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북北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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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희미한 바퀴 소리가 들려온다. 아득한 감각 너머로 몸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러스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전신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얼마나 자고 있었기에 이렇게 몸이 찌뿌둥한 거지? 게다가 여기는? 흔들리는 감각으로 보아 아무래도 마차 안인 것 같은데.
‘왜 내가 이런 데에 누워 있는 거지?’
의아해하며 러스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복부에 맹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아!”
탄식이 새어 나왔다. 흐릿했던 기억 속에 한껏 일그러진 그의 이복형, 유서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모든 기억이 물 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오러를 각성한 순간, 모두의 경외 어린 눈동자, 한껏 고무된 자신, 그리고 배 속 깊숙이 느껴지던 유서스의 칼날, 그리고 아득한 추락감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검푸른 강물…….
기억났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손끝이 떨렸다.
‘유서스 형님…….’
러스는 머리를 감쌌다. 분노보다도 허탈감이 먼저 느껴졌다.
유서스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느껴지는 그 경멸의 눈빛에 이를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주 증오하기에 유서스는 너무도 위대한 기사였다.
기사 중의 기사, 무시당하는 자신이 보아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품의 소유자. 그런 기사가 자신의 형제라는 걸 듣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던가? 그리고 자신이 그 자랑스러운 형의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지 못함을 얼마나 부끄러워했던가?
저토록 위대한 기사의 눈에 자신 같은 일개 기사가 형제로서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인정하지 않는 것도, 경멸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당연하다 여겼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이 한 명의 기사로 오롯이 선다면, 테네스의 검에 부끄럽지 않은 힘을 얻는다면 결국은 유서스라도 자신을 인정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조급해져 대열을 이탈하고 명령을 어기는 행위도 잦았다. 그 때문에 더더욱 미움받는 처지가 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조급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오러에 눈을 떴다. 드디어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 이제야 유서스와 동등한 형제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유서스 역시 기뻐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테네스의 검다운, 그의 형제다운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어…….’
러스는 한숨을 쉬며 마차 천장을 바라보았다. 미몽에서 깨어나니 차가운 진실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의 형제는 러스가 생각했던 기사 중의 기사가 아니었다.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워지자 피를 나눈 형제를 가차 없이 찌르는, 권력에 찌든 평범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그런 남자를 위대한 기사라 믿고, 오로지 그의 인정만을 받고자 달려온 자신이 미칠 듯이 우스꽝스러웠다.
“큭큭큭…….”
허무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덜컹!
마차가 멈췄다. 갑자기 밝은 햇살이 비치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누군가가 마차 휘장을 걷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러스는 흠칫 놀랐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붉은 장발의 머리에 여자애처럼 곱상하기 짝이 없는 외모. 바로 그 ‘오러 도둑놈’의 동료로 잡혀 왔던 그 소년이다.
“아, 레펜 씨! 이 기사분 깨어났어요!”
☆ ☆ ☆
마차 밖으로 나온 러스는 당황하며 레펜하르트 일행을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그를 보더니 태연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깨어났군. 몸은 좀 어떤가?”
“으음…….”
러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실란을 보았을 때 대충 짐작은 했지만 정작 레펜하르트를 다시 보니 역시 당혹스러웠다. 저 오러 능력자는 테네스 백작가의 적이 아닌가?
“나를 구한 것이…… 당신들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러스가 물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다 죽어 가는 채로 강물에 떠내려오기에 건져서 살려 놨지.”
아무래도 이들이 자신을 살린 것이 맞는 것 같다.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러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
“그런 대체 여기는?”
사방이 평야였다. 아무리 봐도 산악 지대였던 켈베른 자작령으론 보이지 않는다. 구해 준 것은 그렇다 치고, 왜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건가?
의심 섞인 무뚝뚝한 러스의 표정에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었다.
“여기는 베이드 남작령, 내가 켈베른 성에서 난리 피운지도 벌써 사흘이나 지났지. 딱히 여정이 급한 것도 아니니, 원래대로라면 자네가 깨어날 때까지 그냥 여관 같은 데서 묵으면서 치료하는 것이 좋았겠지만…….”
레펜하르트 일행은 영주의 성에서 대판 난리를 친 몸이다. 언제 수배령이 내려질지 모르니 자작령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을 버려두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우리 처지가 있는데 한 자리에 머물 수도 없고. 근처 신전 같은 데 맡길까도 생각해 봤지만 실란 말이 자네 상처가 워낙 위중해서 자신 정도 수준의 신관이 아니면 살리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고.”
이 변방의 시골 영지에 고위 성직자가 있을 리 없다. 만약 있다면 테네스 백작가를 따라온 에어리어스의 신관들 정도인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들은 실란에 비해 상당히 실력이 모자란 이들뿐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중직을 맡지 못했을 뿐, 실란은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엄청난 신성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실란이 겸연쩍어하며 겸양을 떨었다.
“에이, 러스 씨가 오러 유저라 그런 거예요. 보통 사람이 그 정도 상처를 입었다면 아무리 저라도 무리였죠.”
솔직히 러스 입장에서는 조금 웃기는 소리였다. 저 어려 보이는 소년이 성직자로서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다고 자신이 아니면 무리일 거란 소릴 하다니?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다. 저들이 만약 켈베른 자작령 내의 신전에 자신을 맡겼다면 유서스의 눈을 피하지 못했을 테니까.
‘유서스…….’
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절로 살기가 피어오르며 이빨 사이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난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뭐, 생색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일단은 우리가 그쪽을 구해 줬거든? 고맙다는 소리까진 들을 생각 없지만 이렇게 딱딱하게 나올 필요도 없지 않나?”
