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제13장 엘븐우드의 새싹 (14/84)

제13장 엘븐우드의 새싹

1

추억의 빗장이 끌러진다. 환하게 웃는 어린 소녀들의 환영이 파노라마처럼 뇌리 가득 펼쳐진다.

-이걸 봐, 세렌디!

-같이 가자, 세렌디! 오늘은 사막 전갈을 잡으러 갈 거야!

그녀를 부르던 그 목소리.

-세렌디!

그녀의 이름, 모두로부터 받아 모두로부터 불리었던 바로 그 이름.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기억나…….”

이름이 떠오르자, 다른 것들도 점점 추억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틀림없었다. 눈앞의 이 엘프 처녀는 어린 시절 가장 따랐던 그녀의 자매, 샤일렌이었다.

시리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엘프에게 있어 모든 아이들은 형제자매이며, 모든 어른들은 아비이자 어미다. 그리고 샤일렌은 그 수많은 형제자매 중에서도 유독 친하게 지냈던 이였다. 다정한 미소로 이끌며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던, 가장 사랑했던 언니…….

“살아…… 있었구나…….”

애써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며 시리스는 샤일렌의 두 손을 맞잡았다.

50여 년 전의 그 참극 속에서, 그 아수라장 속에서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당연히 자신처럼 인간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팔려 갔을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토록 당당하게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그저 반가움이라는 단어 정도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온기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온다.

하지만 샤일렌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너도 살아 있었네.”

싸늘한 목소리였다. 시리스가 당황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다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한 경멸 가득한 얼굴이었다.

“……샤일렌 언니?”

샤일렌의 옷자락을 꼭 쥐고 숨듯이 등 뒤에 서 있던 두 엘프 아이들, 그중 사내아이가 시리스와 샤일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 아는 사이예요?”

“말 섞지 마, 라이데.”

냉엄한 음성이었다. 라이데가 흠칫 놀라 다시 몸을 숨긴다. 샤일렌이 가라앉은 눈으로 시리스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러운 인간의 노리개가 되어, 긍지도 명예도 없이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세렌디.”

순간 시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 나는…….”

순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록 스스로는 결코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는 50년 넘게 인간 밑에서, 인간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인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다. 그 이후 이리저리 팔리면서 부끄러운 꼴도 많이 당했다. 다행히 정조를 더럽히진 않았지만, 더러운 인간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과연 자신이 더러운 인간의 노리개가 아니었나?

저 삶 속에서도 긍지와 명예를 지키고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나?

시리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슬며시 샤일렌과 맞잡은 두 손을 풀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언니의 비난이 칼날처럼 가슴 속을 후벼 파고 있었다.

시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 표정을 본 샤일렌은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살짝 가슴이 아팠다.

솔직히, 저 덩치 큰 인간의 말에 흔들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저들은 정말로 자신들을 구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탐욕 없이,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그저 선의로 행한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대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노예였다.

‘……인간을 믿을 수는 없어…….’

침묵이 흘렀다. 두 어린 엘프 아이들이 연신 샤일렌과 시리스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핀다. 그때 나직한, 하지만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그녀는 내 동료다. 절대 노예 따위가 아니야.”

순간 샤일렌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레펜하르트가 곁에 다가와 한껏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우락부락, 무식해 보이기만 하는 젊은 인간 청년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실로 정확하기 그지없는 엘프어가 흘러나온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우리말을?”

생각해 보면, 그녀와 시리스는 계속 엘프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애초에 엘프어를 모른다면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샤일렌이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의문을 풀어 줄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암탉이 병아리를 감싸듯 시리스의 앞을 가로막고 그가 매섭게 말을 이었다.

“계속 그녀를 노예 취급하는 것은, 설사 그녀의 가족인 당신이라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다.”

여전히 차분한, 하지만 결코 감정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샤일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설마…… 진심?’

대지의 아이들인 드워프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정령의 후예인 엘프들은 감정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에 감응하는 이 엘프들의 이능은 드워프들과 달리 교육과 훈련에 의해 각성하는 능력이었다. 즉, 인간의 노예로 살고 있는 엘프들에겐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훈련받은 샤일렌은 어느 정도 타인의 감정과 교감하는 것이 가능했다.

레펜하르트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희미한 감정의 향기가 아련히 맡아졌다. 진심 어린 분노 속에 뒤섞인, 간지러울 정도로 지극한 애정의 감정이 코끝을 맴돈다.

점점 더 이 인간이, 다른 인간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샤일렌은 함부로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비록 감정을 교감한다 해도, 자신의 감각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노예가 되어서도 여전히 대지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드워프들과 달리 엘프들은 세계수, 엘븐하임을 잃었다. 이 감정 감응 능력은 정령술을 익히기 위한 기초 단계이기도 하다. 세계수가 없어진 지금의 엘프들은 대부분의 정령술을 잃었고, 그만큼 교감 능력 역시 현저히 떨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렇게 샤일렌이 당혹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더니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시리스.”

살짝 씩씩대는 목소리였다. 시리스가 차분히 대답했다.

“네, 레펜하르트 님.”

“너도 문제야.”

시리스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훈계하듯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왜 말을 못 해? 너는 노예가 아니라고!”

