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영혼의 형제
1
투혼의 축복을 받은 자, 카루가.
이는 오러를 각성한 전사를 칭하는 오크 특유의 표현이다.
스피리츠 웨폰, 무기의 혼을 끌어내는 수준에 다다른 오크들은 전사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그 전사들 중에서도 월등하게 뛰어나 오러를 각성한 이는 투사, 카루가라 불리며 전사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고대에는 모든 투사들의 인정을 받아 오크 부족 전체를 지배하는 대투사, 타이카루가라는 직위도 있었다지만 각 부족 대부분이 오지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현 시대에선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일 뿐. 즉 투사의 칭호는 현 시대의 오크들에게 가장 위대한 전사를 칭하는 표현인 것이다.
스탈라 랑가르 베타.
그녀는 푸른 곰 부족에서도 두 명밖에 없는 투사의 칭호를 지닌 이였다. 모든 오크들의 존경과 경애를 받고 있는 최강의 무인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인간을 투사라 칭하다니? 오크 전사들이 다들 경외 어린 시선으로 러스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루가!”
“카루가 클타 차세르!”
오크어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러스는 오크들이 자신에게 상당한 경의를 보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자신이 겸손한 성격은 아니란 걸 알지만…….
‘아니, 나 정도로 놀라면 나중에 형님 보고는 어쩌려고?’
후드를 걷은 스탈라가 공터로 걸어 나온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러스는 잠시 당황했다.
‘어, 여성이었나?’
위압감이 대단했기에 당연히 스탈라가 남자라고만 생각했던 러스에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비록 시리스나 틸라와 함께 다니며 그녀들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는 그였지만, 아무래도 기사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여성은 보호해야 할 약한 존재란 인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거, 여자를 상대로 검을 휘둘러야 하나?’
난처해하며 러스가 마지못해 검을 뽑을 때였다. 가까이 다가온 스탈라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던졌다!
휘리릭!
스탈라의 전신이 황야의 햇살 아래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러스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여성?’
뭔가 이상했다.
아니. 분명 여자는 여잔데…… 저 우락부락한 이두박근과 삼두근, 대퇴근이 참 사람 섬뜩하게 만든다. 아니, 자고로 체지방은 골고루 빠져야 정상이거늘 저 오크 여인은 어떻게 배에는 선명한 식스팩 복근을 새겨 놓고도 저리 풍만한 가슴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오크족의 특성인가 싶어 다른 오크들도 힐끔거렸는데, 전사 중에도 간간히 민둥민둥한 복부가 보이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기가 막혀하는 러스를 향해 스탈라가 자신의 애병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무기는 길이 40센티미터 정도의 두 자루 단검이었다. 대부분의 오크들이 ‘무기는 자고로 커야 아름다운 법!’이라 여기는 풍습이 있는데 그녀는 독특하게도 단병을 애용하고 있었다.
두 자루 단검을 쥐고 자세를 잡은 뒤 스탈라가 공용어로 고함을 질렀다.
“푸른 곰 일족의 어미, 투사 스탈라! 너와 싸운다!”
☆ ☆ ☆
우우웅!
굉음과 함께 러스의 롱 소드가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가장 순수한 파괴의 빛, 블레이드 오러가 황야의 대지 위로 그 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텔라의 쌍수 단검 역시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냈다. 청보랏빛 오러가 단검의 날을 감싸고 눈부시게 백열한다.
웅웅웅웅!
투기가 피어오르며 러스와 스텔라 사이의 대기를 달구기 시작했다. 투기의 흐름이 공기를 찢고 희미한 소음을 일으킨다. 러스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저 자세를 잡고 서로를 노려볼 뿐인데…….
‘강하다!’
스탈라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소리 없이 흘러와 그의 전신을 얽맨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전신이 위험 경보를 계속 울린다. 더 이상 상대가 여성이니 오크니 하는 것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의 저 오크 여인은, 레펜하르트 이후 처음 만나는 엄청난 강자였다!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오러 유저들보다도 더한 기운이다!
‘기세에서 더 밀릴 수는 없지!’
러스의 검 끝이 살짝 흔들린다. 스탈라의 두 자루 단검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타아아앗!”
기합을 길게 늘어뜨리며 러스가 선공에 나섰다. 4미터의 거리를 격한 채 그가 검을 길게 휘둘렀다. 청색의 오러가 채찍처럼 늘어나며 스탈라의 다리를 후려갈겼다.
“하핫!”
웃음을 터트리며 스탈라가 땅을 박찼다.
콰앙!
폭음이 울리며 박찬 부분에서 흙먼지가 폭발같이 일어 올랐다. 무시무시한 다리 힘으로 땅을 박찬 스탈라가 곧바로 러스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청보라색 오러를 머금은 두 자루 단검이 러스의 시야를 어지럽게 뛰어논다.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스탈라는 단숨에 러스의 전신 급소를 정신없이 찔러 댔다. 반격 대신 러스는 몸을 비틀어 치명상을 피하며 오히려 스탈라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저 수많은 공격을 일일이 쳐 내느니, 차라리 화끈한 일격을 가해 스스로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랄까?
“오? 그대 영리하다!”
날아오는 공격을 무시하고 오히려 반격하는 짓은 어지간히 노련한 전사가 아니면 실행하기 힘든 짓이다. 감탄하며 스탈라는 재빨리 공격을 거두고 단검을 교차해 가슴을 지켜 냈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와 두 줄기 청보라색 오러가 허공에서 교차해 강렬한 파문을 터트렸다.
쩌엉!
뇌성이 울리며 일어난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땅거죽을 파헤치고 대기를 달구었다. 연달아 칼날이 맞붙으며 연신 파동을 퍼트렸다. 강렬한 파괴의 잔재가 애꿎은 황야의 대지를 열심히 갈아엎기 시작했다.
“타아앗!”
“크라라라!”
