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제15장 푸른 영혼의 전사들 (16/84)

5권

제15장 푸른 영혼의 전사들

1

그라임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영구 동토, 프리즈랜드.

만년설이 끝없이 이어진 대설원의 황량한 계곡 사이에서 십여 명의 인원이 야영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털가죽으로 짠 천막 세 개를 쳐 놓고, 계곡의 절벽을 방풍 삼아 그들은 불어오는 북풍을 피해 모닥불을 쬐는 중이었다.

두툼한 털가죽 모자를 쓴 노인이 곱은 손을 덜덜 떨며 허연 입김을 불어댄다.

“후우, 후우…… 춥구먼.”

함께 불을 쬐던 거한이 노인에게 추궁하듯 말했다.

“좀 더 화력을 높일 수 없습니까, 마법사 할?”

모닥불이라고는 했지만 불길을 피우는 장작 같은 것은 없었다. 이 끝없는 설원에서는 그 흔한 나뭇가지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휴대할 수 있는 용량이 한정되어 있는데 장작을 따로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할의 마법의 불길로 이렇게 애써 추위를 이겨 내고 있었다.

“참게나. 밤새도록 불을 피워야 하는데 벌써 마력을 낭비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이들은 마법사 할이 이끄는 그라임 왕국 출신의 유적 탐사대였다.

올해로 쉰일곱 살이 되는 늙은 마법사 할은 이름난 유적 탐사자였다. 마법 실력은 6서클 후반으로 나이에 비하면 평범하다 할 수 있으나, 할의 고대어 해독과 정보 해석 능력은 출중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세 개의 유적을 탐사해 명성이 자자한 그가 이번에 도전한 곳은 프리즈랜드 오지에 위치한 던전, 살카나.

반년에 걸친 준비 끝에 할은 탐사대를 이끌고 이 얼어붙은 대지에 도전했다. 그리고 두 달이란 시간 동안 무수한 고초를 겪으며 결국 살카나 유적을 탐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불을 쬐던 거한, 탐사대의 부대장 격인 검사 아론이 문득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할이 피워 놓은 세 개의 작은 모닥불마다 서너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모두들 머리며 수염에 하얀 서리가 잔뜩 끼어 있어 이 추위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론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올 때는 서른 명이 넘었거늘 생존자는 열 명뿐이라니…….”

지난 여정을 떠올리며 아론은 몸서리쳤다.

은의 시대 유적들은 대부분 험하기 그지없는 오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프리즈랜드는 그중에서도 격이 다른 곳이었다.

피마저 얼어붙는 듯한 맹렬한 추위.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눈보라.

굳건한 의지마저 꺾어 버리는, 끝없이 펼쳐진 대설원.

프리즈랜드의 끔찍한 자연 환경은 그 자체로 최악의 마물이었다. 이곳을 통과해 살카나 던전까지 도착하는 데만 세 명의 동료를 잃어야 했다. 할의 탐사대가 이미 세 개의 던전을 경험해 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아니었다면 결코 살카나까지 도착하지도 못했으리라.

그리고 간신히 도착한 던전 살카나 역시 이제껏 겪어 왔던 유적들과는 격이 달랐다.

가공할 마법 함정들, 여태껏 만나 보지 못했던 강력한 마물들 앞에 할의 탐사대는 지옥을 맛보아야만 했다. 간신히 던전 중반까지 진행하긴 했지만 그 대가로 함께했던 수많은 동료들, 강력한 마법사와 성직자들마저 모두 잃었다. 그 상황에서 전멸하지 않고 다시 던전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행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너무 피해가 크군요.”

잃은 동료들을 떠올리며 아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다들 숙연한 표정을 짓는다. 할이 힘없이 웃으며 모두를 격려하듯 말했다.

“그래도, 이번 원정은 실로 많은 것을 얻지 않았나.”

그러자 힘든 와중에서도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많은 피해를 입었고, 탐사도 절반 정도밖에 진행하지 못했을 정도로 살카나 던전은 엄청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이나 대가도 컸다.

불을 쬐던 탐사대원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천막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온갖 은의 시대 유물들이 가득 채워진 무한의 주머니가 무려 열 개가 넘게 놓여 있었다.

그 전리품들을 보자 아론도 좀 기운이 났는지 목소리가 밝아졌다.

“하긴, 이제껏 얻은 유물을 다 합친 것보다도 이번에 한탕 터트린 것이 훨씬 많으니까요.”

오지 중의 오지여서 그런지 살카나 던전은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신묘한 유물들이 상당했다. 그 귀하다는 무한의 주머니는 흔히 보였고, 강력한 마법검이며 갑옷 등의 무구도 수두룩하게 얻었다. 하나하나가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상위의 것들, 이것들을 시장에 내놓으면 실로 엄청난 재산이 될 터였다. 살아남은 전원이 은퇴해 남은 평생 떵떵거리고 살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법사 할에게 중요한 것은 저 유물의 가격 따위가 아니었다.

할이 문득 품안을 매만졌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노인이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흐흐흐, 이것이 학회에 발표된다면 엄청난 파장이 일 게야.”

그가 매만지고 있는 것은 살카나 유적에서 발견된 서적 중 하나였다. 할 일행은 살카나에서 석판 몇 개와 빛바랜 서적들 역시 발견했다. 다른 대원들은 별 값어치도 없어 보이는 그 유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할에게는 천금보다도 더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고대어 수준이 너무 높아 제대로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도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

이 서적은 비밀에 쌓여 있던 은의 시대, 그 신비한 고대인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수천, 어쩌면 수만 년 전일지도 모를 아득한 고대, 은의 시대.

그 시대의 유물들은 대부분 세월의 흐름 속에 풍화되고 사그라져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발견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유독 내구도가 높은 유물들뿐이다. 군용 병기일수록 내구도에 신경 쓰는 법, 그래서 던전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대부분 전투적인 능력을 지닌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살루카 던전은 달랐다. 프리즈랜드라는 가혹한 환경은 생명이 살아남기에는 최악이지만, 유물이 보존되기에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은의 시대 사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는 대로 이 사료들의 해독에 매달려야지. 기필코 은의 시대, 그 고대인들에 대한 베일을 벗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흐흐흐.’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할의 심장은 젊은이처럼 맹렬히 뛰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발표한다면 할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주어질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학자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 불멸의 명예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어서 그라임 왕국으로 돌아가세. 한시바삐 이번 탐사 결과를 학회에 발표하고 싶구먼.”

