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파괴의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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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인은 평소보다 훨씬 긴장된 얼굴로 성벽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의 직장, 켈베른 성의 외성 경비 임무는 사실, 놀면서 봉급을 받는다 해도 좋을 정도의 한직이었다. 켈베른 자작령은 세텔라드 산맥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마물의 출현이 적었고 주변 영지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영주가 수탈을 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니 영지민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할 일도 없다. 누군가가 이 성을 쳐들어오는 경우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이다. 어젯밤 쳐들어왔던 그 정체불명의 도둑을 떠올리며 드레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함께 경비를 서던 병사, 칼탄이 그를 보며 물었다.
“왜 그래, 드레인? 감기라도 걸렸나?”
“아냐, 그냥 어제 일이 생각나서.”
“아, 하긴. 진짜 무서운 광경이었지.”
솔직히 말하면 둘 다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뭔가 먹구름 같은 것이 눈앞을 닥치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는 것 정도? (레펜하르트가 제일 먼저 기절시켰던 불운한 경비병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 후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성 안은 난장판이었다. 그 이름 높던 테네스 기사단이 단 한 명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더니 결국 황금기사까지 나서서야 겨우 수습이 된 것이다. 고작 한 명의 침입자 때문에.
체면을 구긴 켈베른 자작은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다. 다시 그 도둑이 나타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켈베른 영지의 힘만으로 붙잡아야 기사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다며 호통을 쳐 댔다.
덕분에 신 나게 깨진 경비대장 호테른도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서 지금 켈베른 성의 모든 수비 병력은 비번도 반납하고 엄중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는 켈베른 자작 본인도 갑옷 차림으로 일상 업무를 볼 정도였다.
“호테른 아저씨가 그렇게 화난 것 처음 봐.”
“나도, 나도.”
드레인과 칼탄은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눈알만 굴려 다른 이들을 살펴보았다. 아직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성벽 곳곳에는 오십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창칼을 들고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아주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칼날 같은 병사들의 속마음은 ‘우리의 불찰로 경계가 뚫렸으니 이 무슨 수치인가! 다시는 외적이 켈베른 성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라기보다는 ‘우리 이렇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요! 제발 감봉만은!’ 쪽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드레인이나 칼탄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간밤의 광경을 떠올리며 드레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켈베른 자작이야 병사들의 힘만으로 그 도둑을 잡겠다며 큰소리쳤지만…….
“아니, 맨손으로 갑옷이며 방패를 펑펑 구기는 작자를 우리 같은 일개 병사들이 정신 좀 차린다고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칼탄은 티 안 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더라…… 이건 뭐 숫제 괴물이던데?”
“듣자하니 이미 물건은 도둑맞았다던데. 그러면 그 도둑, 이대로 안 오는 것 아닐까?”
“아냐, 대신 오늘 아침에 유서스 경께서 그 도둑의 동료들을 잡아 왔잖아. 그러니 동료들을 구하러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으, 그냥 어젯밤처럼 깔끔하게 기절시켜 줬으면 좋겠다…….”
겉보기엔 투철한 경계 태세 중인 병사들, 하지만 오가는 대화는 이 모양이었다. 드레인과 칼탄뿐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싼 봉급 줘 가며 부리는 켈베른 자작이 들었다면 실로 복창 터질 일이었다.
그렇게 드레인과 칼탄이 군기 넘치는 모습으로 군기 빠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문득 칼탄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라?”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괴상한 감각이 피부를 찌른 것이다. 칼탄뿐 아니라 드레인도 같은 걸 느꼈는지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뭐지, 이 소름 끼치는 느낌은?”
둘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이 괴이한 감각을 느낀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성벽 위의 모든 병사들이 자신들처럼, 한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성문과 인접한 숲 가장자리, 그곳을 바라본 순간 칼탄이 멍한 신음을 흘렸다.
“아?”
한 남자가 숲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우람한 체구, 딱 벌어진 어깨 위로 황금색 빛무리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찌나 강렬한 빛이던지, 황금빛이 아니었다면 남자 몸에 불이라도 붙었다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드레인이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저거 오러야?”
말로만 들었던 오러 능력자다! 성벽 위의 모든 병사들이 그 순간 굳었다. 기이하다고 느낀 감각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위압감이었다.
황금빛 오러를 뿜어내며 남자가 성으로 걸어온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모습. 굳어 있던 병사 중 유별나게 용감한 이 하나가 겨우 위압감을 이겨 내고 남자에게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남자가 고개를 들어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대단하군. 일부러 과하게 기운을 썼는데.”
남자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때까지도 성 위의 병사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훈련받은 대로라면 활을 들어 상대를 겨누어야 하거늘,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심지어 시선을 돌릴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남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캘러미티 혼…….”
분명 나직한 음성이었는데도 어찌 이리도 똑똑히 들리는가. 드레인이 무심코 손에 든 창을 떨어트렸다.
탕…….
창이 바닥에 떨어져 쇳소리를 내고, 남자가 우렁찬 기합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하아압!”
황금의 오러가 물결치며 대기를 가른다. 강철 같은 육체가 한 자루 거창이 되어 돌격해 온다. 굳건한 주먹이 앞으로 뻗어지며 공간을 찢어 무수한 빛의 파문을 끌어낸다.
남자의 정권이 켈베른 성의 두꺼운 성문을 후려갈겼다.
콰아앙!
굉음이 울리며 그토록 두꺼운 성문이 단 일격에 박살이 났다. 무수한 파편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일렁이던 네 개의 황금빛 파문, 그것이 일제히 한 점으로 수렴되며 주위의 대기를 모조리 끌어당겼다. 가공할 충격파가 대지를 할퀴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발밑이 흔들렸다. 드워프들의 솜씨로 굳건하게 쌓아올려 천년이 지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던 성벽이 쩍쩍 금이 간다.
찰나의 정적, 뒤이어 뇌성이 울리며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우르르릉!
멀쩡하던 발밑이 흔들리는 경험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제야 비로소 병사들이 주저앉아 비명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 ☆ ☆
자욱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켈베른 성 일부가 구름으로 변한 것처럼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긴, 성벽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트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 위를 걸어 오르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좀 심했나?’