스탈라와 러스는 그렇게 수십 차례의 검격을 교환하며 맹렬히 싸워 댔다. 기량이나 오러의 위력은 스탈라가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재능만큼은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는 러스였다. 모자란 경험이나 기량을 오로지 본능만으로 커버하며 러스는 놀랍게도 스탈라와 평수를 이루는 위업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하는 스탈라의 얼굴에 점점 더 감탄의 빛이 짙어졌다.
‘참 신기하기도 하네. 어떻게 저기서 저런 공격을 하지?’
러스의 검은 실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분명 등을 돌렸는데 갑자기 좌측에서 검이 날아오는가 하면, 분명 내려 베기였는데 예기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예의 그 ‘러스 특유의 자유로운 공격’이었다. 무술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검격이 그녀의 예상 범위 밖에서 계속 치고 들어와 승세를 유지하면서도 정작 결정타를 먹일 수가 없었다.
하여튼 신 나는 싸움이었다. 투혼의 축복을 받은 이래 이 정도로 손맛이 오는 상대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흥이 오른 스탈라가 입을 열어 러스를 향해 찬사를 내뱉었다.
“재능이 대단하구나, 젊은이! 하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군!”
떠들고 나서야 상대가 오크어를 모른다는 것이 떠올랐다. 스탈라는 공세를 피하며 공용어로 다시 외쳤다.
“너 잘났다! 하지만 난 늙었다!”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았다. 스탈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끙, 저 말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어쩔 수 없다. 아무리 현명한 스탈라라 한들 어쩔 수 없이 오크는 오크다. 제 아무리 머릿속에 현자의 언어가 가득하다 한들 오크의 혀와 성대로는 단순한 공용어밖에 나오질 않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역시 러스는 어리둥절해할 뿐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스탈라가 말을 이었다.
“칭찬이다!”
“……?”
“됐다! 그냥 싸우자!”
스탈라의 단검이 화려하게 춤을 췄다. 러스의 롱 소드도 그에 맞춰 부드러운 궤도로 흐르듯 움직인다. 검과 검이 손잡은 화려한 연무, 그렇게 둘은 이 황야의 무도회장에서 칼날의 춤을 추며 한껏 어우러졌다.
얼마나 정신없이 싸웠을까? 둘 다 슬슬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수없이 검격을 교환했지만 정작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 애꿎은 황야만 봄철 보리밭처럼 신 나게 갈아엎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밑천을 좀 꺼내야 쓰겠는데?’
갑자기 스탈라가 양손의 단검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리고 소리쳤다.
“세테아! 란다트!”
애병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는 단검의 혼을 일깨웠다. 청보라색 오러가 순수한 보랏빛으로 변하며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상태로 스탈라가 양 손바닥을 펼쳐 수도의 형태를 취했다.
우우웅!
양손에서 오러의 칼날이 일어나 길게 뻗어졌다. 그녀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가자, 나의 자매여!”
보랏빛 단검들이 허공을 비행하며 러스의 좌우로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 ☆ ☆
두 자루 단검이 섬뜩한 기운이 담아 좌우로 날아온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파괴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러스는 검을 고쳐 쥐며 안색을 굳혔다.
‘저게 형님이 말한 그거군.’
이미 시리스와 틸라를 통해 본 수법이지만, 그래도 직접 마주하니 당황스러웠다.
오러 유저가 된 이래 어지간한 건 척 보면 요령을 파악할 수 있었던 그다. 드워프들의 수법, 대지 공명도 신체가 달라 따라 하질 못할 뿐이지 방식 자체는 파악한 지 오래다.
그런데 저 수법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거참…….’
러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검을 허공에 띄워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는 건 오러 유저에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검에 오러를 덧씌운 뒤 의지력으로 움직이면 되는 문제니까.
문제는 그래 봤자 딱히 쓸 데가 없다는 점이었다. 허공에 뜬 검 조종하느라 정신 팔리다 칼침 밖에 더 맞겠나? 원거리 공격이 필요하면 그냥 오러를 날리면 된다. 굳이 칼을 던질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저 수법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오러 유저인 러스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스탈라와 단검 사이엔 어떠한 기운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스탈라가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단검들이 저 혼자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정신 팔릴 일도 전혀 없을 터.
‘역시 형님 말씀대로 오러와는 전혀 상관없는 건가?’
오러 영역권을 넓혀 단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러스는 눈을 부라렸다. 방금 전 레펜하르트의 설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크들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은 검과 소통해 그 혼을 일깨우는 수법이라고 한다. 뭐, 저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거지, 실제로 내가 연구해 본 바론 좀 달랐지만.
틸라가 싸우는 시간 동안 레펜하르트는 시간을 들여 러스에게 오크들의 비전에 대해 아는 대로 자세히 알려 주었다. 시리스 때의 실수를 또 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틸라야 상황이 급해 그냥 내보냈지만 다음 차례인 러스는 시간이 제법 있었으니까.
오크들의 믿음과 달리 단순한 도구일 뿐인 무기에 정말 영혼이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오크 전사들이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하면 정말로 무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인다. 이 비합리적인 현상을 마법사인 레펜하르트가 연구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안타레스 제국 황제이던 시절 그는 타시드며 다른 오크 전사들을 연구하며 그들의 비전에 대해서도 상당히 파악한 바가 있었다.
-정확히는 검의 영혼이 아니라, 오랫동안 애용해 온 무기에 오크 전사 자신의 사념이 깃드는 거야. 장시간 자신의 의식을 투영해 잔존 사념을 남기고, 그 사념력이 무기를 일종의 반 정보체로 만드는 거지. 마법으로 비유하면 인공 지능 상태라고 해야 하려나? 뭐, 마법사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단순한 상태지만.
이성을 지닌 존재가 강렬한 감정이나 의식을 동반하면 세상의 흐름에 자취를 남긴다. 그것이 잔존 사념.
-오크들은 세상의 종족들 중에서도 단순하기로 이름 높은 이들, 단순한 만큼 그들의 사고는 강렬하지. 그들이 자신의 무기를 애지중지하는 행위가 곧 무기에 잔존 사념을 싣는 행위가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저 스피리츠 웨폰이다. 저 능력을 응용해서 자신의 사념을 투영해 짐승을 길들이거나 하는 짓도 가능하더군. 다이어울프 같은 사나운 맹수를 오크들이 길들일 수 있는 것이 그런 이유지.
