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제20장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은가? (21/84)

제20장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은가?

1

유벨 2세가 국왕으로 오르는 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운 권왕 레펜하르트는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레펜하르트의 성을 국왕이 인정하고 지위를 부여했으니 그는 이제 당당한 크로방스 왕국의 귀족, 안타레스 백작이 되었다.

타국인인 그가 크로방스 왕국의 귀족이 되는 것에 대한 반발은 전혀 없었다. 아무 공이 없더라도 레펜하르트 정도의 오러 유저라면 어느 나라를 가건 저 정도 대우는 받을 수 있다. 타국인 오러 유저가 자국의 귀족이 된 사례는 많이 있기에 귀족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레펜하르트 정도의 공이라면 공작이나 후작위를 주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많이 깎아서 백작위를 받은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야 작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으니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정말 그가 원했던 부분, 겔페인 자작의 영지와 그에 따른 조건 부분은 역시 말이 많았다. 레펜하르트는 단순히 영지를 원한 것이 아니라 크로방스 왕국법과 완전히 독립된 자치권을 원했다.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의 관계처럼, 크로방스 왕국 안에 새로운 국가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역시 전례에 없던 일이기에 반대도 심했다.

귀족들은 두 파로 갈려 열심히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중립이었던 귀족들은 대체로 반대하는 편이었고, 원래부터 유벨 왕자를 지지하던 이들은 찬성을 표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데다 눈앞에서 그의 군대, 이종족들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똑똑히 본 그들은 감히 반대할 엄두를 못 낸 것이다.

“좋지 않은 선례입니다. 아무리 공이 크기로서니 어찌 자치권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의 공은 현실적으로 너무 크오. 실로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지 않소?”

“그렇소. 그런 공신에게 고작 백작의 작위와 척박한 겔페인 자작령만을 내린다는 것이 어찌 형평성에 맞단 말인가?”

“그렇다면 공에 걸맞은 다른 상을 내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자치권은 역시 과합니다.”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이번에도 새로운 국왕, 유벨 2세였다.

“그럼 대신 다른 영지를 내리는 것이 낫겠소? 하지만 땅의 크기는 정해져 있으니 그만큼 다른 공신들에게 주어질 포상이 줄어들 텐데? 음, 그의 공적을 생각하면 페르난도 공작령 정도는 통째로 주어야…….”

그러자 반대하던 중립파 귀족들이 싹 안면몰수하고 찬성으로 돌아섰다. 처음부터 유벨과 함께 했던 이들에 비해 그들은 아무래도 공이 적었다. 레펜하르트에게 공적에 맞는 영지를 내려야 한다면 그 영지는 보나 마나 중립파 귀족들이 받을 포상에서 잘릴 가능성이 컸다. 눈앞에서 자기 몫이 뭉텅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소릴 듣고 나니 다들 참 간사하게도 태도를 바꾼 것이다.

결국 이 역시 대다수의 찬성을 받아 통과되었다. 유벨 2세가 왕가의 인장을 내밀며 단호하게 선언하니…….

“레펜하르트 공에게 땅을 내리고 자치권을 부여하니, 이제부터 그 영지를 안타레스 백국이라 칭하겠노라!”

크로방스 왕국 내에 새로운 국가, 안타레스 백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글로텐 산맥 서부, 한때는 겔페인 자작령이라 불렸던 대지.

산을 끼고 세워진 커다란 성의 회견실에서 거구의 사내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청년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일국의 왕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형님.”

거구의 사내, 레펜하르트가 청년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러스 너도 마음만 먹었으면 이 정도 대접은 받았을 텐데, 뭘.”

스피리어스 경을 물리치고 명성을 드높인 러스 역시 크로방스 왕가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그에 걸맞은 영지가 주어졌다. 공도 공이거니와 이미 내전으로 인해 두 오러 유저를 잃은 크로방스 왕가가 새로운 오러 유저의 존재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러스는 정중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언젠가 가문으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라 유벨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는 처지라는 이유였다. 결국 금은보화로 포상을 받고 레펜하르트를 따라온 러스였다.

“하지만 저는 일국의 왕이 될 수는 없었겠지요.”

“에이, 이걸 가지고 일국이라고 하면 부끄럽지.”

창밖의 풍경을 손짓하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는 백국의 주인으로서 크로방스 왕실 내가 아닌 한은, 대외적으로 백왕으로 칭할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겔페인 자작령, 이제는 안타레스 백국이 된 이 땅은 일국이라기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애초에 영민도 거의 없고 순 산맥뿐인, 어찌 보면 별장 같은 느낌의 영지였다. 아무리 법적으로 백국이 되었다지만 이 땅을 한 나라로 인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야 그렇죠. 조금 더 부르시지 그랬습니까?”

러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겔페인 자작령과 인접한 귀족들은 전부 카르사스 측으로, 이미 반역죄로 목이 잘린 후였다. 그들의 영지는 대부분이 포상으로 다른 귀족들에게 넘어갔고 레펜하르트는 약간의 농지만 더 받았을 뿐이었다. 그 농지는 물론 비옥한 토지였지만 그의 공적에 비하면 심히 적은 면적이었다.

“솔직히 인접한 남작령 한두 개쯤 통째로 달라고 했어도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텐데요.”

“대신 자치권을 받지는 못했겠지.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영지의 크기가 아니라 인간의 법이 허용하는 자치령이야.”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귀족들이 반대하지 않은 이유도, 이런 초라한 영지에 자치권을 주어 봤자 큰 문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름 세심하게 귀족들의 생각을 예측해 이 정도를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모자라는 땅은 차차 빼앗아 버리면 되니까. 영지전 좋잖아?’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며 레펜하르트는 웃었다. 귀족들이야 눈앞의 이득 때문에 자치령을 허용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때 인간 하인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 드워프들이 회견실로 모였습니다.”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겔페인 자작 가족들은 모두 반역죄가 적용되어 참수당하거나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레펜하르트는 겔페인 자작이 거느리고 있던 하인, 하녀 들을 모두 본인이 원한다면 그대로 성에 거주시켰다. 충성심이 강했던 집사나 몇몇 하인들은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떠났지만 대부분 성에 남았다. 저 하인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가자, 러스.”

