝쿨들이 돋아났다. 넝쿨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 가며 카피르의 발치에 이르러 두 발을 얽매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움직임이 완전히 봉쇄되어 버렸다. 당혹해하는 카피르의 눈에,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아틸카의 모습이 보였다.
“흐라앗!”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틸카가 좌우 단봉을 맹렬히 휘둘렀다. 두 다리가 묶여 있어 카피르로서는 도저히 방어 자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검을 들어 우측 공격을 막는 순간이었다.
“크윽!”
카피르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미처 막지 못한 우측 단봉이 그의 늑골을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오러의 방어를 간단히 뚫고 육중한 타격을 입힌다. 붉은 피가 목구멍을 타고 토해졌다.
“쿠, 쿨럭!”
“카피르!”
블레이가 놀라 소리쳤다. 마룬드의 목소리가 석실 안을 가득 메웠다.
“폭염이여! 내 손에 임하라! 세상을 태우는 기둥이 되라! 플레임 스트라이크!”
보다 못한 마룬드가 손을 쓴 것이다. 강렬한 불꽃의 기둥이 아틸카를 노리고 내리꽂혔다. 후속타를 날리려던 아틸카가 혀를 차며 뒤로 피했다. 그 틈을 타 카피르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발을 묶고 있는 넝쿨을 잘랐다.
“보, 보통 마물이 아니었군!”
고통으로 인상을 쓰며 카피르가 더듬더듬 외쳤다. 블레이가 그에게 다가가 치유 주문을 쓰며 말했다.
“애당초 몬스터를 상대로 기사도를 신경 쓸 필요가 뭐 있나? 다 같이 나서서 후딱 해치워 버리세!”
3
“화염의 숨결, 한 자루 화살이 되리, 프레임 애로우! 암운의 외침이 내 손에 임한다, 라이트닝 스피어! 폭렬의 구, 적을 친다, 파이어볼!”
마룬드가 연달아 마법을 발동했다. 경험 많은 마법사인 그는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에게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 육체를 태워 버리는 화염계와 뇌격계 마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폭염과 뇌전이 아틸카의 사방을 점유하고 날아들었다.
피할 곳이 없어보이자 아틸카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이이익-!
아틸카의 주위로 뿌연 기류가 소용돌이쳤다. 모든 마법이 소용돌이에 가로막혀 폭발하며 흩어졌다. 마룬드가 놀라 외쳤다.
“뭐지, 저건? 마법도 신성 주문도 아닌데?”
블레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에 들어갔다.
“세이어여, 그대의 종이 아픔을 딛고 새로이 일어서게 하소서!”
블레이의 신성력이 카피르에게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카피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블레이! 살살 좀 하게!”
당황하며 블레이가 반문했다.
“아니, 그냥 치유술 걸었는데 뭐가 아프다는 건가?”
아틸카의 주술력이 카피르의 체내 오러와 상충하며 블레이의 신성력과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블레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러 유저끼리 싸운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런 현상이?”
그래도 치유술 덕에 부러진 늑골의 통증이 한층 완화되었다. 카피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브로드 소드를 들었다.
“아오, 아파 죽겠네. 내 저놈을 당장에!”
재차 오러를 끌어낸 카피르가 흥분한 목소리로 아틸카에게 돌진했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두 자루 단봉과 맞부딪쳤다.
콰아아앙!
폭음과 빛의 파문 속에서 카피르와 아틸카가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검과 단봉이 교차할 때마다 폭음이 터지며 귀가 멍멍할 정도로 공기가 뒤흔들린다. 마룬드가 재차 마법을 날렸다.
“아이언 스틸!”
4서클 무장 해제 마법, 아이언 스틸이 아틸카의 단봉을 직격했다. 갑자기 무게가 증강되자 아틸카의 두 팔이 바닥으로 축 처졌다. 하지만 단봉을 놓치지는 않았다. 단봉을 쥔 채로 바닥에 주먹을 짚더니 바로 물구나무를 서며 카피르에게 발차기를 날린다.
퍼버벅!
어깨에 연타를 맞은 채 카피르가 신음을 흘리며 물러섰다. 갑자기 상하가 반전되며 머리 위에서 발차기가 날아오다니, 산전수전 다 겪은 카피르로서도 처음 당해 보는 공격이었다. 게다가 그 위력은 오러 유저의 그것과도 맞먹는다!
“크으윽!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그 틈에 주술력으로 마법을 해제한 아틸카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단봉으로 허벅지의 북을 두드리며 아틸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붉은 하늘이 너를 내리쳐 모래와 먼지가 되어…….”
리듬을 타고 또다시 기이한 기운이 요동을 친다. 마룬드가 노성을 터트렸다.
“또 그 수작이냐! 어림없다, 이놈! 그대, 침묵하라! 사일런스!”
아틸카의 입 주위 대기의 흐름이 막히며 노래가 끊겨 버렸다. 상대의 수법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어쨌건 언령言靈의 힘을 쓰는 것으로 보이기에 소리를 막은 것이다. 과연 요동치던 기운이 잠시 멈춰 버렸다.
