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제11장 그랜드 포지
1
공동과 연결된 통로 사방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리스나 실란, 틸라는 그저 소리만을 듣고 있을 뿐이지만 오러를 다루는 레펜하르트와 러스는 상대의 위치와 숫자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 대략 오십여 명 정도의 드워프들이 빠른 속도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저마다 기둥이며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긴 채 짙은 살기를 피워 올린다.
포위망을 구축하자마자 드워프 중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를 토했다.
“전원 사격 개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개의 화살들이 일행을 노리고 날아왔다. 다들 사색이 되어 무너진 신전 폐허 뒤로 몸을 숨겼다. 머리를 숙인 채 실란이 투덜거렸다.
“아으, 드워프들 성질 급하네요…….”
아무리 자신들이 침입자라도 그렇지, 아무 말 없이 대뜸 화살을 날릴 줄이야?
“보통 이런 경우 기대하는 대화라는 것이 있잖아? 누구냐라든가, 꼼짝 말라든가…… 뭔 사람들이 대뜸 보자마자 죽이려고 드냐그래?”
팅팅~ 탱탱~.
화살촉이 돌벽과 부딪치며 연신 맑은 소리를 울린다. 그래도 드워프 편들어 준답시고 레펜하르트가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며 입을 삐죽였다.
“너 같으면 자기 집 폭삭 무너트리고 들어오는 침입자에게 말 걸 여유가 나겠냐?”
“그래, 그걸 잘 아는 양반이 이런 미친 짓을 저질렀나요?”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 없지. 음.”
머쓱해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 냈다. 화살 공격이 통용되지 않자 드워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저마다 도끼며 망치, 검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명백한 적의와 살의를 띄운 채 일행들을 노려본다.
사실 드워프들은 그리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드워프들은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처지, 발각된 시점에서 결코 이들을 살려 둘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레펜하르트 일행이 부순 것은 드워프들의 신, 알 포트의 신전이다. 그걸 부수고 나타난 일행들에게 고운 눈빛을 보낼 리가 없지.
레펜하르트와 실란이 서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쩝, 다들 눈빛이 장난 아닌데?”
“그러게요. 한밤중에 딸 침실 창문 부수고 침입한 외간 남자를 발견한 아빠의 시선 같은데요.”
“……미묘하게 그럴듯한 비유일세.”
러스가 안색을 굳히며 검을 들었다. 그가 드워프들을 굽어보며 호통을 쳤다.
“감히 미물들이 인간을 해하려 하느냐!”
드워프들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러스의 오만한 말에 분노한 것이 틀림없었다. 러스가 코웃음을 치며 힘을 끌어 올렸다.
웅웅웅!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백열하며 러스의 어깨 위로 살기가 피어오른다.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며 외쳤다.
“러스! 살기를 거두어라!”
“네? 하지만 형님…….”
당황하는 러스를 뒤로 물린 채 레펜하르트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전신을 훤히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드워프들이 놀라며 활시위를 당긴다. 십여 대의 화살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공격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기 위해 두 손을 위로 들기까지 했다.
팅팅팅팅~!
날아간 화살이 모조리 튕겨 나간다. 오러고 뭐고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단련된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고작 평범한 화살 정도로는 흠집도 나지 않는 것이다. 드워프들이 경악하며 웅성거렸다.
“괴물이다!”
“화살이 통하지 않아!”
“심지어 대놓고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과시하면서 우릴 조롱하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닌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항복한답시고 손들었더니 오히려 드워프들의 표정이 더더욱 살기등등해졌다. 더 이상 시간 끌면 무슨 소리 나올지 몰라, 그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지의 아들들이여! 들어 주시오!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오!”
드워프들의 살기가 눈에 띄게 꺾였다. 다들 당황하며 서로를 향해 눈빛을 교차했다. 레펜하르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드워프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좋은 중년 드워프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간인 그대가 우리들의 적이 아니란 말인가?”
여전히 두 손을 든 채 레펜하르트가 대답했다.
“그렇소!”
확실했다. 눈앞의 저 침입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중년 드워프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인가? 왜 이곳에 왔는가?”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누구냐고? 왜 이곳에 왔냐고? 물론 대답할 말은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으, 내 입으로 말하기엔 너무 쪽팔린데 이거…….’
그래도 여기서 피 안 보려면 외칠 수밖에 없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레펜하르트가 다시 외쳤다.
“나는 그대들의 구원자! 알 포트의 신탁 속 인물이오!”
드워프들의 표정이 일거에 변했다. 더 이상의 살기는 없었다.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레펜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물론 드워프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우와, 레펜 씨, 제 얼굴이 다 화끈거려요. 그 대사 대체 뭐예요?”
“시, 시끄러! 나라고 좋아서 이런 말 한 줄 알아?”
막상 해 놓고 보니 정말 낯부끄러운 대사다. 레펜하르트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을 향해 다시 외쳤다.
“스틸해머 일족의 인도에 따라 이곳 그랜드 포지에 대신관 마켈린을 만나러 왔소!”
뒤에서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러스가 혀를 찼다.
“아니, 형님. 아무리 그래 봤자 이들이 우리 말을 믿어 줄 리가…….”
말이 채 끝나기도 무섭게 드워프들이 무기를 거두었다. 일제히 검을 검집 안으로 넣더니 다들 반색을 하며 외쳐 댄다.
“오오! 구원자시다!”
“일족의 구원자께서 오셨구려!”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아니, 근데 왜 멀쩡한 정문 놔두고 이런 곳에서 나타나셨대?”