오크들의 진정한 종족 특성은 단순히 무기를 날아다니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물체에 깃든 자신의 사념력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연구 끝에 오크들의 진정한 힘을 깨달은 레펜하르트는 전율했다. 즉, 오크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그저 생각만으로도 사물을 움직이거나 타인을 정신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에.
그래서 안타레스 제국 시절, 레펜하르트는 한때 수하 오크들을 모아서 자신의 이론을 가르치고 의식적으로 사념력을 발동시키는 훈련을 하기도 했었다. 잘만 하면 엄청난 무기가 오크들에게 주어질 거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오크들의 사념은 분명 물리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위력이 너무 미미했다. 오랜 기간, 올곧게 정신을 집중해야 간신히 그 사념력이 현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즉, 잔존 사념이라는 형태가 될 때까지 사념력을 집중해야만 비로소 물리적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집착에 가까운 애정, 진정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 아니면 잔존 사념은 남지 않는다. 그걸 깨닫고 아쉬워하며 결국 실험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전생의 이야기를 러스에게 할 수는 없는 법, 그 부분은 쏙 빼고 레펜하르트는 실용적인 부분만 설명해 주었다.
-무기에 깃든 사념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무기는 진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인다. 아마도 오러 유저 정도 되면 거의 분신이라고 봐도 좋다. 잔존 사념에 담긴 본인의 정보가 많을수록 본인의 기술이나 경험 역시 많이 남아 있으니까.
날아드는 단검의 움직임을 느끼며 러스는 내심 혀를 찼다.
‘과연, 아까까지의 오크들과는 움직임의 차원이 다르군.’
오러가 깃든 두 자루 단검은 춤추듯 허공을 유영하며 러스의 빈틈을 교묘하게 노리고 있었다. 공격 하나하나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고 섬세했다. 같은 쌍검이라지만 잘카토가 선보였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정말로 보이지 않는 두 명의 스탈라가 더 있어 합공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으, 진짜 까다롭네.’
이를 악물며 러스는 연신 공격을 피해 댔다. 반격할 여력은 없었다. 단검을 날린 스탈라 역시 가만히 서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양손에 오러를 가득 머금고 계속 위력적인 수도를 휘두르는데, 그것만으로도 땅이 파이고 대기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콰콰콰쾅!
단검과 스탈라가 동시에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뻗어 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각도, 러스는 이번에도 방어 대신 오히려 길게 칼을 찔러 넣었다.
“타아앗!”
아까처럼, 공격을 일일이 막아 내는 대신 오히려 마주 칼을 날려 상대를 물러나게 하는 수법이었다. 역시나 스탈라도 공격을 거두고 수도를 교차해 방어 태세를 갖추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결과는 조금 전과 달랐다.
스탈라는 물러섰지만 그녀의 단검, 세테아와 란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파앗!
섬뜩한 소음과 함께 한 줄기 섬광이 러스의 어깨를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신음을 흘리며 러스가 오른팔을 늘어트렸다.
뚝! 투둑!
오른팔을 타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최대한 몸을 틀어 좌측, 세테아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역시 우측 단검, 란다트의 오러까지 피할 겨를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잘리진 않았지만 힘줄을 당했는지 팔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으윽…….”
왼손만으로 검을 든 채 고통을 억누르는 러스를 보며 스탈라가 호탕한 외침을 토했다.
“나의 승리다!”
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대의 실력이 그보다 위인 것은 이미 인정한 지 오래다. 경험, 기량, 오러의 위력. 모든 점에서 러스는 아직 스탈라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기는 역시 아쉬웠다.
그는 아직 모든 것을 보여 주지 못했다!
갑자기 러스가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아직은 아니오!”
퍼엉!
러스의 발밑이 폭발했다. 몸을 날리는 기세가 지나쳐 땅이 움푹 파인 것이다. 그 상태로 돌진한 러스가 왼손에 쥔 롱 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채 스탈라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며 이를 악문다.
‘아직 실전에서 쓸 만큼 숙달되진 않았지만…….’
그랜드 포지에서 갑자기 닥쳐 온 깨달음, 일주일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그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 덕에 작은 것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상대가 오크라는 것 따윈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스탈라는 분명 그가 존경할 만한 위대한 검사였다. 그런 검사에게 뭔가 보여 주고 싶었다.
검을 내리치며 러스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제발 성공해라!’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팬텀 디바이드!”
칼날의 꽃이 화려하게 만개했다. 수십 개의 참격이 스탈라의 시야를 가득 메우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 ☆ ☆
시야 가득 칼날의 폭풍이 불어닥친다. 푸르디푸른 오러가 수십 개의 참격에 깃들어 사방에서 쏟아져 온다.
하지만 스탈라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뭐지?’
겉보기에는 엄청나게 화려한 기술이겠지만, 그래 봤자 결국은 칼질 좀 많이 하는 것뿐이다. 보통 전사들에게야 저런 어지러운 환검幻劍이 효과가 있겠지만 그녀는 오러 능력자였다. 저 무수한 참격 중 어느 것이 실체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기척이 느껴지는 것은 세 개뿐. 나머지는 속임수군.’
오러 능력자에게 저렇게 덤벼 봤자 결과는 팔다리 날아가고 바닥을 뒹굴 뿐이다. 상대도 오러 유저이니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아무래도 마지막 힘을 폭발해 생사를 도외시한 최후의 공격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인간 무인이 보았다면 어리석은 자살행위라며 비난해 마지않았을 것이지만…….
“젊은 총각이 싹수가 있구먼!”
오크인 스탈라는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다.
‘암, 자고로 검 든 놈이 그까짓 팔다리 한두 개에 연연해서야 쓰나?’
흡족해하며 스탈라는 마주 돌진해 불어오는 칼날의 폭풍 사이로 뛰어들었다. 속임수에 불과한 참격 대부분을 무시하며 그녀는 오러 깃든 수도로 진짜 공격을 쳐 냈다. 그녀의 단검들도 남은 두 개의 검격을 허공에서 막아 냈다.