시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차갑도록 굳어진다. 레펜하르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확실하게 말하란 말이야. 노예가 아니라고, 자유로운 한 사람의 엘프라고!”

“…….”

적막이 흘렀다. 시리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순간 시리스의 두 눈이 매섭게 뜨였다.

“정말로…….”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턱을 들어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변한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가 움찔한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제가 노예가 아닌가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반문했다.

“아니, 내가 언제 너를 노예처럼 대한 적이 있어?”

확실히 그런 적은 없었다. 그동안 레펜하르트가 보여 준 모습은 결코 노예를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리스도 그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차가운 음성으로 그녀가 대꾸했다.

“아니요.”

“그럼 내가 언제 네 의사를 묻지 않고 행동한 적이 있어?”

“없지요.”

“그런데 왜 계속 스스로를 낮추는 거야!”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레펜하르트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시리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님은 한 번도 제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잖아요…….”

“응……?”

순간 깨달았다. 그는 진심으로 시리스를 상대했다. 언제나 그녀의 의사를 물었고, 언제나 명령이 아닌 부탁만을 해 왔다. 충분히 행동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한 번도 ‘입 밖으로’ 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쯧…….”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얼마나 둔하게 굴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확실하게 말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해 줄 생각이다.

“넌 노예가 아니야. 너와 나는 동등하다. 넌 자유로운 엘프야.”

하지만 시리스는 전혀 화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녀가 두 눈을 치켜떴다.

“내가 노예가 아니라고요?”

“그래, 너는 노예가 아니야.”

달래는 듯한 레펜하르트의 대답에, 시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아요. 당신이 엘프를 노예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엘프도, 드워프도 당신은 정말로 인간처럼 대하고 있지요. 그건 나도 잘 알아요.”

“그, 그런데 왜…….”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백금발이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어요. 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하지만 하나는 알겠네요.”

선명한 눈동자로 레펜하르트를 직시하며 시리스가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은…….”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절대 표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감정. 그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언어가 되어 그녀의 혀를 움직였다.

“나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을 뿐이죠…….”

☆ ☆ ☆

레펜하르트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굳었다.

“어…….”

잠깐 시리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그녀가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뇌리 한구석에서, 주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가 정말 그녀를 바라보았던가?’

진정 지금의 저 가녀린 엘프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멋대로 기억 속의 그녀를 대하듯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지만, 그것이 과연 시리스에게 향하는 애정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복잡한 상념이 회백색 뇌 속을 어지럽게 흩어 지나갔다. 시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상관없었어요. 어차피 노예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 없었죠.”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린다. 레펜하르트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지만 그럴 거면 노예처럼 취급해 주세요.”

시리스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가올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그녀를 구했다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했다.

지독한 착각이었다. 레펜하르트는 그녀를 구한 적이 없었다. 그가 구한 것은 전생의 시리스일 뿐이었다. 이 시대에서, 그는 그저 엘프 노예를 돈 주고 산 인간일 뿐이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시리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전혀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돈 주고 사서, 멋대로 친절하게 대하고, 애정을 담뿍 주며, 너는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

소름이 돋았다.

“……내 것이 아닌 진심을 받을 수는 없어요.”

결국 속내를 터트린 시리스가 후회하는 얼굴로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발길을 돌렸다. 레펜하르트는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휘이이잉…….

메마른 모래 바람이 사막 위를 달린다. 낙타들이 눈을 껌뻑이더니 제 자리에 주저앉아 뭔가를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레펜하르트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던 상념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그녀는 전혀 틀리지 않았다.

틀린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군…….’

레펜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결심했다.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이로 인해 닥칠 일에 대해 공포마저 느껴졌지만, 그는 이 결심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였으니까.

레펜하르트가 시리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리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너는 자유야. 이제 너의 행동을 구속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어.”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이제 너의 행동을 구속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어.”

힘없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본다. 왜 이 이야기를 또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와는 의미가 달라. 내 곁에 있는 것도, 나를 떠나는 것도 모두 네 의지라는 의미다. 원하는 대로 행해. 그것이 너의 의지라면 나는 전부 존중할 테니까.”

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펜하르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곳이었다면 이런 말도 가식에 불과했겠지만…….”

대륙은 이미 인간이 지배하는 곳, 주인에게 버림받은 엘프에게 안주할 장소 따위는 없다. 다른 곳에서 시리스에게 이런 소리를 해 봤자 현실적으로 그녀가 레펜하르트를 떠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네 고향, 네 가족이 있는 곳이야.”

이곳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단하임 일족이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녀는 언제든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머무를 곳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시리스, 아니,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시리스는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 더 이상 자신의 주인이 아닌 이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두 눈동자에 담긴 강렬한 빛, 진심이었다.

“당신을 떠나라는 말인가요?”

“아니야.”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네가 내 곁에 남아 있어 주기를 원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이해해.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시간을 거슬렀다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해 봐야 믿어 줄 리 없다.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 그중에서도 가장 현명하다는 마켈린조차 증거를 보이기 전까지는 그를 믿지 못했을 정도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버림받는 것까진 참을 수 있지만, 미친 자 취급 받으며 경멸 받는 것만은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진심을 담아…….

