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진정한 왕
1
레단트 회전에서 대패한 카르사스는 패잔병 삼천에 왕도 수비군 이천을 합친 병력으로 수성전 준비에 들어갔다. 왕도 전체에 계엄령을 내리고 병력을 재편하고 왕도 수비 상태를 정비하며 그는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냉철하게 전력을 재정비해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중립을 표방했던 귀족들이 대거 병력을 동원한 덕에 현재 유벨 왕자군의 전력은 일만에 육박했다. 카르사스의 인기 덕에 아직 병사들의 동요는 적은 편이었지만 민심은 달랐다. 이미 왕도의 시민들은 이미 유벨 왕자가 다음 국왕이 될 것이라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레단트 회전 사흘 뒤, 일만의 유벨 왕자군은 위풍당당하게 왕도로 진군했다. 왕도 크로틴은 삼중 구조로 세워진 도시. 제일 외곽에 시 전체를 두르는 성벽이 있고 안쪽에 왕성을 감싸는 외곽, 그리고 중심부에 왕궁을 방어하는 내곽 성벽이 세워져 있다. 왕도 남쪽에 진을 친 유벨 왕자군이 목소리 큰 병사들을 앞세워 고함을 질렀다.
“반역자 카르사스는 하늘의 뜻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았다! 이제 진정한 국왕 앞에 무릎 꿇고 문을 열어라!”
마법으로 증폭된 외침이 성벽 전체를 뒤흔든다. 이내 성벽 위에서 기사 한 명이 나타나 마주 소리쳤다.
“헛소리! 저 괴물들이 무슨 하늘의 뜻이란 말이냐! 유벨 왕자는 악마와 손을 잡았다! 이는 크로방스 왕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유벨 왕자야말로 지금 당장 병력을 해체하고 왕실의 명예를 더럽힌 죗값을 받아야 할 터이다!”
이어 마법으로 증폭된 욕설이 서로에게 오갔다. 본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어차피 싸울 건데 참 말들도 많아요들.”
하지만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서 그가 마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저렇게 상대가 소리칠 때 별 헛짓 다 한다 싶어 대뜸 마법으로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레펜하르트 딴에는 마법사답게 그냥 쓸데없는 허식 빼고 얼른 본론 들어가자는 합리성에 기반한 행위였다. 그런데 그게 상대방 입장에서는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괴물 같은 존재로 느껴진 것이다.
“같은 실수 또 할 수는 없지. 안 그래도 파격이란 파격 다 저질러야 할 처지인데, 맞출 수 있는 건 최대한 맞춰 가면서 싸워야지, 음.”
이윽고 화려한 갑옷을 걸친 유벨 왕자가 진형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우렁찬 외침으로 개전을 선언했다.
“용사들아! 진정한 왕을 위해 그대들의 용맹을 떨쳐라!”
☆ ☆ ☆
“오오오오오!”
함성과 함께 사다리며, 갈고리 달린 밧줄을 든 보병들이 기세등등하게 성벽으로 달려갔다. 카르사스군에서도 북 소리가 울리며 지휘관들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제자리를 지켜라! 궁사대! 일제사격 개시!”
보병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궁사들이 일제히 활을 당겼다. 무수한 화살들이 죽음의 비가 되어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보병 선두에 선 고참병이 고함을 질렀다.
“전원! 방패 들어!”
방패 위로 화살들이 푹푹 박혀 간다. 개중엔 미처 막지 못한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모습도 보인다. 유벨 왕자군 측에서도 궁사대가 마주 응전했다. 화살비가 성벽으로 날아가며 카르사스군의 머리 위를 장악한다.
“화살이다!”
“성벽 뒤로 숨어!”
“후열 부대! 방패로 동료를 엄호해라!”
화살비로 인해 잠시 성벽 위의 공세가 주춤해진 틈을 타 보병들이 성벽 아래로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다들 열심히 사다리를 놓고 갈고리 밧줄을 던져 댔다.
하지만 역시 카르사스군의 훈련도는 높았다. 화살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다들 U자형 장대로 사다리를 밀고 창칼로 밧줄을 잘라 가며 방어에 열심이었다. 결코 쉽게 성벽을 내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러나 유벨 왕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보병들의 공성전은 미끼였을 뿐, 진짜 전력은 따로 있었으니까.
유벨 왕자가 다시 손짓을 했다. 푸른 깃발이 번쩍 올라가 신호를 보냈다.
“부탁합니다! 여러분!”
왕자답지 않은 정중한 말투,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탓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제부터 등장할 이들은 모두 그런 대접을 받기에 충분했으니까!
“으하하! 가자! 마누라!”
호쾌한 외침과 함께 다이어울프를 탄 거구의 오크가 대검을 뽑아 들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을 꿰뚫으며 찬란한 빛을 발했다. 스탈라도 유쾌한 듯 마주 고함을 지르며 다이어울프를 몰았다.
“안 그래도 가고 있수! 남편!”
세 드워프 오러 유저들도 저마다 찬란한 빛을 뿌리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다들 노획한 준마 위에 그 짧은 몸통을 얹고 용맹무쌍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우, 이거 멀미 나는데, 말로이드?”
“이거 계속 타고 가야 되오?”
“말 타고 가야 폼 난대요. 그냥 좀 타고 가소!”
뭐, 대화는 그리 용맹해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블레이드 오러 휘두르고 있는 시점에서 용맹은 충분해 보인다. 기마술 자체는 어설펐지만 오러 유저의 균형 감각은 일반인의 그것을 아득히 상회한다. 다들 처음 타 보는 말 위에서도 용케 떨어지지 않고 성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들 잘 타시면서 왜 그럽니까? 하하핫!”
푸른 오러를 안개처럼 피우며 러스도 말을 몰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풀 플레이트 차림으로 완벽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로 천상에서 내려온 장수 같은 기세로 러스가 남문을 향해 돌격했다.
“오러 능력자들이시다!”
“사이러스! 사이러스!”
“오오오!”
함성과 함께 눈부신 여섯 섬광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러스와 이종족 오러 유저들이 일제히 성벽을 향해 돌진을 시작한 것이다.
“젠장! 역시 저렇게 나오는군!”