“아…….”
그제야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레펜하르트가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기껏 부상자 생각해서 마차까지 구입해서 이동했구먼.”
러스는 조금 놀란 눈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저들은 원래 마차로 이동하질 않았었다. 그냥 구해 줬어도 고마울 지경인데, 그를 위해 특별히 말과 마차까지 구입했단 말인가? 말과 마차를 구입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았을 텐데, 그냥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적인 자신을 위해…….
기분이 묘하다. 피를 나눈 형제는 기습을 해 가며 그를 죽이려 했는데, 검을 나눈 적은 돈까지 써 가며 그를 구했다.
어색한 감정이 가슴속을 치밀어 오른다. 살아오며 이토록 호의를 느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솔직히, 굉장히 감동스럽다…….
굳은 얼굴로 러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구명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름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한다고는 했는데,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영 딱딱하다.
‘끄응,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러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원체 미움만 받고 살던 처지다 보니 뭐, 남에게 감사를 할 일이 있어야지? 그렇다 보니 영 무뚝뚝한 어조가 나와 버렸다.
다행히 레펜하르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리를 긁으며 그가 슬쩍 실란을 가리켰다.
“쟤가 좀 착해서. 돈 낸 건 쟤니까 쟤한테 감사하라고.”
실제로 그는 마차 구입에 땡전 한 푼 안 보탰다. (보탤 돈도 없고.)
“그나저나 정신이 들었으니 가문으로 돌아가야겠지? 여비 좀 보태 줄까?”
자기 돈도 아니면서 제대로 생색을 내는 레펜하르트였다. 뭐, 실란 성격에 반대할 리는 없다. 게다가…….
‘여기서 미래의 검성한테 신세 지워 놓으면 나중에 좋은 일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타시드의 원수라지만 그것은 전생의 일, 이번 생애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여기서 호의 베풀어 놓아서 손해 볼 일은 절대 없다!
‘무려 생명의 은인인데, 최소 적이 되어도 전생에서처럼 막 덤비지는 않겠지.’
그러자 러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러스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신이 테네스 가문의 사생아라는 것, 유서스와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오러를 각성한 그를 유서스가 찌른 일까지.
이미 유서스에 대한 경외심 따윈 내다 버린 러스였다. 머리가 맑아지니 이후 유서스가 취했을 행동도 익히 짐작이 간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가문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겁니다. 아마도 후계자를 암습한 배신자가 되어 있겠죠.”
“흐음.”
레펜하르트는 턱 끝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검성 사이러스에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비슷한 건 있었다. 안타레스 제국 시절 사이러스에 대한 정보도 상세히 조사했었던 그다. 젊은 시절의 일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분명 오러를 각성한 뒤, 원래 후계자였던 형과 정식으로 결투를 벌여 가문을 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워낙 존재감이 없어 그 정보에조차 유서스의 이름은 없었다. 그만큼 유서스는 잊힌 자였던 것이다.
‘내가 끼어들어서 또 역사가 바뀌었나 보네.’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자신이 사이러스의 신세를 망쳐 버린 것 같아 묘하게 통쾌하기도 하고, 죄책감도 든다.
하여튼, 이대로라면 러스의 인생도 꽤나 꼬였다. 뭐, 살려 준 것도 감지덕지인데 그 이후까지 레펜하르트가 책임감을 느낄 이유는 없겠지만.
침울해져 있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어찌할 텐가?”
러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린 겨울 하늘 위론 한 점 구름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명하다.
‘어찌해야 하는가?’
가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인생의 목적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붕 떠 버렸다.
혼란스럽다. 머릿속이 헝클어져 상념이 제멋대로 날뛴다.
유서스는 그가 상상했던 이상적인 기사가 아니었다. 그를 아껴 주었던 아버지조차도 지금 와서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아들이라서 사랑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오러를 각성할 만한 인재였기에 사랑한 것인가?
러스는 애써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은…… 가문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가 테네스 백작가로 돌아가 봤자 배신자 취급을 당할 뿐이다. 적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확고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기사는 검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
조금씩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확고한 무위를 지닌 검사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오러 능력자가 되어 돌아간다면 테네스 백작가라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경지에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득 러스의 눈에 레펜하르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보다 훨씬 앞을 걷고 있는 강력한 무인, 난생 처음 만난 진정한 오러 능력자, 그에게 진실된 오러의 길을 알려 준 남자.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구해 준 자…….’
러스는 결심했다.
☆ ☆ ☆
사실 레펜하르트의 질문은 그냥 이야기 흐름상 던져 본 말이었다. 딱히 러스의 차후 계획이 궁금해서라거나 해 물어본 것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러스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넙죽 고개를 조아린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응?”
당황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러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 기사된 도리로 응당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하나 저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자, 이 한 몸 바치는 것 외에는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는데…….”
이거 생색을 너무 과하게 냈나?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러스를 내려다볼 때였다. 러스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빛냈다.
“그리고 제가 오러에 눈 뜨게 된 것은 모두 당신 덕분. 내 생애 최초로 보는 강자, 그의 뒤를 따르며 더더욱 내 기량을 갈고닦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도 갚고, 따라다니면서 무술 기량도 훔치고 싶다는 소리다. 레펜하르트는 멍한 눈으로 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레펜하르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확고함이 깃들어 있어, 신중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권왕 제라드의 후계자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날? 전공도 다르잖아?”
칼 쓰는 놈이 주먹 쓰는 놈 따라다니면서 배울 게 뭐가 있다고? 레펜하르트의 의문은 타당했다. 하지만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라 오러 능력, 그 자체니까요.”
