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제8장 드워프 (9/84)

3권

제8장 드워프

1

도시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황궁 가이라크의 중심부, 심연의 전당의 한 발코니에서 깡마른 중년 사내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로부터 마왕이라 불리는 자, 안타레스 제국 황제 레펜하르트였다.

레펜하르트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이 세운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위의 주름, 강력한 마력으로도 채 지우지 못한 세월의 흔적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작별 인사 올립니다, 폐하.”

오크 대전사, 타시드의 목소리였다. 단순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 깃든 통한의 감정은 확실히 느껴졌다.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오크 전사가 무릎을 꿇고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부복하고 있는 이는 타시드 뿐만이 아니었다. 흉악하게 생긴 늙은 트롤과 흰 수염이 성성한 드워프, 그리고 아름다운 엘프 여인 역시 함께 무릎 꿇고 있었다. 모두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틸카, 마켈린, 시리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들 표정들이 왜 그러나? 무슨 다 죽어 가는 사람 보는 것처럼 말이야.”

황제의 웃음에 그들은 따라 미소 지을 수가 없었다.

전 대륙이 손을 잡았다.

전 인류가 한 목표를 향해 칼을 들었다.

인류의 적, 마왕 레펜하르트를 척살하기 위해 열국의 왕이 뭉쳐 군대를 모았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이백만. 전쟁의 상식을 모조리 무시한 그 숫자는 실로 대륙의 인간이 가진 모든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대륙의 모든 마법사가 이백만의 인류 연합군을 마법으로 지원했다. 대륙의 모든 성직자들이 그 병력을 신성력으로 가호했다. 모든 왕국의 오러 유저들이 그들을 이끌고 제국을 침공해왔다.

200만이라는 숫자는 그 어떤 강대한 마법도, 고도의 전략도 무시하는 절대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침략군 자체를 마법으로 싹 쓸어버려 전쟁을 종결짓던 레펜하르트의 방식도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강력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그의 몸은 하나뿐이다. 인류 연합군은 레펜하르트를 교묘히 피하며 병력을 분산, 안타레스 제국을 착실하게 잠식해 갔다. 레펜하르트가 가공할 마법으로 성 하나를 수복하면 그다음 날 스무 개의 성이 동시에 침공된다. 압도적인 물량전 앞에서 결국 안타레스 제국군은 점점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오크 전사들이 인간의 검 아래 고혼이 되었다. 끝없는 재생력을 지닌 트롤들조차도 압도적인 숫자에 밀려 지치고 피로해져, 결국 사지가 찢겨 죽어 갔다. 드워프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엘프들의 시신이 산을 이뤘다. 그리고 이들이 죽은 만큼, 아니 그 몇 배나 되는 인간의 피가 대지 위로 흘렀다. 참혹한 전쟁의 불길이 제국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반년이 지난 지금, 인류 연합군은 마지막 보루였던 안타레스 제국 수도 레펜하임까지 침공해 있었다.

발코니에 기댄 채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수도 성벽 너머의 평야, 지평선 너머까지 빽빽하게 인간의 군대가 도열한 것이 보였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사방이 모두 인간의 군세뿐이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그나저나 진짜 무식하게도 동원했다. 다들 전쟁 한 번 하고 나라 말아먹을 작정인가?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끌고 온 거래?”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만큼, 저들은 우리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폐하.”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쩝, 쪽수 차이가 어지간하면 손을 써 보겠는데 이건 뭐…….”

세상에는 레펜하르트가 백만의 어둠의 군세를 이끌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그것이 열국의 왕들이 뒷생각 안 하고 이백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은 이유기도 하지만), 사실 안타레스 제국 내의 모든 이종족의 숫자는 남녀노소 다 합쳐 봐야 오십만이 조금 넘을 뿐이다. 실제로 전투가 가능한 인구는 이십만이 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은 이미 전쟁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돌려 발코니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태연한 말투로 손을 저었다.

“자, 그럼 얼굴들 봤으니까 이만 작별하도록 하세.”

“……죄송합니다, 폐하…….”

아틸카의 머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레펜하르트에 대한 충성심은 그 누구와 비교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아틸카였지만, 그는 지금 황제의 곁을 떠나야 했다. 아틸카 개인이 아닌, 트롤 전체의 존속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사천왕은 단순한 황제의 호위병이 아니다. 그들은 각 종족의 대표자이자 수호자이며 일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존재.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그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대들의 동족을 이끌고 피신하라. 결코 종족의 정신이 끊기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간신히 노예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간신히 선조의 문화를, 긍지를 찾아가는 이들이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겨우 찾은 긍지를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 봤자 인간의 손아귀에 떨어져 다시 노예가 된다면, 죽어 간 이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타시드가 인상을 쓰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녕 함께 가실 수는 없는 겁니까, 폐하?”

“이미 설명하지 않았나, 타시드? 내가 이 가이라크에 자리 잡고 있기에 탈출 기회도 있다는 걸?”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레펜하르트도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종족들의 전력을 보존해 수도에서 탈출시키느냐.

그걸 위해서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일부러 노출시켰다. 어차피 인류 연합군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레펜하르트의 목일 터다. 그러니 그가 제국 수도에 확실히 존재하는 한, 이종족의 탈출 시도에 인류 연합군은 전력을 다할 수가 없다.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를 놓친다면 이 전쟁은 실패나 다름이 없을 테니까.

즉, 레펜하르트는 황도의 모든 이종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미끼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그, 그건 알지만 그렇다 해도 어찌 폐하를 홀로…….”

순간 레펜하르트가 호통을 치며 그의 말을 잘랐다.

“타시드! 감정을 앞세워 책임을 방기하지 마라! 그대는 나의 사천왕이기에 앞서 오크들의 대전사다!”

타시드는 이를 악물며 말을 삼켰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의 마지막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의 동족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아틸카도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타시드처럼 트롤들을 이끌어 수도를 탈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비탄에 찬 목소리로 늙은 트롤 주술사는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폐하. 부디 옥체 보중하시길…….”

