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단죄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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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2층으로 올라간 시리스는 곧바로 실란을 데리고 복도로 나섰다. 짐짝처럼 들려 다닌 실란이 어지럽단 얼굴로 비틀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리스가 엘프다운 몸놀림으로 일시 거리를 벌리긴 했지만, 저들도 바보는 아니니 금방 계단을 통해 쫓아올 것이다.
실란이 의견을 내며 뛰기 시작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무장을 하자.”
따라 달리며 시리스가 고개를 저어 반대했다.
“그쪽에도 사람이 있을 거예요.”
엘븐하임은 슬레이어에게 전투 기술 외에도 각종 상황에 대한 대처법 역시 착실히 가르친다. 그래야 제대로 주인을 충실하게 보필할 수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며 그녀가 실란을 말렸다.
“게다가 쫓아오는 이들도 바로 우리 객실부터 찾겠죠. 너무 위험해요.”
역시 어려서 뭘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것인데 의외로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쯤은 나도 알아. 그래도 지금은 무장부터 찾는 게 더 중요해. 시리스 실력이면 우리 객실 지키는 놈 한둘은 처리할 수 있을 거 아냐? 설마 거기에까지 오크 검투사를 세워 놓았을 리는 없을 테니까.”
복도를 달리며 실란이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어차피 저놈들은 우릴 쫓아올 거잖아? 그러면 단검 하나만 들고 도망치는 것보단 조금 지체하더라도 무장을 제대로 하는 쪽이 나아.”
“그, 그런가요?”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뒤를 따르며 시리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실란을 바라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여운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위기 상황이 닥치자 놀라운 판단력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실란은 어린 나이에 비해 세상을 돌아다녀 본 경험이 풍부했다. (사실은 별로 어리지도 않고.) 엘븐하임 안에서만 살며 이론만 익힌 시리스보다 실란이 오히려 현실을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객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사내 하나가 객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사내가 놀라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시리스가 뛰어올라 벽을 박차고 삼각 뛰어차기를 날렸다.
“어? 뭐여? 크에엑!”
그렇게 간단히 상대를 쓰러트린 뒤 시리스와 실란은 잽싸게 객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실란이 허겁지겁 자신의 법복과 성물을 챙겨 들었다.
그동안 시리스는 옷장을 열고 레펜하르트가 사 준 옷가지를 꺼낸 뒤, 무기도 챙겨 들고, 옷을 펼쳐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색이 실란도 남자애인데 그 앞에서 옷 갈아입어도 되나? 라는 속 편한 생각도 잠시 했다.
쫓기는 주제에 참 느긋한 모습이었다. 실란이 기막혀하며 외쳤다.
“시리스! 지금 한가하게 옷 갈아입을 시간이 어디 있어?”
“예? 그럼 어쩌라고…….”
엘븐하임에서 습격에 대한 대비는 가르쳐 줬지만 도망치는 와중에 무장 챙기는 것까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무심코 평소처럼 무장을 하려던 시리스였다.
“당연히 들고 뛰어야지…….”
이 시리스란 엘프, 굉장히 차갑고 성숙해 보이는 인상인데 은근 꺼벙한 구석이 있다. 한숨을 쉬며 실란이 어서 손으로 들라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아차 하며 시리스가 무기며 재킷을 대충 뭉쳐 들었다. 그동안 실란이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우리의 자취를 지워 위기로부터 구하소서.”
흔적을 지우는 신성 주문을 자신과 시리스에게 씌운 뒤 재차 기도문을 외운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숨결을 우리에게 깃들게 하소서.”
핑크빛 입자가 살랑살랑 일어나 두 사람의 발치를 감쌌다. 그 상태로 실란이 객실 창문을 벌컥 열고 대뜸 뛰어내렸다. 시리스가 놀라 외쳤다.
“실란!”
아니, 쟤가 왜 갑자기 투신자살을? 당황해 창밖을 내다보니 실란이 마치 깃털처럼 사뿐히 지상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방금 실란이 외운 것은 높은 곳에서 안전하게 몸을 지키는 기도문이었다. 마법으로 치면 페더 폴과 비슷한 효과라 하겠다. 착지한 실란이 어서 뛰어내리라는 듯 손짓했다.
“아…….”
이해한 시리스도 바로 밖으로 몸을 날렸다. 한겨울인 데다가 저녁때가 지난 늦은 시간이라 거리엔 그리 행인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2층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딱히 시선을 집중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 어쩌죠?”
무슨 그런 뻔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실란이 대꾸했다.
“튀어야지.”
☆ ☆ ☆
50대의 중년인, 란타스는 느긋하게 복도를 걷고 있었다. 추적자라기엔 지나치게 느긋한 모습이지만 그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란타스는 위대한 검의 경지, 오러를 각성한 검사였다. 오러 능력자의 감각권은 실로 가공하다. 그는 이미 이 반경 30미터 내의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히 감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아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음, 뭐야, 저것들? 방에 들어가서 숨을 셈인가?’
엘프와 소년의 기척이 2층 여관 객실로 향하는 걸 느끼며 란타스는 실소했다. 당장 이 여관을 벗어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자기 방으로 기어들어 가다니, 정말 애송이는 어쩔 수 없는 애송이다. 한껏 상대를 무시하며 천천히 인기척을 따라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란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뭐지?’
인기척이 사라졌다! 분명 2층 객실에 생생히 느껴지던 그 기척이 어느 순간 소멸해 버린 것이다.
란타스는 당황했다. 이런 경험을 그는 해 본 적이 있었다. 고위 마법사나 위계 높은 성직자의 경우, 특유의 술법으로 자신의 자취를 감출 수 있다.
‘뭐야? 그 애송이가 기척 제거의 술을 쓸 정도로 고위 성직자였어?’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중년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느긋하던 란타스의 몸이 파공음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복도를 지나쳐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간 란타스가 안을 살폈다. 객실은 텅 비어 있고 창문은 활짝 열려 차가운 겨울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이, 이런…….”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애송이들이라고만 들었는데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그는 혹시나 싶어 기감을 끊고 오러를 청력에 집중했다. 혹시 기척을 지운 뒤 방 안에 숨어 있지 않나 해서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믿는 이들이 가끔 이런 식으로 추적자를 따돌리곤 하기에 대비한 것이었다.