조금 전의 살기는 온데간데없고, 다들 얼굴 가득 환대의 미소를 띠며 우르르 일행들에게 몰려들었다. 실란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와, 뭔 태도가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뀐대?”
☆ ☆ ☆
그랜드 포지는 세텔라드 산맥 지하 30미터에 위치한 지하 도시였다. 직경이 2킬로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최하 30미터에서 최대 50미터까지 이르는 거대한 동굴 안에 수많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두 줄기 강에는 강물 대신 끓는 온천수가 흘러 사방에 자욱한 수증기를 피운다. 도시 천장에는 100미터 거리마다 거대한 지열석이 박혀 빛과 열을 제공하고 있었다. 비록 지상의 한낮만은 못하지만, 적어도 사물을 구별하는 데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광량이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한 중년 드워프의 인도에 따라 그랜드 포지 중앙의 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 제일 먼저 화살 날리라 소리쳤던 바로 그 드워프였다. 자신을 풀바트라 소개한 드워프는 그랜드 포지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도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련 장인들이 모인 대장간 구역입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살림집이 모여 있는 거주 구역이 나올 겁니다.”
다들 갓 도시 올라온 촌놈들처럼, 사방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우와, 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만든 걸까요?”
시리스도 동감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손재주가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심지어는 같은 드워프인 틸라조차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하긴, 도시 올라온 촌놈이라는 정의에 가장 적합한 것은 그녀일 것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 굉장하군요, 그랜드 포지는…….”
새삼 일족에 대한 자긍심이 가슴 벅차게 피어오른다. 대부분의 엘프와 오크들은 이미 모든 문화와 전통을 잊었지만 드워프들은 아직도 이 정도의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러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뇌까렸다.
“이해할 수 없군. 이 정도의 대역사가 가능하려면 아무리 드워프들이라 해도 엄청난 인원이 필요할 텐데…….”
그만한 인원이 이 험한 오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지라는 것은 살기 힘들기에 오지라 불리는 것이다. 이 정도 대규모 건축이 가능할 정도의 드워프들이 과연 이 세텔라드 산맥 깊숙한 곳에서 제대로 생활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 정도 규모라면 왜 노예로 살아가는 동족들을 구하려 하지 않는 거지?”
“헤에, 러스 씨도 슬슬 드워프들이 노예로 살아가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나 보죠?”
“응? 그게 무슨 소리지, 실란?”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의문을 가질 리가 없으니까요.”
“으음…….”
놀리는 듯한 실란의 말에 러스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고정관념에 딱 박힌 러스라도 이런 엄청난 광경을 보니 패러다임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말에 풀바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 그랜드 포지는 우리들이 건설한 게 아닙니다.”
원래 그랜드 포지는 은의 시대 유적, 즉 던전이었다. 그것을 이곳까지 쫓겨 온 드워프들이 수많은 희생을 내며 탐사를 거듭하고 내부를 개조한 끝에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대륙에는, 이미 탐사될 대로 탐사되어 버려진 유적들도 상당히 많다. 대다수는 그럴 경우 유적의 마력 코어를 잃어 이공간으로 사라져 버리지만 개중에는 이렇게 현실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은 인간이 부수거나 개조해 다른 용도의 건물로 쓰곤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그라임 왕국 왕성 델 그라임이었다. 원래 던전이었던 곳을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그라임 왕국 초대 국왕 델 그라임이 완벽하게 탐사한 뒤 지하를 개조하고 지상에 성을 올려 왕성으로 삼은 것이다.
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 어쩐지…….”
이 정도 도시를 직접 건축하려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안에 있는 것을 몰아내고 개조하는 데는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도 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노예 종족인 드워프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애초에 손재주 하나는 좋은 놈들이었으니.
그때 레펜하르트가 그의 착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렇지만 이곳이 은의 시대에도 드워프들의 도시였던 것은 분명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형님?”
레펜하르트가 길가에 있는 건물들을 가리켰다.
“문턱이 낮잖아.”
러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단순히 문턱이 낮은 정도가 아니다. 낮은 문턱, 낮은 천장, 그리고 지나치게 짧은 계단과 낮은 손잡이까지. 모든 면에서 인간을 위해 지어진 것임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도시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 저 드워프 석상과 동상들은 누가 뭐래도 이 도시가 드워프의 도시임을 증명해 준다.
“즉, 은의 시대에는 드워프들이 자기만의 도시를 세울 만큼 번영하고 있었다는 소리지. 노예로 타고난 종족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였겠지?”
“으음…….”
러스는 신음을 흘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레펜하르트의 말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뿌리 깊은 인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생활 구역에 도착한 뒤, 풀바트가 일행을 한 가옥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중년 드워프 여인이 나와 그를 맞이한다. 여인에게 뭐라 말을 건넨 뒤 풀바트가 일행에게 말했다.
“일단 이곳에서 묵으시지요. 우선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다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풀바트가 내준 가옥은 근처 가옥에 비하면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그래 봤자 드워프 기준이었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며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개구멍 들어가는 기분이군.’
신장 192센티미터인 레펜하르트나 180센티미터인 러스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시리스조차도 문턱을 넘기 위해 허리를 굽혀야 했다. 엘프답게 그녀는 소녀의 나이지만 이미 17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이었으니까.
아, 물론 실란은 우울해하며 허리 쭉 펴고 들어갔다.
“나, 나도 허리를 굽히고 싶다…….”
틸라가 피식 웃으며 실란 뒤를 따랐다. 적당히 방 여기저기에 짐을 풀자 풀바트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지금 대신관께 연락을 취했습니다. 변변치 않지만 허기라도 채우면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구려.”
