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붙잡힌 자, 풀려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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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열대 수림 사이로 세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숲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우둘투둘한 피부에 거미처럼 길고 깡마른 팔다리를 지닌 종족, 트롤이었다. 성인으로 보이는 장신의 트롤이 돌칼로 정신없이 수풀을 가르며 두 명의 어린 트롤들을 이끌고 있었다.
“헉헉헉!”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며 바위를 뛰어넘고 덤불을 헤친다. 어린 트롤 하나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울상을 지으며 트롤 아이가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헉, 헉, 헉! 더 못 뛰겠어, 우트랑!”
“쓰러지면 안 돼! 인간들이 쫓아온다!”
“하, 하지만…….”
가슴을 할딱대는 어린 트롤들을 보며 우트랑은 난처해했다. 이미 성년식을 치른 그와 달리 이 어린 트롤들은 아직 재생력이 발달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폐를 혹사시키다간 생명이 위험하다. 설령 팔다리가 잘린다 해도 끼니 좀 잘 챙겨 먹으면 말끔히 치료되어 버리는 성인 트롤들에 비해, 어린 트롤들은 과로나 과다출혈만으로도 쉽게 죽음에 이르는 연약한 존재였다.
초조해하며 우트랑이 숲 저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인간들에게 잡혀 버릴 텐데…….”
트롤들으로부터 200여 미터쯤 떨어진 열대 우림 저편, 커다란 넝쿨이 어지럽게 얽힌 숲 사이로 한 무리의 인간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석궁이며 창칼을 든, 질 좋은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중년 사내가 숲을 헤치고 나가며 외쳤다.
“흔적을 찾았나?”
앞장서서 바위며 흙바닥을 살피던 청년 하나가 손가락질을 하며 대답했다.
“저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런든 대장!”
중년인, 런든이 히죽 웃으며 석궁에 화살을 재었다.
“좋아! 좌우로 포위망을 좁히면서 예정대로 몰아라!”
“알겠네!”
런든의 명에 따라 다른 이들도 빠르게 숲 사이로 사라져갔다.
이들은 할라인 왕국 남부, 덴키드 지방에서 제법 명성이 있는 마물 사냥꾼들이었다. 마물들의 피며 생체 조직은 연금술사들에게 귀한 재료였기에, 연금술사 길드의 의뢰를 받아 각종 마물을 사냥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높은 마물이 바로 트롤이었다.
트롤의 피는 힐링 포션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원래 힐링 포션은 연금술사들이 여러 귀한 약초들을 조합하고 마법사가 마력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지는데, 트롤의 피가 있다면 저 과정이 대폭 줄어든다. 싸구려 약초를 써도 트롤의 피 몇 방울만 넣으면 정통 힐링 포션 못지않은 약효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마법사의 마력도 필요 없어진다.
힐링 포션은 한 병에 은화 열 닢은 족히 나가는 비싼 물건, 당연히 트롤의 피는 같은 무게의 황금과도 맞먹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트롤을 사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트롤 자체가 어지간히 노련한 마물 사냥꾼들이 아니면 잡기 힘든 강력한 몬스터였고, 게다가 깊숙한 숲 속에서만 서식하는 습성 때문에 쉽게 인간들 눈에 뜨이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런든은 운이 좋았다.
마물 사냥을 하던 중 우연히 묵은 밀림의 한 마을에서, 트롤 하나가 근처에 나타났으니 퇴치해 달라며 부탁해 온 것이다. 그리고 런든과 그의 일행들은 트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하고 강력한 마물 사냥꾼들이었다.
일주일 동안 마을 주변 밀림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결국 트롤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런든이 욕심 가득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렵게 찾은 대박인데 놓칠 수야 없지, 후후후.”
☆ ☆ ☆
인간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 온다. 우트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저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데리고는 불가능하다.
‘내 실수다!’
통한의 심정으로 우트랑은 가슴을 쳤다. 부락을 이끄는 구루 마테로의 말을 듣지 않고 금지 구역 밖으로 향한 것이 문제였다.
‘그 폭포에 가서는 안 되었는데.’
금지 구역 바깥쪽에 영기가 고인 폭포를 발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훌륭한 주술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몸인 우트랑에게 그 폭포의 정갈한 영기는 실로 탐나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무리 금지 구역이라도 인간의 마을과 한참 떨어진 곳이니 큰 문제 생기겠냐 싶어 몰래 그곳을 들락거렸던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결국 폭포수를 맞으며 수행하던 우트랑은 마을 주민의 눈에 띠었고, 공포에 젖은 마을 사람들은 트롤 퇴치를 위해 사냥꾼을 모았다. 문제는 그때까지도 우트랑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폭포를 들락거리며, 심지어 친하게 지내던 부락의 어린 트롤까지 데리고 나오는 우를 범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귀한 아이들까지 인간에게 쫓기는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 한탄하며 우트랑은 머리를 굴렸다.
‘어찌해야 하는가?’
해답은 금세 나왔다.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우트랑은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깨달았다.
‘둥지가 위험에 처하면 물떼새는 다친 척 일부러 포식자 앞에 자신을 드러내 알을 보호한다.’
결심한 우트랑이 나무 밑을 파기 시작했다. 어린 트롤들이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구덩이를 판 우트랑이 아이들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둘 다 여기 숨어 있어! 알았지?”
트롤들이 구덩이로 들어가자 우트랑이 낙엽을 모아 그들의 모습을 가렸다. 아이들이 놀라며 물었다.
“어? 우트랑은?”
대답 없이 우트랑이 씨익 웃었다. 트롤답게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긴 턱 사이로 처연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어린 트롤들이 울면서 말리기 시작했다.
“안 돼! 우트랑!”
우트랑이 두 손을 뻗어 어린 트롤의 머리 위에 하나씩 올렸다. 그리고 구덩이로 도로 밀어 넣었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그때 다른 아이들을 보살펴 주렴.”
“싫어!”
“우트랑!”
아이들이 난동을 부리며 울음을 터트리려 한다. 이대로라면 위치를 들키게 된다. 살짝 당황하며 우트랑이 연거푸 손가락을 튀겼다.
딱딱! 따다닥!
“솜구름, 실려 오는, 양귀비의, 밤.”
