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제5장 과거의 인연
1
어두운 지하실, 각종 약병들과 기괴한 약초들, 동물들의 시체며 희귀한 광석들이 선반마다 꽉꽉 들어찬 곳이었다. 그곳에서 중년의 남자와 엘프 여인이 플라스크에 조심스레 시약을 옮겨 담고 있었다. 한창 마법 실험에 열중인 레펜하르트와 시리스였다. 평소의 깨끗한 옷 대신 둘 다 허름한 차림으로 두꺼운 서적을 연신 넘기며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시약을 섞는다.
갑자기 시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어? 거기에 지금 그거 섞으면 안 돼요!”
“응?”
외침이 조금 늦었다. 레펜하르트는 이미 유리관을 기울이는 도중이었다. 붉은 액체가 녹색의 광석 위로 떨어졌다.
펑!
가벼운 폭발과 함께 시꺼먼 연기가 자욱하게 퍼진다. 콜록대며 시리스가 연기를 휘저었다.
“아유, 레펜하르트 님! 결국 터졌잖아요!”
“어, 이게 왜 터지지?”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었다. 폭음이 일어났는데도 지하실 밖에선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법사의 실험실에서 뭔가가 터지는 일은 하도 비일비재해서, 마탑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드워프 병사들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폐하. 또 터트려먹었네?’
‘매번 터트리면서 왜 항상 저러시는 거야?’
‘몰라, 마법사는 원래 그러고 산대.’
자욱한 연기 속에서 시리스의 잔소리가 따발총처럼 이어졌다.
“그러게 화염초 추출액을 시드암에 섞으면 어떡해요?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시리스가 삿대질을 해 댄다. 꼬리를 만 채 레펜하르트가 손바닥을 비볐다.
“미, 미안하다…… 될 것 같았는데, 쩝.”
“어제도 그 소리 하시고 바로 터트려 먹었잖아요!”
낑낑깽깽.
혼나는 강아지 모드가 된 레펜하르트가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그 모습에 결국 시리스가 키득 웃어 버렸다.
‘아이, 이 사람은 나이도 지긋해서 왜 이리 귀여운 거야!’
참고로 여자의 귀여움은 남자와 상당히 기준이 다르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자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하겠다. 풀 죽은 반백의 중년남을 진심으로 귀엽다고 생각한 시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손수건을 꺼냈다.
“이리 와요, 얼굴이 까매요.”
“으음…….”
그리고 애써 딴청 피우는 레펜하르트의 얼굴을 슥슥 닦는다.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던 중, 문득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님이란 호칭을 붙일 것이냐? 그냥 이름을 부르래도.”
불만스러운 레펜하르트의 말에 시리스가 다소곳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어요.”
“왜?”
시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인을 향해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레펜하르트는 불만을 잊었다. 자신을 향한 저 애정 가득한 표정만으로도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 ☆ ☆
사랑하던 이가 눈앞에 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가 바로 앞에 서 있다.
기억 속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곳 하나 낯선 부분이 없는 그녀.
하지만 저 싸늘한 목소리는 너무도 낯설다.
“당신이 제 새 주인님이군요.”
노예상의 부름에 따라 검투를 끝내고 올라온 시리스는 차갑게 레펜하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심해 보이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에 무한한 경멸을 담은 시선, 그는 한탄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전생의 모습이 겹쳐지며 가슴속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한 번도 그녀는 자신에게 이런 눈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터질 듯한 그리움으로 겨우 연인을 앞에 두었는데, 그 연인은 더러운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노려볼 뿐이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어서 시리스를 데리고 나가야겠다. 결심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노예상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아이를 구입하시겠습니까?”
“물론!”
단호한 대답에 노예상이 더더욱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눈앞의 이 엘프 소녀는 여기저기 흠집도 나고 차림도 더러워 도저히 구매욕을 느낄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다니?
‘역시 변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변태건 뭐건 귀중한 손님이다. 그것도 재고 떨이를 처리해 주는 고마운 손님! 노예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금화 삼백 닢 되겠습니다.”
사실은 이백 닢이지만 눈치를 보니 이 148번 슬레이어가 아주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이참에 슬쩍 남겨 먹을 욕심이었다.
곁에 있던 실란이 놀라 되물었다.
“고작 근화 삼백 닢이요? 엄청 싸네요?”