실제로 검사인 러스는 권사인 레펜하르트를 보며 오러를 각성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납득은 가는 이야기다.
“그, 그래도 너도 오러 능력자잖아? 그럼 혼자서 잘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운 좋게 오러를 일깨웠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으음…….”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러스의 상황은 이해가 갔다. 오러에 각성했다고 전부가 아니다. 각성한 오러를 갈고닦으려면 그에 걸맞은 용법을 익히는 것이 필수다. 레펜하르트 같은 경우도 오러를 각성하고도 2년 넘게 제라드 밑에서 수행을 하지 않았던가?
원래대로라면 러스는 이대로 가문에 돌아간 뒤, 그라임 왕국의 오러 유저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얻어 기량을 높이게 된다. 온갖 가르침을 받고, 온갖 실전을 겪고, 그렇게 마흔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검성이란 칭호를 얻으며 대륙의 모든 검사들 중 우뚝 서는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배신자가 되어 죄인 취급을 받게 된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타국의 오러 유저를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홀로 세상을 떠돌며 기량을 높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 타국의 오러 유저란 게 나잖아?’
오러 유저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 생각해 보니 지금 러스의 입장에서 저렇게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야 마법사 출신이라 어색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강자를 만나 잠시 몸을 의탁하며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 일은 무인들 세계에서는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다.
러스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언젠가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 그러니 주군으로 모시진 못합니다. 그러나 제 검이 자리를 잡는 그날까지는 당신의 명에 따르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받아 주시길!”
강한 의지를 담아 외치는 러스를 레펜하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사이러스가…… 그 검성 사이러스가 나를 따른다?’
전생의 적, 타시드의 원수.
이것이 레펜하르트가 지닌 사이러스에 대한 감상이었다. 구하기는 했어도 그는 러스를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미래의 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라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모든 시간은 리셋되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적이 아군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것도 미래에 검성이 될 것이 확실한 천재적인 재능의 검사가 말이지?’
생각해 보니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 이대로 다른 놈들도 꼬셔 버릴까?’
그저 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전생의 적들도 이쪽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잠깐 혹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무리였다. 일단 용사 알렉스와 성녀 엘린은 나이상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태어났어도 갓난아기다. 그럼 남는 건 테스론이랑 사이러스, 빛의 마도사 제이드뿐인데, 지금 그의 육체가 권왕 테스론의 것이니 얘는 이미 제외.
‘제이드, 그놈은 너무 음흉해서 줘도 가지기 싫고.’
타시드까진 그렇다 치고 시리스를 죽인 놈이랑 한 편이 되긴 싫다! 논리라고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감정이란 게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제이드는 빛의 마도사라고 불리긴 했지만 상당히 음흉한 놈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칭호와 달리 뒷구멍으로는 온갖 더러운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잠시 딴생각을 하자 러스가 불안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검을 완성하는 그날까지만 충성하겠다는 것이 기분 나빴던 걸까?’
생각해 보면 저 말, 빼먹을 거 다 빼먹으면 바로 등 돌리겠다는 소리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테네스 가문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주군으로 모실 수는 없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그렇게 러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데, 레펜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뭐, 충성이랄 것까진 없고 그냥 동료로서 함께 다니는 것이라면 나도 좋은데.”
러스가 화색이 되어 일어났다. 이걸로 그는 받아들여졌다. 저 강력한 오러 능력자에게! 앞으로 그를 따르며 그의 모든 것을 흡수할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한 사람의 오러 유저, 진정한 초인이 되어 가문으로 돌아가리라!
레펜하르트의 손을 마주잡으며 러스가 감격해 물었다.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저기…… 지금 몇 살인데?”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당당히 대답하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왜 저러나 러스가 의아해하는데,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딴청을 피우더니 작게 뇌까렸다.
“……나, 아직 스물셋인데.”
“에에엑!”
러스는 경악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 덩치, 저 얼굴로 고작 스물셋이라고? 하지만 잘 보니 정말 얼굴이 앳되다. 워낙 몸이 좋아 미처 못 느꼈는데 얼굴을 보니 확실히 20대의 청년이었다. 로브로 몸을 가리고 얼굴만 보았다면 오해하지 않을 정도다.
‘왜 이제까지 몰랐지?’
레펜하르트가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턱을 매만진다.
“내가 그렇게 노안인가?”
“그보단 분위기가……. 묘하게 나이 든 사람처럼 느껴져서…….”
더듬거리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하긴, 머릿속이 50대이니 그렇게 느껴질 만도 하겠다. 이 시간대로 회귀하며 많이 젊은이처럼 사고방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러스가 난처해하더니 물었다.
“그럼 레펜하르트 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좀 이상하잖아?”
비록 러스가 충성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레펜하르트의 종이 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가문으로 돌아갈 입장에, 그런 식의 칭호는 역시 부담스럽다.
“그럼 스승님? 사부님?”
“그건 더 이상하다, 야.”
둘 다 당혹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처 레펜하르트는 생각 못 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전생에서 사이러스가 대륙에서 최연소 오러 능력자로 알려진 이유였다.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은 대대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면 오러를 각성한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테스론이나 제라드가 최연소 오러 능력자로 알려져야 하리라.
하지만 신장 2미터가 넘는 그들을 아무도 제 나이 때로 봐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역대 계승자들도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하지 않았다. 자고로 남자들 세계에서 나이 어리면 깔보는 것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러스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앞서 길을 걷는 선배 무인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기야, 액면가로 보나 정신연령으로 보나 어색하지 않기는 하지. 머리를 사정없이 벅벅 긁다가 레펜하르트도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편할 대로 해, 그러면.”