닦달하는 할을 보며 다들 동의를 표했다.

“물론입니다.”

학자의 그것은 아니겠지만, 다른 이들도 다가올 장밋빛 미래에 흥분하긴 마찬가지였다. 유물을 팔아 거부가 될 꿈에 부풀어 탐사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뻐하던 때였다.

“음?”

탐사대원 중 한 명이 계곡 저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렬히 부는 북풍, 그 자욱한 눈보라 속에서 흐릿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다들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지?”

사람의 그림자가 늘어났다. 숫자는 모두 넷, 다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혹독한 프리즈랜드의 환경에서는 몬스터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 외의 다른 생명체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들의 야영지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들 헛것을 보는 것인가 싶어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론이 검을 빼들며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 ☆ ☆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놀라운 미모의 청년이었다.

그 청년의 옷차림을 본 순간 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청년은 평범한 레더 아머 차림에 망토를 두르고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복장 자체야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곳은 영구 동토, 프리즈랜드다.

‘어찌 저런 복장으로 이 추위 속을 저리 태연하게!?’

뒤이어 다른 그림자들의 형태도 뚜렷해졌다. 적갈색 로브를 걸친 붉은 금발의 여인과 새까만 전신 갑옷을 걸친 20대의 청년,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풀 아머의 금발 기사였다.

어느 누구 하나, 이 추위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옷차림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털외투 하나 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추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다들 어이가 없어 눈만 껌벅였다. 아론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그, 그대들은 누구요? 그리고 대체 어떻게 이곳에?”

청년이 아론을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싯누런 빛이 아론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아?”

아론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동시에 그의 목에 붉은 선이 천천히 생겨났다. 적색의 선 사이로 핏물이 조금씩 흐르더니, 머리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진다.

퉁!

아론의 머리가 얼어붙은 땅바닥 위를 데굴데굴 구른다. 극심한 추위 탓에 피는 조금 흐르려다 바로 싸늘히 식어 얼어붙는다.

잠시 후, 할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에엑!”

아론이 죽었다! 다른 탐사대원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신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아론 형님!”

“적이다!”

“유물을 노린 도적들이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탐사대원들이 분노한 기세로 청년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청년이 뒤에 서 있던 일행을 돌아보더니 차갑게 뇌까렸다.

“모두 죽이시오.”

검은 갑옷의 청년과 황금빛 기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네!”

“명대로!”

두 기사가 검을 뽑으며 탐사대원들에게 돌격했다. 검은 칼날이 춤을 추고 황금빛 장검이 피를 뿌렸다. 비명이 연달아 터지며 검붉은 선혈과 선홍빛 내장이 여기저기서 왈칵 쏟아진다.

“으악!”

“커헉!”

순식간에 탐사대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간다. 할이 당황하며 마법을 준비했다.

“차, 창공의 뇌전, 선더 볼트 애로우!”

3서클 뇌격 주문, 선더 볼트 애로우가 할의 주름진 손아귀에 맺히며 전격을 방전시켰다. 막 그가 마법을 쏘는 순간, 로브를 걸친 여인이 낭랑한 음성을 터트리며 수인을 맺었다.

“파괴의 힘, 순리대로 흐르라! 회피의 로드!”

회색빛 마법의 막대가 여인의 정면에 생성되며, 전격의 화살이 모조리 그 막대로 빨려 들어갔다. 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여인이 구사한 마법은 3서클의 마력 흡수 주문이었다. 그녀는 저토록 어려 보이는 나이에 할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였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그러는 와중에도 탐사대원들은 죽어 가고 있었다. 이들 역시 던전 탐사를 통해 전투에 이골이 난 이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저 두 검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들 원통함에 눈을 부릅뜬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갈 뿐이었다.

결국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할 외의 모든 탐사대원들이 죽음을 당했다. 할이 청년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유물을 원한다면 모두 가져가시오! 다 드리겠소!”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할에게 다가섰다. 할이 품속의 서적을 만지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안 돼…….’

유물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이 위대한 진실, 이 역사적인 사료를 공표하지도 못한 채 죽을 수는 없었다. 할이 애원하듯 말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나 같은 노인을 죽여 보았자 그대들에게는 아무 이득도 없지 않소?”

그때, 청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마법사.”

청년이 장검을 들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할의 귓가를 후벼 팠다.

“우리가 온 이유는 사실 당신 때문이거든.”

차가운 칼날이 할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극심한 통증이 할의 뇌를 강타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 ☆ ☆

차가운 북풍이 주검 가득한 계곡 사이로 냉기를 뿌리며 흘러간다.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던 로브를 걸친 여인, 필레나가 검은 머리의 청년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테스론…….”

필레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테스론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칭얼대듯 물었다.

“꼭 이래야만 했던 거야?”

“은의 현자의 명령이다.”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테스론이 할의 시체로 다가갔다.

“이들은 열어서는 안 될 문을 열었어.”

우울해 보이는 필레나의 표정을 무시하며 청년, 테스론은 시체를 뒤졌다. 한 권의 빛바랜 서적을 꺼내 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알려져서는 안 될 역사, 모든 것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서다.”

필레나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은의 현자가 인류의 수호자라는 것은 들었지만…… 그래도 죄 없는 이들을…….”

“인류 전체를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다.”

차가운 목소리로 테스론이 필레나의 말을 잘랐다. 그때 검은 갑주를 걸친 기사가 테스론 곁으로 다가왔다. 테스론이 그를 보며 물었다.

“어떤가, 스테반? 버서커 아머는 쓸 만한가?”

검은 기사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테스론 경.”

검은 기사의 정체는 스테반 폰 레판토 알티온, 알티온 후작가의 차남이자 레판토 자작의 작위를 지닌 이였다.