“그야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니까요. 손님이 하도 원하시기에 판매는 합니다만, 저도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노예상은 의외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상도를 지키는 선량한 상인인 것이다. 슬쩍 금화 백 닢 더 붙이긴 했지만 원래 물건의 가치란 사람마다 다른 법, 진짜 원하는 이에겐 돈 더 받는 것이 진정한 상도인 법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금액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빨리 시리스를 이곳에서 빼내고 싶을 뿐이었다.
“데리고 가겠소.”
서두르는 그를 향해 노예상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신관을 불러 드릴까요? 흠집 제거 정도는 당연히 해 드려야…….”
최상의 엘프를 제공하기 위해 엘븐하임 경매장은 바다와 포용의 여신, 넵퓨리아스를 섬기는 넵튠 교단과 장기 계약을 맺고 있었다. 호출만 하면 바로 달려와서 148번 슬레이어의 상처를 말끔히 치료해 줄 것이다. 원래는 못 파는 상품이라 생각해서 치료도 안 해 놓았지만, 일단 팔렸으니 최대한 좋은 물건을 제공하는 것이 상인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필요 없소!”
하지만 그는 바로 거절했다. 이 더러운 장소에서라면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실란이 있으니 상처 치유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차갑던 표정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진다. 그가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가자.”
“네.”
세상 모든 것에 희망을 잃은 눈빛으로, 그녀는 레펜하르트의 뒤를 따랐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곧바로 엘븐하임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마치 쫓기듯 허겁지겁 뛰어나온 것이라 실란이 왜 이리 서두르느냐고 투덜댈 정도였다.
경매장 문을 나와 거리로 나서자 그제야 좀 정신이 든다. 레펜하르트는 숨을 골랐다.
“후우…….”
티는 안 냈지만, 그는 사실 시리스를 본 순간 대단히 분노한 상태였다. 상처 입고 피 흘리는 그녀를 본 순간 머리끝까지 피가 올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실 순간적으로 주먹이 10센티미터 정도 움직이기도 했다. 거기서 30센티미터만 더 움직였어도 그 노예상은 머리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아 간신히 냉정을 되찾아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대학살을 일으킬 뻔했다.
그래도 밖에 나와 찬 공기를 쐬니 꽤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허겁지겁 데려온 탓에 그녀는 피투성이에 허름한 차림 그대로였다.
“실란, 치유술 좀 부탁해.”
“이미 하고 있어요.”
실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순식간에 다 나은 시리스가 한결 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 의아해하다가 레펜하르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지금은 추위를 느끼겠구나.’
엘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더위와 추위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숲 속의 요정으로 살며 정령술에 통달했을 때의 이야기지 노예로 살아온 시리스에겐 아직 그런 재주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코트를 벗어 주었다.
“춥겠구나. 미안하다, 일단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
속으로 시리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주인께서 감격스럽게도 노예에게 입던 옷을 건네주셨으니 응당 감동으로 몸을 떨며 거절해야 하나? 뭘 기대하는지는 뻔히 알겠는데, 그 기분 맞춰 줄 생각 따윈 전혀 없다.
노예다운 행동은 해 주겠다. 하지만 마음마저 노예로 살진 않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는 대뜸 손을 뻗어 코트를 받아 걸쳤다. 노예답게 시키는 대로 바로 행해 버린 것이다.
‘이 추위에 폼 좀 내려나 본데, 어디 계속 내 보시지?’
그런데 어째, 간단한 모직 상의만 입고도 이 덩치 좋은 새 주인은 전혀 추운 티를 내지 않았다. 강물이 꽁꽁 얼 정도로 강추위이건만 봄바람이라도 되는 양 한풍을 서슴없이 맞고 있는 것이다. 표정을 보니 그저 시리스가 춥지 않게 된 것이 마냥 좋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안 추운가?’
허세라고 하기엔 정말 피부에 소름 하나 안 돋아 있다. 시리스는 살짝 혀를 내둘렀다. 레펜하르트가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일단 옷부터 사러 가자.”
셋은 상업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한풍이 부니 절로 걸음이 빨라진다. 사실 추위로 걸음이 빨라진 것은 실란과 시리스고, 레펜하르트는 그냥 평소처럼 걸었다. 다리 길이 차이가 있으니 셋의 보행 속도가 비슷해졌다.
걸음을 옮기며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저기, 아직 이름이 없지?”
“네.”
세 번이나 반품되며 이름을 받은 적도 한 번 있기야 하지만, 이미 기억에서 지워 버린 후였다.
“음, 저기…… 시리스라는 이름 어때?”
“제 이름은 시리스군요. 알겠습니다.”