“조심하게, 아틸카.”

발코니를 나서는 오크와 트롤의 뒷모습이 실로 쓸쓸하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왼편에 서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이 든 드워프를 향해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알 포트께는 죄송하게 됐군. 기껏 신께서 보증 서 주셨는데 부도나 버렸다.”

드워프, 마켈린도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보증이 아니라 신탁입니다만.”

“그 소리가 그 소리지, 뭐.”

드워프들이 레펜하르트에게 신병을 의탁한 것은 자그마치 10여 년 전, 안타레스 제국이 생기기도 전의 일이다. 다른 이종족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각 씨족 단위로 그에게 의탁한 데 비해 드워프들은 모든 부족이 단결하여 한꺼번에 레펜하르트 밑으로 들어왔는데, 그 이유가 바로 드워프의 대신관, 마켈린이 받은 신탁 때문이었다.

엘프를 곁에 두고 오크의 길잡이를 따르며 다이만의 심연을 통과하는 자, 호크릴의 기둥을 부수고 나타날지니 그를 따르라. 그가 곧 운명을 뒤틀어 구원을 줄 자이다.

그 당시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와 타시드를 대동하고 한창 던전 다이만을 탐사하던 중이었다. 탐사 도중, 특이한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 있는 기둥을 발견하고 연구차 이리저리 마법 걸다가 왕창 부숴 먹었는데, 그게 바로 드워프들의 은거지이자 알 포트의 신전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땐 정말 당황했지. 신전 절반을 박살 냈는데 드워프들이 몰려오더니 화를 내긴 커녕 구원자라고 막 칭송하더라고. 진짜 상황 파악 안 되더군.”

추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가 키득거렸다. 마켈린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날 이후 드워프들은 레펜하르트 밑으로 들어왔고, 깊은 신뢰와 충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신뢰와 충성은 황도가 불타는 지금에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다른 이종족들과 마찬가지로…….

마켈린이 고개를 숙이며 성호를 그었다.

“알 포트께서 가호하사, 다시 뵈올 날이 있기를.”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잘 가게나, 마켈린.”

그렇게 마켈린마저 보낸 뒤 레펜하르트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엘프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리스.”

“네, 레펜하르트 님.”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시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각오를 다진 그녀의 모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야 저렇게 엘프들의 수장다운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어젯밤에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레펜하르트 님!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아무리 레펜하르트 님이라도 대륙 최강자들을 홀로 상대하시는 건 너무 위험해요!

-시리스, 나의 사랑. 네가 선택한 남자는 그렇게 부실하지 않단다.

-가끔 부실해지시잖아요!

-……아니, 이 상황에 밤일 이야기는 왜 하누…….

-몰라요! 같이 가요!

-설명 다 하지 않았니? 내가 움직이면 다른 이들을 구할 수가 없단다.

-그럼 저도 안 가요!

-……그럼 엘프들은 누가 이끌란 말이냐?

-몰라요! 어쨌든 전 레펜하르트 님 곁에 있을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비이성, 비논리, 감정은 대폭발! 이라는 히스테리 3대 요소를 몽땅 갖추고 생난리를 쳐 대는데…….

‘달래느라 죽는 줄 알았지.’

그래도 하룻밤 사이 많이 진정한 모양이었다.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연인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다정한 음성을 이었다.

“……이제 너도 가야지.”

“네.”

대답을 마치며 시리스는 레펜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강한 의지를 담아 속삭였다.

“기다릴 거예요.”

그 사랑스러운 표정에 레펜하르트는 더더욱 씁쓸하게 웃었다. 그인들 시리스와 떨어지고 싶을까? 하지만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자신을 기약 없이 기다리라 할 만큼 레펜하르트는 잔인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꾸했다.

“운명이란 어찌 될지 모른단다. 시리스, 그러니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반드시 기다릴 거예요.”

“아, 물론 나도 너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겠느냐?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구나. 저들도 작정을 하고 왔으니 아무래도 쉽지 않을…….”

“무! 조! 건! 기다릴 거예요!”

“…….”

고집 센 눈동자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의 목을 껴안았다. 레펜하르트도 시리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불타는 황도를 뒤로한 채 두 연인은 말없이 키스를 나누었다.

☆ ☆ ☆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떴다.

‘오랜만에 전생의 꿈을 꾸었군.’

우울한 기억, 서글픈 추억의 단편이었다. 결국 자신의 미끼 역할에도 불구, 사천왕들은 모두 인간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딱히 작전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예 탈출 자체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병력 차가 나도 너무 심각하게 났으니 그 당시엔 저것 외에 대책이 없었다.

‘후우…….’

죽어 간 사천왕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시려 온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애써 머리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 내려 애썼다.

‘괜찮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막을 수 있는 일이야.’

애써 기분을 환기하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간 인상을 썼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지독한 통증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으윽, 단단히 망가졌네.’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오러를 운용해 몸 상태를 점검해 보니 절로 기가 찼다. 갈비뼈도 대여섯 개 나간 데다 내장도 상했고 근육 곳곳이 파열되어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역시 최강의 마도기 엘드라드.’

그토록 단련을 거듭한 육체이거늘 단 일격에 이 꼴이 되어 버렸다. 엘드라드의 명성은 결코 헛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보짓을 했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마갑주 엘드라드를 다루는 유서스의 실력은 확실히 오러 능력자와 필적할 만했다. 과연 명성 높은 황금기사, 주색잡기에 찌든 란타스보다는 확실히 우위에 선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레펜하르트가 감당치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전력을 다해 맞붙었다면, 오러를 제한하고 싸우지 않았다면 능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결국은 자신의 사고방식의 문제였다. 생사가 걸린 와중에서도 ‘나는 도둑질 중이다.’, ‘나는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라며 스스로 족쇄를 걸고 싸우다니, 게다가 위기가 코앞까지 닥치도록 그 마음의 족쇄를 풀지를 못하다니 이 무슨 머저리 같은 짓이란 말인가?

