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제14장 드워프를 사랑한 왕자님 (15/84)

제14장 드워프를 사랑한 왕자님

1

세상은 평화로웠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마왕의 존재도 없었고, 수십 개의 국가가 서로 창칼을 들이대는 거대한 전쟁도 없었으며, 전설 속의 드래곤이 날아올라 인간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설치는 일도 없는, 참으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륙 전체를 보았을 때의 거시적인 관점일 뿐이다. 한쪽에서는 태평성대를 노래해도 다른 한쪽에서는 삶은 고해요, 지옥이라 울부짖는 자가 있는 것이 인간사인 법.

적어도 크로방스 왕국에 한해서만큼은, 세상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크로방스 왕국 중부, 한 이름 없는 커다란 들판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카르사스 님의 이름으로! 저 더러운 찬탈자의 무리를 해치워라!”

“그 더러운 입을 찢어 놓겠다! 정통한 왕가의 이름으로 반역자들을 죽여라!”

각 무리의 우두머리들이 고함을 지르며 말을 달려 적진으로 향한다. 그 뒤를 수많은 기사들이 달리고, 병사들이 창을 휘두르며 뒤따른다. 화살의 비가 쏟아지고 비명과 아우성이 전장 가득 울려 퍼진다. 페르난도 공작가의 후계자인 카르사스 경을 따르는 기사들과 크로방스 왕국의 제2왕자, 유벨 렌 크로방스를 따르는 병력이었다. 각자 자신이 모시는 이가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으며, 서로의 생명을 빼앗고 또 빼앗기는 끔직한 전투를 끝없이 이어 가고 있었다.

“진정한 국왕, 카르사스 님을 위해!”

“유벨 님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국왕이시다!”

☆ ☆ ☆

전 국왕, 고트린 1세가 갑작스럽게 서거한 지도 어느덧 반년. 크로방스 왕국은 빈 왕좌를 놓고 카르사스 공자와 유벨 왕자의 세력이 맞붙어 심각한 내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큰 문제가 생길 상황은 아니었다. 고트린 1세에겐 텔리온이라는 후계자가 있었고, 국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이 왕자는 누구보다도 확실한 정통의 피를 지니고 있어 왕위를 계승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고트린 1세가 죽고 나서 후계자인 텔리온 역시 반달이 채 못 되어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죽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왕위 계승자의 죽음은 큰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텔리온이 딱히 후사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현명한 텔리온은 자신의 결혼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20대 후반이 되도록 쉽게 왕자비를 결정하지 않고, 그 위치를 이용해 국내의 각 귀족 세력들을 조율해 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왕위 후계자가 가질 법한 훌륭한 정치적 감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가 죽어 버린 이상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큰 문제로 대두되어 버렸다.

국왕과 왕위 계승자를 보름 간격을 두고 모두 잃은 크로방스 왕국. 왕실의 대신들은 슬픔 속에서 장례를 치루고 바로 누구를 다음 국왕으로 모실지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첫 번째로 떠오른 인물은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되는 제2왕자, 유벨 렌 크로방스. 하지만 이 왕자는 정통성에 있어 꽤나 큰 흠집이 있었다.

그는 후궁의 자식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쯤 되면 후궁이나 첩을 두는 것이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설사 후궁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왕의 피를 이은 이상 왕자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국왕과 동침한 후궁은 몇몇 더 있었지만, 아쉽게도 고트린 1세는 그리 남자로서 뛰어난 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 씨를 뿌렸지만 싹이 튼 것은 텔리온과 유벨 둘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만큼, 어지간해서는 유벨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유벨 왕자는 그 혈통에 있어 귀족가의 반발을 심각하게 받고 있었다. 그의 어미가 왕족도 귀족도 아닌, 원래는 타국 출신인 비천한 평민이었던 탓이다. 비록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는 해도, 근본도 없는 핏줄을 왕으로 모실 수는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귀족들이 가진 의견이었다.

그래서 나온 또 다른 후보가 바로 페르난도 공작가의 카르사스 공자였다.

올해로 28세가 되는 카르사스 공자는 비록 고트린 국왕의 아들은 아니지만 상당히 짙은 왕실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 전 국왕의 동생인 페르난도 공작의 아들이며 모계 쪽도 왕실의 핏줄인 브로젠 후작가, 혈통 면에서는 타국의 비천한 피가 섞인 유벨보다도 오히려 더 왕에 어울린다는 의견이 많았다.

게다가 카르사스는 뛰어난 무용을 자랑하는 기사로 이미 자자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귀족다운 기품과 기사다운 용맹, 수하들에게도 신뢰가 깊었고 여러모로 존경을 받는 이였다.

반면 유벨은 다른 부분에서 명성이 높았다. 바로, 방탕아라는 이름으로.