“예, 형님.”

러스를 대동하고 레펜하르트가 방을 나섰다.

회견실에는 이미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다들 백발이 성성한 이들로, 오래 사는 드워프들 중에서도 늙은이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회견실로 들어오자 선두에 선 늙은 드워프가 머리를 조아렸다.

“백왕님을 뵈옵니다.”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들 오시오.”

이 드워프들은 겔페인 자작의 노예였던 이들이다. 레펜하르트가 원한 것은 단순히 겔페인 영지를 넘어서 자작이 가진 모든 것의 소유권이었고, 이들 역시 그가 거두게 되었다.

드워프 노인이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왕께서 우리들의 구원자시라는…….”

“그렇다더군.”

“가족을 만난 이들 모두 구원자의 은혜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들은 그만큼 아첨이라는 개념에 약하다. 지금 이 늙은 드워프는 진심으로 레펜하르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광산의 남자 드워프들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드워프 노예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가족을 인질 삼아 거주지를 분리시키는 것은 광산업을 하는 이들의 상식이다. 겔페인 자작 역시 광산의 남자들과 그 가족들을 따로 살게 하고 가끔 만나는 것만 허용함으로써 드워프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 언제나 가족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드워프들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미 이 성 지하에서는 가족과 조우한 드워프들이 상봉의 기쁨을 느끼며 기뻐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드워프 노인이 문득 곤혹스러워하며 물었다. 레펜하르트가 이 드워프들에게 행한 것은 이산가족 상봉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이들의 노예 문서를 전부 불태우고 그들이 이제 자유임을 선언했다.

어느 정도 조상의 문화와 사회를 유지하고 있던 드워프들이었기에, 엘프나 오크 노예들처럼 자유의 개념조차 이해 못 해 당혹스러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

“혹시, 저희들은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자유민, 원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소. 물론 원한다면 이곳에 있을 수도 있고.”

드워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노예로서 이곳에서 살아온 이들이다. 자유를 얻었다 해서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물론 그랜드 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들 밑에서 안전하게 살아온 드워프들이 살아가기에 그곳은 역시 너무 척박하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도 이 드워프들을 놓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 양반들이 이 땅의 유일한 돈줄인데 떠나면 큰일 나지.’

이 영지의 주 수입원은 바로 드워프들의 광산업이다. 광산이 문 닫으면 기껏 생긴 안타레스 백국도 문 닫는다. 노예처럼 부리며 강제로 땅 파게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광신 놀릴 생각도 전혀 없다.

“그대들은 자유인, 하지만 저 광산은 명확하게 제 소유입니다.”

“그럼 역시 광산을 떠나야 한다는?”

“아니오. 그대들이 광산의 채굴권을 주겠다는 소리입니다. 정확히는 광산을 임대한다고 해야 하려나?”

드워프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거저 모든 것을 넘겨줄 수는 없다. 이것은 전생에서도 지켜왔던 원칙이었다. 진정 자유로운 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한다.

레펜하르트가 드워프 노인을 향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여태처럼 광산에서 일을 하라. 단, 이제부터는 광산의 관리를 전적으로 드워프들에게 맡기겠다. 어디서 살고 누구와 지내건 간섭하지 않는다. 드워프들은 광석을 캐고 무기며 갑옷을 제작해 그걸 판 돈으로 세금과 임대료를 내면 된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돈을 모아서 광산 소유권을 제게서 통째로 사십시오. 원하면 적당히 나눠서 받겠습니다. 뭐, 한 360개월 할부 정도?”

레펜하르트는 드워프들에게 인간처럼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하라고 권한 것이다. 드워프들이 눈을 껌벅이더니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아니, 상상도 못할 정도로 후한 조건이다. 360개월, 30년이면 인간에겐 강산이 세 번은 뒤바뀔 엄청난 기간이겠지만 오래 사는 드워프들에겐 그냥 적당한 시간이다.

“백왕께선 우리들에게 너무도 후한 대접을 해 주시는군요. 뭔가 원하시는 것은 없습니까?”

“제가 부를 원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은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래선 백왕께 전혀 득 될 것이 없어 보이는데…….”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갖는 것은 당신들이 만드는 모든 무구에 대한 전매권이니까요.”

쉽게 말해서, 이 드워프들이 만드는 모든 것은 레펜하르트를 통해서만 현금화할 수 있다는 소리다. 드워프들이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조건이면 레펜하르트 역시 그들을 통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노예였던 그들은 인간이 원하는 최저의 광물과 무기만을 대충 만들어 공급하곤 했다. 이제부터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땅을 파고 무기를 만들 것이다. 겔페인 자작이 그들을 노예로 부렸을 때보다 오히려 몇 배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 같은 시절에 우리와 거래하려 하는 이는 어차피 백왕님뿐일 터, 전매권은 그저 명분일 뿐이군요. 다시 한 번 구원자께 감사드립니다.”

연신 감사하며 드워프들이 회견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의 뜻을 펼칠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그는 회견실 창문을 통해 척박한 겔페인 영지, 이제는 안타레스 백국이 된 땅을 내다보았다.

“예전에 비하면 참 초라한 땅이지만…….”

그래도 이것이 시작이었다.

“뭐, 안타레스 제국도 첫 시작은 이랬으니까.”

사실은 이것보다 훨씬 나빴다. 그때는 딱히 나라 세울 생각이 아니라서 그냥 적당히 황무지에 마을 세운 정도로 시작했었으니까.

문득 레펜하르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여행은 어땠소, 마켈린?”

회견실 한쪽에 어느새 노회한 드워프 한 명이 서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수염을 자랑스레 쓰다듬고 있는 그는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었다. 안타레스 백국이 세워지자 연락을 받은 그 역시 타오반 상회를 통해 은밀히 이곳으로 온 것이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습니다, 레펜하르트 님. 다들 레펜하르트 님의 노예라고 하니 전혀 귀찮게 굴지 않더군요.”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사죄의 말을 건넸다.