시리스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이라 레펜하르트가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괜찮아? 마음에 들어?”
“……?”
시리스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노예에게 이름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무슨 상관인가? 안 들면 바꿔 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 이름은 시리스. 기억했습니다.”
여전히 차가운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는 전전긍긍했다. 저게 마음에 든다는 의미로 한 소린가? 아, 전생이나 현생이나 여자 마음 이해하기 힘든 것은 여전하구나!
하여튼 별 반대가 없으니 그는 ‘전생’에서처럼 그녀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럼 넌 이제부터 시리스 발렌시아다.”
전생의 그녀는, 이 순간 굉장히 감격해했다. 노예에게 성을 주는 주인 따윈 세상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리스는 마냥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노예에게 성은 필요 없습니다. 혹시 주인님의 성입니까?”
“아니, 네가 가져야 할 성이다.”
“……?”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잠깐 호기심이 일었지만 시리스는 바로 의문을 지웠다. 어차피 이놈도 분명 며칠 지난 다음 신경질 벅벅 내면서 자신을 반품할 것이다. 상관없는 인간에게 관심을 할애할 이유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자신과 실란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난 레펜하르트. 얘는 실란이고 필라넨스의 성직자다.”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얼굴로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븐하임 경매장의 주인, 라쿠스는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행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금고 속의 금화를 세는 일이었다. 엘프 노예 사업은 투자비가 엄청나게 들어가긴 하지만 그만큼 얻는 이득도 어마어마했다. 시작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궤도에 오르고 나면 망할 일은 절대 없다.
‘세상 남자들이 모두 고자가 되거나 성자가 되지 않는 한은 말이지.’
300년이란 전통 속에 14대 후계자로 경매장 주인이 된 라쿠스는 그래서 인생이 행복했다. 초기에 경매장을 세운 조상님들이야 고생깨나 했다고 들었지만, 편하게 사업을 물려받은 그는 고생 따위 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각 교단에서 펼쳐도 세상 남자들은 결코 성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사업도 영원토록 번창하리라!
그렇게 한창 라쿠스가 신을 낼 때였다. 시종 중 하나가 귀한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금화 세는 일도 중단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접대실에는 이미 화려한 복장의 뚱뚱한 청년이 인상을 쓰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쿠스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테리크 님. 어서 오십시오.”
공국 2위의 대상회, 롤페인 상회의 후계자이자 엘븐하임 경매장 최대의 고객이기도 한 그가 왔으니 지금 금화 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깍듯한 라쿠스의 인사에 테리크가 표정을 풀었다.
“잘 지내셨소, 라쿠스.”
“석 달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요새 하시는 일은 잘 되시는지요?”
“타오반이란 새 상회가 생겨서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소.”
타오반은 요 근래 새롭게 두각을 나타나는 상회였다. 주로 곡물을 전문으로 다루는지라 롤페인 상회와 자꾸 사소한 다툼이 생기곤 했다. 기본적으로 안 다루는 것이 없긴 하지만 롤페인 상회의 주력은 곡물과 소금이다. 영역이 겹치니 이놈들이 자꾸 그의 상권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압박을 가하고 있던 참이지.”
자고로 거슬리는 것들은 돈으로 누르는 것이 정석인 법, 라쿠스가 바로 알아듣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야 테리크님의 수완이라면 어련히 잘 하시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렇게 두 사람은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교환했다.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자 라쿠스가 바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번에 공들여 키우던 엘프 암컷이 하나 있어서요. 안 그래도 선보여 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테리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 이번엔 됐소. 따로 사고 싶은 게 있어 왔으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뚱뚱한 청년이 라쿠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그, 얼마 전에 베레트가 반품한 슬레이어가 하나 있다면서?”
라쿠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기껏 슬레이어로 키웠는데 세 번이나 반품당한 대실패작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결국 본전도 못 건지고 싸게 팔지 않았던가? 그 보고 들으면서 참 속이 쓰렸다.
“148번 말입니까?”
“댁들이 붙인 번호 따위를 내가 알 리가 없잖소? 하여튼 그거. 그거 내주시오.”
찬장에서 술병이라도 가져오라는 식의 태도로 테리크가 손가락질을 했다. 평소라면 만세를 불렀을 일이겠지만…….
“아, 저, 그게.”
난처해하는 라쿠스를 보며 테리크가 의아해했다.
“응? 문제라도 있소?”
“그게, 148번은 이미 팔려 버렸습니다만.”
“에엥?”