비록 구루의 경지에 오르진 못한 우트랑이었지만, 그래도 간단한 잠의 주술 정도는 쓸 수 있었다. 리듬감 있는 핑거 스냅 소리가 아이들의 귓가를 흔들었다. 아이들의 발버둥이 사그라지며 조용해졌다.
“휴우…….”
우트랑이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밀림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인간들이 거의 근처에까지 다가왔다.
돌칼을 빼 들고 우트랑이 우렁찬 외침을 터트렸다.
“으아아아!”
☆ ☆ ☆
수풀이 흔들리며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뛰쳐나온다. 모습을 드러낸 트롤을 보며 사냥꾼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왔다!”
“트롤이다!”
비교적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이 트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트롤은 듣던 대로 살벌하기 그지없는 괴물이었다. 2미터가 넘는 장신에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나무껍질 같은 피부 위에는 괴상한 문신 같은 것이 그려져 있고 얼굴은 악마처럼 흉측하기 그지없다. 일반인이라면 저 괴물과 마주하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크아아아!”
트롤이 포효를 터트리며 사냥꾼들 사이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공격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냥 돌칼을 휘두르며 밀림 저편으로 질주한다. 런든이 허겁지겁 소리쳤다.
“놈이 도망간다! 화살을 쏘아라!”
석궁이 일제히 당겨졌다. 수십 대의 화살이 트롤의 등 위에 꽂혔다. 달려가던 트롤이 움찔하며 속도를 늦춘다. 런든이 재차 소리를 질렀다.
“쫓아라! 놓쳐서는 안 돼!”
느려진 트롤, 우트랑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려야…….’
통증으로 인해 발이 느려진 우트랑을 사냥꾼들이 금방 따라잡았다. 포위망을 구축하며 사냥꾼들이 투창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타아앗!”
“발을 묶어!”
“모두! 다리를 노려라!”
우트랑이 돌칼을 휘둘러 창을 쳐 내려 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구루가 아닌 그에게 그 정도 기량은 없다. 허공으로 돌칼이 빗나가며 투창이 그의 사지 여기저기에 박혔다. 고통으로 우트랑이 비명을 질렀다.
“크어어억!”
연거푸 돌칼을 휘둘러 사냥꾼의 접근을 막으며, 우트랑은 남는 손으로 허겁지겁 몸에 박힌 투창을 뽑았다. 깊숙했던 상처가 창이 뽑히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아물기 시작한다. 성인이 된 트롤의 재생력은 실로 가공한 것이라, 이 정도 부상쯤은 부상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다.
“놈이 재생합니다!”
“그물을 던져 움직임을 막고 불로 지져라! 그래야 재생을 막을 수 있다!”
포위망 밖에서 사냥꾼들이 그물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그물에 뒤덮인 채 우트랑은 계속 두 팔을 놀렸다. 사냥꾼 중 몇몇이 창과 칼을 들고 가까이 다가와 공격을 가했다.
그러던 중, 정신없이 휘두르던 우트랑의 돌칼에 사냥꾼 하나가 정통으로 두들겨 맞고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크어어억!”
“디란드!”
동료가 쓰러지자 사냥꾼들이 한층 분노하며 트롤을 몰아붙인다. 창칼이 연신 우트랑의 사지를 베고 찔러 갔다. 불붙인 막대기가 청색의 피부 여기저기를 태운다. 고통 속에서 우트랑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으로 인해 점점 정신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제 끝인가…….’
계속해 상처를 회복하는 그 힘이 우트랑의 정신마저 뒤덮기 시작한다.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이 고개를 든다. 일단 한번 고개를 든 방어 본능은 점점 커져 그의 뇌리를 채울 뿐, 결코 꺼지지 않는다.
“아아아!”
우트랑은 한탄을 터트렸다. 그들의 종족의 피 속에 새겨진, 또 다른 자신이 눈을 뜨고 있었다. 트롤들의 축복이자 저주인, 추악하고 난폭한 본성이 우트랑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불길이 뇌리를 태우는 끔찍한 감각 속에서 우트랑은 결국 정신을 잃었다.
트롤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런든이 그의 변화를 감지하고 외쳤다.
“조심해라! 거대화다!”
우득, 우득, 우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물에 갇힌 트롤의 덩치가 부풀기 시작했다. 깡마른 몸이 무서울 정도로 커지며 근육이 붙는다. 가는 허리며 허벅지도 몇 배로 커진다. 2미터 조금 넘는 키였던 트롤이 3미터 가까운, 오우거만한 덩치로 변하며 포효를 터트렸다.
“으, 아, 아, 아!”
대기를 울리는 광포한 외침과 함께 트롤이 그물을 주욱 찢었다. 시뻘건 눈으로 트롤, 이제는 더 이상 우트랑이 아닌 진정한 마물이 사냥꾼들을 노려보았다. 두꺼운 손톱이 사냥꾼의 머리 하나를 후려갈겼다. 머리통이 박살 나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아, 아, 아!”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트롤이 사냥꾼들을 향해 돌격했다. 두 팔을 거침없이 놀릴 때마다 사냥꾼들이 낙엽처럼 이리저리 날려 간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중년 사냥꾼 하나가 치를 떨며 소리쳤다.
“크윽! 실로 괴물이로다!”
런든이 모두를 독려하며 침착하게 외쳤다.
“모두들 당황하지 마라! 저것이 진짜 트롤이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아닌가!”
평소의 트롤은 그렇게까지 강력한 마물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에 몰리게 되면 그들은 놀랄 정도로 거대해지며 실로 광폭하게 날뛰게 된다. 그때의 트롤은 오우거와도 비견될 강력한 마물, 이야기 속에 전해져 오는 끔찍한 괴물로서의 트롤은 모두 저 모습에서 기인된 것이다.
날뛰는 거대한 트롤의 공격을 피해 사냥꾼들이 포위망을 풀었다. 런든이 뒤로 물러나며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다들 침착하게 저 마물을 함정으로 유인하라!”
☆ ☆ ☆
밀림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페룸.
현재 페룸의 모든 주민들은 마을 중심에 위치한 커다란 중앙 회관에 모여 있었다. 반나절 전 트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 생업을 멈추고 유일한 석조 건물인 회관으로 대피한 것이다.