그렇다고 유벨이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는 그런 추잡한 짓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단 한 여인밖에 끼고 다니지 않았다. 문제는 그 여인이 인간이 아닌 드워프였다는 점이다.

엘프 암컷을 안는 것도 사실, 떳떳하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물론 뒷구멍으로야 어지간히 권력 좀 있는 놈이면 다들 하는 짓이지만 적어도 드러낼 일은 아닌 것이다. 하물며 드워프라면? 아무리 사실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드워프 여인의 겉모습은 어린 인간 소녀와 비슷해 보인다. 그런 여인을 항시 대동하며 희롱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 솔직히 좋게는 안 보이는 것이다.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한 음탕한 모습이었다.

이렇다 보니 상황이 영 애매해졌다.

한 쪽은 전 국왕의 아들만 아닐 뿐이지, 존경받을 만한 기사이자 왕위에 지극히 어울리는 인물.

반면 다른 쪽은 국왕의 아들이란 것 외에는 전혀 뛰어난 점이 없는 하찮은 방탕아.

귀족들의 의견이 갈라지는 것은 차라리 필연이었다.

페르난도 공작가와 브로젠 후작가가 주축이 되어 카르사스를 국왕으로 밀었다. 각 지방의 영주들, 전통이 깊은 귀족 가문들이 그들을 지지했다.

유벨을 지지하는 것은 정통성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귀족들과 당대에 일어선 신흥 귀족들이었다. 대부분이 상인들로서, 부를 쌓아 작위를 얻은 이들이었다.

사실 유벨의 어미가 비록 평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가난하게 자랐다는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가난한 평민 처녀가 어떻게 왕의 후궁이 될 수 있겠는가? 저거야 평민 처녀들의 로맨스를 만족시켜 주는 허황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것이고, 사실 그녀는 크로방스 왕국 최대의 상단인 페오닌 가문의 딸이었다. 페오닌 가문과 친분이 있는 대다수의 상가들이 유벨을 지지하고 있었다.

정통성을 두고 무수한 설전과 토론이 오갔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양측 모두 흠집이 있었으니 말로 해결될 리가 없었다.

결국, 국왕이 서거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내전이 일어났다.

☆ ☆ ☆

크로방스 왕국 중부, 델피나 남작령.

벽돌로 쌓아 올리고 석회를 바른 새하얀 저택의 2층 발코니에서,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깨끗한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황금처럼 빛나는 선명한 금발에 보석같이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지닌 미모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시무룩한 눈으로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의 새싹들이 파릇파릇 피어올라 숲은 꽤나 녹색으로 물들어 있다.

문득 청년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청년, 크로방스 왕국의 제2왕자 유벨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상념에 젖었다.

카르사스 군과의 내전은, 처음에는 유벨 측이 우세했다.

막대한 부를 지닌 상인들은 유벨의 승리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유벨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크로방스 왕국도 차탄 공국처럼 상업을 지지하는 국가가 되길 원하고 있었다. 크로방스 왕국은 대륙 최대의 곡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상인을 무시하는 꽉 막힌 정책들 때문에 대부분의 부를 차탄 공국에게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지니고 있던 병력을 총동원하고, 대륙 각지의 용병들도 고용해 유벨 측은 카르사스 군을 몰아쳤다. 아무리 용맹한 기사라도 숫자 앞에는 무용인 법이다. 병력이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니 그 유명한 기사 중의 기사, 카르사스라 할지라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승리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은 그 이후였다.

“하아…….”

한숨을 쉬며 유벨은 숲에서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숲 저편에 널리 펼쳐진 광활한 보리밭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슬슬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며 탐스러운 알곡이 매달려 있어야 할 곳, 하지만 지금은 잔뜩 메말라 죽어 가는 보리 잎사귀밖에 없다.

유벨이 절망스러운 어조로 뇌까렸다.

“하필 지금 이런 지독한 흉년이 올 게 뭐람.”

크로방스 왕국 전역에 엄청난 가뭄이 들어 버렸던 것이다. 레단티의 축복을 받아 결코 샘이 마르지 않는다는 이 풍요의 땅에 극심한 대기근이 닥쳤다. 안 그래도 내전이 길어지며 치안은 악화되고 용병들과 탈영병이 왕국 곳곳에서 살인과 강간, 약탈을 일삼던 중이었다. 거기에 대기근까지 덮치니 지금 크로방스 왕국은 그야말로 현실에 펼쳐진 지옥도였다.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것쯤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지독히도 흉흉한 소문이 각지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유벨 측에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상인들 대부분이 곡물을 다루던 이들이다. 망해 버리는 상회가 속출하고, 그 자리를 어찌 알았는지 귀신같이 곡물을 들고 나타난 차탄 공국의 타오반 상회가 대신했다. 자금이 떨어지자 용병들은 곧바로 배신했고 전세는 역전되었다.