“그것도 막 방금 팔렸습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테리크는 황당해했다. 원래 슬레이어는 워낙 고가라 쉽게 팔리지 않는다. 1년에 세 마리 팔면 대박이라 할 정도였다. 뭐, 엘프들이야 워낙 유통기한(?)이 기니까 결국 다 팔 수야 있지만.
‘그런데 그것이 벌써 팔렸다고? 이런 공교로운 일이?’
“설마 베레트가 내 심중을 눈치채고 다시 사 간 건가?”
“아뇨, 베레트 님이 아니라…….”
라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처음 보는 청년이었습니다.”
“잉?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환어음 결제할 때 서명을 했을 것 아니오?”
“그게, 전부 현금으로 계산해서요.”
“허, 슬레이어를 현금으로 구매할 정도로 돈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아무리 돈이 넘치는 그라도 금화 몇백 닢을 현금으로 가지고 다니진 않는다. 어차피 신용 높은 롤페인 상회의 환어음으로 모두 결제가 가능하니 굳이 무거운 짐 지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슬레이어를 구매할 정도로 잘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 마찬가지다.
“그 슬레이어는 워낙 결함품이라 그냥 헐값에 넘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에잉…….”
현찰로 계산했다는 걸로 보아 뜨내기 모험가가 운 좋게 대박을 터트려 평소의 로망을 이룬 모양이다. 아마도 싸다는 소리에 덜컥 넘어갔겠지.
“그럼 그 사간 놈 인상착의를 알려 주시오.”
테리크는 반품 엘프를 다시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베레트를 놀릴 목적이었지만, 이미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는 소리를 듣더니 욕심이 덜컥 생겼다. 언제나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던 테리크였다.
‘적당히 웃돈 주면 고마워하면서 넘기겠지.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테리크의 요구에 라쿠스가 잠시 주저했다. 원래 고객의 신상명세는 알리지 않는 것이 상인의 법도다. 자칫하면 엘븐하임의 신용도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엘븐하임이 아무리 유서 깊은 경매장이라도 롤페인 상회와 비견할 수는 없다.
‘뜨내기 같았으니까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
“찾기는 쉬울 겁니다. 워낙 덩치가 큰 청년이었으니.”
결심한 라쿠스가 레펜하르트의 외모를 천천히 묘사했다.
☆ ☆ ☆
제플린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의류점을 찾은 레펜하르트는 바로 주인을 닦달해 돈이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시리스가 입을 만한 건 몽땅 가져오라며 으름장을 놨다. 돈 냄새를 맡은 의류점 주인이 희희낙락하며 각종 값비싼 여성용 의복들을 연신 가져왔다.
“어때? 마음에 드는 거 있니?”
레펜하르트가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물론 시리스는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아니, 네 마음에 들어야지 내 마음에 들어 봤자…….”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난처해하는 레펜하르트에게 시리스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노예로 살던 그녀에게 화려한 옷을 사 주고 감사를 받고 싶은 모양인데, 솔직히 가소로웠다.
‘비싼 옷이라도 사주면 감동할 줄 알았나 보지?’
노예인 그녀에게 이런 비싼 옷을 사 주는 것에 대해선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엘프 노예를 산 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는 경우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애초에 예쁜 엘프들을 사다가 인형처럼 입혀 놓고, 눈요기를 한 뒤 벗기려는 놈들은 세상에 쌔고 쌨다.
얼음 같은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바로 마음을 열 리 없지.’
자신에게 있어 시리스는 몇십 년간 사랑해 온 연인이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는 오늘 처음 본 생판 남인 것이다.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서운하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어쨌거나 옷을 사긴 사야 한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직접 이것저것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무슨 색을 좋아했더라?’
레펜하르트는 전생의 그녀의 취향을 떠올리며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옷을 하나하나 골랐다. 남자는 보통 연인이라도 여자의 옷 취향에 대해서는 그저 좋아하는 색상 정도나 알면 다행이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 보니 그냥은 생각이 안 나 무려 인공 주마등까지 써 가며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덩치 큰 사내놈이 여자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감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의도야 좋았지만 남이 보기엔 참 변태스러운 광경이었다. 실란은 낯부끄럽다고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아, 대충 좀 골라요.”
저게 어떻게 보이냐면, 노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자기 취향으로만 꾸미겠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왜 옷 하나하나를 고를 때마다 저리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연인에게 옷을 사 주는 거라면 사랑하는 이의 취향을 고려하는 성실한 모습이겠지만(그리고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입힐 상대가 엘프 노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무섭도록 진지한 태도를 고수할 뿐이었다. 실란의 불만 따윈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열심히 옷을 고르는 그의 모습에 시리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이상하긴 하네?’