조상의 마검 알티온을 찾는 와중에서 정체를 감춘 권왕 레펜하르트와 조우한 스테반은, 그 이후 자격지심에 시달린 나머지 주색잡기에 빠져 버렸다. 비슷한 나이에 이미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를 보고 나니 모든 수련이 허무해진 것이다.

한때 바실리 왕국에서 단호의 기사란 칭호로 불리던 이 전도유망한 기사는 그렇게 폐인이 되어 잊혔고, 그저 술로 시름을 달래며 레펜하르트에 대한 막연한 증오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 스테반에게 다가온 것이 은의 현자, 테스론이었다.

테스론은 약속했다. 그를 따르면 오러 능력자와도 필적할 위대한 힘을 주겠다고. 그 힘으로 레펜하르트를 무찌르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받은 것이 바로 이 새까만 전신 갑옷이었다.

마갑 엘드라드와 맞먹는 특급 아티팩트, 버서커 아머.

각종 마법을 구사하게 해 주는 엘드라드와 달리 버서커 아머의 특징은 하나뿐이었다.

끝없이 빠르고, 강하고, 튼튼하고, 지치지 않게 해 주는 것.

전설 속 광전사처럼 싸울 수 있으면서도 명철한 이성을 유지시켜 주는 이 갑옷의 위력에 스테반은 흠뻑 매료되었다. 희망이 생겨나자 주색잡기도 모두 끊었다. 모든 시간을 버서커 아머를 다루는 것에 투자했다.

‘아직은 완벽하게 버서커 아머를 다루지 못하지만…….’

이 갑옷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되는 날, 그 건방진 천민 오러 능력자는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게 되리라!

복수로 이를 가는 스테반을 향해 침착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복수를 꿈꾸는 것은 그대만이 아니오, 스테반 경.”

“아, 유서스 경.”

스테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황금 갑옷을 걸친 기사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레펜하르트에게 설욕하려는 이는 그 하나뿐이 아니었다.

이름 높은 그라임의 황금기사, 유서스 폰 테네스.

하지만 그 위명은 현재 상당히 빛이 바래져 있는 상태였다. 권왕 레펜하르트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탓이었다.

자신처럼 테스론에게 몸을 의탁한 유서스를 보며 스테반은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유서스 경?”

“하하, 스테반 경.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잡배들을 상대로 다칠 리가 있겠소?”

“그건 그렇지요.”

따지고 보면 경쟁자인 셈이지만, 현재 스테반과 유서스는 꽤나 사이가 좋았다. 같은 처지에 같은 적을 지닌 이들이니만큼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서스는 레펜하르트 ‘따위’와 달리 이름 높은 귀족의 혈통을 지녔고 명성 역시 높았던 이였다. 뼛속까지 귀족인 스테반에게 있어 실로 ‘친구로 사귈 만한 자’였다.

“그나저나…….”

테스론에게 다다가며, 유서스는 착용하고 있던 마갑 엘드라드를 검집의 형태로 돌려보냈다. 한때 레펜하르트에게 당해 박살 직전까지 갔던 엘드라드였지만 자가 치유 능력과 테스론이 준 은의 시대 유물을 이용해 지금은 완전히 복구되어 있었다.

갑옷을 벗고 가뿐한 차림이 된 유서스가 몸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 온기의 목걸이는 정말 효과가 좋군요. 이 눈보라 속에서도 마치 봄바람을 맞고 있는 것 같으니.”

테스론 일행 전원이 목에 걸고 있는 이 온기의 목걸이는 어떠한 추위에서도 일정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은의 시대 아티팩트였다. 세상에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오로지 은의 현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물이다.

유서스가 천막 안에 널려 있는 무한의 주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유물들은 어찌합니까, 테스론 경?”

“쓸 만한 것은 거두고 나머지는 팔아 버리지. 하지만 이 중 명단에 있는 것은 모두 회수해 은의 현자가 보관한다.”

테스론이 미리 받아 외워 뒀던 명단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 살카나 던전에서 나온 유물 중에는, 현재의 인류에게 절대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 끼어 있었다.

“은의 현자는 인류의 수호자, 고대의 악으로부터 인류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다. 은의 시대 유물들 중엔 위험한 성능을 가진 것들도 많으니, 올바른 관리자가 정당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혼돈이 올 것이다.”

테스론의 말에 유서스가 목에 건 목걸이를 매만지며 의아해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도대체 기준이 뭔지, 원…….”

그들의 목에 건 이 온기의 목걸이는 물론 대단한 기물이었다. 하지만 이게 인류에게 허락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성능인가? 마갑 엘드라드나 버서커 아머같은 아티팩트도 세상에 내보이면서 온기의 목걸이는 안 된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유서스를 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그도 대체 은의 현자들이 무슨 기준으로 유물의 경중을 가리는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은의 현자라곤 하지만, 테스론 역시 그들의 비밀에 대해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는 일, 테스론은 모른 척 넘어가며 무한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미리 받은 명단대로 유물을 가리던 중 문득 유서스가 눈을 빛냈다.

“음? 이거 혹시 엘류시온의 목소리 아닙니까, 테스론 경?”

유서스가 손에 든 것은 네모난 검은 블록이었다. 테스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그냥 검고 네모난 블록일 뿐이지 않은가? 어째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라 생각하는 것이지?”

“그야…….”

유서스가 블록 옆면에 새겨진 고대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여기 새겨진 문양이 똑같으니까요.”

고대어에는 전혀 소양이 없는 유서스지만, 그는 기사답게 매서운 눈썰미를 지니고 있었다. 읽을 수야 없지만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닌 것이다.

“으음…….”

테스론은 살짝 신음을 흘렸다. 역시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현 시대의 인류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기물이었던 것인가?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그토록 아끼는 기물이니까.

“이게 또 하나 있는 줄은 몰랐군.”

대충 대답하며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분류하려다 말고 문득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마왕이 그토록 중시한 걸 보면 이것 역시 보통 아티팩트가 아닐 터…….’

테스론은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검은 블록을 챙겼다. 그리고 무한의 주머니들을 챙겨 들며 일행에게 말했다.