“이제 그대를 구속할 것은 어떤 것도 없어. 그저 간청할 뿐이지.”

추억이 아닌, 눈앞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이 가녀린 소녀를 직시하는 것뿐이다.

“앞으로도 그대가 나와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

시리스는 멍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가슴 한구석에서 흘러나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자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소녀를 향해.

머뭇거리다가 시리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 ☆ ☆

샤일렌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레펜하르트에 대한 의심이나 두려움은 이미 가신 지 오래였다.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 덩치 큰 인간이 정말 엘프들을 노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확신마저 들 정도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터덜터덜 그녀에게 걸어왔다. 영 기운 없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저 덩치, 저 근육으로 저렇게 힘없어 보이는 걸음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얼마나 이 청년이 상심해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진다.

샤일렌과 두 엘프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 낙타 한 마리만 빌려 주신다면…….”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희 것도 아닌데 허락받을 이유가 없지요. 원하신다면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순간 샤일렌이 눈을 빛냈다.

노예 사냥꾼들이 데리고 온 열 마리의 낙타들은 여전히 그들 주위를 서성대며 한가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가혹한 사막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단하임 일족에게 열 마리의 낙타란 엄청난 재산이었다. 게다가 저 낙타의 안장에는 노예 사냥꾼들이 챙겨 온 물과 식량도 가득했다. 엘프답지 않게 샤일렌이 탐욕의 눈빛을 보였다 해서 그녀를 탓할 수는 없으리라.

“구해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감동으로 그녀가 말을 더듬을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어려워하며 부탁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저 아이를 가족과 만나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저만치 떨어져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리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샤일렌은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녀의 자매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인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던 걸까?

그녀의 눈빛을 경계의 의미로 읽은 것인지, 레펜하르트가 서두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제 노예가 아닙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요. 인간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리거나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샤일렌은 진작 시리스를 일족에게 데려가기로 마음을 굳힌 후였다. 상황을 여기까지 지켜본 이상, 설마 레펜하르트나 시리스가 그들에게 해코지를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레펜하르트의 부탁에 자기 자신은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 문득 떠오른다.

“당신……, 저 아이를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

“네, 이 근처에서 적당히 기다리고 있을 셈입니다.”

레펜하르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일렌이 빙그레 웃었다.

“함께 가요.”

“네?”

“저희를 구해 주신 분이잖아요. 은인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일족의 명예에 누가 되지요.”

완전히 마음을 연 샤일렌의 말에 도리어 레펜하르트가 놀랐다.

“함부로 은신처의 위치를 타인에게 알려도 되는 겁니까?”

“당신은 믿을 수 있으니까요.”

태연한 샤일렌의 대답에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경계심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 그의 의문에 샤일렌이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를 데려간다면, 당신을 데려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

만약 레펜하르트가 엘프의 마을을 알아내기 위해서 자신의 노예와 이런 연기를 했다면, 둘 다 데리고 가나 시리스만 데리고 가나 어차피 은신처가 들통 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시리스를 허락한 이상 레펜하르트 역시 함께 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둘 다 거절한다 해도, 당신들이라면 저희 은신처쯤은 금방 찾을 테니까요.”

스펠라트 사막은 사람이 살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땅이다. 사람이 살 수 있을 장소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 사람이라면 모를까, 시리스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억을 조금만 떠올리면, 단하임 일족이 은신처로 삼을 만한 장소쯤은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애초에 엘프들이 모여 숨을 만한 장소가 몇 군데 없으니까.

모든 설명을 들은 레펜하르트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이군요.”

“엘프는 언제나 합리적이죠.”

물론 인간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상황을 보건대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샤일렌의 결론이었다.

엘프들은 인간과 달리 감정보다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해 움직인다. 상황을 파악한 샤일렌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 채비를 해야겠군요.”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낙타들을 모았다. 가벼운 정신 제어 마법을 쓰자 낙타 열 마리가 마치 조련사를 따르듯 자연스레 레펜하르트의 손짓대로 일렬로 와 섰다.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레펜하르트 주위를 얼쩡거렸다.

“가자, 라이데, 네티나.”

아이들을 불러 샤일렌이 낙타에 태웠다. 낙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낙타를 타 본 엘프 아이들이 환호성을 흘린다.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나 확인한 뒤 샤일렌이 천천히 시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대열 중앙쯤에서 말없이 걷고 있었다.

“세렌디…….”

“이제 저를 인정해 주는 건가요?”

살짝 삐친 목소리에 샤일렌이 그녀를 달랬다.

“너도 나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거잖아?”

“그건 그래요.”

시리스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일렌이 재차 사과하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좋은 인간을 만났구나.”

“네.”

시리스는 바로 대답했다. 비록 상황이 복잡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레펜하르트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요.”

“그래…….”

샤일렌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름을 알려 주었을 정도니까.”

“네?”

순간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샤일렌을 바라보았다. 샤일렌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잖아? 아까 네 본명을 부르던걸?”

“아…….”

시리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나눴던 대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 떠오른다.