덕분에 유벨은 지금, 크로방스 왕국 동쪽 오지인 이 델피나 남작령까지 피신한 처지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 대기근 탓에 카르사스 측도 계속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 잠시 휴전 상태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계속 외교적으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들었다. 왕위를 노린 불의한 자의 목을 내놓으라고.

상인의 의리가 있어 델피나 남작도 아직까지는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 흉년이 계속된다면 상황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기지개를 켠 뒤 유벨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니, 누가 왕 시켜 달랬냐고. 하기도 싫은 걸 억지로 밀어붙이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그도, 그의 어미도 왕위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욕심을 부린 것은 그의 외조부, 페오닌 상단주다.

투덜거리는 유벨의 등 뒤에서 한 소녀가 사뿐히 걸어왔다. 가녀린 몸에 검은 머리칼을 예쁘게 땋아 올린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뾰족한 귀와 어색할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유벨의 악명의 원인이 된 드워프 여인, 피니아였다.

피니아가 유벨 곁으로 다가오더니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꽤나 장신인 유벨이 의자에 앉고 피니아가 그 뒤에 서니 적당히 높이가 맞는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릿결을 매만지며 그녀가 다정스레 물었다.

“유벨, 그렇게 왕 하기가 싫어?”

“응. 진짜 하기 싫어. 하지만 지금 분위기가 어째 왕이 되거나 단두대의 이슬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지?”

“아무래도 그렇지?”

유벨의 뺨을 쓰다듬으며 피니아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뒤로 젖혀 피니아의 얼굴을 마주보며 유벨이 투덜거렸다.

“어이, 남 일인 것처럼 말하지 마, 피니아. 내 목 떨어지면 다음엔 네 차례라고.”

확실히, 왕족을 홀린 사악한 드워프 마녀를 저들이 살려 둘 리가 없지. 피니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돌아가더니 유벨의 무릎에 사뿐히 앉았다. 두 팔로 목을 감싸며 피니아가 애교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쩌다가 이런 남자를 사랑해 버렸담.”

“이런 남자라 미안하구먼.”

뿌루퉁한 표정으로 유벨이 고개를 돌린다. 피니아가 깔깔 웃으며 그의 얼굴을 잡아 돌리고 입술에 키스를 했다. 이내 표정이 풀리는 유벨을 보며 피니아가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당분간은 안전해. 전쟁도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라잖아?”

대기근으로 인해 크로방스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상인들만큼 타격이 크지는 않지만, 카르사스 측도 자신의 영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쪽도 군량을 확보하기 전까진 못 움직일 거야.”

“대신 움직이는 순간 난 훅 가는 거네. 시한부 인생이구먼.”

피니아가 구시렁대는 유벨의 뺨을 톡톡 때렸다.

“그렇게 되면 눈치껏 도망가야지, 유벨.”

“너랑 나랑 둘이서 사랑의 도피?”

“사랑의 도피는 이미 늦었고, 이건 그냥 망명이지. 신분도 정체도 숨기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면 설마 잡으러 쫓아오겠어?”

“피니아, 난 곱게 자라서 험한 일 못하는데?”

“내가 막 자랐으니까 괜찮아. 너 하나쯤은 먹여 살릴 수 있어.”

“아니, 남자 주제에 여자에게 얹혀사는 것도 좀…….”

“왜? 주인이 노예를 부려서 돈 벌게 시키는 게 뭐가 이상해?”

“누가 노예라는 거야?”

유벨이 인상을 구긴다. 그 모습에 피니아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가 유벨의 품에 안긴 채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할 수 없잖아. 이 세상에서 나는 노예일 뿐인걸. 네가 왕이건, 왕이 아니건 간에…….”

“피니아…….”

유벨도 그녀를 껴안고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었다. 설사 이 전쟁에서 이겨 왕이 된다 할지라도, 진정 원하는 것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어딜 가도 없겠지…… 우리를 연인으로 봐 주는 세상 따위는.”

두 연인이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작게 속삭이며 뜨거운 숨결을 교차한다.

“사랑해, 유벨.”

“사랑해, 피니아.”

그때 안쪽 방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논다~.”

순간 피니아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누구냐!”

외침과 동시에 그녀가 바로 유벨에게서 떨어지며 바닥을 걷어찼다.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도끼 창이 회전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숙련된 움직임으로 도끼 창을 움켜쥔 뒤 피니아가 바로 거실 쪽을 겨누었다.

섬뜩한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조금 전 사랑을 속삭이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전신 가득 투기를 일으키는 전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그러자 거실 구석의 어둠에서 한 남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처럼 보이는 이였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써 얼굴마저 보이지 않는 그 남자가 유벨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크로방스 왕국의 유벨 왕자님이 맞으신지?”