‘정말 한심하군.’

레펜하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무엇이 문제인지 이번 일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소심하게 굴고 있다. 지금의 난…….”

물론 차탄 공국에서 그토록 무식하게 날뛴 레펜하르트가 소심하다고 하면 그의 주먹에 맞아 죽은 이들이 울분을 터트리겠지.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전생에 한 번 실패했다. 고금 최강의 마법사였음에도 결국 대륙 전체의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 보니 다시 태어난 후로도 너무 상황에 대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마왕으로서 세인들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생각만 가득해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직은 굳이 저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둑질하니까 오러를 숨겨야 한다고? 정체가 들통 나면 안 된다고?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정체가 들통 나면 대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그래 봤자 그냥 오러를 다루는 강력한 권사 하나가 어울리지 않게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만 알려질 뿐이다. 뭐, 제라드의 귀에 그의 행각이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저걸 워낙 두려워해서 정체 숨기려고 한 부분도 컸지만) 생각해 보면 제라드 성격상 호쾌하게 날뛰었다고 칭찬하면 했지 뭐라 할 것 같지는 않다.

전생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점은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패를 두려워해 몸을 사리고 있어 봤자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야 할 때였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건 실패할 만큼의 뭔가를 이루어 놓은 뒤의 일이다.

“진짜 바보짓 했다니까…….”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확실하게 문제점을 인식하고 나니 가슴속이 후련해졌다.

‘뭐, 어쨌거나 결과는 나쁘지 않구먼. 좋은 교훈도 얻었고, 엘류시온의 목소리도 제대로 챙겼고.’

한층 편해진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네모난 블랙박스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도저히 마도구 같지 않은 그냥 평범한 상자. 하지만 이것은 은의 시대에서도 최상을 달리는 특급 아티팩트다.

‘이걸로 마법을 되찾는 길도 한걸음 나아갔다.’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호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으니 일단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윽! 웃었더니 또 쑤신다.”

물론 그 대가가 상당히 아프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옆구리를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는 일단 상념을 접고 다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여기저기 상처가 심했고, 특히나 오러로 방어를 채 못 한 두 다리는 말이 아니었다. 아예 다리뼈가 으스러져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그래도 오러 방어도 늦어서 사실 반쯤은 맨몸으로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걸 감안하면 사지 멀쩡한 게 더 신기하지.’

강철 같은 육체를 이 꼴로 만든 엘드라드의 마법에 경탄을 보내야 할지, 아니면 그 강력한 마법을 맞고도 이 정도로 끝난 육체에 경탄을 보내야 할지 영 아리송하다. 보통 이 정도 부상이면 아예 불구가 될 심각한 중상이겠지만…….

‘이렇게 다쳐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레펜하르트는 마비된 두 다리를 내려다보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선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 ‘적당히 사부와 구타 훈련을 한 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두 번 당해 본 것도 아니고 오러를 각성하기 전엔 매일 이 정도 부상은 달고 살았으니 당황할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오러로 박살 난 뼈와 살을 다시 맞추고 자체 치유력을 높인다면 사흘 정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겠군.’

오러를 운용하며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작은 방이었다. 화강암으로 된 벽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고 문 쪽엔 얇은 휘장만이 쳐 있다. 특이한 것은 천장이 상당히 낮아, 레펜하르트가 만약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허리를 상당히 굽혀야 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거 혹시…….’

뭔가 떠오른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누워 있던 침상을 살펴보았다. 지금 그가 깔고 앉은 침상은 작은 침대 네 개를 겹쳐 놓은 물건이었다. 아이 침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넓고, 어른 침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짧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누가 이런 사이즈의 침대를 쓰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누군가가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호오? 깨어났구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이런 사이즈의 침대를 쓰는 이는 대륙에 단 하나뿐이다.

드워프였다.

평균 신장 140 정도에 어깨 넓이는 1미터가 넘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를 지닌 대지의 아들들, 드워프.

휘장을 걷으며 나타난 것은 새하얀 머리에 갈색 눈을 지닌 드워프였다. 드워프다운 풍성한 수염으로 가슴을 덮은 그가 레펜하르트를 살펴보며 안부를 건넸다.

“몸은 괜찮소?”

“아, 예. 그럭저럭…….”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며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수염의 길이와 풍성함으로 짐작컨대 적어도 삼백 살은 넘은 늙은 드워프인 것 같았다. 인간들 눈에야 모든 드워프가 죄다 수염은 북실북실, 눈알은 부리부리, 몸통은 둥글 넙적한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포인트만 파악하면 나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저들이 그를 구해 준 것은 틀림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정중히 사의를 표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군요.”

늙은 드워프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허, 당연한 것을 가지고. 난 헤토스라 한다오.”

“……레펜하르트입니다.”

통성명을 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내심 당황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는 것이 별로 어색한 일이 아니겠지만…….

‘뭐, 뭐야? 왜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

현 대륙의 실정을 생각해 볼 때, 드워프가 인간에게 좋은 감정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애초에 죽어 가는 인간을 드워프가 구해 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뭐, 그거야 이 드워프들이 워낙 성격이 좋아서 그랬다 치자. 그래도 이렇게까지 호감어린 눈빛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호의는 눈빛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고…… 음식은 드실 수 있겠소?”

“예? 예…….”

“다행이군. 틸라 양, 준비한 것 좀 들고 오게나.”

헤토스가 휘장 밖으로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귀엽게 생긴 인상의 드워프 여인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겉보기엔 마치 10대 초반의 어린 인간 소녀인 것도 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어 바로 드워프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을 보니 혼기 꽉 찬 처녀로군.’