회관 창문을 통해 주민들이 연신 불안해하며 밀림을 바라본다. 젊은 처녀 한 명이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리가 들려요.”
숲 저 편에서 흐릿하게 포효 소리가 들렸다. 트롤의 울음소리였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며 저 멀리 하늘 위로 새떼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중년 사내가 여인을 달래며 말했다.
“사냥꾼들이 트롤을 유인하고 있는 걸 게다. 조금만 참으렴.”
트롤을 마을로 유인해 함정에 빠트려 퇴치한다는 계획은 이미 사냥꾼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회관 밖,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큼직한 마법진이 중앙에 설치되어 있었다.
마을 사내 하나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정말 저것으로 트롤을 붙잡을 수 있는 겁니까, 마법사님?”
그러자 주민들 모두가 경외어린 시선으로 로브를 걸친 50대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 마법사, 루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시골에서야 마법사는 무조건 굉장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는 그리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다. 나이가 쉰이 넘고서야 간신히 5서클에 입문했을 정도이니까.
하긴 그런 실력이니 마물 사냥꾼들과 함께 방랑 마법사로 떠도는 것이긴 하다.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귀족의 후원을 받거나 마탑에서 연구를 하거나 하지, 굳이 이런 험한 일을 하며 떠돌이로 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티를 내 봐야 주민들을 불안하게 할 뿐. 루소는 억지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자네들은 그저 우리들이 트롤을 붙잡을 때까지 이 안에서 피신하고 있게. 금세 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걸세.”
그때였다. 회관 구석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렸다.
“트롤을 건드려서는 안 돼! 지금 큰일 날 짓을 하고 있는 거여!”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늙은 노파였다. 곁에 있던 중년 아낙이 노파를 달래며 혀를 찼다.
“아이고, 테스 할머니. 또 그 소리예요? 왜 그러세요, 트롤은 몬스터라니까요.”
“아니여…… 쿨럭쿨럭!”
노성을 터트리려던 노파가 헐떡대며 기침을 해 댔다. 잦은 숨을 내쉬며 노파가 울상을 한 채 중얼거렸다.
“트롤은 숲의 수호자여, 숲을 지키는 이들이란 말이여…… 잘못하고 있는 것이여…….”
아낙이 등을 두들기자 노파가 이내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루소를 보며 송구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워낙 미신을 믿는 할멈이라…….”
“신경 쓰지 않는다네. 잘 보살펴 드리게.”
헛웃음을 흘리며 루소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마을 회관 밖에서 사냥꾼 두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육포를 질근질근 씹던 나이 든 사냥꾼이 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준비는 확실하겠지요, 마법사 루소?”
광장에 설치된 마법진을 바라보며 루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될 거야. 만일을 대비해 3중의 결계까지 짰으니.”
문득 젊은 사냥꾼 하나가 힐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굳이 이 마을에 함정을 설치해야 했습니까? 저는 마법사께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설치할 줄 알았습니다만.”
대답은 루소가 아닌 늙은 사냥꾼으로부터 나왔다.
“트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으니까. 만약 마을 근처에서 발견되면 우리가 설치한 함정으로 유인하기도 전에 마을을 습격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흥분한 트롤이 반드시 자신을 상처 입힌 자만을 쫓으라는 법은 없다. 도중에 다른 인간의 냄새를 맡고 발길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사냥꾼이라면 모든 경우를 생각해 두어야 하는 법, 주민들도 지키고 트롤을 제대로 유인하기 위해선 이 마을에 함정을 설치하는 것이 제일 합리적이다.
선배의 가르침에 젊은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아, 그렇군요.”
루소가 밀림 저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런든 대장이 잘하고 있나 모르겠군. 이 마법진에 들어간 액수가 장난이 아닌데. 트롤을 잡지 못하면 대적자야, 이거.”
광장의 마법진은 지름이 10미터 가까이 되는 크기다. 저것을 그리기 위해 들어간 마법 시료의 양은 무려 두 통이 넘는다. 일향초의 즙과 텐타릴 가루, 소금과 유황을 물에 개어 만드는 마법진 구축용 마력 시료는 상당한 고가의 물건, 저 마법진에 들어간 재료값만도 금화 두 닢은 족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저거 그리느라 내가 사흘 내내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걸 헛수고로 만들면 안 되지.”
긴장을 풀려는 의도인지 루소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쉽게도 그리 효과는 없었다. 노련한 늙은 사냥꾼은 어차피 크게 긴장하지 않았고, 젊은 쪽은 저 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빳빳하게 긴장 중이었으니까.
우거진 밀림 저편, 푸른 열대수들이 점점 거칠게 흔들린다. 숲 위쪽이 연신 요동치며 온갖 열대의 새들이 잔뜩 날아오른다.
순간 루소가 눈을 빛냈다.
“왔다!”
동시에 마을 외곽의 나무 사이로 사냥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죽어라 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연거푸 나무가 쓰러지며 무시무시한 포효가 들렸다.
우지끈!
거대한 그림자가 나무를 좌우로 쓰러트리며 뜨거운 햇살 아래 여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3미터가 넘는 거체에 통나무를 연상케 하는 두꺼운 팔다리, 섬뜩하게 드러난 이빨들과 돌처럼 단단한 피부를 가진 거인이 붉은 눈을 빛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크, 아, 아!”
괴성을 토하며 거대 트롤이 손에 잡힌 나무를 통째로 들어 내던졌다. 날아간 나무가 마을을 덮치며 집 한 채가 우루루 무너져 내린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모두 박살 내며 거대 트롤은 계속 사냥꾼들을 쫓았다. 정신없이 도망쳐 광장까지 도달한 사냥꾼 중 한 명, 런든이 버럭 소리쳤다.
“마법사 루소! 빨리 마법을!”
안 그래도 루소는 이미 모든 마법 영창을 마친 후였다. 그가 허공에 손짓하며 트롤을 향해 시동어를 외쳤다.
“파이어볼!”
커다란 화염구가 이글거리며 트롤에게로 날아들었다. 폭발이 이어지며 트롤이 비명을 질러 댔다.
