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제17장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18/84)

제17장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1

어둠이 가득한 거대한 홀.

그 홀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벽이라곤 존재치 않는 이 무한의 공간은 은의 시대 유적을 이용해 창조해 낸 유사 공간일 뿐이다.

그 어둠 속에 흑발의 미청년이 서 있었다. 새하얀 로브를 입고 가슴에 은빛 성표를 단 그 청년은 자못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홀 중앙에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기둥 안에서 역시나 하얀 로브를 걸친 인간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수염을 배까지 기른 노인이었다.

마법 영상으로 자신을 드러낸 노인이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의 노고를 치하한다, 현자 레스틴.”

현자 레스틴, 속세의 이름으로 테스론이라 불리는 청년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수호자 다오스.”

인류의 관리자, 은의 현자.

노인은 그중에서도 모든 비밀을 관리하는 최상위, 13인의 수호자 중 한 명이었다.

노인, 다오스가 테스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일을 처리했더군. 만족스럽다.”

한 달 전, 테스론은 수호자 다오스의 명령에 따라 살카나 던전을 탐사한 이들을 전멸시키는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이후 그는 한 달에 걸쳐 세상에 알려진 살카나 유적에 대한 정보를 없애고 유적 탐사대에 대한 흔적을 조작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모든 것이 이제야 끝나 다오스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겸양하며 테스론이 그동안의 일을 요약한 보고서를 노인에게 건넸다. 보고서는 종이가 아니라 정보를 저장시킬 수 있는 보랏빛 마법의 수정이었다.

수정을 받아 들며 노인이 온화한 목소리를 건넸다.

“위험한 지식은 올바른 관리 속에 유지되어야 하는 법. 그대는 별일 아니라 여길지 몰라도 그 또한 인류를 지키는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테스론은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노인이 수정을 쥐고 눈을 감은 채 안의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후우, 저 위치까지는 아니어도 최소 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는 빨리 올라가야 할 텐데.’

그동안 마왕에 맞서기 위해 한껏 힘을 키우고 정보를 모았다. 황금기사 유서스도 동료로 끌어들이고 스테반과 필레나를 거두어 은의 시대 유물로 그들의 검과 마법적 실력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테스론 자신의 육체와 마왕의 두뇌를 가진 레펜하르트는 실로 두려운 존재였다.

보다 더 강한 힘, 보다 더 강력한 동료가 필요했다.

그런 만큼 테스론은 현재 자신의 지위에 불만이 많았다. 은의 현자 내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권한도 강화된다. 지금처럼 관리 단계의 특급 아티팩트가 아닌, 현 시대에는 완전히 사용이 금지된 절대적 권능을 지닌 유물들도 사용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눈앞의 노인을 붙잡고 마왕이란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펼치고 싶은 기분이다만…….

‘하지만 환생에 대해 말해 봐야 정신병자 취급만 당할 테니 당장은 어쩔 수 없지. 간신히 얻은 은의 현자 자리는 지켜야 하니…….’

이 시대에 환생해 은의 현자에 가입했던 때를 떠올리며 테스론은 입맛을 다셨다.

☆ ☆ ☆

레펜하르트를 상대하기 위한 힘이 필요했던 테스론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라나드 공작부터 찾았다. 이미 전생의 정보를 통해 그는 이라나드 공작이 은의 현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 적당히 말을 꾸며 냈다.

대륙의 역사를 보고, 추측하여 인류를 관리하는 집단의 존재를 유추했다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정보를 얻어’ 이라나드 공작이 그들의 일원임을 알게 되었다고.

전생에서 들었던 내용을 몽땅 자기가 추리해 낸 양 떠들어 대는 테스론을 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그를 놀라운 직관력과 현명한 두뇌의 소유자라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거하기엔 그의 무위와 나이가 아까울 테니, 결국 테스론은 기대했던 대로 은의 현자에 받아들여졌다.

그 정보를 제공한 전생의 인물이 바로…….

‘빛의 마도사, 제이드 아크라이트.’

마왕 레펜하르트가 한창 안타레스 제국의 세력을 넓히고, 떠돌아다니던 권왕 테스론도 조국을 버릴 수 없어 바실리 왕국의 신하로 열심히 그에 맞서 싸우던 때의 일이다.

그때, 동료였던 제이드로부터 은의 현자란 집단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고대의 모든 비의를 알고 있다고 했다.

위대한 은의 시대에 대한 진정한 계승자라고 했다.

현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은의 현자의 일원이었던 그를 통해 테스론은 진실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의 자부심, 그 근본을 뒤흔드는 엄청난 것이었다.

위대한 은의 시대, 그 주역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 위대한 문명의 주인은 바로 세계수를 지닌 엘프였고, 대지를 지배하는 드워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시대에 인간들은 무엇을 했는가?

저 위대한 고대인이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조상으로 삼고 있단 말인가?

이 의문에 대한 진실만은, 은의 현자라 할지라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저것만으로도 인류의 정체성을 흔들기에는 충분히 무시무시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은의 현자는 인류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수백 년을 걸쳐 역사를 조작해 왔다.

그중 한 예가 바로 ‘은의 시대’라는 명칭이었다.

사실, 왜 고대를 은의 시대라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테스론도 한때 의아해했던 적이 있었다. 은의 시대라 부르는 고대 문명이 있었다면 황금의 시대나 청동의 시대, 강철의 시대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다른 건 하나도 없는데 뜬금없이 왜 은의 시대만 툭 튀어나온단 말인가?

제이드를 통해서 테스론은 그제야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천여 년 전만 해도, 어지간한 고서에는 옛 고대 문명에 대한 명칭이 따로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며 엘프, 드워프들이 붙인 명칭이었다.

그 문명은 이렇게 불렀다.

엘드라스 문명과 알하트란 문명.

고대어에 능숙한 이라면 저 단어들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엘드라스는 엘디아의 축복.

그리고 알하트란은 알 포트의 은총.