“네, 형님.”
그렇게 러스가 함께 하기로 결정되자, 다른 이들도 자기소개를 했다.
“아, 저는 실란. 필라넨스를 섬기는 성직자예요.”
“잘 부탁한다, 실란.”
“시리스입니다.”
“틸라입니다.”
“음, 둘 다 형님의 노예인가 보군.”
“둘 다 내 동료다. 노예 따위가 아니야!”
“……네?”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러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 당장 설명해 줄 일도 아니고 해서 레펜하르트는 일단 넘어갔다.
마차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마차를 타라고 실란이 권했지만, 러스는 몸을 회복시키려면 좀 움직여 주는 게 좋다며 레펜하르트 곁으로 가 걷기 시작했다. 대신 시리스와 틸라를 마차에 태운 뒤 그들은 다시 가도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던 중,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아, 러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너네, 대체 엘류시온 유적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냐?”
“글쎄요? 저는 말단 기사였는지라 그런 건 잘…….”
☆ ☆ ☆
그라임 왕국 수도, 템페라드.
인구 십만에 달하는 대륙 서부 최대의 도시인 이곳은 지금 한 가지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명성 높은 황금기사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은의 시대 유적,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이 쟁취한 고대의 유물들은 그 가치를 금은으로 바꾸면 마차 열 대를 가득 메울 정도라고 했다.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테네스 백작가를 귀족들은 모두 시기했고, 평민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술집이며 거리마다 그들이 겪은 모험담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읊어지고 골목마다 아이들이 검에 노란 칠을 한 채 ‘황금기사의 검을 받아라!’라며 칼싸움을 하고 놀곤 했다.
물론 켈베른 성에서 있었던 일, 유서스의 패배와 러스가 그를 암습한 일 등은 철저히 비밀로 붙여졌다. 뭐, 비밀로 해 봤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정보지만 일반 시민들은 알 수 없는 것, 그들은 그저 열심히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찬양하고 또 찬양할 뿐이다.
덕분에 가문 내 유서스의 평가는 여전했다. 레펜하르트에게 패했다 해서 그것이 누가 되지도 않았다. 엄청난 수입을 거두어 가문의 재력이 한층 두터워졌으니 가문의 원로들도 모두 흡족해했다. 상대가 무려 권왕 제라드의 제자인 만큼 그의 패배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검 쥔 자로서 어찌 승리만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번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더욱 정진하시라며 흘러 넘겼을 뿐이다.
러스의 사건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테네스 가문이 오러 유저를 배출할 수 있었을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선 다들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유서스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들 그런 승냥이 같은 놈에게 그런 재능을 내린 신을 원망하며 유서스를 위로했다. 그저 가주인 테네스 백작, 폴트만이 러스의 이야기를 듣고 한탄하다 등을 돌렸을 뿐이었다.
모든 면에서 유서스는 현재 왕도의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왕도의 영웅’은 지금, 자신의 침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실망이군요.”
나직한, 하지만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귓전을 찌른다. 유서스는 더욱 죄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그의 눈에 반투명한 두 발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은의 현자시여. 제가 미욱한 탓에 명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유서스 앞에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청년의 환영이 허공에 투영되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달 전, 유서스에게 엘류시온의 정보를 알려 주었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니 저만을 벌하시고 부디 가문에는…….”
유서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그가 부복해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침실이었다. 연무장보다도 오히려 더 엄중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곳에조차 마음대로 환영을 보낼 수 있다니, 은의 현자가 지닌 권능에 대한 감탄과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공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저 마법이 걸린 수정구를 통해 서로의 모습과 음성을 확인하는 것이 현재 마법학이 지닌 한계, 그조차도 쌍방에 궁정 마도사급의 강력한 마도사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강력한 은의 시대 유물을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름 유적 탐사에 잔뼈가 굵은 유서스조차도 접하지 못했던 고도의 아티팩트를.
사소한 환영 하나만으로도 은의 현자란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 유서스는 더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청년의 환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정보가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무리한 임무를 내렸던가요?”
“죄송합니다…….”
“아니면 그라임의 황금기사가 고작 이 정도 인물이었을 뿐인 겁니까?”
연이은 비아냥에 유서스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진다. 아무리 은의 현자라지만 자신 역시 이름 높은 기사다. 이렇게까지 오만하게 굴 입장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감히 화를 낼 수는 없다. 상대는 테네스 백작가쯤은 간단히 짓밟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
“이대로라면 테네스 가문의 앞날도 순탄치는 못하겠군요.”
“제, 제발 용서를!”
청년의 환영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거만한 태도를 한껏 과시한 뒤, 환영이 사라졌다. 유서스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독한 불안감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이를 갈았다.
“젠장!”
2
검은 방, 창문이라곤 하나 없는 사방이 막힌 장소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유서스의 앞에 환영으로 나타난 바로 그 검은 머리 청년이었다. 청년은 인상을 구기며 발치에서 커다란 수정 하나를 주웠다. 이것은 팬텀 일루저니티, 미리 지정한 곳으로 언제든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은의 시대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크윽!”
청년은 신경질을 내며 수정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결국 실패했나.”
유서스야 청년의 신출귀몰함에 경악했겠지만, 사실 청년이라고 그리 쉽게 모든 일을 처리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팬텀 일루저니티가 아티팩트급 은의 시대 유물이라지만, 아무 곳에나 척척 환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시전자가 가 본 적은 있어야 거기에 환영을 보내는 것이다.
