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제7장 엘류시온의 목소리 (8/84)

제7장 엘류시온의 목소리

1

회색빛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통로, 사방이 어둠인 그곳에서 불빛이 연신 번뜩이고 있었다.

화르르륵!

푸른 화염이 사기邪氣를 가득 담고 날아온다. 순간 검광이 불꽃을 둘로 갈랐다. 갈라진 불길을 뚫고 미모의 엘프 소녀가 백금발을 휘날리며 돌진해 갔다. 마염魔炎을 토한 나이트 스컬의 머리 위로 롱 소드의 칼날이 예리하게 내리쳐졌다.

“야압!”

검게 물든 해골이 박살 나며 그 위로 덧씌워져 있던 인간의 환영이 촛불처럼 흔들려 흩어져 갔다. 비명과 함께 일도양단된 나이트 스컬이 부서져 내렸다.

“케에에에!”

뒤에서 실란이 소리쳤다.

“시리스! 조심해!”

다른 나이트 스컬이 푸른 안광을 이글거리며 검을 찔러 오고 있었다. 녹슨 검이지만 검신에 사이한 기운이 어려 있어 우습게 볼 위력이 아니었다. 시리스가 잽싸게 몸을 돌려 검을 튕겨 냈다.

타탕!

진각을 밟아 순간 체중을 높이며 시리스는 검을 쳐 내 나이트 스컬들을 뒤로 밀쳤다. 그 틈에 실란이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주받은 이들에게 정화의 빛을 내리소서!”

분홍빛 성광이 실란의 손끝에서 뻗어 나와 나이트 스컬들을 휩쓸었다. 일명 턴 언데드, 해골들을 감싼 사기의 기운이 폭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역시 나이트 스컬, 스켈레톤 계열의 언데드 중에선 최상급 몬스터답게 완전히 정화가 되진 않았다.

실란이 혀를 찼다.

‘쳇! 이 정도론 부족한가?’

잠깐 밀린 나이트 스컬들이 재차 시리스에게 덤벼들었다. 열심히 막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숫자가 숫자다 보니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실란이 시리스에게 손을 뻗으며 재차 기도를 올렸다. 마음이 급해지니 절로 기도문도 짧아졌다.

“필라넨스 님! 쟤한테 풀 서비스!”

이미 기도도 아닌 것 같지만 용케도 신성 가호가 발동했다. 과연 여신다운 통찰력, 저따위로 기도해도 다 알아들으시는 것이다.

시리스의 전신에 각종 신체 강화술이 걸려 핑크색으로 빛났다. 분홍색 엘프 소녀가 푸른 해골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 갔다.

“이야아아압!”

한편 레펜하르트는 복도 반대편에서 다섯 개체의 악마들과 맞서 싸우며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흐음, 호흡 잘 맞네, 쟤들.’

전사와 성직자가 팀을 이루는 경우는 꽤 흔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서로를 보조하며 전투를 전개하는 데는 상당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저들은 몇 년이나 함께해 온 팀처럼 절묘한 팀워크를 보이고 있었다.

‘저건 시리스가 대단하다기보다는, 실란이 워낙 여러 타입과 호흡을 맞춰 보았단 소리군.’

시리스는 분명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검사였지만 역시 경험은 부족했다. 지금 저 절묘한 팀워크는 전적으로 실란, 저 어린 소년의 재량이었다.

‘재능이야 타고 태어났다곤 쳐도 저 나이에 저 정도 경험을 한 건가? 대체 몇 살 때부터 실전에 나선 거야, 저 녀석?’

생각보다 실란은 더 대단한 성직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신성력도 막강하다. 저대로 꾸준히 성장한다면 전생의 숙적, 성녀 엘린보다도 더 굉장한 프리스트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그런데 저런 녀석이 대체 왜 무명無名이었지?’

레펜하르트는 전생에 수많은 이름 높은 성직자들을 파악한 바가 있었다. 대륙 전체가 그를 적대했으니 안타레스 제국의 황제로서 그 정도 정보 수집은 필수였다. 그런데 그 속에 실란의 이름은 결단코 없었다. 지금이야 아직 어려서 그렇다 해도, 훗날에 대단한 성직자가 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저 녀석, 설마 요절하나? 혹시 지병이라도 있는 거 아냐?’

한가할 때 의료 길드라도 한번 찾아가 볼까? 라며 잠깐 레펜하르트가 딴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탈케라!”

악마 하나가 고함을 터뜨리며 손톱을 찔러 왔다. 방심한 덕분에 손톱이 제대로 어깨를 긁었다.

“윽!”

옷이 찢어지며 어깨에 살짝 통증이 왔다. 뭐, 그래 봤자 조금 부은 정도였다.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발을 매섭게 휘둘렀다.

“이 자식이!”

무시무시한 펀치와 킥이 회오리치며 악마들을 빨아올린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놈의 약점은 옆구리의 핵, 저놈의 약점은 양 뿔. 요놈은 뭐더라? 아, 이건 그냥 세게 패면 되겠구나.’

황금의 오러가 넘실거리며 악마들을 단숨에 몰아쳤다. 약점을 다 알고 있으니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닌 것이다. 뭐, 개중엔 냉기에 약하다거나 하는 그런 마법적 약점을 가진 악마도 있었지만, 그런 놈은 그냥 열심히 패서 잠재우면 되었다.

잠시 후, 모든 악마가 박살이 나 피 떡이 되었다. 휘날리는 피와 살점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숨을 골랐다. 마침 시리스와 실란도 나이트 스컬들을 모두 처리하고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려 안부를 물었다.

“다친 데는 없니?”

고개를 끄덕이며 실란이 통로 안을 바라봤다.

“네, 그런데 이 유적 이름이 엘류시온이라 했던가요? 이거 팔톤 유적보다도 더 센 놈들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여기는 뒷길이라 좀 나은 편이지.”

차탄 공국을 떠난 지 보름째, 그라임 왕국에 들어선 레펜하르트 일행은 그대로 세텔라드 산맥으로 향했다. 산길을 걸어 곧장 이곳, 엘류시온 유적으로 향한 이들은 곧바로 던전의 중심부로 직행했다. 신기하게도 레펜하르트는 뭔가 바닥의 돌 몇 개를 옮기는 것만으로 숨겨진 뒷길의 비밀문을 열어 버렸던 것이다.