“불명예스러운 처지에 처하게 해 미안하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리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오래 기다렸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요. 우리들에게 시간은 그리 귀중한 자원이 아닙니다.”

마켈린이 빙그레 웃으며 레펜하르트를 달랬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고, 인간에게 시간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것이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는 게 슬픈 점이지만.”

☆ ☆ ☆

회색빛 석벽으로 둘러싸인 회견장에 여러 종족의 대표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를 대표하는 마켈린과 세 오러 유저.

푸른 곰 부족의 오크를 대표하는 세 명의 멘토, 칼켄과 스탈라, 그랄타.

단하임 일족의 엘프를 대표하는 렐하드와 그의 부관, 데임.

그들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가 그려진 전도全圖였다.

칼켄이 지도를 보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싸워서 이겼으니 이제 땅 줄 차례인가, 형제?”

“그렇습니다. 자, 여기서 여기까지가 이제 푸른 곰 부족의 영역입니다.”

지도에 선을 그으며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질을 했다. 그가 짚은 지역은 안타레스 백국의 서쪽 일부와, 국경 너머의 글로텐 산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렐하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 여기는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가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 레펜하르트가 짚은 지역 대부분은 크로방스 왕국의 국경 밖에 있는 산맥 지역이었다. 자기 땅도 아닌데 멋대로 주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크로방스 왕국의 영토도 아니지요. 공식적으로 글로텐 산맥은 대륙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닙니다.”

영토란 것은 지도 위에 슥 줄 긋는다고 다가 아니다. 그곳에 백성이 살고, 그 백성이 관리하에 있어야 비로소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험준한 글로텐 산맥은 인간이 생활하기엔 너무도 힘든 곳이었고, 그런 만큼 영토로서 관리할 가치도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나마 겔페인 영지도 광산이 있었기에 크로방스 왕국에 편입되었을 뿐, 글로텐 산맥 대부분은 무주공산이었다. 산맥에서 얻는 것보다 관리하는 노력이 몇 배나 들어가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푸른 곰 부족이 돌아다니는 땅은 고스란히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가 되는 겁니다.”

설명을 마치며 레펜하르트는 싱글벙글 웃었다. 하지만 칼켄과 스탈라, 그랄타는 당혹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랄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형제, 이 산맥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소?”

글로텐 산맥이 비유 상 무주공산이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 드넓은 산맥에 인간 하나 안 산다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국가 단위의 세력이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산맥 곳곳에 여러 산악 민족들이 부락 단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범위는 산맥 동부의 초원, 페틀랜드까지 퍼져 있다. 하나하나는 세력이 약하지만 다 합치면 그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을 함부로 건드리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덤벼 온다. 그리고 인간들은 우리보다 숫자가 너무 많지. 그래서 조상님들도 여태 이쪽으로 오지 못했던 것 아닌가? 우리는 우리 부족을 지켜야 하는데 전사들의 수는 너무 적다.”

칼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그들에게 사기를 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의심은 아니었다. 일단 호투의 의식을 통과한 시점에서 그들은 레펜하르트를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저런 식의 의심은 결코 품지 않았다. 단지, 레펜하르트가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물론 오크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대마법사인 레펜하르트가 생각 못 할 리는 없다. 그가 웃으며 푸른 곰 부족의 땅, 그중에서도 안타레스 백국 내에 속한 지역을 가리켰다.

“그럼 본거지로 돌아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렇군!”

렐하드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전히 못 알아들은 오크 3인방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게 뭔 소리요?”

렐하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국경 안쪽은 엄연히 크로방스 왕국의 영토입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안타레스 백국의 백성인 겁니다. 글로텐 산맥의 산악 민족들이 병력을 모아서 몰려오면 그때부터는 국경 침입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대규모로 쳐들어오려면 상당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반면, 우리들은 이제 안타레스 백국을 등에 업고 당당히 산맥을 넘나들 수 있지요.”

그래도 오크들은 이해를 못 하고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렐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이 단순한 작가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제는 애들 지킬 사람들이 많다 이 소립니다. 이 땅에 댁들만 사는 거 아니잖습니까? 엘프도, 드워프도 살 것이고 레펜하르트 님 휘하의 인간들도 살게 될 겁니다.”

“그래서?”

“본진 털릴 걱정 없다 이 소립니다.”

그제야 오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오오! 그렇군!”

“이제 애 봐줄 사람들이 더 생긴단 말이지?”

“그럼 전사들이 마음 놓고 마을 비워도 되겠군!”

좋아하는 오크들을 보며 마켈린과 렐하드, 레펜하르트- 그러니까 좀 더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이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오크들을 쉽게 이해시키느라 이렇게 설명하긴 했지만,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그보다는 더 복잡하다.

사실 이종족들이 나타날 때 인간들이 똘똘 뭉치는 이유는 그저 영토를 침범당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크들은 물론이고 엘프나 드워프들은 노예 종족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한마디로 야생의 이종족들이 발견되면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한다 해도 쓰는 예산보다 얻는 이득이 많은 것이다. 주인 없는 노예들을 잔뜩 얻게 될 테니까. 그래서 이종족들과 조우한 당사자들뿐만이 아닌, 전혀 상관없는 인간들도 욕심을 앞세워 힘을 합치려 한다.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을 등에 업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땅의 이종족들은 엄연히 대외적으로 레펜하르트의 소유다. 자치권을 받았으니 크로방스 왕국법이 이종족들을 레펜하르트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보호해 준다.

즉, 여기를 기점으로 푸른 곰 부족이 글로텐 산맥의 산악 민족과 부딪치게 되면 그때는 야생의 오크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안타레스 백국의 레펜하르트가 영토를 넓히는 전쟁이 되는 것이다.