성벽 위 보루에서 지휘하고 있던 카르사스가 인상을 썼다. 결국 유벨 왕자군이 오러 능력자를 꺼냈다. 자신 역시 똑같이 했을 것이기에 당연히 상대의 전법도 예측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갈며 카르사스가 고함을 질렀다.
“화살을 쏴라! 저 악마들을 맞추는 자에게 금화 백 닢을 내리겠다!”
화살 비가 여섯 섬광을 향해 쏟아졌다. 칼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뭇가지에 깃털 달았다고 매의 발톱이 되느냐? 가소롭도다!”
2미터짜리 대검이 거대한 빛의 원을 머리 위로 그린다.
우우우웅!
녹색 오러가 하늘 위로 뿜어져 나가며 날아드는 화살들을 모조리 쳐 내 버린다.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박살난 화살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다른 오러 유저들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화살 정도로는 결코 저들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투, 투창을 던져라!”
지휘관 중 하나가 덜덜 떨며 고함을 질렀다. 투창은 화살과 달리 두꺼운 기사들의 갑옷도 뚫을 수 있기에 수성전을 벌일 때 유용하게 쓰이는 무기다. 하지만 역시 소용은 없었다.
“화살 좀 두꺼워졌다고 뭐가 달라지나? 허허허!”
슬로이틀이 망치를 번쩍 들어 올리며 오러를 크게 펼쳤다. 섬광이 회오리치며 거대한 빛의 장막이 되어 투창들을 모조리 쳐 냈다. 이들 입장에서는 화살이나 투창이나 그게 그것이다. 솔직히 투창이 큰 만큼 도리어 막기도 쉽다.
단숨에 전장을 돌파한 러스가 두꺼운 성문을 바라보며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아앗!”
말을 몰며 러스가 롱 소드를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점점 더 응집되며 거대해진다.
“저, 저건!”
거의 10여 미터에 달하는, 숫제 빛의 기둥이 되어 버린 오러를 보고 카르사스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스피리어스 경의 기간틱 블레이드가 아닌가!”
지금 러스가 선보이는 저 기술은, 전신의 오러를 계속 응축해 오로지 순수한 파괴력만으로 바꾸는 스피리어스의 절기였다. 카르사스를 호위하던 스피리어스 경이 기막혀하며 이를 갈았다.
“저! 저놈! 저놈이 남의 기술을!”
스피리어스 경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저거 익히느라 2년이 넘게 걸렸는데! 무수한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며 겨우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기술인데! 그걸 한번 보고 베꼈단 말인가?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타아앗!”
우렁찬 기합을 터트리며 러스가 검을 내리쳤다. 허공을 꿰뚫은 빛의 기둥이 무너지며 성문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폭음이 울리며 성벽 전체가 흔들렸다. 단 일격에 마법으로 강화된 두꺼운 성문이 박살이 나며 파편이 날렸다. 파편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테이블 이상의 크기였다. 날려간 파편이 집이며 벽을 강타해 대참사가 일어났다.
“으아악!”
“커어억!”
폭발에 휩쓸린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러스가 이번엔 오러의 기둥을 가로로 휘둘렀다. 빛의 기둥이 목책과 병사들을 쓸어 가며 대지를 파헤쳤다. 흙먼지가 일며 피와 비명이 아우성친다. 단 일격으로 거의 20미터 가까운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든 러스를 보며 병사들 모두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악!”
“도망쳐!”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잖아!”
성벽 밑으로까지 달려간 칼켄이 러스의 활약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 카루가 러스! 제법 호쾌하게 한 방 날렸구먼! 그럼 어디 나도…….”
칼켄이 다이어울프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아우우우우!
칼켄의 애랑, 푸른 번개가 길게 울부짖으며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단숨에 성벽의 절반 높이까지 뛰어오르자 칼켄이 대뜸 성벽에 대검을 찔러 댔다.
“좀 높지? 이거 밟아라!”
마치 치즈라도 된 것처럼, 대검이 성벽에 쑤욱 박힌다. 다이어울프가 그 대검을 밟고 재차 점프했다. 날아오르며 칼켄이 손가락질을 하자 대검이 알아서 뽑히며 허공을 날아 그에게로 돌아갔다.
거대한 늑대와 거대한 오크가 성벽 위를 가득 장악한다. 태양을 등진 두 괴물의 그림자가 병사들의 머리 위로 길게 드리운다.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칼켄이 히죽 웃었다.
“자, 나도 뭔가 좀 보여 볼까!”
대검이 허공을 찔렀다. 찬란한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파괴의 힘을 담아 일렁인다. 칼켄이 검을 내리쳤다.
“벼락 떨구기!”
녹색 벼락이 성벽을 후려갈겼다. 대기가 찢어지며 처절한 뇌성의 비명을 터트린다.
우르르릉!
섬광이 성벽을 관통하고 대지까지 파괴의 여파를 꿰뚫었다. 성벽 전체가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폭발을 일으켰다. 누런 흙먼지 사이로 박살 난 성벽의 잔해가 확연히 드러냈다. 수백 년간 왕도를 수호했던 그 굳건한 성벽이 지금 생일 만난 케이크처럼 서걱서걱 잘도 베여 버린 것이다. 투석기를 일제히 발사해도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이것이 오러 능력자의 힘인가…….”
애써 성벽 아래까지 말을 몬 드워프 오러 유저들 역시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말을 버린 그들은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성벽을 타고 올라 여기저기를 오러로 신 나게 두들기는 중이었다.
오러 실린 망치며 도끼가 성벽을 때릴 때마다 성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굳이 병사들을 노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다들 도망가거나, 무너진 성벽에 깔려 생매장되어 죽어 가고 있었다.
“다들 잘하네.”
다른 오러 유저들을 보며 스탈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번 전투에 참가하기 전, 레펜하르트가 그들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이 저것이었다.
-되도록 화끈하게!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성벽을 무너트려 주십시오. 굳이 병사들을 노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성벽만 무너트리세요.
전생에서 성벽 무너트리기로 짭짤하게 재미를 본 레펜하르트가 그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한 것이다. 뭐, 굳이 병사들을 안 노려도 이미 인명 피해는 세 자릿수를 넘기고 있었다. 스탈라가 성벽을 바라보며 잠깐 인상을 썼다.