“그럼 돌아가도록 하세. 은의 현자에게 반납할 것들을 제하고도 꽤 유물들이 남겠군, 이거.”

테스론이 농담조로 말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다들 잘사는 집안이라 딱히 유물을 잔뜩 얻었다 해서 그리 기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은의 현자의 명령이라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학살했으니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며 필레나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알려져서는 안 될 역사란 게 뭐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은의 현자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테스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려 하지 마라, 관심 갖지 마라, 필레나.”

아무렴, 결코 알려 해서는 안 된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현재 노예 종족일 뿐인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들에 대한 진실을.

그들에 대한 진실은 현재의 인류를 위험에 몰아넣을 뿐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진실일 뿐이다.

테스론이 엄숙히 선언했다.

“그것을 알 자격이 있는 이들은 은의 현자뿐이다.”

2

크로방스 왕국과 바실리 왕국의 동부 국경을 이루는 거대한 산맥, 글로텐. 그 험준한 산세를 넘어가면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진 평원과 바위산이 지평선을 이루는 이곳은 아직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장소, 페틀랜드 평원이다.

비교적 산맥과 인접한, 작으나마 계곡과 호수가 있어 경작이 가능한 지역에는 그래도 인간의 마을이 남아 있었다. 인간의 왕국이 세운, 국경 관문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유목민과 행상인들의 마을이었다. 이들은 건조한 황야를 누비며 양과 염소를 치거나, 관문에 자리 잡은 국경 수비대를 상대로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그 이상 동쪽으로 향하지는 못했다. 밤낮의 기온이 극단적으로 바뀌는 가혹한 기후, 수시로 양과 염소를 노리는 몬스터들의 존재는 혹독한 삶 속에서 강인하게 단련된 유목민들조차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페틀랜드 평원 동쪽을 따로 데스트란드, 유목민들의 언어로 죽음의 땅이라 부르며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용맹한 양치기조차도 접근하지 않는 페틀랜드 평원 동쪽, 죽음의 대지 데스트란드.

그곳에서 지금 한 무리의 양과 염소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거구의 장정 한 명이 웃통을 벗은 채 근처 바위에 앉아 한가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인간이 보았다면 눈을 의심할 광경이었다. 데스트란드는 단순한 들짐승 정도가 아니라, 몬스터라 불리기에 합당한 강력한 괴물들이 들끓는 곳이다. 그렇기에 어떤 양치기도 설사 모든 풀이 말라붙었을지언정 이곳으로 양을 치러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장정은 이 위험한 곳에서도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리 희한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오크였다.

2미터 가까운 거구, 나무 등걸처럼 꺼칠꺼칠한 녹색 피부에 납작한 들창코, 멧돼지처럼 아래턱에서 돋아난 섬뜩한 어금니를 지닌 이 오크는 그야말로 오크 특유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균형이 맞아 그리 흉악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 기준으로 보아도 제법 사내다운 멋이 느껴질 법한 외모랄까?

여기저기 듬성듬성 나 있는 풀들을 열심히 뜯고 있는 염소들을 살피다 말고, 그 녹색 피부의 오크 사내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하아암, 어째 오늘은 소식이 없네.”

사내의 목소리에 바위 밑에서 불쑥 커다란 늑대 머리가 튀어나왔다. 사납게 생긴 늑대였는데 그 사이즈가 어마어마했다. 체구 1.2미터에 신장이 3미터에 달하는 몬스터, 다이어울프였다.

황소도 한입에 물고 간다는 이 사나운 몬스터가 오크 사내 근처로 가더니 개처럼 머리를 비비며 낑낑대기 시작했다.

“끼잉, 끼잉.”

“어허! 이놈이! 한 것도 없이 밥부터 찾나?”

머리를 퉁 쳐 주니 진짜 개처럼 깨갱대며 꼬리를 만다. 자신의 발치에 엎드리는 다이어울프를 보며 오크 사내가 혀를 찼다.

“……아니, 그래도 한때는 초원의 제왕이었던 놈이 왜 이리 비굴해졌냐?”

그러자 다이어울프가 고개를 슥 들더니 ‘쳇, 안 통하네.’란 표정으로 혀를 날름 내밀고 위풍당당하게 바위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오크 사내가 한 번 더 혀를 찼다.

“으, 저 영악한 놈.”

그가 이 검은 털의 다이어울프, 흑왕을 길들인 것은 반년 전의 일이었다. 오크에게 있어 다이어울프를 길들인다는 것은 명예로운 용사의 증명이다. 모든 오크들이 울프 라이더가 되기를 꿈꾸지만 진정한 전사만이 이 흉폭한 몬스터에게 자신을 각인시켜 따르게 할 수 있다.

초원의 제왕이라 불리던 이 흑왕을 쫓은 것만 일주일, 흑왕의 반격에 시달린 것이 사흘, 그리고 반나절의 사투 끝에 그는 간신히 흑왕을 꺾었다. 그리고 흑왕에게 전사의 혼을 각인시켜 자신을 따르게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어째 이놈의 흑왕은 보통 다이어울프와 달랐다. 영리한 것이 지나치달까? 말귀도 척척 알아듣고 사람처럼 구는 건 좋은데, 정도가 지나쳐 능글맞기까지 하다.

‘어째 가끔은 내가 낚인 기분도 들고 말이지…….’

고개를 젓다 말고 문득 오크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음?”

바위 밑으로 내려가던 흑왕도 귀를 쫑긋 세웠다.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양을 돌보던 다른 오크 사내 둘이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지?”

“드디어 나타났나, 타시드?”

오크들이 일제히 타시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커다란 그림자가 들판 저편, 바위산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터틀 라이온, 거북이 같은 몸통에 사자의 머리와 팔다리를 지닌 육식 몬스터였다. 나이가 상당히 들었는지 크기만도 흑왕의 두 배에 가까워 보였다.

크허어어엉!

터틀 라이온이 포효를 터트리며 양들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포효 소리에 얼어붙은 양이며 염소들이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한 채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메마른 기후에서 수분 증발을 줄이기 위해 진화한 이 몬스터는, 외견적으로는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거북의 방어력과 사자의 공격력을 겸비한, 인간 병사 수십 명을 쉽게 쓸어버릴 수 있는 가공할 괴물인 것이다.