그렇잖아도 마물들의 습격으로 변변한 더운 음식 한번 못 먹어 본 일행이다. 다들 기대하는 가운데 중년 드워프 여인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왔다.
식사로 나온 것은 순무와 감자를 넣고 끓인 수프와 정체불명의 삶은 고기였다. 일족의 구원자 일행에게 대접하는 음식으로 치기엔 지나치게 검소하지 않은가 싶지만, 드워프들이 오지 중의 오지에 숨어사는 처지임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정성을 들여 대접한 것이 분명하리라. 다들 순수하게 고마워하며 숟가락을 떴다.
삶은 고기를 한입 베어 문 실란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이거 무슨 고기예요?”
뭐랄까, 묘하게 질기고 노린내가 난달까. 딱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솔직히 맛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풀바트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바실리스크의 간을 삶은 것입니다.”
다들 안색이 굳었다. 바실리스크? 그 몬스터의 내장이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실란과 러스가 비위가 뚝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크를 들었던 시리스도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고기 담긴 접시를 슬쩍 밀었다.
“에, 엘프는 원래 채식 위주예요, 호호.”
“어제까지만 해도 육포 잘만 씹더니…… 아얏!”
옆구리를 꼬집힌 실란이 울상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물론 제라드 밑에서 온갖 악식은 다 먹어 본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고깃덩이를 으적으적 잘도 씹고 있었다.
“먹을 만한데. 다들 왜 그래?”
맛은 둘째 치고 몬스터의 고기라는데 먹을 마음 드는 이가 누가 있겠나? 모두가 불편한 얼굴을 하자 풀바트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맛은 좀 그래도 상당히 귀한 물건입니다. 몸에도 좋고.”
“어디에 좋은데요?”
“음…….”
갑자기 풀바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게…… 남자에게 참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구려…….”
“오옷!”
“헉?”
러스와 실란이 눈을 빛냈다. 인간이건 드워프건, 남자라면 이건 먹지 않을 수 없다! 종족을 초월한 동질감을 느끼며 둘 다 열심히 바실리스크 간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틸라와 시리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짐승들.”
“러스 씨야 그렇다 치고 실란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요.”
“나도 곧 근육질의 몸매가 될 테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죠.”
뭘 미리 준비하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준비성 투철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덕분에 분위기가 급 훈훈해졌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러스조차도 ‘드워프,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들이군!’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치자 밖에서 젊은 드워프 한 명이 들어왔다.
“풀바트 아저씨, 대신관께서 구원자 분을 중앙탑으로 모시라 하십니다.”
기다렸다는 듯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갔다 오지. 다들 여기서 쉬고 있어.”
☆ ☆ ☆
그랜드 포지의 중심, 천장과 종유석처럼 연결된 커다란 탑이 바로 알 포트의 대신관 마켈린이 거하는 곳이었다. 탑 아래까지 안내하더니 젊은 드워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이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탑을 올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못 드나드는 모양이군. 하긴, 대신관이 거하는 곳이면 일종의 성역…….”
“아뇨, 그냥 올라가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데요.”
“…….”
생각해 보니 드워프란 종자들, 원래 이랬다. 헛웃음을 흘린 뒤 레펜하르트는 계단을 올라갔다. 탑 위쪽에 도착하니 사방이 갈색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왔다. 벽과 기둥에 온갖 그림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엔 금과 청동으로 장식한 커다란 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 제단 앞에서 늙디늙은 드워프가 레펜하르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신탁이 점지한 구원자여.”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이며 눈썹이 길게 늘어져, 그야말로 수염에 뒤덮여 있는 것 같은 드워프였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 마켈린…….’
가장 충성스러운 수하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였으며, 때로는 존경하고 의지하는 스승과도 같았던 이.
그의 모습은 30년이라는 세월의 벽을 두고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시리스나 타시드와 달리 전생에서 마켈린은 이미 드워프로서도 늙은 나이에 레펜하르트와 만났다. 30년이라 봐야 인간 기준으로는 7, 8년 정도, 마켈린의 모습이 딱히 달라질 일이 없는 것이다.
너무도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에 무심코 ‘우와, 마켈린! 오랜만이야!’라고 외칠 뻔했다. 목구멍까지 기어 나온 말을 애써 삼킨 뒤 레펜하르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응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알 포트의 대신관, 마켈린이여.”
그러자 마켈린이 신기해하는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봤다.
“방금 그 말은 진실이구려, 구원자여. 하지만 이상하군. 우리가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소?”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이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군. 나는 50년째 이곳을 떠난 적이 없거늘.”
눈앞의 구원자 청년은 아무리 봐도 30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사실은 20대 초반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를 알지만, 그대는 날 모를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다. 어느 누구라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진실의 소리를 듣는 드워프, 그들의 대신관인 마켈린이라면 그를 믿어 줄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내가 당신을 만난 시기는 지금부터 10년 후이니까요.”
마켈린이 혼란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진실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 말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하나뿐이다.
‘……설마 구원자께서 정신 질환을?’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뭐, 정신병자란 것이 척 봐서 알아볼 수 없기는 하지만 드워프의 신, 알 포트께서 설마 일족의 구원자로 정신병자를 점지해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아해하는 마켈린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온 자입니다.”
