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제12장 추억과의 조우 (13/84)

제12장 추억과의 조우

1

대마궁 가이라크의 심장부, 심연의 옥좌.

어제까지만 해도 지상 최대의 건축물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이 홀은 지금 폐허가 되어 있었다.

굳건하던 화강암 벽은 참혹한 파괴의 흔적으로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대리석 바닥은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파헤쳐지고 갈라져 있다. 곳곳에 화마가 넘실거리며 뜨거운 열기를 뿌린다. 갈라진 천장 틈새로 싸늘한 새벽 햇살이 새어 들어온다.

그 희미한 여명의 빛 아래,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로브를 걸친 검은 장발의 남자가 상대를 향해 힘없는 목소리를 건넸다.

“강하구나, 권왕 테스론…….”

철탑을 연상케 하는 거구의 중년 사내가 입에 묻은 피를 닦으며 대꾸했다.

“우리의 승리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테스론은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드디어 이 ‘대륙의 악몽’을 꺾어 눌렀다.

마왕 레펜하르트.

암흑 제국 안타레스의 제왕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강, 최악의 마도사.

백만의 어둠의 군세를 거느리고 이계의 악마를 사역하여 대륙 절반을 불태우고 수백만을 학살한, 그야말로 인세에 강림한 진정한 마신.

인류에 대한 무한한 증오만을 불태우는 이 사악한 마도사를 쓰러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졌는가?

수백만의 군대가 생명을 던지며 어둠의 군세 사이로 길을 뚫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목숨을 바쳐 이계의 악마를 상대했다.

피를 강처럼 흘리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도 그들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간신히 이곳까지 왔다. 태양이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새벽이 오기까지 모든 힘과 역량을 다해 마왕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대륙의 악몽 레펜하르트의 권능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검술, 무투술, 신성력, 마법 등등, 각자 자기 분야에서 극에 달한 동료들조차도 마왕의 무한한 마력 앞에서 하나 둘, 피를 토하며 쓰러져 갈 뿐이었다.

새벽의 냉기가 사위를 뒤덮을 때쯤 그들 중 서 있는 이는 단 한 명, 가장 강인한 육체를 지닌 자, 그래서 ‘언브레이커블’이라고까지 불리던 권왕 테스론뿐이었다.

동료들이 모두 쓰러졌지만 테스론은 포기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절망을 한 자루 의지의 칼날만으로 헤치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강철의 의지로 자신의 생명을 모두 불태워,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빈사 상태의 육체를 움직여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쿠, 쿨럭!”

레펜하르트는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다. 썩은 듯 검게 물든 핏물, 그의 육체가 급속도로 죽어 간다는 증거였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감회 어린 표정으로 테스론은 중얼거렸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수많은 희생, 끝없는 고통, 마성에 휩싸여 날뛰는 오크와 드워프, 트롤, 엘프들의 손에 죽어 가던 수많은 동료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제 다른 놈들도 마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이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크도 엘프도 드워프도, 원래대로 온순하고 선한 성품을 되찾고 인류의 친구로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왔다.

“사라져라, 대륙의 악몽이여!”

엄숙한 목소리로 테스론은 주먹을 쥐었다. 이제, 최후의 일격을 가해 저 사악한 마왕에게 심판을 날릴 일만 남은 것이다.

그때였다. 레펜하르트가 흐릿한 웃음을 띠었다.

“크크큭…….”

죽어 가던 마왕의 얼굴에 사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테스론은 흠칫 놀랐다. 대체 어떤 간교한 수작을 부리려고 이 상황에서 미소 짓는단 말인가?

그때 마왕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붉은 빛의 작은 보석이었다. 고개 숙인 레펜하르트로부터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 페르트 뎀 이스테드 사피아…… 나, 정명한 법칙을 비틀어 운명의 눈을 속일지니…….”

“크윽!”

테스론은 놀라며 전신의 힘을 끌어 올렸다. 마왕이 꺼낸 붉은 보석, 그곳에서 정체 모를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너무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너무나 강대해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지의 파동!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테스론이 허겁지겁 몸을 날렸다.

‘설마 아직까지 여력이 있었을 줄이야!’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두 눈동자에서 기괴한 빛이 새 어나왔다.

“……흐름을 거슬러 역천의 법 아래 머물러…….”

“어림없다, 이놈!”

테스론의 거구가 쏘아진 포탄처럼 홀을 갈랐다. 막아야 했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막아야 했다.

“으아아아아!”

마지막 힘마저 불태운 테스론의 정권이 레펜하르트의 마력장을 후려갈겼다. 황금빛 투기를 두른 주먹이 마력장을 뚫고 붉은 보석을 향해 맹렬하게 내뻗어졌다.

동시에, 지옥에서 울부짖는 듯한 사악한 음성이 테스론의 귓가 가득 울려 퍼졌다.

“……나, 시공을 뒤트는 자가 되리라!”

☆ ☆ ☆

테스론은 눈을 떴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허공에 뻗은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또 이 꿈인가…….’

쭉 뻗은 오른손, 강인하게 단련되긴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주먹을 보며 테스론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을 내린 채 몸을 일으켰다.

‘으음, 잠깐 졸았나.’

어젯밤, 마법과 권술의 수행을 병행하느라 밤을 새웠더니 아무래도 잠시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잠시 누워서 머리만 식힐 생각이었는데…….’

혀를 차며 테스론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오후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테이블 위에는 온갖 서류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가 조사한, 이 시대의 강자들과 ‘강자가 될 예정’인 인물들의 신상명세였다.

옆에는 미래에 닥칠 기상이변이라든가 각국의 정세 등이 적힌 책자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흐릿한 옛 기억을 열심히 더듬고 더듬어 간신히 되살려 놓은 소중한 정보들이었다. 인간의 기억력은 믿을 수가 없으니, 열여섯 살 때 이 시대로 전생한 이후 시간 날 때마다 적어 둔 것들이었다.