그래도 크게 다친 이는 없어 보였다. 비록 무식하기 그지없어 보였겠지만, 레펜하르트는 확실하게 경비들이 서 있지 않은 부분을 노려 캘러미티 혼을 날린 것이다.
감각권을 펼쳐 이미 확인해 보았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에 깔린 병사들은 확실히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흔들리는 성벽 위에 주저앉아 공포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성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거나 한 몇몇 병사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야 요양 좀 잘하면 금방 나을 것이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얼이 빠져 있겠지.’
이걸로 켈베른 자작령 내의 병사들은 처리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들 혼이 나가 있어 당분간은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원래 성벽을 통째로 날려 버려서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 수법은 레펜하르트가 전생에서도 매우 애용하던 짓이었다.
성벽이란 보통 건물과 다르다. 산이나 절벽처럼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매우 강한 건축물인 것이다. 보통 정상적인 감각을 지닌 인간이라면 눈앞에서 그런 성벽이 홀랑 날아가는데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다. 설사 자신에게 피해가 없더라도, 눈앞에서 그런 대규모 파괴가 일어나면 보통은 넋 놓고 있게 마련이다.
무기력해진 병사들을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는 켈베른 내성 쪽으로 걸어갔다. 내성 회랑을 통해 무장한 기사들 수십 명이 몰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네스 기사단이었다. 뒤이어 로브를 입은 무리와 법복 차림의 사내들도 우르르 몰려나왔다. 테네스 가문과 계약한 마법사와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의 성직자들이었다.
기사들이 노련한 움직임으로 레펜하르트를 둘러쌌다. 마법사와 성직자들도 저마다 원호를 위해 자리를 잡았다. 대열이 갖춰지자 기사 중 한 명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 뻔뻔한 악적! 잘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구나!”
간밤에는 복면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레펜하르트를 알아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제라드처럼 대륙 내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거구는 아니지만, 레펜하르트도 쉽게 보기 힘든 체구의 소유자다. 기사들 모두 이자가 간밤의 도둑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레펜하르트도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내 동료들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소만?”
느긋한 목소리였다. 기사, 렌토가 분노해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테네스 기사단을 무시하는 것이냐!”
저 간밤의 도둑은 테네스 기사단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동료를 구하러 온 주제에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대놓고 성벽을 날리고, 거기에 느긋하게 휘적휘적 걸어오다니?
‘얼마나 테네스 기사단을 우습게 보고 있기에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분노의 파도가 기사들 사이로 퍼져 갔다. 물론 상대가 오러 능력자라는 건 알고 있다. 성벽을 무너트리는 그 엄청난 위용에 솔직히 기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당할 만큼 테네스 기사단은 하찮은 이들이 아니다!
부단장, 로트 경이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테네스의 기사들이여! 저 오만한 자에게 그대들의 힘을 보여 주어라!”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절도 있는 자세, 기사단 전원이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마법사와 성직자들도 한 치의 빈틈없이 자리를 잡고 그 뒤를 지킨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로트 경이 외침을 이었다.
“어젯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젯밤과는 다르군.”
어제는 몰래 쳐들어간 것이다 보니 사실 테네스 기사단도 제대로 대응을 했다고 볼 수 없다. 힘든 유적 탐사를 끝내고 귀환할 일만 남아 다들 긴장이 풀어진 상태, 게다가 성내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악마와도 한차례 사투를 벌인 후였다. 설마 또다시 일이 터질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고, 그래서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레펜하르트를 상대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에 비해 지금의 테네스 기사단은 방심도 없고 한껏 집중한 상태, 100퍼센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로트 경이 저리 자신만만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른 건 그 역시 마찬가지. 자세를 취하며 레펜하르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어젯밤과는 좀 다를 거다.”
“렌토! 바라스! 나가라!”
“예! 부단장님!”
로트 경의 명령에 따라 두 기사가 방패를 앞세워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해 왔다. 방패 뒤로 검을 숨기고 밀어붙이는 중갑 기사의 특유의 실드 차징, 상대가 평범한 전사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레펜하르트에겐 통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선 채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달려오는 방패에 육중한 정권을 연거푸 날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기사 모두 방패를 들어 앞을 막았다.
콰쾅!
폭음이 두 번 울렸다. 두 기사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커억!”
“으억!”
어제와 달랐다. 방패로 막아도 소용없을 것이란 점은 예상했다. 방패째 날려 갈 것이란 것도 각오했다. 그래서 둘 다 날려 가는 즉시 땅을 굴러 다시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유적 탐사 도중 악마와 싸울 때 이런 일쯤은 비일비재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방패가 찌그러지며 강렬한 충격파가 전신을 타고 올라온다. 마치 맨몸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내장이 뒤틀리며 극심한 고통이 느껴진다.
“쿨럭!”
날아간 렌토와 바라스는 피를 토하며 땅 위를 나뒹굴었다. 단 일격, 그것도 방패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이 움직이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은 것이다.
예상 밖의 전개에 로트 경이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거두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도 한번 맛본 전법인데, 또 당하면 진짜 바보지.”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타격은 기본적으로 모든 공격에 오러의 파동을 실어 날린다. 그러면 설사 방어했다 해도 충격이 그대로 상대의 몸을 관통해, 방어구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다. 어젯밤에야 오러를 숨기느라 쓰지 못했다지만 지금은 부담 없이 구사할 수 있다.
“크윽! 셀피드! 라칸! 어네스토!”
로트 경이 다시 기사들을 돌진시켰다. 쓰러진 두 기사를 뒤로한 채 다른 기사 셋이 후속 공격에 나섰다.
“감히 렌토를!”
“이 악적!”
“죽어라!”
몰개성한 외침을 터트리며 기사들이 일제히 레펜하르트의 좌우, 후방을 노리고 검을 찔러 갔다. 이번에도 레펜하르트는 두 손을 휘둘러 공격을 일제히 걷어 냈다. 공격을 걷어 내며 동시에 오러가 실린 발차기를 찔러 넣어 기사들을 가격한다. 제대로 들어간 옆차기가 기사들을 또다시 나뒹굴게 만들었다.