원래 드워프 여성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도 작달막한 소녀 체형에 인간 기준으로는 동안을 유지한다. 그 상태로 나이를 먹을수록 가슴만 풍만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 중 특이한 취향을 지닌 놈들은 가끔 젊은 드워프 여성을 데려다 성노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뭐, 수요는 그리 많지 않지만.

하여튼 남자는 수염, 여자는 가슴! 이것이 드워프들의 나이를 구별하는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무슨 음흉한 속셈이 있어 대뜸 처음 보는 처자 가슴부터 훔쳐본 것이 아니란 소리다.

“아, 깨어났네요. 잘됐다. 드세요.”

틸라라 불린 드워프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쟁반을 침상 한구석에 놓았다. 쟁반 위에는 보리죽이 가득 담긴 커다란 대접이 놓여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당황했다.

‘드워프들이 인간을 좋아할 리가 없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그렇다고 잘 대해 주는 이들에게 ‘왜 이리 잘해 줘요?’라고 묻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레펜하르트는 머쓱해하며 수저를 들었다. 죽을 퍼먹는 레펜하르트를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헤토스가 다시 휘장을 열고 방을 나섰다.

“그럼 난 장로님을 모셔오겠소이다.”

의문은 장로라 불린 늙은 드워프가 나타난 순간 바로 풀렸다.

“오! 깨어나셨소이까? 일족의 구원자여!”

“……구원자요?”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드워프의 이름은 겔파이드 델파이스톤. 이곳에 머무는 드워프 일족의 장로이자 알 포트를 섬기는 신관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듣자, 왜 이들이 레펜하르트에게 그리도 호의적이었는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여 전, 드워프들의 대신관에게 알 포트의 신탁이 내려졌다고 한다.

강철의 육체에 지고의 지식을 담은 자, 흑암의 길을 통해 북풍의 눈물을 타고 나타날지니 그를 따르라. 그가 곧 운명을 뒤틀어 구원을 줄 자이다.

쉽게 말해서 덩치 크고 머리 좋은 놈이 지하 동굴을 통해 얼음물에 동동 떠내려올 테니까 건져다 구원자 삼으란 소리였다.

대신관은 저 신탁을 전 대륙의 드워프들에게 은밀히 알렸고, 모든 드워프들은 자신의 거처에 동굴이 있고 그곳이 강과 연결되어 있다면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역시 강과 연결된 지하 동굴이 있었고, 그래서 겔파이드는 6년 동안 겨울만 되면 그 동굴에 보초 세워 놓고 누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결국 어젯밤, 커다란 인간 하나가 두둥실 떠내려 오기에 얼씨구나 하고 건져 냈다는 이야기.

“하하…….”

설명을 들은 레펜하르트는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상황이 바로 파악이 되었다.

‘와, 알 포트 이 양반, 그새 말 바꿨구나.’

신탁이 내린 것이 6년 전이면 딱 레펜하르트가 이 시공으로 전생했을 그 시점이다. 레펜하르트가 이 시간대에 나타나자마자 바로 움직였다는 소리다.

‘참 반응 한번 빠르시네. 한 번 말아먹었는데 그래도 아직 보증 서 주시겠다는 건가. 호인, 아니 호신好神이시구만.’

인과율을 뛰어넘는 이 사태에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이걸로 이 드워프들이 처음 보는 자신을 이토록 환대하는 것도 확실히 납득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랬었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그때 했던 질문을 되풀이해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만으로 처음 보는 인간을 이렇게 믿고 치료해 주었단 말입니까?”

역시나, 전생에서 들었던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알 포트께서 빈말하셨겠소?”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빛으로 대꾸하는 드워프 장로, 겔파이드였다.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속으로 알 포트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무리 레펜하르트라지만 이 정도의 부상을 입은 채 계속 얼음물에 잠겨 있었다면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한 번 더 믿어 줘서 고맙습니다. 이번엔 잘해 볼게요.’

겔파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며 그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환자를 앞에 두고 긴 이야기 하긴 그렇군. 일단은 푹 쉬면서 상처를 돌보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틸라를 곁에 둘 테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아이에게 말하시고.”

탈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레펜하르트는 감사를 표한 뒤 다시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어서 몸 상태부터 호전시켜야 했다.

‘적어도 두 다리로 움직일 정도까지는 어서 나아야지. 용변은 혼자 볼 수 있어야 할 거 아냐?’

아무리 성인 여성이란 걸 머리로는 알아도, 틸라의 겉모습은 어린 소녀로밖에 안 보인다(특정 부위를 제외하곤). 그런 이에게 용변 처리를 부탁할 만큼 그는 뻔뻔하지 못한 것이다.

순식간에 보리죽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레펜하르트가 빈 그릇을 내밀며 아쉬운 목소리를 흘렸다.

“저기, 죽 좀 더 줄 수 있습니까?”

“잘 드시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린 소녀의 얼굴로 성숙한 여인의 미소를 지으며, 틸라가 빈 그릇을 받아 들고 방으로 나섰다. 다시 자리에 누워 레펜하르트는 오러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육체를 치유하며 그가 상념에 빠졌다.

‘그나저나 이렇게 된 이상 실란과 시리스가 걱정이군.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2

이른 아침, 아침 햇살이 가득한 켈베른 자작령의 한 거리.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햇빛 아래, 평소와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쫓아라!”

“도적을 잡아라!”

한 무리의 기사들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쪽, 다닥다닥 붙은 이층집 지붕 위를 정신없이 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백금발의 단발머리 사이로 뾰족한 귀를 드러낸 아름다운 엘프 소녀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뒤를 따르는 붉은 장발의 소년이었다.

앞서 달리던 엘프 소녀, 시리스가 지붕 끝에 다다르자마자 손을 뻗었다.

“내 손을 잡아요, 실란!”

“이미 잡고 있는데요!”

거의 악을 쓰다시피 실란이 대꾸했다. 시리스가 바로 그를 잡아당겨 어깨 위로 짊어지더니 바로 몸을 날렸다.

“하앗!”