누가 봐도 명확하게 고대 문명에 엘프와 드워프의 신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조작한 것이 과거, 은의 현자들이었다. 그들은 고서를 불태우고 역사를 조작해 저 문명의 이름을 없애 버렸다. 수백 년에 걸친 대작업이었지만, 인류가 번성해 점점 힘을 키우며 결국 은의 현자들도 작업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진실을 지우려면 그만큼 그럴듯한 거짓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대신 붙인 이름이 은의 시대였다.

-고대 엘프들은 지금의 엘프들과 달리 귀가 짧고 모두가 눈부신 은발이었습니다. 던전의 벽화 등을 통해 보면 고대의 엘프들은 그냥 은발에 장신의 인간으로만 보이지요. 그래서 유적 탐사자들 대부분은 그런 벽화 속 고대인을 보며 은의 시대라는 명칭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고대 드워프들이 주로 애용한 금속은 예나 지금이나 진은, 미스릴이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드워프들과 달리 미스릴과 다른 광물을 합금하여 월등한 금속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색은 분명 은색이지요.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유물들도 은색인 것이 많았고, 그래서 유물을 연구하는 이들도 은의 시대란 명칭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던 겁니다.

이렇듯 은의 현자들은 수많은 세월 동안 음지에서 정보를 조작해 왔던 것이다. 인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제이드에게 이 모든 사실을 들었을 때만 해도, 사실 테스론은 그렇게 경악하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테스론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다운 깔끔한 뇌 주름을 지니고 있었다. 심히 무식했다는 이야기다. 과거야 어쨌건 지금은 엘프건 드워프건 별 볼 일 없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 싶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와 싸울 때만 해도 ‘얘만 조지면 다들 멀쩡해지겠지?’라며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고, 월등한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지녀 전생을 되새겨 보니 은의 현자들이 왜 저리 역사를 감추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 소속감과 전통, 조상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만큼 머리가 좋아진 것이다.

‘그리고…… 은의 현자들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말이지…….’

스테반이나 필레나 앞에서는 입장상 진실을 알려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친 테스론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지금 은의 현자가 하는 짓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전생에서, 초반 안타레스 제국은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륙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레펜하르트의 강력한 마법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은의 현자는 인류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역사를 조작했다. 그리고 자긍심을 지닌 인류는 결국 다른 종족들을 억누르고 세상의 패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은의 현자는 분명 인류의 수호자라 칭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을 행해 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들의 간섭은 지나친 과보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은의 현자의 정보 조작이 극에 달한 현재, 인류는 이종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

비록 지금은 노예로 전락했다지만 한때는 인간과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이들이다. 언제 다시 조상의 힘을 깨우칠지 모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종족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원래부터 저런 존재이려니 하고 넘겨짚으며 아무도 그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았다. 인간의 자부심을 높이려 한 사상 공작이 도를 넘어서, 현 인류는 대륙 전체를 지배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안타레스 제국 초기, 인간의 왕국들이 맥없이 무너져 간 이유였다. 이종족들이 무서운 기세로 쳐들어와도 고작 노예가 뭘 하겠냐며 코웃음 치다가 다들 죽어 나간 것이다. 안타레스 제국이 성립될 때쯤에는 인간들도 비로소 현실을 깨닫고 경각심을 높였지만, 그때는 이미 세 개의 왕국이 무너진 후였다.

‘결국 수적 우세를 이용해 최후에는 우리가 승리하긴 했지만, 그 피해도 어마어마했지…….’

그때 슬슬 보고서를 전부 검토한 다오스가 테스론을 불렀다.

“수고했다, 현자 레스틴.”

“네, 수호자 다오스.”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테스론이 고개를 숙인 뒤 정해진 구호를 외쳤다.

“그럼 모든 것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서.”

빛과 함께 사라지며 다오스 역시 근엄한 얼굴로 구호를 받았다.

“모든 것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서.”

다오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 빛의 기둥이 꺼지고 홀이 다시 암흑으로 가득 찬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테스론이 다오스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인류의 수호라…… 하지만 인간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겠다며 당신들이 해 온 그 모든 짓이 결국 현재의 인간들을 약하고 어리석게 만들고 있거늘…….”

2

전 국왕 고트린 1세와 왕위 계승자 텔리온이 사망한 지 석 달이 지난 지금, 크로방스 왕국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가 카르사스 폰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일파.

페르난도 공작가와 브로젠 후작가가 주축이 된 이들은 지방의 영주들과 귀족 가문의 힘을 입어 카르사스야말로 진정한 왕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휘하에 두 명의 오러 능력자를 두고 일만 오천의 병력을 지닌 카르사스는 현재 가장 크로방스의 왕위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유벨 렌 크로방스.

올해 열여덟 살인 이 청년은 전 국왕 고트린 1세와 애첩 사이에서 태어난 이였다. 왕국 최대의 상인, 페오닌 가문을 외척으로 둔 유벨은 상인 출신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왕실의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 귀족 몇몇도 유벨의 손을 거들었다. 비록 혈통에 흠이 있긴 했지만 유벨이 전 국왕 고트린 1세의 유일한 적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휘하에 오러 유저도 없고 대흉년이 국토를 덮쳐 용병들도 떠나 버린 지금, 유벨에겐 삼천 정도의 병력만이 남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꽤나 밀린 신세였다.

그럼에도 아직 카르사스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벨 왕자 측이 크로방스의 왕관과 국왕의 인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크로방스 국왕은 왕관과 인장을 소유하고 왕궁의 신성한 홀, 브라스티나에서 대관식을 치러야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카르사스는 왕도 크로틴을 제압해 신성한 홀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왕관과 인장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카르사스 공자 측은 타오반 상회와 접촉, 거금을 들여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다시 전쟁을 재개할 준비를 척척 갖추는 중이었다. 그에 비해 유벨 왕자 측은 더 이상의 여력이 없다. 이 왕위 계승 전쟁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카르사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말이야…….”