피니아가 잔뜩 독 오른 고양이처럼 경계심을 표한다. 유벨이 눈을 매섭게 뜨며 그녀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건지 모르겠군. 일단 정체와 용무를 고하라.”

붉은 로브의 사내가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마법사올시다. 크로방스 왕국의 정당한 국왕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 찾아왔습니다만.”

“내 편이 되고자 왔다고?”

의심쩍은 눈으로 유벨이 피니아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거짓말은 아닙니다, 유벨 님.”

☆ ☆ ☆

피니아의 말을 듣고 유벨은 일단 안심했다. 적어도 저 붉은 로브의 남자가 암살자 같은 부류는 아니란 의미니까.

긴장을 풀며 유벨은 유심히 눈앞의 남자,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일단 복장은 마법사인데…….’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든다. 원근감이 살짝 어긋난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유벨은, 그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메? 뭔 덩치가 이리 크대?’

유벨도 나름 자신이 이 시대 청년의 평균 키는 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레펜하르트라는 마법사는 그런 그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냥 껑충하니 꺽다리인 것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어깨 넓이부터가 어지간한 기사들도 울고 갈 수준이다. 휘하 기사 중 가장 거한인 타웨인 경도 이 마법사에 비하면 작아 보였다. 멀리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 눈앞이 붉은 로브로 가득 차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사, 상당히 기골이 장대하군, 그대.”

유벨이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사로 안 보이십니까?”

‘그래서 일부러 품이 넉넉한 로브로 전신 근육까지 가렸는데, 쩝.’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봤자 체적 자체가 워낙 크니 영 숨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유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좀 과하기는 하지만, 마법사 중에서도 덩치 좋은 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전투 마법사인가 보군.”

“네, 뭐…….”

전투 마법사의 정의는 체술과 마법을 함께 익히는 전장의 마도사.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고 해서 레펜하르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이 자세를 바로 하고 레펜하르트를 차분히 올려다보았다. 방탕하다고 알려진 이 왕자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심으로 나를 도우려 왔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방금 잘 논다~라는 대사를 들은 듯한 기분이…….”

“기, 기분 탓이겠지요.”

레펜하르트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조금 전, 유벨과 피니아가 애정 행각을 벌이는 걸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누구는 아직도 진도 전혀 못 뽑고 있는데 눈앞에서 짜디짜게 염장질을 하고 있으니 눈꼴이 시지 않을 수가 있나? 그래서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이었는데 용케도 들은 모양이다.

유벨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더니 힐끔 피니아를 돌아본다. 그녀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거짓말이네요.”

“헤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벨도 눈을 흘긴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탄을 터트렸다.

‘아으, 이래서 드워프는 골치 아파.’

드워프의 종족 특성, 진실을 듣는 귀는 역시 여러모로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물론 세상에는 진실만을 말하며 일부를 숨겨 거짓을 고하는 방법도 다양하니 속이려면 못 속일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말발 되는 프로 사기꾼쯤 되어야 가능한 것이고, 레펜하르트에게 그 정도 말주변은 없다.

난처해하는 그를 보다 말고 유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그대가 그런 눈으로 보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의외로 유벨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걱정 마라. 난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피니아와의 관계로 온갖 눈빛 다 받아 본 유벨이었다. 뒷구멍으로 어떤 소문이 오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잘 논다~.’ 정도면 유벨 입장에서는 꽤나 호의가 담긴 어조인 것이다.

난처해하며 레펜하르트가 후드를 걷었다. 의외로 얼굴이 젊어 유벨과 피니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 연인도 엘프니까요.”

“응?”

연인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붙일 것이 못 된다. 한층 더 놀란 표정을 짓는 유벨을 향해 피니아가 속삭였다.

“지, 진짜인 것 같은데?”

그녀도 꽤나 놀랐는지 가식적인 어투가 사라지고 평소처럼 반말이 나와 버렸다. 둘은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레펜하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그냥…… 세상에 나 같은 변태가 또 있을 줄은 몰라서…….”

“…….”

하긴, 세상에 이종족 여인들을 성적으로 탐하는 놈들이야 많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는 얼마 없겠지. 유벨이 신기해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덕분에 묘하게 분위기가 방만해졌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탄을 터트렸다.

‘끄응…… 어쩌다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거야?’

원래 계획은 신비롭게 나타나 왕자를 도우는 현자의 등장을 연출하려 했는데, 어째 말을 나누다 보니 현자는 고사하고 취향 특이한 놈들끼리 동아리 활동 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역시 신비주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먼…….’

어쨌거나, 그 덕에 유벨과 피니아의 경계심이 상당히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유벨이 다시 왕자다운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를 돕기 위해 왔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유벨 전하.”