하지만 어째 오크들은 그리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크 사내, 타시드가 곁에 놓은 거대한 참마도斬馬刀를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흑왕!”

다이어울프가 기다렸다는 듯 타시드의 발치에 엎드린다. 고삐를 잡고 날렵하게 흑왕의 등에 올라탄 타시드가 오크어로 외침을 터트리며 박차를 가했다.

“탈크라! 케차트라카!”

해석하면 ‘밥 왔다! 불 피워!’쯤 되겠다. 흑왕에 탄 채 타시드가 맹렬한 속도로 초원을 질주해 갔다. 투박한 참마도를 높이 든 채 타시드가 우렁찬 외침을 터트렸다.

“다카르!”

참마도의 이름을 불러 무기의 혼을 일깨운다. 타시드의 애병, 다카르의 검신에 희미한 빛이 맴돌았다. 오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자신의 투기를 검에 씌우는 것이 아니라 검의 혼 자체를 끌어내는 오크 전사 특유의 용법이었다. 둔탁했던 참마도, 다카르의 칼날이 면도날처럼 예리해지며 섬뜩한 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게 검의 혼과 자신의 혼을 합일시키며 타시드는 질풍처럼 터틀 라이온을 향해 달려갔다. 막 염소 하나를 덮치려는 터틀 라이온의 앞을 날쌔게 가로막는다. 터틀 라이온이 분노와 경계의 포효를 터트렸다.

“크어허헝!”

흑왕도 송곳니를 드러내며 마주 울부짖었다.

“으르르릉!”

사나운 야수가 서로를 마주하며 상대를 살핀다. 순간 터틀 라이온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몸을 날렸다. 동시에 앞발로 흑왕에 탄 타시드를 후려쳤다. 타시드가 참마도를 비껴들어 공격을 막았다.

터엉!

쇳소리가 울리며 타시드는 가뿐히 터틀 라이온의 공격을 막았다. 타시드의 두꺼운 팔 근육이 터질 듯 불끈거렸다. 하지만 밀리지는 않았다. 저 거대한 터틀 라이온의 모든 체중이 실린 일격을, 타시드도 그를 태운 흑왕도 가뿐히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크허어엉!”

분노한 터틀 라이온이 연거푸 앞발을 휘둘러 댄다. 계속 참마도, 다카르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 가던 타시드의 눈이 일순간 불을 뿜었다.

“타아아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투박한 참마도가 섬세한 궤도를 그리며 터틀 라이온의 목과 어깨를 동시에 베어 갔다. 화려한 3연속 베기가 허공에 선혈의 수를 놓았다.

피분수가 솟구치며 거대한 몬스터가 생을 잃고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한다. 뒤에서 백업을 위해 검이며 도끼를 들고 대기하던 다른 오크 전사 두 명이 화색을 띤 채 달려왔다.

“오오, 역시 용사 타시드!”

“이 정도면 당분간 굶주리지 않겠군!”

오크 전사들이 기뻐하며 쓰러진 터틀 라이온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등딱지 부분을 제거하고 가죽을 벗기는 손동작이 대단히 숙련되어 보였다.

사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오크들에게 있어 양을 습격하는 몬스터는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 도저히 유목만으로는 생활이 감당이 안 되기에, 간간히 이렇게 몬스터들이 습격해 주지 않으면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이쪽이 주식이랄까?

물론 그 와중에 죽어 가는 오크들도 상당히 있었지만, 전사를 숭앙하는 이들에게 패배자를 위해 흘려 줄 눈물은 없다.

이 정도 크기의 터틀 라이온이라면 살코기만 발라도 한동안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등딱지며 가죽 역시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타시드와 다른 오크 전사들은 신나게 해체 작업에 열중했다.

한창 피를 뽑고 가죽을 벗기고 있는데, 흑왕이 슬그머니 다가와 앞발로 터틀 라이온의 뒷다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타시드를 돌아보며 이번엔 허벅지를 툭툭 친다.

“……뭐냐?”

퉁명스러운 타시드의 목소리에 흑왕이 코끝으로 뒷다리 부위를 가리켰다. 이미 흑왕과 영혼을 통한 타시드는 바로 이 다이어울프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흑왕은 이리 말하고 있었다.

‘대충 하고 빨리 내 몫 내놓으시지?’

“……옜다.”

기막혀하며 뒷다리를 큼지막하게 썰어 던져 주니 흑왕이 좋아라 입에 문다. 그리고 이번엔 타시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누가 봐도 ‘오냐, 수고 많았다~.’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요물 같으니…….”

저만치 떨어져 신 나게 뼈다귀를 뜯어 대는 흑왕을 보며 타시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원의 제왕이라더니, 어째 힘이 아니라 정치력 쪽으로 왕 노릇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대충 들고 갈 채비를 끝내자 타시드가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양과 염소들이 그 소리에 옹기종기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료들을 돌아보며 타시드가 벌떡 일어났다.

“자, 마을로 돌아갑시다.”

☆ ☆ ☆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살짝 솟아오른 언덕 위로 웅크린 곰 같은 형상을 한 거대한 바위산이 있었다. 바위산 아래로 작게 샘이 솟고 있고, 그 근처에 수백 개의 가죽 천막들이 도열해 있다. 이 가혹한 땅의 진정한 지배자, 푸른 곰 부족의 봄 야영지였다.

타시드와 다른 두 오크 사내들이 터틀 라이온을 짊어지고 언덕을 내려오자 마을에 남아 있던 오크들이 환호를 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손을 흔들어 그들의 환대에 답하며 타시드는 마을로 들어섰다. 두 배 가까운 크기의 커다란 천막 앞에 도착하자 휘장이 걷히며 검붉은 피부색에 탄탄한 근육, 풍만한 유방을 가진 오크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한인 타시드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로 여장부라 불릴 법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구의 여인이었다.

타시드가 터틀 라이온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의 수확입니다, 대모님.”

“아이들이 굶지 않겠구나.”