아무리 기척을 지우고 숨을 멈춰도 심장 고동 소리마저 숨기진 못한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나 신성 주문도 뛰는 심장을 멈춘 채 살 수 있게 해 주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리에 귀 기울인 것인데…….
“젠장, 밖으로 튄 게 맞구먼.”
방은 확실히 텅 비어 있었다. 그때 로마드와 수하들이 뒤늦게 객실로 들어왔다. 열심히 계단 오르고 복도 달려가며 이제야 란타스를 따라잡은 것이었다.
“놈들은 어디 있습니까, 란타스 경?”
로마드가 주위를 둘러보며 질문한다. 평범한 어조였지만, 왠지 힐난하는 것처럼 들려 란타스는 더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놓치신 겁니까?”
“시끄럽다! 이 근처일 테니까 애들 풀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란타스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냥 가볍게 몸이나 풀고 생색이나 낼 생각으로 따라온 것이었는데 이쯤 되니 열이 올랐다. 그가 새처럼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 ☆ ☆
이미 해가 저문 제플린 시내. 그믐이어서인지 도시 곳곳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상업 도시답게 대로 쪽 거리는 가로등과 가게의 불빛으로 환하지만 골목으로 몇 발자국만 들어가면 칠흑 같은 암흑이 자리하고 있다.
그 어둠 속을 두 사람이 조심조심 걷고 있었다. 황금의 휴식처를 빠져나온 실란과 시리스였다. 둘 다 이 어둠을 이용해 골목 사이사이를 걸어 여관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으, 안 보여.”
“이쪽이에요.”
“응응…….”
밤눈이 밝은 시리스는 그럭저럭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지만 실란은 완전 장님 신세였다. 계속 뭔가에 걸려 비틀거리며 그는 그저 시리스의 손만을 의지해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로마드 일행이 아니더라도 어두운 골목길은 그 자체로 우범지대다. 그녀는 시미터를 쥔 채 연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저들이라도 보는 눈이 많다면 함부로 덤빌 수 없겠죠. 차라리 거리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엘븐하임에서 배운 대로 시리스가 상식적인 제안을 꺼냈다. 저들이 아무리 막 나가는 놈들이라도 사람들 눈은 꺼리는 것 같았다. 여관에서도 일부러 손님들을 따로 옮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실을 아는 실란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소용없어. 오히려 최대한 시선을 피해야 해.”
“어째서?”
“저놈들, 분명히 도망친 노예 잡으러 왔다고 할 테니까.”
지나가던 행인 입장에서 시리스가 도망친 노예인지, 아니면 남의 노예인데 멋대로 빼앗으려 하는 것인지 구별할 재간이 있을 리 없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신경 끌 것이 뻔했다.
“오히려 우리 위치만 알려 주게 될 걸? 지금은 최대한 눈을 피하는 게 중요해.”
혀를 차며 실란은 다시 어둠을 더듬었다. 문득 한숨이 나왔다.
“휴우…….”
세상을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주로 바실리 왕국 쪽만 돌아다녔던 그였다. 필라넨스 교단의 교세가 강한 바실리 왕국은 어디에나 필라넨스 신전이 위치했다. 그때는 실란 역시 권력자 층이었고, 그래서 불합리를 보면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례자가 되어 바실리 왕국을 벗어나니 참 세상 험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왜 순례자들이 그리 죽어 나가는지 이해가 갔다. 몸 편하고 마음 편한 자신의 교단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실란은 교단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순례자의 길을 택한 가장 큰 이유인 ‘그녀’. 여기서 돌아가면 다시 ‘그녀’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건 싫었다.
‘차라리 위험해도 세상을 떠도는 게 낫지! 남자다운 몸이 되기 전엔 절대 안 돌아갈 거야!’
각오를 다지며 실란이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렇게 골목길을 한참 동안이나 헤매다 보니 제법 밝은 곳이 나왔다. 어둡긴 매한가지였지만, 제법 잘사는 집이었는지 밤에도 불을 켜 2층 창문을 통해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간신히 사물의 윤곽이 보일 정도가 되자 실란이 안도하며 벽에 기댔다. 눈을 감은 채 걷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심력 소모가 심했다. 숨을 고르며 실란이 신경질을 냈다.
“아우! 레펜 씨만 있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이 양반 대체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거야?”
오러 능력자가 곁에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 저딴 패거리가 몇이 몰려오건, 오크 검투사가 군대로 쳐들어오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어떻게든 레펜 씨랑 합류해야 하는데, 끙…….”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본 레펜하르트는 덩치 크고 역할 놀이에 빠진 이상한 청년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위 성직자인 실란이 이토록 깊은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레펜하르트 님이 그렇게 강한가요?”
‘아, 시리스는 모르지, 참.’
막 실란이 레펜하르트가 오러 유저란 사실을 말해 주려던 차였다. 시리스가 먼저 화제를 바꿨다.
“어쨌건 합류는 해야겠지요?”
“그렇지. 아무리 봐도 저놈들, 이 동네 권력층 부하들인데 부딪쳐 봐야 골치만 아프지.”
레펜하르트의 무력이라면 당면한 문제쯤은 쉽게 주먹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권력자가 힘으로 밀고 나오면 일개 개인은 감당할 수가 없다. 실란 자신이 권력층이었던 터라 잘 알고 있었다.
제일 좋은 선택지는 어떻게든 레펜하르트를 만나 이대로 제플린을 벗어나는 것이다. 죄도 없이 도망치는 것이니 기분이야 더럽겠지만,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으니 별수 있나?
“그러면 사람을 시켜서 서신을 보낸 뒤 합류 장소를 정하죠.”
상식적인 제안이었지만 이번에도 실란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 동네 인심을 보니 그 서신 들고 바로 그놈들에게 달려갈 것 같은데?”
이미 실란은 이 차탄 공국이라는 어이없는 나라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이 박혀 있었다. 딱히 편견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 제플린이란 도시에는 실제로 그럴 놈들이 수두룩한 것이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요?”
의견을 내는 족족 거절당하니 시리스도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다시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물론 둔한 실란은 여전히 못 느끼고 있었지만.