2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대마도사로 대륙을 떠돌던 이야기, 10서클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이종족의 비의를 찾으며 그들과 교류를 쌓은 이야기, 손 닿는 대로 그들을 돕고 그 와중에 점점 인간의 세력과 충돌하며 이종족을 보호하던 이야기, 결국 안타레스 제국을 세워 마왕이라 불리게 되어 전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그의 최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누구를 만났는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다시 살아나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믿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분명 진실을 말했으니, 믿을지 말지는 당신의 몫입니다.”
설명을 마친 뒤, 빙그레 웃으며 레펜하르트는 허리를 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마주 앉아 모든 말을 경청하던 마켈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라 할지라도 믿기 힘든 이야기임에는 분명하구려.”
드워프들은 분명 진실의 소리를 듣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진실을 확실히 캐낼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말하는 상대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면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드워프들 귀에는 진실로 들리는 것이다.
“나 또한 알 포트 님의 신탁이 없었다면 그대를 정신병자 취급했을 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그대의 말은 꽤나 그럴듯하지.”
문득 마켈린이 눈을 빛냈다.
“시험을 해 봐도 되겠소? 그대가 정신병자인지, 아니면 진짜 시간을 초월한 현자인지 알고 싶소.”
‘시험이라?’
그도 호기심이 일었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켈린이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사천왕이라 불리는 그대의 수하였고, 그대와 친밀했다면 내 성격상 분명 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오. 그러니 묻겠소.”
눈부시도록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켈린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내 수염은 무슨 색이오?”
눈에 뻔히 보이는 수염 색을 물어보다니, 분명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어도 보이는 것처럼 흰색이 아니란 것쯤은 확실하겠지. 마켈린은 유심히 레펜하르트를 관찰했다. 과연 이 젊은이는 어떤 대답을 하려나?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이 나왔다.
“수염이 없는데 색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마켈린, 당신 30년 후에도 그거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체질 안 변했어요.”
“……슬프구먼.”
마켈린이 우울해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풍성한 수염이 턱에서 뚝 떨어지며, 꽤나 중후하게 생긴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드워프들의 대신관다운 희고 풍성한 마켈린의 수염, 사실 이건 가짜였던 것이다.
“혹시 이 수염에 얽힌 이야기도 알고 있소?”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 포트의 은총이라 들었습니다만.”
드워프 남자들 사이에서 풍성한 수염은 곧 남성미의 상징이다. 대머리는 용납해도 수염 없는 민턱은 징그럽다고 혐오하는 것이 모든 드워프 여성들의 공통된 취향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켈린은 슬프게도, 젊은 시절부터 이상할 정도로 수염이 나지 않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인간이었다면 가짜 수염이라도 달았겠지. 하지만 진실을 꿰뚫어 보는 드워프들 사이에서 가발이나 가모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더욱 구차해 보일 뿐이다.
뭐, 비록 수염은 없었지만 마켈린은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인재였다. 놀라운 신성력과 지도력으로 그는 200년 만에 알 포트의 대신관으로 점지받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지상 대리자에게 드워프의 신 알 포트가 내려 준 것이 바로 이 풍성한 가짜 수염이었다.
진실의 눈으로조차 꿰뚫어 볼 수 없는 신성한 수염! 인간이 보기엔 참 알 포트 할 짓 없구나 싶겠지만,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이것은 마켈린이 진정으로 알 포트에게 사랑받는다는 명확한 증거인 것이다! 이 수염으로 인해 마켈린은 드워프들의 존경과 경외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드워프들조차 이 수염의 진위를 구별할 수 없는데 인간인 그대가 알아보았을 리는 없을 터, 그대의 말이 참됨을 이제 확신할 수 있겠구려.”
다시 수염을 달며 마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레펜하르트가 정신병자라, 자신의 망상을 진실로 믿고 있다면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눈앞의 이 인간 청년은 진짜 시간을 거슬러 온 자인 것이다.
“원래 그대를 찾은 이유는, 그대에게 구원자로서의 운명과 앞으로의 갈 길에 대해 작은 조언이나마 던지려던 것이었소. 하지만 이미 그대는 구원자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구려.”
갑자기 마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하나뿐.”
마켈린이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중후한, 엄숙한 목소리로 그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알 포트를 섬기는 모든 드워프들을 대표해, 나 마켈린 포트 해머라인은 그대 레펜하르트 왈드 안타레스에게 충성을 다짐합니다.”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무릎 꿇은 늙은 드워프, 마켈린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뜬금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랬으니까. 그렇다 보니 드워프들의 충성을 받게 되었다는 만족감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가슴 한편에서 묵직한 중압감만이 느껴질 뿐.
이미 한 번 이들의 충성을 배신했다. 이토록 충성과 헌신을 받아 놓고 결국 자신의 무능으로 이들을 죽음과 고난으로 내몰았다.
과연 이번 생애에는 이들의 충성에 보답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한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친 뒤 레펜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일어나시게.”
말투가 변했는데,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대의 말은 반은 틀렸다네, 마켈린.”
몸을 일으키는 늙은 드워프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자네의 조언이 절실하거든.”
☆ ☆ ☆
다시 자리에 앉은 마켈린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미 한 번 실패했지. 나의 힘, 나의 마력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다 결국 인류의 공적이 되었고 죽음을 당했다.”
그러니 전생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해야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것이 현재 레펜하르트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일단 마법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어서 여태까지 미루어 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염없이 미룰 수 있는 문제인 것도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안이 있긴 하지만, 역시 확실하다 할 수는 없고…….”
마켈린이 물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계획이랄 정도는 아니고…….”