‘음, 난 어쩔까나…….’
애초에 무식하게 힘만 추구하는 칼켄, 대지 공명의 힘을 쓰는 드워프들, 남의 기술 잘도 빼먹는 러스라면 모를까 사실 보통 오러 유저들은 저렇게 성벽을 무너트릴 정도로 엄청난 기술은 잘 쓰지 않는다. 쓸 재주도 보통은 없고, 쓸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 잡는 데 저런 파괴력만 무식하게 높고 피하기는 쉬운 기술을 연마할 이유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아까운 성벽을 왜 굳이 부수겠는가? 오러 유저라면 그냥 성벽 위로 날아올라서 근처 병사들 싹 죽이고 그 지역을 점거해 버릴 수 있는데.
‘하지만 남들 다 하는데 나만 못한다고 하긴 또 쪽팔린데.’
스탈라의 실력이 저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오러를 운용하는 방식에서, 그녀는 무식한 파괴력보다는 섬세함과 정확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현 시대의 대다수 오러 유저들이 그렇듯이.
잠깐 고민하던 스탈라가 문득 눈을 빛냈다. 생각해 보니 방법이 있었다. 그녀가 차갑게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가라! 나의 열두 자매여!”
오러를 머금은 열두 단검이 섬광이 되어 발사되었다. 그 기세만으로도 대기가 갈라지며 폭풍을 일으켜 바닥을 파헤친다. 열두 줄기 섬광이 대지를 파헤치고 허공을 갈라 성벽 여기저기에 틀어박혔다.
쾅쾅쾅쾅!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성벽 여기저기가 흔들렸다. 스탈라가 그 상태로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울부짖어라! 나의 자매들!”
우우우웅!
성벽에 박힌 단검들이 일제히 귀곡성을 울리며 흔들린다. 단검에 실린 오러가 서로 공명하며 성벽 전체를 뒤흔들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성벽뿐 아니라 근처 대지,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카르사스의 보루까지도 요동을 쳤다.
“으윽!”
“이건 또 뭔가!”
스피리어스가 욕설을 흘리며 카르사스를 부축할 때였다. 갑자기 성벽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우르르르릉!
성벽 여기저기 박힌 스탈라의 단검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성벽의 구조 자체를 무너트린 것이다. 거의 100여 미터에 달하는 그 넓은 성벽이 일제히 붕괴하며 누런 뭉게구름을 피워 올렸다. 스탈라 혼자서, 다른 오러 유저들 전원이 일으킨 것만큼의 파괴를 보인 것이다.
칼켄이 조금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헐? 마누라가 저런 것도 할 줄 알았어?”
드워프들도 입을 동그랗게 말고 감탄을 터트렸다.
“오, 저 파괴 공법 신선하다.”
“그러게, 오크들도 건축학에 재능이 있나?”
“저 아줌마 나중에 건물 철거할 때 부르면 되게 좋겠다.”
그리고 러스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싸, 또 하나 건졌다. 저건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할 수 있겠는데?”
여섯 오러 유저들의 만행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왕도 크로틴의 남쪽 성벽은 더 이상 성벽이 아니게 되었다. 카르사스가 암담해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렇게 나올 줄이야.”
성문이 부서졌다거나, 성벽이 점거되었다거나 하면 그에 상대할 전법이 있다. 하지만 아예 성벽을 통째로 무너트려 버리니 대책이 없다. 스피리어스 경이 이를 갈았다.
“죄송합니다. 한두 놈이면 제가 어떻게 상대해 보겠습니다만…….”
스피리어스 경은 현재 카르사스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만약 저 오러 유저들이 카르사스의 목숨을 노린다면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카르사스가 혀를 차며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 어떻게든 수성전을 피하려 한 것이거늘…….”
평야에서 회전會戰 형태로 전투를 벌인다면 오러 유저의 숫자가 부족해도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전투 내내 전신 방어에 오러를 집중시킬 수는 없다. 육체를 그토록 무식하게 단련하는 집단은 대륙이 넓다 해도 짐 언브레이커블 하나뿐, 보통 오러 유저들은 집중력이 흐트러진다거나 피로가 쌓이면 눈먼 화살이나 검에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해전술로 밀고 나가면 일반 기사들도 오러 유저를 해치울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 막대한 피해가 나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공성전 형태를 취하면 대책이 없다. 일단 다수로 밀어붙일 수도 없고, 오러 유저의 운동 능력으로 건물과 엄폐물 사이를 오가면 화살도 별 쓸모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왕궁으로 후퇴합시다.”
“그래야겠군…….”
스피리어스 경의 제안에 카르사스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이 완전히 무너졌으니 수성전이고 뭐고 없었다. 잽싸게 왕성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때, 놀랍게도 오러 유저들과 유벨 왕자군이 일제히 물러났다.
“응?”
“어째서 다 이긴 싸움을 스스로 물리는 거지?”
의아해하는 카르사스군을 뒤로한 채 유벨 왕자군이 본진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다시 전령이 나와 소리쳤다.
“반역자여! 그대의 목숨은 이미 유벨 왕자님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 우리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대로 왕성까지 진격할 수 있음을 이미 느꼈을 터!”
카르사스는 할 말이 없었다. 저쪽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 복잡한 왕궁으로 후퇴하면 오러 유저들이 더더욱 설칠 수 있는 자리만 마련해 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국왕으로서 어찌 왕도의 시민들을 위험에 빠트리겠는가? 그대가 진정 저들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스스로 백기를 올리고 굴복하여 심판을 받을지어다!”
카르사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렇게 나오다니…….”
유벨 왕자는 단순히 승리뿐이 아니라 카르사스가 가졌던 인기마저도 모조리 빼앗을 셈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카르사스는 왕도의 시민을 인질로 삼는 것이 되어 버린다.
물론 카르사스도 시민을 인질삼아 농성하는 걸 생각 안 해 보진 않았지만, 유벨 왕자의 성품상 시민들의 안전 따위는 별로 신경 쓸 것 같지 않아 작전을 폐기했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자기들이 시민을 인질삼아 카르사스를 협박하고 있다.