서류와 책자들을 내려다보며 테스론이 중얼거렸다.

“아직 부족해…….”

지난 6년 동안,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여 왔다.

극한까지 익혔던 오러의 경지, 그것을 이용해 그는 이 레펜하르트의 육체로도 스무 살 때 오러에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걸로 델피아의 마탑 원로들을 협박해 정규 마법사의 지위도 손에 넣었다.

세상을 나와 미래의 강자들과 교분도 쌓았다.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언젠가 강해질 그들과의 친분은 훗날 그에게 큰 힘이 될 터였다.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은의 현자의 일원이 되는 데도 성공했다. 은의 현자는 극비이던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냈으며, 미래조차 예지하는 테스론의 ‘현명함’을 접한 뒤 그를 적대하기보다는 한 편으로 삼는 것이 이롭다는 결정을 내렸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았다. 교분을 쌓은 이들이 원하는 만큼의 ‘강자’가 되기 위해선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은의 현자가 되었다 해도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같은 은의 현자, 이라나드 공작의 후원을 받게 된 것이 전부였다.

‘이 정도로는 마왕을 해치울 수 없어!’

테스론은 서류를 구기며 이를 악물었다. 오러를 각성하고 5서클에 달하는 마법을 익혔지만, 그는 여전히 레펜하르트를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과거의 자신은 강했다. 그만큼 그의 진정한 육체는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그 마왕에게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탈취하는 것도 실패했다. 마왕의 마법이 얼마나 회복되었을지도 알 수 없다.

초조했다. 미칠 듯이 초조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저 대륙의 악몽은 힘을 되찾을 것이다. 그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의 공포가 되어 또다시 대륙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테스론은 부르르 떨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끔찍한 미래가 오도록 놔둘 수는 없어!’

다행히 아직 마왕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모든 대비를 해야 했다. 그는 계속 서류를 들여다보며 미래의 계획을 짜고, 또 짰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이내 노크 소리와 함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테스론? 들어가도 돼?”

테스론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들어 와, 필레나.”

문을 열고 적갈색 로브 차림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빛이 감도는 금발에 채 주근깨가 사라지지 않은, 2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리 미녀라 할 수는 없지만 꽤나 귀여운 인상이다. 테스론과 함께 델피아의 마탑을 나선 여마법사, 필레나 레이그림이었다.

필레나가 방 안으로 들어서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그녀는 새삼 이해 못 하겠다는 눈으로 테스론을 바라보았다. 테스론이 피식 웃었다.

“사소한 것 묻지 않기로 했었지?”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그 속에 담긴 엄격함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필레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테스론은 가라앉은 눈으로 필레나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은 레펜하르트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마법을 배워 온 동기이자 소꿉친구였다. 테스론이 이 시대로 부활해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을 때도 한결같이 그를 옹호했던, 이 시대에 있어 몇 안 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 엄격한 마탑 속에서 그가 오러를 각성할 시간적 여유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레펜하르트의 친구겠지만…….’

어차피 모든 시간은 뒤집어졌다. 이 시간대의 제라드가 더 이상 그의 스승이 아니듯, 이 여인 역시 더 이상 레펜하르트의 소꿉친구가 아닌 것이다.

필레나가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며 테스론을 빤히 바라본다. 그 속에 담긴 애정 어린 빛을 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웃었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네가 나의 것을 빼앗은 만큼, 나도 네 것을 빼앗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미래는 결코 달라지지 않아!’

차가운 미소가 테스론의 입매 가득 떠오른다. 필레나가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테스론, 그렇게 웃으니까 꼭 예전 같아.”

“예전?”

“응, 네 이름이 레펜하르트였을 때…….”

“이상한 소릴 하는군.”

테스론은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됐어?”

그제야 자신의 용건이 떠올랐는지 필레나가 소매 안에서 한 줌의 종이 뭉치를 꺼냈다. 테스론에게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역시 권왕 레펜하르트의 명성이 꽤나 세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어. 신기하지 않아? 어릴 적의 너와 같은 이름이라니…….”

“내 이름은 더 이상 레펜하르트가 아니야.”

“응, 알아. 그래도 재미있는 우연이잖아?”

“……별로 재미없어.”

고개를 저으며 테스론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황금기사 유서스가 엘류시온의 유적을 탐사한 지도 어언 한 달째. 그라임 왕국에는 지금 새로운 소문이 자자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믿은 황금기사가 사실은 새로운 오러 능력자에게 굴욕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소문이었다.

테네스 백작가의 성장을 시기하는 다른 가문에서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지만, 테네스 백작가에서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거짓 소문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인 것이다. 마갑 엘드라드까지 박살 난 데다가 그 광경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입단속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문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황금기사 유서스의 명성이 높았던 만큼, 그를 쓰러뜨린 레펜하르트의 명성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그를 제라드의 뒤를 이은 새로운 권왕이라 부르며 칭송하고 있었다.

서류를 들여다보는 테스론을 향해 필레나가 입을 삐죽였다.

“솔직히 나는 대체 저 새로운 권왕이 뭘 했다고 저렇게 명성을 떨치는지 모르겠어.”

생각해 보면 남의 집 쳐들어가서 도둑질하다 안 되니까 다 때려 부순 놈이다. 대체 저 행위 어디에 칭송할 구석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테스론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강함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법이지.”

실은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는 무문 자체가 워낙 무식하게 역사를 쌓아 온 바가 있어서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는 면이 컸다. 전생의 테스론도 걸리는 족족 패 죽이면서 명성을 쌓지 않았던가? 뭐, 죽이려고 한 건 아닌데 패다 보니 결과적으로 죽어 있었던 경우가 많았지만…… 하여튼 테스론도 도덕적으로 살아서 명성 얻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약자가 억울하게 당하면 상대를 비난하지만, 강자가 억울하게 당하면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 그리고 유서스 경은 만나 보았어?”

