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제21장 운명의 격돌 (22/84)

7권

제21장 운명의 격돌

1

테스론은 경악에 차 눈앞의 거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얼굴이었다. 분명 자신의 몸이었다.

그럼에도 테스론은 저 육체가 자신의 몸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너?”

저게 정말 레펜하르트? ‘내 몸’에 들어간 그 마왕이란 말인가?

“몸이 왜 저렇게 왜소해진 거냐아아아!”

2미터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를 보고 왜소하다고 한탄하는 그 모습에 유서스며 다른 동료들이 잠깐 테스론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하지만 테스론은 진심이었다.

230센티미터에 달했던 신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있다.

어지간한 성인 여성 허리 굵기였던 자랑스러운 팔뚝이 고작(?) 어린애 허리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두툼했던 어깨며 가슴도 사이즈가 팍 줄어 버렸다.

테스론이 울분을 터트렸다.

“남의 몸을 가져가서 제대로 간수도 못 하다니!”

레펜하르트 역시 비슷한 기분으로 테스론, 자신의 육체를 차지한 전생의 권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날렵한 턱선, 오똑한 콧날에 살짝 치켜 올라가 색기마저 느껴지는 눈매, 분명 그의 원래 얼굴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리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너?”

단지 그 감상은 테스론과 정반대였다.

‘우와! 저 근사한 총각은 대체 누구여?’

얼굴이야 엇비슷했다만 몸이 완전히 달랐다. 전생의 시리스가 잘 벼려진 칼날 같다고 칭찬한,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냥 말라비틀어진 멸치 쪼가리였던 그 육체가 놀랍도록 변모해 있었다.

“그, 그거 내 몸이냐?”

레펜하르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여자인 시리스와 날씬함을 경쟁하던 그 좁던 어깨가 딱 벌어져 완연한 남성미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울퉁불퉁한 근육질도 아니다. 흑표범처럼 날렵하면서도 탄력이 넘치는, 한 치의 군살조차 없이 단련된 몸이었다. 전신의 균형이 완벽히 잡혀 있고 키도 상당히 커져서 거의 185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허, 내 몸에 저 정도 잠재력이 있었단 말인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이 버럭 성질을 냈다.

“잠재력은 무슨 잠재력? 정말 네놈 몸 저질이었다! 이걸 그나마 이만큼이나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삿대질까지 해 가며 테스론이 타박을 해 댔다. 그간 이 비실거리는 육체를 여기까지 단련하느라 그가 한 고생은 거의 왕년 제라드 밑에서 수행할 때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걸 잠재력 따위로 치부하려 하다니?

물론 레펜하르트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울컥하며 받아쳤다.

“그, 그러는 네놈 대가리는 뭐 고성능이었는 줄 알아! 이게 머리냐? 모자걸이지?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마법 하나 외우는 데 10분이 넘게 걸리냐? 원숭이한테 시켜도 이것보단 빨리 계산하겠다!”

씩씩대며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본다. 다른 이들이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실란이 모두를 대변하듯 중얼거렸다.

“뭐야? 고향 친구인가?”

그제야 테스론과 레펜하르트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몸이 너무 충격적이라 잠시 적의를 잃긴 했지만, 지금 그들이 이렇게 사이좋게 수다나 떨고 있을 사이가 아니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테스론이 허리춤의 장검을 뽑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전의를 끌어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마왕 레펜하르트!”

“아니, 이제 와서 근사한 척 목소리 깔아 봤자…….”

옆에서 필레나가 초 치는 소리를 했지만 테스론은 애써 무시했다. 분위기를 바꾸며 그가 근엄하게 소리쳤다.

“또다시 대륙을 전화의 불길에 휩싸이게 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그대를 처단하고 정의를 되찾겠다!”

☆ ☆ ☆

테스론이 검을 뽑자 그의 동료들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유서스를 본 러스나 전생에 대해 알고 있는 시리스는 이미 전투준비에 들어갔지만 타시드나 실란은 도통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굴릴 뿐이었다.

실란이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뭐예요, 레펜 씨? 아는 사람?”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대꾸했다.

“적이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의아해하면서도 실란이 안색을 굳히며 기도를 올릴 준비를 했다. 타시드도 참마도를 들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공동 속에서 두 일행이 서로를 노려보고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우리가 있는 줄 알았지?”

테스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산타라 마을에 흔적을 남겼더군.”

레펜하르트의 종적을 찾아 세텔라드 산맥에 도착한 테스론 일행은 인근 산촌을 뒤져 정보를 모았다. 그 와중에 산타라 마을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 늦어, 이미 레펜하르트가 던전 켈테 탐사를 끝내고 떠났다는 소리도 들었다.

실망하며 혹시나 싶어 여관 주인에게 혹시나 다음 목적지에 대해 들은 것이 없냐고 물었었는데, 의외로 여관 주인이 행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관 주인은 바트 산 근처라고만 답했지만 테스론은 바로 알아차렸다.

“사부님이 남긴 선물을 찾으러 간 것일 줄 알았지.”

그도 전생에 제라드가 남겼던 저 선물을 받은 바 있었다. 참으로 신 나는 경험이었다. 부담 없이 팰 수 있는데 손맛도 짜릿하고 숫자도 백 명이 넘는다. 하루 밤낮을 미친 듯이 날뛸 수 있던 훌륭한 수행이었다.

“역시 사부님다운 선물이었지. 후, 사부님의 진심이 느껴져 얼마나 고마웠는지.”

사부의 은혜는 하늘같구나! 감동하며 열심히 유령들을 패고 그 후 진짜 ‘선물’도 받아 챙겨서 나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테스론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자 레펜하르트가 질린 얼굴을 했다. 역시 저게 ‘제대로 된’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저렇게 안 돼서 정말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테스론이 손에 든 장검을 레펜하르트에게 겨누며 차갑게 웃었다.

“결국 운명이 내 손을 이끌어 그대 앞에 서게 했지. 이제 모든 악몽을 끝낼 시간이다, 마왕 레펜하르트!”

주먹을 내밀며 레펜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무식했던 놈이 말 하나는 잘하게 됐군. 남의 좋은 머리 가져간 덕을 톡톡히 보나 보지?”

차가운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살기가 피어올라 아지랑이처럼 둘 사이를 맴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공기가 팽팽해진다.