하지만 그 기운은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쿵! 딱! 쿵쿵! 딱!
입이 막힌 아틸카가 발을 구르고 단봉을 서로 부딪치며 리듬을 이어 간다. 주술이 완성되며 바람이 일었다. 폭풍이 망치 형상으로 모여들어 마룬드를 향해 쇄도했다.
휘이익!
“으헤헥!”
기겁하는 마룬드를 보며 블레이가 잽싸게 성호를 그었다.
“세이어여! 당신의 가호를!”
십자 형태의 성광이 마룬드 앞을 가로막아 폭풍의 망치를 막아 냈다. 블레이가 식은땀을 흘렸다. 조금만 타이밍이 늦었어도 오랜 친구를 잃을 뻔했다. 마룬드가 혀를 내두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놈, 진짜 소문대로 트롤 모습을 한 악마라도 되는 건가? 뭐가 저리 센 거야?”
진지해진 얼굴로 카피르가 아틸카에게 돌진했다. 더 이상 그의 눈에 오만이나 방심 따윈 없었다. 저 전설의 트롤은 결코 미신의 존재가 아니었다. 오러 유저인 그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도 감당키 어려운 마물 중의 마물이었다.
“타아아앗!”
연달아 기합을 터트리며 카피르가 침착하게 아틸카를 압박해 갔다. 마룬드도 숨을 돌리고 공격 마법을 이었다. 블레이가 성력을 끌어 올려 두 사람을 보좌했다.
방심을 버리고 진지하게 세 사람 모두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자, 아틸카도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다.
“큭! 크윽!”
하지만 신음을 흘리면서도 아틸카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위태위태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저 ‘알 수 없는’ 수법을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카피르의 블레이드 오러를 옆으로 흘리며 아틸카가 짧은 호흡을 터트렸다.
“훗훗훗!”
호흡과 함께 연달아 가슴을 튕기며 머리를 빙빙 돌린다. 아틸카의 땋은 머리에 매달린 작은 구슬들이 서로 부딪혀 맑은 방울 소리를 울린다.
찰랑찰랑찰랑!
방울 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기도를 올리던 블레이가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으아악!”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란해지며 멍해진다. 마법사의 정신계 마법에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블레이가 치를 떨었다.
“도대체 저 사술의 정체는 뭐란 말이냐?”
단순한 언령뿐 아니라 리듬과 음악, 춤 등 전신을 이용하는 트롤 주술은 인간의 마법이나 신관의 신성 주문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완전히 처음 상대하는 수법이라 카피르 일행으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아틸카는 항상 인간들과 싸워 왔던 이다. 인간들의 수법은 익숙할 대로 익숙하다.
‘하지만 역시 세 명은 버겁군.’
진땀을 흘리며 아틸카는 눈앞의 인간들과 우리 속 동족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미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이곳은 인간들의 도시 한복판, 더 지체하다가는 또 다른 인간 무리들이 창칼을 들고 몰려올 것이다.
그렇다고 일격에 해치울 수 있을 만큼 눈앞의 저 인간들이 약한 것도 아니다.
‘도망쳐야 하나…….’
판단을 내려야 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저들은 트롤의 주술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그 한 몸 빼내는 것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고통 받는 일족을 저버리게 된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대로 아틸카가 여기서 버티고 있다 해서 동족을 구할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원통하지만 일단은 자신이 살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다시 이들을 구할 기회를 얻게 된다.
“미안하오! 나의 일족이여!”
슬픔 속에서 아틸카가 고함을 지르며 양손의 단봉을 맹렬히 후려갈겼다.
“크아아아!”
카피르가 검을 들어 방어했지만 그럼에도 절로 뒤로 밀렸다. 거리를 벌린 뒤 막 아틸카가 도주를 시도하려 할 때였다.
지하 석실 입구 쪽에서 굵은 외침이 들렸다.
“레인보우 포스 레이!”
공기가 일렁이며 일곱 줄기 무지갯빛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파괴의 빛이 카피르 일행 주위를 두들기며 연달아 폭발을 일으켜 댔다.
콰콰콰콰콰콰쾅!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카피르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냐?”
언제 나타난 것인지 세 명의 그림자가 석실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거구의 사내 둘과 가녀려 보이는 여인의 실루엣이었다.
“간신히 늦지는 않았네요.”
“그러게 말이오. 대체 그 안개는 뭔데 기감까지 차단하는 거지?”
“미안하군, 쩝…… 아, 트롤 주술 잘 알면서 왜 내가 은신의 안개는 생각 못 했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나누며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얼굴을 비춘 것은 아틸카와 비슷한 키의, 그러나 덩치는 거의 두 배는 됨직한 거구의 인간이었다. 아틸카가 경각심을 끌어 올렸다.
‘새로운 적인가?’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안면 가득 미소를 띠운 채 말을 건넸다.
“드디어 만났군, 구루 아틸카. 현명한 자연의 아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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