“응, 시킨 대로 서신 전달하니까 바로 만나 주더라.”

“답장은?”

필레나가 품에서 또 다른 서신을 꺼내 건네며 웃었다.

“테스론의 예상 그대로이던걸?”

“그렇겠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테스론은 서신을 받았다.

‘기사라면 이런 굴욕을 씻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저 치욕적인 불명예를 씻기 위해 유서스는 레펜하르트와 재대결해 그를 꿇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현재 유서스가 가진 힘, 마갑 엘드라드는 빠르게 힘을 얻을 수 있는 대신 한계도 명확했다. 엘드라드의 힘을 한계까지 구사하고도 패한 유서스에게 더 이상 레펜하르트를 상대할 방법 따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유서스에게 테스론이 보낸 서신은 간단했다.

-그자를 이기고 싶다면 나를 따르라.

서신을 펼치자, 단정한 글씨체로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따르겠소.

필레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시킨 대로 여기 위치 알려 줬어. 그랬더니 신변 정리를 하고, 조만간 찾아오겠다고 했어.”

“응, 수고했어, 고마워.”

“으, 으응.”

칭찬을 받자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두 눈 가득 담긴 애정의 빛이 필레나가 테스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 준다.

테스론은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필레나…….’

그의 영혼은 결코 젊지 않다. 이 젊은 여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쯤 못 알아볼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테스론은 자신이 그 사랑에 응답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이 육체, 레펜하르트지 결코 시간을 거슬러 와 육체를 차지한 테스론이 아니다…… 같은 로맨틱한 이유는 물론 아니었다.

비록 요즘 들어 머리가 꽤나 좋아진 테스론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였다. 지상 최강, 최고, 최악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무문의 정식 후계자인 것이다. 그런 그가 저런 달달한 생각 따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있나?

테스론에게 있어 사랑이란 ‘자신의 뜨거운 근육으로 꾹 눌러 주고 훌륭한 씨앗을 뿌려 튼튼한 자손을 낳는 영광을 주는 행위!’인 것이다. 결혼? 그런 보편적인 개념 따위 안 키운다. 왜 자신의 훌륭한 씨앗을 보다 많은 여인들에게 펼치지 않고 한 여자에게만 허용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참 여자들이 보면 기가 차 상대도 안 할 사상 같지만, 전생의 테스론은 저따위 사고방식으로도 여자 꽤나 후리고 다닐 수 있었다. 의외로 세상에는 두꺼운 가슴 근육과 선명한 식스 팩만 있으면 대가리 속 개념 유무 따위는 신경 안 쓰는 여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 만큼, 평소의 테스론이라면 진작 필레나를 안았겠지만…….

‘미안하구나, 필레나. 내 본연의 육체라면 거리낄 것 없이 네게 훌륭한 씨를 뿌려 주었겠지만 이 빈약한 육체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너에 대한 모독이겠지.’

그렇다. 지금 테스론은 진지하게 필레나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뭐랄까, 마초에게도 마초 나름대로의 양심이란 것이 있달까? 그야말로 여심이랑은 담 쌓은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세상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 정도 되니까 마초라고 불리는 법이다.

하여튼 속마음이야 어떻건 덕분에 테스론의 겉 태도만큼은 꽤나 신사적이었다.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다 말고 필레나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테스론이 말하던 조건이랑 엇비슷한 사람이 하나 있었어.”

방금 보고받은 일 말고도 테스론은 필레나에게 따로 일을 시킨 것이 있었다. 현 시점에서 레펜하르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나름대로 세력과 무력이 있어 동료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비록 ‘강자 예비군’과 이런저런 친교를 쌓기는 했지만 그들을 동료 삼아 레펜하르트를 죽이려 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던 것이다. 미래에 마왕이 될 자이니 미리 죽이자고 하면 미친놈 취급 받을 것이 뻔하고…….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응? 누구지?”

“스테반 폰 알티온. 바실리 왕국 알티온 백작가의 차남이야.”

“들어 본 적 없는 놈이군.”

테스론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기억하는 미래의 강자들 중 스테반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즉, 오러도 각성 못하는 쓰레기(?)라는 의미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마왕을 상대할 이 중에서는 쓸 만한 놈이 전혀 없으니…….

‘쓸 만하지 않다면, 쓸 만하게 만들면 되는 거지.’

결심을 내린 테스론이 물었다.

“그 스테반이란 친구는 지금 어디 있지?”

☆ ☆ ☆

가혹한 태양이 끝없이 대지를 달구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와 바위가 한낮의 열기로 대기마저 끓어 올려 한껏 일렁인다. 사방을 모두 돌아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열사의 대지뿐. 그 장엄하기까지 한 사막 가운데 유일한 그늘이 하나 있었다.

오랜 세월 풍화 속에서 기괴한 형태가 된 커다란 바위, 그 어둑한 그늘에서 갑자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연기가 피어오르며 암석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곧이어 사람의 그림자가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왔다. 단단한 육체를 지닌 청년과 날씬한 몸매를 지닌 여인이었다.

여인이 주변을 돌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통곡의 땅이군요…….”

청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난 척을 해 댔다.

“내가 금방 올 거라고 했잖아?”

시리스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결심하자마자,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물과 식량을 챙겨 그랜드 포지 서쪽에 위치한 알 포트의 신전으로 향했다. 반쯤 허물어진 그 신전 폐허에서 시리스가 도통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긴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하지 홈 지고르 후토르바티아, 나는 계약된 자, 각인을 부여해 권리 얻은 자이니 자격 있는 자의 이름을 받아 그 흐름을 제어하노라…….”

굉장히 긴 주문이었다. 얼마나 길었는지 시리스가 슬슬 지루함을 느낄 때,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복잡한 수인을 맺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내 앞에 그 공허를 열지어다! 알사스 다이만 포털 바이탈리티!”