콰콰쾅!
오러와 오러가 맞부딪쳐 폭음이 울렸다. 그렇게 러스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낸 뒤 스탈라는 남은 한 손으로 길게 블레이드 오러를 뻗어 냈다. 목표는 허벅지, 상대를 죽이지는 않되 확실하게 상처를 입혀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막 오러의 수도를 휘두르려던 차였다.
번쩍!
섬광이 번뜩이며 순간 옆구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 자신의 수도에 가로막혀 있을 러스의 롱 소드가 어느새 좌측에 위치해 그녀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크억?”
신음을 흘리며 스탈라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분명 이쪽으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니, 이건 대체?”
“어, 오러를 응용하면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관전하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조금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같은 오러 유저인 그는 지금 러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내 알아챌 수 있었다.
스탈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러를 끌어내 옆구리를 지혈하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척과 실체를 분리하는 기술인가?”
지금 러스는 오러와 실검을 섞은 뒤, 오러로 자신의 기척을 가장해 실체를 숨겨 참격을 날린 것이다.
그 절묘한 오러 운용 방식에 스탈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런 짓거리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센스를 타고 나야 가능한 수법. 실제로 레펜하르트와 스탈라도, 뭔지는 알아보았을지언정 따라 할 수는 없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정작 러스는 그리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검을 쥔 채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쳇, 실패인가…….”
구경하고 있던 오크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칼 잘 먹여 놓고 뭐가 실패라는 것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라는 이해한 표정이었다.
“제법 쓸 만한 공격이었지만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스탈라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러스의 저 수법의 약점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기술을 따라 할 수는 없지만 그 기술을 파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기척을 무시하고 실체가 가르는 공기의 물리적 진동에 감각을 집중하면 되는 문제다.
즉, 러스의 이번 공격이 스탈라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한 이상 저 수법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러스가 실패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자, 그럼 젊은이에게 한 수 가르쳐 주지!”
자세를 취하며 스탈라가 의기양양하게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단검과 연계하며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냈다. 러스도 재차 검을 들고 반격에 나섰다.
“팬텀 디바이드!”
또다시 무수한 참격이 비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이번엔 스탈라도, 그녀의 사념이 깃든 두 단검도 기척을 무시하고 대기의 진동을 인식해 반격에 나섰다. 눈부신 블레이드 오러가 허상을 연달아 베어 내며 러스의 실체를 향해 매섭게 검을 찔러 간다!
“타아앗!”
순간 러스가 기합을 터트리며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검의 환영이 그녀의 허벅지를 노리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그것은 기척일 뿐이다.
목을 노리는 진짜 참격을 인식하며 스탈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확실히 실체다! 대기의 흐름이 그것을 증명한다!
“헙!”
고함과 함께 당당히 수도로 검을 막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러스의 롱 소드가 딱 1미터 아래로 이동하며 그녀의 허벅지를 베어 갔다!
“크윽!”
스탈라는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섰다. 러스가 혀를 찼다. 너무 얕았다. 고작해야 거죽만 베었을 뿐이니 그녀의 전투력에는 거의 지장이 없으리라.
하지만 스탈라는 입은 상처 이상으로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베였다.
그것도 이번엔 기척에 베였다.
아니다. 정확히는 갑자기 공간이라도 이동한 것처럼 실체와 기척의 공격이 서로 위치를 바꾼 것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도, 러스가 희열에 차 중얼거렸다.
“서, 성공했어!”
오크들의 표정이 더더욱 기묘해졌다. 아까는 제대로 칼침 놔 놓고 실패라더니, 이번엔 슬쩍 스쳐 놓고 성공했다고 좋아한다.
‘대체 왜 저래?’
반면 러스의 수법을 알아볼 안목이 있는 스탈라는 경악한 얼굴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대단…… 하다…… 이건 대체?”
“헤에…….”
러스와 스탈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감탄을 흘렸다.
지금 러스가 한 짓은 그 역시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저것은 그가 익히고 배워 온 무예와 전혀 궤를 달리 하는 부분이라, 비록 레펜하르트가 러스보다 더 강한 오러 능력자라 한들 알아볼 수 있는 수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뭔 짓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스탈라의 착각과 달리 러스는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해 실패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첫 번째 팬텀 디바이드는 기술 시전을 ‘실패’했던 것이다. 기척과 실체가 분리되는 그 효용은 그저 실패한 기술의 부산물일 뿐이다.
성공한 팬텀 디바이드는 단순히 그 정도 기술이 아니었다.
‘벌써 허공검에 대한 감을 잡은 건가? 진짜 천재는 천재네.’
지금 러스가 한 짓이야말로 전생에서 타시드를 그토록 괴롭혔던 검성 사이러스의 절기, 허공검虛空劍의 초입이라 할 수 있었다.
대륙의 모든 무예를 벗어나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어 낸 최강의 검사, 검성 사이러스.
그의 검은 공간을 넘나들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몇 미터에 불과한 협소한 범위에서만 가능한 기술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위업은 모든 무인과 마법사들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현 시대의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3대 요소.
시간과 물질, 그리고 공간.
오러를 극한으로 연마한 그는 결국 검 한 자루로 세상의 법칙을 타파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대마법사인 레펜하르트도, 심지어 사이러스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냥 감각적인 부분이라 이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덕분에 사이러스의 수많은 제자들도 허공검만큼은 수련은커녕 감조차 못 잡고 포기했었다.
‘저걸 다시 보니 참 기분 묘하네.’
레펜하르트는 씁쓸해하며 뺨을 긁었다. 전생의 타시드가 저 허공검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익히 봐 온 그였다. 칼날이 공간을 뛰어넘어 베어 오는데 피하거나 막거나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크다운 강건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시드 놈은 결국 막아 냈지만.’
저 수법에 대한 타시드의 대응책은 실로 오크다운 것이었다.
‘그냥 감으로 때웠지, 아마?’