레펜하르트는 잔잔한 목소리로 차탄 공국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엘프와 오크 노예들을 거두고 그들에게 인간이 받는 교육을 시키게 한 것, 그리고 그것이 유행이 되어 퍼지기를 기대했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듣고 마켈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음, 나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의식을 계몽해 점진적 변화를 이끌어 가는 것도 분명 이종족들에게는 희망적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인간이 이종족이지만, 레펜하르트 님께서 이해하시기 편하게 일단 이 표현을 쓰기로 하지요.”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첨언했다.
“하지만 그래서야 족히 100년은 걸리겠군요. 엘프나 우리 드워프들이야 수명이 기니 견딜 만한 세월이겠지만, 그 전에 레펜하르트 님께서 늙어 버리지 않으실지?”
“그것이 문제지…….”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평화적인 변화라는 것은 참 듣기 좋고 이상적이지만, 그만큼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을 설파하는 성인이라 해도 그가 올바른 평가를 받기까지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의 고정된 패러다임을 부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튀겼다.
“라이란.”
작은 불꽃이 손가락 끝에서 생성된다. 화염 주문 중 가장 기초적인 발화 주문, 공격력 따윈 전무하고 그저 부싯돌 대용으로나 쓰는, 그야말로 마법에 처음 입문할 때 요령을 파악하기 위해 배우는 발화 주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마법 스펠 없이 시동어만으로 발동했다는 것은 레펜하르트의 마법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증거.
불꽃을 살짝 흔들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난 지금 마법을 되찾고 있다. 그리고 전생과 달리 또 하나의 힘도 얻었지.”
불꽃이 피어오른 손가락, 그 위로 황금빛의 오러가 솟구쳐 불꽃을 감쌌다.
“사실, 마법만 되찾는다면 안타레스 제국을 다시 세우고 대륙을 공포로 지배하는 마왕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이미 한 번 해 본 짓이었다. 이종족들의 도움을 얻어 낼 자신도 있다. 전생과 달리 이제는 지치지 않는 육체도 있다. 게다가 전생에서는 딱히 나라를 세울 생각도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이종족들의 나라가 생겼던 케이스다. 처음부터 제대로 계획을 세워 제국을 건국한다면 도저히 실패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또다시 암흑 제국이 재현될 뿐이지.”
암흑 제국을 다시 세워 봤자, 다시 인류의 공포의 대상이 될 뿐.
물론 수동적으로 움직였던 전생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의 왕국을 공격하고 그들을 지배하면서 세력을 넓힌다면 10년 이내에 대륙 전체를 정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전생에서도 그 정도 힘은 있었다. 인간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각개격파를 했다면 그런 결말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륙 전체를 전쟁의 겁화로 불태우겠다는 소리와 똑같다.
“그렇게까지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는 않다.”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마켈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내 고민을 알겠는가, 마켈린? 힘으로 세상을 누르면 결국 실패한다. 하지만 나는 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세상을 변혁시킬지 아직 명확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 드워프의 현자여.”
마켈린은 대답 없이 수염만을 쓰다듬었다. 생각을 정리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군요.”
늙은 드워프가 레펜하르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레펜하르트, 나의 주군이여.”
“말하라, 마켈린.”
마켈린이 늙수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 너무 우습게 보고 계십니다.”
“응?”
뜬금없는 소리에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마켈린이 혀를 찼다.
“힘으로 눌러서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을 찾으시겠다고요?”
“뭐, 뭐가 잘못되었나?”
마켈린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레펜하르트 님의 실패 원인은 힘으로 눌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마켈린이 단언하듯 말했다.
“힘으로‘만’ 눌렀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단순하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 수만큼의 신념과 의견이 있는 법이다. 그 신념과 의견의 절대 다수가 인정한 것, 그것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모두가 인정하고 포용하는 고정된 상식,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신념을 교환했을까?
“레펜하르트 님은 그 고정 상식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모자라지요. 힘으로 누르고, 말로도 설득하고, 때로는 자율에 맡기고 때로는 강제하면서…… 그렇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해도 몇 년이 걸릴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레펜하르트 님의 꿈이자 야망입니다.”
“으음…….”
“그냥 힘으로 눌렀다가 실패했으니 이번엔 다른 시도를 해 봐야지~라고 할 정도로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실로 뼈아픈 지적이었다. 동시에 머릿속 한쪽이 활짝 개는 느낌도 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마켈린이 다시 물었다.
“레펜하르트 님은 인간을 증오하십니까?”
증오하냐라?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증오라? 별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이종족에게 애착이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이 인간인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딱히 오크나 엘프, 드워프나 트롤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아, 뭐 시리스가 엘프인 만큼 자신도 엘프였다면 오래오래 함께 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 정도야 해 봤다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군.”
마켈린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인간을 좋아하십니까?”
이번엔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인 그가 보기에도, 인간은 워낙 추악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레펜하르트 님이 말씀해 주신 전생 속에, 인간 동료는 없었으니까요.”
문득 마켈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드워프인 제가 이런 말하기는 좀 우습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나쁜 종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레펜하르트 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엘프나 오크, 트롤, 저희 드워프들을 사람 대접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푸대접하셨던 것 같습니다.”
“응?”
“왜 전생에서, 안타레스 제국을 지키기 위한 군대에 인간을 포함시키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믿을 수도 없고…… 게다가 그들의 전쟁도 아니지 않은가? 상관없는 전쟁에 동원시키려니까 미안해서…….”
“그럼 왜 전생에서, 안타레스 제국을 움직이는 행정 관리에는 인간을 포함시키지 않으셨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을 수가 없고…… 게다가 엘프나 드워프들이 아무래도 오래 살다 보니 그런지 부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 특히 드워프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판결 같은 것도 명쾌하게 잘 내리고. 나름대로 적재적소에 배치했다고 생각했는데?”