피부가 불타며 일그러지고, 재생력이 다시 파손된 육체를 복구하고, 그것을 화염이 또다시 불태운다. 고통 속에서 트롤의 눈동자가 더더욱 붉게 빛났다. 루소 곁에 있던 두 사냥꾼이 악을 써 가며 소리쳤다.
“이쪽이다! 이 괴물아!”
트롤이 루소 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인데 이제는 아예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일 정도다. 젊은 사냥꾼이 공포로 딱딱하게 굳었다. 거대 트롤이 두 팔을 번쩍 들고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 온다!”
쿵! 쿵! 쿵! 쿵!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트롤이 광장의 바닥을 깨부수며 맹렬히 돌진한다. 루소가 침착하게 수인을 맺으며 마법을 이었다.
“렌 하르 발티르 자탄! 깨어나라, 란프라우드의 족쇄여! 하늘과 땅을 죄여 그 속에 갇힌 자를 얽맬지어다!”
거대 트롤이 막 마법진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루소가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며 외마디 외침을 토했다.
“케이지 오브 아케인 포스!”
파아아앗!
마법진 전체가 백열하며 빛을 뿜어냈다. 빛 속에서 수십 개의 사슬이 형성되어 트롤의 팔다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마력의 소용돌이가 트롤의 몸통을 따라 회오리치고 머리 위로 붉은 전격이 방전하며 트롤의 전신을 두들겨 댔다.
“크아아아악!”
마법진 속에서 트롤이 발버둥을 치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때마다 마법진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일어나며 진의 일부가 부식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마법진에 의해 몇 배나 위력이 증폭된 봉쇄 마법이었는데도, 버티질 못하는 것이다.
루소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런든! 나 좀 도와주게!”
“알고 있소!”
런든이 사냥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냥꾼들이 미리 준비한 거대한 발리스타를 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마물 전용으로 개량된 발리스타였다. 건장한 청년 둘이서 톱니바퀴를 돌려 발리스타의 시위를 당겼다. 런든이 굵은 창을 발리스타에 재어 넣고 트롤을 겨누었다.
“간다! 괴물!”
타아앙!
발리스타가 요란한 채찍 소리를 내며 투창을 쏘아 냈다. 투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구의 트롤에게 날아가 복부 깊숙이 박혔다. 워낙 엄청난 부상에 트롤의 힘이 빠지며 다시 마법진 안으로 갇혀 버린다. 루소가 눈을 빛냈다.
“좋아! 마지막이다!”
루소가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연금술사로부터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마법 독, 헤스티아의 눈물이었다. 약병을 열고 독약을 촉매로 삼아 루소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흩어져서 스며들며 내 적을 감싸라! 클라우드 포이즌!”
녹색의 작은 구름이 일렁이며 트롤의 사방을 뒤덮었다. 독 구름을 펼치는 마법, 클라우드 포이즌은 3서클의 비교적 저급 주문이지만 그 촉매가 되는 독약이 무엇이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갈린다. 고래조차도 마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마법 독, 헤스티아의 눈물이 기화되어 트롤의 전신 구멍을 통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신음을 흘리며 트롤이 점차 눈을 감기 시작했다. 거구의 육체가 서서히 무너지며 결국 트롤이 쿵 소리와 함께 땅 위로 쓰러졌다.
환호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잡았다!”
“으하하핫!”
“대박이다!”
2
쓰러진 트롤은 이내 거대화가 풀리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깨어나지 않도록 재차 마법 독을 주입한 뒤 사냥꾼 두 명이 트롤을 꽁꽁 묶어 마차에 실었다. 확실하게 트롤을 제압했음이 확인되자 공포에 떨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회관 밖으로 나와 환호를 터트렸다.
“오오!”
“드디어 저 괴물이 잡혔군!”
“이제는 안심하고 살 수 있겠어.”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저 트롤이 나타난 이래 혹여나 나쁜 일이 생길까 다들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제부터는 밤마다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기뻐하며 런든과 그의 일행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소.”
“고맙습니다. 덕분에 마을이 구원받았어요.”
하지만 모든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즐거워하는 가운데, 한 노파만이 유독 굳은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을 최고령의 노인, 테스 할머니였다.
“잘못하고 있는 게야…….”
노파가 두려움 가득 찬 눈으로 밀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수히 꺾인 나무들, 거대한 트롤이 스치고 지나간 그 파괴의 흔적을 보며 떨리는 음성을 흘렸다.
“트롤은 숲의 수호자이거늘…….”
옆에 서 있단 아낙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휴, 또 시작이시네.”
테스 할머니가 왜 저러는 지는 아낙도 알고 있었다. 아낙 역시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오래된 이야기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져 오는 아득한 옛이야기.
그 속에서 트롤은 숲의 지킴이였고 숲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평화로운 이들이었다. 숲의 풍요로움을 수호하는 그들은 현명하고 온유한 이들로 숲 속에서 곤경에 빠진 인간을 소리 없이 구해 주는 존재였다.
아니, 대체 저기 묶여 있는 저 흉악한 괴물의 어디에 현명과 온유가 있단 말인가? 당연히 미신일 뿐인 이야기다. 호랑이나 곰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흔한 동화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노파는 여전히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숲이 분노하고 있어…….”
노파가 런든 일행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슬슬 모든 짐을 꾸리고 페룸 마을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마을 어귀로 향하는 런든 일행의 등에 대고 노파가 칼칼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트롤을 건드려서는 안 돼!”
다들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노파가 다시 소리쳤다.
“숲의 분노가 덮칠 게야!”
마치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며 외치고 또 외친다.
“숲의 분노가!”
조금 전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노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하늘을 울렸다. 헛소리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저 모습을 보니 기분이 꺼림칙하긴 했다.
애써 무시하며 런든이 고개를 저었다.
“에잉,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
☆ ☆ ☆
할라인 왕국 남부의 게테란 산맥. 그중에서도 험준하기로 이름 높은 제툰 고개.
서른 명 정도로 이루어진 사냥꾼 무리가 한 대의 마차를 호위하며 산길을 가고 있었다. 할라인 왕국 남부 밀림에서 트롤 사냥에 성공하고, 황금의 꿈을 꾸며 희희낙락하고 있는 런든 일행이었다.