허공검 자체야 대뜸 나타나는 식이니 도저히 예측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검을 휘두르는 사이러스는 명백하게 인간인 것이다.
타시드가 한 짓은 검이 아닌, 그걸 휘두르는 사이러스의 생각을 예상하고 막아 내는 방식이었다. 좋게 말해서 예측이지, 진실은 ‘하도 자주 상대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감이 와서.’라는 쪽이 옳다.
하여튼 지금 하는 걸 보니 러스는 저 젊은 나이에 벌써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단초를 잡은 모양이었다.
‘그랜드 포지에서 며칠 틀어박혀 있더니, 결국 저걸 건져 온 모양이군.’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는 상념을 거뒀다. 러스가 저런 모습을 보인 이상, 스탈라도 이제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공터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긴장된 분위기가 황야의 하늘 위로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탈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러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상대의 체력이며 오러의 양이 확 떨어진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역시 방금의 그 기술로 힘을 상당히 소모한 모양이었다. 오른팔을 당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지친 듯 보인다.
‘슬슬 끝을 봐야겠군.’
아쉽지만, 스탈라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러스는 충분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스탈라는 러스 말고도 한 사람을 더 상대해야 하는 몸이었다.
‘저 덩치 큰 인간 역시 투혼의 축복을 받은 자…….’
이쪽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스탈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오러 유저뿐이다. 지금 이 자리의 오크 전사 중 오러 유저는 스탈라 자신뿐, 러스와 싸우고 연이어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려면 힘을 비축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스탈라가 손을 뻗었다. 허공의 두 자루 단검이 그녀의 손아귀로 날아와 잡혔다. 러스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스피리츠 웨폰을 거두다니?
스탈라가 어금니를 한껏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재밌었다! 이제 끝을 보자!”
러스도 움직이는 왼손을 들어 재차 자세를 갖추었다. 지금 그의 상태로 선공은 무리였다. 남은 체력으로 가능한 것은 상대의 공세에 맞춰 카운터를 날리는 것뿐.
‘한 번 더 팬텀 디바이드를 발동할 수 있을까?’
체력도 한계에 달했고, 게다가 이 팬텀 디바이드는 그리 성공률이 높은 기술이 아니었다. 그토록 연습했지만 아직도 열 번에 한 번 성공할까 말까였다. 그나마 방금, 두 번 중 한 번이나마 성공한 것도 사실 행운의 여신의 축복이라 할 정도다.
‘에이, 지면 지는 거지.’
러스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오크 투사, 스탈라의 감탄도 끌어냈다. 할 만큼 했으니 딱히 더 욕심날 것도 없다.
검을 겨눈 채 러스가 마지막 투기를 끌어 올렸다. 아무리 패배를 각오했다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져 줄 생각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를 뿐!
스탈라도 투기를 끌어 올렸다. 어찌나 강렬한 기운인지 그녀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처럼 대기가 일그러지고 있다. 그렇게 두 오러 유저는 서로를 보며 최후의 일격을 가할 틈을 노렸다.
“하압!”
먼저 몸을 날린 것은 역시 스탈라였다. 스탈라가 단검을 든 두 팔을 등 뒤로 길게 늘어트리며 새처럼 돌진했다. 러스가 카운터를 노리려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갑자기 스탈라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고함을 내질렀다.
“나의 열두 자매여!”
스탈라의 품 안에서 열 자루의 단검이 더 튀어나왔다! 미리 들고 있던 두 자루 단검을 합쳐 모두 열두 자루, 그 모든 단검이 화살처럼 일제히 쏘아졌다.
휘이이이익!
바람을 찢는 열 두 개의 굉음 속에서 러스는 경악했다.
“뭐, 뭐야?”
입이 쩍 벌어졌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러스도 이번만큼은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섬뜩한 기세를 담고 날아오는 열두 자루의 단검, 그 모두가 칼날에 보랏빛 오러를 여실히 담고 넘실거리고 있었다. 날아오는 궤적도 채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하다.
눈앞 가득 다가오는 열두 파괴의 빛, 러스는 카운터를 포기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본능이 그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대책 없다.
이건 전혀 대책이 없다.
러스는 재빨리 검을 놓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나의 패배요!”
2
황야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연이은 사투로 어느덧 해가 저무는 것이다. 석양을 등진 채 스탈라가 당당히 선언했다.
“호투의 의식, 세 번째 결투는 푸른 곰 부족의 승리다!”
그리고 곧바로 러스를 향해 소리쳤다.
“인간 투사여! 내 비록 승리했으나 그대의 패배가 강함을 가리지는 못하였으니, 그대는 진정한 전사이며 투사로 인정하겠다!”
“오오오오!”
“와아아아아!”
오크 전사들이 흥분한 고함을 터트렸다. 그 환호 속에는 스탈라뿐만 아니라 러스에게 보내는 환성 역시 섞여 있었다. 저 이방인은 무려 푸른 곰 부족의 투사와 저만큼이나 겨루어 자신을 증명한 것이다. 저런 자를 전사라 칭하지 않으면 누가 전사라 자처할 수 있겠는가?
“사이러스 카루가!”
“카루가 사이러스!”
러스의 이름을 환호하며 오크들은 주먹을 흔들어 댔다. 비록 패했지만 미련이 없는 듯 러스도 후련한 얼굴로 일행에게 돌아왔다. 실란이 잽싸게 신성력으로 그의 어깨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는 러스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잘했다, 러스. 그런데 대체 그건 언제 익힌 거야? 역시 그랜드 포지?”
“네, 그렇죠. 뭐.”
“그 기술, 팬텀 디바이드라고 했었나? 나중에 나랑 붙을 때도 보여 줘 봐. 한번 맛보게.”
“형님 상대로는 그리 쓸모가 없어요. 애당초 피한다는 개념이 없는 양반이 뭘…….”
쓴웃음을 지으며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스탈라나 다른 오러 유저라면 공간을 뛰어넘는 이 팬텀 디바이드가 무시무시한 기술이겠지만, 레펜하르트에겐 그리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스파이럴 가드로 몸을 감싸 버리면 어디서 뭐가 날아오건 별 상관이 없으니까.