‘대체 어떤 악랄한 인간이 이런 수법을 생각해 낸 것인가?’
‘카르사스 성품상, 저런 소리 듣고도 수성전을 벌일 인물은 못 되지.’
악랄한 인간, 레펜하르트는 박살 난 크로틴 성벽을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이미 카르사스의 성격을 모두 알고 있기에 일부러 이런 작전으로 나온 레펜하르트였다. 이렇게 하면 피해도 줄일 뿐 아니라 유벨 왕자의 인기도 상당히 올라가는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백성의 피해를 먼저 생각하는 왕자!
이 정도면 그동안 떨어졌던 유벨 왕자의 평판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레펜하르트 공은 진정 현자인 것 같소. 카르사스의 성격상 저런 소리 듣고도 계속 성안에 틀어박혀 있지는 못할 터, 아무래도 이 전쟁은 내 승리인 것 같구려.”
유벨 왕자가 레펜하르트의 현명함을 칭찬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딱히 그가 전략, 전술에 뛰어나다기보다는 전생의 정보를 써먹었을 뿐이니 머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오닌 백작도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일단 지드린 자작의 저택으로 돌아갑시다. 이 정도 힘의 차이를 보았으니 저들도 곧 항복할 터, 굳이 이 이상의 피를 흘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게 유벨 왕자군은 절망에 빠진 카르사스를 뒤로한 채, 당당히 깃발을 올리고 왕도에서 물러났다.
완벽한 승리였다.
2
왕도 크로틴의 왕성 내 집무실.
한때 국왕이 왕국의 업무를 보았던 그곳에서 지금 여러 귀족들이 하나같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올해로 50세가 되는 건장한 장년인, 페르난도 공작이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어찌 생각하시오, 카르사스 공자? 지금 우리에게 승기를 잡을 방법이 있겠소?”
페르난도 공작은 아들인 카르사스에게도 반공대의 어법을 쓰고 있었다. 왕위 계승자다운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마주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 브로젠 후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허, 난 모르겠소. 저 비천한 것들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이 오러 유저다운 힘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잖소?”
다들 성벽을 박살 낸 이종족 오러 유저들의 힘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유능한 기사이며 지휘관이었지만 그 공포스러운 위업 앞에서 머리가 제대로 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머리가 아직도 제대로 도는 카르사스조차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전력이 나온 것인지…….”
여섯 명의 오러 유저라면 그냥 일국의 전력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놀라운 기책을 낸다 해도 통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귀족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타진했다.
“저들은 오만한 것인지 왕도 크로틴을 포위하지도 않고 물러났습니다. 일단 여기서 후퇴해 후일을 도모함이 어떠한지…….”
카르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저들은 이미 인장과 왕관을 가지고 있어요. 신성한 홀을 빼앗기는 순간 유벨 왕자는 즉위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왕도를 빼앗기는 그 순간이 바로 패배를 의미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저들도 그걸 알고 안심하고 물러선 것이겠지요.”
“그건 저도 알지만, 그렇다고 현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일단 물러나서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한편 차탄 공국이나 바실리 왕국에 도움을 청하면…….”
카르사스가 일견의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랬다간 타국의 참전을 허용해 버리는 것, 우리가 이긴다 해도 크로방스 왕국은 몰락하게 될 겁니다.”
유구한 크로방스 왕국의 역사에 타국의 간섭을 허용하는 우를 범할 수는 없다. 그러자 의견을 꺼낸 귀족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하지만 안 그러면 카르사스 님이 몰락하실 겁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카르사스는 그 속에 담긴 진의를 금세 읽어 냈다.
‘정확히는 자신들이 몰락할 거란 소리겠지.’
나라를 팔아서라도 자신의 안위를 챙기겠다는 그 말에 경멸조차 느껴진다. 카르사스의 표정에 귀족이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은근 그 생각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외조부조차도!
“후우…….”
카르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언정 크로방스 왕국을 다른 나라에 팔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세력들은 다른 것이다.
그때 브로젠 후작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시 그 더러운 왕자를 암살했어야 해.”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 않습니까?”
카르사스 군은 이미 수차례나 유벨 왕자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왕국을 내전으로 몰아넣는 것보다는 희생이 덜하기에 카르사스도 그것에 대해서는 별 반감이 없었다.
하지만 암살 시도는 죄다 실패했다. 유벨 곁에 있는 피니아가 모두 가로막은 덕이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피니아는 아무리 신분을 숨기고 접근을 해도 암살자를 귀신같이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암살자에게 처음부터 성에 잠입, 가로막는 경비들을 해치워 가며 유벨 왕자를 죽이라고 명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야 이름난 암살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에게 접근해 슥 죽이고 바람처럼 떠나가는 줄 알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다. 애초에 암살자가 그 정도 실력이 있으면 뭐하러 암살자 노릇을 하겠는가? 그냥 아무데나 가도 기사 자리 하나쯤은 꿰찰 수 있을 텐데.
“그 정도 실력이 되고 또 믿을 수 있는 자라면 역시…….”
귀족들이 일제히 스피리어스 경을 바라보았다. 단신으로 몸을 숨기고 잠입해 유벨 왕자의 목을 따 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역시 오러 유저인 그밖에 없었다.
페르난도 공작이 간청하며 물었다.
“스피리어스 경, 정녕 안 되겠소?”
안 그래도 예전부터 스피리어스에게 은근 이런 요구를 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스피리어스는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아무리 패악무도한 자라 하나 폐하의 피를 이은 자입니다. 기사로서 그런 불충을 저지를 순 없습니다.”
귀족들이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고지식하게 구는 스피리어스 경에 대한 비난이 섞인 한숨이었다.
그때 스피리어스 경이 표정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암살이란 면에서는 동감입니다.”
“음?”
카르사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피리어스 경이 눈을 빛냈다.
“유벨 왕자가 아니라, 그 정체 모를 마법사 레펜하르트를 암살합시다.”
어떤 사소한 정보라도 전부 수집하라 명했던 카르사스였다. 저 정체불명의 이종족들을 이끌고 온 것이 레펜하르트란 사실쯤은 전해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저 노예들은 그 마법사에 의해 저렇게 날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를 해치우면 저들도 다시 온순한 본성을 되찾을 것입니다.”