실란이 잠시 고민하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방법이 있긴 있네…….”
방법은 떠올랐는데 별로 마음에는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한숨을 쉬며 실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자애 어린 가호가 인연의 실을 허락하시니 안타까운 헤어짐을 굽어살피사 만남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평소와 달리 꽤 기도문이 길었다. 게다가 정상적이기도 했다. 신기해하며 시리스는 실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여신을 향해 기도를 올린 실란이 눈을 감고 잠시 서 있었다. 문득 그가 몸을 떨었다.
“아, 됐다…….”
성공한 것치고는 그리 탐탁찮아하는 표정이었다.
지금 실란이 구사한 것은 ‘운명의 교차점’이라 불리는 신성 주문이었다.
사랑은 우연을 운명으로 이끄는 것.
우연한 만남은 사랑을 통해 운명적 만남이 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며 말한다. 대륙의 수많은 남자와 수많은 여자 중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기적 같은 우연이라고. 이것이야말로 운명이라고. 그저 필연에 가까운 확률 상의 우연일 뿐이지만, 그것에 필라넨스의 가호가 깃들면 운명이 되는 것이다.
실란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아.”
‘운명의 교차점’은 반드시 만나야 할 운명의 상대에게 우연을 통해 길을 이끌어 주는 권능을 가진 주문이었다. 원래는 궁합 맞는 커플들끼리 맺어 주는 용도로 쓰는 신성 주문이지만, 해석을 좀 폭넓게 하면 헤어진 동료와 재회하는 수단으로도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레펜하르트도 실란도 둘 다 남자다 보니 영 기분이 더럽다는 점이지만.
“에휴, 이런 식으로는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실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필라넨스의 사랑은 실로 그 폭이 넓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게이 커플이나 레즈비언 커플도 얼마든지 인정하는 여신다운 관대함을 보이시는 것이다. 물론 미의 여신답게 겉보기에 괴로운 커플이면 잘 발동되지 않는 주문이긴 했는데, 이번엔 보시기에 흡족하셨는지 그냥 넘어가신 듯했다.
따지고 보면 여신 상대로 사기 친 셈인지라 실란도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 주문은 쓰고 싶지 않았다.
“가자, 시리스.”
기운 빠진 표정으로 실란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주문이 발동된 이상,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럼 운명적으로 레펜하르트와 조우할 수 있게 우연이 도와줄 것이다.
그래도 목적지가 확실해졌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긴 했다. 느긋해진 두 사람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시리스, 무지 세더라?”
“슬레이어니까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던데? 렐시아라고 다른 슬레이어를 본 적이 있긴 한데 시리스는 그 이상인 것 같아.”
“남들보다 조금 열심히 하긴 했어요. 그러는 실란이야말로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고위 성직자잖아요?”
“아, 그게 좀 웃기는 일인데…….”
그렇게 시리스와 대화를 나누며 실란은 문득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말하고, 상대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가끔은 의구심도 가진다. 분명 노예 종족인 엘프인데도 마치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시리스가 특이한 걸까?’
하지만 실란은 다른 엘프들과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엘프 노예가 귀하긴 했지만 지위상 몇 번 만날 일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저 명령을 내리고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특이한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다.
문득 실란은 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실란이 걸음을 멈추자 시리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인가요?”
그곳은 공용 우물이 있는 작은 공터였다. 사방이 건물 뒤쪽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작은 뒷문만 몇몇 보이는 으슥한 장소다.
“응, 여기라고 점지해 주셨어.”
실란이 자신 있게 대꾸했다. 괴상망측한 기도문으로도 신성 주문이 발동할 만큼 여신의 사랑을 받고, 또 여신에 대한 신앙이 돈독한 실란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이곳이 ‘운명의 교차점’이 가리키는 곳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공터 저편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에 실란이 활짝 웃었다.
“아? 레펜 씨인가?”
하지만 시리스는 마주 웃지 않았다. 대신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실란이 놀라 되돌아보았다.
“시리스?”
“레펜하르트 님이 아닙니다.”
자세를 취하며 시리스가 안색을 굳혔다. 레펜하르트의 발소리쯤은 이미 기억하고 있었다. 딱히 주인이라서는 아니었다. 엘프의 청력은 워낙 섬세해, 싫어도 사람들의 발걸음 차이를 절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잠시 후, 흐릿한 어둠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란의 안색 역시 굳었다. 나타난 것은 허리에 칼을 찬 50대 남자였다.
중년인, 란타스가 시리스와 실란을 노려보며 차갑게 웃었다.
“찾았다, 이 애송이들.”
☆ ☆ ☆
“잘도 도망쳐 다니더구나. 덕분에 오랜만에 좀 뛰어 봤네.”
란타스가 시리스와 실란을 번갈아 보며 뇌까렸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작은 봉지 같은 것을 꺼냈다.
“아, 이 바보들도 불러야지.”
엄지를 튕기는 것만으로, 손에 든 봉지가 슬링으로 발사된 것처럼 무섭게 날아올랐다. 상공에서 싯누런 불꽃이 펑 하고 터지더니 사그라졌다. 봉지 안에 연금술사들이 만든 폭죽 시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쳇…….’
시리스는 인상을 쓰며 란타스를 노려보았다. 저 불꽃으로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힐끔거리며 공터와 연결된 골목길을 살펴보는 시리스의 모습에 란타스가 피식 웃었다.
“도망가 볼 테냐? 말리고 싶다만.”
확실히 적을 눈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것은 그리 권장할 짓이 못 된다. 등 돌린 상태에서는 뭐가 날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도주도 어디까지나 적을 흔들고 나서나 가능한 짓이다.
시리스가 시미터를 뽑았다.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당장 눈앞의 적을 베고 이 자리를 벗어난다!
“타앗!”
그녀가 시미터를 늘어뜨린 채 연신 땅을 박차며 달렸다. 단숨에 10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좁힌 시리스가 바로 검을 올려 벴다.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상대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날아오는 검날을 보고만 있었다.
은빛 섬광이 란타스의 옆구리부터 어깻죽지까지 길게 그었다. 순간 시리스는 확신했다.
‘베었다!’