팬텀 디바이드는 그 기적적인 효과만큼이나 구현에 필요한 오러양도 극심한 기술이었다. 공간을 넘는 데 힘 다 빼고 나면 정작 레펜하르트의 스파이럴 가드를 뚫을 여력이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것도 형님에겐 크게 문제 되지 않겠군요.”
스탈라를 돌아보며 러스가 피식 웃었다. 열두 개의 단검을 자유롭게 다루는 스탈라의 저 수법은 러스에겐 실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냥 몸으로 때우면 그만이다. 아무리 무기가 스스로 움직인다 해도 그 속에 깃든 오러는 분명 스탈라의 것, 열둘로 나누어진 오러에 스파이럴 가드를 뚫을 힘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붙어 봐야 아는 것이긴 하지만…….”
그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자, 그럼 내 차례구먼.”
☆ ☆ ☆
레펜하르트는 겉옷을 벗고 공터로 걸어 나갔다. 혹시 전투로 인해 옷이 상할 수도 있으니 아예 미리 벗고 나간 것이다. 한때 한 나라의 황제로까지 군림하던 작자치고는 참으로 쪼잔한 면모라 하겠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 시절 워낙 없이 살아서인지 현재의 레펜하르트는 그런 인식을 미처 못 하고 있었다.
웃옷을 홀랑 벗으니 강철의 육체가 여실하게 드러난다. 걸어 나오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환호를 날리려던 오크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헐…….”
“으음…….”
전사를 숭상하는 오크들이다.
강함을 찬미하는 오크들이다.
그런 오크들에게 저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멋지다 못해 실로 황홀할 지경이었다. 저 무시무시할 정도로 단련된 저 육체라니! 그것도 인간도 아닌 오크들 기준에서!
“허어.”
스탈라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진정이 가득 담아 찬사를 건넸다.
“몸매 죽이는데?”
“으음…….”
참으로 오크다운 칭찬에 레펜하르트는 얼굴을 붉혔다. 동족의 반응을 지켜보며 스탈라가 피식 웃었다.
“댁은 의식 안 해도 되겠다. 지금도 다들 뻑 간 눈치구만.”
확실히, 오크 전사들은 레펜하르트가 웃통을 깐 것만으로도 전사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저 정도 육체를 지니고 있다면 전사가 아닐 리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순박한 마초란 표현이 딱 걸맞은 이들이라 하겠다.
“뭐, 그렇다고 정해진 의식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중얼거리며 단검을 꺼내 드는 스탈라를 향해 레펜하르트도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가 선언하듯 외쳤다.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왈드 안타레스! 호투의 의식에 임하겠소!”
스탈라도 단검을 고쳐 쥐며 의식대로 자신을 소개했다.
“푸름 곰 부족의 투사 스탈라, 그대와 싸우겠다. 원래 호투의 의식은 서로 한 명씩 내보내는 것. 하나 투사인 그대와 맞설 수 있는 것이 나 뿐이라 어쩔 수가 없군. 용서하라.”
“상관없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터트렸다.
“으랏차차!”
황금색 오러가 불길처럼 일어 올라 그의 전신을 감쌌다. 스탈라도 포효를 터트리며 청보랏빛 오러를 끌어 올렸다.
“크라라라!”
그렇게 두 오러의 보유자가 서로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중후한 음성이 그들 사이를 끼어들었다.
“어이, 마누라! 그 친구는 내가 맡으면 안 될까?”
순간 놀라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허억!’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음성은 오크 전사들 쪽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일행들이 서 있는 곳, 바로 그 뒤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시리스며 틸라, 러스도 놀라 등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등에 멘 한 명의 오크가 서 있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스탈라처럼 전신을 망토로 감싸 눈만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강함이 느껴진다.
“누, 누구?”
“언제 여기에?”
다들 경악해 입을 벌렸다. 엘프의 예민함을 지닌 시리스는 물론 오러 유저인 러스조차도 누군가가 등 뒤에 다가올 때까지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망토를 두른 오크가 어금니를 매만지며 레펜하르트 일행 옆을 지나 공터로 다가간다. 스탈라가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남편?”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오크 사내를 보며 스탈라가 자세를 풀었다. 단검을 품에 갈무리하며 그녀가 물었다.
“언제 왔소, 남편?”
“아까 왔다, 마누라. 재밌어 보이기에 구경하고 있었지.”
레펜하르트 일행 전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저 망토를 두른 오크 사내를 바라보았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어디서 구경하고 있었단 말인가?
오크 사내가 힐끔 러스며 시리스를 훑어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들 등 뒤를 가리키며 공용어를 내뱉었다.
“그대들, 안 놀란다. 나 저 바위에 있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일행의 등 뒤에 펼쳐진 황야, 2~300여 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였다. 그제야 레펜하르트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 거리에 숨어 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법도 했다. 게다가 오러 유저의 시력이라면 2~300미터 정도 거리는 그리 멀다고 할 수 없으니 구경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바로 등 뒤까지 오는 동안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저 오크 사내가 적의를 지니고 있었다면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칼 맞고 쓰러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러스며 시리스는 여전히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오크 사내를 향해 경계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오크 사내가 스탈라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후드를 걷었다. 검붉은 피부에 오크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칼이며 제법 주름진 얼굴이 상당히 나이를 먹은 듯했다.
스탈라가 그를 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어째 벌써 왔소? 뱀들의 왕은 어쩌고?”
뱀들의 왕.
인간들은 엘더 드레이크라고도 부르는 이 강력한 몬스터는 오랜 세월 동안 푸른 곰 부족을 괴롭혀 온 천적 중 하나였다. 보통 드레이크들보다 두 배는 거대한 육체에 블레이드 오러로도 잘 베이지 않는 단단한 비늘을 지닌 이 흉폭한 마수를 사냥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이 홀로 부족을 떠난 것이 고작 열흘 전, 벌써 돌아왔을 것이라곤 스탈라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크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이미 잡아서 잘 토막 내 넘겨주고 오는 길이여.”