카르사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그럴까?’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냥 마법으로 탄생했다고?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가 본 저 이종족들은 결코 조종당하는 이들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 보는 안목만큼은 자신 있는 카르사스였다. 저들 모두가 확실하게 자기 의지로 결정하고 이 전투에 참가하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모두들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그것 묘안이오!”
“저 괴상한 것들만 사라지면 희망이 있지!”
“저것들 때문에 상황이 이리 된 것이니!”
잠깐 고민했지만 카르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시도해서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정말 마법사를 죽여 이종족들이 얌전해지면 더 바랄 나위가 없고, 만약 실패한다 해도 지금 상황은 더 나빠질 것도 없는 것이다.
단지 걱정되는 것이라곤…….
“하지만 혹시 스피리어스 경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
카르사스는 스피리어스가 전장의 기사가 아닌, 암살자로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스피리어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르사스 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암살에 실패하더라도 제 한 몸 빠져나올 실력은 됩니다.”
그때 브로젠 후작이 다른 걱정을 꺼냈다.
“하지만 스피리어스 경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저쪽에서 암살을 노리면?”
스피리어스는 오러 유저가 카르사스 암살을 노릴 것을 대비해 계속 그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저쪽에서 암살을 노린다면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스피리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지키고 있어도 오러 유저가 둘 이상 쳐들어오면 암살을 못 막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으음…….”
러스에게 패한 것이야 실수라고 우겨도, 상대는 오러 유저가 여섯이나 있다. 저쪽이 작정하고 암살을 시도하면 스피리어스가 곁에 있건 없건 카르사스는 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군요, 내 목은 이미 반쯤 떨어져 있는 거였군.”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스피리어스 경, 죄송스럽지만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스피리어스가 각오를 다지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결코 카르사스 님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 ☆
핸드릭 백작 성을 떠난 유벨 왕자군은 현재, 왕도 외곽에 위치한 지드린 자작의 별장에 숙영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지드린 자작의 별장 저택은 왕도 인근에 위치하고 주변에 막사를 설치할 넓은 지대가 있으며 숲과 샘도 가까워 숙영지를 설치하기에 최고의 조건이었다.
그날 저녁, 유벨 왕자는 승전 축하연을 열었다. 모든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가 주어졌고 귀족과 기사들도 지드린 자작의 저택에 모여 화려한―하지만 귀족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조촐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연회부터 여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도 다 필요한 행위였다. 지금 유벨 왕자군은 중립 귀족들이 대거 참가해 거의 일만에 가까운 병력이 되어 있었다. 기존의 세력들과 저 중립 귀족들 간의 화합을 위해서도 이런 형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상석에 앉은 유벨이 벌떡 일어나 황금 술잔을 들고 외쳤다.
“크로방스 왕국의 미래를 위해 뜻을 함께해 준 그대들을 치하합니다! 오늘의 승리는 모두 그대들 덕분이니,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테이블에 앉은 귀족과 기사들이 일제히 잔을 들어 화답했다.
“진정한 왕을 위하여!”
곧바로 은 식기에 담긴 푸짐한 술과 고기가 이어졌다. 하인들이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하녀들이 테이블을 오가며 시중을 든다. 전쟁 중의 연회이니 무도회 같은 우아한 분위기는 아니다. 다들 갑옷을 걸친 채 술과 음식을 즐기는 전장의 잔치였다.
단숨에 연회장이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리에 앉으며 유벨이 곁의 레펜하르트에게 중얼거렸다.
“말은 이렇게 했다만, 솔직히 저들이 뭘 했다고 치하하는지 참…….”
이미 유벨 왕자군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된 레펜하르트는 당당히 왕자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레펜하르트도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대꾸했다.
“……한 게 없으니까 더더욱 치하해야 하는 겁니다.”
정말로 오늘의 전투에서 저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한 것은 거의 없다. 귀족들은 미끼 역할을 한 보병들을 차출한 것이 전부고, 기사들은 그냥 말 타고 서 있다가 돌아온 것이 전부다. 실제 전투는 오러 유저들이 전부 도맡아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런 요식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저들에게도 공을 돌려놓아야 이종족들에게 가는 시기와 질투가 줄어들 것이기에.
레펜하르트는 태연하게 잔을 들며 이번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전투에서 빛을 발한 이들만을 찬양하지만 현명한 이들이라면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법이지요. 저의 동맹들이 강렬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그 뒤에 용맹한 기사들과 귀족 여러분의 병력이 위풍당당하게 포진해 있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있기에 진정 저 반역자들에게 위압을 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다들 들으라고 대놓고 큰 소리로 뱉은 말이었다. 술을 마시고 있던 귀족이며 기사들이 반색을 하며 떠들어 댔다.
“레펜하르트 공께서 저희를 이리 띄워 주시니 부끄럽군요! 하하하!”
“그렇지! 어리석은 자들과 달리 레펜하르트 공은 전쟁에 대해 잘 알고 계시구려!”
“범인은 보지 못하는 곳을 확연히 보고 있으니 과연 현자시오! 하하하!”
귀족이며 기사들도 사실은 이 축하연에 대해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 일이 없다는 것은 자신들이 더 잘 아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공을 내세워 모두를 찍어 눌러도 솔직히 할 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는 속 시원하게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자신들 역시 전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받았다. 한층 홀가분해진 얼굴로 귀족이며 기사들이 잔치를 즐기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한층 호감도가 올라갔음은 물론이다.
분위기가 바뀌는 걸 보며 유벨이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마법사라고만 듣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감각도 훌륭하지 않은가? 안 그래도 그의 존재로 인해 꺼림칙해하는 귀족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표정들을 보니 다들 불만이 상당히 사라진 모습이다.
‘헤에, 이건 진짜 배워야겠네.’
유벨의 왼쪽에 앉은 페오닌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레펜하르트 공은 젊은 나이임에도 사람 대하는 법이 능숙하군. 이 페오닌, 진심으로 감복했소. 허허허!”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술잔을 마주 들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별로 젊지도 않거든?’