그때였다. 분명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적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벤 것은 잔상이었던 것이다. 등 뒤에서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빠르구나.”
‘아?’
당황하며 시리스는 반회전해 등 뒤로 시미터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 란타스는 없었다. 텅 빈 뒤를 확인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시리스의 귓가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신품 슬레이어 솜씨가 아닌데, 이거?”
“히익!”
란타스는 어느새 뒤에 선 채, 시리스의 어깨에 턱을 얹고 능글맞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름이 돋아 시리스가 겨드랑이를 통해 칼날을 찔러 갔다. 하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칼을 날리는 그 순간 이미 란타스는 그녀의 시야를 벗어나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재능도 제법 있는 것 같고.”
“타앗!”
기합을 터트리며 이번에는 찌르기 후 바로 2회전해 연격을 날리는 복잡한 검술을 구사했다. 상대의 도주 경로를 예측해 칼을 날린 것인데, 그래도 란타스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꽤나 성실하게 노력한 모양이구먼. 노예치곤 특이하네.”
란타스는 마치 신기루처럼 시리스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태연자약한 얼굴에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으윽!”
굴욕감에 시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엘븐하임의 다른 슬레이어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의 소유자였다. 엘븐하임에서 오지게 말 안 듣는 시리스를 왜 그리 끈질기게 슬레이어로 키우려 발악했겠는가? 종이 몽둥이만을 든 채 십여 명의 슬레이어 후보들과 싸우는, 말도 안 되는 불리한 상황에서조차 밀리지 않았던 그녀다. 말만 잘 들었다면 역사상 최강의 슬레이어가 되었을 테니 엘븐하임이 그토록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다그친 것이다. 뭐, 결국은 실패했지만.
다른 슬레이어들은 물론이고, 검술 교관이나 검투사 출신 오크 호위병들도 일단 검을 들기만 하면 모두 눕힐 자신이 있었다. 탈카타와 싸우며 밀렸던 것은 익숙하지 않은 단검 하나만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무장을 하고, 익숙한 무기를 든 상태인데도 상대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아직 검조차도 뽑지 않았다!
‘대체 뭐야, 이 인간은!’
한편 실란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의 검투를 보고 있었다.
‘맙소사! 어째서 저런 실력자가 이런 일에 낀 거야?’
그토록 빠른 시리스의 공격을 저 중년 사내는 참으로 쉽게도 피하고 있었다. 그냥 피하는 것도 아니고 슬쩍슬쩍 칼날만 피하며 계속 거리를 유지한다. 실력 차가 엄청나게 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저 정도 경지면 어지간히 이름 높은 기사나 검사임이 분명할 텐데, 이런 추잡한 일에 끼어든단 말이야?’
어쨌거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실란이 성력을 끌어 올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필라넨스시여…….”
슬쩍 기도문을 외우며 실란은 란타스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단검이라도 던지면 바로 기도 때려치우고 우물 뒤로 숨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별 신경을 안 썼다. 실란은 안심하고 기도문을 이었다.
“당신의 종에게 사자의 용맹을 허락하소서. 검 든 두 팔에 거인의 힘이 깃들고 그 눈이 매처럼 매서워지며 두 다리가 굳센 수소가 되어 적을 치게 하소서!”
실란의 신성력이 시리스의 전신에 쏟아졌다. 그녀가 든 시미터가 핑크빛으로 반짝였다. 필라넨스의 성스러운 검, 홀리 스트라이킹이 걸린 것이다.
“이건?”
시리스는 전신을 휘감는 놀라운 활력과 권능에 경악해 몸을 떨었다. 신성력 하나는 넘쳐흐르는 실란이 아주 시리스의 근력, 방어력, 스피드와 민첩함에 반사 신경까지 모조리 끌어 올려 준 것이다. 란타스도 이번엔 정말 놀란 듯 표정이 굳었다.
“뭐야? 이 많은 신성 주문을 한 번에 걸어? 저 나이에 주교급 신관이었나?”
실란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래 봬도 바실리 남부에서는 잘나가던 몸이었다고! 시리스! 조져 버려!”
“네, 실란!”
시리스가 바로 몸을 날리며 참격을 날렸다. 이제까지완 차원이 다른 스피드라 란타스도 잽싸게 뒤로 몸을 날렸다. 더 이상 주위를 맴돌며 노닥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크크!”
필라넨스의 성광이 깃든 시미터가 반짝거리는 핑크빛 궤적을 허공에 남겼다. 레펜하르트 때는 참 꼴불견이더니, 미녀 엘프가 구사하는 상황이 되자 꽤나 어울려 보였다. 물론 시리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타앗!”
시리스가 계속 란타스를 압박해 갔다. 환영 같던 상대의 움직임이 모두 보였다. 방금 전까지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손발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윽!’
란타스는 당황했다. 핑크빛 칼날이 연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틈이 없어 결국 그도 검을 뽑았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음을 울렸다.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검격을 교환했다. 강철의 빛깔 위로 분홍의 색채가 덧입혀지며 요란한 검광이 공터 위를 사정없이 유린한다.
‘이런…….’
신들린 듯한 시리스의 움직임에 란타스는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 가지고 놀던 상대가 신성 주문 좀 받았다고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이래서 강력한 신관의 가호가 있고 없고는 전투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입맛이 썼다.
실란이 신바람을 냈다.
“잘한다, 시리스!”
갑자기 란타스가 인상을 구겼다.
“에잉, 이것들이 좀 놀아 줬더니 기가 살아서!”
신경질을 내며 그가 검을 내리그었다. 막 공격을 이으려던 시리스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가득 비쳤다. 미스릴 시미터가 두 동강 나며 그녀가 마차에 치인 것처럼 뒤로 날아가 버렸다.
“아악!”
신을 내던 실란이 그 자세로 굳어 버렸다.
“어……?”
단 일격이었다. 엇비슷하게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단 일격에 승부가 갈려 버렸다. 실란은 경악한 얼굴로 란타스를 바라보았다.
란타스의 검, 그것은 피처럼 붉은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오러 능력자?”
“쳇, 고작 슬레이어 따위에게 오러를 쓰다니…….”
란타스가 입술을 뒤틀며 불쾌한 얼굴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실란이 허겁지겁 쓰러진 시리스에게 달려갔다.