“레펜하르트…….”

“테스론…….”

시간을 거슬러 온 두 사람이 운명의 대적자를 노려보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레펜하르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 변해 버린 자신의 육체에 순간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저건 더 이상 내 몸이 아니야.’

혹여나 테스론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와 싸우게 되었을 때 과연 자기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고민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는 더 이상 없다.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으며, 지금 이 육체야말로 세상에 하나뿐인 그의 육신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실감해 버렸다.

부우우웅!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가 양손 가득 오러를 머금은 채 고함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지. 이 기회에 확실하게 후환을 없애 주마!”

☆ ☆ ☆

“타아아앗!”

기합을 길게 지르며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테스론이 검을 든 채 옆으로 몸을 날려 공세를 피했다. 빗나간 주먹이 대기를 찢으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검은 갑주의 사내, 스테반이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레펜하르트!”

흑색의 대검을 뽑아 들고 스테반이 레펜하르트의 옆으로 내달린다. 그 순간 타시드가 참마도를 세운 채 앞을 가로막았다.

“은인의 싸움을 방해하지 마라!”

타탕!

참마도와 흑색의 대검이 허공에서 맞붙으며 불꽃이 튀었다. 스테반이 악을 쓰며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오크 따위가 내 앞을 막아!”

유서스와 러스도 움직였다. 푸른 오러를 덧씌운 롱 소드를 든 채 러스가 차분한 눈으로 유서스의 앞에 섰다.

“형님…….”

힐끔 레펜하르트를 노려본 유서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네놈이 우선이겠지.”

레펜하르트에 대한 원한도 원한이지만, 유서스에게 있어 가장 최우선적인 목적은 바로 눈앞의 사생아, 비천한 몸에서 태어난 주제에 오러를 각성해 버린 러스다.

“이번에야말로 가문의 수치를 씻겠다!”

마검 엘드란을 겨누며 유서스가 살기 어린 목소리를 띄운다. 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지금의 형님이야말로 가문의 수치요.”

한때는 그토록 존경하고 인정받으려 노력했던 ‘형님’을 보며 러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시기와 질투로 휩싸여 살의를 피우는 유서스의 얼굴에 그가 알고 있던 명망 높은 황금기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기억 속 마지막 얼굴, 자신의 배에 검을 찔러 넣던 그때의, 그 추악한 욕망으로 번들거리던 그 표정뿐이다.

한탄하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기사도를 추구하던 긍지 높던 형님은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시끄럽다!”

고함을 지르며 유서스가 검을 들었다.

“눈을 떠라, 엘드란!”

마검 엘드란의 힘을 일깨우며, 동시에 유서스가 마갑 엘드라드로부터 온갖 강화 마법을 끌어내 자신의 몸에 걸었다. 러스가 긴장한 얼굴로 검을 고쳐 쥐었다. 아무리 오러에 각성했다지만 그라임의 황금기사는 마검사로서 오러 유저와 맞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진정한 테네스의 검을 보여 주마!”

이를 갈며 유서스가 러스에게 돌진해 갔다. 마주 몸을 날리며 러스도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앗!”

엘드란의 황금빛 광채가 푸르른 블레이드 오러와 맞붙어 석실 가득 빛을 뿌렸다. 그 섬광 속에서 실란은 침을 삼켰다.

“꿀꺽…….”

현재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레펜하르트의 고향 친구(?)도, 러스의 배다른 형도, 몇 달 못 봤다가 이상하게 강해져서 나타난 저 스테반도 아니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다가오는 저 거구의 여인, 이보다 더 큰 공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실란,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저 악적으로부터 구하겠어요!”

너무도 예상대로 흘러가는 크리스틴의 발언에 실란이 잽싸게 시리스 뒤로 몸을 숨겼다.

“너만 믿을게, 시리스!”

“에휴, 알았어요.”

시리스가 시미터를 늘어뜨린 채 크리스틴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리스틴이 검을 뽑아 들며 쌍심지를 켰다.

“노예 따위가 감히 주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에게 맞서려 하느냐? 주제를 모르는구나.”

“예전 같았으면 화도 안 났을 텐데, 이제는 그런 소리 들으니까 슬슬 화가 나네요.”

차갑게 웃으며 시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빛에 살기가 서서히 피어오른다. 차가운 살의로 무장한 두 여인이 서로 몸을 날렸다.

“내 친구, 실프! 나의 검을 수호해 줘요!”

“세이어시여! 당신의 검을 빛나게 하소서!”

정령력으로 감싼 시미터와 세이어의 신성검이 맞붙으며 대기가 일렁였다. 순백의 광채가 퍼져 나가고 돌풍이 불어닥친다.

휘이이잉!

공동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뒤로 물러서며 필레나가 잽싸게 상황을 살펴보았다.

‘일단은 스테반을 원호해야…….’

그녀는 마법사, 마법사의 임무는 앞장선 전사의 전투를 보호하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필레나는 스테반과 싸우고 있는 덩치 큰 오크 전사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테스론이 말하길, 오크가 마법에 특히나 취약하다고 했겠다? 그럼 일단 저놈부터…….’

목표를 정한 필레나가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겔 타른 일렌디 필, 지옥의 공기여, 이 땅에 임하라! 내 적을 치는 창이 되라! 헬즈 스피어!”

그때였다. 실란이 성호를 그으며 바로 그녀의 마법을 방해했다.

“필라넨스시여! 사악한 힘에 맞설 신성한 방패를 허하소서!”

분홍색 성광이 방패 형상으로 나타나며 날아가는 필레나의 마법을 가로막았다. 마력과 신성력이 맞붙어 폭음을 일구었다.

콰아아앙!

폭연 속에서 필레나가 혀를 찼다. 실란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스나 러스에게 지겹게 들은 필레나였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위 성직자란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쳇, 역시 굉장한 신성력이네.’

실란이 곧바로 시리스와 타시드를 위한 가호 주문을 준비했다.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나 러스에겐 별 쓸모가 없겠지만 오러에 각성하지 못한 타시드나 시리스에겐 그의 보조 주문이 큰 힘을 발휘한다.

“필라넨스시여, 그대의 종에게 사자의 힘을…….”

막 기도를 올리려는 실란이 순간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선 자리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필레나가 기도를 못 하게 마법으로 그를 견제한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어린 성자!”