“으어억!”
“커억!”
“아구구구!”
이번에도 세 기사 모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들 맥없이 공격을 허용한 것도 아니다. 평소처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교묘히 몸을 틀어 갑옷 두꺼운 부분으로 타격을 받아 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러 파동에 의한 충격파는 갑옷으로 막을 수가 없다.
“이, 이런…….”
로트 경은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방어구로 몸을 보호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테네스 기사단 특유의 전법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당황은 길지 않았다. 테네스 기사단은 수많은 악마들과 싸워 왔다. 이 정도로 물러설 만큼 약한 이들이 아니다!
금세 냉정을 되찾은 로트 경이 오른손을 들었다.
“신관들이여! 저들의 갑옷이 아닌 육체에 가호를!”
성직자들이 신성력을 짜내 기사들에게 가호를 퍼부었다. 갑옷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방어력 자체를 높이는 신성 주문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에어리어스여! 그대의 종에게 당신의 가호를 주시어 그 육체가 바위처럼 굳건히 서게 하소서!”
한껏 신체를 강화시킨 기사들이 일제히 덤벼 온다. 뒤이어 후열에 있던 마법사들도 일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동토의 칼날, 내 앞에 임하라! 아이스 볼트!”
“폭염, 내 손에 임해 적을 치는 시위가 되리! 프레임 애로우!
“라 필트 크렐 아소르, 전뇌의 폭풍, 불어올지니! 라이트닝 스톰!”
기사들의 공격 사이사이로 온갖 마법들이 폭풍처럼 날아들었다. 기사들의 공격뿐이면 그냥저냥 버티겠는데 사이사이에 마법이 날아드니 타이밍을 잡기가 영 애매하다. 휘둘러 오는 칼날들을 피하고, 가끔은 튕겨 내며 레펜하르트는 저 멀리 서 있는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순간 레펜하르트가 발을 구르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신장 190센티미터의 거구가 단숨에 기사들의 머리 위를 넘어가 마법사들 앞까지 쇄도해 간다. 당황한 마법사들이 뒷걸음질 치며 연거푸 주문을 외워 댔다.
“으헉! 라 틸트 델…….”
“동토의 바람이여…….”
수인을 맺으며 막 주문을 준비하는 마법사들 사이로 잽싸게 파고든다. 레펜하르트가 사방으로 연거푸 주먹을 뻗어 냈다.
“연환 기격탄!”
황금빛 오러가 연달아 날아가 마법사들의 다리를 정확히 가격했다. 주문이 모조리 깨지며 마법사들이 일제히 다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토해 냈다. 레펜하르트가 날린 기격탄이 그들의 다리를 몽땅 분질러 버린 것이다.
“아고고고!”
“내 다리!”
“저, 저런 악독한 놈!”
아파 죽겠다며 흙바닥을 뒹구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이렇지, 뭐.’
자신이 전생에 마법사였기에 마법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대마도사였던 그조차도 왕년에 어디 하나 부상당하면 집중력이 확 떨어져서 쓸 수 있는 마법이 극히 제한되었었다. 그런데 이들 같은 평범한 마법사들이 다리 부러지고도 멀쩡하게 주문을 외울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한둘쯤은 근성을 보일 줄 알았는데…….’
살짝 실망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쓰러진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신음만 흘리지, 통증을 이기고 주문을 외우는 이가 없었다. 한때 대마도사였던 그가 보기에 하나같이 한심한 이들 뿐이다.
‘쯧쯧, 그런 정신력으로 무슨 마법의 길을 걷겠다고…….’
한심한 후학들을 바라보는 선배의 기분이 이럴까 싶다.
‘아니, 이들이 내 선배구나, 따지고 보니.’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돌렸다. 분노에 차 달려오는 기사들이 보였다.
“마법사 폴른!”
“겔트! 피아른! 제길, 모두 쓰러졌나!”
다들 이를 갈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적은 순식간에 20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뛰어넘어 채 손쓸 틈도 없이 마법사들을 모조리 눕혀 버렸다. 마법 전력을 이토록 맥없이 잃다니, 테네스 기사단의 역사 속에서 결코 없었던 수치였다. 다들 분노로 가득 차 성난 들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자, 그럼 다음엔…….’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들의 분노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의 다음 목표는 기사들의 등 뒤로 보이는, 저 푸른 법복을 입은 이들이다.
‘성직자들도 처리해 볼까…….’
레펜하르트가 재차 몸을 날렸다. 또다시 그의 신형이 기사들의 머리 위를 타고 넘는다. 기사들 모두 닭 쫓던 개의 심정을 절실히 느끼며 이를 갈았다.
“젠장!”
오러 능력자와 일반 기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것이다. 신체 능력이 너무 심하게 차이가 나 버리는 것이다. 누구는 두 발 놀려서 열심히 뛰어갈 때 누구는 발 한번 굴러 20~30미터씩 휙휙 날아가 버리니 도저히 쫓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러 유저라면 정정당당히 맞서라! 이 무슨 비열한 짓이냐!”
기사 중 하나가 분개하며 소리친다. 뒷전으로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여럿이서 하나 몰매 놓는 주제에 뭔 정정당당을 찾아?’
또다시 훌렁 날아가 거리를 벌린 레펜하르트가 이번엔 에어리어스의 신관들 앞에 착지한다. 이미 마법사들이 당하는 꼴을 본 신관들이 저마다 기도를 올리며 수호의 방벽을 끌어냈다.
“에어리어스시여…….”
“창공의 은혜로 당신의 종을 가호하소서!”
저마다 푸른 성광의 방어막으로 몸을 감쌌다. 특히 다리 부위에 집중적으로 빛이 맴돈다. 레펜하르트의 기격탄을 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결코 같은 수법을 쓸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성직자는 마법사처럼 처리할 수가 없지.’
아예 죽여 버릴 작정이면 별 차이가 없겠지만, 생명에 지장 없이 제압하려면 마법사와 성직자는 그 방법이 전혀 다르다. 마법사야 그냥 부상만 입히면 고통으로 무력화되겠지만, 성직자는 그렇지 않았다.