가벼운 기합과 함께 가녀린 엘프 소녀가, 더 가녀린 소년을 짊어지고 건너편 지붕으로 뛰어넘는다. 아득한 부유감을 느끼며 실란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나도 그래도 남잔데 이렇게 번쩍번쩍 들어 버리면…….”

시리스 어깨에 얹혀 있다 보니 자연스레 저 아래, 도로를 따라 열심히 자신들을 쫓는 기사들이 보인다. 기세등등하게 쫓아오는 그 모습을 보며 실란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세상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결국 들켰구나, 바보 레펜 씨. 어쩐지 예감이 불안하더라.”

레펜하르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실란과 시리스는 새벽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불청객을 맞이해야 했다. 도적의 동료들을 체포하겠다며 켈베른 자작의 병사들이 테네스 기사단을 대동한 채 여관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런 시골 영지에 외부인은 드물고 레펜하르트 정도의 덩치는 더더욱 드물었으니, 이들이 동행이란 것은 숨겨질 일이 아니다. 병사들은 바로 여관을 에워싸고 두 사람이 묵던 방으로 쳐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 다 잠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리스가 미리 불길한 예감을 느낀 탓에 둘 다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그 덕에 바로 여관에서 몸을 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달려 다른 가옥 지붕 위로 뛰며 계속 도망쳤다. 정확히는 시리스가 뛰어넘어 도망치고 실란은 그냥 얹혀 다녔지만, 그렇다고 실란이 완전 짐덩이인 것만은 아니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을 보살피사 산양처럼 끝없이 뛰게 하소서!”

시리스가 힘들어할 때마다 실란은 신성 주문으로 그녀의 피로를 제거하고 활력을 불어 넣는 한편, 도약력을 증폭시켜 도주에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었다. 허약한 다리로 직접 뛰느니, 이렇게 얹혀 가고 열심히 신성 주문 걸어주는 쪽이 더 효율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추격을 따돌리기는 요원했다.

“저쪽이다!”

“반대편으로 몰아라! 도주로를 차단해!”

지붕 위에서 힐끔 아래를 내려다본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들을 쫓고 있는 병력은 어림잡아도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도저히 따돌릴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적은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어이구, 기사님. 저쪽으로 갔는뎁쇼.”

“협조 감사한다!”

“저기로 도망가는구먼요!”

“그대들의 충성, 기억하겠다!”

켈베른 자작령의 주민들 역시 추격자들에게 협조적이었다. 켈베른 자작은 괜찮은 영주였고, 영민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게다가 워낙 시골이다 보니 추격전이라 봐야 사과 훔친 어린애와 몽둥이 들고 쫓아가는 과일상 주인 정도밖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딱히 자작에게 충성도가 높아서라기보다는, 그냥 다들 이걸 무슨 흥미진진한 축제쯤으로 인식했는지 열심히도 손가락질을 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다!”

막 지붕 두 개를 연달아 건너 뛴 시리스의 눈앞을 세 명의 검사가 가로막았다. 미리 그녀의 도주로를 예상하고 지붕 위로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기사들이 검을 뽑아 시리스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형성했다. 기사 중 하나가 검을 겨누고 위엄찬 목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상황을 살피던 시리스가 굳은 얼굴로 실란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롱 소드도 풀어 지붕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누가 봐도 명백한 항복의 표시라 기사들이 살짝 긴장을 풀었다.

‘하긴, 저 엘프가 아무리 슬레이어라도 세 명의 기사를 상대로 감히 덤비려는 생각은 못하겠지.’

시리스가 연달아 느린 동작으로 허리춤에서 작은 막대기를 꺼내 들었다. 기사들은 그때까지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작은 막대기가 무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순간 시리스가 외쳤다.

“니힐렌!”

막대기가 바로 빛의 마궁으로 형태를 변환한다. 기사들이 채 당황하기도 전, 시리스가 어느새 시위를 당겼다.

슈육!

바람을 가르며 빛의 화살이 기사 중 하나의 어깨를 관통했다.

“크억!”

비명을 지르며 화살에 맞은 기사가 지붕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 틈을 타 시리스가 발치의 롱 소드를 걷어차 올리더니 허공에서 뽑아 들었다.

“타앗!”

검을 뽑아 기사들에게 돌진한 뒤 좌우로 빠지며 이연속 베기! 실란의 권능으로 한껏 증폭된 시리스의 움직임은 방심한 기사들이 감히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심리의 틈새를 정확히 노린 기습에 노련한 기사들도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피를 뿌렸다. 뒤에서 보던 실란이 놀라 외쳤다.

“주, 죽이진 마!”

검을 휘둘러 핏물을 흩뿌리며 시리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아요.”

과연, 쓰러진 기사들은 고통스러워는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시리스는 그 순간 절묘하게 기사들의 허벅지와 종아리만을 베어 기동력을 빼앗은 것이다. 실란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죽이지 않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냉혹함이 무섭다. 뒤집어 말하면…….

‘필요하면 살상도 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하긴, 생각해 보면 차탄 공국에서도 시리스는 가차 없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인간들을 상대로 잘도 피를 봤었지. 한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슬레이어치곤 그래도 착한 거겠지, 이거?’

엘프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엘프들 이야기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여도 검술이란 건 결국 사람 잡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슬레이어가 살인에 거부감을 가진다면 애초에 장사가 되질 않는 것이다. 시리스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리라.

“가요, 실란.”

“으, 으응.”

실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도 병사들이 계속 그들을 추격하고 있으니 느긋해할 여유 따윈 없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실란을 재차 짊어진 시리스가 또다시 도움닫기로 뛰어 다음 건물로 건너갔다.

☆ ☆ ☆

“어찌 되었소?”

“죄송합니다, 유서스 님. 생각보다 보통 실력들이 아니어서…….”