“그렇다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위엄을 담아 유벨이 물었다. 레펜하르트도 자세를 바로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화 십만 닢에 달하는 군량이라면 어떻습니까?”

순간 유벨과 피니아의 안색이 동시에 굳었다.

“금화 십만 닢?”

금화 십만 닢이면 크로방스 왕실의 반년 치 예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 정도 액수의 곡물이라면 크로방스 왕국 전체를 석 달간 먹이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흉년이 들기 전의 가격이고, 곡식 값이 20~30배씩 뛴 지금은 그렇게까지 엄청난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벨 군의 군량을 모두 대기에 충분한 수준인 것은 틀림없었다.

“……부자로군? 마법사가 그리 돈벌이가 잘되나?”

반쯤 농을 섞어 애써 당황을 숨기려 했지만, 유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밀리고 있는 유벨군에 저 정도의 지원이 들어온다면 기울어진 판도를 바꾸기에 충분하다!

“너무 타이밍이 좋아 질 나쁜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군…….”

힘이 빠져 의자에 몸을 누이며 유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물론 저 제안이 사실인 것은 확실했다. 바로 옆에서 피니아가 진위를 확인해 주었으니까.

거기에, 레펜하르트가 쐐기를 박듯 추가타를 날렸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병력도 원조할 것입니다. 숫자는 적으나 질은 높지요.”

“……질이 높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도 되겠소?”

이쯤 되니 유벨도 더 이상 반말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슬쩍 말투가 반공대가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유벨 전하의 휘하에는 오러 능력자가 몇이나 있습니까?”

“……한 명도 없소만…….”

표정을 구기며 유벨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현재 크로방스 왕국에 거하는 오러 유저의 숫자는 총 다섯이었다. 그중 카르사스 공자를 지지하는 이가 둘, 나머지 셋은 중립을 선언한 채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다. 초반에 압도적인 금력으로 밀어붙이고도 유벨 군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오러 유저는 그 자체로 전술 병기라 할 존재, 그런 무인이 유벨 측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부끄러워하는 유벨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여섯 명의 오러 능력자라면 큰 힘이 되겠군요?”

“여섯?”

너무 놀란 나머지 유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로방스 왕국의 오러 유저를 다 합쳐도 다섯 명밖에 없다. 지금 이 마법사는 자신이 한 국가가 보유한 것보다도 더 많은 수의 오러 유저를 동원할 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레펜하르트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벨은 이제 숫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졌다. 동시에 경각심도 들었다. 대체 이자는, 이런 엄청난 조건을 걸어서 과연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그럼 그것에 따른 대가는?”

레펜하르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유벨 전하께서 국왕이 되면, 제게 영지를 하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벨이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건에 비해 너무 흔한 요구였다.

“단지 그것뿐이오?”

저것만으로는, 레펜하르트가 굳이 유벨을 찾아온 이유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지금 유벨은 거의 막바지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굳이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쪽에 판돈을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레펜하르트가 내건 조건이라면, 그냥 카르사스를 찾아갔어도 얼마든지 환대를 받았을 터였다. 군량이 없어 전쟁을 못 하는 것은 사실 저쪽이 더 급했으니까.

“왜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유를 듣고 나면, 왜 제가 유벨 님을 찾았는지 납득하실 겁니다.”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바라는 영지는 완벽한 자치령, 크로방스 왕국의 통속법으로부터 독립된 장소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니까요.”

유벨이 조금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공국이나 변경백 같은, 한 국가 내의 독립된 법과 체제를 지닌 영지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어지간히 큰 공이 없이는 내리기 힘든 조건이다. 왕실의 권위로부터 벗어난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일이므로.

“……그거라면 확실히, 승기를 잡은 카르사스 공자 측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이겠군. 하지만 대체 왜?”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인해, 유벨은 레펜하르트가 왜 자신을 택했는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유벨 전하.”

2

델피나 남작령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

마을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대기근으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는 와중이었다. 거기에 유벨 왕자와 그의 군대까지 왔으니 이곳이 전장이 될 가능성이 극히 높아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공포에 떨며 앞으로 어찌 될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말라붙은 마을, 사람 없는 적막한 거리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막 유벨 왕자를 만나고 다시 성을 빠져나온 레펜하르트와,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리스였다.

다른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시리스가 슬쩍 물었다.

“이야기는 잘되었나요?”

“이야기 자체야 잘되었지.”

유벨 입장에서는 레펜하르트의 의견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대로라면 단두대의 이슬이 될 판인데 갓 구운 빵, 딱딱한 빵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레펜하르트의 제안은 유벨도 언제나 바라던 것이었으니 더더욱 반대할 리가 없다. 이야기 자체야 막힐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야기한 대로 흘러가느냐지.”