레펜하르트는 분명하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시리스, 아니,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녀의 원래 이름, 그녀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던, 그렇기에 입 밖에 꺼냈을 리도 없는 그 이름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멍해진 그녀를 보며 샤일렌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응? 왜 그러니, 세렌디?”

“……아, 아뇨.”

시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 자신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화제를 샤일렌에게까지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시리스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터덜터덜 뒤따르고 있는 레펜하르트가 보인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모든 이야기를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차피 대답해 주지 않겠지…….’

그렇게 싸워 댄 후라 딱히 말을 걸 기분도 아니다. 시리스는 일단 의문을 가슴에 묻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낙타 대열이 천천히 사막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2

단하임 일족의 마을, 데류 엘데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커다란 계곡이 하나 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 사이에 움푹 파인 대지의 상처 같은, 생명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메마른 협곡.

단하임 일족은 지금, 그 협곡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50년 전의 대규모 노예사냥으로 일족의 대부분을 잃은 이들은 그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따로 대피할 만한 은신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이 협곡에 따로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다.

협곡 좌우,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짐승 가죽과 검불을 이용해 만든 천막들이 곳곳에 위치한다. 그 사이로 나 있는 협로 곳곳에는 번득이는 벽돌로 쌓아 올린 방어용 진지들이 구축되어 있다. 모래를 녹여서 만든 유리질의 벽돌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게 위장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전혀 안쪽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가파른 벼랑에 푸석푸석한 사암으로 이루어진 이 협곡은 그야말로 천험의 요새였다. 사실 여건만 된다면 아예 마을을 이쪽으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물이 떨어져 갑니다, 렐하드 장로님.”

짐승 가죽과 검불을 엮어 만든 조잡한 천막, 그 속에서 백금발의 청년 엘프 한 명이 중년 엘프를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년 엘프, 렐하드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올해로 삼백마흔세 살이 되는 렐하드는 단하임 일족의 최연장자이자 수장이었다. 오래 사는 엘프 기준으로도 충분히 나이 든 그였지만, 외모 상으로는 40대 초반의 인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인간이라면 노인이 되어서도 이런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렐하드를 보며 감탄하겠지만, 사실 엘프들은 성인이 된 뒤 젊은 외모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기에 사실 노인이라는 것이 존재치 않는다. 늙지 않는 엘프가 무려 중년의 외모가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이 험한 오지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렐하드가 한숨을 쉬며 눈앞의 엘프에게 물었다.

“남은 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나?”

“아껴 쓴다 해도 하루 정도가 한계입니다.”

이 협곡이 은신처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에는 물이 없다.

물론 단하임 일족도 따로 물 저장고를 만들어 두었다. 사막이라 해서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사막은 무시무시할 정도의 폭우를 퍼붓기도 한다. 일명 돌발성 호우, 문제는 저것이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일이며 메마른 사막은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그 수분을 유지할 수가 없다. 따로 저장고를 만들어 두지 않으면 보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 저장고에 저장된 수량으로 농사를 짓는다거나 할 수는 없지만, 은신처에 숨어 있을 동안 목을 축일 정도는 되었다. 물론 오랫동안 고인 물이기에 방치되는 동안 상당히 오염되지만, 사막의 모래로 물을 거른 뒤 정령의 축복을 받으면 충분히 식수로 쓸 수준까지는 정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기껏해야 이백여 명이 일주일 정도 쓸 분량에 불과했다. 그것도 오직 식수용으로만 써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도저히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척후로 보낸 이들은 돌아왔는가?”

“네, 주위를 유심히 살펴본 결과 인간들은 더 이상 탐색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다고 합니다.”

렐하드의 미간에 떠오른 고뇌의 주름이 더욱 짙어진다. 그가 다시 물었다.

“일족의 전사들, 그들의 시신은 수습해 주었는가?”

일족을 피신시키기 위해 마을에 남아 목숨을 던진 숭고한 전사들, 그들의 시신을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할 수는 없다. 젊은 엘프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사막의 모래 아래 잠들어 있습니다.”

“라그엘이 그들의 영혼을 거두어 정령의 품 안에 안기었기를.”

불의 정령, 라그엘의 이름을 되뇌이며 렐하드는 죽은 전사들의 넋에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고민했다.

“그렇다면…… 일단은 안전해졌다고 봐도 될는지…….”

“어차피 이곳에서 더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을로 돌아갈 체력을 남기려면 물은 이제 한계입니다.”

이곳에서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놓인 거대한 유사의 강을 건너야 한다. 어른들은 몰라도 아이들에겐 험하기 그지없는 여로, 더 시간을 끌면 또 죽어 가는 아이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결국 렐하드가 승낙의 뜻을 표했다.

“……오늘 저녁,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돌아가세. 채비를 하라고 일러 주게.”

“예, 장로님.”

젊은 엘프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천막 밖으로 나갔다. 렐하드는 심란해하며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하는가.’

고민이었다.

‘언제까지고 위치가 발각된 본 마을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데…….’

50년 전, 마을의 위치가 알려진 이후 벌써 노예 사냥꾼들의 습격이 두 자릿수를 넘었다. 평소의 대피 훈련과 은신처 덕분에 그때처럼 멸족의 상황까지 가는 긴박한 경우는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소중한 일족의 여인과 아이들을 조금씩 잃어 갔다.