신성 주문은 머리를 써서 주문 술식을 짜 이적을 발하는 마법사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신께 외쳐 기적을 현실에 구현시키는 것이 성직자다.
즉, 성직자 같은 경우엔 가끔 부상을 입을수록 오히려 더 신성 주문의 위력이 강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간단한 이치였다. 몸 멀쩡한 놈이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과 어디 하나 부러진 놈이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 중 어느 쪽에 더 진심이 담겨 있겠는가?
‘그래서 성직자들은 오히려 상처 없이 제압해야 하지.’
착지한 레펜하르트가 곧바로 몸을 날렸다. 당연히 황금색의 무엇인가를 쏠 줄 알았던 성직자들이 허가 찔려 흠칫거리는 찰나, 레펜하르트가 대뜸 손을 뻗었다. 두꺼운 손가락이 성광의 방어막을 부수며 파고들어 중년 성직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어억!”
목이 졸린 성직자가 발버둥을 치더니 잠시 후 푹 늘어진다. 다른 성직자들이 기겁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프리스트 하토르!”
“저런 흉악한 놈! 사람을 목 졸라 죽이다니!”
정확히는 엄지와 검지로 경동맥만을 정확히 눌러 뇌로 가는 혈행을 막아 기절시킨 것이다. 뭐, 일일이 설명해 줄 상황이 아니니 대충 무시하고, 레펜하르트는 다른 성직자에게로 돌진했다. 이번엔 나름 체술도 익힌 자였는지 제법 그럴듯하게 주먹질을 해 댔다.
“이얍!”
물론 그래 봤자 대륙에서 가장 주먹 잘 쓰는 인간에게 사사한 그가 보기엔 아이들 손장난 수준이다.
“으차~!”
레펜하르트는 간단히 주먹을 걷어 내고 오히려 상대의 팔뚝으로 목을 감싸 초크를 걸었다. 목이 졸린 성직자가 안색이 노래지며 이내 기절한다.
“케에에에…….”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성직자들을 하나하나 쫓아다니며 친절하게 조르기를 걸어 주었다.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와 달리 이번엔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 그렇다 보니 기사들도 어느새 합류해 열심히 레펜하르트를 공격해 댔지만…….
“켁켁! 사, 살려 주시오!”
“이 악적! 라한 신관님을 놓아 드려라!”
“켁켁! 이놈이 내 목을…….”
“스마드 신관님!”
레펜하르트는 기사들의 공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잘도 피해 가며 신관들을 하나하나 기절시켰다. 마법사와 신관을 모두 잃은 로트 경이 악을 써 댔다.
“그물! 그물을 던져라!”
쇠사슬로 만든 그물을 던져 봤자 맨손으로 잡아서 북 찢어 버린다.
“쇠뇌! 쇠뇌를 쏴라!”
열심히 날린, 강철이라도 뚫을 쇠뇌도 전신에 휘감긴 회전하는 오러에 의해 모조리 튕겨 나간다.
오러를 발현하는 시점에서, 이미 레펜하르트에게 이 정도는 걸리적거리지조차 못하는 것이다. 로트 경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덤벼라! 너희들은 명예로운 테네스 기사들이다!”
이미 두 발로 서 있는 기사들의 숫자는 3분의 1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절망 어린 표정으로 기사들이 최후의 발악을 담아 돌격해 갔다.
“으아아아아!”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하압!”
가벼운 기합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날아오르자마자 맨 앞에 있는 기사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그 반동으로 좌우 옆차기, 뒤이어 손등 내려치기로 또 다른 기사를 침몰시키고 착지하자마자 수면 차기로 세 명을 동시에 쓸어 간다. 바늘이 실을 누비듯 순식간에 기사들 사이를 오가며 공격을 해 대는데, 덩치는 곰 같은 놈이 스피드는 먹이 노리는 독수리 저리 가라다.
순식간에 일곱 명의 기사가 신음을 토하며 땅 위를 나뒹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성직자의 가호도 없다. 한 방 맞으면 끝이다.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못 일어난다. 웅성거림이 남은 기사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뭐, 뭐야?”
“어제랑 전혀 다르잖아?”
이쯤 되니 천하의 테네스 기사단이라도 사기가 꺾이지 않을 수 없다. 로트 경이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오러 능력자의 힘인가…….”
그는 침울한 얼굴로 남은 기사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이젠 두 발로 서 있는 이가 채 다섯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기사들의 얼굴을 보던 로트 경이 순간 인상을 팍 구겼다.
‘러, 러스! 저 자식!’
남은 기사 중, 멍하니 서서 상황을 보고만 있는 러스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순간 기가 차 로트 경이 소리를 내질렀다.
“러스! 뭐 하고 있는 게냐!”
하지만 러스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로트 경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그저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쓰러져 가는 동료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저 자식은 도대체? 평소엔 제자리 지키라고 해도 죽어라 뛰쳐나가더니 정작 뛰쳐나가야 할 때는 망부석처럼 제자리 지키고 있는 거냐?’
하지만 지금은 말 안 듣는 놈 붙잡고 닦달할 상황이 아니다. 칼을 뽑아 들며 로트 경은 이를 갈았다.
‘제명시킨다. 이번에 가문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제명시킨다!’
기합을 터트리며 로트 경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 ☆ ☆
‘아…….’
동료들이 쓰러지고 있다. 그토록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명예로운 기사들이 하찮은 병사들처럼 맥없이 날아가고 있다.
하지만 러스는 그 모습에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다른 동료들처럼 저자를 향해 덤벼들지도 못했다. 그저 검을 힘없이 축 늘어트린 채 제자리에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저런 거였구나…….’
그가 언제나 갈구하던, 하지만 손에 닿지 않았던 움직임이 눈앞에 있었다. 단순한 걸음 하나, 주먹질, 발길질 하나하나에조차 경악스러울 정도로 오묘한 움직임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찬란한 빛이 깃들어 있다. 힘의 흐름을 제어하고 때론 북돋아 주며, 때로는 함께 흘러가는 찬란한 빛.
‘오러…….’