“원주민들과의 마찰은 있겠지만, 적어도 욕심 때문에 참전하는 인간들은 정치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렐하드의 말에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후에 우리들의 숫자가 커진다면 인간들의 반응도 달라질 터. 하나 초기에는 별문제 없을 겁니다.”

저 문제는 오크뿐 아니라 드워프나 엘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 역시 안타레스 백국을 등에 업고 안전하게 글로텐 산맥으로 진출할 수 있다.

“엘프의 영역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되겠군요.”

레펜하르트가 백국과 연결된 산맥의 중앙, 능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숲 지역에 동그라미를 그었다. 오크들의 영역과 인접하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둔 지역이었다.

오크들이 채집, 수렵으로 살아가느라 활동 범위가 넓은 것에 비해 엘프들은 대체로 숲 속에서 경작과 재배에 열중하기 때문에 영역도 그렇게까지 넓을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 수림이면 천 명이 넘는 엘프들이 마을을 꾸리고 살기에 충분한 넓이였다.

“차후 엘프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다른 숲도 필요하겠지만 당분간은 이 정도로 충분할 겁니다.”

렐하드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넓소. 단지 문제는 우리 일족이 전부 이곳으로 옮겨 와야 하는 것이냐인데…….”

일족이 통째로 옮겨 올 생각인 푸른 곰 부족과 단하임 일족은 처지가 달랐다. 한때 통곡의 땅이라 불렸던 그들의 고향은 이제 은총의 대지라 불리며 녹음이 푸르른 땅으로 변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되살린 세계수 엘븐하임의 권능 덕이었다.

렐하드가 난처한 듯 손가락을 꼬았다.

“세계수 곁을 떠나는 것은 역시 좀…….”

물론 레펜하르트도 단하임 일족이 굳이 되살린 세계수 곁을 떠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대륙에는 여전히 노예로 살아가는 엘프들이 많으니까요. 이 숲은 그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단하임 일족 외에도 아직 오지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이 제법 있지 않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단하임 일족의 일부가 이 숲에서 거하며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것은 확실히 필요한 일이겠군. 알았소. 일족의 젊은이들을 추려 이쪽으로 보내도록 하지.”

렐하드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아쉬운 목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이럴 것이면 차라리 이곳에 세계수를 심는 것이 나을 뻔했군.”

현재 세계수는 완전히 성장한 상태가 아니기에 엘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역시 약하다. 단하임 일족의 고향은 오지 중의 오지라 사막만 벗어나도 세계수의 힘이 거의 미치질 못했다. 그래서 현재 렐하드와 엘프 전사들도 품에 엘븐하임의 가지를 각자 품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 여기도 심을 겁니다.”

그러자 렐하드가 기막혀 하며 되물었다.

“……세계수가 무슨 분재도 아닌데 그렇게 아무 데나 막 심을 수 있는 거였소?”

“아무 데나 심을 수는 있습니다. 아무거나 못 심어서 문제지.”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그는 저 엘프들의 숲에도 세계수를 심을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물론 보통 나무들 가지치기 하듯 세계수 가지를 꺾어서 땅에 박는다고 다 엘븐하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궁 니힐렌처럼 세계수의 순수한 정精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야 새로운 거목이 될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의 위치는 다 파악하고 있으니까.’

전생에서 레펜하르트는 일곱 그루나 되는 세계수를 대륙 곳곳에 심고 연동시켜 대륙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권능의 그물을 짠 바가 있었다. 원래의 엘븐하임처럼 어마어마한 권능과 크기를 가진 세계수로 성장시키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해 내린 편법이지만, 효과 자체는 그리 차이가 없었다. 이번 생에도 레펜하르트는 그 방법을 고수할 생각이었다. 단시간에 엘프들을 각성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까.

‘물론 시간이 지나면 각각의 세계수가 지나치게 대지의 정을 빨아들이게 될 테니 한 그루만 남기고 다시 꺾어 버려야겠지만, 그건 앞으로 수백 년 후의 일이니까.’

그렇게 렐하드와의 논의를 끝낸 뒤 이번엔 레펜하르트가 마켈린을 돌아보았다.

“드워프들은 이런 식이면 되겠지?”

“충분합니다.

드워프들의 영역은 오크나 엘프와 달리 전 지역 곳곳에 점의 형태로 퍼져 있었다. 지상보다는 지하에 관심이 많은 그들에게 지상의 영토는 크게 의미가 없다. 광산 근처의 마을과 농토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다 보니 푸른 곰 부족의 영토와 상당수 겹치긴 했지만 어차피 한쪽은 지상이고 한쪽은 지하이니 별문제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인구가 늘 경우 자급자족이 힘들어지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상관없겠군요.”

“어차피 초기 드워프들의 주 수입원은 광물과 무기의 판매에 의존하게 될 테니까.”

레펜하르트의 말에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지의 지리적 위치는 좀 아쉽군요. 그랜드 포지와 왕래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차라리 세텔라드 산맥을 접한 영지를 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렐하드도 마찬가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그랜드 포지와 단하임 일족의 은총의 대지에서 이곳 안타레스 백국까지 오려면 너무도 긴 여정이 필요했다. 양쪽 모두 던전 다이만의 공간 포털을 이용해 세탈라드 산맥 외곽을 빠져나온 뒤 타오반 상회의 도움을 받아 차탄 공국을 통과, 크로방스 왕국을 동서로 주파해야 하는 것이다. 거리도 멀거니와 인간의 영역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너무 많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영지를 일부러 택한 것이라오. 여기, 글로텐 산맥에 있는 던전 클로이 때문에.”

“거기에도 다이만 터미널과 연결되는 공간 포털이 있습니까?”

놀란 마켈린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괜히 이 겔페인 자작령을 콕 집어서 유벨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냥 글로텐 산맥을 끼고 있는 영지라면 조건 좋은 곳은 더 많다.