앞장선 런든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살아 있는 트롤이면 적어도 금화 천 닢은 족히 받겠지.”
곁에서 걷고 있던 마법사 루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칼티잔까지만 가면 우리 팔자도 확 피는 거야.”
트롤은 분명 값비싼 몬스터지만, 그것이 값어치를 다 하려면 트롤의 피를 정제할 수 있는 설비가 있는 연금술사 길드까지 가야 했다. 그곳의 연금술사들에게 생포한 트롤을 넘겨야 비로소 확실한 황금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런든 일행은 칼티잔 시, 할라인 왕국의 연금술사 길드 ‘산타나의 눈물’의 남부 지부가 있는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를 이끌고 런든 일행은 계속 산길을 걸었다. 점점 해가 저물어 가며 어둠이 산길을 뒤덮기 시작했다.
산속의 해는 순식간에 진다. 금세 해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좌우로 우거진 야생림이 삽시간에 짙은 그림자를 사방에 드리웠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런든이 길을 재촉했다.
“자 자, 다들 서둘러. 다음 야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험준한 제툰 고개에 대인원이 숙영을 할 수 있을 만한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제법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숙영지에 도착하기 전 해가 저물어 버린 것이다. 표정을 구기며 사냥꾼들이 하나둘 화톳불을 켰다.
새롭게 불을 밝히고 그들이 계속 산길을 걷던 중이었다.
일행 중간쯤에서 걷고 있던 젊은 사냥꾼 한 명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곁에 있던 중년 사내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나, 드렌?”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젊은 사냥꾼의 대답에 중년 사냥꾼이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은 고요했다. 그저 어둠 속에서 여러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히 울려 퍼질 뿐이다.
젊은 사냥꾼이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기분 탓인가?”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중년 사냥꾼도 확실하게 소리를 들었다.
둥…… 둥…….
어둠 저편에서 흐릿한 울림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온다. 런든 일행의 발걸음이 멈췄다.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번엔 보다 소리가 컸다. 일행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둥! 둥! 둥!
“뭐지?”
“웬 북소리가?”
은은한 북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산속이라 소리가 반사되어 어디서 들려오는 지 알 수가 없다. 런든이 긴장하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무슨 일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제일 후미에 있던 늙은 사냥꾼 하나가 풀숲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사람 하나가 통째로 수풀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뒤이어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으아아악!”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모두들 경악하며 수풀을 바라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냐!”
사냥꾼들이 재빨리 검이며 석궁을 꺼내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용감한 이 몇몇이 석궁을 겨눈 채 수풀을 헤쳐 보았다.
“윽!”
“한덴 씨가…….”
수풀 속에 펼쳐진 광경을 조우하는 순간, 사냥꾼 몇몇이 신음을 흘렸다. 수풀 속에 팔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린 동료의 시체가 있었다. 엄청난 괴력으로 사지를 비튼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허겁지겁 후미로 달려온 런든이 그 참혹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한덴? 도대체 이게 갑자기 무슨…….”
바로 그때.
“으힉!”
“으아악!”
런든 바로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들을 잡아당긴 것이다. 건장한 성인 장정이 순식간에 위로 빨려 올라가 짙은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눈앞에서 동료가 ‘날아가 버리는’ 괴상한 광경에 누군가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히힉! 도대체 뭐야, 이건!”
후둑! 후두두둑!
머리 위, 어둠이 짙게 깔린 나무 사이로 뭔가가 요동을 치며 가지를 떨어 댔다. 나뭇잎사귀가 우수수 머리 위로 나부낀다. 그리고 곧바로 걸쭉한 액체가 비처럼 쏟아지며 두 개의 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액체를 뒤집어쓴 사냥꾼 하나가 손으로 뺨을 만져 보더니 공포에 질렸다.
“으엑! 이거! 피! 피!”
떨어진 두 개의 덩어리, 그것은 방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동료의 처참한 잔해였다. 그 끔찍함에 일행 모두가 공포에 질려 패닉에 빠졌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어!”
개중 노련한, 경험 많은 늙은 사냥꾼이 소리치며 주위를 달랬다.
“다들 정신 차려라! 마물의 습격일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순간 휘파람 소리가 바람을 갈랐다.
휘이이익!
퍼엉!
떠들어 대던 늙은 사냥꾼의 머리통이 박살이 났다. 어디선가 두꺼운 돌덩이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정확히 명중한 것이다.
머리 잃은 시체가 피를 뿌리며 천천히 땅 위로 쓰러진다. 런든이 사방을 둘러보며 악을 써 댔다.
“다들 사방을 경계해라! 습격이다! 마차 주위로 모여!”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사냥꾼들이 질서 정연하게 마차 주위로 대열을 짰다. 동료와 등을 맞댄 채 런든이 이를 갈았다.
“젠장, 순식간에 네 명이나 잃었어!”
도대체 무슨 마물이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런든이 루소에게 외쳤다.
“마법사 루소! 탐지 마법을!”
“아, 알겠소!”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서 있던 루소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법을 준비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자꾸 수인이 실패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인가가 날아와 자신의 머리통을 부술지 모르니 입안이 자꾸 바짝바짝 말랐다.
“헉헉…….”
간신히 마법을 완성한 루소가 눈을 감고 시동어를 외쳤다.
“디텍트 라이프 오브젝트!”
생명체의 기운을 찾는 3서클 탐지 마법이 루소를 중심으로 크게 퍼져 나갔다. 이제 살아 있는 존재라면 이 마법으로 탐지가 가능하리라. 루소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오로로로로로로!
괴이한 허밍이 어둠 속을 울려 퍼졌다. 새 소리도 맹수의 울음도 아닌 괴상한 소리였다. 가늘고 긴, 그러면서도 낮고 굵직한 느낌이 드는 이중적인 허밍. 그것이 울려 퍼지자 루소가 순간 기침을 해 댔다.
“켁! 케켁!”
“왜 그러시오, 루소?”
런든의 질문에 루소가 경악에 차 대꾸했다.
“내, 내 마법이 깨졌소!”
“뭣이?”
저 괴이한 허밍이 들리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루소의 마법에 간섭하며 마력장을 무효화시켜 버린 것이다. 루소가 벌벌 떨며 고개를 사방으로 돌렸다. 공포에 젖은 루소의 머릿속에 무심코 페룸 마을의 그 노망난 노파의 외침이 떠올랐다.