유서스의 재촉에 중년 병사가 죄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켈베른 자작가의 수비대장이기도 한 이 중년 병사는 비록 기사는 아니었지만, 나름 영지의 치안을 훌륭히 지킨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의 침략도 거의 없고 밤거리 범죄도 극히 드문 이런 시골 수비대장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저 ‘날아다니는’ 도둑놈들을 붙잡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물론 활이나 석궁 등을 쓴다면 방법이 있겠지만, 이 이름 높은 황금기사는 분명하게 요구했다. 생포해 달라고.

굽실거리는 수비대장을 보며 유서스가 연신 표정을 구겼다. 그러더니 곁에 선 부단장 로트 경에게 작은 목소리로 신경질을 냈다.

“그러게 우리들이 직접 나서자 했잖소?”

로트 경이 고개를 슬그머니 숙이며 유서스를 달랬다.

“그럴 수 없다는 건 잘 아시잖습니까?”

아무래도 손님이니만큼, 켈베른 자작령에서 테네스 기사단이 직접 설치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켈베른 자작가가 범인 검거를 주도하고 자신과 테네스 기사단은 협조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러다 놓치면 어쩔 생각이오?”

이 상황을 이해 못할 유서스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그는 조급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 이렇게 크게 벌일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로트 경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물론 간밤의 도둑놈은 확실히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간 것은 그 수많은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단 하나, 정체를 알 수 없어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작은 상자뿐인 것이다. 물론 은의 시대 유물들이야 하나같이 고가품이니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난리를 피울 일도 아니다. 그냥 그것 하나쯤 잃어버리더라도 별 상관이 없을 만큼 테네스 기사단은 충분히 많은 유물을 거두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해하시지? 혹시 그 상자가 엄청 대단한 물건인가?’

로트 경은 간밤의 도둑이 훔쳐 간 유물을 보고하는 순간, 창백하게 변했던 유서스의 안색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걸까?

그렇게 로트 경이 잠시 상념에 빠져있을 때였다.

“이 정도면 됐소! 직접 나서겠소!”

유서스가 등 귀에서 마검 엘드란을 꺼내 들었다. 로트 경이 놀라며 말했다.

“아니, 고작 저런 놈들을 상대로 유서스 님이 직접 상대하실 필요는…….”

유서스는 로트 경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엘드란을 바닥에 꽂았다. 역시 이상했다. 평소의 유서스라면 적어도 대답 정도는 했을 텐데.

당혹해하는 로트 경을 뒤로한 채 유서스가 준비된 언령을 외쳤다.

“눈을 떠라! 엘드라드!”

황금빛이 폭발하며 그의 전신을 감싼다. 마갑 엘드라드를 착용한 유서스가 발치를 가볍게 박찼다.

쾅!

폭음과 함께, 황금빛 그림자가 새처럼 허공을 날아올라 지붕 사이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타앗!”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검광이 번뜩인다. 세 줄기 붉은 선혈이 허공에 비산한다. 세 번의 칼질로 3인의 기사를 동시에 쓰러트려 퇴로를 확보한 뒤 시리스가 소리쳤다.

“실란!”

“네네, 업힐게요.”

‘아, 레펜 씨는 언제쯤 근육 수련 시켜 주려나? 남자의 자존심이…… 흑흑.’

그렇게 실란이 한가한 생각을 하며 손을 뻗으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울어라! 바람의 칼날!”

휘이익!

대기가 일그러지며 흐릿한 칼날의 형상이 두 사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4서클 풍계 주문, 윈드 스매시였다.

콰쾅!

윈드 스매시가 실란과 시리스 사이를 정확히 가르며 지붕 위를 파헤쳤다. 실란이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고개 돌린 실란의 눈에 휘황찬란한 갑옷을 걸친 기사가 지붕 위로 착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빛으로 번쩍번쩍.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차림이었다.

“그라임의 황금기사!”

마법으로 상대의 퇴로를 막은 뒤, 유서스가 검을 들어 시리스와 실란을 겨누었다.

“여기까지다, 이 쥐새끼들.”

예의 바르기로 유명한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달리, 유서스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시리스가 대뜸 검을 휘두르며 돌진을 시도했다.

“흥!”

코웃음을 치며 유서스가 마검 엘드란을 아래에서 위로 크게 휘둘렀다.

“솟아오르는 대지의 숨결!”

검풍이 일어 오르며 네 줄기 회오리가 시리스의 사방을 에워싸고 휘몰아쳤다. 생포해야 하니 살상력이 높은 마법 대신 바람을 일으켜 움직임을 얽매려는 것이었다.

‘잡았군.’

무심한 눈으로 유서스가 시리스에게서 눈을 떼려던 차였다. 갑자기 시리스의 롱 소드가 좌우를 빠르게 베어 갔다.

“타앗!”

검으로 바람을 베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놀랍게도 검날이 회오리를 베어 내며 전격을 토했다.

파지지직!

네 줄기 회오리가 순식간에 소멸했다. 동시에 시리스가 지붕을 박차며 유서스의 턱 밑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섬뜩한 검광이 빛을 뿌리고 길게 휘둘러졌다.

타앙!

검날과 검날이 맞부딪치며 시리스가 뒤로 튕겼다. 제대로 틈을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유서스가 황금의 검을 휘둘러 공격을 걷어 낸 것이다. 반격에 실린 검력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튕겨진 시리스가 채 자세를 못 잡고 지붕 위를 한 바퀴 굴렀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시리스가 구른 기세를 살려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재차 전투태세를 취한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롱 소드를 보며 유서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검이 아니군?”

마법의 바람을 평범한 칼날로 벨 수 있을 리가 없다. 엘드란만은 못해도 상당한 수준의 마법검이었다.

하긴, 무려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란타스가 쓰던 검이다. 가진 건 돈 밖에 없다는 롤페인 상회가 귀한 오러 능력자에게 싸구려 검을 사 주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 시리스가 들고 있는 롱 소드 정도면, 어지간한 소국의 기사단장이나 들고 다닐 귀한 물건인 것이다. 물론 유서스가 저 속사정까지 알지야 못하겠지만, 적어도 노예 종족인 엘프 따위가 휘두를 물건이 아니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엘프에게 저런 귀한 검을 들렸단 말인가?’