변명하듯 말을 더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뒤,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의무도 권리도 인간들에게는 부여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나?”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자기 딴에는 인간들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 정책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들은 기본적인 세금만 걷고, 그 외에 전혀 강압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힘든 전쟁은 오크나 트롤, 혹은 그가 지배한 마물들이 대신 했다. 복잡한 행정이나 정치 같은 것은 드워프나 엘프를 시켰다. 인간들은 그저 속 편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만 즐기며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인간들에겐 행정이나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거?”
“그야 없는 쪽이 훨씬 잘 돌아가는데 굳이 끼울 필요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책망하듯 말했다.
“마왕이라 불릴 짓은 다 하셨군요.”
“그, 그런가?”
레펜하르트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켈린의 말에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안타레스 제국의 인간들은 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륙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부패도 없고 가난도 적고 딱히 학대받는 이들도 없었고…….
“이 정도면 됐잖아? 뭐가 문제인 건데?”
투덜대는 자신의 주군을 보며 늙은 드워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평범한 농민들에겐 세상 살기 좋아졌겠지요. 하지만 유능한 이들은? 지식이 있고 야망이 있는, 레펜하르트 님처럼 자기 꿈을 향해 달려가는 추진력과 열정이 있는 인간들에게도 과연 살기 좋은 세상이겠습니까? 꿈을 꾸려 해도 제도적으로 막혀 있고, 추진력을 가지고 달리려 해도 길이 없는 그 세상이?”
“…….”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마켈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마왕이란 것이 꼭 선혈로 목을 축이고 생살을 뜯으며 시체로 산을 쌓고 정상에 올라서 광소를 터트려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드럽지만 엄격한,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듯한 어조로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이들의 의견만 들으며 자기 취향대로만 세상을 움직이려 한다면…….”
표정을 굳힌 레펜하르트를 향해 마지막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것이 바로 마왕입니다.”
☆ ☆ ☆
레펜하르트는 의자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넘치는 체력을 가진 그가 지금 힘이 다 빠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마켈린의 말은 직설적이었고, 그렇기에 조금의 여과도 없이 그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대는 분명 선했지만, 분명 마왕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군주, 레펜하르트여.”
언제나 그렇다.
세상에 진실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기운 빠져 허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데 이런 이야기, 전생의 저는 안 했습니까?”
생각해 보니 전생의 자신이 이런 말을 안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성격상 레펜하르트 밑에서 일했다면 미움을 받건 말건 할 말은 다 하고 살았을 텐데?
그러자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사실 전생의 마켈린은 이런 소릴 하지 않았다. 마켈린이 레펜하르트의 밑으로 들어올 때, 이미 대륙은 드워프를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마물들을 모은다는 소문에 모든 인간들이 무리로 모여 있는 드워프 노예들에 대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저 드워프란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리 현명한 마켈린이라 할지라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현명한 신의 대리자답게 인간에게 무턱대고 증오를 보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함께 어울리려는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안타레스 제국의 저 시스템, 지금 마켈린이 혀를 차며 성토하는 저 제도는 사실 절반 이상 전생의 마켈린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자 마켈린의 안색도 굳었다.
“그, 그렇습니까? 저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군요.”
둘은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머리를 긁었다.
“어쨌거나,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지금부터 잘하면 되는 거야. 암.”
그가 물었다.
“마켈린이여, 일단 전체적인 문제점은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가?”
힘으로만 눌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느 정도 강제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까지는 이해했다. 그렇다면 그 강제력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마켈린이 대답했다.
“레펜하르트 님께서 전생에서 하신 가장 큰 실수는, 대결의 양상을 인간과 이종족의 구도로 몰고 간 것이라고 봅니다.”
“응?”
좀 이해가 안 간다. 레펜하르트가 설명을 촉구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소린가?”
굳은 목소리로, 마켈린이 대답했다.
“인간 대 이종족의 구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구도 사이에 이종족이 한쪽 편을 들게 하십시오. 절반의 인간에겐 미움받지만 나머지 절반의 인간의 인식은 강제적으로라도 조금씩 변할 겁니다.”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뒤에서 꼼수를 부려서 인간들끼리 싸움을 붙인 뒤 슬그머니 한쪽 편을 들라는 소리인가?”
마켈린이 피식 웃었다.
“굳이 꼼수를 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버려 둬도 자기들끼리 열심히 다투는 것이 인간들인데요.”
듣고 보니 그랬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아무 짓 안 해도 어차피 대륙 곳곳에서 시시때때로 전쟁은 일어난다. 권력을 얻기 위해, 부를 얻기 위해, 영토를 얻기 위해, 사소한 국가, 세력 간의 분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굳이 꼼수 따위 부리지 않아도 인간들끼리의 다툼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그런 인간들의 분쟁에 슬쩍 끼어들어 그들의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엘프나 드워프, 오크, 트롤들에 대한 대우를 완화시키라는 것이 마켈린의 조언이었다.
합리적으로 들리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그렇게 쉽게 이종족에 대한 편견을 버릴까?”
마켈린도 그렇게까지 인간에게 기대할 만큼 멍청한 드워프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한들 인간 중 이종족을 노예가 아니라고 보는 이들은 아마도 10퍼센트도 안 될 겁니다. 하지만 뭐든지 시작에서 큰 욕심 부리면 안 되는 법이지요.”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짚었다.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다. 마켈린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내 이해할 수 있다.