갑작스럽게 생겨난 빛의 소용돌이, 시리스가 멍한 얼굴을 하는 사이 레펜하르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바로 소용돌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 차렸을 때 시리스는 이미 그랜드 포지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거대한 검은 석실, 바로 유적 다이만이었다.

시리스는 이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챘다. 그랜드 포지로 향했을 때처럼, 지금 레펜하르트는 은의 시대 유적을 이용해 역으로 이곳 다이만 던전에 돌아온 것이다. 시리스가 레펜하르트를 돌아보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 쌍방 통행이 가능한 것이었나요?”

“전부는 아니고. 몇몇은 포털을 활성화시키면 가능해.”

태연하게 대꾸하며 레펜하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기둥에 쓰인 고대어를 유심히 살피던 그가 반색을 하며 시리스에게 손짓을 했다.

“찾았다, 티다엔 다이만 포털.”

원래 이곳 다이만 던전은 은의 시대, 일종의 정거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다. 대륙 곳곳에 마력의 포털을 설치한 뒤, 공간을 뛰어넘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은의 시대 특유의 교통수단인 것이다. 대부분의 시스템이 망가져 있었지만 몇몇 포털은 아직 비활성화된 상태로 제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구했지만 결국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포털은 일곱 개밖에 없었지.’

과거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그리운 얼굴로 티다엔이라 적힌 기둥을 어루만졌다.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시키는 이 유적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이종족들을 안타레스 제국으로 옮길 수 있었던가?

반대편 도착지에 위치한 포털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기에, 살아남은 포털들은 전부 인간의 손이 채 닿지 않은 오지로 향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노예 신세를 피해 숨어 사는 이종족들 대부분이 그런 오지에서 거하고 있었으니, 그중 단하임 일족이 숨어 살던 스펠라트 사막행 포털이 건재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가자, 시리스.”

“네, 네에…….”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는 시리스를 대동한 채, 레펜하르트는 이번엔 티다엔 다이만 포털을 활성화시켰다. 그렇게 포털을 통과하니 나온 곳이 바로 반쯤 허물어진 은의 시대 유적의 지하, 당연히 각종 마물이 들끓는 곳이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번에도 별거 아니라는 듯 곧바로 샛길을 작동시켰다. 이내 마물이니 언데드니 하나도 없는 비밀 통로가 보란 듯이 입구를 드러냈고, 덕분에 시리스는 은의 시대 유적 한복판에 떨어졌음에도 전투 한번 안 하고 안락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말문을 잃은 얼굴로 시리스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30여 분 전까지 혹독한 북풍이 불어 닥치는 한겨울의 산맥 속에서 거하고 있었거늘, 순식간에 계절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그리고 그 위로 지독하게 내리쪼이는 열기. 후끈하기까지 한 대기의 내음.

틀림없었다. 그녀의 고향, 통곡의 땅, 스펠라트 사막이었다.

시리스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은의 시대 유적을 활성화시킬 정도면 엄청난 고위 마법사나 가능하다던데…….”

별거 아니란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겸양을 떨었다.

“포털을 활성화시키는 마법은 그렇게 고위 마법이 아니야. 그냥 헝클어진 마나 기류를 제 순서에 맞게 재배치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걸? 배치 방식만 알고 있다면 6서클 마법 정도로도 충분히 가능해.”

하지만 여전히 시리스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쇠가 있고, 돌릴 힘이 있다면 누구나 문을 열 수 있겠지. 하지만 열쇠를 직접 제작하려면 전문적 기술을 지닌 열쇠 장수여야 하지 않겠는가?

노예 경매장에서 슬레이어로 교육을 받으며 시리스도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쯤은 배웠다. 포털을 여는 것과, 포털을 여는 술식을 알아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6서클 종사자가 열 수 있을 정도의 포털이라면, 그 활성화 술식을 연구해 알아내는 데 최소 8서클 이상의 대마도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도 스승이란 분이 가르쳐 주신 건 아니겠죠?”

권왕 제라드가 마법에도 정통했다는 소문 따윈 들은 적이 없다. 그녀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스승님 친구 중에 마법사도 있었거든. 안 그러면 내가 어디서 마법을 배웠겠어?”

시리스가 눈을 흘겼다.

‘수상한데에…….’

권왕씩이나 되는 제라드라면 친구쯤 되는 마법사는 당연히 대마법사일 것이다. 그러니 레펜하르트가 그 친구란 작자에게 마법을 배웠다는 것도 꽤나 그럴듯하다.

그래, 딱히 꼬집을 구석은 없다. 앞뒤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은 기분이 드냐고?’

시리스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납득을 하자니 자꾸 여자의 감이 뭔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고…….

“알았어요!”

야멸차게 대꾸하며 시리스는 바위 그늘 밖으로 나섰다. 뜨거운 햇살이 매끄러운 갈색 피부 위로 강렬하게 쏘아진다. 하지만 시리스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혹독한, 하지만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햇살이었다.

성큼성큼 앞서 가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쟤 또 왜 삐졌지?’

아, 전생이나 현생이나 여자들 마음은 알 수가 없구나! 이번에 마법의 힘을 모두 되찾으면 여심을 ‘해독’해 주는 10서클 주문이라도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

야심찬(?) 야망을 품은 채 레펜하르트도 고개를 저은 뒤 시리스의 뒤를 따랐다.

2

모래를 뚫고 나오며 2미터가 넘는 거체가 이빨을 들이댄다.

“카아아아!”

싯누런 비늘로 온몸이 뒤덮인, 마치 악어를 연상케 하는 거구의 도마뱀, 샌드리저드였다. 바위도 부수는 강렬한 턱 힘에 소나 말쯤은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꼬리 힘을 지니고 있어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 점심일 뿐이죠.”

피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태연하게 덤벼 오는 샌드리저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꼬리를 대뜸 손을 뻗더니 턱 하고 잡아 버렸다.

“꾸잉?”