불만스러운 듯 레펜하르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유벨은 몰라도 그 휘하의 귀족들이 그의 의견을 과연 받아들여 줄까? 당장 유벨부터도 의견 자체는 찬동했으되, 실행에는 난색을 보였다.

-지금 상황이라면 그대의 요구 자체는 반대할 이가 별로 없을 것이오.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영지로 요구한 곳은 카르사스 공자 측, 겔페인 자작의 영지였다. 크로방스 왕국의 서부, 험한 글로텐 산맥에 위치한 척박한 땅으로 언제나 몬스터와 들짐승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곳이다. 주요 산업은 드워프 노예를 이용한 광산업, 정작 인간은 얼마 살지도 않는 장소였다. 게다가 그 광산업조차도 광맥이 고갈되어 가는 탓에 거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적측의 영지인 데다가 가져 봐야 그다지 건질 것도 없는 땅, 귀족들도 전혀 욕심을 내지 않는 곳이었다. 당장 겔페인 자작이 카르사스 공자 측에 붙은 이유도 바로 옆 영지를 집어삼키려는 욕심이었으니까. 그런 땅을 주고 금화 십만 닢에 달하는 군량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반대할 이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정작 내가 왕위를 계승하고 난 뒤에 어찌 될지는 자신이 없소. 노예들의 신분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법을 제안한다면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 같소만.

유벨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사실, 가능하다면 이종족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하는 일은 당장 유벨 자신도 하고 싶었다. 그래야 피니아랑 떳떳하게 행복하게 살 테니까. 왕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후궁으로라도 떳떳하게 곁에 두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그가 왕이 된다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귀족들이 있고, 굳어질 대로 굳어진 전통이 있고, 여전히 이종족을 노예일 뿐이라 인식하는 민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을 타파하고 과연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유벨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피니아, 드워프인 그녀조차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의견을 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일단 자치령을 법적으로 인정시키고 나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시리스와 함께 길을 걸으며 레펜하르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자치령은 자치령. 그 안에서 돌로 빵을 굽건 클레이모어로 이를 쑤시건 외부에서 신경 쓰는 것은 내정 간섭이 되거든. 일단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물론 이래저래 골치 아프긴 하겠지만.”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인간의 의견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을 힘으로 누르고 밀어붙였다. 그래서 편하게 일이 진행되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이번에는 좀 느려도, 확실하게 가야지. 인간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그렇군요…….”

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뜻에 찬동할 인간이 있다더니, 듣고 보니 꽤나 이해가 갔다. 방법도 현실적이었다. 잘만 되면 적어도 첫 발자국은 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레펜하르트 님.”

“응?”

“혹시 유벨 왕자와 원래 알던 사이였나요?”

“아니, 얼굴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야. 소문만 들었었지.”

“그럼 전생에서는 누가 이겼나요?”

별 상관없는 문제지만, 역시 궁금하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더니 가차 없이 대답했다.

“카르사스 공자. 사실 전생에서 유벨 왕자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거든.”

그리고 유벨 왕자는 그저 음탕한 취미를 지닌, 왕실의 수치로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된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카르사스 공자가 크로방스 왕국의 국왕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시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역사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겠죠?”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레펜하르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도 한 나라의 국왕을 바꿔 버릴 정도로 역사에 크게 개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쪽이 정상이지.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쪽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어차피 되돌려진 시간.

어차피 새롭게 쓰이는 역사.

이미 레펜하르트가 이 시대로 돌아온 시점부터 그가 알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 음유시인이 지어내는 허황된 이야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미 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그래도 최선을 다해 희망을 쌓아 올리는. 다른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노래하듯 중얼거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잘되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난 꽤 괜찮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봐. 오크와 엘프, 드워프들과 함께 싸우며, 인간이 그들을 노예가 아닌 전우로 보게 된다면 말이지.”

레펜하르트는 누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벨과의 마지막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벨 전하, 전하께 원조하는 병력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그들은 오크와 드워프, 엘프 들입니다. 저는 그들의 의지를 대행해 이곳에 왔습니다.

☆ ☆ ☆

다른 일행들은 마을 외곽에 위치한 작은 여관에 묵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홀에 모여 있던 실란과 러스, 틸라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형님?”

“그럭저럭? 아직까지는 잘되어 가는 것 같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홀에 놓인 벽난로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러스가 감탄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꽤나 거창하게 행보를 시작하시는군요, 형님.”

그랜드 포지를 떠난 지도 벌써 한 달. 레펜하르트 일행은 그동안 정신없이 각지의 유적들을 탐사해 댔다. 그동안 그들이 탐사한 유적의 숫자는 무려 열 개! 이쯤 되면 탐사했다기보다는 그냥 털어 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전혀 탐사가 아니었으니까.