‘쉬운 길 뻔히 아는데 굳이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그가 목표로 하는 유물, ‘엘류시온의 목소리’가 있는 곳은 유적의 중심지였다. 전생에 각종 고생을 하면서 레펜하르트는 모든 통로를 전부 조사했었고, 그래서 간신히 뒷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은의 시대 유물은 중심지 말고도 유적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그 돈 덩어리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중심부에서 일단 방어 시스템만 해제해도 한층 유적 탐사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숨겨진 통로를 따라 전진했다. 강력한 악마들은 레펜하르트가 상대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 언데드들을 실란과 시리스가 처리하며 그들은 빠르게 유적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눈앞에 통로가 끝나며 커다란 석문이 나타났다. 온갖 마법 금속으로 도금해 복잡한 문양을 덧씌운 문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도착했네.”

실란이 문을 살피더니 인상을 썼다.

“마법으로 봉인된 문이에요. 힘으로는 열 수 없겠는데요?”

마법으로 봉인된 문은 단순한 물리력만으로는 부술 수 없다. 가해진 물리력을 봉마의 주문이 강제로 사방으로 흩어 버리기 때문이다. 같은 힘이라도 송곳을 든 채 찌르면 깊숙이 박히지만, 그냥 맨손으로 치면 나무가 멀쩡한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오러 능력자인 레펜하르트의 물리력이라면 맨손으로도 아름드리나무를 분지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아름드리나무는 싹 날아가겠지. 그리고 여기서 그 나무가 바로 석실이다. 힘만으로 봉마의 주문을 깬다는 건, 이 석실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는 소리나 같다.

“그래서 제가 마법사 하나 고용하자고 했잖아요? 계속 필요 없다더니만…….”

실란이 연신 툴툴거렸다. 코앞까지 와서 돌아가게 생겼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개문開門의 마법은 3서클 주문으로, 어지간한 정식 마법사라면 다 구사할 수 있다. 아무 마법사나 한 명만 데리고 왔으면 쉽게 해결했을 문제인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태연했다. 그라고 여기에 이런 문이 있는 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기다려 봐. 주문을 준비할 테니.”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레펜하르트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실란이 기겁하며 물었다.

“잠깐? 레펜 씨, 마법도 쓸 줄 알아요?”

“응, 나 원래는 마법사였어.”

중간 과정이 싹 생략되긴 했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대답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실란으로서는 기가 막힌 소리였다.

“에에엥?”

세상에는, 분명 마법과 무술을 함께 구사하는 마검사魔劍士나 마권사魔拳士라는 직종이 있다. 하지만 마검사는 대체로 용병 출신 무인들이 실력의 벽을 느끼고 마도구를 사용하거나 간단한 마법을 몇 개 익혀 신체를 강화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진정 양쪽에 높은 수준을 지닌 마검사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레펜 씨, 마권사였어요?”

마권사는 사실, 전투 마법사의 다른 말이다. 마법사 중에서도 실전을 위한 마법만 전문적으로 익힌 전장의 마도사들, 그들이 날아드는 창칼을 피하며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 체술을 함께 익히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마법사가 체술도 익혔다 정도지, 본격적으로 무인의 길을 걷는다는 소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레펜 씨는, 마법을 익힐 만큼 머리도 좋은 주제에 무술에도 재능이 넘쳐서 오러까지 각성했단 말이야?’

억울하다! 누구는 남자다운 몸 하나만 바라고 죽어라 연습해도 알통 하나 안 생기는데 누구는 몸도 좋고 머리도 좋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그렇게 분통을 터트리며 실란이 레펜하르트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던 차였다. 문득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지금 뭐 해요?”

주문 쓰겠다는 양반이 어째 아까부터 계속 주저앉아 눈만 감고 있다.

“명상 중이다. 마력을 모아야지.”

“네?”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아니, 3서클 주문에 마력 얼마나 든다고 명상씩이나?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명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10여 분간이나 가부좌를 한 채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간신히 3서클 마법을 구사할 마력이 모이자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랄피아…… 데…… 라테아…… 볼트…….”

체내의 마력을 마법으로 전환하는 룬어, 저것을 준비하는 데 한 30초 걸렸다.

“고대의 이름으로 명한다…… 봉인의 힘이여…… 그 닫힌 문을 열어라.”

전환된 마법을 술식화하는 마법의 언령, 이것에 또 한 30초 걸렸다.

“…….”

실란은 입을 쩍 벌렸다. 평생 이렇게 느려 터진 마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레펜하르트가 현실 구현화를 위한 시동어를 외쳤다.

“게이트 오픈!”

석문이 살짝 진동하며 봉마의 주문이 풀렸다. 석문이 끼긱거리며 천천히 열린다. 수백, 어쩌면 수천 년간 움직이지 않았을 고대 유적의 문이 열린 것이다!

……물론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실란에겐 어떠한 감흥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레펜 씨,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하지 말아요.”

원래 마법사였다기에 억울해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아니, 3서클 주문에 1분 가까이 걸리는 주제에 마법사는 무슨 마법사?

“시끄러, 어쨌거나 열었잖아.”

레펜하르트가 뚱한 얼굴로 일어났다. 전생에는 역사상 최초의 10서클 대마법사가 되어 전 대륙을 상대로 마왕으로까지 군림했던 그였는데 이런 소리나 듣다니?

‘아으, 진짜 빨리 엘류시온의 목소리부터 찾아야지. 이거 참 서러워서 살 수가 있나.’

하여튼 문은 열렸다. 이제 이 안에 그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있으리라. 흥분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어?”

그의 입에서 당혹감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뭐야? 왜 텅 비었어?”

☆ ☆ ☆

한겨울의 세텔라드 산맥 기슭, 순백의 설산 속 작은 산길 위로 세 사람이 걷고 있었다. 한 발자국쯤 떨어져 말없이 뒤를 따르는 백금발의 엘프 소녀와 붉은 머리의 예쁘장한 소년, 그리고 앞장서 걸어가며 연신 한숨을 푹푹 쉬는 거구의 청년이었다.