“쳇…….”

혀를 차며 실란이 다시 기도를 준비했다.

“필라넨스시여! 저 여자 좀 어떻게 해 줘요!”

오랜만에 터진 오만불손한 기도문이다. 물론 관대한 필라넨스께서는 알아서 기도를 해석하시어, 권능을 내려 주셨다.

웅웅웅!

분홍빛 망치가 허공에 형성되어 필레나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신관, 프리스트의 공격력은 사실 별것 없다. 언데드에겐 절대적이지만 물리력 자체는 변변찮은 것이다. 필레나가 가볍게 마력장의 배리어를 치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이 막혀 버렸다.

“호호, 아무리 고위급이라 봤자 프리스트일 뿐인걸?”

마법사의 공격력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 주겠다! 필레나가 의기양양하게 에너지 볼트를 준비했다. 5개나 되는 에너지 볼트를 구현시킨 그녀가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날렸다.

“매스 에너지 볼트!”

에너지 볼트가 실란뿐 아니라 레펜하르트며 러스, 시리스와 타시드에게까지 골고루 날아간다. 성직자인 실란과 달리 마법사인 그녀는 동시에 여러 목표를 노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실란이 비웃음을 흘렸다.

“흥! 필라넨스시여! 그대의 종‘들’을 가호하소서!”

날아가는 에너지 볼트를 성광의 방패가 모조리 가로막아 버렸다. 공격력은 별것 없지만 프리스트의 방호 능력은 감히 마법사가 따라올 수 없다. 직종 차이는 있어도 실란은 필레나에 비해 몇 수나 높은 급의 신관, 그녀의 마법 따윈 얼마든지 막을 자신이 있었다.

“쳇!”

혀를 차며 필레나가 실란을 노려보았다. 실란도 긴장한 얼굴로 필레나를 노려보았다. 양쪽 모두 근접전에는 취약하다 보니 이렇게 서로를 견제할 뿐 당장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그렇게 둘 다 서로를 견제하며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 ☆ ☆

“연환 기격탄!”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터트리며 두 주먹을 연달아 뻗어 냈다. 황금빛 오러가 탄환이 되어 테스론의 사방으로 융단 폭격을 해 댔다.

쾅쾅쾅쾅!

폭발이 끝없이 이어지며 공동이 우르릉 흔들린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연달아 날린 기격탄, 그 무수한 공격을 테스론은 자연스럽게 모조리 피해 버린 것이다.

“단순한 공격이구나, 마왕! 나의 연환 기격탄은 이렇지 않아!”

역시 자신의 기술이었던 만큼 테스론은 연환 기격탄이 발동하는 순간 이미 궤도와 파괴 범위를 모조리 파악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잘도 피하는군. 짐 언브레이커블에 회피 따위는 없다더니.”

짐 언브레이커블은 진정한 사나이라면 당당하게 모든 공격을 받아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제라드로부터 아주 기본적인 회피법 밖에 배우질 못했다. 그런데 지금 테스론은 미꾸라지처럼 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고 있다.

테스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 부분은 나도 좀 부끄럽군. 이 몸뚱이가 너무 부실해서 말이지.”

전생에서 어지간한 공격은 전부 몸으로 때운 테스론이었다. 하지만 지금 육체로 그 짓 했다간 곧바로 황천행인 것이다. 다행히 테스론은 전생에 무수한 무인들과 싸우며 터득한 경험이 있었다. 지금 그의 발놀림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것이 아니라 그가 싸웠던 상대로부터 훔친 회피 기법이었다.

“내 몸으로 그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건 정말 대단하다만…….”

레펜하르트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날렸다.

“피하기만 해서 뭐가 될 것 같나?”

곧바로 테스론에게 접근하며 레펜하르트가 길게 미들킥을 날렸다. 전생에 비해 신장이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2미터에 달하는 거구다. 무시무시한 범위의 킥이 테스론의 눈앞을 휩쓸어 버린다. 역시 아무리 단련해 봤자 육체의 성능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 파고들 틈을 찾지 못한 테스론이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파괴의 노래! 섬광의 일격! 루인 송 & 라디언스 블래스트!”

동시에 두 마법이 완성되어 레펜하르트의 좌우로 쏘아졌다. 멀리서 보고 있던 필레나가 놀라 소리쳤다.

“맙소사, 더블 캐스팅?”

지금 테스론이 선보인 것은 단순히 두 마법을 빠르게 외운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외우는 더블 캐스팅이었다. 마법의 경지보다는 연산력과 마법적인 센스가 받쳐 주어야 가능한 것이라 설사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더블 캐스팅이 가능한 자는 극소수였다. 그런데 테스론이 그것을 해내다니?

감탄하며 필레나가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역시 테스론이야…….”

반면 레펜하르트는 전혀 감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실망한 표정이었다.

“고작 더블 캐스팅? 내가 그 나이 때는 주문 네 개까지 동시 영창이 가능했었는데?”

참고로 마왕으로 군림하던 시절엔 일곱 개까지 동시 영창이 가능했다. 실로 괴수 중의 괴수라 하겠다.

음파의 파동과 백색 섬광이 레펜하르트를 직격했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두 팔을 벌리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스파이럴 가드!”

어지간한 것은 다 튕기는 몸뚱이를 어지간하지 않은 것도 튕기게 만들어 주는 사기적인 기술, 스파이럴 가드가 두 마법을 모조리 분쇄해 버린다. 테스론이 순간 기가 차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그 회전력은? 스파이럴 가드가 왜 저렇게 느려?”

마법을 튕겨 낸 레펜하르트가 분노해 소리쳤다.

“남의 좋은 머리 들고 가서 고작 그거밖에 못하냐!”

“내가 할 소리다! 남의 몸 차지하고 이렇게 몰락시키다니!”

싸우다 말고 열심히 비난을 던지는 둘의 모습에 필레나와 실란이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도대체 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뭔가 굉장히 분노하고 원통하다는 듯 떠들곤 있는데 양쪽 모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인 것이다.

또다시 테스론이 연달아 더블 캐스팅을 구사, 온갖 마법들을 쏘아 댔다. 화염구며 뇌격, 마법의 탄환이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스파이럴 가드를 쓰지 않았다.