사흘에 한 번꼴로 유적을 탐사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오러 능력자인 러스와 드워프 전사 틸라가 합류한 데다가 레펜하르트 역시 마법의 힘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이다. 그냥도 탐사할 능력이 충분한데 정식 답안지를 옆에 끼고 들이댔으니 시간 절약이 장난이 아니었다. 질풍처럼 유물을 털어 댈 수 있었다.

그 일을 떠올리며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유적에서 악마들 상대할 때보다 유물 들고 나오는 게 더 힘들었어.”

물론 유적을 여기저기 털다 보니 무한의 주머니 숫자도 상당히 늘어나긴 했다.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은 압축률이 열 배 가까이 되는 무한의 주머니만도 열 개가 넘게 챙긴 후였다. 하지만 아무리 부피와 무게를 줄인다 해도 절대량 자체가 너무 크다 보니 들고 돌아다니기 벅찬 사이즈임은 분명했다.

러스의 말에 실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제가 근육이 늘었으니 망정이지.”

“……아니, 수통 하나 들 수 있는 놈이 수통 두 개 들 수 있게 되어 봐야 별 차이는 없지 싶은데?”

“윽! 하지만 이제 곧 세 개도 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봤자 수통이잖아?”

러스와 실란이 농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레펜하르트가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절반 이상 내가 들고 나왔는데 무슨…….”

하여튼 그렇게 은의 시대 유물들을 잔뜩 건진 레펜하르트는, 개중 값어치 나가는 것들을 타오반 상회에 팔아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자그마치 유적 열 개, 그것도 비싼 것만 챙겨 온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닥까지 싹싹 긁어 왔으니 그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타오반 상회에 투자했던 금화 천오백 닢 역시 대기근에 힘입어 금화 삼만 닢이 넘는 거액이 되어 있었다. 실란이며 러스에게 각자의 몫을 떼어 주고도 지금 그의 총 재산은 거의 금화 육만 닢에 육박했다. 두 사람 역시 금화 일만 닢 정도의 재산을 타오반 상회에 맡겨 놓고 있었다.

러스가 검을 뽑아 어루만지며 웃었다.

“돈도 돈이지만, 전 역시 명성을 떨칠 기회가 온 것이 더 기쁩니다, 형님.”

유적 탐사-라기보다는 유물 털이라 불러야 할 행위들을 벼락치기로 끝낸 뒤 레펜하르트 일행은 크로방스 왕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전에 가담하기로 한 자신의 계획을 일행에게 설명했다. 시리스나 틸라야 반대할 리 없겠지만, 러스나 실란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에 대해 조금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둘 다 반색하며 찬성을 표했다.

-전 형님을 따르기로 이미 맹세한 몸입니다. 게다가 어차피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명성이 불가피한 것, 전장에서 제 이름을 높인다면 제 목표도 더 가까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러스의 대답.

-전 이미 레펜 씨의 뜻에 찬성했다고 했잖아요. 뭘 이제 와서? 그리고 유적 탐사도 좋지만, 역시 순례자라면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죠.

이것이 실란의 대답.

둘 다 흔쾌히 레펜하르트를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바로 유벨을 찾아 이곳 델피아 자작령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유벨 왕자와 접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때마침 여관 안주인이 푸짐한 음식을 들고 홀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 준비했습니다요. 많이들 드십쇼~.”

타오반 상회와 연결되어 있는 레펜하르트 일행 덕분에 이 여관은 때아닌 횡재를 누리고 있었다. 식량이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레펜하르트는 아예 처음부터 타오반 상회를 통해 미리 이곳에 식재료를 몽땅 갖다 놓으란 의뢰를 해 두었다. 이들 입장에선 하늘에서 음식이 뚝 떨어진 격이었다. 지금 크로방스 왕국에서는 돈보다도 식량이 더 귀하다. 여관 주인 부부는 마치 레펜하르트 일행이 인세에 내려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극진히 굴고 있었다.

“필요한 것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네, 수고하세요.”

예의 바른 실란이 일행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건넨다. 안주인이 송구스러워하며 다시 들어가자 일행은 때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에일 주를 벌컥벌컥 마시다 말고 문득 실란이 물었다.

“아, 그런데 레펜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우리한테 금화 십만 닢이라는 거액이 있었어요?”

실란이 계산해 보기로, 그들 일행의 재산을 다 합쳐도 금화 팔만 닢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레펜하르트는 자신 있게 십만 닢을 부른 것이다. 피니아가 곁에 있었으니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성격 상 일행 몰래 돈 꼬불쳐 놓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가진 의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금화 십만 닢이 아니라 ‘금화 십만 닢에 해당하는 곡물’이잖아.”