전생에 황제씩이나 해먹던 몸이다. 뭐, 어지간한 것은 마법으로 눌러버리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사람 마음이란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건 이종족이건 사람 마음이란 건 다 거기서 거기다. 문화와 풍습이 아무리 달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리 변하지 않는다.
‘남 잘되는 것 보고 배 아파하는 건 다 똑같지, 뭐.’
술잔을 홀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연회장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인간들 말고도 오크와 드워프, 엘프들의 우두머리급도 연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오크 측에서는 칼켄과 스탈라, 무기아비인 그랄타가 인간들 사이에서 고기를 뜯는 중이었고 드워프들은 세 오러 유저가, 엘프 측에선 단하임 일족의 족장인 렐하드가 부관으로 보이는 남자 엘프를 대동한 채 우아한 태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간도 이종족들도 모두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거리를 둔 상태였다.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어린 성자, 실란이었다.
“칼켄 공, 이분은 크로방스 왕국에서도 명성 높으신 할튼 자작이십니다. 할튼 자작, 푸른 곰 부족의 족장이신 칼켄 공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칼켄 공. 할튼입니다.”
“나도 반갑소, 할튼 자작. 칼켄이라 하오.”
현재 칼켄은 대단히 유창한 공용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목에 걸려 있는 마법기, ‘의사 전달의 목걸이’ 덕분이었다. 수준 높은 번역 주문이 걸려 있는 이 마법의 목걸이는 레펜하르트가 전쟁 틈틈이 짬을 내 만든 것으로, 오크어를 거의 완벽하게 공용어로 바꾸어 주었다.
레페하르트는 언어라는 것이 상대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인간과 접촉이 많은 고위 계급 오크들에게는 빠짐없이 저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마력과 재료, 시간이 모자라 칼켄과 스탈라, 그랄타에게만 선물했지만…….
‘여건이 되면 빨리 대량 생산해서 적어도 오크 전사들에게는 하나씩 걸어 줘야지.’
그리고 인간 귀족들은 난생 처음 ‘유식한’ 오크를 만나 컬처 쇼크에 빠져 있었다.
“고, 공용어에 능숙하시군요.”
“레펜하르트 형제가 좋은 선물을 했지. 말이 제대로 통하니 나도 즐겁다오. 허허…….”
“귀공의 부하들은 오크답지 않게 굉장히 용맹하더군요.”
오크답지 않다는 소리에 칼켄이 막 인상을 찌푸리려는 찰나였다. 스탈라가 잽싸게 끼어들어 말을 받았다.
“호호, 그것이야말로 진정 오크다운 모습이랍니다. 우리들은 전사를 숭상하고 비겁자를 경멸하지요. 할튼 자작은 실로 용맹한 분이니 저희들도 기쁘게 사귈 수 있군요.”
“하하, 이거 부인께서 이 모자란 이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오러를 다루는 부인이 보기에 어찌 제 기량이 눈에 차겠습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적당히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할튼 자작이 다른 이들과 안면을 넓히려 잔을 들고 떠났다. 칼켄이 여전히 호탕하게 웃는 얼굴로, 오크어를 중얼거렸다.
“오크답지 않다니, 열받네. 게다가 저런 부실한 놈이 무슨 전사?”
“어차피 이런 소리 나올 줄 미리 들었잖소? 술이나 드시구려.”
“그래야지, 쩝.”
우아한 스탈라의 대응은 전부 레펜하르트의 반복 학습 덕분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전생에서 인간들이 오크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질릴 정도로 경험해 본 레펜하르트였다. 이번엔 아예 연회 전에 이종족 우두머리들을 모아 놓고 리허설(?)까지 열어 가며 인간을 상대하는 법을 교육시켰다.
-인간에게 많은 걸 바라지 마세요. 저놈들, 어차피 당신들 이해 못 합니다. 그냥 그려려니 하고 맞춰 주세요.
처음에는 다들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오크로서, 드워프로서, 엘프로서 자신의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이들이다. 어찌 인간들을 상대로 그들의 문화와 풍습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레펜하르트도 그들의 의견 자체는 옳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생에 그랬다가 결국 마왕으로 불리고 대륙 왕창 태우고 제국 홀딱 말아먹었다. 같은 실패를 또 할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는 간신히 그들을 달래며 찬찬히 이유를 댔다.
-다 억압받는 그대들의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대륙이 인간의 것임은 다들 인정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것을 주장하려면 우선 남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 쪽이니 일단 저들을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이쪽을 이해시키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러자 드워프들은 구원자가 빈말할 리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엘프들도 합리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현 상황이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님을 바로 인정했다.
하지만 오크들은 반발했다.
-전사로서의 자긍심이 있거늘 어째서 우리가 인간들에게 맞춰야 한단 말이오?
칼켄이나 스탈라, 그랄타는 여전히 레펜하르트의 제안을 못마땅해했다. 단순 명쾌한 사고를 지닌 오크들에게 저 행위는 영 비겁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 수많은 오크들을 다뤄 본 레펜하르트였다. 이럴 경우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쯤은 지겹게 숙지하고 있었다.
-쟤들이 땅 주잖아요.
오크들도 식량 챙겨 온 전사들을 칭송하지 않느냐? 지금 가르쳐 주는 것은 땅 주는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는 인간들의 방식이다. 댁들 방식으로 칭찬했다간 인간들은 모욕으로 여긴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칭찬해야 할 상대를 제대로 칭찬하지 않는 것 또한 전사로서 불명예가 아닌가?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결국 오크들도 레펜하르트의 말이 타당함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랐다.
사실 정말 힘든 것은 그 이후였다. 인간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저놈들 어차피 아무것도 이해 못 한다고 잔뜩 폄하하긴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사실 이종족들에게도 그런 면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이종족들이라고 뭐, 인간들을 그리 쉽게 이해하겠는가? 어차피 다 같은 사람이다. 자신과 다른 이를 기피하고 이해 못해 꺼려하는 것은 인간이건 이종족이건 별 차이 없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 꺼내면 저렇게 대답해라, 저런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답해라 등, 일일이 주입식 교육을 통해 어휘를 골라내느라 진땀을 뺐지, 음.’