“이 정도 마법에 굳이 오러 소모가 심한 기술을 쓸 필요도 없다!”

돌진하는 대신 레펜하르트가 연거푸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나는 흐름을 끊는 자, 정명한 언령에 개입해 일점을 찍는다! 아드란 린포스!”

현재 레펜하르트의 연산력으로 더블 캐스팅은 무리다. 하지만 그는 모든 마법의 흐름과 맥을 깨달은 자다. 게다가 테스론의 마력 패턴은 바로 레펜하르트 자신의 것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하면 발동된 마법의 맥을 끊을 수 있는지 손바닥 보듯 알 수 있다.

뒤늦게 마법을 발동했음에도 레펜하르트의 마력장이 날아든 마법들을 일제히 분쇄해 버린다. 테스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 저 가공할 마왕은 내 덜 떨어지는 머리로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나!’

레펜하르트가 재차 몸을 날리며 펀치를 날린다. 교묘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테스론이 감탄해 중얼거렸다.

“내 머리로 이렇게까지?”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내는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도 감탄을 터트렸다.

“내 몸으로 이렇게까지?”

싸우기도 바쁜 와중에 열심히 떠들어 대는 테스론과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뭐 하는 거냐, 저 사람들…….’

생사대적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하는 말들이 참 대구가 척척 맞는다. 사실은 저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게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 정도다.

물론 저 풀풀 날리는 살기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으면 절대 그럴 리 없다. 마법을 파훼하며 레펜하르트가 계속 테스론을 몰아붙였다. 잘도 피하고 있지만 일단 거리에만 들어오면 테스론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으아아아!”

레펜하르트가 전력을 다해 화난 들소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는 테스론이 전력을 다한 레펜하르트의 신체 능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오러를 끌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막 일격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타아아앗!”

순간 테스론이 곧바로 스텝을 밟아 거리를 좁히며 검을 찔러 갔다. 물론 그토록 단련한 이 강철의 육체가 저 따위 쇠꼬챙이에 어떻게 될 리가 없다. 레펜하르트가 코웃음을 치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때,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걸렸구나!”

우우웅!

싯누런 오러가 검을 감싸며 레펜하르트의 심장을 정확히 찔러 갔다.

“으윽?”

2

뚝뚝뚝.

핏방울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다. 레펜하르트는 놀란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강철과도 같던 대흉근, 그것이 길게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처 깊이도 상당했다. 긴 자상이 두터운 가슴 근육을 절반 가까이 파고들어 있다.

테스론이 혀를 찼다.

“쳇, 눈치도 빠르군.”

오러로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려드는 순간 테스론의 눈빛을 보고 경각심을 가져 몸을 뒤로 뺀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정말 심장까지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

저, 싯누런 오러를 머금은 칼날이!

“오러……인가?”

레펜하르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테스론의 검, 그 칼날에 머금어져 소용돌이치는 누런 오러를 바라보았다. 꽤나 낯익은 형태의 오러였다.

“스파이럴 가드? 아니, 검날에 씌웠으니 스파이럴 블레이드라고 해야 하나?”

“이 육체로 스파이럴 가드를 쓸 수는 없으니까. 용법만을 살려 관통력을 극대화시키는 기술이지.”

어떻게 테스론이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는지도 이해가 갔다. 그는 이제껏 오러를 구현시키지 않은 채 육체 강화에만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몸이 오러를 발현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나?”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이 태연하게 반문했다.

“내 머리가 마법 쓸 재능이 있어서 그대가 마법을 쓰나?”

검을 겨눈 채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육체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을 따를 수는 없었지.”

확실히 지금 보이는 테스론의 오러는 레펜하르트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누런 색 계통이긴 하지만 황금빛의 찬란함은 없고 그저 칙칙한 색이었다. 틀림없이 저것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권왕 테스론이다!”

검성 사이러스와 함께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무인으로 군림하던 테스론이었다. 그만큼 그가 깨달은 오러의 경지 또한 드높은 것, 그는 전생의 깨달음을 통해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를 개조, 이 육체에 걸맞게 바꾸어 낸 것이다.

“마왕인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못할 거라 생각했나?”

“내가 그대를 너무 얕보았군, 테스론.”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껏 그리 걱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한 분야에서 끝을 본 자는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검성 사이러스와 함께 대륙 최강자 자리를 양분했던 그대였지.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그 최강자 중 나머지 하나가 그쪽에 붙었다는 것은 속 쓰리지만.”

테스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옆을 힐끔 보았다. 저만치서 유서스와 맹렬히 싸우고 있는 러스의 모습이 보였다. 기억 속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젊디젊은 모습이지만 그렇다 해도 테스론은 그 속에서 함께 무술을 겨루던 친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보니 새삼 입맛이 썼다.

‘설마 저 사이러스가 유서스에게 칼 맞고 쫓겨날 줄은 몰랐지.’

애초에 테스론이 유서스와 연락을 취했던 것도 러스의 존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현 시대의 러스는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기에 유서스와 친분을 쌓은 뒤 자연스럽게 그를 자신의 동료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레펜하르트의 개입으로 테스론이 알고 있던 미래가 꼬여 버리며, 결국 현 시대의 사이러스는 마왕 측에 붙어 버렸다.

“이번 생애의 사이러스는 꽤나 사람들과 잘 지내는 모양이더군? 친구도 생긴 것 같고.”

무심코 나온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했다.

“원래는 친구 하나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뭐, 러스가 워낙 낯가림이 심하기야 하지만…….”

“없었지. 아마 나 정도가 유일한 친구였을걸?”

전생을 떠올리며 테스론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검성 사이러스에게 친구 따윈 없었다. 본인의 차가운 성격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아무도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 컸다.

너무도 위대한 검사, 사이러스를 보통 사람들은 그저 외경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사이러스와 어깨를 함께할 수 있는 오러 유저는 오히려 그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지나치게 뛰어난 그의 재능 때문이었다. 보기만 하면 남의 기술 알맹이만 쏙쏙 빼먹는 사이러스였다. 오러 유저치고 가장 친구 삼고 싶지 않은 자 1순위인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은 달랐다.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법은 그리 복잡하지가 않다. 기법 자체는 굳이 러스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오러 유저라면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애초에 그리 머리가 좋은 무문도 아닌지라 어려운 건 가르쳐 보았자 이해도 못 한다.