현재 타오반 상회는 레펜하르트의 투자 덕분에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차탄 공국 내에서 레펜하르트가 벌인 일―공국 2위의 대상단 회주를 가차 없이 죽여 버린 일―에 대해 감탄한 시볼트는 그의 식견이 남다름을 알아채고, 아예 상단의 모든 힘을 털어 곡물을 사 크로방스 왕국으로 옮겼다. 만약 대기근이 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망해 버릴 위험한 짓이었지만 시볼트는 과감히 계획을 이행했다. 어차피 레펜하르트가 아니었다면 망하기는 마찬가지, 그렇다면 인생의 기회로 여기고 한번 도박을 해 보자는 심보였다.

다행히 도박은 성공했다. 그리고 시볼트는 순식간에 차탄 공국 2위의 대상회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레펜하르트에게 고마움과 경외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뭐, 그렇다고 레펜하르트를 상회의 주인으로 모신다거나 하는 개념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무리 고마워도 그는 상인인 것이다. 대신 그는 레펜하르트에 한해서, 그가 곡식을 구입할 때는 현 시가가 아닌 구입 원가대로 판매할 것을 약속했다. 상단을 살리고 크게 키울 수 있게 해 준 은인에 대한 상인다운 보답이었다.

즉, 레펜하르트가 말한 ‘금화 십만 닢에 해당하는 곡물’은, 사실은 끽해야 금화 삼사천 닢 정도면 구입 가능한 양인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틸라가 혀를 찼다.

“묘하게 사기 같은데요, 그거.”

완전히 짜고 치는 도박이 아닌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때? 거짓말은 안 했잖아?”

피니아조차도 그의 말에서 거짓을 찾지 못했으니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다. 본인의 생각과 달리 레펜하르트도 은근 사기꾼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키득거리다가 문득 러스도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형님.”

닭다리를 으적으적 씹으며 레펜하르트가 러스를 돌아보았다.

“여섯 명의 오러 능력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러스가 손가락을 꼽으며 셈을 시작했다.

“형님이랑 저, 그리고 드워프 오러 유저가 셋…….”

오른손을 다 접은 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섯 명뿐인데요? 혹시 엘프 중에도 제가 모르는 오러 능력자가 있습니까?”

“아, 물론 엘프들에게도 오러 능력자는 있지만…….”

그가 기억하는 엘프 오러 유저는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엘프 오러 유저와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군이긴 하지만 친구는 아닌, 그런 관계?

‘아무래도 설득하기 힘든 타입이라 지금 시점에서 찾아가긴 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엘프는 아니다. 그리고 나도 저 숫자엔 포함되지 않아. 난 어디까지나 뒤에서 움직일 뿐, 전면으로 나설 생각은 없거든.”

러스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둘이 비잖습니까?”

레펜하르트는 에일 주가 든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하게 목을 축인 뒤 그가 눈을 빛냈다.

“괜찮아. 오크 대투사, 칼켄과 스탈라가 합류할 테니까.”

“……오크요? 오크들 중에서도 오러 능력자가 있습니까?”

러스뿐 아니라 실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같은 노예 종족이라도 엘프나 드워프에 비해 오크들은 멍청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평균적으로 멍청한 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오크에게도 위대한 검의 혼을 일깨운 자가 있단 말인가?

놀란 눈빛을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키드 산맥 남동쪽으로 보름쯤 되는 거리에 광야가 하나 있다. 인간 아닌 종족이 시련의 땅이라 이름 붙인 대지지. 그곳에 옛 전통을 그대로 보존한 오크들이 있다.”

모든 야성을 잃은 겁 많은 오크 노예가 아닌, 오로지 야만성만을 키워 흉포할 뿐인 오크 검투사도 아닌, 이성과 야만이 절묘하게 결합해 긍지 높은 전사의 영혼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

“푸른 곰 부족이라 하지.”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바로 위대한 오크 대투사, 칼켄과 스탈라였다. 부부이기도 한 이들은 전생에서, 이미 노년이 되었음에도 엄청난 전투력으로 레펜하르트의 군세를 이끌곤 했다.

심지어 지금 시대에서는 전성기의 육체를 지니고 있을 터, 과연 지금의 그들이 얼마나 강할 지는 레펜하르트라 할지라도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타시드도 그곳에 있겠군. 그 녀석, 많이 컸으려나?’

문득, 전생의 그 우락부락한 오크 전사와 왜소한 어린 오크 소년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레펜하르트는 그리움에 히죽 웃었다.

러스가 믿기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오크 검투사들 중엔 제법 쓸 만한 자들이 보였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오크가 그렇게 강할까요?”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은 지상 최강의 전투 집단이다. 인간과 엘프, 드워프를 모두 포함한다 할지라도!”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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