맨손의 인간이 자신의 꼬리치기를 그냥 잡아 버리다니? 이 듣도 보도 못한 사태에 샌드위저드가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손을 들었다. 신장 2미터의 샌드리저드지만, 레펜하르트의 키도 무려 192센티미터다. 손을 올리니 샌드리저드가 허공에 대롱대롱 뜬다. 이 불손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작태에 기가 막힌 샌드리저드가 아가리를 벌리며 막 독액을 뿜어내려던 찰나.

퍼억!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샌드리저드를 바닥에 내리쳤다. 바닥이 바위가 아니라 모래라 그런지 한 번 내리친 정도로는 딱히 죽질 않는다. 뭐, 그래 봤자다. 레펜하르트는 마치 무슨 빨래하듯 샌드리저드를 연신 바닥에 퍽퍽 내리쳤다. 샌드리저드도 살아 보려고 어떻게든 요동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뭔 놈의 인간이 독액도 안 먹히고 이빨도 안 들어가고 그러는 와중에 점점 의식은 흐릿흐릿…….

“꾸에…….”

조촐한 비명을 끝으로 샌드리저드는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시리스, 밥 먹고 가자!”

보통 여인이었다면 이 무식한 광경에서 기가 질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리스는 이 사막이 고향인 처자였다. 아까부터 ‘우와, 샌드리저드 진짜 오랜만에 먹어 보네?’라는 기대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랄까, 엘프가 지을 표정은 아닌 것 같지만 또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제가 껍질 벗길게요.”

“응, 난 불 피울게.”

사막 한 복판에서 때 아닌 캠핑이 이루어졌다. 피크닉 하기에는 지나치게 따사로운 날씨가 아닐까 싶지만, 두 사람에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배리어 오브 다크!”

마법으로 어둠의 장막을 머리 위로 치니 이내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진다.

“프레임 필드!”

바닥에 작게 프레임 필드를 깔아 놓으니 모래 위에서도 바로 불을 피울 수 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구사하는 동안 시리스도 노련한 솜씨로 샌드리저드의 가죽을 홀랑 벗기고 피를 뽑았다. 뽑은 피는 버리지 않고 벗겨 놓은 가죽을 용기 삼아 따로 모아 둔다. 사막에서 수분이란 귀중한 법,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시리스가 다듬은 샌드리저드를 굽기 좋게 토막 치는 동안, 레펜하르트가 피를 담은 가죽 용기에 재차 마법을 걸었다.

“아쿠아 드레인.”

수분 추출 마법을 샌드리저드의 핏물에 거니 이내 피 떡과 깨끗한 물로 나뉜다. 이걸로 사막 여행의 가장 두려운 요소인 수분도 확보한 셈이다. 사실 마법은 전투보다는 이런 실용적인 부분에서 더욱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 이렇게 편한 걸 이제까지 못 썼으니…….’

척척 돌아가 주는 자신의 술식 연산력에 스스로 감동하며 레펜하르트는 익어 가는 샌드리저드 고기를 바라보았다. 자글자글, 기름이 떨어지며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시리스도 아까에 비해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고향으로 돌아온 덕인 듯했다.

심지어, 레펜하르트에게 고기를 건네기까지 한다.

“레펜하르트 님, 먹어 볼래요? 잘 익었는지…….”

“응! 응!”

맛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손수 먹여 주는 고기 맛이 나쁠 리가 있나! 넙죽넙죽 받아먹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잠시 빙그레 웃었다. 뭐, 금방 미소를 거두고 평소의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에 비해 훨씬 표정이 풀려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즐겁게 점심 식사를 즐겼다. 고기를 씹다 말고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시리스, 고향이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사실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는 척할 수는 없다. 시리스가 잠시 주변 지형을 살피고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엘프답게 그녀는 인간처럼 밤하늘의 별을 보거나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대기에 깃든 정령을 느껴 현재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 위치를 파악하더니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는 쪽으로 반나절 정도만 걸으면 될 거예요.”

무려 50년 만에 돌아가 보는 고향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기대의 빛이 두 눈에 가득했다. 하지만 시리스는 이내 깨달았다. 땅은 그대로라도, 사람은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살아남은 이들은 없겠지만…….”

풀 죽은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레펜하르트가 다정하게 말했다.

“세상일 모르는 거잖아, 안 그래?”

“……?”

왠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 시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반나절 뒤,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단하임 일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시리스가 말문을 잃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고 있는 사구砂丘 아래 검불을 얼키설키 얽어 만든 원시적인 오두막들, 그리고 그 옆에 조촐하게 자리하고 있는 오아시스 하나.

인간들의 마을에 비하면 허름하다 못해 무슨 짐승 우리처럼 보인다. 이것이 아득한 옛 시절에는 위대한 정령의 후예라고까지 불리던 고귀한 하이엘프들의 현주소인 것이다.

시리스는 그리운 눈으로 오두막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검불 지붕 아래 모래 먼지가 가득 쌓인 목재 식기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스러질 것만 같다.

시리스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고 그것들을 매만졌다. 추억 속의 목소리들이 환청이 되어 들려왔다.

-우리의 딸, ……. 너도 자라서 우리 일족을 지켜야 한단다.

-잘하는구나. 검은 그렇게 휘둘러야 한단다. …….

-이것 봐라, ……! 나도 이제 아버지를 도울 수 있어!

수많은 엘프들의 목소리다. 그녀의 모든 아버지들, 어머니들, 함께 뛰놀던 어린 엘프들의 목소리가 기억을 따라 귓가 가득 울려 퍼진다. 한 번 봇물이 터진 기억의 댐이 끝없이 추억을 내뱉는다.

시리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 처마 아래로 불어오며 텁텁한 모래를 옮기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 없는데…….’

밀어닥친 추억의 홍수가 그녀의 심장을 가혹하게 할퀴며 수마의 흔적을 남긴다. 가슴이 아프다. 수백 개의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가슴 한쪽이 통증을 호소한다.