회색빛 석탑의 한 응접실에서 피터란 백작은 서류 하나를 살펴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갈대처럼 푸석푸석해 보이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이 중년 사내는 카르사스 공자 측, 브로젠 후작가의 세력에 속한 자였다. 영지가 근처인 덕에 델피나 자작령으로 후퇴한 유벨 왕자군의 움직임을 정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지금 손에 쥔 서류 역시 델피나 자작령에 몰래 침투시켜 놓은 그의 첩자가 알아 온 정보였다. 서류에는 유벨 왕자 측이 새로운 조력자를 영입, 막대한 군량미를 손에 넣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껏 자금줄을 다 막았더니 이건 또 뭐지?”

피터란 백작은 혀를 찼다.

상인들에게 금전이 주어지면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되어 돌아오는지는 내전 초기에 충분히 맛보았다. 그래서 카르사스군은 대흉년이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차탄 공국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유벨 왕자 측 상인들의 자금 흐름을 끊는 것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군량미를 손에 넣을 방법은 없을 것이라 안심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조력자가 나타나 곡식을 대 주다니?

‘쳇, 운도 좋군, 유벨 왕자.’

정보에 의하면 그 군량미의 양은 자그마치 금화 10만 닢의 가치를 지녔다 했다. 이 정도의 군량미가 유벨 왕자에게 들어가면 다 이긴 전쟁에서 패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이 뻔했다.

피터란 백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떻게 그런 조력자를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자고로 보급을 차단하는 것은 전쟁의 상식이다. 게다가 저 정도의 곡식이라면 현 크로방스 왕국에서는 상당한 재산이었다. 저런 보물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보급에 허덕이는 건 카르사스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도 군량을 탈취한다면 그 공이 적지 않을 터, 내 위치도 상당히 올라갈 수 있겠군.’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다시없는 기회였다. 좋아하면서 피터란 백작은 계획을 세웠다.

타오반 상회와 곡식을 거래하는 것은 카르사스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타오반 상회가 곡식을 관리할 때 습격할 수는 없다.

그래서 피터란 백작은 습격 시점을 유벨 왕자 측이 타오반 상회로부터 곡물을 넘겨받는 크로방스 왕국 서부 관문 도시, 카드바를 지난 후로 잡았다. 전 왕국이 흉년으로 시달리는 지금 타오반 상회의 곡식은 그야말로 모두의 생명줄이다. 괜히 밉보여 척을 지게 되면 중립을 유지하는 다른 귀족들의 비위를 거스를 가능성이 높다.

“흥, 비겁한 작자들.”

중립을 유지하는 귀족들을 떠올리며 문득 피터란 백작은 욕설을 뱉었다. 진정한 국왕에게 힘을 보태는 이 성스러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그들은, 피터란 백작에게는 유벨 왕자군만큼이나 미운 존재였다.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로열나이츠 단장인 하츠버겐 경 등 주로 오러 능력자의 가문들이었다. 현재 크로방스 왕국에 존재하는 오러 유저는 모두 다섯, 그중 셋은 이 내전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있었다.

명목은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대상은 국왕이니, 아직 즉위식을 올리지 않은 이상 어느 쪽도 손을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터란 백작은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오러 능력자라 안심하고 있는 것이겠지.’

보통 귀족이 중립을 표방하게 되면 차후 국왕이 된 이에게 당연히 미운털이 박히게 된다. 하지만 오러 유저는 국가적 차원에서 귀한 존재, 적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보듬어 안아야 하는 것이다. 저들도 그걸 아니까 안심하고 중립을 선언해 가문의 힘을 보전하겠다는 수작이 뻔했다.

그렇게 툴툴대면서 피터란 백작은 계속 ‘군량미 탈취 계획’을 짰다. 그리고 시종을 불러 명을 내렸다.

“다들 출병 준비를 하라 일러라!”

☆ ☆ ☆

테르마니아 관도官途.

크로방스 왕국 남부를 관통하는 이 대로는 서부 관문 도시 카드바부터 시작해 왕국의 동쪽 경계인 글로텐 산맥까지 이어져 있다. 차탄 공국이나 그라임 왕국의 관도처럼 제대로 포장된 도로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 행인들의 발과 마차 바퀴로 다져진 이 테르마니아 관도는 크로방스 왕국의 주요 교역로 중 하나였다.

그 관도 위로 기다란 마차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소와 말들이 짐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며 걸음을 옮긴다. 마부석에는 엘프며 오크 노예들이 고삐를 쥐고 마차를 모는 중이다. 그 주위로 백여 명 정도의 병사들이 마차 행렬을 호위한다.

말 울음소리와 소 울음소리가 한적한 관도 곳곳에서 은은히 울렸다.

음메!

히이잉…….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마차 행렬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테르마니아 관도 인근에 위치한 이름 없는 작은 숲.

그 울창한 수풀 속에서 한 무리의 군세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유벨 왕자군의 군량을 포획하기 위해 매복중인 피터란 백작군이었다.

수풀 사이로 마차 행렬을 지켜보며 피터란 백작이 혀를 찼다.

“이것 참…… 유벨 왕자 측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저 군량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호위 병력이 고작 백 명 남짓인가?”

곁에 서 있던 젊은 기사, 피터란의 부관인 마이어 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많은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무리일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오백 명은 동원할 줄 알았는데…….”

피터란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군량미에 대한 정보를 취득한 피터란 백작은 우선 마탑에 전갈을 보내 카르사스 공자에게 자신의 출전에 대한 사후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바로 병력을 동원해 이곳으로 달려왔다.