다 저 던전 클로이, 현 시대에도 살아 있는 공간 포털이 있는 던전 때문에 굳이 이 땅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동에 있어서는 오히려 훨씬 편해진 셈이군요. 다이만 포털을 통해 바로 이 영지로 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클로이 던전으로 들어가서 포털을 활성화시켜야 하고, 또 그 던전을 깔끔히 청소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이곳에 모인 각 일족의 전사들이라면 별로 힘든 일도 아니지요. 미리 공략법도 다 설명해 줄 것이고.”

클로이 던전의 수준은 엘류시온 유적보다도 떨어진다. 황금기사 유서스와 테네스 기사단이 탐사했을 정도 수준이니 오러 유저가 남아도는 이들이 탐사를 고민해야 할 정도 레벨은 아닌 것이다.

말로이드가 가슴을 치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건 맡겨 주시오, 구원자여! 깔끔하게 정리해 드리겠소!”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이종족 우두머리들과 상의해 영역 밑 간단한 법령을 정했다. 법령이야 이미 안타레스 제국 시절 써먹던 것이 있으니 금세 정할 수 있다. 어차피 지금은 초기 단계라 복잡한 법도 필요 없었다. 각 종족 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율과 예의 정도면 족했다.

다들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렐하드의 부관, 데임이라 불리는 엘프 청년이 지도 귀퉁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은인이시여, 지도를 보니 여기 남는 땅이 있는데 이것은 뭡니까?”

지도상에 엘프와 오크의 영역 사이, 꽤나 넓은 지역이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굳이 땅 욕심이 나서가 아니라 일부러 비워 놓은 것이 명백해 보이니 그냥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곳은, 아직 만나지 못했으나 곧 만날 이들을 위한 지역입니다.”

“……?”

다들 그의 뜻을 이해 못 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마켈린만이 뭔가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2

크로방스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지 어언 한 달.

이제는 안타레스 백왕성으로 이름을 바꾼 겔페인 성의 뒤뜰에서 두 사내가 검을 맞대고 있었다.

“타앗!”

“켈타!”

날렵하면서도 탄력적인 몸을 지닌 인간 청년과 두툼한 근육을 지닌 녹색 피부의 오크 전사였다. 완연한 초여름, 따갑도록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둘 다 얼굴 가득 신 난다는 표정으로 공방을 주고받는다.

“허리!”

공격 지점을 미리 가르쳐 주며 러스가 횡 베기를 날린다. 투박한 참마도로 공격을 막아 낸 타시드가 검을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가라! 다카르! 머리!”

참마도가 허공을 날아 러스의 머리를 노린다. 검을 휘둘러 공격을 방어하며 러스가 잽싸게 타시드에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타시드는 어느새 거리를 벌려 사정권 밖으로 벗어난 후였다. 멀리서 타시드가 소리쳤다.

“러스! 나의 맹우가 어깨를 노린다!”

러스가 혀를 차며 등 뒤로 정신을 집중했다. 튕겨 나간 참마도가 어느새 재차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몸을 비틀어 검을 튕기자 참마도가 다시 타시드의 손으로 돌아갔다. 러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윽! 알고 있어도 이건 역시 까다롭네.”

현재 러스는 일부러 오러를 봉인한 채 타시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느꼈던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수많은 오러 유저를 상대해 온 러스였다. 확실히 오러를 다루는 실력은 예전에 비해 월등히 올랐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검술 같은 기본적인 기량이 오러에 비해 너무 떨어진 것이다.

오러를 각성한 시점에서 모든 신체 능력이 월등히 올랐으니, 아무리 달인이라 불리는 검사라 할지라도 현재 러스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검술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현재 러스의 수준은 내려 베기 하나만 제대로 할 줄 아는 그 시절과 거의 나아진 것이 없다. 러스 특유의 그 ‘예측 불가능한 검술’은 그냥 멋대로 휘둘러도 먹힌다는 의미이지, 검술로서 정립되었다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자고로 모든 것은 고르게 발전해야 하고 하나 모자람이 없어야 하느니…….’

러스는 오래토록 내려오는 무언武言을 읊으며 숨을 골랐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시행하지는 못하는 옛 가르침, 하지만 러스는 타고난 본능으로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강자가 되는 지름길임을 느끼고 있었다.

“후우우우.”

숨을 고른 러스가 다시 타시드에게 돌진했다.

“크아아아!”

타시드도 전사의 포효를 터트리며 마주 돌격해 갔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까지 치솟았거늘, 이 두 젊은이들은 더위조차 느끼지 못한 듯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흥겹게 검을 나누었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잠시 쉬자고 손짓하며 러스가 타시드에게 다가갔다. 타시드가 물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러스에게도 다른 물수건을 던져 주었다.

이마를 훔치며 러스가 물었다.

“아, 타시드. 그 스피리츠 웨폰 말인데.”

“오크어로 킨드라 카타.”

“음, 여하튼 그거.”

둘은 굉장히 막역한 말투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것이다.

타시드는 오크답게 호쾌하고 단순한 성품이면서도, 인간들 사이에서 자란 덕에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마법의 목걸이를 받아 공용어 역시 우아하게 구사하니, 러스에게는 오크가 아니라 인간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사실 러스는 인간 친구도 없었다. 그냥 타시드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 하겠다.)

러스가 타시드의 애검, 다카르를 가리키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 기술 대단하긴 한데, 검을 던지면 넌 맨손이 되잖아? 그때를 대비해서 검 한 자루쯤 더 차고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타시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전사에게 무기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 어찌 맹우를 배신하고 다른 무기를 쥘 수 있겠나?”

“하지만 잘카토란 오크는 쌍검을 쓰던데?”

“그 녀석이야 맹우가 둘인 것이고. 난 이제 와서 맹우를 하나 더 늘일 생각은 없거든.”

“뭔가 복잡하네.”

아리송해하며 러스는 혀를 찼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로부터 들은 스피리츠 웨폰의 특성을 생각하면 또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애당초 저 정도로 고지식하게, 얼핏 불합리해 보일 정도로 무기에 집착해야 잔존 사념이 깃드는 것이다.