하지만 따라 하면 죽는다.

스파이럴 가드건 기격탄이건, 기본적으로 육체를 기반으로 쏘는 기술이다. 그리고 다른 오러 유저가 그런 식으로 오러를 운용했다간 기격탄 날리기 전에 포대인 팔뚝이 먼저 박살 나는 것이다.

즉, 짐 언브레이커블은 절대 기술 도용당할 염려가 없다! 물론 육체 단련법 역시 마찬가지다! 탐나면 얼마든지 훔쳐 가라! 그 기법으로 육체를 강철처럼 만들 수 있으면 오히려 환영이다! 재능이 모자라도 육체가 강철처럼 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준다면 오히려 짐 언브레이커블 쪽에서 큰절 올리면서 스승으로 모셔 갈 용의도 있다!

물론 슬프게도 대륙의 역사 속에 그런 엄청난 천재는 없었다. 심지어는 검성, 사이러스조차도.

“검성 사이러스도 꽤나 우울한 인생이었군.”

주위에 우정을 나눌 만한 상대는 하나도 없고, 기껏 친분이 있는 이가 단순, 무식, 과격한 권왕 테스론이었다니.

어째 불쌍하게까지 느껴진다.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리자 테스론이 마주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우리가 계속 이렇게 대화나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확실히…… 필레나도 우리가 무슨 고향 친구 사이가 아니냐는 표정을 짓고 있군.”

테스론과 레펜하르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교차했다.

분명 그들은 운명적으로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사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기억을 공유하는 자 역시 눈앞의 대적자뿐인 것이다.

“우리는 시공을 거스른 시간의 유배자, 미래라는 같은 곳에서 왔으니 고향 친구라는 말도 틀리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레펜하르트가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테스론도 미소를 띠우며 검을 겨누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호호 웃으며 지낼 사이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겠지!”

차가운 살기가 두 사람의 미소 위로 흘러간다. 테스론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를 해치우기 위해 절차탁마로 힘을 키웠다, 마왕 레펜하르트. 그리고 이제 그 대가를 받아 내겠다!”

레펜하르트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내 몸으로 거기까지 해낸 것은 확실히 대단해. 하지만 그 정도로 설마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아무리 테스론이 오러를 각성할 정도로 힘을 키웠다지만,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러 유저쯤 되면 상대의 기량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육체의 성능도 오러양도 레펜하르트의 절대적 우위다. 방금도 방심해서 당했을 뿐이지, 제대로 오러 유저를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역시 레펜하르트 쪽에 승기가 기운다.

“마법으론 날 어떻게 못해.”

콰아아앙!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폭발하며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오러양을 선보이며 레펜하르트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무인으로서도 내 상대가 되지 못하지. 그대도 이미 이 격차를 느꼈을 터. 대체 무슨 수로 나를 해할 셈이지?”

그러자 테스론이 비웃음을 흘렸다.

“마법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

그리고 갑자기 검을 버렸다. 레펜하르트가 순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맨손 체술로 싸울 셈인가? 아무리 권왕의 영혼이라곤 해도, 권왕의 ‘육체’를 지닌 그를 상대로?

그때 테스론이 두 손을 벌리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무인의 싸움은 그저 오러양이 높다고 다가 아니다!”

순간 테스론이 화살처럼 레펜하르트의 정면으로 돌격했다.

“이제부터 그것을 증명해 주지!”

☆ ☆ ☆

필레나는 유서스 쪽을 보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서스 경이 밀리는 것 같은데…….’

마갑 엘드라드의 힘을 총동원하며 유서스는 연달아 마법을 날려 화려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이 화려하게 폭발하는 그 속에서, 정작 밀리는 쪽은 유서스였다.

“제, 제길! 깨어나라, 엘드란!”

“그 수법을 내가 한두 번 본 것 같소, 형님?”

황금빛 섬광이 밀어닥친다. 러스는 차가운 눈으로 가뿐히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창처럼 길게 뻗어 유서스의 어깨를 강타한다. 오러가 적중될 때마다 마갑 엘드라드가 조금씩 금이 가며 유서스가 고통으로 인상을 썼다.

“크윽!”

마검사와의 전투는 비록 겪어 보지 못했지만, 몇 년 동안이나 질시 어린 눈으로 유서스를 보고 또 본 러스였다. 유서스가 어떤 식으로 싸우고 어떤 마법을 쓰는지는 손에 잡힐 듯 훤하게 알고 있었다.

반면 유서스는 러스가 오러를 각성한 후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서로간의 정보가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이 명예도 모르는 비천한 놈이!”

“명예를 아는 자가 그래, 동생의 배에 칼을 꽂았소?”

“너 따위가 무슨 동생이란 말이냐!”

그럼 동생이 아니면 배에 칼 꽂아도 된단 말이냐? 러스가 기가 막혀 눈을 부라렸다.

“그래, 말 잘했다! 나도 너 따위 더러운 기사를 형으로 인정할 생각은 더 이상 없다, 유서스!”

둘 다 극도의 분노 속에서 눈동자를 벌겋게 물들이며 검을 교환하고 있었다. 필레나는 혀를 찼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격을 회피하는 러스에 비해 유서스는 아까부터 계속 여기저기 공격을 허용한다. 마갑 엘드라드가 워낙 강력한 갑옷이라 치명상은 없었지만 조금씩 체력이며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리고 크리스틴과 시리스의 전투 역시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았다.

“내 친구, 사라나! 우정의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요!”

바람의 정령 사라나를 불러 연신 허공을 누비며 시리스는 세이어의 성기사, 크리스틴을 압도하고 있었다. 크리스틴도 성기사답게 신성검을 휘두르며 열심히 맞상대하고 있었지만 공격 회수가 점점 시리스에 비해 떨어진다.

“이, 노예 주제에 감히 이런 괴이한 짓을!”

한쪽은 두 발 땅에 붙이고 싸우는데 한쪽은 허공을 3차원적으로 유용하며 전투를 벌이니 움직이는 범위가 너무 차이가 났다. 게다가 정령술을 익힌 시리스는 더 이상 단순한 검사 수준이 아니었다.