“괘, 괜찮아, 시리스?”
“으음…….”
신음을 흘리며 시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긴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실란의 신성 가호가 그녀를 보호해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한 덕분이지만, 그 대가로 실란이 열심히 걸었던 수많은 가호의 권능은 싹 날아간 후였다.
“아니, 오러 능력자가 왜 이런 곳에…….”
시리스를 부축하며 실란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오러를 각성한 자라면 세상 어디를 가도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고작 엘프 노예 잡아오는 임무 따위에 투입될 전력이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스프 끓이는 데 드래곤이 불 뿜는 격이다.
그때 공터 곳곳의 골목을 통해 그림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호를 받은 로마드와 그 일행들이 뒤늦게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로마드는 탈카타에게 쓰러진 동료들을 챙겨 저택으로 돌아가게 한 뒤, 남은 인원으로 거리를 뒤지고 있었던 차였다. 어차피 란타스가 나섰으니 오크 검투사의 힘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로마드가 실란과 시리스를 보더니 기뻐하며 외쳤다.
“잡으셨군요, 란타스 경!”
그 이름에 실란은 저 중년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자가 란타스? 그 더러운 변태 기사였단 말이야?’
2
란타스 폰 칼파나드.
그는 원래 바실리 왕국 옆에 붙어 있는 테이칸 왕국의 이름 높은 기사였다.
명가의 후손으로 자라나 기사의 길을 걸은 그는 타고난 재능에 훌륭한 가르침, 자신의 노력에 힘입어 30대 후반에 오러를 각성하는 놀라운 무위를 보였다. 테이칸 왕국의 모든 이가 새로운 오러 능력자의 탄생을 기뻐했다.
하지만 란타스에겐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추악한 취미가 있었다. 그는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만 성욕을 느끼는 소아 성애자였다.
젊을 때는 무술에 매진하느라, 그리고 남들 눈치를 보느라 숨기고 있었지만 오러 능력자가 되고 비견될 수 없는 강자의 처지에 놓이니 슬슬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처음에는 어린 엘프들을 사다가 성욕을 풀곤 했던 란타스의 패악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도를 더해 갔다. 왕도의 어린아이를 납치해 간살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귀족의 어린 여식에게까지도 손을 댔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수상하게 여긴 한 정의로운 기사에 의해 결국 그의 추악한 범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수도 기사단이 란타스의 저택을 쳐들어갔고, 저택 지하실에서 본 참상에 이를 갈았다. 그곳엔 어린 나이에 능욕당한 아이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테이칸 왕국의 자랑은 역사상 가장 추악한 수치가 되었다. 당연히 그를 잡기 위해 왕국 전체가 들고일어났다. 하지만 오러 능력자인 그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수백 명을 학살하며 결국 테이칸 왕국에서 도망친 것이다.
그 악명은 테이칸 왕국을 넘어 바실리 왕국에까지 펼쳐져 있다. 실란도 어렸을 적, 함부로 밤에 돌아다니면 란타스가 잡아간다는 식으로 혼난 적이 있을 정도다.
실란이 분노해 외쳤다.
“이 더러운 괴물! 차탄 공국에 숨어 있었나!”
란타스가 실란을 힐끔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호오? 나를 알고 있나?”
“명색이 오러 능력자가 이런 추악한 일에 끼어들다니, 정말 소문대로 더러운 놈이구나!”
경멸 가득한 외침이 이어졌지만 란타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신경 예민한 놈이었으면 어린아이들을 간살하는 죄악을 저지를 리도 없다.
란타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일단은 봉급 받아먹고 사는 처지인지라 말이지.”
테이칸 왕국에서 도망친 그는 쫓기고 쫓기다 결국 이곳 차탄 공국에까지 흘러왔다. 대륙 어느 나라도 추악한 변태 강간마인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롤페인 상회는 달랐다. 오러 능력자의 가치를 금전적으로만 판단한 롤페인 상회는 사소한(?) 악명쯤은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란타스는 어린 노예들을 간살해 가며 행복한 성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오러 능력자답게 봉급도 두둑했고, 제플린이 노예 산업의 본고장이다 보니 노예를 원가로 구매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겼다.
가끔 색다른 걸 즐기고 싶을 땐 뜨내기 행상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납치해 오면 되었다. 테이칸 왕국과 달리 유동 인구가 워낙 많은 이곳에선 사람 한둘 없어진다 해도 알아채는 인간이 전혀 없었다. 천국이었다.
물론 롤페인 상회에도 란타스의 존재는 큰 이득이었다. 뒤로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는 롤페인 상회는 그만큼 무력을 써야 할 일도 많았다. 그리고 오러 능력자는 그 무력의 정점에 위치한 존재다. 롤페인 상회가 10년 만에 차탄 공국 2위의 대상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란타스의 덕도 컸다. 1위인 차탄 상회는 이름 그대로 이 나라의 왕족들이 직접 경영하는 곳이니 사실상 1위나 다름없었다.
서로가 이득이 되니 대우도 좋았다. 테이칸 왕국이 열심히 추적자를 보내긴 했지만 롤페인 상회가 그를 비호하니 자다 칼 맞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란타스도 지금은 그냥 가명 대신 본명을 드러낼 정도로 뻔뻔해져 있었다.
“여신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실란이 분노해 외치며 두 손을 모았다. 가진 신성력을 모두 시리스에게 퍼부어 그녀를 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프리스트라 직접적인 전투력은 거의 없다. 하지만 회복과 증폭력만큼은 자신 있다.
‘모든 신성력을 깡그리 퍼부으면 잠시간은 오러 능력자와 싸울 힘을 시리스에게 부여할 수 있을 거야!’
그 대가로 둘 다 며칠은 골골대야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잡혀 가는 것보단 낫다. 그렇게 실란이 막 여신의 이름을 외치려던 차였다.
“필라넨스시여…….”
“아차! 그렇게는 안 되지!”
란타스가 흠칫하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안 그래도 실란의 신성력에 놀란 터라 대비를 하고 있었다. 붉은 오러의 산탄이 비산하며 두 사람에게 날아들었다. 적색 섬광이 다트처럼 날아가 시리스와 실란의 사지 곳곳에 틀어박혔다.