오크 여인, 스탈라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터틀 라이온의 살코기 하나를 들고서 가볍게 양쪽으로 찢었다. 구운 것도 아니고 생 고깃덩어리를 그냥 악력만으로 북 찢은 것이다. 생사람 한둘쯤은 가볍게 포 뜰 어마어마한 괴력이다. 하지만 오크들은 다들 전혀 놀라지 않고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쪽으로 찢은 고깃덩어리를 들고 스탈라가 축복을 내렸다.

“이 살과 이 피가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될지니 이를 취하고 운명에 맞서 싸우라!”

축복을 내린 뒤 다른 여성 오크들이 칼을 들고 저마다 고깃덩어리를 잘라 갔다. 오크 여성들답게 하나같이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잘 짜여 있었다. 물론 남성 오크와 달리 여성적인 특징은 명확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나 엘프 여성처럼 부드럽고 날씬한 몸매를 지닌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크들에게 있어 비만의 기준은 몸에 얼마나 군살이 붙어 있느냐인지라, 아무리 수수깡처럼 말라도 근육이 없다면 ‘살찐’ 여성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마흔 살이 되는 스탈라는 실로 무시무시한(?) 미녀였다. 그녀의 군살은 실로 피부라는 단어와 동의어! 모든 오크 남성들이 침을 줄줄 흘릴 쭉쭉빵빵 미녀라 아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스탈라는 저런 바위 같은 근육을 지녔음에도 불구, 가슴도 풍만했다. 그 풍만한 가슴으로 무려 서른 명이 넘는 어린 오크들을 먹여 살린 어미 중의 어미인 것이다. 뭔가 포인트가 이상하다는 느낌도 들겠지만, 어쨌거나 오크 기준에서는 존경받을 만한 여성이었다.

터틀 라이온의 살코기를 들고 가는 부족의 오크들을 보며 스탈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곁에 서서 마찬가지로 뿌듯해하는 타시드를 보며 다시 한 번 찬사를 내렸다.

“수고했다, 타시드.”

“별것 아니었습니다.”

이 녹색 피부의 오크 청년은 원래 그녀의 부족이 아니었다. 4년 전, 시련의 땅을 통해 나타난 외부인이다. 원래는 인간의 노예로 살아가던 오크였다가 기이한 인간의 인도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스탈라가 그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대를 인정치 않는 이가 없구나.”

당시에는, 오크의 혼도 긍지도 잃은 외부인을 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반대도 많았다. 그때 모든 반대를 뚫고 어린 타시드를 받아들인 것이 스탈라였다. 현명한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의 사슬을 부수고 전사의 혼을 일깨운 타시드의 잠재력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배우고 익혀 전사의 긍지를 영혼에 지니는 것은 물론 대단하다. 하물며 이 아이는 배우지도, 익히지도 못했음에도 그 영혼에 긍지가 가득하다. 이 아이가 전사가 아니라면 그 누가 전사임을 자처할 수 있단 말이냐!

스탈라의 일갈은 푸른 곰 부족 전체를 일깨웠고, 모두들 부끄러워하며 그 어린 오크 소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빈약한 몸을 지녔던 그 어린 오크는 이제 푸른 곰 부족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전사가 되었다.

“너를 직접 가르친 보람이 느껴져서 좋구나.”

온화한 스탈라의 말에 타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워낙 잘났잖습니까?”

퍽!

스탈라의 백 너클이 타시드의 안면을 직격했다.

“녀석, 잘난 척은.”

“에구구~.”

타시드가 얼굴을 움켜쥐고 아픈 척 엄살을 떨었다.

물론 정말 아픈 것은 아니다. 콧대 높은 인간이었다면 이 한방에 코뼈쯤은 가볍게 나갔겠지만, 납작한 들창코를 가진 오크들에게 이런 식의 안면 가격은 말 그대로 장난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인간들끼리 어깨를 툭툭 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뭐, 인간들은 이런 오크들을 보며 난폭하고 야만적이라며 치를 떤다. 신체 구조상의 차이가 낳은 오해랄까?

그렇게 스탈라와 타시드가 한가하게 장난을 치던 중이었다. 저만치 언덕 위에서 한 오크 전사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산양처럼 단숨에 언덕을 내려온 그 오크가 스탈라 앞에 도착해 소리쳤다.

“대모님!”

“웬 난리냐, 마가단?”

마가단이라 불린 오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서쪽에서 양을 치던 앙가트가 알려 왔습니다.”

타시드와 스탈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가하게 불을 피우던 다른 오크들도 눈을 빛내며 하던 일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군대인가?”

마가단이 고개를 저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들었습니다.”

“그냥 모험가 부류인가?”

스탈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모험가들이 이 시련의 땅으로 들어오곤 했다. 오크들이 목적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은의 시대 유적을 노리는 탐사자들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들에게 있어 오크는 그저 야생의 몬스터일 뿐이다. 조우할 때마다 전투가 벌어지고는 했다.

문득 스탈라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가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알려 줘야겠구나. 이 대지의 진정한 주인을!”

☆ ☆ ☆

글로텐 산맥을 따라 남하한 지 일주일째, 레펜하르트 일행은 어느새 페틀랜드 평원을 지나 시련의 땅에 들어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족히 스무 날은 걸릴 거리였다. 평소처럼 두 발로 걷는 여행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돈이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레펜하르트 일행은, 이번에는 과감히 지갑을 풀고 전원 말을 구입하고 마구 달린 것이다. 돈이 넉넉하니 각 역참을 통과할 때마다 지친 말을 바꿔 타는 사치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일단 시련의 땅에 들어서자 레펜하르트 일행은 이동 속도를 낮추었다. 지금까지처럼 지친 말을 교환할 곳이 없으니 말들의 체력을 신경 써야 했다.

“정말 황량한 곳이군요, 형님.”

속보로 걸어가는 말 등에 오른 채 러스는 주위 경관을 훑어보았다. 페틀랜드 평원에서 멀어질 때마다 점점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마주치던 초원을 방랑하는 유목민들의 원뿔형 천막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앞장서 말을 몰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들이 괜히 그런 오해를 받는 게 아니지.”