시리스는 눈을 감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차라리 오지 않았다면,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차라리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 아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추억은 잔혹한 파랑이 되어 끝없이 그녀의 귓가에서 몰아칠 뿐이다.

-이걸 봐, ……!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한 가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같이 가자, ……! 오늘은 사막 전갈을 잡으러 갈 거야!

부모의 얼굴, 친구의 목소리, 그리운 형제자매들의 숨결과 내음마저 뚜렷하게 떠오르는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그녀를 부르던 그 목소리.

-……!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을 부르던 이름, 그녀가 모두로부터 받아 모두로부터 불리었던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쾅!

시리스는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내리쳤다. 쥐고 있던 나무 그릇이 박살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화를 내도 원하는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시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펑펑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은 이미 50년 전에 멈췄다.

한편 레펜하르트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이곳을 찾았을 때, 건재하던 단하임 일족의 모습을.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상들의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간직하고 있던 그 순혈의 하이엘프들을 레펜하르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체 왜 아무도 없는 거야?’

당혹해하는 레펜하르트의 눈에, 실의에 빠진 시리스가 한숨을 쉬는 모습이 보였다. 이는 그가 기대한 광경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일족을 만나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싶어 이곳까지 데려왔다. 결코 저렇게 슬프게 하고 싶어 저지른 짓이 아니다.

“설마……?”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자신이 이 시대로 회귀한 탓에 원래는 생존하고 있을 단하임 일족이 멸망해 버린 것일까?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인과율이란 아주 작은 일그러짐만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그렇게까지 일그러질 짓은 안 한 것 같은데, 나…….’

초조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눈을 빛냈다. 이 폐허가 된 마을을 보고 있자니 뭔가 어색했다.

‘어색하다? 뭐가? 뭐가 어색하다는 거지?’

그는 고민했고 이내 해답을 찾았다.

레펜하르트가 화색이 되어 시리스를 불렀다.

“시리스!”

“……네?”

시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돌리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남은 기운 없어 죽겠는데 뭐 그리 신 났냐며 힐난하는 표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마을, 뭔가 이상하지 않아?”

“……폐허가 된 마을 처음 보시나요?”

시리스가 퉁명스레 대꾸한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마을, 뭔가 어색하지 않냐고.”

“뭐가요?”

“시리스, 네 말에 의하면 단하임 일족이 멸망한 게 50년 전이랬잖아?”

굳이 아픈 추억을 들추어내는 레펜하르트의 무신경함에 막 시리스가 화를 내려던 찰나였다.

“이 마을이 그럼 50년 동안이나 이 상태로 유지되었다는 소리야?”

“……아?”

그제야 시리스도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50년이면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뀔 시간이다. 게다가 이곳은 혹독하기로 이름 높은 스펠라트 사막이었다. 웅장한 거암도 50년쯤 지나면 풍화되어 귀여운(?) 괴석이 되어 있을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고작해야 검불로 만든 이 마을이 50년 동안 폐허인 상태를 유지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녕 단하임 일족이 50년 전 멸망했다면 이 자리에는 모래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야 정상인 것이다.

“그,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린 시리스가 허겁지겁 바닥에 손을 짚었다. 잘 살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확실했다! 이 마을이 텅 비게 된 것은 아무리 잘 쳐줘 봐야 2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패닉에 빠져 시리스가 중얼거렸다. 혹시 단하임 일족이 멸망한 뒤, 다른 이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오두막의 형태나 식기 모습 등이 지나치게 단하임 일족 특유의 양식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얼마 전까지 이곳에 그녀의 가족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분명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가족이…….

“사실은 살아 있다……?”

멍하니 중얼거리던 시리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순간 희미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세요…….

“왜 그래,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그녀의 태도에 의아해하며 묻는다.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의 청력은 엘프인 시리스보다도 오히려 위다. 그런 그가 듣지 못한 소리를 시리스가 들었다?

고개를 저으며 시리스가 역시 환청이었나 보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와주세요…….

다시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아득히 먼 곳에서 울리는 듯한, 하지만 더더욱 확실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그래, 마치 귀가 아닌 영혼에 울리는 듯한 소리…….

-제발 도와주세요…….

동족의 소리였다.

시리스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리에 꽂혀 있던 니힐렌이 미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그녀가 검을 뽑았다. 레펜하르트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리스? 갑자기 왜 검을……?”

시리스가 두 다리로 모래를 박찼다. 단련할 대로 단련한 탄력 있는 두 다리가 가벼운 엘프의 육체를 힘차게 밀어붙인다. 그렇게 시리스는 마을을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을을 벗어나더니 정신없이 사막 저편을 향해 뛰어간다.

“……시리스?”

☆ ☆ ☆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꽂히는 사막, 그 위로 마흔 명 정도의 무장한 이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하나같이 험상궂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상처 가득한 얼굴에 제멋대로 자란 수염, 그야말로 얼굴에 ‘난 악당이오.’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듯한 인상의 소유자들뿐이었다. 남자 나이 마흔이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더니, 책임을 지나치게 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양심 없이 산 티가 팍팍 나는 이들이었다.

그 무리의 뒤에서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세 명의 엘프가 밧줄에 묶인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리따운 엘프 여인과 아직 어린아이인 소년, 소녀였다. 헐벗다 못해 누더기에 가까운 차림, 다들 말라붙은 입술로 간신히 호흡하며 절망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간에 선 사내 한 명이 품에서 가죽 푸대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에이, 씨발. 야! 빨랑빨랑 안 움직여!”

어린 엘프 소녀가 그 기세에 넘어지며 신음을 흘린다.

“아으으…….”

가녀린, 채 성숙하지 않은 육신이 뜨겁게 달구어진 사막의 모래 위를 뒹군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모습에서 동정심 따위를 떠올리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품에서 채찍을 꺼내 휘두를 준비를 한다.