뭔가 방도가 필요했다. 이미 위치가 알려진 장소에서 이대로 계속 사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곳 말고는 딱히 살 만한 곳이 없다는 게 문제지.’

스펠라트 사막에 오아시스가 단하임 일족의 마을뿐일 리는 없다. 하지만 어지간히 살 만한 오아시스는 이미 전부 인간 유목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깊숙하게 들어갈 수도 없었다. 더욱 서쪽, 스펠라트 사막 깊은 곳에도 오아시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는 단하임 일족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 못할 가공할 몬스터들이 출몰한다. 지금도 이미 태어난 아이의 절반만이 성인이 될 정도인데, 여기서 더 오지로 가면 인간의 습격이 없더라도 단하임 일족은 점점 죽어 갈 뿐이다.

이 은신처가 단하임 일족의 최후 한계선이었다. 이보다 더 물러서면 생존조차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엘디아여, 길을 내려 주소서…….”

엘프들의 여신, 엘디아의 이름을 부르며 렐하드는 한탄을 터트렸다. 물론 엘디아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미 세계수, 엘븐하임을 잃은 엘디아는 그녀의 아이들에게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줄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늙은 엘프, 렐하드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음?”

렐하드는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다. 왠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순간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설마!”

인간들에게 이 은신처의 위치마저 들킨 것인가? 그는 놀라며 곁에 놓아 둔 검을 들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협곡의 입구, 황야가 내려다보이는 그 좁은 둔덕 위에는 이미 수십 명의 엘프들이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사막에서 금속은 귀한 법, 철검을 찬 엘프는 십여 명 뿐이고 대부분은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골骨제 검이나 창을 들고 있었다.

한때 우아함과 고귀함을 자랑했던 하이엘프들이 이제는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짐승의 뼈를 휘두르고 있다니, 옛 시절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실로 통탄할 일이리라. 물론 그 까마득한 옛 세월을 기억할 만큼 오래 사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지만.

렐하드는 협로를 따라 빠르게 뛰어 협곡 입구로 나섰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건 도대체?”

협곡 아래의 광야, 그곳에 열 마리의 낙타를 이끄는 한 무리가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백금발에 갈색 피부, 뾰족한 귀를 지닌 틀림없는 일족의 여인이었다. 게다가 낙타 등에는 두 아이도 타고 있었다. 모두 렐하드가 잘 아는 이들이다.

“샤일렌? 그리고 네티나와 라이데도?”

저들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 물론 그것만이라면 이런 소란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아니, 소란이야 벌어졌겠지. 돌아온 일족을 기쁘게 맞이하는 기쁨의 소란이.

하지만 저들 뒤에는 누가 봐도 인간의 노예인 것이 분명한 엘프 소녀와, 인간 치고는 좀 지나치게 크지 않은가 싶은 덩치의 인간 청년이 서 있는 것이다. 다른 엘프들이 당황하는 이유가 실로 이해가 갔다. 도대체 어째서 저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당혹해하는 렐하드의 모습에 샤일렌이 반색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렐하드 님!”

그때 협곡의 엘프 중 하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라!”

동시에 엘프들 몇 명이 짐승 가죽으로 만든 슬링을 들고 휘둘러 댔다.

휘이이익!

뭔가가 연거푸 날아와 샤일렌 근처에 떨어졌다. 상당히 거리를 둔 것이, 겨냥을 한 것이 아닌 위협일 뿐임이 명백했다. 그래서 시리스도 경계 태세를 갖출지언정 바로 응전하지는 않았다.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저들이 경계를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시리스가 근처에 날아와 박힌 투사체를 내려다보며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링으로 그냥 돌 같은 것을 던진 줄 알았는데……

“금속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날아온 투사체는 금속 특유의 광택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이라기엔 너무 매끄럽고 묘하게 투명한 느낌이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말을 걸며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모래를 녹여서 유리로 슬링 탄환을 만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이것, 유리구슬이랑 느낌이 닮았다. 처음에 못 알아본 것은 동그랗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녹다 만 구슬이라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뭐, 그냥 던져서 맞출 용도니까 조잡해도 상관없지.”

잠깐 서먹해하다가, 시리스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런 곳에서 모래를 녹일 정도의 화력을 얻을 땔감이 있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 싸움 이후 영 어색해서 말을 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레펜하르트를 계속 무시하기에도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일단 말문을 꺼내고 나니 한결 홀가분하다. 레펜하르트도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령술을 썼겠지.”

보통 엘프들이 가장 능통한 것은 바람의 정령술이고 그다음이 물의 정령술이다. 하지만 메마른 오지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단하임 일족은 하이엘프임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열기 탓인지 불의 정령술에 가장 능했다.

“아무래도 세계수가 없어서 전투에 쓸 정도로 정령을 구현화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불의 정령을 구체화시킨 뒤 시간을 들여 점점 화력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순간적으로 높은 화력을 뽑아낼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레펜하르트는 설명을 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저들 모두 손에 불덩이 하나씩은 들고 있지 않았겠어? 그리고 고작 저런 노예 사냥꾼들 정도에게 당하지도 않았겠지.”