뭐, 기억 속의 장소라면 어디든지 환영을 보낼 수 있으니 역시 기적적인 권능이긴 하다. 하지만 청년이 무슨 유서스의 마누라도 아닌데 침실까지 가 볼 일이 어디 있었겠나? 덕분에 몰래 침실에 숨어들어 가 그 장소를 기억하느라 야밤에 담까지 탔다. 훈련장에 나타난 것도 사실은 세 시간이나 미리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막 나타난 척 쇼를 한 것이었다.
“신비한 척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인지라…….”
신출귀몰해 보이려면 참으로 보이지 않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백조가 우아해 보여도 수면 아래론 죽어라 물장구치고 있다는 소리가 있던가? 청년은 실로 그 백조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하여튼 반쪽짜리 마검사를 믿는 것이 아니었어. 이러니 황금기사가 검성에게 밀려서 싹 잊혔지.”
툴툴대며 청년은 방을 나섰다. 은의 현자답게 ‘폼’을 내느라 뒤로 그 고생을 하고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으니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훔친 괴한의 정체를 청년은 잘 알고 있었다. 덩치 좋고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놀라운 근육질의 육체를 지닌 권왕 제라드의 후계자.
청년의 인상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마왕 레펜하르트!’
방 밖은 근사한 귀족가 저택이었다. 3층으로 되어 수십 개의 방이 나열된, 적어도 공작이나 후작 정도에게나 허락된 거대한 저택이다. 방을 나선 청년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하녀 하나가 그를 보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테스론 님, 이라나드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뒤 청년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곧 가겠다고 전해 주시오.”
☆ ☆ ☆
방을 들어서며 테스론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테이블에 앉아 있던 푸근한 인상의 중년의 사내가 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테스론 군.”
테스론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사내, 이라나드 공작 앞에 가 앉았다.
이라나드 공작. 그라임 왕국 최대의 재력과 권력을 지닌 귀족이자 왕위 계승 서열 7위이기도 한 그는 현재 그라임 왕국 최강의 오러 능력자이기도 했다. 그 덕인지 6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년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명실공이 국왕을 제외한 그라임 왕국의 제 2인자가 바로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의 정체인 것이다.
이라나드 공작이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손짓을 했다. 하인들을 모두 물리라는 의미였다. 잠시 후 그가 테스론을 바라보더니 눈빛을 가라앉혔다.
“현자 레스틴이여.”
테스론이 속으로 혀를 찼다. 칭호가 바뀐 것을 보니 이라나드 공작이 왜 그를 불렀는지 바로 짐작이 갔다.
‘하긴, 모를 리가 없지.’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그가 대답했다.
“예, 현자 아펙투스.”
이라나드 공작이 인상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성표를 사용했는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테스론을 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확실히 놀라운 인물이다. 현자 레스틴. 역사상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자는 없었지. 심지어 그대는 마법의 경지 역시 낮지 않아. 게다가 그대가 가진 예지의 힘은 실로 놀라워 인류를 수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 그리하여 나는 그대가 아직 어리고 경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의 현자로 추천했고, 우리는 그대를 받아들였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미래의 가치가 있다 판단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테스론이 엄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순간 이라나드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즉, 그대가 은의 현자가 된 이유는 현재의 기량이 아닌 미래의 가치에 있다는 것이다! 아직 그대는 은의 현자로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 알고 있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런 변명 없이 테스론은 순순히 사죄를 표했다.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원래의 푸근한 얼굴로 돌아왔다.
“물론 그대가 성표로 무슨 대단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니니 징계 같은 것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대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는 있겠지.”
“자중하겠습니다.”
순순한 테스론의 태도에 이라나드 공작이 다시 말투를 바꿨다.
“그럼 나가 보게, 테스론 군.”
“예, 공작님.”
방을 나설 때까지도 테스론은 순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닫자마자 그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굳은 얼굴로 테스론이 중얼거렸다.
“젠장…….”
겉으로는 잔뜩 엄포를 줬지만, 사실 지금의 테스론에게는 테네스 백작가에게 해를 끼칠 어떨 힘도 없었다. 괜히 그토록 신비해 보이려 발악한 것이 아니다. 테스론이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은의 현자의 일원이 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인류의 수호자.
대륙을 어둠 속에서 지배하는 비밀결사, 은의 현자.
분명 그 힘은 의심할 바 없이 한 나라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다.
단 문제는…….
‘내가 아직 여기서 최말단이란 말이지.’
초조했다. 미칠 정도로 초조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6년 전의 그날, 죽었다고 생각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그 충격을.
비참할 정도로 왜소한 소년으로 다시 깨어나고, 그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의 그 경악의 감정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신뢰했던, 강철과도 같던 자신의 육체는 더 이상 없다. 가진 것은 피골이 상접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수수깡 신체뿐.
지독한 상실감도 상실감이었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자신이 이 육체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육체의 진짜 소유자가 자신의 육체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테스론의 육체, 어린 레펜하르트는 그 당시 델피아의 마탑에서 한 마법사의 도제로 수행 중인 견습 마법사에 불과했다. 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반쯤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저 최악의 추측을 증명할 힘도 돈도 없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비록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을 다시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권왕 테스론, 한때 오러의 궁극에 달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가 익히고 있던 모든 깨달음을 총동원해, 이 허약한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다시 무인의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와중에 마법도 열심히 익혔다. 과연 마왕이라 불릴 정도의 대마도사다운 두뇌였다. 전생의 테스론은 그리 머리가 좋지 않았지만, 일단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차지하고 나니 그야말로 헛소리처럼만 보이던 모든 마법이 쏙쏙 이해가 되었다.