레펜하르트가 고르는 것은 전적으로 착용자의 편의성에 맞춰 있었다. 겉보기에 야하고 섹시한 옷은 철저히 배제하고, 실용적이면서도 튼튼하고 착용감이 편안한 것 위주로 고르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벗길 거, 왜 굳이 착용감을 신경 써 준단 말인가?
결국 레펜하르트는 색색별의 속옷과 평상복으로 입을 질 좋은 원피스 몇 벌, 그리고 여행용으로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 사슴 가죽으로 만든 부츠와 재킷을 두 벌씩 구입했다. 모두 최상급으로, 어지간한 귀족이나 입을 법한 물건들이었다. 시리스가 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허름한 노예의 모습은 사라지고 갓 여행을 나선 귀족가 영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때? 몸에 맞아?”
살짝 몸을 움직여 보며, 시리스는 솔직히 감격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팔려 가면서 화려한 드레스는 많이 입어 보았지만, 이렇게 편안하고 몸에 달라붙는 것 같은 좋은 옷은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고급품이었다. 다른 놈들은 죄다 벗길 생각밖에 없어, 겉으론 화려한 드레스였지만 실제로는 싸구려만 입히곤 했다.
게다가 색상도 디자인도, 신기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마치 자신의 취향을 완전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
‘좋다…….’
하지만 마음속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조금 예상과 다르긴 해도, 그것이 이 청년을 좋게 평가할 이유는 못 된다.
여전히 냉랭한 시리스의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뭔가 오해했는지 머리를 긁었다.
“으음, 나중에 더 좋은 것들로 구해 줄게. 지금은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입고 있어.”
이런 고급품을 사 줘 놓고 무슨 엉뚱한 소린가 싶어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허세를 피우는 건가 싶었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진심이었다.
전생의 시리스는 여행을 다닐 시 아예 인간이 만든 물건은 몸에 걸치지도 않았다. 전신을 죄다 은의 시대 유적에서 나온 아티팩트로 도배를 했던 것이다. 공간 이동 마법이 걸린 부츠라든가, 포스 필드가 발동되는 바지라든가, 절대 생존 주문이 걸린 서바이벌 재킷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심지어는 속옷조차도 레펜하르트가 한 달 동안 낑낑대며 인챈트해 모든 습기와 노폐물을 완벽하게 흡수하며 착용자에게 최상의 촉감을 제공하는 1급 마도구였다. 급수만 따지면 마검 알티온보다도 높은 것이다. 그야말로 성을 입고 다녔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그것이랑 비교하면 마법 하나 안 걸린 이 옷들이야 부실할 수밖에 없지. 미안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아라, 시리스. 금방 던전들 뒤져서 싹싹 긁어 올 테니까.’
남은 옷가지들을 챙긴 뒤 레펜하르트는 짐을 직접 들고 나왔다. 노예인 시리스를 내버려 두고 직접 짐을 들다니, 다시 이상하게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헤어질 인간이니 어떤 기행을 부려도 무시한다는 생각이었다.
“시리스, 배는 고프지 않니?”
가게를 나선 레펜하르트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시리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이번 주인은 뭔가 이상해도 많이 이상했다. 계속 노예인 그녀의 의사를 묻다니?
‘무슨 인간 여성을 대하는 것 같잖아?’
물론 그녀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이번에도 시리스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음, 그러니까 딱히 주인님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고…….”
“반품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뜸 나오는 반품 타령에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아,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하나?
“그냥 함께 여행하는 동료로 대해 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주인님이라 하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주면 안 될까?”
진심 어린 레펜하르트의 말에 시리스는 그 순간 모든 의혹이 햇살 만난 안개처럼 걷혀 가는 걸 느꼈다.
‘아, 그런 설정이었냐?’
뭔가 아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드디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덩치 큰 청년은 자신을 지금 옛 모험담에서 나오는 동료 여검사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험담이 애들을 참 많이 버려 놔서, 모험가를 꿈꾸는 애들 중에는 미모의 여검사 동료를 동경하는 이들이 꽤 된다. 슬레이어라는 직종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모험담에도 그 여검사로 노예 종족인 엘프가 등장하는 경우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미모의 여검사란 건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엘프로 대체하는 변태들이 꽤 있다고 들었다. 이놈도 아무래도 그런 역할 놀이에 푹 빠진 종류 같았다.