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이 무식해 보이는 청년이 생각보다 훨씬 유식하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자신의 일족에 대한 것조차 이렇게 잘 알고 있다니.

시리스의 눈동자에 감탄의 빛이 맴돌자 신이 났는지, 레펜하르트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떠들어 댔다.

“너희 일족의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도 그런 이유야. 사실, 아무리 오지의 태양에 검게 그을렸다 해도 너처럼 50년 가까이 이곳을 떠났다면 다시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와야 정상이지. 그게 아닌 것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이곳에 살아온 단하임 일족이 불의 정령의 힘과 상당히 동화된 상태라, 피부색 자체가 고정된 케이스지. 그 피를 이은 너 역시 불의 정령력과 동화되었다는 뜻이고.”

시리스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유식한 것도 정도가 있다. 이쯤 되니 의문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설마 그 이야기도 사부에게 들은 건 아니겠죠?”

유적이야 그렇다 쳐도, 엘프들에 대한 것까지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건 역시 이상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다. 이상할 정도로 이종족 전반에 대한 지식이 너무 풍부하다. 오크어에 드워프어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더니 이젠 엘프어조차 능통하다. 이건 유적 탐사와 전혀 관계없는 지식이 아닌가?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끙, 시리스가 말 상대를 해 주니 신 난다고 너무 이야기를 풀어 버렸다.

“우, 우리 사부님 친구가 엘프나 드워프들에 관해서도 학식이 깊으셔서…… 나도 어깨 너머로 이것저것 주워들은 거야…….”

더듬더듬 레펜하르트가 변명처럼 이유를 든다. 시리스가 눈을 빛냈다.

“그럼 제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었죠?”

“응?”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 제 엘프 이름 말이에요.”

“어?”

순간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이제야, 그도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시리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계속 레펜하르트를 응시한다. 레펜하르트는 등 뒤로 땀을 뻘뻘 흘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큰 실수였다.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의 불신 가득한 눈빛을 슬금슬금 피했다. 하긴, 예전부터 시리스가 계속 그에게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도 점점 이런 상황을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숨기는 것도 슬슬 한계이긴 하다.

‘하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냐고?’

아무래도 그랜드 포지에 돌아가 마켈린이랑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 조언을 구해 봐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며 레펜하르트는 슬며시 시리스를 달랬다.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줄게. 아무리 이런 상황은 좀 그렇잖아?”

확실히, 지금도 엘프들은 살기와 의문이 복잡하게 섞인 얼굴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 한가하게 담화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며 시리스가 다시 협곡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일단 적의가 없다는 것부터 알려야지…….’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엘프들이여!”

휭윙윙윙윙!

그랜드 포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대화고 뭐고 일단 유리 탄환부터 날아왔다. 물론 쇠로 된 화살촉도 가뿐히 튕기는 레펜하르트가 이 정도에 당할 리는 만무하다.

퉁퉁! 투둥!

슬링으로 쏘아진 유리 탄환들이 죄다 튕겨 나가는 모습에 엘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서,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위대한 정령의 후손들이여, 나는 비록 인간이나 그대들의 적이 아니오! 엘프들이 지닌 역사를 아는 자로서 우정의 예를 바라고 있소!”

뚜렷한 엘프어였다. 엘프들이 당황하며 렐하드를 바라보았다.

“뭐, 뭐지?”

“렐하드 장로님?”

렐하드도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정확한 엘프어도 엘프어거니와, 저 말은 너무도 엘프들의 예법에 정통해 있었다. 오지에서 살다 보니 엘프들조차도 거의 잃어버린 예법을 분명 인간인 이가 입 밖으로 꺼내다니?

‘……적이 아닌가?’

그는 난감해하며 샤일렌과 낙타에 탄 두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합리적으로 이 광경에서 유추되는 사실은, 저들이 일족을 구해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상대가 인간만 아니었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렐하드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엘프들이 일제히 겨누고 있던 슬링을 거두었다. 공격이 멈추자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적의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호의 가득한 미소였다. 그 감정에 감응하며 렐하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일단 상대가 호의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하지만 저것이 함정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은 실로 연기가 뛰어난 생물이라 겉으로는 태연히 웃으면서도 뒤로 칼을 찌를 수 있는 놀라운 종족이니까. 일단 공격은 멈추게 했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무작정 믿을 수도 없다.

렐하드가 외쳤다.

“그대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대를 믿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뭐, 그렇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들이야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몇 마디만으로도 바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엘프들의 신뢰를 얻을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상황이었으니까.

“충분히 이해하오! 그러니 이제부터 그 근거를 보이겠소!”

엘프어로 고함을 친 뒤 레페하르트가 갑자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화르륵!

황금빛 오러가 불길처럼 솟구친다. 안 그래도 기운에 민감한 엘프들이다.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강렬한 파괴의 기운에 다들 화들짝 놀라 경계 태세로 돌아갔다.

“으윽?”

“허억!”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허공에 강렬한 일격을 날렸다.

“캘러미티 혼!”

눈부신 황금의 빛이 사막의 하늘을 뚫고 솟아올랐다. 빛의 기둥이 대기를 밀어내며 막대한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대기가 울리며 파문이 퍼져 나가 모래 위로 그 자취를 명확히 남겼다.