“벌써? 역시 내 남편이네. 한동안 포식하겠구먼.”
“잘했지?”
“잘했소, 잘했어.”
부부 간의 오붓한(?) 재회를 마친 뒤, 오크 사내가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유쾌한 어조로 소리쳤다.
“반갑소, 이방인 용사여. 푸른 곰 부족의 족장, 투사 칼켄이오.”
☆ ☆ ☆
레펜하르트 앞에 선 칼켄이 망토를 벗어 던졌다. 살짝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터질 듯한 근육으로 무장한 젊디젊은 육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허허, 사부 이후로는 처음일세?’
레펜하르트는 오랜만에 타인을 올려다보는 경험을 하며 어색해하고 있었다.
칼켄의 신장은 2미터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거의 왕년 권왕 테스론과 맞먹는 것 같았다. 뭐, 사부인 제라드보다는 살짝 작아 보였지만 오크들은 원래 인간보다 평균 신장이 약간 작고 대신 좌우로 넓은 체형이다. 딱 벌어진 어깨에 두꺼운 팔다리를 보면 덩치 자체는 오히려 사부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와 칼켄이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관전하고 있던 몇몇이 무심코 눈을 비볐다. 무지막지한 덩치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 원근감에 혼란이 온 것이다.
칼켄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인간 투사여, 아내를 대신하여 내가 그대를 상대해도 되겠는가?”
레펜하르트가 호쾌하게 대꾸했다.
“좋소!”
이것이 승패에 연연하는 결투였다면 굳이 지친 스탈라 대신 상대하기 까다로운 칼켄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겠지. 하지만 어차피 호투의 의식은 승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의를 거부할 경우 ‘전사답지 않은 치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니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호쾌한 모습을 보여 점수라도 더 따는 게 낫지.
“바라던 바요!”
칼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좋다! 남자답다!”
칼켄이 등 뒤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2미터를 훌쩍 넘는 칼켄보다도 더 긴 대검이었다. 검신 폭도 무지막지해서, 옆으로 뉘여 놓으면 족히 서너 명은 비 피할 공간이 나올 것 같았다.
우우웅!
거대한 대검의 검신 위로, 더더욱 거대한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한껏 머금어진다. 오러를 끌어 올려 검을 겨누며 칼켄이 외쳤다.
“무기를 들라!”
두 주먹에 황금빛 오러를 담은 채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취했다.
“나 자신이 곧 무기요!”
“호오?”
칼켄이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크들에게도 물론 전래되어 오는 맨손 체술이 있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맨손으로 무기를 상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스피리츠 웨폰이라는 비전이 있는 이상 무기가 있는 쪽이 오크는 월등히 강한 것이다.
“흥미롭군!”
눈을 빛내며 칼켄이 포효를 터트렸다.
“싸우자!”
순간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꿈이여, 깃들라. 임프로브드 슬립!”
동시에 달려들려던 칼켄이 풀썩 엎어져 버렸다.
“드르렁~!”
“…….”
관전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다들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강력한 오러 유저의 대결을 기대하며 막 눈을 빛내고 있었는데 이런 사태라니?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오크는 오크였다. 오러 유저라고 없던 마법 저항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실란이 벙찐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허무해…….”
러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설마 이걸 승리로 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시리스가 혀를 찼다. 호투의 의식은 어디까지나 전사의 기량을 가늠하는 행위다. 여기서 마법을 보여 봤자 오크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도대체 레펜하르트가 왜 저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래서야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될 텐데?’
역시나, 스탈라는 황당해하며 자빠져 주무시는 그녀의 남편과 손을 거두는 레펜하르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 이건 전사의 방식이 아니다!”
억울한 듯 외치는 스탈라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손짓을 했다.
“깨우시오.”
스탈라가 혀를 차며 남편 곁으로 다가가 발로 툭툭 걷어찼다. 칼켄이 하품을 하며 눈을 뜨더니 두리번거리며 맹하게 중얼거렸다.
“응? 피곤이 풀리지 않았나?”
“마법에 당했어, 남편.”
“어? 저 친구 마법사이기도 했어?”
칼켄은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리 놀라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칼켄은 레펜하르트가 강력한 오러 능력자라는 걸 이미 파악한 것이다. 강력한 전사의 힘을 지닌 자가 마법까지 구사할 수 있다니?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나는 전사이자 마법사.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알렸을 뿐이오.”
오크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전사를 숭상하는 만큼 오크들은 마법사의 존재를 멸시한다. 아무리 단련해도 막을 수 없는 마법이라는 존재는 오크들에게 악마의 수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경멸하기에는, 레펜하르트는 누가 봐도 강력한 전사인 것이다. 대체 인정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당황한 칼켄이며 다른 오크들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의 육체처럼 마법 역시 나의 무기. 지닌 모든 것을 다해 그대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무례가 아니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 같았다. 칼켄이 애매해하며 중얼거렸다.
“그, 그런가?”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레펜하르트는 내심 초조해하며 오크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끙, 어떻게 나오려나?’
사실 레펜하르트라고, 마법에 대한 오크들의 반감을 몰라서 굳이 수면 주문을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오크들의 신뢰를 사야 하는 몸이다. 어차피 평생 오크들 앞에서 마법을 쓰지 않을 것도 아닌데, 마법사라는 것을 숨겼다가 나중에 들키면 오히려 더 신용을 잃게 된다.
신뢰는 얻기 힘드나 잃는 것은 한순간.
비록 경계를 받는다 해도 지금 솔직하게 모든 것을 보이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는 더욱 나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나름 믿는 구석도 있었다.
‘칼켄은 마법에 대한 인식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역시나, 칼켄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마법 역시 그대의 무기라면 그걸 쓰지 않음은 오히려 명예롭지 않은 일일 터.”
마법의 존재를 인정하는 칼켄의 발언에 다른 오크들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웅성거렸다.
“마법은 나쁜 거잖아?”
“하지만 무기가 있는데 안 쓰는 것도 나쁜 거잖아?”