그렇게 잠시 유서스가 당혹해하는 사이, 실란이 재빨리 신성 주문을 읊조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사자의 용맹을 허락하소서. 검 든 두 팔에 거인의 힘이 깃들고 그 눈이 매처럼 매서워지며 두 다리가 굳센 수소가 되어 적을 치게 하소서!”

일명 여신의 풀 서비스. 시리스의 전신이 분홍빛으로 반짝이며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실란을 본 유서스가 더더욱 당혹해했다. 저 정도 실력이면 누가 봐도 최고위 신관이었다.

“역시…….”

담 넘는 놈은 오러 유저에, 데리고 다니는 노예는 초고가의 마법검을 휘두르더니, 이제 애송이 순례자처럼 보이는 소년이 고도의 신성력을 선보인다.

“그냥 도둑놈들은 아니었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유서스를 보며 실란이 슬쩍 손사래를 쳤다.

“아니, 저기 오해할 만하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말이죠. 사실은 그게…….”

“타앗!”

실란의 말을 중간에 끊은 채, 한껏 강화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시리스가 다시 돌격했다. 유서스가 차분히 공격을 받아넘겼다. 허공에 불꽃이 튀며 단숨에 수차례의 검격이 오고 갔다.

‘확실히 지금은 대화로 풀 만한 상황이 아니지.’

혀를 차던 실란도 또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필라넨스시여, 눈앞의 적에게 신성한 철퇴를 내리소서!”

분홍색 빛의 망치가 마구 날아들었다. 유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위 프리스트가 가끔 저런 식의 신성 주문을 쓰는 건 봤었지만, 저렇게 성광의 망치를 소나기처럼 퍼부어 대는 건 처음 봤다.

‘진짜 어느 동네 주교쯤 되나?’

뭐,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맞서기 힘들 정도의 강자란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그라임의 황금기사, 엄연히 오러 능력자 급의 마검사인 것이다.

“천공의 궤적, 바람 따라 흐른다.”

유서스의 등 뒤로 마법의 기류가 생성되더니 허공을 휘몰아치며 날아드는 분홍색 망치들을 일제히 후려갈겼다. 강렬한 마력에 휩싸인 실란의 성광 망치가 단숨에 소멸해 허공에 녹아들었다.

“내 주문이 저렇게 간단하게?”

놀란 실란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유서스는 눈앞의 엘프 소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방어에만 치중하던 그의 검세가 점점 공격으로 바뀌어 간다.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느라 잠시 수세에 몰렸지만, 대충 파악이 된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황금빛 마검 엘드란이 본격적으로 시리스를 압박해 가기 시작했다.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점점 뒤로 밀렸다.

“크윽!”

시리스도 어떻게든 반격을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기본적인 신체 스피드가 너무 차이가 났다. 결국 유서스의 휘둘러 치기에 그녀의 롱 소드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갔다. 검을 놓친 시리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뒤 유서스가 바로 검을 내려 겨눴다.

“끝이다.”

차가운 칼날이 쓰러진 그녀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눈다. 무심하던 표정이 무너지며 시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제길!”

“시리스!”

쓰러진 시리스를 보며 실란이 허겁지겁 기도를 준비했다.

“필라넨스시여!”

물론 유서스는 실란이 기도를 이어 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고위 신관이 입 놀리게 놔두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는 건 전장의 상식. 유서스가 바로 왼손을 뻗으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대, 침묵하라!”

“당신의 종에게…… 웁! 우우웁!”

입 주변의 대기의 흐름을 막아 언령을 구사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수법이었다. 성직자나 마법사들끼리 싸울 때 서로의 주문 시전을 막는 꽤나 보편적인 방법이다. 물론 그런 만큼 어지간한 성직자나 마법사라면 이런 수법에 대한 파훼법도 다들 가지고 있다. 실란도 재빨리 대비책을 시도하려 했지만…….

“피어라, 광휘의 꽃이여!”

이어진 유서스의 마법이 실란과 시리스를 동시에 뒤덮었다. 마력의 넝쿨이 지붕에서 피어올라 두 사람을 칭칭 감쌌다. 넝쿨에서 황금빛 장미가 피어오르며 아득한 향기를 피운다. 그 자욱한 내음에 둘의 정신이 점점 흐릿해졌다.

“……으윽!”

“……시, 실란…….”

신음을 흘리며 결국 시리스와 실란은 기절해 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축 늘어진 두 사람을 보며 유서스가 그제야 숨을 골랐다.

“후우…….”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성직자 소년도 소년이거니와, 이 엘프 소녀의 검술도 절대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슬레이어겠지? 그렇다 해도 실력이 너무 좋은데…….”

워낙 고가의 노예이다 보니 유서스는 슬레이어가 없었다. 원래 슬레이어라는 건 실용성보다는 허영심이 더 크게 자리하는 품목이다 보니, 사실 가격 대 성능비가 전혀 안 맞는 것이다. 슬레이어 하나 살 돈이면 차라리 그 돈으로 마도구들을 잔뜩 사서 기사단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 낫다는 게 유서스의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가문의 슬레이어는 제법 봐 왔다. 개중에는 어지간히 단련한 기사 수준의 검술을 지닌 슬레이어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엘프 소녀…… 시리스라고 했던가?’

이 소녀는 검술만 치면 이름 높은 검사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솔직히 유서스보다도 우위인 것 같았다.

‘맨몸으로 붙었으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겠군.’

승패를 가른 것은 단순히 저 실란이란 소년의 신성 가호보다 마갑 엘드라드의 능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일 뿐.

“……그렇다 해도 승리는 승리다.”