엘프 여인이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 네티나. 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

“네…… 샤일렌 언니.”

고통 속에서도 소녀는 울지 않았다. 독기를 품은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다시 몸을 일으킨다. 막 채찍을 휘두르려던 사내가 김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채찍을 거두었다. 그리고 툴툴거렸다.

“뭐라는 거야, 이것들?”

엘프어로 나눈 대화이기에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저 ‘야생동물’들이 뭐라고 울건 인간인 그들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다시금 엘프들을 끌고 사막을 건너며 중간에서 걷던 사내가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이 고생 하고도 고작 이거밖에 못 건지다니.”

곁에 있던 대머리 사내가 달래듯 말을 건넸다.

“브라이트 형님, 그래도 이거라도 갖다 팔면 돈 좀 되지 않을까요?”

“병신아! 여기까지 들어온 경비를 생각하면 적자란 말이다!”

브라이트는 신경질을 내며 사내를 구박했다. 그리고 다시금 물을 마신 뒤 혀를 차 대기 시작했다.

“씨발, 좋은 자리 다 놓치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는데…… 이것도 영 돈 안 되고. 인생 참 살기 힘들다.”

브라이트는 원래 바실리 왕국 동부, 라키드 산맥 근처에 자리한 크롬 시의 투기장 소속 용병이었다. 투기장의 일은 사실 별로 할 것이 없었다. 그냥 관객들 중 난리 피우는 일을 제압하거나 어쩌다, 진짜 어쩌다 가끔 도망치는 노예들을 잡아 오는 것이 임무의 전부였다. 한가하고 봉급 많은,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도 몇 년 전에 끝이 났다. 임무 하나를 실패하며 투기장에서 가차 없이 해고되었던 것이다.

사실, 아무리 용병이라 해도 임무 한두 번 실패했다 해서 그리 쉽게 해고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임무가 정말 별것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냥 투기장에서 도망친 오크 새끼 하나를 붙잡아 오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브라이트 본인조차도 귀찮기는 할지언정 어려운 임무는 아니라 확신했으니,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 산골 촌놈 만난 다음부터 모든 일이 꼬였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브라이트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오크 노예를 쫓다가 산에서 만난 그 덩치 좋은 촌놈, 그놈 때문에 오크 노예를 놓치고 반병신도 되었다. 정말이지, 그 상태로 크롬 시로 돌아간 자신들의 정신력에 스스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무슨 오지 탐험하는 기분으로 하산했었다.

얼마나 오지게 두들겨 맞았는지, 브라이트와 그의 수하들은 그 이후 꼬박 반년을 누워 지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이미 크롬 시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오크 노예를 쫓다가 산속의 기인을 만나 그 꼴이 되었다는 브라이트의 말을 믿어 주질 않았다. 당연히 오크 노예를 놓치고 말을 지어낸다고 믿었다.

심지어, 무식한 놈답게 지어내도 참 허술하게도 거짓말을 지어냈다며 비웃기까지 했다. 브라이트가 솔직하게 ‘그놈, 근육이 얼마나 단단하던지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 버린 덕분이었다. 세상에 칼 안 들어가는 몸뚱이라면 최소 오러 유저란 소리인데, 오러 유저가 뭐가 아쉬워서 오크 노예를 도망치게 해 준단 말인가?

결국 일거리 하나 못 얻게 된 브라이트 일행은 쫓기듯 다른 나라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왠지 일도 계속 꼬여 의뢰주를 잃거나 일을 실패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결국 노예 사냥꾼이 되어 이 지옥 같은 사막까지 오는 처지가 된 브라이트 일행이었다.

“아, 더럽게 덥네. 진짜…….”

연거푸 손바람을 부치며 브라이트는 하늘의 태양에 원망의 눈길을 열심히 보냈다. 그러더니 앞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시오, 클론토! 어떻게 좀 시원해지는 마법 같은 거 없습니까?”

낙타를 타고 가던 중년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없어! 자네는 마법이 무슨 만능인 줄 아나!”

대뜸 반말로 대답한 뒤 마법사, 클론토는 다시 로브 후드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낙타를 몰았다. 브라이트는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이런 사막까지 와서 저런 로브 뒤집어쓰고 다니는 클론토를 보며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여기서도 그 차림을 고집 하냐?’라며 비웃었는데, 막상 사막에 들어서고 나니 오히려 저게 더 시원한 차림이다. 그래도 저 로브는 이 지옥 같은 햇살은 차단해 주는 것이다.

“에이, 있는 돈 다 털어서 저 양반까지 고용했는데…….”

클론토를 보니 또다시 열불이 차오른다. 브라이트는 인상을 구겼다.

이곳, 스펠라트 사막에 야생화된 엘프 부락이 있단 정보를 듣고 처음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평범한 엘프 암컷 스무 마리만 잡아도 인생 역전이었다. 그 금액이라면 번듯한 곳에 주점이라도 하나 차리고 과부 하나 꿰어 차서 엉덩이 두들기며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전 재산을 다 털어 이번 사냥을 준비했다. 장비와 식량을 사고 모자란 병력을 채우기 위해 용병도 고용하고, 심지어 없는 돈에 마법사까지 불렀다. 무려 6서클에 종사하는 고위 마법사라 고용비도 엄청나게 비쌌다. 그래서 부하들 쌈짓돈까지 박박 긁어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걸 걸고 이곳으로 왔다. 처음에는 일이 잘 풀리는 듯싶었다. 마법사 클론토는 이 넓은 사막 속에서 엘프 부락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야음을 틈타 엘프 부락을 습격하는 데도 성공했다. 엘프들의 숫자는 끽해야 이백여 마리 정도, 전투로 일생을 보낸 용병 마흔 명이면 충분히 짓밟을 수 있는 병력이었다. 심지어 이쪽에는 마법사도 있지 않은가? 그때만 해도 금은보화가 눈앞 가득 아른거렸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놈의 엘프들이, 한밤중에 습격했는데도 당황하긴커녕 놀랄 정도로 빠르게 대처를 해 갔던 것이다.