“후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가 재차 한숨을 내쉰다. 실란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달랬다.

“에이, 레펜 씨. 너무 그렇게 속상해하지 마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텅 빈 유적의 중심부에 망연자실한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다른 지역도 탐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딜 가도 마찬가지였다. 존재하는 것은 유적에 의해 묶인 각종 마물들뿐, 기억 속의 모든 유물들이 싹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통로며 석실 곳곳에 갓 생긴 것이 분명한 파괴의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확실했다. 누군가가 그보다 먼저 엘류시온 유적을 털어 버린 것이다!

실란이 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유적이 레펜 씨 소유도 아니잖아요? 딴 사람이 먼저 탐사할 수도 있는 거지.”

고대 유적에 대한 정보를 비싼 돈 주고 구입해 달려가 봤더니 이미 딴 놈이 쏠랑 털어 버렸더라는 이야기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흔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실란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엘류시온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원래 17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것도 레펜하르트 본인에 의해서. 이건 누가 먼저 선수 쳤다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미래가 바뀌었다…….’

자신이 이 시간대로 시공 회귀한 시점에서 미래가 점점 어그러질 거란 것쯤은 익히 짐작하고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그는 마법사, 당연히 인과율에 대한 개념 역시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설마 그 영향이 벌써 일어나는 건가?’

아주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레펜하르트의 과거에서는 죽어야 할 인물이 자신 때문에 살아났다면 그 인물이 우연히 이 던전을 발견해 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실란은 그저,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허탕 친 자의 수심 정도로만 이해하고 계속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못 건진 건 아니잖아요? 저것도 굉장한 아티팩트인 것 같은데.”

말을 하며 실란은 힐끔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뒤를 따라 걷고 있던 그녀는 왼손에 3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막대기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나무 막대기일 뿐이다. 하지만 시리스가 작게 중얼거리자 바로 변화가 생긴다.

“니힐렌.”

막대기 양쪽 끝에서 빛이 쏟아져 형상을 이루었다. 좌우로 길어지며 부드럽게 휘어지고 빛의 실이 생겨나 그 끝을 이었다. 단순한 막대기였던 것이 커다란 빛의 활이 되었다.

시리스가 빛의 시위에 손을 얹었다. 빛의 화살이 구체화되어 손아귀에 잡혔다. 그녀가 연거푸 시위를 당겼다.

파파팟!

빛의 화살이 연사로 쏘아지며 수십 미터 밖의 나뭇가지들을 차례대로 꺾었다. 실란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거 어때, 시리스?”

“굉장한 무기군요.”

차가운 어조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흥분이 엿보인다. 그만큼 시리스는 새롭게 얻은 이 마법의 활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다.

마궁魔弓 니힐렌.

이 마법의 활은 따로 화살도 필요 없을뿐더러 바람이나 중력의 영향도 받지 않는 데다가 사용자의 집중력에 따라 여러 발을 장전해 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마나 게더링의 힘이 있어 그냥 놔두기만 해도 저절로 마력이 충전되고, 무엇보다도 휴대성이 엄청나다. 평소에는 그냥 막대기일 뿐이니까. 은의 시대 유물 꽤나 봐 온 실란이 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의 아티팩트다.

“저런 굉장한 걸 그냥 버리고 가다니, 쯧쯧.”

다른 유물과 달리 겉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나무 조각 정도로만 보였기에 아마도 그냥 놓고 간 모양이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유물인 줄도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레펜 씨는 저게 아티팩트인 줄 어떻게 알아본 거예요?”

실은 저 마궁 니힐렌은 전생의 시리스가 주무기로 쓰던 활이었다. 그 당시엔 레펜하르트도 저것이 대단한 유물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막대기의 재질이 처음 보는 것이기에 연구차 들고 왔고 그 와중에 기능을 알아내 시리스에게 선물했다. 저 나무 막대기가 세계수 엘븐하임의 잔재라는 것은 나중에나 깨달았다.

물론 이 이야기를 실란에게 전부 해 줄 순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아, 정보가 있었거든. 어쨌거나 마음에 든 것 같으니 다행이네.”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길을 걸으며 계속 근처 나무에 니힐렌을 쏘아 보고 있었다.

빛의 화살을 쏘는 이 니힐렌은 아무래도 보통 활에 비해 조준 감각이 미묘하게 다르다. 무엇보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화살이 포물선이 아닌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리스는 열심히 그녀가 배운 궁술과 니힐렌의 용법을 비교하며 감각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요. 대륙에 유적이 엘류시온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으음, 그렇긴 하지만…….”

위로하는 실란의 목소리에도 레펜하르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는 하나뿐이지.’

미래가 바뀐 것도 바뀐 것이지만, 당장 얻어야 할 물건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 타격이 컸다. 다른 유물들은 괜찮다. 하지만 엘류시온의 목소리만큼은 대체할 물건이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마법의 힘을 돌려줄 아티팩트였다.

‘끄응…….’

그렇게 산길을 한참 걷다 보니 삼림 너머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무 사이로 커다란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 드러났다. 실란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 슬슬 보이네요. 게할른 마을. 오랜만에 남이 해 주는 밥 좀 먹고 가요, 우리.”

게할른 마을은 세텔라드 산맥 서쪽에 위치한, 꽤나 큰 규모의 산촌이었다. 산맥을 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마을 대부분의 집들이 여관업을 겸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적당히 사람이 북적이는 여관을 하나 찾아 음식을 주문했다.

곧이어 듬직해 보이는 아주머니 하나가 양손에 푸짐하게 빵과 수프, 샐러드를 들고 식탁에 차렸다.

“많이들 드시구랴. 이거 1인분 더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덩치 좋은 레펜하르트를 보며 아주머니가 너스레를 떨었다. 훈훈한 시골 인심을 느끼며 다들 식사를 시작했다. 단순한 검은 빵에 호박 수프였는데 한입 베어 물어 보니 맛이 꽤 좋았다. 실란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투박한 재료임에도 이 정도 맛이라니?

“우와, 맛있는데요?”