군략을 배운 피터란 백작은 유벨 왕자군의 숫자가 대략 기사 20기에 보병 오백은 될 것이라 판단했다. 저 군량미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삼천 병력 모두를 동원해도 지나침이 없겠지만, 그랬다간 델피나와 인근 영지, 즉 본진을 털릴 위험성이 있으니 오백 명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피터란도 확실한 승리를 위해 지닌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기사 30기에 팔백의 보병대였다. 만약 전투에서 이겨 군량을 탈취하면 제일 좋고, 적들의 반항이 거세어 탈취하지 못한다 해도 군량미를 불태우고 후퇴하기엔 충분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상대 병력이 너무 적은 것이다. 승리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으니 좋아해야 할 일이나, 지나치게 예상 밖이니 오히려 의심이 간다.

“이미 믿을 만한 병사를 보내 주변 정찰을 마쳤다. 분명 달리 숨겨 놓은 병력은 없을 터인데…….”

고민하는 피터란 백작을 보며 마이어 경도 진지한 태도로 조언을 건넸다.

“혹시 모르니 저들의 면모를 상세히 살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대 말이 옳다. 마이어 경, 마법사 헤로트를 불러 주겠나?”

“예, 백작님.”

곧이어 갈색 로브를 걸친 늙은 노인이 백작에게 다가왔다. 피터란 가문의 마법사, 헤로트였다. 백작은 그에게 명해 원견遠見의 마법을 시행하라 일렀다. 커다란 대야에 물을 붓고 잠잠해지길 기다려 헤로트가 주문을 외우니, 이내 수면 위로 마차 행렬의 상세한 모습이 비쳤다.

주문을 외운 뒤 헤로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원견의 마법에 전혀 저항이 없습니다. 저들 중 마법사는 없는 듯합니다.”

눈앞에서 보듯 마차 행렬을 살펴보며 피터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뇌까렸다.

“이상하군.”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두 발로 걷거나 마차 위에 올라타 있었다. 말에 올라 탄 이는 둘뿐이었는데 그나마 한 명은 인간 기사가 아니라 사나워 보이는 오크였다. 아마도 검투사 출신 노예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인간이었는데 역시 기사 같지 않았다. 전혀 마상 전투에 대비하는 차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장도 하프 플레이트 메일 차림에 검 한 자루만 달랑 허리에 차고 있다. 마상 창이나 투창, 방패 등의 무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사라기보다는, 그냥 검사가 말을 몰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저게 기마병의 전부인가?’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 게다가 황당한 기분은 저, 백여 명의 호위 병력을 보고 나니 더해질 뿐이었다.

백 명의 호위 병력은 마차 행렬 옆에서 일렬로 행군하고 있었다. 다들 커다란 로브를 입고 후드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상태였다. 등에 도끼 창이며 망치 같은 장병기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원견의 주문으로 가까이서 보니 대부분 신장이 하나같이 참으로 작았다.

‘저렇게 작은 병사들이라니?’

피터란 백작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병력이 없어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마저 병사로 차출한 것 같았다.

옆에서 함께 수경을 지켜보던 마이어 경이 나름 짐작을 내놓았다.

“아마도 유벨 왕자군은 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우리들의 습격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테지요. 그렇다면 행렬에 대한 위협은 굶주린 난민들뿐, 아무리 어린 소년들이라도 저렇듯 품 넓은 로브로 가리고 무기만 들려 주면 겉보기엔 병사들로 보일 테니 난민들도 함부로 덤벼들진 못할 테니까요.”

“그건 너무 도박이 아닌가? 저 군량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하다못해 정규병 삼백 명 정도는 붙여야 할 텐데?”

“백작님이야 여유가 있으니 그리 생각하시겠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그것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마이어 경이 고개를 저었다.

“유벨 왕자 측에선 지금 병력을 나눌 처지가 못 됩니다.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인데, 그랬다가 우리 군이 쳐들어오면 큰일이니까요. 카르사스 공자께서 지금 바로 진군하지 않는 것이 패배를 두려워해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힘을 비축하시는 것이지요.”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저들이 군량미를 포기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행운을 기대하며 고육지책으로 저런 작전을 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마이어 경의 조리 있는 설명에 피터란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 마이어 경.”

주변 정찰도 충실히 행했고, 원견의 마법으로 본진의 상황도 살펴보았다. 저들에게 어떠한 함정도 없음을 확실했다. 그렇다면 분명 마이어 경 말대로 운에 맡기고 저런 가련한 작전을 세웠을 터이다.

“생각보다도 유벨 왕자군의 사정이 더 안 좋은 모양이군.”

혀를 차며 피터란 백작은 공격 준비를 명했다. 매복하며 이제나저제나 공격 명령만 기다리던 기사들이 일제히 눈을 반짝인다. 말에 올라타 투구의 안갑을 내린 뒤, 창을 들고 피터란 백작이 휘하 기사들에게 말했다.

“상대는 가련한 소년병, 적당히 겁만 줘도 정신없이 도망칠 것이다. 다들 손 속에 사정을 두도록 하라.”

기사들도 어차피 본격적으로 살육할 생각은 없었다. 다들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무장을 갖췄다. 소풍 가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피터란 백작이 소리쳤다.

“전원, 돌격하라!”

피터란 백작과 30기의 기사들이 숲을 뛰쳐나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마차 행렬을 향해 돌진했다. 보병대도 열심히 뛰며 뒤를 따랐다.

두두두두!

대지가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기사대가 단숨에 1킬로미터라는 거리를 좁히며 행렬을 급습했다. 피터란 백작이 창을 들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진정한 국왕, 카르사스 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모두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거대한 말에 올라타고 두꺼운 강철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기사라는 존재는 평범한 보병들에게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성이라 할 정도로 대처 불가능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 그런 기사가 30기나 몰려오는데 용기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을 터, 피터란이 승리를 확신했을 때였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으응?”

아무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보병 전원이 기다렸다는 듯 후드를 젖히며 무기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으하하하!”

“왔구나!”

“기다렸다! 이놈들!”

소년이라 생각했던 이들의 입에서 실로 중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후드 속, 소년은 고사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그 얼굴들을 보며 피터란 백작이 놀라 외쳤다.

“……드워프?”

☆ ☆ ☆

우와아아아!