수컷들은 칼을 들고 그들 앞을 막고 암컷들은 뒤에서 함정을 작동시키고 화살을 쏘더니, 어느새 노인과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피해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다. 평소부터 대피 훈련에 이골이 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대체 야생화된 놈들이 뭐하러 저런 훈련을 해 왔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습격을 받았었나?

하여튼, 덕분에 브라이트가 얻은 것은 엘프 몇 명의 시체와 채 도망가지 못한 아이 둘, 그리고 그 아이들을 보호하느라 남은 엘프 여인 하나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도망쳤다. 심지어는 클론토의 마법으로도 탐지가 되지 않았다.

“어휴,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만날 일이 꼬이는 거냐!”

누구는 조상이 물려준 엘프 경매장 덕분에 앉은 자리에서 호의호식하는데, 누구는 사막을 이토록 헤집고 다녀도 대박 한번 안 터진다. 실로 원망스러운 하늘이었다.

툴툴대는 브라이트를 견디다 못한 수하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달랬다.

“그래도 한 푼도 못 건진 건 아니잖습니까? 세 마리나 잡았는데…….”

“어린 것들은 거의 돈 안 된단 말이다!”

엘프는 워낙 성장 기간이 길어, 어린놈들은 경매장에 갖다 팔아 봐야 몇 푼 못 받기 마련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고작해야 열한두 살 정도로만 보이는 저 엘프 아이들도 제값 받을 때까지 키우는 데 30년은 족히 걸린다. 그만큼 노예 경매장에서도 손이 많이 가다 보니 어린 엘프들을 반기는 곳 따윈 없다.

“게다가 한 놈은 수컷이기까지 하지!”

브라이트는 신경질을 냈다. 엘프 수컷은 암컷의 10분의 1 정도 가격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다 자란 야생 엘프 수컷의 경우엔 워낙 자살률이 높아 아예 사 주지도 않았다. 그나마 어린놈은 씨 내리는 용으로 싼값에라도 사 주는 이들이 있어 이렇게 끌고 가는 것이었다.

“아, 저거 대체 얼마에 팔리려나?”

브라이트는 뒤따르는 엘프 여인을 보며 고민했다. 이대로 저걸 팔아 봤자 대적자다. 하지만 저 엘프 여인은 제법 칼을 쓸 줄 알았다. 어린 것들을 지키겠답시고 조악한 검을 휘두를 때 유심히 봐 뒀다. 그냥 엘프 노예라면 몇 푼 못 받겠지만, 예비 슬레이어로 판다면 그럭저럭 본전치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며 브라이트가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뒤따라 걷고 있는 용병 하나가 사막 저편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응?”

뭔가를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용병이 브라이트를 불렀다.

“브라이트 대장! 웬 엘프 암컷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는데요?”

엘프! 게다가 암컷이란 말인가! 브라이트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오오! 다 자란 암컷이잖아!”

사막 저편에서 백금발의 엘프 소녀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성숙한 여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사춘기는 지난 것이 충분히 제값 받을 수준으로 보였다. 왜 저렇게 달려오는지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제 딴에는 동족들 구하겠답시고 덤벼드는 모양이었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 절대적인 무력 차이를 보고도 혼자서 덤벼든단 말인가? 역시 엘프들은 어리석은 야생 짐승이다.

검을 뽑아들며 브라이트가 신 난 목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금화 주머니가 달려온다! 챙길 준비 하자!”

3

두 다리로 사막을 박찬다. 두 눈에 모래 저편의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갈색 피부에 백금발을 가진, 마치 소나 말처럼 묶인 채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가고 있는 그녀의 일족들이.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틀림없었다. 수백 년 동안 이 오지에서 살아가던 단하임 일족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멸망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저들을 데리고 가는 인간들의 모습도 똑똑히 보였다. 시리스의 두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으으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노예로 살아가며 항시 느꼈던, 얼음같이 차갑게 가슴속에 스며들던 소리 없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저 외면하고 무시하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 슬프고 힘없는 분노가 아니었다.

전신의 열기가 사막의 열풍을 누른다. 한낮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뜨겁디뜨거운 분노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끓어오른 분노가 불길이 되어 전신을 태우는 듯하다. 시리스가 기합을 터트렸다.

“으아아아!”

한편 브라이트 일행은 당혹해하는 표정으로 달려오는 시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돈 생겼다며 좋아했다. 이쪽에서 쫓지 않아도 알아서 덤벼주니, 발품 팔 일 없겠다며 이 행운을 순진하게 기뻐했다. 그런데 어째 점점 가까워지는 저 엘프 소녀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물론 브라이트 일행이 시리스의 기세를 느끼고 경각심을 느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감 좋은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레펜하르트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았으리라. 그들이 의아해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수하 중 한 명이 멀뚱멀뚱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 저년 옷이 어째…….”

이곳의 야생 엘프들의 옷차림은 쉽게 말해서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선인장 섬유와 검불을 엮어 만든, 그저 푸대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의 누더기가 이 야생 엘프들의 주된 의복이었다. 그런데 저 엘프의 옷차림은 마치 이름난 귀족가의 여검사나 입을 법한 고급품이 아닌가?

게다가 들고 있는 시미터도 날이 바짝 선 것이 보통 검이 아니어 보였다. 야생 엘프들이 주로 쓰는, 석검이나 청동검, 나무를 갈아 만든 목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품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시리스가 브라이트 일행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용병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뭐, 그래 봤자 엘프 암컷이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용병이 도끼를 들고 위협하듯 크게 올렸다. 자, 이대로 내려치면 넌 뒈져. 무섭지? 무섭지?

그 순간 용병의 전신에 푸른 섬광이 세 번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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