‘뭐, 괜찮은 옷 선물해 준 대가로 잠시 따라 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며칠 지나면 망상과 현실이 다른 걸 깨닫고 반품하겠다며 난리 칠 테니까.’
시리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펜하르트 님이라고 부를게요.”
‘아…….’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의 목소리다. 비록 쌀쌀맞긴 하지만, 그래도 기억 속의 칭호였다. 아련한 추억이 밀려오며 가슴이 들뜬다.
레펜하르트는 식당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뒤를 따르는 시리스가 한심하단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여튼 인간은 다 똑같은 놈들이야.’
2
‘레단티의 은혜’는 제플린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중 하나였다.
대지와 풍요의 여신, 레단티의 이름을 건 이 레스토랑은 감히 여신의 이름을 걸 만큼 명성 높은 곳이었다. 대륙 각국의 국왕 직속의 요리사였던 이만도 셋인 데다가 마법사 길드와 계약을 해 제철 아닌 재료들도 싱싱하게 보존해 요리에 쓰니, 각국의 미식가로부터 명성이 높았다.
물론 그만큼 가격도 상상을 초월했다. 일단 마법을 이용해 보존하다 보니 재료비부터가 차원이 다른 데다가 요리사 역시 어지간한 귀족 수준의 봉급을 받는 이들이 대부분이니, 한 끼 식사로 금화 외의 다른 화폐로는 계산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신성모독이라고 해도 좋을 저 무엄한 간판을 대놓고 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곳이 레단티 교단의 제플린 교구인 탓이었다. 뭐, 교리 상으로는 레단티의 은총인 대지의 산물을 가공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야말로 여신을 섬기는 자신들의 의무이기에 그렇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돈 잘 벌리니까 계속 하는 것 같았다.
“정말 베풀려면 음식을 무상으로 공급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테이블 위로 차려진 성찬들을 바라보며 실란은 투덜거렸다. 필라넨스의 성직자인 그는 레단티 교단의 이 돈독 오른 교리 해석에 꽤 불만이 많았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필라넨스 교단도 비슷한 사업 하지 않아?”
사랑과 미, 자애의 여신 필라넨스 교단은 각 교구마다 에스틱 살롱을 하나씩 마련해 놓고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미용 사업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레단티 교단을 욕할 처지는 못 되는 것이다.
“그건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여긴 그게 아니잖아요?”
“필라넨스 에스틱 살롱도 금화 꽤 받는다고 들었는데?”
“그, 그렇긴 하지만…….”
말문이 막힌 실란이 다른 트집을 잡았다.
“아니, 바닷가재가 왜 대지의 산물이에요? 교리를 지킬 거면 아예 해산물은 메뉴에서 뺐어야죠.”
하지만 맛있으므로 계속 먹는다. 냠냠.
지금 그들은 레단티의 은혜 2층에 앉아 코스로 나오는 요리를 한창 즐기는 중이었다.
과연 요리는 훌륭했다. 나름 고위 성직자로 괜찮은 식사를 해 온 실란조차도 여기서 처음으로, 고기 요리가 민트 없이도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향초를 넣고 구운 사슴 넓적다리 구이,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살구 빵에 한겨울임에도 갓 잡은 듯 싱싱한 농어 요리 등이 연달아 나왔다. 실란은 연신 입으로 불만을 토하고, 그 빈자리에 요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스테이크를 듬뿍듬뿍 썰어 입으로 가져가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시리스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엘프답게 신선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흰 빵, 그리고 꿀에 절인 사과와 무화과를 먹고 있었다. 빵을 씹으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걸었다.
“슬레이어 훈련을 받았지? 그럼 주로 무슨 무기를 배웠니?”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이지만,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꺼낸 화제였다. 채소를 삼킨 뒤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단검과 장검술, 비도술, 궁술을 배웠습니다.”
“그럼 무기를 준비해야겠네?”
“네.”
단답형 대꾸를 끝으로 다시 시리스가 식사에 열중한다. 참 말 붙이기 어려운 분위기라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쩝, 여기도 마음에 안 드나?’
사실 이곳은 전생의 시리스가 참 좋아하던 곳이었다. 특히 지금 먹고 있는 메뉴를 굉장히 즐겼다. 그래서 둘이 처음 만났던 날을 기념하며 1년에 한 번씩 이곳에 와서 식사를 즐기는 것이 그들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안타레스 제국을 세운 뒤 그가 마왕으로 불리게 되자, 이곳을 못 오게 되어 그녀가 참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가 좋아하던 곳에 와서 그녀가 즐기던 음식을 시켰는데도 테이블 위는 찬바람만 쌩쌩 분다.