“그렇지? 우리 요리사 솜씨는 일품이라고.”

아주머니가 자랑스러워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다 문득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그 거만한 작자들은 뭐 그리 미식가라고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으니.”

“응? 거만한 작자라뇨?”

“일주일 전쯤에 여기로 온 귀족가 기사들이 있다오. 무슨 유적을 탐사한다던가?”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그건 뭐하러 묻소, 청년?”

아주머니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은화 한 닢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주머니가 인상을 구기며 손을 내저었다.

“에잉, 이야기에 뭐 돈 든다고 이런 걸 다 줘?”

결국 레펜하르트는 젊은 놈이 돈 함부로 쓰면 벌 받는다는 일장 연설을 듣고서야 비로소 원하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주일 전의 이야기인데…….”

한 무리의 기사들이 세탈라드 산맥의 새 유적을 탐사한다는 목적으로 게할른 마을을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잠시 묵으며 정비를 했는데, 계속 잠자리가 불편하다느니 음식이 개도 안 먹을 것이라느니 하면서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디의 누구인지는 못 들었습니까?”

“케벨른 자작님이 모시고 왔는데, 어째 자작님보다 다들 높아 보였수.”

이곳 게할른 마을은 케벨른 자작령의 자치촌 중 하나다. 그러니 케벨른 자작이야 알아보겠지만 다른 이들까진 알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일단은 케벨른 자작가를 찾아가 봐야 하려나?’

레펜하르트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아주머니가 손뼉을 치더니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중 금색으로 번쩍번쩍하는 기사님이 하나 계셨다오. 그분은 참 좋은 양반이었어. 친절하고 우리 같은 촌사람들에게도 자상했지. 그런데 온통 금색이니까 좀 웃기기는 하더만? 심지어는 칼조차도 금칼이었다니까?”

순간 레펜하르트는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다. 황금의 갑옷에 황금의 검이라면 대륙이 넓다 해도 단 하나뿐이다.

‘……그라임의 황금기사! 테네스 백작가였나.’

☆ ☆ ☆

켈베른 자작령은 세텔라드 산맥 서남쪽 인근에 위치한 작은 영지였다. 영지 대부분이 산지라 농업 쪽은 간신히 자급자족할 수준이지만 대신 매장량이 풍부한 철광과 동광을 세 개나 지니고 있어 영지민의 생활은 꽤 풍족한 편이었다. 그 덕에 켈베른 자작은 작위는 낮지만 그라임 왕국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그 자작의 성에서 지금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자작과 마주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성찬을 앞에 두고 쉰이 넘은 켈베른 자작은 진심 어린 태도로 사내를 향해 찬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유서스 경!”

사내가 겸양하며 고개를 저었다.

“켈베른 자작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이지요.”

자작이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 유적의 마물들을 해치운 건 유서스 경이 아닙니까? 역시 그라임의 황금기사,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똑똑히 보았습니다그려.”

켈베른 자작이 눈앞의 사내, 유서스의 연락을 받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 내에 엄청난 고대 유적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에 잠시 꿈이 아닌가 의심했다. 고대 유적을 한번 탐사하게 되면 그곳에서 나오는 재물의 양은 보통이 아니니 어떤 영주라도 반가워하지 않을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작이 진정으로 반가워한 것은 유적의 존재가 아닌, 황금기사 유서스 경과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가진 것은 돈뿐인 이런 시골 귀족이 그라임 왕국 내에 명성이 드높은 기사와 안면을 익히게 될 기회는 거의 없는 것이다.

바로 유서스의 청에 따라 탐사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 테네스 기사단을 맞이했다. 그리고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해 직접 탐사대에 끼어들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기사로서의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였다. 쉰이 넘은 나이였지만 산사람답게 청년처럼 듬직한 육체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아무리 유적이 위험하다 해도 자신의 몸 하나쯤 지킬 자신은 있었다.

그렇게 친분을 쌓기 위해 시작한 여정 속에서, 켈베른 자작은 유서스 경에게 진심으로 매료되어 버렸다. 그는 강인하고 인자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했고 부하들에게도 자상했다.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기사 중의 기사였다.

험한 탐사 과정에서 많은 수하들을 잃긴 했지만, 결국 유서스는 저 고대 유적,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엄청난 보물을 거두어 귀환하게 된 것이다.

켈베른 자작이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성 정원에서는 십여 명의 마법사들이 오크 노예를 부리며 유적에서 얻은 유물들을 조사해 분류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를 눈치챈 유서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켈베른 자작. 미리 약정했던 대로 유물의 3분의 1은 당신의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라임의 황금기사와 함께 싸우는 영광을 얻었는데 저깟 유물이 대수겠습니까? 모두 가져가셔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자작이 정색을 했다. 실제로 그는 저 유물들에 대해선 전혀 욕심이 없었다. 어차피 돈은 썩을 만큼 있다. 그보다는 눈앞의 이 사내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더욱 큰 이득이었다. 자신이야 이 작은 영지에서 살아간다 해도, 후손들에게는 좀 더 큰 세계를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진심이 느껴졌는지 유서스의 표정도 밝아졌다.

“저런 보물 앞에 탐욕을 부리지 않으시다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아, 그런데 유적에서 발견한 아다만트와 오리하르콘 광석들은 어찌 처리하시겠습니까?”

고대 유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물은 대체로 완성품이 많지만, 가끔 원자재 상태의 희귀한 마법 금속들도 나오곤 했다. 이번에 그들은 엘류시온에서 상당한 양의 아다만트와 오리하르콘 역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마법 금속이라도 가공하지 않으면 돌멩이와 다를 바가 없을 터.

“하하하, 부리고 있는 땅강아지들에게 이미 저것들을 제련해 갑옷과 무구를 만들라 일러 뒀습니다. 보름 정도면 괜찮은 물건들이 나올 겁니다.”

“역시 광산업으로 이름 높은 켈베른 가문입니다. 유능한 드워프들을 많이 가지고 계시군요.”

유서스는 빙그레 웃었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켈베른 자작가의 부는 단순히 광산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쌓인 것이 아니다. 켈베른 자작가는 대대로 드워프 노예들을 부려 광석을 캐고, 그것을 직접 제련해 각종 무구를 만들어 팔아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훌륭한 물건이 나와 줄 것이다.