물의 정령 님피아를 전신 혈맥에 깃들여 민첩성을 높이고 바람의 하위 정령 실프를 검에 깃들여 파괴력을 높인다. 대지의 정령력으로 근력을 보조하며 싸우는 그녀는 이제 어지간한 오러 유저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위급한 순간마다 축복의 호흡법―사실은 저주받은 호흡법이지만―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진작 쓰러졌을 크리스틴이었다.

연거푸 밀리며 크리스틴이 치를 떨었다.

“노예 주제에 이렇게 사납다니! 네년도 혹시 실란을 노리는 거냐?”

이 상황에서 저런 엉뚱한 소리를 내뱉다니, 시리스가 기가 차 말을 더듬었다.

“아니, 뭐…….”

안 그래도 여기저기 레펜하르트에게 원한 품은 이들이 많은 판이다. 그냥 노린다고 하는 게 좀 더 편해지려나? 레펜하르트를 걱정하며 시리스가 갈등 어린 표정을 지을 때였다. 크리스틴이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아잉, 역시 우리 실란이 참 인기가 많다니까?”

정신없이 싸우다 말고 갑자기 부끄러워하다니, 정말 정신세계가 궁금한 아가씨다. 고개를 저으며 시리스는 결심했다. 뭔 소리를 하건 말리지 말고, 그냥 열심히 싸우기나 하자.

“나의 맹우, 이그나시스! 나를 위해 싸워 줘요!”

거대한 불의 거인이 허공에서 나타나 크리스틴에게 돌격한다. 크리스틴이 절망에 차 소리쳤다.

“세이어여! 그대의 종을 가호하소서!”

화염에 대한 방어 주문을 몸에 감싸고 크리스틴이 애써 검을 휘둘러 댔다. 그 모습에 필레나는 초조해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당장이라도 마법으로 원호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걸요, 마법사 아가씨?”

그때마다 저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 신관이 그녀를 견제한다. 저렇게 어린 주제에 대체 얼마나 전투 경험이 많은 것인지, 필레나가 뭘 좀 하려고만 하면 칼같이 타이밍 맞춰 훼방을 놓는데 신경질이 날 지경이다. 이를 득득 갈며 필레나가 테스론 쪽을 돌아보았다.

‘누구건 빨리 상대를 해치워야 이 대치 상황이 끝날 텐데…….’

그렇게 막 테스론과 레펜하르트 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필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나? 저, 저 두 사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 ☆ ☆

테스론이 두 손을 내밀며 낮은 자세로 돌진해 온다. 의아해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무릎치기를 날렸다. 상대의 자세가 워낙 낮다 보니 무릎을 살짝만 들어도 정통으로 테스론의 머리를 갈길 수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테스론이 무릎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의 다리 밑으로 몸을 던졌다. 뱀이 땅 위를 기는 것처럼 빠른 스피드, 그렇게 바로 레펜하르트의 발목을 잡아 넘어트리며 무릎 관절을 꺾는다. 일련의 동작이 너무 빨라, 정말 뱀이 삽시간에 먹이를 휘감는 것처럼 보였다.

“으엑?”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앞으로 엎어졌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균형 감각이 교란되며 몸이 발랑 넘어가 버린다. 동시에 무릎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억!”

레펜하르트가 비명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테스론이 그의 오른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두 다리로 레펜하르트의 다리를 제압하고 옆구리에 그의 오른발목을 끼운 채 몸을 눕히고 있는데, 도저히 몸이 꿈쩍도 하질 않았다.

“뭐, 뭐야, 이거!”

전신에 힘을 준 채 테스론이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라운드 레슬링 계열은 전혀 모를 줄 알았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서서 하는 관절기 외에는 전혀 가르치지 않으니까!”

‘케엑? 이게 레슬링이었나?’

사부, 제라드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제라드는 말했었다.

세상엔 그라운드 레슬링이라고 해서 건장한 사내 둘이서 살을 비벼 대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놈들이 있다고. 나름 깊이 파고들면 오묘한 기술이니 제법 인정할 만은 하지만 그래 봤자 자신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사지육신 멀쩡한 사내놈이 뭐가 아쉬워서 바닥을 뒹굴며 서로의 몸을 더듬어야 한단 말이냐? 자고로 남자라면 서서 싸워야지,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구차하게 바닥을 뒹굴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래서 짐 언브레이커블은 오로지 서서 구사하는 관절기만을 가르친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허약한’ 상대를 ‘상처 없이’ 제압하기 위한 보조 기술로써 익힐 뿐이다. 공격 기술이 아닌, 제압 기술의 개념이랄까? 그렇다 보니 지금 테스론이 선보인 것처럼 본격적인 그래플링 기술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싸울 거면 남의 관절 붙잡고 깔짝댈 시간에 그냥 한 대 더 때리라고 했지, 아마?’

제라드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잠시 암담해했다.

‘아니, 그런데 이 자세에서 어떻게 때리라는 거야?’

양 다리가 제압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으니 두 팔을 아무리 뻗어 봐야 상대의 몸에 닿지 않는 것이다. 버둥대다가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에라이!’

제라드가 가르쳐 준 기법은 그냥 패는 것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지!

상대가 달라붙으면 갈아 버리면 된다고!

“스파이럴 가드!”

붙잡힌 오른 다리를 축으로 황금빛 오러가 찬란히 솟아올랐다. 테스론이 눈을 빛내며 싯누런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고 생각하나!”

싯누런 오러가 황금빛 오러와 충돌해 섞여 버린다. 두 이질적인 오러가 뒤섞이며 입자 상태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대가 익힌 오러는 내가 볼 땐 애송이에 불과한 것! 그런 느려 터진 스파이럴 가드쯤은 기혈氣血만 차단하면 별것 아니다!”

생명기, 오러는 오러 유저의 육신으로부터 발현되는 것. 그리고 그 흐름은 영체를 흐르는 기맥을 통해 현실로 구현된다. 테스론은 지금 자신의 오러를 마개 삼아 레펜하르트가 스파이럴 가드를 발동시키는 기혈 자체를 막아 버린 것이다.

오러의 발동이 막혀 버린 레펜하르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런 건 배운 적이 없는데?”

“그렇겠지. 이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거든.”

애초에 스파이럴 가드는 테스론이 원조다. 육체가 바뀌어 구사할 수는 없어졌다지만, 영혼에 깃든 깨달음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가 한 팔로 바닥을 짚고 반대 손을 들어 올렸다. 애초에 마법사인 그가 무술가인 척했던 것이 잘못이다.