쩌어엉!

우레 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빛의 기둥이 사막의 하늘을 관통했다. 실로 엄청난 힘에 엘프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렐하드가 기막혀하며 중얼거렸다.

“……오러 유저?”

상대는 오러 능력자였다! 선택받은 초인 중의 초인, 단신으로 군대에 필적한다는 엄청난 무력의 소유자다! 게다가 저 엄청난 기운은 단하임 일족이 모두 덤벼들어도 상처 하나 못 낼 것이 명백해 보인다!

우르르릉!

허공을 꿰뚫은 캘러미티 혼이 대기를 떨쳐 굉음을 내며 사라졌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주먹을 거뒀다. 곁에 서 있던 시리스가 사색이 되어 따지듯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이건 아무리 봐도 시비 거는 것 아닌가? 평화롭게 다가가도 모자랄 판에 대뜸 무력시위를 하다니! 시리스의 비난에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연신 동족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야 인간들이라면 이 경우 당연히 협박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역시 시리스는 인간들 사이에서 너무 오래 산 모양이다. ‘엘프’답지 않은 사고방식을 보이는 걸 보니.

레펜하르트가 엘프들을 살며시 가리켰다. 시리스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그토록 적의 가득하던 엘프들, 그들이 다들 호의 가득한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에?”

렐하드가 검을 허리춤에 꽂더니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 정도의 강자라면 함정 따위 팔 필요가 없겠지! 그대가 진정으로 호의로 다가왔음을 알겠소이다!”

“엘프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니까?”

그거 보라는 듯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전생에서는 강력한 마법을 시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지만, 뭐 오러 능력을 보인다 해도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

시리스가 납득이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다 해도 이렇게 믿어 버리는 것은…….”

설사 레펜하르트가 오러 능력자라서 단하임 일족 전체를 상대할 수 있는 강자라 해도, 함정을 팔 필요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노예 사냥꾼들도 단하임 일족 전체를 상대할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레펜하르트가 만약 엘프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방심시킨 뒤 몰래 동료들을 불러들여 사방에서 포위할 계획이었음 어쩌려고?

하지만 엘프들은 이미 레펜하르트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풀었는지, 방어 태세를 풀고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협곡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더욱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녀의 의문에 레펜하르트가 속삭이며 대꾸했다.

“응? 그런 이유로 믿은 게 아냐.”

“그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 오러 능력자잖아? 그것도 그중에서도 꽤나 강한 축에 끼는.”

“그렇죠.”

“그런데 이 오지까지 와서 고작 엘프 잡아다 팔려고 이 귀찮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오러 능력자라면 훨씬 쉽게 돈 벌 방법이 널렸는데.”

“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레펜하르트 정도의 강자라면 이 짜증 나는 사막에, 고작 야생 엘프 좀 잡아보겠다고 올 일 자체가 없는 것이다. 오러 능력자쯤 되면 어딜 가도 대접받을 수 있다. 당장 저 란타스만 해도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도 배 두드리며 잘살지 않았던가? 오러 능력자가 화전민 촌락 터는 것 봤나?

적어도, 대마도사나 오러 능력자가 다른 이유 없이 그저 돈만으로 이 오지까지 왔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한 것이다. 이것이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저들에게 레펜하르트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한 이유였다.

“그, 그렇군요…….”

시리스는 감탄하며 다가오는 그녀의 일족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상황에, 게다가 이 촉박한 상황에서도 저리 명철한 이성을 유지했단 말인가?

뿌듯한 긍지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이런 척박한 생활 속에서도 단하임 일족은 엘프다운 현명함을 결코 잃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자랑스러운 일족이었다. 그 사실이 왠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기쁘다…….

“우리 일족의 아이들을 구해 준 것, 진심으로 감사하오.”

가까이 다가온 렐하드가 오른손을 어깨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담은 감사를 보내는 엘프의 예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왼손을 어깨에 얹으며 대꾸했다. 겸양을 의미하는 엘프의 예법이다.

“천만에요, 진정 감사를 받아야 할 이는 따로 있습니다.”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가르켰다.

“진정 저들을 구한 것은 그녀입니다.”

렐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시리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시리스는 당황했다. 레펜하르트는 아는 엘프의 예법을 그녀는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인간처럼’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대부분을 해치운 것은 분명 레펜하르트 님인데…….”

대꾸하며 시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인간도 엘프의 예법을 따르는데 정작 엘프인 자신이 이렇게 굴다니 이 무슨 부끄러운 상황일까.

그때 렐하드가 시리스를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머리와 피부에 깃든 기운은 왠지 낯이 익구려.”

샤일렌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세렌디예요, 렐하드 님.”

“응?”

시리스의 곁으로 다가가며 샤일렌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렐과 피아나의 딸, 세렌디예요. 기억하시겠어요?”

순간 렐하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족의 장으로서, 그는 그동안 태어나고 죽어 간 모든 일족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뇌리 저편에서 과거의 기억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악몽의 날에 잃었던 아이인가!”