스무 살이 되는 해, 결국 테스론은 전생에서보다 조금 늦게 오러를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4서클에 입문해 정식 마법사의 자격도 획득했다.
세상을 나서자마자 최우선적으로 바실리 왕국 남부, 라키드 산맥으로 향했다. 악몽의 장소인 그의 사문, 짐 언브레이커블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라드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사부에 대한 공포는 이미 영혼에 각인되어 있어, 아무리 육체가 바뀌었다 해도 다시 만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대신 제라드가 물품을 구입하러 주로 들르던 인근 마을에서 정보를 얻었다.
그곳에서 확인했다. 제라드가 어린 자신을 가르치고 있음을. 게다가 이미 어린 자신을 테스론이 아닌 레펜하르트라고 부른다는 것까지.
악몽이었다. 마왕 레펜하르트는 틀림없이 이 시대에 부활했다. 권왕이라 불리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당장 처리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상대는 이미 오러를 각성해 그의 육체를 완벽히 다루고 있었다. 젊었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제일 잘 아는 것은 테스론 본인이었다. 아무리 오러를 각성했고 4서클까지 마법을 익혔다지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제라드의 도움을 얻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부 성격상, 제자의 영혼이 바뀌건 말건 몸만 튼튼하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
‘나 같아도 그랬을 테니까.’
지금이야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얻어서인지 잔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테스론이었지만, 원래 짐 언브레이커들의 역대 문도들은 대대로 성격이 비슷했다. 인간성을 결정짓는다는 유년기 내내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 10년간 살아 보라. 인간이 단순 무식해질 수밖에 없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냥도 대륙을 공포에 잠기게 만들었던 전율적인 마왕이었다. 그런 자가 이제 자신의 육체, 강철의 신체를 손에 넣었다. 솔직히 레펜하르트를 쓰러트린 것은 순전히 체력 싸움이었다. 동료들의 희생과 불굴의 육체로 장기전을 벌여 겨우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유일한 약점마저 보충해 버렸다.
완벽해져 버린 그를 세상의 그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다가올 악몽 같은 미래를 누가 막을 수 있느냔 말이다!
“막아야 해…….”
복도를 걸어가며 테스론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마법의 힘을 완전히 되찾기 전에 막아야 한다.”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마왕이더라도 내 대가리로 왕년의 마법을 되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본인 입으로 말하고 나니 참 뭔가 비참한 대사다. 하지만 테스론은 전생의 자신이 돌대가리였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바뀐 육체를 보고 절망한 자신처럼 레펜하르트 역시 바뀐 두뇌를 보며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 역시 이 부실한 육체로 오러를 각성하는 데 성공했다. 레펜하르트라고 그 반대의 일을 하지 못할 것이란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처사다. 그는 대륙 역사상, 고금 제일의 마법사라 불리던 존재였으니까.
‘그런 만큼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놓친 것은 뼈아프군.’
테스론은 혀를 찼다. 그는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전생의 그는 무식한 주먹패일 뿐이었다. 복잡한 마법 도구 따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테스론이 아는 정보는 엘류시온 유적에서 레펜하르트가 저 유물을 얻어서 그토록 젊은 나이에 대마도사가 되는 기량을 쌓았다는 것 정도다.
‘엘류시온의 목소리, 그리고 사방신의 유물. 분명 제이드는 그 은의 시대 아티팩트를 이용해 마왕이 저 정도의 힘을 얻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결코 그것들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겠다. 사방신의 유물이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는 물론 테스론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다. 마왕의 정보에 대해서는 지겹도록 보아 온 그였으니까.
‘어떻게든 사방신의 유물이란 건 미리 선수 쳐야 할 텐데.’
고민하며 테스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유적 탐사를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힘이 부족하고…….’
명색이 오러 유저였다. 게다가 마법 수행 역시 게을리하지 않아 슬슬 5서클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훌륭한 무력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엘류시온 정도의 초일급 유적을 탐사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전생의 기억으로 정보를 알고 있다고는 해도, 테스론은 현재 자신의 기량으로 엘류시온을 탐사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없었다. 굳이 유서스를 이용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물론 이 점은 현재의 레펜하르트 역시 마찬가지다. 유서스조차도 유적에 대한 정보를 숙지한 상태에서 기사단과 마법사, 성직자를 잔뜩 거느리고서야 겨우 엘류시온 탐사를 성공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지금 레펜하르트의 실력으로 혼자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것은 무리다.
문제는 테스론과 레펜하르트, 둘 사이의 유적 정보 수준이 상당히 차이 난다는 점이었다.
테스론은 레펜하르트가 마왕으로 불리지 않던 시절, 이미 이름난 유적 탐사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유적 탐사에 일가견이 있긴 했지만, 테스론이 아는 정보는 어디까지나 그 유적의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유적의 시스템 정보 자체를 숙지하고 있다. 시스템을 조작하고, 은밀히 숨겨진 백 도어를 이용한다면 현재 그의 무력으로도 어지간한 유적은 충분히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힘을 더 키워야 해. 지금은 레펜하르트는 고사하고 황금기사조차도 상대할 수 없다…….’
걸음을 옮기며 테스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세텔라드 산맥을 따라 놓여 있는 그라임 왕국 서부 가도, 사방이 평야인 그 도로를 통해 한 대의 마차가 덜컹덜컹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평범한 품질의 짐용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고, 붉은 장발의 소년이 마부석에 앉아 반쯤 졸면서 고삐를 잡고 있다. 소년의 좌우로는 엘프와 드워프 소녀가 사이좋게 앉아 뭔가 이야기를 나눈다. 마차 옆에서는 날렵한 체구의 검을 찬 청년 하나가 마차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을 찬 청년, 러스는 문득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슬슬 날씨가 풀리려는지 겨울바람도 그리 시리지 않았다. 러스가 마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형님은 저 안에서 뭘 하시는 걸까?’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 해도 매일 자신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 일행과 합류한 지 사흘이 지나도록 러스는 레펜하르트가 무술 연습을 하는 꼴을 단 한 번도 못 봤다!