“그렇다면…….”

엎드린 자세로 레펜하르트가 맹렬히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 바로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은 미끄러질지어다! 그리스!”

붙잡혀 있던 레펜하르트의 다리가 쑥 빠졌다. 사물의 마찰력을 극도로 줄여 주는 마법, 그리스를 자신의 다리에 걸어 버린 것이다. 원래 이 그리스란 마법이 사람 몸에 걸리는 게 아닌데, 역시 실란 때의 사례도 있듯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인간 몸뚱이로 인식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헉헉!”

숨을 헐떡이며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몸을 빼냈다. 하지만 테스론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도망치려는 레펜하르트를 날쌔게 따라붙으며 재차 태클을 건다. 레펜하르트가 수도를 내리치며 태클을 막으려 하던 찰라.

“흥!”

콧방귀를 끼며 테스론이 내려친 레펜하르트의 오른팔을 붙잡고 두 다리로 팔을 감쌌다. 그리고 곧바로 양다리로 팔목 관절을 엮으며 허리를 죽 폈다. 기껏 일어난 레펜하르트가 이번엔 뒤로 발라당 자빠져 버렸다. 팔 꺾기 기술, 암 바가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아오! 대체 이거 뭐야!”

바닥에 드러누운 채 레펜하르트가 치를 떨었다. 분명 힘으로는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압도한다. 그런데 어째서 붙잡힌 팔이 꼼짝도 안 하는 거지?

오로지 서서 하는 서브미션 계열, 그것도 순 제압하는 법만 배운 터라 방어 쪽은 개념조차 없는 레펜하르트다. 그렇다 보니 당하고 있으면서도 대체 왜 당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제압한 채 테스론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그냥 재미 삼아 익혀 둔 기술이었는데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지금 그가 구사하고 있는 기술은 대륙 서북부에서 생겨난 무술, 카르지안 유술이었다.

판크라티온이나 레슬링 등과 달리 오로지 관절기만을 특화시킨 이 카르지안 유술은 현 대륙의 무인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무기를 든 상대에게는 위력이 제한되는 데다가, 상대와 엉겨 붙어 땅바닥을 구르는 경우가 많은 무술이라 아무래도 보기 추하다는 이유로 세인들이 기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대일 대결에서만큼은 상당한 강력함을 자랑하는지라 대륙 서북부 지역에서는 제법 세력이 있는 유파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이 카루지안 유술을 전생의 테스론이 익혔던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이 먹어 가면서 이런저런 무술을 섭렵하다 보니 그 와중에 끼어 있었을 뿐이다. 전생의 테스론은 쉰 평생 무술만을 익혀 온 무인 중의 무인,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체술은 물론 어지간한 무기술들도 전부 통달한 달인인 것이다.

“그리스!”

이번에도 레펜하르트가 마찰력 제어 주문으로 팔을 빼려 시도했다. 암 바를 건 테스론이 씨익 웃었다.

“차단의 마력, 내 손을 떠난다! 매직 브레이커!”

레펜하르트의 그리스 마법이 발동 도중 테스론에게 차단되었다. 테스론이 더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마법은 이제 나도 쓸 줄 안다!”

“크윽!”

믿었던 마법마저 차단당한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세상에 살다 살다 테스론에게 마법으로 밀리게 될 줄이야! 마왕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위대한 마법의 깨달음을 선보이고 싶다.

‘그런데 수인을 못 맺잖아? 젠장!’

한 팔이 완전히 붙잡혀 있으니 쓸 수 있는 마법이 극히 제한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 손으로 가능한 마법은 그리스 같은 하위 마법뿐, 3서클 이상의 마법은 아무래도 양손이 필요했다.

물론 수인 못 맺는 것은 테스론도 마찬가지지만 현재 그는 레펜하르트의 가공할 두뇌를 지닌 상태, 같은 주문이라도 수인 없이 발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연산력만 치면 여전히 테스론 쪽이 우위다.

자빠진 채 레펜하르트가 악을 썼다.

“젠장! 네놈은 사부님의 가르침도 잊었냐! 구차하게 살아 보겠다고 땅바닥을 뒹굴다니!”

하지만 테스론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 시대의 난 짐 언브레이커블의 제자도 아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잠시의 수치쯤이 뭐가 대수이겠느냐!”

“남의 팔뚝 가랑이에 끼고 대륙의 평화 운운해 봐야 설득력 없거든?”

확실히 암 바는, 상대의 팔을 잡고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축으로 삼아 지렛대 원리로 팔을 꺾는 기술이다. 테스론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그, 그건 네놈이 무술에 대해 몰라서 그런 것이고! 이거, 사실은 굉장히 고도의 기술이란 말이다!”

“그래 봤자 자세는 발정난 개가 허리 비비는 것 같잖아! 저기 필레나 눈빛을 봐라!”

참고로 필레나가 두 사람을 바라본 것이 딱 이 시점이었다.

‘어머나? 저, 저 두 사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테스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안 그래도 필레나는 지금 뺨을 감싼 채 어머어머를 연발하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 그라운드 레슬링이 참 효율적인 기술인 건 분명한데, 문외한이 보기에 굉장히 야시시한 것도 사실이다.

“돌겠네…….”

혀를 차면서도 테스론은 계속해 레펜하르트의 팔을 꺾었다. 현재 테스론은 보통 레슬러들이 기술을 겨루듯 천천히 힘을 주며 관절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잡은 순간 바로 스냅을 주며 전력으로 관절을 꺾고 있었다.

대련이 아닌 실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일반인이라면 바로 관절이 꺾이며 뼈가 살을 찢고 나와 개방 골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이 ‘자신의’ 육체가 너무 강인하다는 점이었다.

‘썩어도 내 육체군. 더럽게 질기네.’

분명 기술은 제대로 들어갔는데, 인대가 너무 질기고 견고해서 스냅을 주었음에도 늘어나며 붓기만 할 뿐 끊어지지를 않는다.

그렇게 교착 상태로 들어간 두 사람이 저마다 힘을 주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왜 이렇게 몸이 안 움직여?”

“제길, 왜 이렇게 몸이 질겨?”