‘거참, 너무 차갑네…….’
사랑을 속삭이던 전생의 모습과 겹쳐지니, 지금의 시리스가 너무 낯설다. 전생의 그녀 역시 처음 만날 땐 웃음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눈빛이 다르다. 허무하긴 했어도, 저런 적의와 경멸의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역시 너무 일찍 만나서 그런 건가?’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예전의 그는 구원자로서 시리스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구매자로서 시리스 앞에 나타났다.
한 글자 차이지만 의미는 하늘과 땅이다. 솔직히 시리스가 뭐가 예쁘다고 레펜하르트를 좋게 봐 주겠는가? 전생에서야 학대받다가 구함받았으니 당연히 적의 따위 느끼지 않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레펜하르트는, 아무래도 시리스가 아직 소녀 시절이다 보니 남자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게 있어 그런 것 같다며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음, 뭐 그래도 언젠가는 진심을 알아주겠지?’
전생이건 지금이건 시리스는 시리스일 뿐.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연인이다. 그렇다면 결국 운명대로 흘러가리라.
기대했던 재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차가웠지만, 무화과 절임을 먹고 있을 땐 살며시 표정이 풀리는 걸 보면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닌 듯했다.
레펜하르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맛있게 먹고 있는 시리스를 보고 있으니 마냥 좋았다.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해.’
식사를 마치고 레펜하르트는 바로 무기상을 찾았다. 시리스에게 무기를 사 주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시리스도 직접 무기를 골랐다. 옷가지와 달리 무기는 얼마나 손에 맞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단티의 은혜에서 사 준 음식은 맛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메뉴만 골라 주문했던 레펜하르트였다. 입에 안 맞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겉으로야 차가운 태도를 고수한 시리스였지만 속으로는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이 ‘정신 나간 덩치 큰 변태 주인’에 대한 호감도도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엔 시리스도 순순히 레펜하르트의 역할 놀이(?)에 맞춰 주고 있었다.
“자, 손님. 이게 저희 가게에서는 최상급품입니다요. 다른 곳에선 구하지도 못할 겁니다. 으하하.”
주인장이 그녀가 쓸 만한 세검류와 단검류, 그리고 대거 등을 연거푸 들고 나오며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레펜하르트의 돈지랄은 여전하여, 하나같이 최상품들뿐이었다. 가장 가격이 싼 대거조차도 마법 금속 미스릴을 섞어 제련한 드워프제였다. 몇백 년 전 같았으면 어지간한 귀족이나 왕족만 쓸 수 있었을 귀한 물건이겠지만, 현 시대엔 대부분의 드워프가 노예화되어 인간 밑에서 대량 생산형 체제를 갖추고 있기에 미스릴로 된 물건들도 그럭저럭 시장에 풀리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귀하긴 마찬가지다. 제플린 정도 되는 대 상업 도시이기에 이런 물건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때, 시리스? 쓸 만한 게 있니?”
레펜하르트가 슬금슬금 시리스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미스릴과 강철 합금으로 제련된 레이피어를 들고 한창 무게 중심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레펜하르트가 문득 말했다.
“으음, 이왕이면 그것보다는 이쪽이 더 낫지 않아?”
그가 가리킨 것은 펼쳐 놓은 무구들 왼쪽에 위치한 은회색의 시미터였다. 역시 레이피어와 마찬가지로 미스릴과 강철 합금으로 제련된 물건이었다. 시리스가 잠시 놀랐다.
‘아니?’
원래 슬레이어라면 레이피어를 쓰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모험담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검사들이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탓이다. 그렇다 보니 그녀도 무심코 그걸 골랐다. 딱히 역할 놀이에 맞춰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무의식중에 레펜하르트가 이런 취향을 원할 것이라 생각해 버린 것이다.
“어째서 이걸 권한 건가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리스가 물었다. 레펜하르트가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
“응? 원래 시미터 쓰지 않았어?”
실제로 시리스가 가장 잘 다루는 무기는 시미터 같은 환도 계열이었다. 찌르기 위주인 레이피어는 사람이나 인간형 이종족들 상대로는 쓸모가 있지만 거대 몬스터들 상대론 그리 유용하지 않았기에 배워 두긴 했어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고?’