‘하긴, 만약 타시드가 다른 검을 쥔다면 도리어 스피리츠 웨폰의 힘마저 잃을 수도 있겠지.’

문득 러스가 고개를 돌리더니 실소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참 전장과 평소 모습이 갭이 크군.”

그들이 싸우고 있던 뒤뜰 성벽의 그림자, 그 밑에서 거대한 다이어울프 하나가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시드의 애랑, 흑왕이었다. 저 노회한 늑대는 ‘좋구나, 한창 때라 힘이 남아도나 보네~.’란 눈빛으로 둘을 보며 도롱도롱 졸고 있었다. 저 모습만 보면 그저 갈 때 다 된 늙은 개지 전혀 데스트란드를 지배하던 공포의 제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타시드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군. 평소엔 어지간히 게을러야 말이지.”

“그래도 전투에만 임하면 괴물처럼 변하니, 과연 대단한 늑대야.”

둘은 그렇게 가볍게 농담을 나누며 휴식을 취했다. 타시드가 갑자기 러스에게 말했다.

“아, 그 오러란 거 한번만 더 보여 줘.”

“이렇게?”

부우웅!

푸르른 블레이드 오러가 러스의 롱 소드를 찬란하게 감싼다. 타시드가 롱 소드를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거참, 알 듯 말 듯. 잘만 하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쩝.”

러스와 친구가 된 이래, 타시드는 은근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안 그래도 푸른 곰 부족 3위의 실력을 자랑하는 전사인 타시드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러스가 오러를 다루는 걸 보니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계속 검을 마주하며 뭔가 속에서 간질간질하게 올라오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딱 이거다 싶은 느낌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타시드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아, 역시 투혼의 축복을 받기엔 시간이 필요하려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 보통은 몇십 년 걸린다고, 이거.”

“네가 그런 소릴 하면 안 되지.”

20대에 벌써 오러를 막 써 대는 러스를 향해 타시드가 핀잔을 던졌다. 그리고 포기한 듯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해 댔다.

“하암, 역시 열 살은 넘어야 하나?”

“쿨럭!”

순간 러스는 헛기침을 해 댔다. 타시드가 올해로 아홉 살이란 것은 이미 들었지만, 그래도 상기할 때마다 어색해 죽겠다. 타시드가 불만스러워하며 입을 삐죽였다.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종족 나이로 치면 또래인데.”

“그건 잘 알지만 말이지.”

오크들의 성장 시스템이 인간과 다르니 현재 타시드의 종족 나이는 러스와 비슷한 20대 후반으로 봐야 한다. 태어난 지 5년 만에 청년기, 인간으로 치면 20대 중반까지 자라고 그 이후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오크들은 전투를 위해 태어난 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도 기분이 영…….’

머리를 긁으며 러스가 몸을 일으켰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한판 붙지?”

“좋지!”

타시드도 참마도를 움켜쥐며 벌떡 일어났다. 또다시 둘이 격돌하며 우렁찬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앗!”

“크아아!”

☆ ☆ ☆

안타레스 백왕성, 그 2층 발코니에서 한 소녀가 뒤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엘프 소녀, 시리스였다. 그녀는 단정한 평상복 차림으로 턱에 손을 괸 채 두 남자들의 땀내 가득한 결투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들 열심이네.”

러스와 타시드뿐이 아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선 실란이 오늘의 체력 단련을 위해 열심히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시리스도 어쩔 수 없는 소녀라, 한창 때의 남자들이 땀을 흘리며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든다.

“틸라 양도 나름 열심히 임무 수행 중이고.”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른 구역, 회랑이 연결된 작은 정원에서 한 남녀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드워프 처녀 틸라와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틸라와 함께 정원을 거닐던 청년이 문득 연못 수면에 비친 자신을 보고 흠칫했다. 그가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으음, 이 얼굴은 여전히 익숙해지지를 않는군.”

청년의 정체는 레펜하르트의 포로가 되어 이곳까지 끌려온 카르사스였다. 카르사스를 구해 낸 레페하르트가 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법으로 외모를 바꾸어 준 것이다. 원래의 얼굴에 비하면 미모도가 대폭 하락한 모습이지만,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닐 것이다.

카르사스의 생명을 살리고, 그의 신분까지 숨겨 데리고 왔으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틸라를 감시 삼아 붙인 뒤 성내라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용한 것이 전부였다.

적이었던 상대에게 내려진 처우치곤 지나치게 관대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생길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현재 카르사스에게 이 성을 떠나 달리 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틸라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다. 아무리 카르사스가 강하다지만 무장이 해제된 채 틸라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카르사스도 전혀 반항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명예를 아는 기사였고, 포로가 취해야 할 예의 역시 잘 지키고 있었다. 왜 자신을 살렸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법도 하건만, 카르사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순순히 주어진 작은 자유를 즐길 뿐이었다.

“날씨가 꽤 더워졌군요.”

“슬슬 여름이니까요, 카르사스 씨.”

“항상 나를 감시하느라 피곤하지 않소, 틸라 양?”

“아마 제가 이 성에서 두 번째로 한가할걸요.”

“흐음? 첫 번째는 누구요?”

“웅,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아직까지 자고 있을 저 위의 누군가?”

거리가 상당하지만 엘프의 가공할 청력으로 시리스는 틸라와 카르사스의 대화를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장난스러운 틸라의 손짓에 시리스가 표정을 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이그…….”

틸라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모두가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한가하게 농땡이를 피우는 작자가 하나 있었다.

그 작자는 지금도 햇살을 피해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 위를 데굴거리는 중이다. 시리스가 척척 걸어가더니 이불을 휙 잡아당기며 외쳤다.

“어휴, 레펜하르트 님! 그러다 살쪄요!”

이불이 벗겨지며 건장한 근육질의 거한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 안타레스 백국의 지배자, 권왕 레펜하르트였다.

레펜하르트가 눈곱 가득한 눈으로 시리스를 향해 히죽 웃었다.

“며칠 데굴거린다고 군살 붙을 만큼 인간미 있는 몸이라면 얼마나 좋겠냐?”