-숲의 분노가 덮칠 게야! 숲의 분노가!
런든이 패닉에 빠진 루소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노성을 터트렸다.
“이봐! 루소! 정신 차려! 빨리 적의 위치를 파악하란 말이다!”
그렇게 다들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만치 나무 위에서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일족은 그대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거늘…….”
뚜렷한 공용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것이 인간의 목에서 나온 음성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쇠를 서로 마주 비비는 듯한 거친 목소리, 마치 지옥 끝자락에서 들리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대들은 탐욕으로 그를 해하였도다…….”
섬뜩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런든이 애써 용기를 끌어 올리며 검을 뽑아 겨누었다.
“어떤 사악한 마물이 감히 세이어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해하느냐!”
휘리리릭!
바람이 불었다. 검은 그림자가 런든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채찍 같은 긴 그림자가 일행들을 덮쳐 갔다. 둔탁한 소음이 연달아 울리며 네 명의 사냥꾼이 피를 뿌리며 뒤로 날려 갔다.
“크어억!”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숲속을 뒤흔들었다.
떨어진 그림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섬뜩한 눈동자가 푸른 불꽃을 피우며 일행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화톳불 사이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둘투둘한 푸른 피부에 긴 팔다리, 매부리코에 강퍅한 인상을 지닌 괴물이었다. 채찍같이 긴 그림자의 정체는 저 괴물의 양팔이었다. 긴 양팔에 돋은 날카로운 손톱, 그것이 또다시 네 명의 동료를 앗 하는 사이에 죽여 버린 것이다.
사냥꾼 중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트롤?”
평범한 트롤이 아니었다. 일단 육체부터가 보통 트롤과 달리 굵직해 보였다.
보통 트롤들은 너무 깡말라 가느다랗다는 느낌마저 드는 반면, 저 트롤은 비록 날씬하긴 했지만 확실하게 두꺼운 근육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지독한 곱슬머리를 수십 가닥으로 땋아 허리까지 내렸고, 전신에 붉고 푸른 안료로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연하게 눈에 띠는 부분이 있었으니…….
“……상아어금니다!”
나타난 저 트롤의 이빨, 코끼리의 상아처럼 길게 튀어나온 두 개의 어금니를 본 순간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외침을 들은 다른 이들도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상아어금니! 그 악마 트롤이란 말인가?”
런든이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상아어금니.
그것은 마물 사냥꾼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일종의 미신 같은 것이었다.
인간 이상으로 영악한 지능에 마법도 통하지 않는 괴상한 술법,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며 사냥꾼들을 습격하는 저 마물은 트롤의 모습을 하고 있으되 트롤과는 전혀 다른 무자비한 괴물이었다.
저 악마 때문에 무너진 연금술사 길드 지부가 스무 군데가 넘는다고 했다. 그 이름 높던 마물 사냥단, 다랄드 헌터즈가 저 트롤 하나 때문에 전멸했다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는 북부의 이름 높은 오러 능력자가 저 악마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다. 마물 사냥꾼들 중에는 저 상아어금니가 트롤로 변신한 지옥의 악마라는 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이들도 많았다.
둥! 둥! 둥!
그 전설 속의 악마 트롤, 상아어금니가 북소리를 내며 일행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허벅지 옆에 작은 북이 좌우로 매달려 있어 그것을 두드리는 것인데, 북소리가 사냥꾼들의 귓가에 울릴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뇌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움바트 쿠라드 랄카 랄카 라타카…….”
북소리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섬뜩한 목소리가 리듬을 탄다. 사냥꾼들이 일제히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으아아아…….”
사냥꾼들이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런든이 마차 위의 생포한 트롤과 눈앞의 상아어금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심장을 쥐고 있는 공포의 손아귀는 강력했다.
하지만 공포만큼이나 강력한 욕망, 눈앞의 황금이 어른거려 그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런든의 귓가에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탐욕이 공포를 이겼느냐? 과연 인간이로구나.”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런든의 목이 밤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3
테스론과 조우한 지 일주일 후, 레펜하르트 일행은 안타레스 백왕성으로 돌아왔다.
원래 세텔라드 산맥에서 안타레스 백국이 위치한 글로텐 산맥까지 오려면 빠른 말로 쉴 새 없이 달려도 족히 한 달은 걸릴 거리다. 하지만 다이만 터미널을 이용, 새롭게 공간 포털을 활성화한 클로이 던전을 경유하니 그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돌아온 레펜하르트는 바로 자리 비운 동안 별일이 없었는지부터 파악했다.
일단 오크들, 글로텐 산맥과 인접한 백국령 가장자리에 새롭게 부락을 꾸린 푸른 곰 부족은 산맥을 오가며 마음껏 사냥과 채집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글로텐 산맥의 선주민들, 다른 산악 민족들과의 충돌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부딪칠 일이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 둘 필요는 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스탈라와 그랄타에게 안타레스 백국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전달해, 만약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저 깃발을 들고 싸우라며 언질을 해 두었다.
엘프들을 위한 보금자리, 엘븐 포레스트에 또 하나의 세계수를 심는 것도 무난히 진행되었다. 레펜하르크가 창천의 지팡이, 제룬팅을 숲 한가운데 심고 세계수의 정을 일깨우니 투박한 지팡이가 이내 싹을 틔우며 거대한 떡갈나무만 한 크기로까지 자라났다.
세계수가 하나가 아니게 되니 따로 이름을 붙여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근원이 된 유물의 이름을 따 단하임 일족의 세계수를 니힐렌이라 부르고, 새로운 세계수를 제룬팅이라 명명한 뒤 출장(?) 나온 단하임 일족의 엘프 몇몇이 곁에 머물며 돌보았다.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은 대부분 안타레스 백국에 남았다.
타오반 상회를 통해 대량의 곡물과 식량을 얻게 된 그랜드 포지는 당분간 전사들이 목숨 걸고 몬스터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식량을 옮기기 위한 서른 명 정도의 드워프 전사들만 귀환하고, 나머지는 다른 안타레스 백국에 원래 거하고 있던 드워프 일족에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노예 신세였던 이 드워프 일족은 이제 더 이상 안타레스 백왕성 지하가 아닌, 광산 근처에 자신만의 마을을 꾸리고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을이 완성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역시 건축·건설에 도가 튼 드워프들답게 거주할 지역 정도는 이미 마련한 후였다.