켈베른 자작이 근사한 라벨이 붙은 와인병을 꺼내 유서스에게 따랐다.

“안심하고 술이나 드시죠. 노르간에서 만든 21년산입니다.”

“호오, 이런 귀한 와인을?”

“아무리 귀하다 한들 그라임의 황금기사 앞에서는 초라할 뿐이지요.”

“너무 띄워 주시는군요. 그라임 왕국엔 저보다 더 뛰어난 기사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뛰어난 무용에 겸손하기까지 하시니 실로 기사의 귀감입니다. 받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와인 잔을 기울여 향기를 맡은 뒤 유서스가 감탄을 터트렸다.

“훌륭한 향이로군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저녁 성찬을 즐겼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켈베른 자작이 손뼉을 쳤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두 소녀를 대동하고 다시 나타났다.

자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들이 제 여식들입니다. 인사들 올리거라. 명성 높은 그라임의 황금기사, 유서스 테네스 경이시다.”

소녀들이 치맛자락을 살짝 걷고 귀족다운 인사를 올린다. 두 소녀 모두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켈베른이 은근히 말을 건넸다.

“성혼하셨다는 건 압니다. 그저 좋은 친분을 남길까 하여…….”

자작은 지금 은근히 자신의 딸들을 유서스와 연결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비록 결혼을 했다 해도 고위 귀족이 첩을 두는 것은 흔한 일이다. 특히 유서스 정도의 명성이라면 그것이 영웅다운 면모일지언정 결코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켈베른 자작의 지금 태도는 전혀 귀족의 예의에 어긋난다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두 딸 모두 인근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미녀들인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유서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굉장히 불쾌하다는 티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아내 외의 다른 여인을 품을 생각이 결코 없습니다.”

단호한 태도였다. 켈베른 자작은 순간 당황했다. 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하지만 저건 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런 상황 자체가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나?’

그때 켈베른 자작은 비로소 황금기사의 가문, 테네스 백작가의 또 다른 소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 그 동생분…….”

챙그랑!

유서스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이 박살났다. 아까까지 그토록 신사답던 그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해 있었다. 유서스가 동토의 북풍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뇌까렸다.

“제게는 동생이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테이블 주위를 가득 메웠다. 켈베른 자작도, 집사와 두 딸들도 모두 얼어붙어 벌벌 떨었다. 그제야 유서스가 실수를 자각하고 바로 사죄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제야 켈베른 자작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내심 놀라웠다. 그토록 완벽해 보이던 저 황금기사가 저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자작의 경외심을 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매료되었다.

영웅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죄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작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불찰을…….”

자작이 집사에게 손을 저으며 딸을 데려가라 손짓했다. 파랗게 질린 자작 영애들을 보며 유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저 소녀들이 무슨 죄인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 자리에 와서 봉변만 당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소녀를 에스코트했다.

“이런 어여쁜 레이디라면 저 같은 유부남보다 더욱 훌륭한 상대가 있을 터, 어찌 제가 감히 이 싱그러운 꽃을 탐하겠습니까? 그저 바라보며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요.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네? 아, 네에…….”

조금 전까지 파랗게 질려 있던 소녀들의 안색이 발그레 물들었다. 역시 유서스 경은 명성대로 기사 중의 기사였다. 잠시 실수를 했어도 훌륭하게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그렇게 다시 술잔을 들려 할 때였다.

“으아아악!”

창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유서스가 놀라 자리를 박차며 창가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창밖에는 붉은 화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불길이 옮겨 붙고 그 사이로 마법사며 하인들, 노예들이 우왕좌왕 도망갈 곳을 찾고 있다. 마침 밑을 지나가는 하인 한 명을 발견한 유서스가 소리를 질렀다.

“뭐냐! 보고하라!”

올려다본 하인이 공황에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물 중 하나에서 악마가 나왔습니다!”

순간 유서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젠장! 소환계 아티팩트가 끼어 있었나!”

2

켈베른 성의 정원은 화염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말라붙은 정원수들이 이글거리는 불길에 재가 되고 매캐한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 파괴의 중심에서 거대한 검은 괴물이 울부짖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흑사자의 몸체에 거인의 상체가 이어진 거구의 악마, 세피아탄이었다. 엘류시온 유적에서 들고 온 유물 중 이계의 악마를 소환하는 마법이 걸린 석상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들이 유물 조사를 위해 마력을 흘리던 도중 주문이 발동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크라라라라라!”

네 발로 대지를 디딘 채 세피아탄은 양손에 든 브로드 소드를 연거푸 좌우로 휘둘러 사방에 불길을 뿌려 대고 있었다. 어깨 높이만도 3미터 가까이 되는 거구라 한손검인 브로드 소드가 어지간한 참마도보다도 거대했다. 칼날이 스치는 곳마다 인간들이 반으로 쪼개지며 피 보라가 일었다.

“으아악!”

“사람 살려!”

성의 하인이며 노예들은 공포 속에서 도망 다니다가 불에 타 절규하며 죽어 갔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주문으로 맞섰지만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마법사 중 하나가 악을 썼다.

“젠장! 왜 하필 저런 게 끼어 있었던 거야?”

소환계 아티팩트는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평생 유적 탐사를 행해도 한 번 보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니 딱히 마법사들이 조사하다 실수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더럽게 운이 없는 케이스였다.

뒤늦게 테네스 기사단이 무장을 갖추고 정원으로 달려왔다. 스무 명의 기사들을 대동한 중년 기사, 부단장 로트 경이 고함을 쳐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전열을 갖춰라! 마법사들을 후위로! 기사들은 모두 방패를 들어라! 신관들이여, 가호를!”

로트 경의 지휘 아래 기사들이 빠르게 산개했다. 방패로 몸을 가리며 악마를 포위하자 세피아탄이 연신 불꽃을 뿜어 기사들을 뒤덮었다. 방패에 불길이 맞닿자 푸른 성광이 일렁이며 불길을 밀어냈다. 뒤따른 창공의 여신, 에어리어스의 신관들이 부여한 신성 가호의 힘이었다.