찜찜한 기분을 애써 털어 내며 유서스는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지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온 켈베른 자작가의 병력과 테네스 기사단, 그리고 유서스가 데리고 온 가문의 마법사들이었다.

“이들을 포박하라! 마법사 폴론, 금제를 준비해 주시오!”

“예! 유서스 님!”

폴른이라 불린 마법사가 시리스와 실란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다. 켈베른 자작가의 병사들이 둘을 포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려 호송할 준비를 갖췄다.

“이들을 성으로 데려가 배후에 대해 캐겠다!”

“예, 유서스 님!”

명령을 내린 뒤 유서스는 사뿐히 몸을 날려 지붕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준엄하게 소리쳤다.

“성으로 돌아간다!”

☆ ☆ ☆

레펜하르트는 두 발로 바닥을 짚고 서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드워프 처녀, 틸라가 감탄을 터트렸다.

“정말 굉장한 회복력이네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사실 틸라는 조금 실망했었다. 광산에서 일하며 부상을 입는 드워프들을 많이 본 그녀였다. 그녀가 본 레펜하르트의 상처는 반신불수가 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설사 상처가 아문다 하더라도 두 다리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리 알 포트께서 예언했다지만, 걷지도 못하는 이가 과연 일족을 구원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신께서 점지한 이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저 한나절 동안 침대에 누워서 보리죽을 미친 듯이 퍼먹는 것만으로, 자력으로 일어나 걸을 정도의 수준까지 회복한 것이다. 굉장하다 못해 비상식적인 회복력이었다.

‘아니, 저쯤 되면 오히려 회복이라기보다는 트롤들의 재생력에 가까울지도?’

그렇게 틸라가 딴생각을 할 때였다. 벽을 짚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던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챙겨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았습니다.”

“……제가 드린 건 전설 속의 엘릭서 같은 영약이 아니라 그냥 보리죽인데요.”

솔직히 정말 엘릭서를 퍼먹였어도 저렇게 빨리 나았을지는 의문이다. 틸라가 뺨을 긁으며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좋은 음식을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있는 게 보리죽뿐이라…….”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구해 주고, 제대로 음식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신체 치유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는 해도 뭔가 뱃속에 집어넣어 주지 않으면 그 효능은 크게 반감하니까.

‘고기를 좀 먹었다면 좀 더 빠르게 회복되었겠지만 뭐, 그런 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의 식량 사정이 좋을 리가 없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레펜하르트가 먹어 치운 보리죽도 꽤나 큰 지출일 터였다. 조금 먹은 것도 아니고 커다란 사발로 열댓 그릇은 해치웠으니까. 아마도 이로 인해 몇몇 드워프들이 본의 아닌 다이어트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 참 미안하네. 쩝…….’

어쨌건 지금은 몸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 최우선, 레펜하르트는 호흡을 고르며 계속 전신의 오러를 운용했다. 틸라가 문득 물었다.

“아, 몸이 많이 나았으면 신관님을 불러도 될까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던데.”

뭐, 이야기 나누는 정도야 전혀 문제가 없다. 막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생각을 바꿨다. 손님 주제에 자리에 앉아 주인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아니, 제가 찾아가죠. 어차피 걷는 것에는 이제 문제가 없으니까요.”

“아, 그럼 제가 안내할게요.”

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레펜하르트를 부축했다.

레펜하르트를 구해 준 드워프들은 스틸해머 일족, 켈베른 자작가의 노예로 살아가는 마운틴 드워프 계열의 부족이었다.

엘프나 오크 노예와 달리 드워프들은 비록 노예일지언정 어느 정도 자체적으로 마을을 이루어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드워프의 쓰임새가 저 두 종족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오크나 엘프 노예가 인간 사회에서 하는 일은 크게 전문 지식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크들은 보통 단순 노동력으로 쓰이고 엘프들은 시종이나 성노로 쓰이는데 이것에 딱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치는 않은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슬레이어나 검투사처럼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노예들도 있지만, 이 교육은 인간들이 충분히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드워프는 다르다. 인간이 드워프 노예를 부리는 분야는 탄광이나 건축, 대장장이나 세공 계열의 일이다. 그리고 이 전문 분야의 지식은 인간이 가르칠 수가 없다.

드워프가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며 그들이 숨겨 왔던 일족의 지혜 대부분은 인간에게 공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지혜를 인간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탄광을 파기 위해 광맥을 찾는 지혜를 배운다 치자.

인간이 요구한다.

광맥을 찾는 법을 공개하라!

드워프가 대답한다.

대지의 소리를 들으면 됩니다. 참 쉽죠?

이게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드워프들도 그 이상의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소리가 들려서 땅 파는 것인데 여기다 무슨 설명을 덧붙이라는 건가?

광맥 찾는 법을 포기한 인간이 이번엔 다른 걸 요구한다.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합금화하는 방법을 공개하라.

또다시 드워프가 흔쾌하게 대답한다.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녹여서 잘 담금질하다가, 두 녀석의 근성이 차오른다 싶으면 그때 합치면 됩니다.

드워프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의 눈에는 저런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냥 들려서 땅 파고 보이니까 담금질하는데 설명이 될 리가 없었다. 빨강과 파랑을 구별하는 법을 알려 달라고 아무리 장님이 닦달해 봐야, 시력을 지닌 이가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드워프들의 기술 전수라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광맥을 찾는다고 하면, 아무리 대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도 선조의 지식을 잇지 못한 드워프가 바로 광맥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지의 소리가 들린다 해도 어느 것이 강철의 소리이고 어느 것이 미스릴의 소리인지의 구별법만은 배우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대장장이 일이나 건축 일도 마찬가지다.

드워프들이 특유의 기술력이 없다면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 기술력의 전수는 오로지 드워프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오크나 엘프 부족과 달리 드워프 부족이란 곧 전문가들의 집단이란 의미와도 같다. 오크 농장처럼 단순하게 그저 상관없는 드워프들을 모아 놓는다고 척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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