전체적으로 모든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종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고, 아직까지는 레펜하르트가 굳이 손을 보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레펜하르트의 골머리를 썩게 하고 있으니…….
바로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 ☆ ☆
레펜하르트가 귀환한지 스무 날째.
안타레스 백왕성의 앞뜰, 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그곳에 서른 명 정도의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전원 무장을 갖춘 강인해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저마다 통일되지 않은 무기와 갑주를 걸친 이들은 연단에 오른 레펜하르트를 보며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름 높은 권왕 레펜하르트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가드윈! 권왕님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이래 봬도 바실리 왕국 북부에선 제법 명성을 쌓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신흥 귀족, 안타레스 백작 밑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없을까 싶어 모인 용병이며 전사 들이었다.
모든 검 쥔 자들의 꿈은 바로 기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가 되는 것은 그저 실력만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전통적으로 기사단을 지니고 있고, 그 속에 속하려면 실력뿐 아니라 혈통과 가문이 받쳐 줘야 한다. 신분이 비천한 이들은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용병이나, 마물 사냥꾼, 던전 탐사자 정도가 출세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런 평민들에게도 기사가 될 길이 가끔 열리니, 바로 이렇게 새로운 귀족이 가문을 세웠을 때였다. 빠르게 힘을 축적해야 하는 신흥 귀족가들은 비록 평민이라 해도 실력만 있으면 기사로 서임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리고 권왕 레펜하르트는 휘하에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은 많이 거느리고 있지만, 인간은 별로 없었다. 소문을 들은 용병이며 전사들이 자신도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꿈을 꾸며 모여든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이 세워진 지도 어느덧 석 달이 넘었다. 이미 레펜하르트 일행이 자리를 비웠을 때부터 이미 상당수의 전사들이 백왕성을 찾았고, 지금도 매일 이렇게 몰려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대부분 노련한 용병들이었지만, 개중엔 세상 넓은 줄 모르는 동네 건달들도 꽤나 많았다.
“난 창 한 자루만 들면 적수가 없었소!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오!”
“난 주먹만으로도 늑대를 때려잡은 사람이오!”
사내들이 저마다 자신을 소개하며 목소리를 높이니, 백왕성의 앞뜰이 시장 바닥처럼 시끌시끌해진다. 레펜하르트 곁에 서 있던 러스가 고함을 질렀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명성이 자자한 오러 능력자, 러스가 소리치자 이내 좌중이 고요해졌다. 레펜하르트가 사내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참, 안타레스 제국 시절엔 마왕 밑에서 마졸이 될 수는 없다며 한 놈도 자발적으로 안 오더니…… 지금은 저렇게 몰려드나?’
새삼 마왕과 권왕의 인기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어쨌거나 바람직한 반응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사들이여, 이 모자란 이를 따르기 위해 모인 그 마음, 실로 감사하기 그지없소. 이것만으로도 그대들의 진심은 확인되었으니 실력을 보인다면 후하게 대우할 것이오!”
“오오오오!”
이름 높은 권왕이 자신들을 인정하는 듯 말하자 사내들이 벌써 기사라도 된 듯 환호성을 터트렸다. 물론 잘 들어 보면 결국 실력 다 확인하고 고르겠다는 소리다.
모인 이들을 살펴보며 레펜하르트가 턱을 매만졌다.
‘오늘도 적당히 걸러야겠군.’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받아 줄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연단 아래 서 있는 두 사람, 러스와 타시드에게 눈짓을 했다.
‘적당히 패서 쓸 만한 놈들만 골라내!’
이미 며칠째 계속된 일이라 둘 다 맡겨 두라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러스와 타시드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러스가 대열 앞에 선 건장한 용병을 가리키며 검을 겨누었다.
“사이러스라 하오.”
용병 사내가 송구스러워하며 검을 마주 뽑았다.
“혈풍의 페트라 하오. 이름 높은 사이러스 경을 상대하게 되어 영광이오!”
어차피 상대는 오러 유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 대결은 어디까지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것, 페트가 긴장하며 검을 뽑았다.
“그럼 가겠소! 타아아앗!”
페트가 맹렬하게 검격을 뿌려 댄다. 물론 러스는 간단하게 모든 공격을 걷어 냈다. 대결이라기보단 거의 지도 대련이나 다름없는 이 결투를 보며 앞뜰에 모인 다른 이들이 수군거렸다.
“오늘도 잔뜩 몰려왔군.”
“역시 사이러스 경은 굉장해. 어떻게 저렇게 검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지?”
그들은 이미 시험을 거친 전사들이었다.
시험에 통과해 기사 자격을 얻은 이들도 있고, 합격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성의 경비병으로 남은 자들도 있었다. 요 며칠 사이 몰려온 무인들의 숫자는 상당해서, 현재 레펜하르트 휘하에는 이종족을 제외하고서도 기사 스무 명에 백여 명 가까운 병사가 모인 상태였다.
‘물론 다 합쳐 봐야 드워프 전사 열 명만도 못한 전력이긴 하지만…….’
러스와 페트의 대결을 지켜보며 레펜하르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생과 다른 길을 가려면 인간 역시 포용해야 하는 것,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대충 쓸 만하다 싶으면 바로 바로 모인 무인들을 거두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종족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한 놈은 곤란하지.’
레펜하르트의 시선이 앞뜰 반대편, 러스처럼 모인 이들을 시험하고 있는 타시드에게로 향했다.
타시드 역시 러스처럼 간단하게 용병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대체로 타시드의 무위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승복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놈들도 간혹 나왔다.
“크윽! 오크 따위가 내 실력을 가늠하겠다는 것이냐!”
쓰러진 채 고함을 지르는 거한의 모습에, 구경하고 있던 인간들이 실소하며 혀를 찼다.
“저런, 저런.”
“저놈은 탈락이군.”
“멍청한 놈 같으니. 아직도 타시드 님이 보통 오크처럼 보이나?”