드워프들이 우렁찬 함성을 터트리며 30기의 기사들을 향해 달려온다. 기본 신장이 1미터가 조금 넘는 난쟁이들이 거대한 말과 기사들을 상대로, 도망은커녕 오히려 돌격해 오는 것이다.

기사 중 하나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드워프들이니, 소년병보다야 조금 낫지만 어차피 미천한 노예 종족일 뿐이다.

피터란 백작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아니, 어떤 미친 작자가 땅강아지들을 데려다가 병력으로 쓴 거야?”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마이어 경이 코웃음을 쳤다.

“곡괭이질이나 하던 것들이 정신이 나간 게로구나!”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기마를 상대로 달려오는 저 모습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한다. 단숨에 드워프들 무리로 다가간 마이어 경이 마상 창을 길게 뻗었다. 과녁은 제일 선두에 선 도끼 창을 든 드워프. 단숨에 꼬치 꿰듯 꿰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앗!”

기합을 터트리며 마상 창을 찌르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상대가 과녁에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상황을 이해 못 한 마이어 경이 멍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의식이 끊겨 버렸다.

“……아?”

마이어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피터란 백작이 경악해 외침을 터트렸다.

“마이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도끼 창을 든 드워프가, 창이 찔러 오는 그 순간 절묘하게 몸을 비틀어 피하더니 어이없게도 3미터가 넘게 ‘날아올라’ 마이어 경의 머리를 베어 넘긴 것이다.

머리 잃은 마이어 경의 몸뚱이가 저만치 달려가서야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진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잘려 나간 마이어 경의 얼굴에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 남아 있을 정도, 아마도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인식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단 일격에? 아니, 그보다 저 도약력은 대체?’

피터란 백작은 혼란에 빠졌다. 그냥 인간이 저 높이를 뛰었어도 경악할 일인데, 그걸 드워프가 해냈다. 저 짧은 다리로!

마치 오러 능력자를 연상케 하는 초월적인 움직임이 아닌가?

‘마, 말도 안 돼…….’

그러는 와중에도 선두에 선 또 다른 두 명의 드워프들이 비슷한 몸놀림으로 두 명의 기사를 베어 넘겼다. 기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뭐야, 저건?”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단숨에 귀한 기사 셋의 목숨이 허무하게 날아간 것이다. 다들 마상 높이까지 휭휭 날아다니는 저 드워프들의 움직임에 기겁할 때였다. 다른 드워프들도 기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으랏차차!”

“썰어 봅세!”

“덤벼라, 인간들아!”

다행히 저런 무시무시한 도약력을 지닌 드워프는 세 명뿐인 듯했다. 하지만 다른 드워프들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다들 점프하는 대신 달려오는 말 앞에 거침없이 몸을 던진다. 기사들의 당혹이 더더욱 깊어졌다.

“이놈들은 대체!”

“이, 미친놈들!”

당황하면서도 기사들이 평소 행한 대로 좌우로 창을 휘둘러 댔다.

원래 보병들을 상대할 땐 그저 말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를 보는 법이다. 말발굽을 울리며 전진하고, 좌우를 창이나 마상 검으로 훑어주면 그것만으로도 보병들은 베어 놓은 수숫단처럼 썰려 나가기 마련이다.

그 당연한 상식이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드워프들은 밟아 오는 말발굽을 절묘하게 피하며 도끼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말들의 뱃가죽이 찢어지고 내장이 쏟아지며 기사들이 낙마한다. 낙마한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육중한 망치가 그들의 머리통을 부수어 버린다.

원래대로라면 자살행위여야 할 무모한 짓, 그러면서도 다들 전혀 긴장하거나 겁먹은 모습들이 아니었다. 드워프들은 태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카다마이트처럼은 못하지만…….”

“어차피 덩치 큰 놈이랑은 만날 싸워 봤는데, 뭘?”

“말 타고 칼 든 것 정도야, 켄타우로스랑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

다들 말발굽을 피해 좌우로 빠지고 기사의 공격을 받아 넘기며 반격해 댄다. 그 동작이 실로 능숙해 수천 번을 해 온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뛰어든 지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스무 명이 넘는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죽어 간 기사들의 피가 대지를 가득 적신다. 그 참혹한 모습에 피터란 백작이 울부짖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 ☆ ☆

두 발로 땅을 박찬다. 단숨에 말을 탄 상대의 머리 위까지 뛰어오른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카다마이트는 도끼 창을 길게 횡으로 휘둘렀다. 또다시 기사 한 명이 허리째 잘리며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피를 뿌렸다. 피터란 백작은 두 발로 뛰어다니며 마상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그의 무위에 경악했겠지만, 오러 능력자인 카다마이트에게 이런 평범한 기사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서른 명의 기사 모두를 혼자 상대할 자신도 있었다.

‘구원자께서 오러를 구현시키지 말라 하셨으니, 시간은 엄청 걸리겠지만.’

그렇게 네 명째 기사를 베어 넘긴 뒤 카다마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사 말로이드. 전사 슬로이틀.

그랜드 포지의 또 다른 오러 능력자들도 가뿐히 기사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들도 카다마이트처럼 직접적으로 오러를 도끼나 망치에 씌우는 짓은 하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드워프들의 진정한 전력을 보다 극적으로,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연출하기 위해 지금의 전투에서는 오러 유저임을 숨기라 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다들 아이를 데리고 노는 것처럼 쉽게도 기사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저 오러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만으로 오러 유저는 충분히 초인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 굳이 오러를 구현화시키지 않아도 이 정도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부상은 고사하고 갑옷에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상대를 도륙하고 있었다.

한편 피터란 백작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아끼고 보살펴 온 기사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간다. 월등한 무위를 보이는 저 세 명의 드워프도 두려웠지만, 다른 드워프들조차도 하나하나가 기사들과 맞먹는 괴물들이었다. 서른 명의 기사들이 대부분 쓰러지는 동안 저들은 경상을 입은 이조차 하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팔백의 보병대가 전장에 도착했다. 피터란 백작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보병대! 돌격하라! 돌격하라아아아!”