비록 권과 검이라는, 분야가 다르기는 했지만 러스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오러 능력자의 전투를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보인다.
모든 것이 보인다.
어째서 저런 움직임을 하는 것인지, 어째서 저렇게 힘이 흘러가는지 모든 것이 명약관화하게 보인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 아무도 가르쳐 주지 못했던 것.
진정한 무의 경지에 다다른 이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움직임과 호흡, 그리고 흐름.
러스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아아……!”
이제야 알겠다.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러스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의 두 팔 근육이 희미하게 약동했다.
‘저기서 저렇게 움직여야 하는 거였구나.’
깨달음의 홍수였다. 막힌 둑이 터진 것처럼, 검을 휘두른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계속 해서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감각이 전신 가득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저것이 진정한 움직임이구나…….’
러스는 무심코 검을 들었다. 살짝 들린 그의 롱 소드, 그 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
“타아아앗!”
우렁찬 기합을 외치며 로트 경은 레펜하르트의 정면에 바스타드 소드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스피드, 각도, 타이밍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일격이었다. 다른 기사들과 비교해 월등한 솜씨, 이런 실력을 가지고도 여태껏 자리를 지키며 지휘에 매진하고 있었다는 건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도 강하고 인내심도 출중하다는 의미다. 성질 급한 이였다면 벌써 지휘고 뭐고 다 내던지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과연 황금기사의 부관을 맡을 만한 인물이라는 건가…….’
뭐, 그래 봤자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가 보기엔 그놈이 그놈이다. 그는 차분히 날아오는 검격을 감지하다 휙 몸을 틀었다.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오른발을 쭉 뻗으며 파고들어 카운터 어퍼컷! 오러 실린 펀치가 로트 경의 복부 갑주를 우그러뜨리며 강렬하게 뻗어 올라갔다.
퍼억!
단 한 방에 로트 경이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상당한 장신에 근육으로 단련된 몸, 거기에 두꺼운 중갑주까지 걸쳤으니 그 무게가 가히 어지간한 바위 수준일 텐데 무슨 풍선이라도 된 것처럼 잘도 떠오른다.
“크윽…….”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로트 경은 짧은 신음만 흘린 채 자세를 잡으려 했다. 갑옷 위로 쳤다지만 충격파가 관통해 맨몸으로 맞은 것과 별 차이가 없었을 텐데, 용케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그 상태로 다시 검을 휘두르는 근성까지 보였다.
‘어? 기절 안 했어?’
얻어맞고 날아가는 와중에도 투지를 잃지 않고 공격을 감행하다니, 실로 무인의 귀감이다. 대단한 근성이랄까? 살짝 감탄하며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틀어 검격을 피했다. 그리고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길게 뻗었다.
“타앗!”
섬광 같은 라이트가 허공에 뜬 로트 경을 강타하려던 찰나였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뻗어가던 주먹을 거두며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타이밍 좋게 그가 서 있던 자리 위로 굵은 전격의 기둥이 내리꽂혔다. 낙뢰라도 떨어진 것처럼 대기가 끓어오르며 땅바닥에 무수한 전기의 뱀들이 꿈틀거린다.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5서클 낙뢰 주문, 일렉트로닉 스피어였다.
“이제야 등장하셨나?”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성 위쪽의 담 위에서 황금 갑주를 걸친 기사가 굳은 얼굴로 검을 겨눈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사, 유서스가 검을 든 채 분노한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테네스의 이름으로, 더 이상의 무도한 행위는 용서치 않겠다!”
☆ ☆ ☆
“다, 단장님…….”
로트 경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반가움과 원망이 섞인 표정이었다.
‘대체 뭐 하느라 이제야 오신 건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자신을 구해 준 것은 물론 감격스러웠지만, 이미 테네스 기사단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후다. 조금만 일찍 왔어도 이렇게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남은 기사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유서스의 이름을 외쳐댔다.
“유서스 님!”
“유서스 경!”
“오셨군요!”
아무런 대꾸 없이 유서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갔다. 주위를 살펴보던 유서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무리 사망한 이가 없다고는 해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테네스 기사들의 몰골은 실로 참혹했다. 차라리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는 마법사들이 양호할 지경이다. 대부분의 기사와 성직자들은 완전히 혼절해 신음조차 못 흘리고 있다.
나직한 음성으로 유서스가 입을 열었다.
“……잘도 나의 기사들을 이 꼴로 만들었구나.”
수하들의 비참한 몰골을 본 수장다운, 확연한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별로 공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유서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문득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뭘 이제야 온 것처럼 굴고 있나, 당신? 아까부터 저 뒤에 있었잖아?”
순간 유서스의 표정에 당혹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레펜하르트가 친절하게도 손가락질까지 하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저 담벼락 뒤에서 아까부터 쪼그려 앉아 지켜보고 있었잖아? 설마 모를 줄 알았나?”
‘그, 그걸 어떻게?’
유서스는 당황했다. 실제로 그는 전투가 시작한 직후 이미 이곳에 도착했었으니까.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다. 오러 유저들이 감각권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파악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충분히 대비를 했다.
‘그래서 특별히 기척을 차단하는 마법까지 걸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자가 그 사실을?’
‘그야, 오러로 파악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
당황하는 유서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웃었다. 틀림없이 그의 감각권은 유서스를 감지하지 못했다. 강력한 마법의 가호나 신성 주문이라면 오러 유저의 감각도 속일 수 있다. 차탄 공국에서 실란이 란타스의 감각을 속인 것처럼.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기감 뿐 아니라 뛰어난 마력 감지 능력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분명 기척이야 안 느껴지지만, 거기에서 은신의 마력이 슬슬 새어 나오고 있는데 그걸 못 느낀다면 전생의 마왕 칭호는 반납해야겠지.
게다가 레펜하르트는 왜 유서스가 저런 짓을 했는지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내 솜씨를 확인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수하 기사들을 몽땅 실험 대상으로 던지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아, 당신?”
유서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 그대로였다. 원래는 그도 바로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너진 성벽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저 도적의 실력이 어젯밤과는 전혀 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제와 달리 대놓고 오러의 힘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나 알아보기 쉬운, 황금빛의 오러를.