레펜하르트 일행이 이곳에 온 지도 어언 스무 날이 넘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도 초반 열흘 정도는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이종족들을 모아 토지를 나누고 법령을 제정하는 한편, 병력을 이끌고 던전 클로이를 탐사해 깔끔하게 던전 내 시스템을 장악하고 공간 포털을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한동안은 정말 바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보통 영주가 새로 영지에 부임하게 되면 할 일이 태산이겠지만, 이 영지는 애초에 인간이 얼마 안 살았다 보니 딱히 관리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레펜하르트는 전적으로 각 이종족들에게 자율권을 주고 그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했다. 왕으로서 신하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동맹으로서 조언을 하는 형식이다. 이게 의미 자체는 참 바람직한데 속 내용을 알고 보면, 복잡한 일 죄다 떠맡겨 버렸다는 소리도 된다.

초반 열흘 정도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나니 정말 할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 보니 인간이 완전히 퍼져 버렸다! 허구한 날 늦잠에 매일같이 하던 무술 수행이며 마법도 야금야금 빼먹기 시작했다. 며칠은 ‘그동안 워낙 열심히 달려왔으니 좀 쉬기도 해야겠지.’란 생각으로 그냥 넘어가던 시리스도 슬슬 두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아아암~!”

레펜하르트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여전히 완벽한 강철의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혹한 수행을 거친 이 육체는 고작 며칠 게으름 피운 정도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무인이 어떻게 매일의 수행을 빼먹을 수가 있어요?”

“나 마법사인데…….”

“마법사가 어떻게 매일의 명상을 빼먹을 수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 없지…….”

결국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레펜하르트가 어슬렁거리며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마치 동면중이던 곰이 막 깨어난 듯한 나태함이 엿보이는 모습이다. 시리스가 계속 혀를 차며 그를 발코니로 이끌었다.

“얼른 잠 좀 깨요!”

구시렁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힐끔거렸다.

‘아니, 얘는 내 마음은 전혀 안 받아 주면서 왜 바가지 긁을 때만 예전 모습이 보이는 거야?’

불공평하다! 불합리하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투덜거릴 때였다.

“아침 차려 놨어요. 식욕 없으면 차라도 드세요.”

발코니엔 어느새 근사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입으로는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도 시리스는 착실하게 그를 챙겨 주고 있는 것이다.

‘아, 요 예쁜 것!’

팔짱을 끼고 딴청을 피우며 시리스가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

잽싸게 의자에 앉아 레펜하르트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응! 잘 먹을게!”

참으로 지조 없는 전직 마왕이었다.

☆ ☆ ☆

발코니에 놓인 테이블 위엔 두꺼운 빵 덩이와 신선한 야채, 잘 구워진 새끼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올라가 있었다. 아침 식사라기엔 지나치게 거한 만찬이었지만 지금의 레펜하르트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소식小食하는 편이다.

돼지 다리를 잡아 뜯고 우물우물 씹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이거 시리스가 직접 차린 거야?”

“네.”

“그럼 하녀들은?”

혹시 하녀들이 엘프인 시리스를 업신여겨 일거리를 떠맡긴 건가 싶어 레펜하르트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이미 권왕이 이끄는 이종족 전사들의 힘은 크로방스 왕국 전체에 자자하게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현재 백왕성에서 종사하는 인간 시종들은 그런 이종족들의 군대를 두 눈으로 보고 두려워하는 이들이었다. 적어도 안타레스 백국 내의 인간들치고, 아직까지도 이종족은 노예일 뿐이라는 착각을 하는 이들은 남아 있지 않다.

‘뭐, 현재 백국 내의 인간들이라 봐야 이 성의 시중인들 스무 명 정도가 전부지만.’

과연, 시리스는 자발적으로 상을 차려 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툴툴거리며 레펜하르트 곁에 와 앉았다.

“다들 제 할 일 하느라 바빠요.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처럼 한심하게 데굴거리고 있지는 않거든요? 게다가 밥때도 아닌데 상 차리라고 하기도 미안하잖아요.”

빵 덩어리를 작게 뜯어 오물오물 씹으며 시리스가 눈을 흘겼다. 레펜하르트와 함께 식사하려고 기다렸던 터라 그녀도 아직 아침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창밖의 태양 위치를 살피며 레펜하르트는 머쓱해했다.

확실히 너무 늦잠을 자긴 잤다. 지금 먹는 이 식사를 아침이라고 해야 하나, 점심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마법사답게 입만 산 레펜하르트가 중얼중얼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어기 할라인 왕국에선 브런치라고 해서 이런 식의 식사 문화가 최첨단 유행이라는데…….”

“밥 하나 제때 못 챙겨 먹는 게 무슨 최첨단 유행? 자신의 게으름에 유행 핑계 대지 말아요!”

뾰족한 시리스의 말투에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움츠리고 열심히 돼지 다리를 뜯었다.

‘역시 너무 놀았나?’

확실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 며칠간 너무 나태하게 보내긴 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한가한 시간인 데다가, 드디어 뭔가 이루어 냈다는 기쁨으로 긴장이 풀어진 탓이었다.

“하긴, 슬슬 이곳도 안정이 된 것 같으니 움직일 때가 되긴 됐네.”

빵 덩이 하나를 통째로 꿀떡 삼키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슬슬 푸른 곰 부족도 이곳으로의 이주를 끝내고 새롭게 부락을 세웠다. 렐하드가 데리고 온 단하임 일족의 전사들도 숲 여기저기를 탐색해 쓸 만한 마을 자리를 선정했다. 원래 이곳에 살던 드워프들도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터전을 꾸리고 있다.

혹시나 예상 못 한 사건이 터질까 싶어 그동안 백왕성에 붙어 있던 레펜하르트였지만, 다행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돌아갈 것이다.

시리스가 희석한 와인을 따라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움직여요? 어디로요?”

“엘븐 포레스트에 심을 세계수의 파편을 찾으러 가야지. 지금 제일 가까운 데 있는 것이면 역시 창천蒼天의 지팡이, 제룬팅이겠군.”