보병대가 드워프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팔백 대 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황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백 쪽이었다.

백 명의 드워프 병사들이 양 떼에 뛰어든 늑대들처럼 거침없이 보병대를 유린해 갔다. 피가 튀고 비명이 하늘 높이 아우성쳤다.

이미 그들의 우두머리, 기사들의 비참한 패배를 본 보병대였다. 평소 받은 훈련 덕에 명령이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긴 했지만 이미 사기는 꺾일 대로 꺾인 후인 것이다. 보병대 여기저기서 도망치는 병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사기충천했어도 어차피 상대는 안 되었겠지만.’

마부석에 앉아 전황을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엔 팔백 대 백의 전투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그랜드 포지의 최정예 전사들인 것이다.

인간들은 농사짓던 농민들도 병사라며 차출해 기본 동작 대충 가르치고 창 들려서 전쟁터에 내보내곤 한다. 하지만 인구가 귀한 드워프나 오크들은 전사와 생산직 종사자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들에게 전사라는 존재는 인간으로 치면 기사와 동등하다.

즉, 이 전투는 사실 백 명의 기사가 팔백 명의 일반 병사들을 유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평범한 인간 기사와 달리 이 드워프 전사들은 하나하나가 험한 환경 속에서 극도로 단련되어 추리고 추려진 이들 뿐이다. 전투의 베테랑인 이들을 일반 병사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힘들게 여기까지 데려온 보람이 있구먼.’

그동안의 여정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실실 웃었다.

크로방스 왕국으로 돌아온 레펜하르트는 타오반 상회에 곡물을 인수하러 갈 때 공간 포털을 이용해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을 일제히 크로방스 왕국으로 이동시켰다. 그랜드 포지에서 다이만의 돌을 이용해 차탄 공국으로 이동한 뒤, 거기서 전원 로브를 입혀 타오반 상회의 호위 병력으로 위장하고 세텔라드 산맥 남부를 넘은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은 레펜하르트의 개인 노예 신분, 타오반 상회의 정식 인가가 있는 노예 문서가 있으니 차탄 공국을 통과해 크로방스 왕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현재 크로방스 왕국으로 이동한 드워프들이 오러 능력자인 카다마이트와 말로이드, 슬로이틀, 그리고 백 명의 전사들이었다. 비록 마법병단은 아직 수준이 높지 않아 그랜드 포지에 남았지만 이들만으로도 피터란 백작의 군세를 상대하는 것은 넘치고도 남았다.

마부석 옆에서 전황을 지켜보며 혹시 나올 부상자를 치유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일 줄은 몰랐어요.”

“그야, 이쪽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고 저쪽은 전략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방비였으니까. 객관적인 전력도 이쪽이 높은데 약한 놈이 방심까지 했으니 결과가 오죽하겠냐?”

레펜하르트의 말에, 곁에서 같이 앉아 있던 시리스가 상대편 지휘관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피터란 백작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고함만 질러 대고 있었다.

“싸워라! 저놈들은 고작 드워프들이다! 저 천한 난쟁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생각해 보면 피터란 백작도 절대 무능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 참가한 노련한 기사였고 이번 전투에 임할 때도 철저히 준비해 모든 요소를 점검했다. 그의 행동에 군사적으로 잘못된 점은 없다.

단지, 피터란 백작은 체스를 준비했는데 레펜하르트는 장기말을 꺼내 들었달까? 아예 룰이 달라 버리니 예측도 대처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한들 상대가 드워프, 그중에서도 오러 유저가 셋이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할 테니까.

‘그걸 예측하면 군사학이 아니라 점술의 영역이지.’

누가 봐도 확연할 정도로 승세가 기울자 카다마이트가 미리 들은 대로 고함을 질렀다.

“도망치는 이들은 쫓지 마시오! 우리 임무는 이 마차를 호위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은 아군에 하는 말이 아니라 피터란 백작 측 병사들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망쳐도 쫓지 않는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살아남은 보병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무기를 버리고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아아아!”

피터란 백작이 목이 터져라 외쳐 댔지만, 병사들의 도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모든 휘하 기사들과 병사를 잃고 홀로 적진 한가운데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런…….”

그제야 피터란 백작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떠올랐다. 피가 흥건한 무기를 손에 쥔 채 드워프 전사들이 히죽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은 표정이다. 피터란이 분노와 공포로 부들부들 떨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들의 주인이 누구냐!”

이 상황까지 와서도 그는 여전히 이 드워프들이 누군가의 노예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양식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생각이니까.

그런 피터란 백작의 눈에, 말을 탄 채 저만치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관전하고 있는 청년 검사가 보였다. 러스였다.

원래 레펜하르트 일행은 혹시나 드워프들의 호위망이 뚫릴 때를 대비해 마차 곁에 머물고 있었다. 혹시 저들이 곡식에 불이라도 지르면 안 되니 그런 것인데, 드워프 전사들이 워낙 잘 싸우다 보니 할 일이 없어 그냥 구경꾼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러스도 말을 탄 채 마차 옆에서 전황을 보고만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피터란 백작에게는 드워프들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피터란 백작이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정녕 도리를 아는 자라면, 기사를 천한 것들의 손에 죽게 하지는 않을 터이다!”

드워프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재수 없네.”

“몰라서 저러는 거잖아. 할 수 없지.”

“하긴, 못 배워서 저런 거니 미워할 수도 없구먼.”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답게, 피터란 백작이 지금 패배를 인정하고 기사답게 ‘명예로운 죽음’을 원한다는 걸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은 진지하기 그지없으니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고쳐 들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까?”

검은 수염의 드워프, 말로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망치를 치켜들었다.

“아닐세, 카다마이트. 내가 하지.”

다른 드워프 전사들도 웅성대며 만류했다.

“어, 내가 하면 안 되나?”