“크윽!”
“아악!”
둘 다 사지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란타스가 오러의 칼날을 날려 둘의 팔다리 힘줄을 끊어 버린 것이다. 애들만 덮치는 변태치곤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기술이었다.
“고위 성직자 입 놀리게 놔두면 무슨 꼴 당하는지는 잘 알거든.”
란타스가 검을 빙빙 돌리며 이죽거렸다. 옆에서 로마드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란타스 경! 상처를 입히면 어떡합니까! 테리크 님께서 노하실 겁니다!”
“시끄러, 신관 하나 데려와서 치유시키면 되잖아? 넌 왜 그리 융통성이 없냐?”
혀를 차며 란타스가 턱짓을 했다.
“가서 묶기나 해.”
로마드 일행이 밧줄을 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고통을 이기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저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녀의 정신력은 분명 놀라운 것이었지만, 애초에 신체 구조적으로 힘줄이 끊겼으니 근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걸 보며 실란이 안타까워했다.
“시, 시리스! 어떡하지, 으으…….”
입이야 멀쩡하니 기도문은 올릴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바로 또 칼 날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시리스를 잡혀 가게 할 순 없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함께 쓰러진 상태지만 실란은 그저 시리스의 안위만 걱정하고 있었다. 뭐, 저놈들의 목표야 시리스고 실란은 그냥 버리고 갈 것이 분명하니 자기 안위 걱정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어째 상황이 좀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쓰러진 실란을 무심히 보던 란타스가 문득 입맛을 다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예쁘게 생긴 아이로구나.”
어두워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의 취향에서 살짝 서너 살 넘기는 했지만, 그래도 워낙 앳되어 보이고 또 미모가 굉장했다. 란타스가 로마드를 향해 외쳤다.
“로마드, 저것도 데리고 가자.”
그리고 턱을 매만지며 음흉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조금만 더 어렸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뭐, 저것도 나름대로 맛이…….”
불길한 소릴 중얼거리는 란타스를 보며 실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맛? 무슨 맛?’
그는 란타스가 어떤 놈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거 시리스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 잠깐! 난 남자야!”
실란의 필사적인 호소에 순간 란타스는 실망했다.
“그래?”
하지만 금세 표정을 되찾았다.
“음,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색다른 느낌이…….”
예상 못 한 란타스의 반응에 실란은 기겁했다. 생각해 보니 란타스가 노소 가린단 소린 들었어도 남녀 가린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주름 진 웃음을 보낸다.
“후후후, 귀여워해 주마.”
성직자, 그것도 남자를 강간하겠다는 천인공노할 소릴 막 해 대는 란타스의 모습에 실란이 시퍼렇게 질렸다.
“으히힉!”
로마드 일행이 ‘저 양반, 또 시작이네.’라는 경멸 어린 표정을 짓는다. 초조함으로 실란의 금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아니, 여신님. 레펜 씨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왜 저런 변태를 만나게 하신 건가요? 제가 기도문 잘못 올려서 그런가요? 그렇지만 평소엔 대충 외워도 척척 응답해 주셨잖아요?
‘헉! 설마 필라넨스께서 내 운명의 상대로 저 변태 늙은이를 택하신 건가? 그런 거야, 혹시?’
잠시 무엄한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실란은 공황에 빠져 있었다.
두 사내가 각자 손에 밧줄을 들고 다가왔다. 힘줄이 잘렸으니 아무리 무서운 슬레이어라도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안심하고 막 손을 뻗으려던 차였다.
검광이 번뜩이며 사내의 팔을 베었다.
“윽!”
사내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벌써 시리스가 일어난 건가 싶어 깜짝 놀란 것이다. 그런데 일어난 것은 시리스가 아니었다.
실란이었다.
“웃기지 마…….”
저 가녀린 소년이 한 손에 은색 단검을 든 채 무서운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스릴 칼날 위로 선혈이 아롱져 떨어진다. 란타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어엉?”
이번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그조차도 도저히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힘줄 잘린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벌써 일어난단 말인가? 기도를 올리지 않았으니 치유술을 쓸 수도 없었을 텐데?
“뭐야? 저거 무슨 좀비 같은 거였어?”
하도 기가 막혀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저건 세상에서 가장 생기 넘치고 아름답고 허약한 좀비일 것이다.
“……절대 내 몸에는 손 못 대!”
단검을 든 채 실란이 눈을 부라렸다. 핏발이 선 금색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독한 모습에 사내들이 무심코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부우우웅!
광풍이 불었다. 동시에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실란 앞에 섰던 남자 둘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옆에서 폭음이 울렸다.
콰아아앙!
눈앞을 가로막던 사람들이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지는 진귀한 광경, 실란이 멍하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라?”
공터를 둘러싼 건물, 그 외벽에 커다란 나무판자 하나가 박혀 있었다. 문고리가 달려 있고 금속으로 모서리를 마감한 걸 보니 원래는 어느 집 문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문짝과 건물 벽 사이에 시뻘건 뭔가가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멍해 있던 실란은 순간 욕지기를 느꼈다.
“우욱!”
저건 핏물과 살점 덩어리였다! 방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사내들의 현재 모습인 것이다!
로마드 일행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살해 방식이었다. 로마드가 문짝이 날아온 쪽을 돌아보았다.
흑갈색 머리에 건장한 체구를 지닌 청년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채 공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섬뜩한 살기를 담아, 청년이 입을 열었다.
“찾았다, 이 개자식들…….”
욕지기를 하다 말고 실란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레펜 씨!”
☆ ☆ ☆
‘뭐냐, 저놈…….’
란타스는 어안이 벙벙해져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에야 그냥 덩치 큰 청년일 뿐이지만 오러 능력자인 그는 상대의 전신에 맴도는 산악 같은 기세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이 엄청난 기운은?’
레펜하르트가 살기 흐르는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렇게 실란에게 다가가 쓰러진 시리스를 내려다 본 레펜하르트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가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실란에게 감사를 표했다.
“시리스를 지켜 주어 고맙다.”
문득 실란이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시리스가 실란을 지킨 것이었지만 막판만 본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착각할 법도 하다. 게다가 마지막에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것은 심각한 정조의 위기를 느껴서이지, 딱히 시리스를 생각해서가 아닌 것이다.