“제룬팅? 마궁 니힐렌 같은 건가요?”

“비슷해. 그 역시 엘븐하임의 잔재로 세계수의 정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유물이거든.”

“마궁 니힐렌이라…….”

문득 시리스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 참 좋긴 좋았는데…….”

화살 재고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위력 조절도 자유자재인 데다가 휴대성도 끝내주는 마궁 니힐렌은 실로 시리스의 입맛에 딱 맞는 무기였다. 그런 좋은 활을 그녀는 몇 번 쏴 보지도 못하고 반납(?)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엘프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게 되었으니 불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간간히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대꾸했다.

“미안, 나중에 비슷한 걸로 하나 만들어 줄게.”

“엥? 레펜하르트 님이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어요?”

놀란 시리스의 눈빛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레 말했다.

“마력만 받쳐 주면 어려울 것도 없어. 날 뭐로 보는 거야, 시리스? 이래 봬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10서클 마법사라고.”

“영 그렇게 보이진 않는걸요, 흥…….”

시리스가 구시렁대면서도 희망 섞인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는 미소 지었다. 전생의 비밀을 공유하는 그녀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상대와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그런 의미에서 마력도 좀 올려야겠는데…….”

자신의 두꺼운 팔뚝과 허벅지를 번갈아 보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하여튼 이놈의 육체는 정말 마법이랑은 담을 쌓아서.”

그동안 레펜하르트가 탱자탱자 놀았던 이유 중에는 이것도 있었다. 열심히 명상하고 또 명상을 해 댔지만 이 테스론의 육체는 도통 마력이 오를 기미가 안 보였다. 지저 태양 마그림으로 마력 체질을 싹 개조했는데도 이렇다. 그러다 보니 결국 지쳐서 퍼져 버린 것이다.

“아직 7서클의 관문도 못 뚫고 있으니, 원…….”

사실 지금 정도면 평범한 마법사보다는 월등히 마력이 잘 쌓이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전생에 마법과 고속도로를 뚫은 몸이었던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좀 더 힘을 키워야 해.”

레펜하르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상황이 잘 풀리고 있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될 리는 없으니까.”

확실히 지금까지는 그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종족들을 규합하고, 인간과 손을 잡고, 이 땅을 받아 새로운 안타레스 제국을 세울 기틀까지 훌륭히 마련했다.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잘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레펜하르트가 행했던 일들은, 비유하자면 상대의 패를 몽땅 보면서 도박을 한 것과 같다. 이쪽은 전생의 정보에 따라 대부분의 일들을 예측할 수 있는데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느니 승승장구하는 것도 당연했다. 프로 도박사가 상대의 패를 훔쳐보며 초짜의 돈을 따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제 이종족들의 힘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종족 전사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도 알려져 버렸다. 이제 인간들도 이종족들을 상대할 때 지금처럼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의미다.

레펜하르트가 싸워야 할 상대는 단순한 세력이나 국가가 아니다. 그는 이 시대, 자체와 싸워야 한다. 전생에서처럼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마법의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룬팅 챙기러 가는 김에 거기서 마력 높은 유물들도 좀 거두어야겠어. 통 진도가 안 나가니 마나 드레인으로라도 마력을 올려야지.”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으며 시리스에게 말했다.

“다들 불러 줄래? 말 나온 김에 오늘 출발해야겠다. 틸라는 카르사스 감시 임무 때문에 못 데려가겠지만, 나머지는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안 그래도 데굴거리는 꼴 보기 싫었던 참이다. 시리스가 좋아하며 몸을 일으켰다.

“행선지를 어디라고 해요?”

“세텔라드 산맥 남서쪽, 마토스 산악 지대. 거기에 제룬팅이 있는 던전 켈테가 있어. 다이만 터미널을 통해서 가면 일주일 정도면 도착할 거야.”

3

체타스 남작령, 글루텐 산맥과 라키디 산맥 사이에 위치한 이 영지는 크로방스 왕국과 바실리 왕국을 잇는 교역로가 관통하는 곳이었다. 그 교역로 위에 위치한 자루드 시, 수많은 상단이 오고 가는 교역 도시의 한 여관에서 거친 사내의 노성이 들리고 있었다.

“뭐? 지금 그곳에 없다고?”

사내 앞에 선 로브 차림의 여인이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대, 테스론.”

여인, 마법사 필레나의 말에 테이블에 앉은 검은 머리의 미청년, 테스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끄응…….”

그라임 왕국을 출발한 지 스무 날째, 테스론과 그의 일행은 일단 교역 도시 자루드에서 머물며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안타레스 백국이 주로 거래하는 타오반 상회는 반드시 이 자루드를 경유했기에 백국 내의 정보를 얻기에는 최선의 장소였다. 그런데 타오반 상회의 상인과 접촉한 필레나가 생각도 못한 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상인의 말에 따르면, 할 일이 있어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울 거라며 사흘 전에 백왕성을 떠났대.”

“간발의 차로 놓쳐 버렸군.”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사내, 유서스와 스테반도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렸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상대가 없다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는 실로 허탈한 일이었다.

“어디로 갔다든가 하는 말은 없었나?”

테스론의 질문에 필레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상인들도 그런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던데?”

“하긴, 굳이 알려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긴 하군.”

상인들 입장에서는 그저 제 때 물건 넘기고 돈만 받으면 만족스러운 거래다. 굳이 상대의 행보까지 물어볼 이유가 없겠지.

“어쩌지, 테스론?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할까?”

“달리 방법이 없군. 하지만 한 달이라…… 너무 긴데.”

테스론이 난처해하며 중얼거렸다. 스테반이 술잔을 거칠게 들이켠 뒤 흥분해 외쳤다.

“빌어먹을! 레펜하르트 그 개새끼를 드디어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때였다. 화장실이라도 갔다 왔는지 테스론네 테이블 곁을 지나던 중년인 하나가 스테반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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