“그러게. 댁들이 나서면 한 방에 끝이잖소?”

“많이 썰었으니 좀 쉬소.”

딱히 드워프들이 전공을 탐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딴 사람들 힘 많이 썼으니 좀 쉬고 자신이 힘든 일 대신 해 주겠다는 아름다운 품앗이 정신에서 이렇게 나온 것이었다.

물론 듣는 피터란 백작 입장에선 혈압 올라 뒷목 잡고 쓰러질 대화들이었다.

“이, 이 미천한 것들이!”

발작한 피터란이 박차를 가했다. 말을 달리며 창을 들고 용맹하게 드워프들 사이로 뛰어드는 그 모습은 정녕 기사의 귀감이리라.

그때 저쪽에서도 누군가가 말을 몰고 달려왔다. 드워프가 아니라 전신에 흉터가 가득한 오크 검투사였다. 그가 마상검을 들고 피터란 백작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며 외쳤다.

“탈카타! 너 죽인다!”

그 모습에 피터란 백작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 더러운 오크 따위가!”

노련한 오크 검투사들이 기사와 맞먹는 기량을 가진 이가 간혹 있다는 사실은 백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땅 위에서의 이야기이다.

오크가 감히 기사에게 말을 타고 덤비다니?

“이 나를 이렇게까지 우습게 본단 말이냐!’

기마술을 배운 오크 따위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피터란 백작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분노로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피터란 백작이 오크 검투사, 탈카타와 격돌했다. 서로의 검과 창이 서로를 스치고 지나갔고…….

서걱!

피를 뿌리며 피터란 백작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툭!

데구르르…….

머리 잃은 피터란의 몸이 말에서 떨어진다. 그의 애마가 주인을 잃고 조금 달리다가 제자리에 선다. 떨어진 피터란의 머리를 검을 뻗어 꿰어 올린 뒤, 탈카타가 당당하게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갔다.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피터란의 목을 내밀며 탈카타가 오크어로 외쳤다.

“나의 주인이여, 적장의 목을 베었나이다!”

“으, 응. 잘했다.”

레펜하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그리고 눈앞의 오크, 탈카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교육은 되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아직인가…….”

레펜하르트가 타오반 상회를 통해 데려온 이는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예전 롤페인 상회의 테리크를 죽이고 엘프와 오크 노예들을 거두어 타오반 상회에 맡긴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인간의 교육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지금, 슬슬 기회가 왔다 싶어 다시 데려온 것이다.

‘계획은 반쯤 성공했는데 말이지.’

오크 검투사였던 탈카타는 그동안 기마술을 정식으로 배워 이제는 어지간한 기사 수준의 마상 전투가 가능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머슴 신세였던 오크들도 검투사 탈카타 밑에서 검술을 익히고 전사의 정신을 배워 쓸 만한 무사로 탈바꿈했다. 성노였던 엘프 여인들은 회계 부기며 각종 상인의 수법을 배워 현재 능숙하게 군량미를 관리 중이다.

타오반 상회주 시볼트 역시 이들이 ‘인간처럼’ 지식을 배우고 익히자 그 효과에 놀라 자신의 노예들도 비슷한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차탄 공국의 다른 상회들도 비슷한 짓을 시작했다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레펜하르트의 계획대로 되었는데…….

‘정작 노예들은 아직도 사상 변화가 그리 안 보인단 말이야.’

기대했던 노예들의 자유 의식은 영 깨우쳐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맡겨 두었던 엘프와 오크들은 분명 예전보다 유능하고 영리해졌지만, 그만큼 레펜하르트를 진정한 주인으로 생각하고 충성심만 깊어져 있었다. 이들이 의리가 있고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주인이라 생각해 맹목적으로 섬기는 것은 문제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개가 늑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보다 충견이 되어 있다.

‘하긴, 고작 반년 지나 놓고 뭘 벌써부터 결과를 바라냐? 나도 참…….’

잠시 고민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어차피 이건 금방 효과를 볼 거라 기대하고 세운 계획이 아니었다.

마켈린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요원한 것이 그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지금이야 인간다운 교육을 받는 것이 ‘특권’이라서 저리 충성을 다하지만, 모두가 노예를 교육시키기 시작하고 그것이 ‘당연’해지면 노예들의 사상도 분명 변화가 오리라.

서두를 필요는 없다.

여러 씨앗을 뿌리다 보면 언젠가는 싹이 트리라 믿고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충성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탈카타에게 물러가라 손짓하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쟤도 얼른 칼켄이랑 스탈라에게 맡겨서 정신 교육 좀 시켜야지.’

저들이 여전히 노예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상관없다. 그럼 자유로운 동족들 사이에 집어넣으면 된다. 그러면 저들은 자유 의식을 가질 것이고, 저들이 배운 인간의 교육은 이종족들에게 자유를 찾을 훌륭한 힘이 되어 주겠지.

호위를 위해 다시 마차 선두로 말을 몰고 가는 탈카타의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드워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슬슬 출발할 준비를 합시다!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알겠소, 구원자시여.”

안 그래도 드워프들은 실란을 주축으로 열심히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죽은 기사들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고,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실란이 치유술을 펼친다. 드워프들도 보병들에겐 딱히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기에 대부분 도주하고, 남은 부상자는 많지 않았다. 넘치는 신성력으로 실란은 부상자들을 전원 운신 가능한 수준까지 치료하고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동안 먹을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저 녀석, 잘하네.’

레펜하르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실란 입장에서는 그냥 성직자다운 인도적인 자세를 보인 것이지만 인간 병사들에겐 의미가 다르다. 그들이 노예로 치부한 드워프들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런 자비로운 대접까지 받은 것이다. 그동안의 인식이 있어 차마 대놓고 감사를 표하진 못하지만 다들 드워프를 바라보는 표정들이 바뀌어 있다.