“에어리어스여! 당신의 미욱한 종이 청원합니다! 용맹을 가진 이들에게 사악한 마를 멸할 힘을 내려 주소서!”

후위에 선 마법사들도 잽싸게 냉기의 벽을 만들어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차가운 동토의 바람이여! 내 손길에 따라 이 자리에 임하라! 월 오브 아이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일단 명령이 떨어지자 다들 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로트 경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포위진이 구성되고 나니 저 사악한 악마도 일순 기세가 꺾여 있었다.

“좋아, 이대로 발을 묶으며 단장님을 기다린다.”

검과 방패를 들고 전위로 나서며 로트 경이 말을 이었다. 일단 기세는 꺾었지만, 저 세피아탄은 어지간한 오러 능력자나 상대할 수 있는 최상급 악마였다. 숫자로 밀어붙이려면 상당한 인명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이대로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때였다.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갑자기 명령을 거역하고 세피아탄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달려간 기사는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었다. 당황하며 로트 경이 소리쳤다.

“뭐 하는 것이냐, 러스!”

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청년 기사가 세피아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방패를 내던진 후 러스라 불린 청년은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쥐었다. 살기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악한 악마여! 테네스의 검 앞에 적은 없다!”

러스가 몸을 날리며 세피아탄의 상체에 길게 내려 베었다.

“타아아앗!”

섬광 같은 일격이었다. 단숨에 악마의 가슴팍이 갈라지며 검은 피가 솟구쳤다. 오러 능력자 정도나 상대할 수 있다는 세피아탄에게 고작 일개 청년이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만큼 방금 러스의 검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달인의 검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예술적인 내려치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크아아아!”

고통 속에서 세피아탄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 불꽃을 머금은 브로드 소드가 바로 러스를 향해 내리찍혔다. 러스도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영 몸놀림이 어설펐다. 내려치기 하나는 달인급이었지만, 그 외의 실력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채 피하지도 못하고 정통으로 두들겨 맞아 버렸다.

“커억!”

갑옷이 박살 나며 러스가 허공으로 날려 갔다. 전신 곳곳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흙바닥에 처박히는 러스를 보며 로트 경이 혀를 찼다.

“저런 바보 같은 놈!”

나가떨어진 러스를 향해 세피아탄이 검을 겨눈다. 불길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일렁인다. 에아리아스의 신관 하나가 놀러 그를 구하러 가려 했지만, 바로 로트 경이 만류했다.

“지금 이 포위망을 풀어서는 안 되오! 저런 어리석은 자를 신경 쓸 필요는 없소!”

쓰러진 러스가 울컥 피를 토하며 굴욕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세피아탄이 바로 불길을 쏘았다. 러스의 전신이 붉은 화광에 뒤덮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창공의 칼날, 허공을 찢노라!”

강렬한 외침과 함께 바람의 칼날이 날아와 화광을 갈라 버렸다. 날아오던 불꽃의 창이 사등분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동시에 건장한 청년 하나가 허공을 날아 러스의 앞에 착지했다. 우아한 귀족의 예복을 입은, 한 손에 2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참마도斬馬刀를 든 청년이었다.

테네스 기사단이 환호를 터트렸다.

“유서스 님!”

“단장님이 오셨다!”

참마도를 들어 땅에 꽂으며 유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피를 흘리며 러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유서스의 입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리석은 놈! 내려치기 하나밖에 모르는 놈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인 줄 알았더냐!”

입가에서 핏물을 줄줄 흘리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혀, 형님…….”

“누가 네 형이란 말이냐?”

순간 유서스의 두 눈에 경멸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위대한 테네스의 기사는 더러운 들개의 배에서 나지 않는다!”

유서스는 바로 러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모멸감에 러스가 이를 갈았다.

“크으윽…….”

유서스가 나타나자 모두들 포위망을 뒤로 물렸다. 싸우기에 충분한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유서스가 참마도의 손잡이를 쥔 채 세피아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러 유저가 아니면 결코 상대할 수 없다는 악마라…….”

그는 오러 능력자가 아니었다. 유서스는 오러를 각성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의 가문, 테네스 백작가는 오랜 세월 기사도로 이름 높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명성에도 불구하고 테네스 백작가에는 오러의 각성으로 이끄는 정형화된 검술이 남아 있지 않았다. 100여 년 전 그라임 왕국 내전 때 거의 실전되어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러 유저만큼이나 강했다. 지금 손에 쥔 이 무구 덕분이었다.

유서스의 무구, 황금빛 참마도는 복잡한 형태의 칼집에 싸여 있었다. 온갖 요철이 돋아나 있고 수십 개의 조각들이 엇갈려 검을 감싸는 그 형태는 칼집이라기보다는 무슨 기괴한 조형물처럼 보였다. 유서스가 검을 쥔 채 언령을 토했다.

“눈을 떠라! 엘드라드!”

칼집이 폭발하며 수십 줄기 황금빛 촉수가 되어 유서스의 전신을 감쌌다. 촉수에 엉겨 붙은 금속 조각들이 절묘하게 엇갈리며 또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곧이어 칼집은 사라지고 대신 유서스의 전신에 눈부신 황금의 갑옷이 걸쳐졌다.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아티팩트, 마갑魔甲 엘드라드였다.

칼집이 사라진 참마도, 엘드란이 눈부신 금빛 검신을 드러냈다. 유서스는 땅에 박힌 엘드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거대한 대검을 가볍게 한손으로 들어 버리는 그 모습은 분명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괴력이었다. 엘드라드에 걸린 근력 강화 주문의 힘이었다.

“와라! 이계의 악마여!”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며 유서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친다. 세피아탄이 분노를 토하며 네 발로 땅을 박찼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악마가 유서스를 향해 돌진해 갔다. 순간 유서스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나, 바람을 타는 깃털이 되리!”

날아오른 유서스를 향해 브로드 소드가 횡으로 쇄도한다. 유서스가 허공을 박차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엘드라드에 걸린 마법, 윈드 워크를 발동시켜 대기를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그대로 유서스가 참마도를 내리찍으며 고함을 질렀다.