힘으로 누르고, 상황적으로 이종족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만들며, 사상적으로 현 세상의 모순을 짚고,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종족을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시키며,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되살려 독립성을 갖추는 것. 이 모든 것을 다 시도해도 모자란 것이 바로 그의 꿈이요, 야망인 것이다.
“커어, 골치 아프네.”
“많이 골 썩이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니까요.”
푸근하게 웃으며 마켈린은 눈앞의 젊은 주군, 신이 점지한 그들의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았지만 그는 현명한 드워프, 이 이상은 레펜하르트가 판단할 몫임을 알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레펜하르트, 그렇다면 그의 행보는 그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선택, 판단이어야 한다. 만약 마켈린의 사상이 100퍼센트 옳았다면 알 포트는 그를 구원자로 삼지 굳이 레펜하르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하는 것은 그저 조언으로 레펜하르트에게 판단할 ‘정보’를 더 부여하는 것뿐.
“으음…….”
뭔가 심각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마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
정신을 차리고 레펜하르트도 마주 일어났다.
“일단은 그랜드 포지에서 좀 지내고자 한다. 여기서 한 달 정도 지내야 할 필요가 있으니.”
레펜하르트가 이곳, 그랜드 포지에 온 이유는 물론 마켈린을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알 포트의 지저 태양, 마그림을 한 달 정도 빌려야 하거든.”
레펜하르트는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슬슬 일행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마켈린이 배웅을 위해 뒤를 따랐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다른 일행 분들을 위해서도 따로 묵을 곳을 마련하지요.”
“고맙군, 마켈린.”
3
차가운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산등성이, 검푸른 검불과 새하얀 눈이 어지러이 덮여 있는 그 능선 위에서 거대한 마수가 포효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거대한 피막의 날개와 30미터에 달하는 거체를 지닌 파충류형 몬스터, 드레이크였다. 날개는 이미 수십 개의 밧줄과 그물들이 엉켜 있는 상태, 전신에도 수십 개의 화살과 쇠뇌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그 주위를 쉰 명 정도의 드워프 무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단단한 근육에 두꺼운 무장을 갖추고 거대한 도끼며 망치를 든, 전사들이었다.
포효와 함께 드레이크가 입을 벌렸다. 순간 유황 냄새가 자욱하게 퍼지며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아아아악!
불길이 대지 위로 작열했다. 드워프 전사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브레스다! 방어를!”
붉은 불길이 채찍처럼 산 능선 위를 길게 후려갈겼다. 불꽃의 벽이 피어오르며 후끈한 열기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기 시작한다. 몰아쳐 오는 불길을 향해 드워프 전사들이 일제히 방패를 내세워 자신을 보호했다. 뒤에서 두 명의 드워프가 손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알 포트시여! 당신의 가호를 내리시어 화염 속에서 무사케 하소서!”
무쇠를 연상케 하는 회색빛의 성광이 주위를 뒤덮으며 드워프 전사들에게 열에 대한 내성을 올리는 신성 가호를 내렸다. 원래도 드워프들은 열기에 대해 저항력이 강하다. 거기에 신관의 가호가 깃드니 다들 화염 속에서도 용케 몸을 보전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비장의 무기가 통용되지 않자 드레이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틈에 드워프 전사들이 저마다 석궁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또다시 수십 발의 쿼렐이 드레이크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갔다. 대다수는 두꺼운 비늘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지만, 비늘 사이의 틈에 박히는 화살도 꽤 많다. 고통으로 분노하며 드레이크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카아아악!
닥치는 대로 괴성을 터트리며 꼬리를 연거푸 휘두르고 앞발을 정신없이 내려친다. 드워프 전사들이 재주껏 피하며 반격을 시작했다. 저 거대한 드레이크의 사방으로 달려들며 도끼를 휘두르고 망치를 내려친다. 몇몇 드워프들이 꼬리며 앞발에 치여 날아가기도 했지만 비명을 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쓰러져서도 얕은 신음만 흘릴 뿐, 두 눈 가득 전의를 태우며 다시 몸을 일으킨다.
전설 속의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드레이크는 한 개체만으로도 일개 인간 영지쯤은 가볍게 짓밟을 수 있는 강력한 마물이다. 어지간히 이름난 기사단이라 해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쉰 명가량의 드워프 전사들은 그런 마물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치고 빠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드워프 전사들이 드레이크의 기력을 어느 정도 빼 놓은 후였다. 드워프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지금일세, 카다마이트!”
“알겠소!”
우렁찬 목소리로 대꾸하며 드워프 전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거대한 도끼 창을 양손에 단단히 쥔 채, 카다마이트라 불린 드워프는 발 한번 구른 것만으로 거의 20미터 가까운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드레이크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드워프의 저 짧은 다리로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공한 스피드였다.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기합을 터트렸다.
“으랏타!”
도끼 창의 칼날이 검붉은 광채를 내뿜으며 찬란하게 빛났다. 그대로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휘둘렀다. 검붉은 오러가 거대한 빛의 칼날이 되어 드레이크의 어깻죽지를 그대로 갈랐다. 거대한 날개가 단숨에 뚝 끊어지며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카아아아아!
지독한 고통으로 드레이크가 비명을 토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재차 착지한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역수로 쥔 채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오오오오오!”
순간적으로 그의 전신에서 적갈색 오러가 폭발하며 부풀어 올랐다. 대지의 기운과 자신을 공명시켜 순간적으로 근력을 늘리는 드워프 전사들의 수법, 그것을 오러에 응용해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전신의 오러양을 열 배 가까이 증폭시킨 카다마이트가 우렁찬 외침을 터트리며 도끼 창을 내던졌다.