오크들은 거칠고 잔인하며 야만적이다. 이것이 인간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크들이 사는 가혹한 환경을 반영할 뿐이다. 허약한 아기가 태어나면 키울 생각 않고 황야에 버려 버린다는 오크들의 잔인한 육아 방식은 사실, 실제 그들의 풍습이었다. 또한 노쇠해진 오크들은 마을에서 쫓겨나 황야 속에서 굶주려 죽어 간다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다.

“단지, 오크들은 사실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을을 떠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길 뿐이지만.”

그러면서, 명예를 모르는 오크 역시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쏙 뺀 레펜하르트였다. 어쨌거나 쫓겨나는 것은 마찬가지란 소리다.

하여튼, 야만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풍습은 사실, 삶과의 힘겨운 투쟁이 낳은 가장 현명한 생존 방식일 뿐이다. 그런 레펜하르트의 말에 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게 결국 야만적이란 소리 아닌가요?”

솔직히 드워프는 뭐 지상낙원 차지해서 저렇게 건물 올리고 살고 있냐? 어차피 오지에서 힘겹게 살기는 마찬가지구만. 그녀 입장에서는 여전히 오크들은 야만적인 놈들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자 시리스가 입을 삐죽였다.

“그야 드워프들은 운이 좋아서 이것저것 많이 건져 놨으니까 그런 소릴 할 수 있겠죠.”

드워프들이야 인간의 노예로 살면서도 옛 조상의 지혜를 많이 간직했으니 오지로 쫓겨나도 나름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밑천 싹 다 털리고 도망가야 했던 엘프 입장에서는 틸라야말로 배부른 소리 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아니, 그래도 아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연장자조차 저버리는 이들이 야만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엘프들도 그러진 않잖아요?”

“그렇다 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이거죠. 드워프들이 건축 기술, 대장 기술 다 잃고도 그렇게 그랜드 포지를 개조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말 위에서 두 여인이 티격태격 실랑이를 벌인다. 엘프가 오크를 감싸는 그 진귀한(?) 풍경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으, 저것도 문제는 문제지. 그러고 보니.’

비록 틸라와 시리스의 사소한 말싸움에 불과하다지만, 레펜하르트는 저 모습이 시사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학대받는 이종족들이라 해도, 그들이 연합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뭉칠 거라는 건 참으로 세상모르는 순진한 기대일 뿐이다. 전생에도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 사이에는 이런저런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애초에 종족도 문화도 다른 이들이 그리 쉽게 융합될 리가 없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는 굳이 인간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엘프, 진실을 듣는 드워프, 긍지 높은 오크라지만, 그들의 합리와 진실과 긍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결국 여러 놈 모아 놓으면 문제 생기는 것은 인간이건 엘프건 드워프건 오크건, 하나 다를 것 없었다.

‘쩝, 예전에야 황제의 권력으로 밀어붙였다지만 그럴 수도 없고…….’

레펜하르트는 난처해하며 뺨을 긁었다. 이 문제도 나중에 마켈린이랑 상의 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시리스와 틸라는 대충 말싸움을 끝내고 다시 말을 몰고 있었다. 둘 다 뺨을 가득 부풀리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모른 척 계속 걸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나름 지혜를 얻은 그였다. 자고로, 여자들 싸움에 남자가 끼어서 좋은 꼴 보는 경우는 절대 없다.

실란 역시 저 ‘지혜’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슬쩍 레펜하르트에게 다가와 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걸 보면.

“그런데 레펜 씨, 오크들은 어떻게 설득할 건가요? 아, 물론 레펜 씨라면 다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궁금해서.”

엘프도 드워프도 쉽게 설득했으니 당연히 오크도 그러려니 하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법이 있긴 한데 조금 자신은 없어.”

실제로 레펜하르트는 고민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엘프들도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이들인 데다가, 세계수 부활 의식이라는 히든카드가 있어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크들에게 자신이 적이 아니며, 그들의 편인지를 알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만 해 뒀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도 이번에는 부딪쳐 봐야 알겠는데.”

그러자 시리스가 말을 달려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전생에서 했던 방법대로 하는 것 아니었나요?”

이미 한번 설득해 봤으니 별문제 없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레펜하르트가 난감해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게…… 그때는 타시드가 있었거든.”

전생에서 레펜하르트가 타시드를 만난 것은 시리스와 함께 대륙 각지의 유적을 탐사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레펜하르트는 이미 대륙 각지의 이종족들을 만나 새로운 마법의 경지를 쌓으며 틈틈이 학대받는 엘프와 오크들을 구하고 있었다.

아직은 안타레스 제국이 생겨나기 전, 그 당시 타시드는 푸른 곰 부족을 나와 학대받는 오크들을 구하기 위해 대륙을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것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그 하나의 힘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한참 좌절할 때였다.

그런 타시드에게 레펜하르트의 존재는 구원과 같았다. 레펜하르트를 찾고, 자신의 검으로 그를 시험한 뒤 타시드는 레펜하르트야말로 자신의 꿈을 이룰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은의 시대 유적을 탐사하고, 오지의 이종족들을 찾아가고, 학대받는 이종족 노예들을 구하며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시절.

레펜하르트에게 있어서는 가장 황금 같던 시간이었다. 꿈과 희망이 가득 차 있고 자유로웠던 행복의 시간.

이후, 레펜하르트는 덩치가 커져 버린 이종족들의 마을을 연합시켜 결국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고 타시드와 함께 푸른 곰 부족으로 향했다. 이미 안타레스 제국의 위명이 대륙 전역에 퍼진 이후였다. 푸른 곰 부족도 별다른 반대 없이 그와 뜻을 함께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타시드라는 중개인도 없고, 딱히 해 놓은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오크들에게 자신의 꿈과 의지가 거짓이 아님을 전달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을 수밖에 없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전혀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일단은 만나 봐야지.”

그때, 문득 러스가 인상을 쓰더니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일행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뭔가가 옵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에서 내렸다. 이내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한 무리의 무장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피부에 가죽 갑옷과 투박한 검이며 도끼를 든, 건장한 스무 명 정도의 오크들이었다.