전투가 정리되자 오크 무사들이 다시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곡식의 양과 보존 상태를 점검하던 엘프 여인들도 길 떠날 차비를 갖췄다. 드워프들도 다시 로브를 걸치고 마차 옆을 따라 걸었다.

곡식을 실은 마차 행렬이 다시 관도를 따라 덜컹덜컹 움직이기 시작했다.

2

델피나 남작가 2층의 커다란 응접실, 그곳에 지금 스무 명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유벨 왕자군의 주축인 그들은 페오닌 백작과 하론 남작, 스팔 백작 등 크로방스 왕국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거상 출신의 귀족들과 고트 후작이며 라이드 공작 등 역사 깊은 가문의 귀족들로, 테이블 하나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본 채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페오닌 백작, 크로방스 최대의 상회였던 페오닌 가문의 주인이자 유벨 왕자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그가 허연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공, 그대의 도움에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실제로 페오닌 백작은 눈앞의 이 거구의 마법사를 진심으로 환대하고 있었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레펜하르트를 이렇게 환영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외국인인 데다가 마법사이기까지 한, 이런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을 믿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현재 유벨 왕자군 측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를 잃고 이곳 델피나 남작령까지 후퇴한 처지였다.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전쟁, 거기서 레펜하르트가 들고 온 군량미는 그야말로 지옥에 내려온 한 줄기 구원의 동아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벨 왕자군의 귀족들은 레펜하르트의 합류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내건 조건, 크로방스 왕국 내에 이종족을 위한 자치령을 달라는 그 요구마저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너무 시원시원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상당히 설득에 난관을 겪을 거라 예상한 유벨이나 레펜하르트가 되려 의아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유벨 왕자 측 상황은 이미 모든 말을 잃고 체크메이트 직전까지 간 체스판이나 다름없다. 레펜하르트가 꿍꿍이를 지니고 접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믿은 다음 뒤통수를 맞건 믿지 않고 레펜하르트를 내치건, 어차피 유벨 왕자군에 남은 것은 파멸뿐이었다.

그리고 저 자치령의 조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자신의 영지를 잃고 목이 달아날 판이다. 제 영지를 떼어 준다 해도 울면서 승낙해야 할 판인데 별 가치도 없는 적측의 영지를, 그것도 승리하고 나면 달라니?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페오닌 백작이 난색을 표하는 것은 또 다른 레펜하르트의 요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대의 요구는 너무 어이가 없구려.”

처음, 레펜하르트가 마차 가득 곡물을 싣고 나타났을 때는 모두가 환호를 터트렸다. 그가 드워프며 엘프들을 잔뜩 데리고 온 것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저 정도 부자라면 노예를 잔뜩 거느리고 있는 것도 당연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앞에서 레펜하르트가, 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전사들로서 유벨 왕자군에 가담하러 왔으며, 자신은 어디까지나 동맹의 자격으로 그들과 교류한다고 선언했을 때는 다들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저들은 야생의 드워프와 엘프들이다. 그것들과 교류를? 마치 늑대나 호랑이 무리와 교류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이자의 의견을 묵살했다간 소중한 군량미가 날아갈 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 그렇군요.’하고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솔직히 레펜하르트가 제정신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레펜하르트는 지금 회의에서 자신이 데려온 드워프와 엘프 들을 정식 병력으로 인정하고 인간 용병처럼 계약을 맺은 뒤 전투에 참가시켜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들의 참전이 제가 군량을 대는 조건 중 하나입니다.”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저 ‘정신 나간’ 마법사를 바라보며, 페오닌 백작은 미간의 주름을 찌푸렸다.

‘마법사라 했으니 뭔가 마법으로 저들을 길들인 모양인데 그렇다고 저것들이 사람처럼 대하자니…… 하여튼 마법사들의 괴팍함은 못 말리겠군.’

하론 남작이 달래는 목소리로 레펜하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공께서 영지 내에서 무슨 뜻을 세우시건, 그것은 저희들과 상관없는 이야기이니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자고로 뛰어난 상인의 조건은 흥정을 잘하는 것이다. 하론 남작은 자치령에 대한 조건을 흔쾌히 넘기는 관대함을 보여 준 뒤 바로 레펜하르트의 요구를 반박했다.

“하지만 노예 종족들을 내세워 반격에 나선다니? 이것은 전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몽상일 뿐이외다. 어찌 고집을 피우시는 게요?”

다른 귀족들도 열심히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소, 레펜하르트 공. 저것들이 나름 싸움 좀 할 줄 안다고 칩시다. 그렇다 한들 고작해야 백 명 남짓한 이들이 뭘 할 수 있겠소?”

“정확히는 126명이지요. 그리고 자유로운 오크들, 푸른 곰 부족 역시 합류할 것입니다.”

“야생의 오크라 봐야 야만성이나 떨칠 줄 알지 대규모 전쟁에서 쓸모가 있을 리 없지 않소?”

다들 귀족도 아닌 레펜하르트에게 공이라는 칭호까지 써 가며 열심히 비위를 맞추려 했다. 사실 유벨 왕자 앞이라 말을 못할 뿐이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삼천밖에 남지 않은 병력, 보급이 확보된다 해서 이 전쟁에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저 정도 군량이 있다면 장기간의 농성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카르사스 측과 좋은 조건으로 협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상당히 토지를 빼앗기겠지만 영지도 어느 정도는 돌려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협상 속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 유벨 왕자의 목일 터, 그래서 지금 이 회의에서 대놓고 안건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여튼 이미 자신의 영지를 빼앗긴 이들 입장에선 레펜하르트의 군량미가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그런데 자꾸 상황 파악도 못 하고 고집만 피우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젊은 축에 끼는 갈린 남작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공, 드워프와 엘프들의 가격이 얼마인데 그들을 전장으로 내보낸단 말입니까? 차라리 저것들을 팔아서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 정도 숫자의 드워프와 엘프들이란 차탄 공국에서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상회를 알아보도록 하지요.”

순간 레펜하르트가 눈을 부라렸다. 그가 또다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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