어색하게나마 귀족이며 기사들을 상대하는 오크들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뿌듯해했다.
교육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저런다고 저들이 서로를 진정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작은 저것이면 된다. 저러다 보면 인간들도 이종족에 대해 이해는 못 해도, 인정은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종족들의 문화도 서서히 인식이 되리라.
‘그러다가 인간들의 문화에 오염될 가능성도 많지만 그것까지는 나도 어쩔 수 없고.’
한 종족의 문화와 전통, 정신까지 모두 레펜하르트가 챙길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잘할 것이라 믿을 수밖에. 그는 어디까지나 판을 벌일 뿐, 거기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저들의 몫이다.
‘예전엔 내가 주사위 던지고 판돈까지 거는 바람에 망했지. 이번엔 좀 더 저들을 믿어야지.’
따듯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연회장 내의 이종족들을 바라보았다. 실란은 미리 언질받은 대로 연회장 여기저기를 바쁘게 누비며 종족들 사이를 열심히 소개하고 있었다.
“이쪽은 그랜드 포지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인 카다마이트 경입니다. 카다마이트 경, 크로방스 왕국에서도 무명이 높으신 기사, 드란 경입니다.”
이종족 수장들이 열심히 대사(?) 외우는 동안 실란도 놀지는 않았다. 미리 유벨 왕자군의 수많은 귀족들의 신상명세를 외우느라 진땀을 빼야했던 것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자연스럽게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을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있는 실란이었다.
“오오, 테츠발트 경의 목을 벤 바로 그 용사시구려!”
“허허, 운이 좋았을 뿐이오. 자, 한잔 합시다!”
“오러 유저의 잔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카다마이트와 드란 경이 사이좋게 술잔을 건넨다. 이후 적당히 이야기를 진행시킨 실란이 또 한 건 올렸다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러자 그 뒷모습을 보며 두 사람이 숙덕거렸다.
“저분이 레펜하르트 공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그렇다더구려.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 음음.”
“호오? 대체 어떤 분위기였기에?”
“시간만 나면 둘이서 어디론가 사라져서는, 땀범벅이 된 채로 돌아오곤 했소. 대체 뭐 그리 둘이 땀 흘릴 일이 있었는지…….”
“그렇군! 역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이구려!”
근육을 탐닉하는 자신의 뜨거운 노력이 어떤 가공할 소문으로 퍼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실란은 그저 좋다고 또 다른 테이블을 향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던 레펜하르트로서는 실로 우울한 광경이었다.
‘으윽, 실란이 잘 하고 있는 건 좋은데 그래도 저건 좀…….’
어쨌거나 사이좋아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레펜하르트는 애써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엘프들은 놔둬도 잘 하고 있네.’
렐하드와 부관인 엘프 사내는 굳이 실란이 끼어들지 않아도 상당히 잘 어울리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조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엘프들은 인간들의 문화에도 금세 적응했다. 적당히 맞장구 치고, 불쾌한 말을 들어도 우아하게 상대의 말을 교정해 주는 등, 실로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반면 러스는…….
“스피리어스 경과의 전투를 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무위를 지니게 되셨는지?”
“수련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그렇군요. 어떤 식으로 수행하셨기에 그런…….”
“검을 휘둘렀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기사의 검술을 함부로 물어보는 것이 아닌데.”
“…….”
젊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하고 스피리어스 경을 물리친 러스는 이 연회의 주역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친교를 다지고 싶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 차가운 인상의 검사는 결코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딱딱한 얼굴로 묻는 말에만 싸늘하게 대꾸하는 러스의 태도에 다들 눈치만 볼 뿐 함부로 다가가질 못했다.
‘러스 경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오.’
‘으음, 이런 연회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그렇겠지. 진정한 무인이 검 대신 잔을 들었으니 불쾌할 법도 하잖소.’
‘역시 오러 유저들은 괴팍한 사람들이 많다더니.’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혀를 차고 있었다.
‘아이고, 저 자식.’
그동안 꽤나 밝아진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도로 옛날처럼 냉혹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연 오러를 각성한 검사답게 한 자루 벼려진 칼날 같다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레펜하르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왜 저리 낯가림이 심해?’
사실 러스는 정말 성품이 차갑다기보다는, 워낙 테네스 백작가에서 천덕꾸러기였던 신세라 평소 사람 대하는 것이 서투르다는 것이 옳다. 그래서인지 차라리 이종족들을 상대하기가 편하다. 어차피 종족이 다르다 보니 오해 살 태도나 발언을 해도 그냥 ‘종족 차이려니~.’ 하고 다들 넘어간다. 인간들 대할 때처럼 자신의 태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러스는 홀로 고고하게 연회장 한쪽을 장악하고 고요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딱히 반감 같은 것 없이 다들 그럴 법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반 기사가 저렇게 굴면 그냥 왕따인데, 오러 유저가 저러고 있으니 저것조차도 신비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전체적으로 계획대로 돌아간다. 레펜하르트는 내심 즐거웠다.
‘그럭저럭 잘되어 가는군.’
애초에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단 드워프와 오크들의 전력이 투입된 마당에, 국가 단위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한손 거드는 입장에서 유벨 측이 패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진짜 전쟁은 승리한 다음부터지.’
지금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귀족들도 정작 유벨이 왕위에 오르고 논공행상이 시작되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다. 그 속에서 바라는 대로 영지를 받고 뜻을 펼치려면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다.
‘뭐,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술을 들이켰다. 연회 분위기도 무르익었고 다른 이들도 잘하고 있었다. 이제 여기서 그가 할 일은 더 없다.
정신적으로 한가해지자 시리스가 생각났다. 엘프 여성에 대한 세인들의 눈이 어떤지 알기에 레펜하르트는 일부러 연회에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불쾌한 경험을 당할 것이 뻔하니까.
‘그래, 여기서 더 신경 쓸 일도 없는데 이제 시리스나 보러 가야겠다.’
☆ ☆ ☆
적당히 핑계를 대고 레펜하르트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밖에도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잔치를 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앞으로의 일에 대해 궁리하며 레펜하르트는 저택 반대쪽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잔치에 열중한 탓인지 기본적인 초병들을 제외하고는 저택이 한가했다. 사람 없는 회랑, 달빛을 받아 기둥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어둑어둑한 공간을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응?”