그들의 복색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오크 순찰자Orc Scouter들이군."

“아까 우리를 정찰하고 간 놈들의 동료인가 보군요.”

러스는 예민한 오러 유저의 감각으로 이미 오크 하나가 자신들을 살피고 갔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덤벼들 것 같은데? 되도록 상처 입히지 않게 조심들 하라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친선의 뜻으로 이곳에 온 거니까.”

오크들이 검을 빼 들고 천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 일행도 말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포진했다. 틸라와 시리스가 실란을 보호하며 무기를 빼 들고, 실란도 신성 주문을 외우며 원호할 준비를 했다.

갑자기 선두에 선 오크가 괴성을 터트렸다.

“주디하 카들 메탈카! 사칸 다 타를카!”

실란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는 거예요?”

“이곳은 우리의 땅. 인간은 모두 죽인다.”

레펜하르트의 번역에 틸라가 고개를 저었다.

“살벌하네.”

레펜하르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푸른 전사의 영혼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막 오크어로 적이 아님을 피력하려 할 때였다. 스무 명의 오크들이 동시에 고함을 내질렀다.

“사칸 다 타를카!”

그리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일행에게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말이 통할 분위기가 아닌데요?”

3

“크아아아!”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투박한 오크의 검이 허공을 가른다. 시리스는 가뿐히 검을 피하며 오크의 넓적다리를 가격했다. 일부러 검을 눕혀 옆면으로 때린 것이기에 피가 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오크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크어어억!”

그 와중에 다른 오크가 연거푸 공격을 해 온다. 시리스는 가뿐히 몸을 놀리며 공격의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연속으로 발차기를 날려 오크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퍼어억!

두 명의 오크가 뒤통수를 맞고 비틀댄다. 그들의 다리를 틸라가 도끼자루로 길게 쓸어 갔다. 훌렁 넘어지며 오크들이 신음을 흘렸다.

“으그그극!”

러스도 검을 놀리며 오크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오러는 쓰지도 않았다. 그저 검집째로 오크들을 상대하며 하나 둘 두들겨 팰 뿐이다.

퍽퍽퍽퍽!

심지어 레펜하르트는 피하지도 않고 있었다.

“타카라!”

“크랏타!”

근성 가득한 오크들의 기합이 터지며 쇠망치와 돌도끼가 동시에 레펜하르트의 명치와 등을 후려갈긴다.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쇳덩이를 친 것 같은 손맛에 오크들이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투지를 불태우는 그들이라지만 이런 광경에서까지 경악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맨몸으로 칼날 튕기는 묘기는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 일행은 스무 명이 넘는 오크들을 간단히 압도하고 있었다.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와 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시리스와 틸라도 일족 내에서 손꼽히는 전사다. 게다가 강력한 신관인 실란의 가호까지 받고 있었으니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과는 별개로 레펜하르트 일행은 감탄하고 있었다.

“굉장하군요, 오크들은.”

검집으로 오크들의 공격을 걷어 내며 러스가 뇌까렸다. 상대하는 오크 입장에서야 분통 터질 노릇이겠다만, 사실 그는 이 오크 전사들의 기량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가 속했던 테네스 기사단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일행의 실력이 너무 높은 것뿐이지, 사실 이들만 해도 어지간한 기사단과 맞서 싸울 강력한 병력으로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동의하며 말했다.

“굉장하긴 굉장하지. 문제는 오크들에게 심각한 취약점이 있어서…….”

그때였다. 오크들이 일제히 분노의 외침을 터트렸다.

“크으으으!”

“크아아아!”

한참을 덤벼들어도 상처 하나 내지 못하자 다들 굴욕감에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어지간하면 역량의 차이를 실감하고 물러설 법도 하건만, 오히려 다들 생명을 도외시한 채 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전사를 숭상하는 오크들에게, 상대가 사정 봐주는 이런 전투는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다들 눈에 독기가 올라 번들거렸다.

생사를 도외시하는 이들은 기량에 상관없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법이다. 특히나 이쪽은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시리스와 틸라의 움직임이 일순 흔들렸다. 그때,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전신으로 칼날을 버텨 내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모래여, 흘러라. 심연의 꿈이 되어라! 매스 슬립!”

양손으로 모래를 뿌리자 가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오크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순간 러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엥?”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스무 명의 오크들이 일제히 쓰러져 버린 것이다. 풀썩풀썩 쓰러지더니 바로 엎드려 얕은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레펜하르트가 시전한 2서클 광역 수면 주문, 매스 슬립의 효과였다.

실란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아니, 뭐 이렇게 효과가 빨라?”

원래 슬립 주문은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은밀하게, 상대가 눈치 못 채게 자연스럽게 졸음이 오게 하는 주문이다. 그걸 한창 전투 중에 구사하고, 또 그게 먹힌다고? 이쯤 되면 2서클 주문이 아니라 무슨 고위 마비 주문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슬립이란 거, 실전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주문 아니었나요?”

실란의 의문에 레펜하르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오크들이 그토록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도 인간들에게 밀린 이유다.”

그렇다. 오크들은 마법 저항력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정신력이 뛰어날 경우 집중을 통해 마법사의 정신계 주문에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오크는 태생적으로 그런 부분이 너무 취약했다. 아무리 강력한 전사라도 하찮은 하위 마법사의 정신계 마법에 농락당할 정도로.

“옛 시절에는 마법사가 워낙 귀해서 오크들도 별문제가 없었지만…….”

예전에는 마법의 존재 자체가 극히 귀했다. 아주 소수의 마법사만이 은밀히 비전을 전수하며 그 명맥을 이어 갔다. 하지만 마탑을 세우고 정식으로 마법사를 육성하게 된 지금 마법사는 예전만큼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여전히 귀하긴 했지만, 적어도 어지간한 백작 이상의 귀족이라면 가문마다 마법사 한둘쯤은 둘 수 있을 정도로 숫자가 불어난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서 점점 인간은 마법의 힘을 키워 갔다.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던 오크들도 점점 마법병단을 내세운 인간들에게 패해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현 시대에는 대부분의 오크들이 노예 신세가 된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설명에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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