다른 엘프들도 웅성거리며 시리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악몽의 날, 단하임 일족이 멸망 직전까지 갔던 그 참혹한 일에 대해 모르는 엘프들은 없었다.

소란이 일어났다. 놀라움과 반가움의 목소리, 그리고 노예로 팔린 아이가 돌아온 기적에 대해 엘디아에게 감사하는 음성이 협곡을 가득 메운다.

렐하드가 고개를 둘레둘레 저었다.

“이거야 원, 잃은 줄 알았던 가족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옛 가족까지 돌아오다니. 그대는 실로 우리의 귀인이구려. 그런 귀인을 이런 자리에 계속 세워 둘 수는 없을 터, 안으로 들어오시겠소? 누추하나마 다리 펼 장소 정도는 있소.”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렐하드의 초대에 레펜하르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펜하르트 일행을 대동하고 엘프들이 협곡 사이로 하나 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3

그날 저녁, 엘프들은 자신들의 마을, 데류 엘데로 돌아갔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도 협곡을 떠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마을에 도착한 뒤 단하임 일족은 의식을 행했다. 또 한 차례의 환난을 무사히 넘긴 것에 대해 여신, 엘디아에게 감사하는 의식이었다.

불의 정령술을 이용한 커다란 불꽃이 장작도 없이 사막의 모래 위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그 불을 둘러싸고 한 아리따운 엘프 여인이 노래를 부른다.

“라헬 리안드 엘린 스 피라나…….”

오래토록 전승되어 온 엘프들의 진혼가다. 일족을 지키기 위해 죽어 간 전사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의식이었다. 이어 살아 돌아온 일족을 환영하기 위한 잔치가 열렸다. 모두들 불을 둘러싸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샤일렌과 두 아이, 그리고 50년 만에 돌아온 시리스를 위한 잔치였다.

사막 한가운데 흥겨운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마을로 돌아와 다시 풍족하게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음식도 넉넉하다.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은 단하임 일족이지만 지금은 무려 열 마리나 되는 낙타들이 생긴 것이다. 렐하드는 큰마음 먹고 그중 네 마리를 도축하기로 결심했고, 덕분에 마을 곳곳의 모닥불에서는 신선한 낙타 고기들이 자글자글 기름을 떨어트리며 익어 가고 있었다.

천막 한쪽에 서 있던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통구이 앞에서 신바람 내는 엘프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구먼…….’

옛이야기 속에서 엘프들의 연회는 언제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광경으로 묘사되곤 한다. 녹음 가득한 숲 속에서 온갖 동물들과 어울리며 고상한 모습으로 맑은 술과 신선한 과일을 취하는 옛 엘프들의 전설에 비하면, 지금 저들의 모습은 실로 타락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전설 속 엘프들처럼 신비롭지도 경이롭지도 않았지만, 그 사실이 저들의 아름다움을 쇠퇴시키지는 못했다. 원시적인 삶 속에서도 결코 야만스러워 보이지 않는, 옛 엘프들의 우아한 모습이 여전히 저들에게 남아 있었다.

하긴, 저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동화하고, 그 속에서 최대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저들의 삶은 풍성한 숲 속이건 척박한 사막이건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엘프들은 신비롭고, 경이가 느껴지는 이들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렐 드라이드 샤할라나…….”

귓가를 간질이는 엘프들의 노랫가락을 음미하며 그는 마을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흥겨워하는 어른들, 그 사이를 열심히 오가는 어린 엘프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은 모닥불 주위에는 놓인 각종 육류며 말린 과일들, 견과류 등을 집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달다!”

“맛있어! 고소해!”

“너도 하나 먹어 봐, 엘리.”

왁자지껄한 아이들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새삼 느꼈다.

‘낙타들 챙겨 오길 잘했군.’

저것은 원래 브라이트 일행이 사막을 건너기 위해 준비했던 저장 식량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챙겨온 열 마리의 낙타에는 무려 40인분이 넘는 식량과 물품들이 각 안장마다 가득 실려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거친 음식만 먹던 아이들에겐 이 저장 식량도 진수성찬인 모양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시리스가 기억 속의 옛 친구들을 만나고 있었다.

“돌아와서 기뻐, 세렌디! 나 기억나?”

“……제레인? 제레인이야?”

“기억하네! 나는?”

처음에는 어색해하는 듯했지만, 다들 반갑게 맞이하는 태도에 시리스도 점점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기 좋구나, 시리스…….’

그녀가 기뻐하는 걸 보니 그 역시 기쁘다.

하지만 그 기쁨을 순수하게 즐길 수 없다는 것이 레펜하르트의 슬픔이었다.

그녀가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단하임 일족이 그녀를 반가워하면 반가워할수록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을 가능성은 낮아지는 것이다.

‘저토록 즐거워하는 시리스가 과연 나를 따라올까?’

점점 더 회의가 든다. 역시 조금은 강제적으로라도 종용할 것을 그랬나?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평생 시리스의 마음은 얻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시리스라는 사랑하는 연인이지, 성욕을 해소할 엘프 노예가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그저,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무심코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그러자 렐하드가 레펜하르트에게 다가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은인께서 어째 표정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잽싸게 표정을 관리하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문득 렐하드를 빤히 바라보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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