회랑 반대편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냥 병사인가 싶지만, 그렇게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저건 보통 유령이거나…….
‘기척을 완벽하게 지운 오러 능력자!’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확실히 오러 능력자가 작정하고 기척을 지우면 같은 오러 유저라 할지라도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마법으로 감지할 수 있지만, 현재 레펜하르트는 딱히 경계 마법을 발동하지 않은 상태다.
어둠 속에서 상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비록 전신에 화려한 갑주 대신 가벼운 복장을 걸쳤지만 저 손에 든 검과 중후한 얼굴은 기억 속에 있었다.
“스피리어스?”
스피리어스가 레펜하르트를 노려보며 검을 들어 겨누었다. 그가 차갑게 뇌까렸다.
“용서하라, 마법사! 모든 것은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일 뿐이니!”
3
스피리어스가 단숨에 허공을 가르며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했다. 강철의 칼날이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레펜하르트가 오른팔을 들어 막았다.
탕!
맨살과 강철이 부딪혔는데 금속음이 울린다. 스피리어스가 혀를 차며 뇌까렸다.
“아이언 스킨 마법인가! 반응이 빠르구나, 마법사!”
물론 현재 레펜하르트의 기량으로 5서클 고위 주문인 아이언 스킨 마법을 시동어도 없이 구사할 재주 따윈 없다. 그냥 맨팔뚝으로 막은 것이다.
스피리어스가 이번엔 좀 더 강력하게 칼을 휘둘렀다. 굳이 오러를 구현하지 않아도 심기체가 합일된 그의 일격은 강철조차 벨 수 있었다.
“하압!”
낮은 기합성과 함께 스피리어스가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베어 왔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피하려면 못 피할 공격은 아니었지만…….
‘어, 어쩌지?’
그는 지금 어디까지나 마법사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걸 피해서 본색을 드러내도 될지 판단이 안 선 것이다.
생각은 길고 공격은 짧다. 고민하는 동안 스피리어스의 검이 시원하게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두들겼다. 당연하게도 또 튕겨 나갔다.
탱!
그제야 스피리어스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언 스킨 마법이 이토록 강할 리가 없는데?”
아이언 스킨은 피부를 강철처럼 만들어 주는 강력한 방호 마법이지만, 그 한계도 명확하다. 지속 시간도 짧은 데다가 화살 정도는 막을 수 있지만 혼신을 다한 그의 검을 튕겨 낼 정도는 아닌 것이다. 안 그러면 모든 마법사들이 아이언 스킨 걸고 전장을 질주했겠지.
그때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시동어를 외쳤다.
“파괴의 불꽃! 플레임 블렛!”
작은 화구가 연달아 손끝에서 떠올라 스피리어스에게 쏘아졌다. 마법을 시전하면서도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으, 오러 유저에게 이런 게 먹힐 리가 없지.’
역시나, 스피리어스는 가볍게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모든 불꽃의 탄환을 사그라뜨려 버렸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하긴, 노예들에게 그런 짓을 가능케 할 정도면 보통 마법사는 아니겠지. 나도 본격적으로 힘을 쓰겠다!”
어차피 그의 목표는 레펜하르트였다. 지금까지야 다른 오러 유저들의 감각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오러를 억제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전력을 다해 그를 암살하고 도망치는 쪽이 낫다.
우우웅!
스피리어스가 검을 늘어뜨렸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푸른 달빛을 가르며 섬뜩한 이빨을 내민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당연히 이럴 줄 예상했어야 했는데!’
궁지에 몰린 카르사스 측에 남은 것은 이제 유벨을 암살하거나 아니면 이종족들을 지휘하는 그를 죽이는 것뿐이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도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걸 여태 못 떠올리다니?
‘아오, 이 빌어먹을 테스론 헤드!’
너무 자주 욕을 해서 이제는 숫제 고유명사(?)까지 붙여 버린 이 육체의 아이큐를 원망하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마법의 힘을 상당히 되찾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오러 유저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사로서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 세인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도 않다.
‘도망칠까?’
하지만 스피리어스 경의 기량은 결코 낮지 않다. 도망치느라 등을 내줄 만큼 허술한 이는 절대 아니다.
그때 스피리어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바닥을 박찼다. 강렬한 찌르기가 붉은 섬광이 되어 레펜하르트의 심장을 노린다.
‘에잇! 어쩔 수 없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며 오른 정권을 뻗었다. 공격을 피하며 상대의 급소에 바로 스매시를 날린 것이다.
퍼억!
육중한 타격음이 울리며 레펜하르트의 정권이 스피리어스의 늑골 부위를 강타했다. 타이밍이 완벽해 제대로 반격이 들어가 버렸다. 스피리어스가 눈을 치켜뜨며 놀라 외쳤다.
“이 체술은? 전투 마법사였나!”
오러로 전신을 방어하고 있어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적의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놀란 스피리어스를 쳐 낸 뒤 레펜하르트가 바로 자세를 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 오러를 직접 구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전투 마법사라고 우길 수 있어!’
스피리어스가 검을 고쳐 쥐더니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하긴, 저 덩치를 보면 전투 마법사라고 이상할 것도 없겠군.”
상대의 오해를 기뻐하며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지금 이 저택에서는 오러 유저만 여섯이 있소! 그들이 금방 그대의 기운을 느끼고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오!”
“흥! 그때까지 네놈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보나?”
스피리어스가 콧방귀를 꼈다. 자세를 보니 전투 마법사치고는 상당한 수준이지만, 그래 봤자 오러 유저에 비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검을 겨누고 매서운 살기를 피웠다.
우우웅!
붉은 기운이 공기를 흔든다. 레펜하르트는 침을 삼켰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살기를 담고 그의 미간을 아프도록 찌르고 있었다. 아까는 상대를 얕잡아 보고 그냥 찔렀을 뿐이지만, 지금 날아올 공격은 제대로 된 검술일 것이다.
‘끙, 오러 구현 안 하고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방어법에는 회피란 개념이 거의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회피술은 있지만 그 수준은 대륙의 흔한 무술 레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