“깨어나라, 엘드란!”

칼날 위로 예리한 기운이 떠올라 빛났다. 오러 능력자의 그것과 달리 희미한, 하지만 위력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파괴의 빛이었다.

“타앗!”

8서클 물질 파괴 주문, 매트리얼 디스트로이를 발동한 채 유서스는 참마도를 내리쳤다. 세피아탄이 브로드 소드를 교차해 검을 막았다. 불꽃과 마법이 충돌해 굉음을 울렸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 정원 곳곳을 태웠다. 악마가 교차한 검을 틀어 올려 벴다. 유서스가 빠르게 피하며 외침을 연신 토했다.

“사신의 눈, 그림자를 꿰뚫고 표범의 울음, 사지에 깃든다! 용의 감각으로 세상을 굽어볼지니!”

동체 시력 증가, 반사 신경 증가, 초감각 확장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전신에 강화 마법을 건 채 유서스는 날아드는 세피아탄의 칼날을 교묘히 피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러 능력자와 필적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보통 마검사들이 강화 마법을 걸고 싸울 경우 정신이 올라간 육체 성능을 따르지 못해 움직임이 커지기 마련이다. 힘은 강해져도 그만큼 동작이 허점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서스는 강력한 마법을 연달아 걸었음에도 전혀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세피아탄이 당황하며 두 앞발을 들어 휘둘렀지만 유서스는 대지와 허공을 교대로 박차며 모든 공격을 회피했다. 황금의 검이 춤을 추며 악마의 곳곳에 자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크윽! 크아아아!”

연신 칼질을 해도 상대를 맞추지 못하자 세피아탄이 굴욕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유서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끝을 보자, 악마여!”

쉴 새 없이 스텝을 밟으며 오른손을 참마도의 검신에 갖다 댄다.

“부식의 숨결, 허공을 흐른다!”

마검 엘드란이 진녹색의 안개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강산의 연기가 뿌옇게 일렁이며 세피아탄의 전신을 뒤덮었다. 두 자루 브로드 소드가 삭기 시작하며 악마의 피부 곳곳이 녹아내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폭염, 응집하며 적을 친다!”

유서스의 등 뒤로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이 생성되어 악마를 강타했다. 상해 버린 악마의 상처를 강렬한 불길이 지져 버린다. 세피아탄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크아아아악!”

오른손을 치켜들며 유서스가 마법을 이었다. 마갑 엘드라드가 눈부신 마법진의 문양으로 뒤덮여 빛을 발했다.

“한설의 안개, 대지를 가린다!”

새하얀 백무를 뿌리며 유서스는 검을 휘둘러 악마의 사방을 냉기의 안개로 뒤덮었다. 강력한 산과 불꽃, 냉기의 공격이 연이어지니 세피아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유서스가 허공을 박차며 악마의 정수리까지 날아올랐다. 엘드란을 휘두르며 그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사라져라!”

악마의 상체가 박살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마의 절규가 켈베린 성을 가득 메웠다.

“크아아아악!”

우우우웅…….

공기를 떨리는 굉음과 함께 세피아탄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진다. 소환된 악마가 다시 이계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윽고 완전히 모습이 사라지며 유물이었던 석상이 스스로 흔들리더니 부서져 버렸다. 세피아탄이 죽어 가며 석상 역시 마법의 힘을 잃은 것 같았다.

유서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흥! 테네스의 검 앞에 악마 따위가 적이 될 것 같으냐!”

모두들 유서스의 무위에 감탄하며 찬사를 던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유서스 님!”

“역시 황금기사의 힘 앞엔 세피아탄 같은 악마도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모두들 상황을 정리하라! 로트 경, 부탁드립니다.”

뒷정리를 명한 뒤 유서스는 마갑을 다시 칼집의 형태로 되돌렸다. 위풍당당하게 물러가는 그 뒷모습을 정원의 모든 이들이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 한 명만 빼고.

‘젠장…….’

쓰러진 채 치유술을 받고 있던 무모한 청년 기사, 러스만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서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그가 러스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유서스가 그를 향해 뇌까렸다.

“내려치기 하나만 남은 쓰레기 검술 따윈 더 이상 테네스의 검이 아니지. 주제 파악을 해라, 러스.”

러스의 고개가 푹 꺾였다. 하지만 유서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대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저택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철저한 경멸과 무시, 그것을 느끼며 러스가 어깨를 들썩였다.

“이것도 테네스의 검이야…….”

손에 든 바스타드 소드를 힘껏 쥐며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도 테네스의 검이란 말이다…….”

☆ ☆ ☆

“그래? 당대의 황금기사가 유서스 경이란 사람이란 말이지.”

“네, 엄청 유명한데 몰랐어요?”

“아, 난 산속에서만 살아서…….”

적당히 핑계를 대며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전생에 그가 세상을 떠돌던 시기엔 다른 이유로 테네스 백작가가 유명했었기 때문에, 황금기사의 명성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침상에 앉아 다리를 까닥이며 실란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들은 적이 없어요? 대륙 최강의 마검사 중 하나잖아요? 오러 능력자와도 필적할 정도라던데.”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은 식사했던 그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있었다. 날도 저물고 해서 일단 게할른 마을에서 묵고 가기로 한 것이다. 시골 여관이다 보니 시설도 그리 좋지 않아 그냥 큰 방에 침상 네 개가 놓인 것이 전부였다.

레펜하르트가 커튼이 펼쳐진 방구석 쪽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유명한가? 혹시 시리스도 들은 적 있어?”

“네, 레펜하르트 님.”

커튼을 걷고 나오며 시리스가 대답했다. 레펜하르트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임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것이었다. 꼴에 실란도 남자라고, 레펜하르트는 사랑하는 시리스의 탈의 장면을 외간 남자에게 보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잠옷 예쁘네. 어때? 잘 맞아?”

“아, 네…….”

곰돌이 잠옷으로 갈아입은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시리스가 어색해하며 반대편 침상에 앉았다. 레펜하르트가 뒷말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대답만 넙죽 하더니 다시 입을 닫았다.

‘쩝…… 쉽지 않네.’