황금빛 오러를 구사하는 무문은 대륙이 넓다 해도 단 하나뿐이다. 적어도 그 순례자 소년이 하나는 진실을 말했던 것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계승자, 그 이름 높은 권왕 제라드의 후예라면 엘드라드의 힘으로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코 패해서는 안 될 전투였다. 반드시 상대를 제압해 유물을 돌려받아야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유서스는 수하들을 버렸다. 어차피 진정한 강자끼리의 전투에서 일개 기사들이 낄 자리는 없다. 제대로 된 오러 능력자를 상대한다면 기사들의 존재는 방해물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사들과 함께 저자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자의 전투를 살펴서 보다 많은 정보를 얻는 쪽이 더 승산이 높다.
승산만 놓고 본다면 유서스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그것은 명성 높은 황금기사라면 결코 취해서는 안 될 비열한 행위라는 점도 사실이다.
“소문에는 광명정대한 기사라던데, 꽤 음흉한 구석이 있군?”
“으, 으음…….”
피식거리며 비아냥을 던지는 레펜하르트의 말에 유서스는 연신 신음만 흘렸다. 들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터라 순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쐐기를 박듯 레펜하르트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아니면 대체 왜 이리 늦게 등장하신 건가? 홀랑 벗고 여자랑 뒹굴다 왔어도 이것보다는 빨리 왔을 것 같은데?”
말문이 막힌 유서스의 모습에 테네스 기사단의 표정도 묘하게 굳어 갔다.
“설마…….”
“유서스 님이 그럴 리가…….”
수하들의 술렁임이 확연히 느껴진다. 조금씩 떠오르는 의혹과 불신의 눈빛들, 유서스가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소리쳤다.
“피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시 잠들었다. 그러다 보니 제때 깨지 못했을 뿐이다!”
“성벽을 뭉개 놨는데도 안 깼단 말이야? 댁이 무슨 잠자는 숲 속의 기사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성벽 무너지면서 생긴 소음도 소음이거니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와장창 땅이 흔들렸다.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해도 그 정도면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시끄럽다! 이 악적!”
버럭 고함을 지르며 유서스는 검을 세웠다. 기사들의 표정에 점점 더 불신의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계속 말을 하게 놔두었다간 어떤 불명예스러운 이야기가 나돌지 모른다. 상대의 입을 막아야 한다.
“테네스의 이름을 더럽힌 죄를 묻겠다!”
마검 엘드란을 휘두르며 유서스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창공의 칼날, 허공을 찢노라!”
검을 내려치며 유서스가 언령을 외쳤다. 바람의 칼날이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든다.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낮추며 기합을 터트렸다.
“하아압!”
순간 그의 전신에서 황금빛 폭풍이 폭발하듯 불어닥쳤다. 그 기세에 휘말려 모든 바람의 칼날이 허공에서 소멸한다. 그저 오러를 발현하는 기세만으로 마법을 소멸시키다니? 빠드득 이를 갈며 유서스가 외침을 이었다.
“사신의 눈, 그림자를 꿰뚫고 표범의 울음, 사지에 깃든다! 용의 감각으로 세상을 굽어볼지니!”
전신을 강화한 유서스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재빨리 몸을 던져 웅장한 돌려 차기를 날렸다. 유서스는 가볍게 뒤로 뛰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피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면 안 되지!’
자신이 제라드와 대련할 때 저러다가 얼마나 피를 자주 봤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후속타를 위해 발을 굴렀다. 뛰어오른 기세를 살려 길게 훅을 휘두르는 때였다.
“나, 바람을 타는 깃털이 되리!”
유서스가 허공을 박차며 다시 몸을 날린 것이다. 덕분에 타이밍이 빗나가 펀치가 허공을 때렸다.
‘아차, 저 자식은 마법도 쓰지, 참.’
4서클 주문, 윈드 워크를 응용하면 허공을 발판 삼아 다시 몸을 날릴 수 있다. 물론 고도의 균형 감각이 필요해 마법사들은 그냥 추락할 때 속도를 줄이는 정도로만 사용하지만, 수준 높은 마검사들에겐 상당히 애용되는 주문이다.
‘젠장, 시리스도 잘 쓰던 거였는데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다시 바닥에 착지한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잡는다. 거리를 벌린 유서스가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간다. 노골적인 적의를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역시 너무 비아냥거렸던 걸까? 있는 대로 화가 난 모습이다.
‘쩝, 사실 별로 비난하려던 생각은 없었는데.’
어째 하는 짓을 보니 배알이 꼴려 저도 모르게 성질을 긁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왜 이리 과민 반응이야, 이 자식은?’
솔직히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다루는 용법은 오직 레펜하르트밖에 모른다. 전생에서야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 용법을 연구해서 알아내고 마법사 학회에 발표한 것이 그였으니 이 시대에 아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즉, 테네스 가문 입장에서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정체불명의 은의 시대 유물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설사 잃어버렸다 해도 전혀 문제 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그리 큰 양심의 가책 없이 도둑질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유서스의 표정은, 레펜하르트가 무슨 테네스 가문의 가보라도 들고 튄 것처럼 극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둑질한 놈이 할 소리는 아니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유서스도 레펜하르트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상황을 살피던 중, 유서스가 엘드란을 늘어트리며 언령을 외웠다.
“세계를 이루는 순수의 흐름, 내 검에 임하라!”
눈부신 백색의 기운이 마검 엘드란의 검신을 뒤덮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마력 패턴을 읽고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순수한 마력의 검, 아케인 블레이드인가? 저거라면 확실히 오러와도 상대할 수 있지.’
전생에 그가 오러 능력자의 검을 받아 낼 때 제일 자주 써먹었던 마법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저걸 직접 휘두른 것이 아니라 자동 반응 술식을 섞어 허공에 띄워 놓고 알아서 공방이 가능하게 구현했었지만.
“타앗!”
유서스가 땅을 박차며 레펜하르트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케인 블레이드가 허공에 수십 줄기의 검광을 뿌려 댔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강력한 파괴의 기운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스피드로 날아들었다.