아니나 다를까 타시드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참마도, 다카르를 들어 올렸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우우웅!
청록색의 광채가 참마도의 칼날을 가득 뒤덮는다. 오늘 모인 용병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블레이드 오러!”
“맙소사!”
“오크가 오러를 쓰다니! 정녕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반박했던 거한이 창백한 안색으로 덜덜 떨었다.
“마, 맙소사! 어떻게 오크가!”
부웅!
타시드가 참마도를 허공에 휘저었다. 블레이드 오러가 대기를 가르며 웅장한 굉음이 울린다. 사색이 되어 거한이 뒷걸음질을 쳤다.
타시드가 차갑게 뇌까렸다.
“꺼져라.”
“으헤헤헥!”
가공할 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거한이 정신없이 성문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살기가 얼마나 짙고 강렬했는지 자신이 추태를 보인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잘하고 있구먼.’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렇게, 이종족에 대한 편견이 뿌리박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들은 타시드 선에서 적당히 걸러지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뒤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 부탁한다. 나는 이만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 ☆ ☆
성안으로 들어서는 레펜하르트 곁에 한 젊은 청년이 따라붙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백왕님.”
“아, 아스레일 경.”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청년은 아스레일 폰 케이토, 현재 레펜하르트의 휘하 기사단인 안타레스 나이츠의 단장을 맡고 있는 이였다.
“어떤가? 오늘 모인 이들 중 쓸 만한 이들이 보이던가?”
“실력이야 어차피 러스 경과 타시드 경이 걸러 내니 믿을 만하지요. 하지만 실력이 있다고 해서 기사의 자질이 있는지는 좀…….”
아스레일이 창밖을 내다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안타레스 기사단에서도 몇 안 되는, 정규 기사 수행을 받은 귀족 출신의 기사였다. 실력뿐 아니라 예법과 지식 역시 갖춘 제대로 된 기사인 것이다. 게다가 나이에 맞지 않게 검술 역시 대단해, 현재 안타레스 백국에서 오러 유저와 이종족을 제외하고는 최강자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오러 유저랑 이종족 다 빼면 몇 명 남지도 않지만.)
어쨌든, 어느 곳을 가건 충분히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아스레일이 레펜하르트 휘하에 들어온 것은 역시 권왕의 명성 덕이었다. 기사 수행을 다니던 아스레일이 슬슬 자신이 모실 주군을 찾던 중, 타이밍 좋게 레펜하르트가 크로방스 내전으로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권왕 정도의 무인이라면 주군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아스레일은 바로 안타레스 백국으로 달려왔다. 안 그래도 제대로 된 기사가 아쉬웠던 레펜하르트 또한 기꺼이 아스레일을 받아들이고 단장의 역할까지 맡겼다. 러스는 언젠가 테네스 가문에 돌아갈 몸이라 아무래도 안타레스 나이츠에 묶어 둘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이 정도로 호의를 보이니 아스레일도 감격해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비록 만난 지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아스레일은 러스나 타시드 못지않은 레펜하르트의 충복이 되어 있었다.
충성 어린 얼굴로, 아스레일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조언을 건넸다.
“너무 용병 출신 기사들만 모으시면 기사단의 권위가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백왕님.”
“오크는 괜찮고?”
“또, 그때의 일을 말씀하시다니…….”
아스레일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처음 안타레스 백국에 온 아스레일을 상대한 것이 타시드였다. 그때만 해도 아스레일은 기사인 자신을 오크와 상대하게 하는 것에 분노를 터트렸다. 비록 권왕의 휘하 이종족들이 보통 이종족들과 다르다는 소문은 들은 바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오크를 인정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검을 마주한 뒤 아스레일은 그 생각을 깔끔하게 버려야 했다.
타시드의 검은 기사 이상으로 섬세하고 강력했다. 그리고 그의 태도나 말투 역시 그가 알고 있는 오크와 전혀 달랐다. 기품 있고 세련된 말투는 엄연한 기사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바로 블레이드 오러!
참마도에 깃든 그 위대한 빛을 본 순간 아스레일은 모든 편견을 버리고 타시드에게 감복했다. 상대가 오크라는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 녹색 피부의 오크는 분명 존경할 만한 뛰어난 검사였던 것이다.
“타시드 경이야 기사에 걸맞은 기품과 실력이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대처럼 생각해 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스레일처럼 귀족 출신임에도 순순히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분명 놀라운 성품이었다. 트인 생각과 넓은 사고방식을 가진, 보기 힘든 유형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에 모인 모든 인간들이 저렇진 않다. 기사들은 철저히 거르다 보니 오히려 문제가 없었지만 남은 병사들 중엔 여전히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스레일처럼 진정으로 이종족을 인정하는 이들은 3분의 2 정도? 상당히 높은 비율이지만 그렇다 해도 남은 3분의 1은 여전히 레펜하르트가 명령했기에 이종족들을 대놓고 무시하지 않을 뿐이지 마음속 깊이 납득하진 않았다.
‘뭐, 나머지도 다른 오크나 드워프들과 부대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바뀌겠지.’
아스레일이 표정을 굳히고 다시 간언을 올렸다.
“지금 안타레스 기사단은 절반 이상이 용병 출신입니다. 물론 기사다운 예법이며 태도를 제가 가르치고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용병 출신이 많으면 기사단의 분위기에 절도가 없어집니다. 조금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닐지?”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마법사인 그의 입장에서, 기사란 존재는 그저 겉멋만 잔뜩 들어 쓸데없는 허례허식만 추구하는 놈들이었다. 용병들만 모아 놓으나 기사들만 모아 놓으나 그가 보기엔 똑같았다.
‘그래도 되도록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겠지?’
전생의 경험으로,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이 시대의 일반인들과 꽤나 거리가 있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란 걸 절실히 느꼈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실패를 딛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기사도란 게 분명 불합리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혀 제약이 없는 용병들보다는 나으니까.’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기사 선발에 있어선 아스레일 경, 그대가 전적으로 맡게. 러스와 타시드에게도 말해 두지.”
아스레일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고작 열흘 정도밖에 보지 못한 자신에게 단장의 지위는 물론이고 기사단의 인사권까지 맡기다니? 어지간히 그를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백왕님의 신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