☆ ☆ ☆

‘아이 참, 대체 테스론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필레나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두 사람이야 나름 맹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겠지만 무술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엔 도대체 저게 뭐 하는 짓거리인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는 것이다. 그저 보면 볼수록 남사스럽고 부끄러워 보일 뿐이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하는 짓이 더 괴이하다.

“에어로 블렛! 플레임 볼트! 선더 스피어!”

팔을 제압당한 레펜하르트가 급한 대로 수인이 필요 없는 에어로 블렛이나 기타 공격 주문을 날린다. 하지만 그 정도론 오러로 전신을 방어하는 테스론에게 타격을 줄 수가 없다. 모든 공격 주문이 허공에서 화려하게 폭발한다.

쾅! 쾅! 콰쾅!

이제는 정신없이 싸우던 크리스틴과 시리스조차 저쪽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남정네 둘이서 엉겨 붙어 비비는 것도 모자라 이제 주위에 화려한 불꽃(?)이 터지며 배경 효과까지 날리고 있다. 필레나와 달리 둘 다 무인인 만큼 저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조, 좀 보기가 그러네요.”

“그, 그러네…….”

다행히 크리스틴도 이런 면에서는 제대로 된 여성의 감성을 지닌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보는 쪽 기분이야 어찌 되건 당하는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미칠 지경이었다.

“아으윽!”

남사스럽다느니 야시시하다느니 하는 건 전부 관전자의 입장, 일단 당하고 나면 그딴 생각 머리에 안 남는다. 어서 풀려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경각심만 가득할 뿐.

“이익!”

마법이 통하지 않자 레펜하르트가 자유로운 왼팔을 뻗어 기격탄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용없다니까?”

스파이럴 가드 때와 마찬가지로 기격탄 역시 발동 전에 기혈이 막혀 차단된다. 오러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엔 지장이 없지만 체외로 발현하려고만 하면 막히는 것이다.

암담한 상황이었다. 서로의 오러가 뒤섞일 정도로 달라붙어 있으니 테스론 입장에선 얼마든지 레펜하르트의 오러에 간섭할 수가 있었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레펜하르트도 얼마든지 테스론의 오러에 간섭할 수 있지만…….

‘그런 거 배운 적 없단 말이야!’

슬프게도 주입식 교육으로 오러를 익힌 레펜하르트에게 저런 고도의 용법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기격탄을 시도한 덕에 왼팔이 테스론의 발목에 닿기는 했다. 손아귀 힘으로 발목을 부러트리겠다는 심보로 레펜하르트가 힘을 주려는 찰나였다.

“안 되지!”

또다시 테스론이 자세를 바꾸며 레펜하르트의 상체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상대의 왼팔을 다리 사이로 끼워 넣으며 재차 오른팔을 꺾었다. 이제는 숫제 두 팔이 전부 봉쇄된 상태, 깔린 채 버둥대는 레펜하르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크윽! 일단 이 자세부터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하지만 두 팔이 붙잡힌 채 상체 전체가 깔려 있으니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때 문득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으아아아!”

드러누운 채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등근육과 엉덩이 근육을 튕기며 강제로 몸을 일으켰다!

“으랏차!”

일반인이라면 저 상황에서 결코 몸을 일으킬 수 없었겠지. 하지만 오러 유저의 초인적인 근력은 손가락 힘만으로도 성인 장정 한둘쯤은 가볍게 들 수 있다. 하물며 권왕의 육체라면 말이 필요 없다. 엉덩이를 씰룩거려 몸을 띄우는 황당한 짓거리도 가능하다!

“켁! 이런 짓도 가능한가?”

역시 힘에서 밀리는 테스론이 얽힌 팔을 풀고 떨어져 나갔다. 겨우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젠장! 살다 보니 별 괴상한 짓을 다 해 보네.”

“내 몸이지만 정말 어이없군!”

다시 테스론이 달라붙었다. 레펜하르트도 나름 손발을 놀리며 어떻게든 타격전으로 몰아가려 했지만, 슬프게도 그의 공격법은 이미 테스론이 훤히 꿰고 있는 상태였다. 순식간에 피해 가며 뒤로 돌아가더니 등에 달라붙어 목을 조른다. 캑캑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몸을 뒤로 날려 등째로 테스론을 벽에 밀어붙였지만, 어느새 빠져나오며 다리를 붙잡고 넘어트리는 테스론이었다.

계속해 밀리기만 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우와, 오러 유저의 레슬링 기술은 처음 보네.”

문외한인 필레나와 달리 실란은 비록 성직자지만 그라운드 레슬링 계열에도 조예가 깊었다. 물론 할 줄은 모르고 그냥 안목만 있다는 소리다. 평소에도 교단의 근육질 몽크들이 저런 식으로 기술을 겨루는 광경을 익히 봐 온 바가 있어 지금 테스론이 어떤 짓을 하는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완전히 레펜 씨가 밀리잖아?”

실란은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모든 움직임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도저히 레펜하르트가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뭔가 하고 싶어도 필레나가 견제하고 있으니 방법이 없다.

“헙!”

가볍게 숨을 멈추며 테스론이 또다시 암 바를 걸어 레펜하르트의 팔을 꺾었다. 막 넘어지려는 레펜하르트가 그야말로 힘으로, 무식하게 버텨 내며 테스론을 팔째 들어 올렸다.

“이대로 바닥에 처박아 주마!”

악을 쓰며 테스론을 바닥에 내려치는 순간, 테스론이 몸을 빙글 돌리며 원심력을 이용해 레펜하르트를 정면으로 고꾸라트렸다. 상대의 상체를 앞으로 눕히며 반대로 거는 암 바, 리버스 암 바였다. 덕분에 레펜하르트 본인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켁!”

철면피라는 관용구를 물리적으로 실천하는 짐 언브레이커블답게, 얼굴로 바닥 좀 부쉈다고 딱히 충격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역시 굴욕감은 굉장했다.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가 눈동자를 이글거렸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레펜하르트가 바닥에 박치기를 날렸다.

콰앙!

반동력으로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엉덩이로도 떠오르는 괴랄한 육체니 박치기로 못 뜰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허공으로 날아올라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보려 했지만…….

“껙!”

테스론은 심지어 허공에서조차 밧줄처럼 레펜하르트를 옭아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