“아, 네. 뭐…….”
말을 더듬다가 실란은 그냥 쓰러진 시리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치유술을 펼쳤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어린 양을 다시 일으키시어 상처를 거두소서.”
그동안 레펜하르트는 굳은 눈으로 로마드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레펜하르트는 전혀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다. 텅 빈 방, 없어진 실란과 시리스의 옷가지, 그리고 열린 창문을 보고도 그냥 ‘애들이 방에만 있기 싫어 놀러 나갔나?’라고 속 편하게 생각했다.
이변을 깨달은 것은 여관 주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왠지 꺼려하는 그 모습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바로 여관 주인을 다그쳤다. 한 방에 여관 기둥을 뭉개는 그 주먹 앞에 주인은 순순히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한 무리의 일행이 와서 그를 매수하고 여관을 비우게 한 것, 그리고 그 틈에 시리스와 실란을 노렸다는 것까지 모두 들은 레펜하르트는 당장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분노와 함께 그는 거리를 누비며 시리스를 찾아다녔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어이가 없었다. 그는 경험 없는 20대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노리는 자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곁에서 떼 놓다니?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왜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제플린 시내를 이 잡듯 뒤졌다. 문득 거리 안쪽 골목에서 강렬한 오러의 파동을 느꼈다. 혹시나 싶어 달려가니 시리스가 쓰러져 있고 사내 둘이 실란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너무 급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게 잘 달려 있던 남의 집 문짝이란 건 던지고 나서야 알았다.
“네놈들이 감히 시리스를 노렸단 말이지…….”
살의 가득한 레펜하르트의 말에 로마드 일행은 모두 굳어 있었다. 저것은 이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식을 잃은 맹수의 으르렁거림이었다.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그 기세만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흥분할 대로 흥분한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로마드 일행 곁에 있는 저 검 쥔 중늙은이의 존재 때문이었다.
‘강하다, 저자.’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무인 특유의 감각이란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하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음에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마드가 레펜하르트를 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란타스 님, 저놈입니다! 저놈이 저 슬레이어를 산 놈이에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란타스가 입맛이 쓰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애송이라더니…….”
저게 무슨 애송이냐! 그냥 척 보기만 해도 전신의 감각이 경종을 울리고 있는데! 오러 능력자인 그가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면, 상대도 최소 오러 능력자란 소리다.
‘하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 어떻게?’
레펜하르트는 아무리 봐도 20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덩치가 워낙 좋아 20대 후반인가 싶었지만, 얼굴이 상당히 앳된 것이 사실은 초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 쪽이건 간에 이런 엄청난 기운을 가질 나이는 절대 아니었다.
‘혹시 엄청난 동안인가?’
얼굴만 팽팽하고 사실은 중년 나이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이름 높은 필라넨스 에스틱 살롱에서 매일 스킨케어를 받아도 저렇게는 안 된다. 하지만 20대에 오러를 각성한 자가 있다는 사실보단 차라리 필라넨스의 미용 실력이 기적적이더라는 쪽을 택하는 게 좀 더 란타스의 상식과 맞았다.
‘겉보기엔 저래도 최소 30대 후반은 되겠지.’
그가 오러를 각성한 것이 딱 그때쯤이었다. 란타스가 진지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오랜만에 진정한 강자를 만났군.”
레펜하르트가 싸늘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애들만 덮치는 변태 늙은이가 꼴에 기사 흉내 내기는.”
란타스란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알 수 있었다. 왜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존재가 여기서 저러고 있는지. 란타스의 악명은 하도 유명해 레펜하르트 역시 익히 들었던 것이다.
상대의 비웃음에 란타스의 얼굴이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크윽!”
실란이 비꼬았을 때야 무시할 수 있었지만 같은 무인, 그것도 강자에게 비아냥을 당하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가 빠드득 이를 갈며 검을 세웠다.
“이 자식이…….”
붉은 오러가 란타스의 칼날을 타고 섬뜩하게 흘러내렸다.
“왜? 욕을 먹으니 꼴에 열은 받나 보지? 아니면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라고 우겨 보게?”
레펜하르트도 두 주먹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황금빛 오러가 흘러나와 양손 가득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 다 말없이 상대를 살피고 또 살폈다.
“헙!”
순간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란타스도 검을 들고 마주 돌진해 갔다. 눈부신 황금빛이 붉은 빛과 격돌하며 요란한 폭음을 뿜어냈다.
파아앙!
적색과 금빛의 파문이 사방으로 퍼지며 제플린의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 ☆ ☆
붉은 검무가 사방을 휘젓는다. 눈부신 검광이 허공을 가르고, 그 자리에 실크 커튼처럼 붉은 장막이 드리워진다.
그 장막을 황금의 빛이 찢어발긴다. 웅혼하게 날아오는 펀치 하나하나마다 가공할 기세가 담겨 있다. 오러의 장막을 가볍게 뚫고 대포처럼 연신 쏘아져 온다.
“이잇!”
“타아앗!”
연거푸 기합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와 란타스는 수십 차례나 공방을 주고받았다. 양쪽 다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몸놀림이었다. 붉은 칼날이 쉴 새 없이 허공을 수놓고 펀치와 킥이 수십 차례나 허공을 뒤흔들었지만 둘 다 상대의 육체에 적중시키지는 못했다. 대신 일렁이는 오러가 서로 마찰하며 그 여파로 주위를 부수고 있었다.
공격을 퍼붓고 또 피할 때마다 오러와 오러가 부딪쳐 빛의 파문이 사방으로 퍼진다. 파문이 닿는 곳마다 석재 바닥이 뒤엎어지고 벽이 무너지고 나무 물통이 박살나 물방울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으아아…….”
“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망가다 휘말리면 그냥 죽는 거야, 임마!”
끔찍한 파괴의 참상 속에서 로마드 일행은 그저 벌벌 떨고만 있었다. 충돌해 터져 나오는 빛의 파문, 상쇄되는 오러의 잔여 파괴력만으로도 공터는 이미 전쟁터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오러 능력자의 힘은 실로 가공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드 일행은 반파된 우물 뒤에 숨어 감히 머리도 못 든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저 오러의 파동에 재수 없게 휘말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즉사다. 감히 도망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반면 실란과 시리스는 상대적으로 편안한 상태에서 전투를 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님이 오러 유저였나요?”