“가라! 할트론!”
웅웅웅웅!
적갈색 오러의 포탄이 드레이크의 몸통에 정확히 꽂혔다. 강철 같은 비늘을 간단히 가르고 두꺼운 근육도 가볍게 파헤치며 무시무시한 폭발을 자아낸다. 폭음이 진동하며 드레이크의 피와 살점이 허공 가득 나부꼈다.
카다마이트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그의 도끼 창, 할트론이 저절로 뽑히며 재차 그의 손아귀로 날아와 잡힌다. 전투 자세를 잡는 카다마이트를 보며 함께 싸우던 인간 검사, 러스는 혀를 내둘렀다.
‘굉장하군…….’
카다마이트의 전투는 이미 몇 번이나 곁에서 보아 왔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러스였다.
올해로 백쉰 살이 갓 넘은 카다마이트는 드워프 중에서도 상당히 젊은 축에 끼는 전사였다. 그리고 그랜드 포지에서도 세 명밖에 없다는 오러 능력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처음 카다마이트의 존재를 알았을 때, 그가 느낀 충격은 대단했다.
드워프 중에도 오러 능력자가 있었다니?
오러 능력이란 것은 야만적인 존재가 본능만으로 일깨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오랜 세대 동안 갈고닦은, 세련되고 전문화된 전투 기술의 궁극이 바로 오러다. 그저 야만성만으로 난폭하게 날뛰는 오크 검투사는, 비록 강력한 무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오러에 눈을 뜰 수가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것도 수십 세대에 걸쳐 최선의 방식이 구축된 무술에 대한 문화가 없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러 능력자인 것이다.
물론, 러스도 레펜하르트를 보고 스스로 오러를 각성하기는 했다. 그러니 저 카다마이트가 러스 급의 천재라 인간 오러 유저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오러를 각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결코 그것은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본 드워프 오러 유저의 힘은 러스가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짧은 신체 조건에도 불구, 카다마이트는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사지가 짧은 대신 기술 변화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강맹하다. 다리가 짧다는 것은 신체 중심이 안정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 보니 기술과 기술 사이의 허점이 거의 없고 자세가 조금 흐트러져도 금방 원상 복귀된다. 물론 인간에 비해 리치가 짧다는 단점도 있지만 오러 유저쯤 되면 그 단점도 사라진다. 오러를 길게 늘이면 되는 문제니까. 솔직히 지금의 러스로는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인간 오러 유저는 구현할 수 없는 오러 운용법, 순간적으로 엄청난 위력을 내는 저 증폭 방식은 심지어 레펜하르트라 할지라도 막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모든 면이 인간과는 별개의, 드워프의 신체에 최적화된 기술이고 움직임이었다. 당장 저 오러 증폭만 해도 러스는 보고 바로 이해했을지언정,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카다마이트가 쓰는 오러의 용법은 인간의 몸으로는 구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드워프만의, 드워프에 의한 오러 용법,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드워프들도 오러 능력자를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지녔다는 의미.
‘형님의 말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건가…….’
그랜드 포지의 위용, 눈앞의 드워프 오러 유저의 존재,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이 험한 오지 속에서도 살아가는 자유로운 드워프들의 모습.
모든 것이 러스의 상식을 깨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붕괴되고 혼란스러운 지식이 머릿속을 차지한다.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러스에게 카다마이트의 일침이 떨어졌다.
“이보게, 러스 경! 뭐 하고 있나?”
“아…….”
한창 전투 중에 또 딴생각을 해 버렸다. 러스는 혀를 차며 검을 들고 몸을 날렸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를 내뿜으며 러스는 상처 입은 드레이크의 반대편으로 날아올랐다.
“허업!”
푸른 오러가 길게 늘어지며 예리한 칼날의 채찍이 된다. 그렇게 10여 미터의 거리를 격한 채 러스는 드레이크를 연신 후려갈겼다. 이제 오러를 늘리며 위력을 유지하는 용법도 꽤나 익숙해져서 이 정도 길이로 늘려도 오러의 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콰콰콰쾅!
오러의 채찍이 드레이크를 후려갈길 때마다 폭음이 울려 퍼졌다. 비늘이 베이고 살점이 깎이며 드레이크가 미친 듯이 허공에 불길을 뿜어 댔다.
화아아아악!
불길이 러스를 노리고 어지러이 허공을 붉게 물들인다. 하지만 러스는 마치 나비처럼 우아한 움직임으로 모든 불길을 피해 냈다. 동시에 다시금 검을 휘둘러 블레이드 오러를 쏘아 냈다.
“세븐 슈레더Seven shredder!”
날카로운 외침을 터트리며 러스는 연거푸 검을 휘둘러 일곱 개의 오러의 칼날을 형성, 그것을 드레이크에게 쏘았다. 초승달 모양의 오러가 부메랑처럼 허공을 회선하며 드레이크의 전신을 강타했다. 하지만 이번엔 폭음이 없었다. 두꺼운 드레이크의 비늘이 모든 공격을 튕겨 낸 것이다.
“쳇!”
러스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이건 아직 무린가…….’
일곱 개의 오러 칼날을 만들어 쏘아 내는 이 기술은 러스가 레펜하르트의 기격탄을 보며 직접 만들어 낸 것이었다. 기술명을 붙이는 쪽이 이미지도 잡기 쉽고 능숙해질 수 있다는 레펜하르트의 조언에 세븐 슈레더라는 이름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