사흘 내내 그들이 서부 가도를 따라 북상하는 동안 레펜하르트가 한 짓이라고는 아침 먹고 마차 안에 처박혔다가, 점심 먹고 마차 안에 처박히고, 저녁 먹은 뒤 또 마차 안에 처박히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뭐, 본인 말로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렇다는데, 대체 뭐 그리 생각할 게 많아서 하루 진종일 마차 안에 들어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무술적인 깨달음 얻겠다고 명상하는 건 아닐 테고.’
뭐, 세간에는 경지에 오른 무인은 정신적인 수련이 중요하지 육체 단련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기는 한다. 하지만 기사인 러스는 그게 얼마나 근거 없는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루 놀면 하루만큼 뒤처지는 것이 무술의 기량이다. 깨달음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지에 올랐으니까 만날 데굴거리면서 놀아도 정신적으로 강해져서 기량이 쑥쑥 오른다? 그렇게 따지면 식물인간도 무신武神이 될 수 있겠지.
누가 뭐래도 무술을 발휘하는 기반은 육체다. 육체가 받쳐 주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완벽한 육체라도 매일같이 단련해 주지 않으면 조금씩 쇠퇴할 뿐이다.
레펜하르트 정도의 강자가 설마 저런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단련까지 빼먹어 가면서 왜 저러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해하기 힘든 건 첫날부터였지.’
지난 사흘간, 러스가 제일 당황했던 점은 시리스나 틸라를 대하는 레펜하르트의 태도였다. 문득 처음 노숙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서부 가도 근처 민가에서 구입한 식료로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나서였다. 러스가 막 그릇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엄한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
“네? 배도 꺼트릴 겸 검이나 좀 휘두르려 합니다만?”
그때 레펜하르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갈 때 가더라도 제비는 뽑고 가야지.”
“네?”
뭔 제비를 뽑나 했더니, 식사 후 설거지 등의 뒤처리를 할 사람 두 명을 제비로 뽑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러스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뒤처리를 노예들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혹시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기를 죽이려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1분 후, 적어도 그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짧은 제비를 뽑은 것은 러스뿐이 아니었으니까.
“쳇, 또 졌네.”
“오늘은 그릇 좀 뽀득뽀득 닦아요, 레펜 씨.”
“야, 실란. 왜 항상 넌 제비에 안 걸리는 거야 도대체? 수작 부리는 거 아냐, 혹시?”
“필라넨스께서 항상 저를 가호하신답니다. 으히히!”
“수상한데…….”
싱글거리며 실란과 시리스, 틸라가 노숙할 준비를 하러 가 버린다. 더러운 식기를 든 채 러스는 멍하니 서 있었다.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그의 등을 툭 쳤다.
“뭐해? 그릇 씻으러 가야지.”
그러고는 정말로 식기를 들고 가도변의 작은 개울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 웅장한 덩치로 쪼그려 앉아 그릇을 뽀득뽀득 씻는데, 보아하니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 괴이한 사태는 결코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물어봤다.
“왜 노예들을 놔두고 직접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형님?”
그때 대답이 이것이었다.
“세상은 저들을 노예라 취급하지만 난 결코 그러고 싶지 않다. 난 저들을 소중한 동료로 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이것이 거슬린다면 러스, 네가 나를 떠난다 해도 충분히 이해한다.”
덕분에 러스도 찍소리 못 하고 함께 식기를 닦아야 했다. 싫으면 떠나라는데 거기다 대고 뭔 말을 할 수 있겠나? 노예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전적으로 주인 마음이니 뭐라 할 수도 없다. 경지에 오른 무인들 중엔 꽤나 괴팍한 사람들이 많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참 마차를 바라보며 그때의 일을 떠올리다가, 러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레펜하르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 비록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엄연히 기사의 맹세였다. 그렇다면 레펜하르트가 어떤 인물이건 그는 충성을 바쳐야 했다. 맹세했던 대로, 자신의 검이 완전해지는 그날까지.
‘그날까지는 형님이 곧 나의 주군이다. 그렇다면 나는 형님의 뜻대로 따르면 될 뿐이야.’
속 편하게 생각을 정리한 뒤 러스는 허리의 검을 뽑았다. 칼날을 타고 푸른빛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그렇게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낸 채 러스는 마차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웅웅웅.
처음에는 일정하던 블레이드 오러가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흔들리며 불규칙적인 소음을 낸다. 역시 힘들다. 러스는 땀을 흘리며 계속 오러에 집중했다. 오러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것에는 재능이 크게 작용하지만, 오래토록 유지하는 데는 센스 따윈 필요 없다. 그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수련해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러스가 호흡을 고르며 한숨을 쉬었다.
‘사흘째 꾸준히 하고는 있는데. 쉽지 않구나, 이건.’
하지만 러스는 이내 표정을 폈다. 레펜하르트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이 정도로 엄살을 피울 수는 없었다.
레펜하르트는 러스를 받아들인 첫날 바로 오러를 균일하게 유지하는 용법에 대해 상세하게 전수해 주었다. 권과 검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이 오러 균일화 작업은 그냥 오러를 다루는 기본적인 수행 방식이라 러스에게도 충분히 통용이 되었다.