“응? 내가 말 안 했던가?”
레펜하르트는 란타스와 싸우는 와중에서도 절대 그들에게는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조절하고 있었다. 파문이 날아갈 것 같으면 몸으로 막거나 기격탄을 날려 공격을 상쇄시킨다.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저런 묘기까지 부리다니? 란타스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뭐야, 이 자식? 갓 오러를 각성한 솜씨가 아니잖아!”
란타스가 오러를 각성한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비록 주색잡기에 빠져 많이 게을러진 그였지만, 그래도 보내 온 경험과 세월이 있었다. 오러로 육체를 강화하고 무기에 덧씌우는 가장 기본적인 경지는 이미 지나 란타스는 오러 그 자체를 운용하는 레벨에까지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오러를 길게 늘려 채찍처럼 휘두르는 용법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차르륵!
붉은 오러가 3미터 가까이 늘어나 뱀처럼 꿈틀거리며 상대의 등 뒤를 노린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바로 몸을 돌려 기격탄을 쏘아 내 채찍을 파괴했다. 기가 막혔다. 란타스가 오러 자체를 운용하는 경지에 다다르기까지는 7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새파랗게 어린 놈이 비등한 경지의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자신이 많이 논 걸 감안해도, 저 경지는 최소 2, 3년간 죽어라 수련에 매진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즉, 저놈은 10대에 이미 오러를 각성했든가, 아니면 저 얼굴에 마흔이 넘겼다는 소리가 된다!
“젠장! 어느 쪽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이를 갈며 란타스가 연신 공격을 퍼부었다. 차분히 피하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빌어먹을! 애만 덮치는 변태 자식이 뭐 이리 강해?’
추악한 악명과 달리 란타스의 검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게다가 레펜하르트는 제대로 된 검사와 싸워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제라드와 그토록 대련을 해 오긴 했지만, 검술과 권술은 용법이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아직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으, 열받아.’
감히 시리스를 납치하려 한 놈이다. 마음 같아선 단매에 패 죽이고 싶은데, 소아 성애자 변태 주제에 이토록 검이 예리하다니? 뭔가 억울한 감마저 들 정도였다. 허리를 접어 횡으로 날아오는 검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앞으로 무술이 인격 수양에 도움 된다고 떠드는 놈 만나면 반드시 패 준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인격자는, 다툼이 생기면 말로 해결하지 주먹을 쓰지 않는다. 역시 무인들이 잘난 척하려고 만든 말이 분명한 것 같았다. 편견 가득한 상념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연신 기격탄을 쏘아 댔다.
“가라!”
하지만 란타스는 소드 패링을 펼쳐 기격탄을 모조리 터트려 버렸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구겨졌다.
“쳇!”
역시 아직 그는 오러 자체를 다루는 경지가 얕아 제라드처럼 강렬한 기격탄을 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강철을 우그러트리고 바위를 부수기에 충분한 위력이지만, 역시 오러 능력자 상대로는 손색이 있다.
란타스가 곧바로 반격했다. 붉은 칼날이 정교하게 허점을 노리며 방어를 비집고 들어온다. 예리한 오러가 강렬한 기운을 담고 레펜하르트의 신장을 노렸다. 잠깐 몸으로 버텨 볼까 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예상이 빗나가면 옆구리로 오줌 싸는 처지가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피할 틈은 없고…….’
결국 레펜하르트는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칼날을 튕겨 냈다. 양 팔뚝에 황금빛 오러를 감싸 회전시키는 방어법에 란타스의 표정이 굳었다.
‘방어구도 안한 맨 팔뚝으로 검을 튕겨 내?’
물론 양쪽 다 오러가 실려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식하게 단단한 팔뚝이었다. 칼날을 막았는데 상처는 고사하고 긁힌 흔적조차 없다니? 저렇게 말도 안 되게 몸뚱이 단단하게 만드는 무문이라면 란타스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양반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순간 경악으로 멈칫거렸다.
“……설마!”
그때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그 거구로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오러가 실린 발 뒷굽차기를 날린다. 리버스 섬머 솔트 킥이 란타스를 노리고 내리찍혔다. 타이밍이 절묘해 채 피할 틈이 없었다. 란타스가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검신을 손으로 받쳤다.
오러와 오러가 격돌하며 폭음이 울렸다.
3
바람이 불었다. 파괴의 힘이 맞붙어 대기를 끓어 올리니 그것만으로 공터 곳곳에 작은 회오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두 오러 능력자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실란이 그걸 보며 혀를 찼다.
‘끄응, 보통 무사들의 싸움이라면 내가 할 일이 있을 텐데.’
실란의 가공할 신성력이라면 전사의 모든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증폭시켜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저들이 평범한 무인들이었다면 벌써 가호를 내려 승패를 결정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성력은 오러 능력자에겐 통용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통하긴 하는데 효과가 없다는 쪽이 옳다. 이미 오러 능력자는 오러로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증폭시킨 후다. 그 증폭도는 신관의 신성 가호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니 오러 능력자들에겐 가호를 내리나 마나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부상을 입게 된다면 바로 치유시킬 수는 있으니 아까부터 치유술을 쓸 틈만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원체 몸뚱이 하나는 단단한 양반이다 보니 아직 긁힌 흔적 하나 없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란타스가 입을 열었다.
“권왕 제라드의 제자였소?”
말투부터가 달라졌다. 레펜하르트가 마법사다 보니 업계가 달라 미처 몰랐을 뿐, 사실 제라드의 명성은 무인들 사이엔 엄청났던 것이다. 어지간한 무인치고 권왕 제라드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
레펜하르트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제라드 기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란타스는 이미 그가 제라드의 제자임을 확신한 듯했다. 원체 알아보기 쉬운 무문이었으니까.
란타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시 물었다.
“대체 그대 정도 되는 강자가 왜 고작 노예 따위에 연연하는 것이오?”
자기 정도 되는 강자가 노예 납치 따위에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은 싹 무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지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분노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