“하지만 마법이 무기인가? 그거 치사하잖아?”
“호투의 의식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더 치사하잖아? 솔직해서 좋구먼.”
“어렵다…….”
웅성대던 오크들은 결국 그들다운 결론을 내렸다.
“에이, 족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역시나 단순한 종자들답게, 깊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칼켄이 말했으니 그러려니 해 버린 것이다. 칼켄이 대검을 들고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인간 투사여, 그대의 배려에 감사한다.”
확실하게 마법을 인정하는 목소리였다. 내심 안도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칼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는 없을 터다.”
“알고 있소.”
마법을 인정했다 해서 칼켄이 마법사 또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레펜하르트의 무기 중 하나로만 여겼을 뿐이다. 레펜하르트가 전사답지 않은, 마법사다운 수법으로만 칼켄을 상대한다면 승리한다 해도 강한 마법사로 인식될 뿐이지 저들의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오크들의 신뢰를 얻은 것은 그가 보여 온 행적과 오크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결코 강력한 마법의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토록 열성으로 오크들을 대하고도 마법사란 사실 때문에 끌어들이는 데 엄청 고생을 했었다.
‘지금은 이 육체 덕분에 좀 더 그 과정이 빨라지겠군. 이건 좋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칼켄이 대검을 들며 선언하듯 외쳤다.
“그럼, 다시 호투의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지!”
“좋소!”
레펜하르트가 두 주먹을 칼켄에게 겨누었다.
칼켄 역시 녹색의 오러를 피워 올리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재차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전의 가득한 눈으로 칼켄과 레펜하르트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흉포한 투기가 피어올라 아지랑이처럼 어우러졌다.
어느 순간.
“타아앗!”
“카아아앗!”
두 오러 유저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3
칼켄의 대검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길게 휘둘러졌다. 2미터가 넘는 검신에 녹색의 오러가 맺혀 넘실거리며 파괴의 빛을 흩뿌린다.
콰콰콰쾅!
오러가 스친 곳마다 폭음이 일어나며 흙먼지를 피워 올린다. 두 팔뚝에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칼날을 막아 내며 레펜하르트가 왼 주먹을 길게 뻗었다.
“기격탄!”
황금빛 포탄이 칼켄의 정면으로 날아든다. 칼켄이 몸을 날려 피하며 재차 검을 내리쳤다. 전신의 오러를 한 점에 집중한 일격, 그 속에 담긴 기세에 전율하며 레펜하르트는 스텝을 밟아 공세를 피했다. 어지간한 건 몸으로 때우는 것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이지만, 지금 칼켄의 검에 맺힌 기운은 결코 어지간하지 않았다. 레펜하르트의 스파이럴 가드를 뚫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닌 참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스치듯 피하며 거리를 좁힌 레펜하르트가 연거푸 주먹을 뻗으며 소리쳤다.
“연환 기격탄!”
수십 개의 오러 포탄이 칼켄의 사방을 점유하며 쏟아진다. 일일이 쳐 내기에는 너무 많은 궤도, 하지만 칼켄은 검면을 방패 삼아 간단히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펑펑펑!
오러와 오러가 맞붙어 굉음을 울린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거리를 벌렸다.
‘역시 오크들은 저런 거대한 무기를 잘도 다루는구먼.’
오랜 세월 발달된 오크들의 무술은 그만큼 오묘한 부분이 있었다. 무기가 크다 하여 결코 동작이 둔한 것이 아니다. 검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강렬한 일격을 날리고 원심력을 이용해 다시 궤도를 바꿔 연환하는 칼켄의 수법에 레펜하르트는 당장 어찌할 바를 못 찾고 연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계속 주먹을 뻗고 두 다리를 휘두르며 레펜하르트는 칼켄의 공격을 열심히 막아 냈다.
콰콰콰쾅!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가며 뇌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한참 싸우다가 슬슬 레펜하르트가 눈치를 봐서 마법을 시도했다.
“꿈이여, 깃들라. 임프로브드 슬립!”
이미 한번 써먹었던 개량화 수면 주문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고생한 덕에 이제 하위 서클의 마법은 전투 중에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 한 방이면 칼켄은 또다시 잠들어 버릴 테니 상당히 치사한 수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정도 상대했으면 전사의 자격은 충분히 증명했을 테니까, 뭐.’
솔직히 계속 싸우면 누구 하나 다칠 것 같으니 이쯤에서 결투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역시나…….
“드르렁~!”
슬프게도 바로 걸려 버린다. 정신계 주문은 불꽃이나 전격처럼 눈에 보이며 쏘아지는 방식이 아니다 보니 피하고 자시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 이겼다고 생각하며 레펜하르트가 살짝 일격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드르러어엉!”
코고는 소리가 기합처럼 요란하게 터지며 잠든 칼켄이 그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에 나섰다!
“케엑?”
너무 놀란 나머지 옆구리를 허용했다.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워낙 맞고 산 덕분에 본능적으로 스파이럴 가드가 발동, 다행히 참격을 쳐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당황은 여전했다.
“마법이 먹히지 않은 건가?”
그건 아니었다. 여전히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도 몸은 제대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자면서도 알아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잠시 후 칼켄이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암! 이런, 또 당한 건가?”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재차 결투에 임한다. 황당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칼켄이 이런 기술도 가지고 있었나?”
☆ ☆ ☆
결투를 지켜보던 실란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러스에게 물었다.
“우와, 자면서도 싸우네? 오러 능력자는 저런 것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러스는 실란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감탄한 듯 나직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진짜 공부가 되는군…….”
타인의 비기 빼먹는 데는 거의 산업 스파이급 안목을 지닌 러스다. 보는 순간 바로 칼켄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칼켄은 오러의 일부를 체내 신경계에 잔존시킨 뒤, 뇌내 명령이 끊김과 동시에 육체가 자동으로 반격을 하도록 미리 설정해 놓은 것이었다. 가끔 오러 능력자가 심한 부상으로 의식을 잃었을 때 오러가 저절로 일어나 신체를 치유하는 경우가 있다. 육체의 생명력에서 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