그때 러스가 얼마나 감동했던가? 물론 이 용법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기라기보다는 그냥 오러 유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비법이라 딱히 유파의 기술을 유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가르쳐 줘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러스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다. 만난 지 하루 만에 바로 기술을 전수해 준다는 것은 레펜하르트가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 가르침도 가르침이지만 그보다 상대가 보여 준 호의가 더더욱 감격스럽다.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에 항상 무시받으며, 기본적인 검술조차도 배우지 못해 곁눈질로 훔쳐 익혀야 했던 러스에게 이런 호의는 난생 처음이었다.
땀 흘리는 와중에도 러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자신을 받아 주었다. 자신을 믿고 은혜와 호의를 베풀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자신이 그를 따를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상관없잖아? 형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그나저나, 형님은 진짜 저 안에서 뭐 하는 거지?’
☆ ☆ ☆
러스의 생각과 달리 레펜하르트는 정말로 마차 안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명상을 하는 이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무술의 깨달음을 얻겠다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휘장이 드리워진 컴컴한 포장마차 안, 한참 동안이나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눈을 번쩍 뜨며 중얼거렸다.
“후우…… 대충 다시 마력이 찼으니 또 시도해 볼까.”
레펜하르트가 발치에 놓인 검은 상자를 건드렸다. 은의 시대 아티팩트, 엘류시온의 목소리였다. 그걸 손가락으로 누른 채 레펜하르트는 사흘간 지겹게 외운 시동어를 읊조렸다.
“스위치 온.”
정해진 언령이 들리자 엘류시온의 목소리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상자 여기저기가 점등하며 빛을 내더니 강렬한 마력장을 주위에 퍼트린다. 둥근 마력장이 레펜하르트를 통째로 삼키고 마차 안을 메운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언령을 외웠다.
“도전. 1단계. 초보자용.”
동시에 그의 눈앞을 환한 빛이 가득 메웠다. 분명 어두운 포장마차 안이었던 곳이 환한 빛으로 가득한 방이 된다.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이놈의 유사 현실도 슬슬 지겹네. 배경 좀 바꿀까.”
허공에 손가락을 가져가니 빛으로 된 콘솔이 저절로 떠오른다. 환영의 콘솔 위 버튼을 몇 번 누르자 갑자기 주위 환경이 변했다. 새하얀 방 대신 백사장이 펼쳐지고 푸른 파도가 철썩이는 해변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심지어는 얇은 천으로 아슬아슬한 곳만 간신히 가린 금발의 엘프 미녀들이 깔깔대며 백사장을 오가는 모습마저 보인다. 레펜하르트가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이왕이면 배경 화면도 눈요기가 되는 쪽이 좋잖아?”
레펜하르트는 이미 고대어를 해독해 저것이 은의 시대 여성들이 헤엄을 치기 위해 보편적으로 입는 복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성들이 저런 것만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다니, 은의 시대는 이 얼마나 축복받은 시대란 말인가!
어쨌든 눈요기나 하려고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가동한 것은 아니다. 레펜하르트는 백사장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이 해변은 마력으로 생성한 일종의 유사 현실, 그가 아무리 움직여 봤자 실제 그의 몸은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마차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잡고 안색을 굳혔다. 심호흡을 하며 긴장감을 높이더니, 허공에 손짓을 했다. 곧바로 해변 위 하늘에 고대어가 떠올랐다.
Welcome to Magical Beat!
그리고 요란한 음악과 함께 허공에서 형형색색의 판자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가 이를 악물며 양손을 휘저었다.
“바람이여, 탄환이 되어 적을 쳐라! 에어로 블렛!”
1서클 풍계 주문, 에어로 블렛이 허공으로 날아가 푸른 판자 하나에 명중한다. 판자가 허공에서 소멸하며 폭죽처럼 터졌다. 레펜하르트가 재차 마법을 시전했다.
“폭염이여, 응집하라! 파이어 애로우!”
화염의 화살이 날아가 붉은 판자에 적중한다. 붉은 판자도 똑같이 허공에서 터지며 불꽃을 피워 냈다. 레펜하르트는 연거푸 마법을 준비하고 곧바로 날렸다. 에어로 블렛, 화이어 애로우, 매직 미사일, 아쿠아 볼 등 모두가 1서클 초보 주문이었다. 그리고 그 주문들이 떨어지는 판자에 하나하나 적중한다. 적중할 때마다 불꽃이 터진다. 그때마다 쿵짝쿵짝 음악이 울려 퍼지며 리듬감을 더한다.
점점 판자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레펜하르트의 안색도 점점 굳어 간다. 점점 밀려오는 판자의 낙하 숫자를 마법의 시전 속도가 못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판자 하나가 백사장에 내리꽂히는 순간.
콰쾅!
폭발이 일어났다. 물론 유사 현실이므로 그 폭발이 레펜하르트에게 무슨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 신이시여!”
“이게 뭔가요!”
“제대로 좀 해 봐요!”
“당신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나요!”
그때마다 금발 엘프 미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고대어로 레펜하르트를 타박하고 있었다. 아무리 유사 현실인 줄은 알지만, 여자들이 입을 모아 바가지를 긁어대는데 남성 된 입장으로 참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고대어를 못 알아들으면 모르겠는데, 레펜하르트야 어학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 억양에 실린 비난의 기색까지 쏙쏙 다 이해가 된다.
“으이그!”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떨어지는 판자들을 마법으로 요격해 떨어트렸다. 벌써 판자를 세 개나 놓쳤다. 그리고 그때마다 엘프 미녀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