마갑 엘드라드로 한껏 강화된 육체가 휘두르는 아케인 블레이드라면 아무리 레펜하르트라도 경시할 수 없다. 뒤로 물러서며 연신 공격을 피했다.
서걱!
쉴 새 없이 몰리던 중, 아케인 블레이드가 레펜하르트의 가슴팍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인상을 썼다. 비록 피부일 뿐이지만 확실하게 베였음이 느껴졌다. 평소 상태도 아니고 오러로 전신을 강화해 강철도 능가하는 상태인데도 베인 것이다. 힐끔 내려다보니 가슴팍 위로 살짝 핏물이 흘러 옷깃에 스며들고 있다.
‘역시 육체만으로 아케인 블레이드까지 막을 순 없군.’
“죽어라!”
살의 넘치는 목소리로 유서스가 다시 검을 내리친다. 이번엔 팔뚝을 들어 공격을 막아 보았다. 오러를 끌어내고, 강렬한 회전을 싣는다.
“스파이럴 가드!”
짐 언브레이커블 최강의 방어법―이라기보다는 사실 방어법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어지간한 건 그냥 몸으로 때우면 된다는 사상의 무문이니까―으로 레펜하르트는 신중하게 공격을 받아 냈다. 혹시 이걸로도 안 된다 싶으면 잽싸게 팔 뺄 준비도 했다.
파지지직!
칼날과 회전하는 오러가 맞붙으며 섬뜩한 소음을 흘렸다. 레펜하르트가 싱긋 웃었다.
‘이건 되는군.’
스파이럴 가드를 실은 그의 팔뚝이라면 아케인 블레이드도 베지 못한다. 그렇다는 것은 블레이드 오러도 막을 수 있다는 의미.
자신감을 가지고 레펜하르트는 양 팔뚝에 스파이럴 가드를 감아 연달아 공세를 막아 냈다. 막아 내며 동시에 점점 반격에 나선다. 둘 사이에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고 갔다. 백색의 검광과 황금빛 오러가 수없이 부딪치며 대기를 찢는 굉음을 토했다.
콰콰콰쾅!
일단 레펜하르트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잠시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이던 유서스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손발을 놀리며 레펜하르트가 문득 내성 너머, 켈베른 성의 중심부를 흘겨보았다. 여기저기 화톳불이 피어오르는 커다란 성채를 보며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틸라는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 ☆ ☆
어두운 지하 감옥, 작은 화톳불 하나만 피워 놓아 간신히 시야를 밝히는 그 어둠 속에서 실란과 시리스가 때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비록 쇠사슬에 묶여 있는 처지였지만 생각보다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일단 실란이 나불나불 전부 불어 버린 덕에 고문 같은 것은 당하지도 않았고, 그 덕에 이들이 들러리란 사실도 기사들 사이에 알려졌다. 죄 없이 휘말린 아이들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니 딱히 괴롭히거나 하지도 않고 식사도 괜찮은 수준으로 제공된 것이다.
수프에 빵을 찍으며 실란이 시리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한 10여 분쯤 전의 일이었다. 느긋하게 침대 위를 데굴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리며 굉음이 들려온 것이다. 깊은 땅속, 창문조차 없는 이 지하 감옥에까지 확실히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어디서 화산이라도 폭발했나?”
하지만 세텔라드 산맥에 활화산이 있단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혹시나 싶어 감옥문 앞을 지키는 간수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얌전히 있으라는 호통만 들었을 뿐이다.
얌전히 빵을 뜯다 말고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펜하르트 님이 우릴 구하러 온 것이 아닐까요?”
“헤에? 쌀쌀맞은 것 같더니 의외로 구하러 올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네.”
평소 태도를 보면 절대 레펜하르트를 믿지 않는 것 같더니, 의외로 대답이 바로 나온다. 신기해하는 실란을 보며 시리스는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한숨을 쉰 뒤 시리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모르겠어요, 레펜하르트 님에 대해서. 왜 저를 그렇게까지 대해 주는지.”
“그냥 엘프 마니아라서 그런 것 아냐?”
가차 없는 실란의 발언에 시리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두 사람, 동료 아니었나? 의외로 평가가 신랄하다.
“하긴, 저도 처음에는 그냥 역할 놀이에 빠진 사람인 줄 알았어요.”
“확실히 좀 그래 보이긴 하지?”
실란이 키득거렸다. 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가끔 보여 주는 그 아련한 눈빛, 그 속에 담긴 깊은 감정의 빛이 그녀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다. 그 빛, 기억에도 채 남지 않은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들이 보여 주었던, 지극한 애정을 담은 그 눈빛.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아요.”
조용히 속삭이는 시리스를 보며 실란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보통 여자들이 그렇게 남자에게 넘어간다더니.”
“네?”
“자기한테 잘해 주면 뭔가가 있다, 남들과는 다르다, 이 사람은 특별하다, 뭐 그런 식으로 착각해서 결국 넘어간다던데.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 ‘속았다, 이 개새끼!’를 외친대. 나 어릴 적에 돌봐 주시던 고아원 수녀님이 그랬어.”
“그, 그래요?”
벙찐 얼굴로 시리스는 실란을 바라보았다. 대체 그 고아원 수녀란 사람은 얼마나 파란만장한 과거를 가지고 있기에 저리도 사고방식이 살벌한 걸까? 문득 의아해진 시리스였다.
수프를 후르륵 마신 뒤 실란이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투덜대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레펜 씨도 참. 도둑질 하려면 잘 좀 하지 들켜서 시리스나 나나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런데, 딱히 레펜하르트 님을 원망하거나 하진 않는 것 같네요?”
명색이 성직자다. 신을 섬기는 이가 도둑질이란 범죄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는 처지까지 되었는데도 희한하게 실란은 별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야 뭐, 나도 도둑질 동의한 시점에서 공범이나 마찬가지인데. 말리지 못한 내 책임도 있지.”
물론 여기서 고문을 당하거나 했으면 생각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면서 실란은 히죽 웃었다. 애초에 레펜하르트가 남의 물건 탐내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해하는데 딱히 원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꼭 법 다 지키며 살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사실 필라넨스의 교리는 딱히 법과 도덕에 연연하지 않는다. 원래 사랑의 형태에는 불륜이나 동성애 등, 속세의 법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것도 많다. 그렇다 보니 필라넨스의 성직자들은 대체 도덕관념이 살짝 느슨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렸다.