일부러 틈만 나면 말을 걸고 있는데도 태도에 크게 변화가 없다. 역시 아직은 자연스럽게 그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마음을 열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눈치 없는 실란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마검사를 오러 유저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마도구의 힘일 뿐 아닌가요?”

아무래도 유서스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말투였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세간의 인식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무인에 비해 마법의 힘을 빌리는 마검사들을 무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마법사이기도 한 레펜하르트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글쎄? 마갑 엘드라드가 엘드릴로 만든 현 시대 최강의 무구 중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그걸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는 또 다른 문제니까.”

진은眞銀 미스릴보다 몇백 배나 희귀하고 또 강력하다는 마법 금속, 진금眞金 엘드릴.

테네스 백작가에 대대로 전승되는 마갑 엘드라드와 마검 엘드란은 이 진금 엘드릴만으로 만들어진 기물로, 은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최강급의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비록 당대의 황금기사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레펜하르트도 테네스 백작가가 대대로 배출해 내는, 엘드라드를 사용하는 마검사의 존재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다.

온갖 강력한 수호 마법이 걸려 있고 간단한 약속어만으로도 강력한 마법이 발동되는 이 아티팩트는 분명 착용자에게 오러 능력자 수준의 전투력을 부여해 준다. 단, 제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도구라도 사용할 줄 모르면 그림의 떡일 뿐이지.’

전생에 각종 마도구를 만들어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던 그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아티팩트도 결국은 도구다. 그리고 도구는 사용자가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갈리게 마련이다.

강력한 근력 증강 마법과 스피드 증강 마법을 건 마갑을 대량생산해 나누어 주어도 부하들의 질은 크게 차이가 나곤 했다. 제대로 도구의 힘을 끌어내는 부하가 있는가 하면, 마법에 휘둘려 스스로를 주체 못하는 부하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때 깨달았다. 검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검술이 필요하듯, 마도구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도 그에 걸맞은 적합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훈련에 드는 노력은 결코 검술과 비견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단지 도구의 힘이라고 치부하면, 검을 든 검사들도 모두 도구의 힘으로 강해진 것이라 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적어도 테네스 백작가는 엘드라드의 힘을 제대로 끌어 쓰는 방법을 대대로 연구해 온 가문이니까.”

실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헤에? 레펜 씨는 마검사에 대한 평가가 높네요? 오러 유저 정도 되면 보통 마검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테네스 백작가의 ‘마갑 활용술’에는 분명 어지간한 검술 이상으로 심오한 면이 있으니까.”

마갑 엘드라드는 분명 강력한 마도구이지만, 그 힘을 100퍼센트 끌어내는 방법은 테네스 백작가에만 전해져 온다. 다른 이들이 엘드라드와 엘드란을 사용한다 해서 오러 능력자와 같은 힘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갑이 강력한 만큼, 그 강력한 마법에 휘둘려 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테네스 백작가는 저 엘드라드의 힘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서 오러 능력자와 비슷하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연구하고 노력해 온 것이다.

“듣기로는 제대로 된 검술의 길을 잃어 그런 식으로 대체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이쪽이 가문 입장에서는 더 낫다고 봐. 아무리 정식 검술을 갈고 닦아도 오러 유저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불확실하지. 그에 비해 황금기사는 확실하게 한 세대에 하나씩은 나오잖아? 오러 유저급 위력을 지닌 무인이 가문에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큰 이득이지.”

어쨌거나 지금 확실한 것은, 저 유서스 경이란 자가 틀림없이 오러 유저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레펜하르트가 난감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엘드라드를 쓰는 마검사라…… 이거 까다롭겠는데?”

오러 유저와 싸워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태에 빠져 수련을 게을리한 오러 능력자와, 비록 오러를 각성하진 못했지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노력에 노력을 더한 마검사.

아무리 생각해도 레펜하르트는 후자에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

그의 혼잣말에 실란이 놀라 물었다.

“응? 레펜 씨, 설마 테네스 백작가와 싸울 생각이에요?”

레펜하르트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져간 유물을 찾아와야지.”

실란의 안색이 굳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도둑질을 하겠다는 건가요?”

레펜하르트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도둑질?”

도대체 실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잠깐만요, 레펜 씨.”

잠시 말을 고르더니, 실란이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차탄 공국에서는 솔직히 레펜 씨가 옳았으니까 저도 찬동했어요. 하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유적을 탐사했고 그 대가로 유물을 가져갔어요. 그 유물의 정당한 소유자란 말이죠. 지금 레펜 씨가 그들에게서 유물을 가져온다는 것은 도둑질이잖아요?”

“어…….”

그제야 레펜하르트도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입장에서 엘류시온은 자신이 탐사하고 자신이 발굴한 유적이었다. 당연히 그 유물들은 자기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대에서는 확실히 그 유물들은 테네스 백작가가 정당하게 소유하는 물건이었다. 실란의 말은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그러게? 도둑질이네?”

맹한 레펜하르트의 반문에 실란이 기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그럼 이 양반은 그런 자각도 없었단 말인가?

“으음…….”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머리를 긁었다. 실란이 살살 그를 달랬다.

“자 자, 미련이 남는 건 이해하겠지만 포기해요. 다른 유적 찾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저 아직 돈 많아요. 당분간 여행 경비 댈 정도는 충분하니까 너무 다급해할 필요 없어요.”

실란은 돈 떨어진 레펜하르트가 마음이 급해서 이렇게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다르지만.

‘끙,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실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도둑질할 거라고 밀어붙일 수도 없다. 납득할 이유도 없이 저렇게 나가면 실망한 실란은 분명 그를 떠나겠지.

‘그건 싫은데…….’

비록 농담 삼아 최고급 약통이니 뭐니 하긴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실란을 확실히 동료로 인정하고 있었다.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전생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었다. 마법의 힘을 되찾은 후라면 그의 말에 설득력이 생기겠지만, 지금은 말해 봤자 미친놈 취급당할 것이 뻔했다.

‘이거 참, 전생 이야기를 뺀 채로 어떻게 얘를 설득해야 하나?’

한참 머리를 굴리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눈을 빛냈다. 그럴듯한 핑계가 떠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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