“보기보다 어른스럽군요. 실란은.”
“아니, 나 그렇게 어리지 않거든? 내년이면 스물인데? 레펜 씨랑 세 살 차이밖에 안 나.”
“에엑! 한 스무 살쯤 차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야, 레펜 씨 들으면 울겠다…….”
하여튼, 감옥에 갇힌 주제에 참 긴장감 없이 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노닥노닥 수다를 떨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노한 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냐? 노예 주제에 이곳에 오다니?”
그러더니 곧바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음이 이어진다.
“끄어어억…….”
실란과 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지?”
“뭐죠?”
잠시 후 철컹거리며 열쇠 여는 소리가 들린다. 감옥 문이 발칵 열리며 예쁘장하게 생긴 어린 소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실란 씨와 시리스 양이 맞나요?”
당황한 채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의 말이 진실임을 느낀 틸라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틸라라고 합니다. 레펜하르트의 조력자예요.”
실란과 시리스는 눈을 껌벅이며 틸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두르며 말을 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지금은 여기를 탈출해야 해요.”
☆ ☆ ☆
위층으로 올라가는 원형의 돌계단. 실란과 시리스는 틸라라 자신을 소개한 소녀를 따라 계단을 달리고 있었다.
“여러분의 짐은 위층에 따로 보관해 놓은 것 같아요. 일단 짐부터 찾아야겠죠?”
“아, 네.”
따라가면서도 시리스는 계속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앞장서 달리는 작은 소녀, 실란과 비슷할 정도의 작은 체구였다. 겉보기엔 인간 소녀 같아 보이지만 그녀는 엘프, 그렇다 보니 다른 이종족들에 대해서도 제법 지식이 있다.
뛸 때마다 흔들리는 저 풍만한 가슴은 절대 저 나이의 인간 소녀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시리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 혹시 드워프인가요?”
“엥? 드워프?”
실란이 놀란 눈으로 틸라를 요리조리 살폈다. 오크나 엘프는 인간 사회 어디에나 침투해 있기에 볼 기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애초에 지하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지라 제법 고위급 신관인 실란도 만나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헤에, 겉보기엔 그냥 인간 같은데.”
그래도 귀, 엘프와 다르게 길진 않지만 인간과는 확실히 다른 저 뾰족한 귓바퀴를 보면 확실히 드워프가 맞는 것 같았다. 신기해하며 틸라를 살펴보는 실란의 모습에 시리스가 문득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귀?”
“응? 왜 그래, 시리스?”
“차이점이 귀뿐인가요?”
“응?”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실란이 고개를 갸우뚱 숙인다. 시리스가 방실방실 웃더니 실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순수한 소년이군요, 실란은.”
아까는 어른이라더니 갑자기 말을 바꾼다.
“어이, 뭐야?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빠, 그 말.”
“착해요.”
“……?”
어쨌거나 도망가는 처지에 노닥거리고 있을 여유 따윈 없다. 틸라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어서 이리로.”
세 사람은 계속 뛰었다. 막 복도를 도는데 두 명의 병사가 그들을 발견하고 창을 고쳐 쥐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냐!”
“저들은 그 도둑의 동료들! 어떻게 감옥을 탈출한 거지?”
순간적으로 시리스가 몸을 날렸다. 비록 무기가 없더라도 그녀는 맨손 체술 역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 벽을 박차며 단숨에 거리를 좁힌 뒤 삼각 날라 차기 일격!
그렇게 병사 하나를 해치우고 바로 다음 목표를 노리려던 시리스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남은 병사 하나를 틸라가 상대하고 있었다. 무슨 시리스처럼 화려한 체술로 제압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내려친 할버드의 창자루를 그대로 잡고, 성인 장정을 통째로 들어 버리더니 바닥에 패대기친다.
“꾸엑!”
마차에 치인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진 병사가 비명과 함께 축 늘어졌다. 순간 실란이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저 가는 팔의 어디에 저런 괴력이?
“히, 힘세네요?”
더듬거리는 실란을 보며 틸라가 빙긋 웃었다.
“드워프들이 원래 힘이 좀 세요.”
‘아니, 저건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기가 질린 실란을 뒤로한 채 틸라가 다시 손짓을 했다.
“자, 서둘러요.”
틸라의 인도에 따라 실란과 시리스는 한 작은 방에서 자신들의 짐을 찾을 수 있었다. 실란의 금화는 무사했지만 아쉽게도 시리스의 롱 소드는 없었다. 금화를 탐내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지만, 적의 무구 중 귀해 보이는 것을 전리품으로 갖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보니 누군가가 챙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궁 니힐렌은 무사했다. 니힐렌은 겉으로 보기엔 그냥 나무 작대기로만 보여 귀한 물건인 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니힐렌을 챙기며 시리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롱 소드는 그렇다 쳐도, 이 마법의 활은 사실 그녀의 마음에 쏙 들어 꽤 애착이 있었다.
“니힐렌도 기사들 앞에서 한번 썼었는데 용케 못 알아챘네요.”
“미처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나 보지. 여하튼 다행이야, 시리스.”
짐을 챙기자 틸라가 다시 그들을 재촉했다. 방을 나서서 잠시 복도를 걷다 말고 틸라가 벽을 눌렀다. 뭘 어떻게 만지자마자 벽이 스르륵 열리며 작은 구멍을 드러낸다. 실란이 흠칫 놀랐다.
“비밀 통로? 이런 게 있는 줄 어떻게?”
“그야, 이 성은 우리가 지었으니까요.”
살짝 우울해하는 표정을 지은 뒤 틸라가 어서 들어가라며 손짓을 한다. 실란과 시리스가 통로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뒤 틸라는 잠깐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봉지 하나를 꺼냈다.
‘일행을 무사히 구하면 이걸 허공에 던지라고 했지?’
틸라가 창밖의 하늘을 향해 봉지를 힘껏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