마치 시리스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안 그래도 옷가지 고를 때라든가 레스토랑 메뉴 시킬 때도 신기할 정도로 그녀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수상쩍어하는 시리스의 표정에 레펜하르트도 아차 싶었는지 얼굴을 굳혔다.
‘으, 실수했다. 뭐라고 변명하지?’
스토커가 아닌 한에야 어찌 오늘 처음 본 여자의 취향이며 실력을 알고 있겠는가? 레펜하르트는 난감해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안 그래도 영 이미지가 안 좋은 것 같은데 거기에 스토커 누명까지 쓰면 어쩌자고?
물론 시리스는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경계 엄중한 엘븐하임을 침투해 스토킹을 할 정도 수준이면 이미 전설의 시프 마스터일 것이다. 설마 그 정도의 은신술 달인이 고작 엘프 노예 스토킹이나 하고 있겠는가?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의아해하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낑낑대고 있던 차였다. 실란이 구원의 동아줄을 던져 주었다.
“우와, 경지에 오른 무인은 손만 보고도 익숙한 무기를 알아볼 수 있다더니, 정말 대단하네요, 레펜 씨?”
“아…….”
시리스가 납득한 얼굴을 했다. 당연히 그런 재주 따윈 없었지만, 레펜하르트도 그런 거란 표정을 열심히 지어 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실란에게 감사했다.
‘고맙다, 실란.’
그렇게 무장을 마치고 레펜하르트 일행은 무기상을 나섰다.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레펜하르트는 실란에게도 미스릴제 단검을 하나 사 주는 통 큰 모습을 보였다.
물론 실란은 단검술 따윈 몰랐지만, 그래도 단검은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데다가 무려 드워프제 미스릴 무기다. 실란이 희희낙락하며 의외의 수확에 신을 냈다.
“우와, 구경은 많이 했어도 제가 미스릴제 무기를 손에 넣는 건 처음이에요.”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넌 프리스트인데 무기 들 일이 뭐가 있겠냐.”
무투승 몽크나 성전사 클레릭, 성기사 패러딘이면 모를까 순수 신관, 프리스트인 실란이 무기 들 상황이면 이미 막장 직전까지 갔다고 봐야지.
그래도 실란은 단검을 이리저리 만지며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역시 아직 소년인지라 귀한 무기를 얻으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렇게 무기상을 떠나 여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막 사거리를 지나치는데 건장한 한 무리의 사내들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귀하에게 할 말이 있소.”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한 것이 얌전한 일 하고 살아온 인생은 확실히 아니었다. 게다가 전원이 무장을 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경계하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슬쩍 그의 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노예가 오늘 엘븐하임에서 구입한 슬레이어요?”
“……그런데?”
사내가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거만하게 말을 이었다.
“귀한 분께서 저 엘프 암컷을 원하고 계시오.”
시리스를 칭하는 호칭에 순간 혈압이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이놈들을 상큼하게 때려눕히기엔 너무 보는 눈이 많다. 애써 참으며 레펜하르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값을 잘 쳐줄 테니 그 노예를 다시 파시오. 귀하가 원한다면 다른 제대로 된 슬레이어와 교환해 줄 수도 있다 하셨소. 여기, 인증된 환어음이 있으니 확인해 보시오.”
그리고 사내가 엘븐하임의 환어음을 펼쳤다. 인장이 확실히 찍혀 있어 사기가 아닌, 제대로 된 환어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플린 시내에서 감히 위조 환어음을 사용하다가는 사지가 찢겨서 죽게 된다. 살인은 돈으로 무마되지만 어음 위조는 최악의 중범죄인 이곳은 차탄 공국, 금화를 섬기는 나라다.
말을 마치며 사내가 일행에게 엘프를 데려오라며 손짓을 했다. 아예 상대가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않는 태도였다. 레펜하르트가 시리스 앞을 가로막으며 인상을 팍 썼다.
“일 없다.”
순간 사내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생각도 않았던 반응이기에 혹시 자기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응? 거절한다는 의미요?”
“그렇다.”
단호한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중년 사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번이나 반품된 결함품 슬레이어를 훌륭한 완성품과 바꿔 준다는데 설마 마다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기가 막혀 사내가 혀를 찼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더 좋은 물건으로 바꿔준다 하지 않았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일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일부러 말을 따라 하며 레펜하르트가 비아냥을 던졌다. 사내의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이 자식이…….”
사내를 따라온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무래도 한판 붙겠구나 싶어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실란과 시리스를 감쌌다.
그런데, 의외로 사내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음, 특이한 친구로군. 그렇다면 강요할 수는 없겠지. 그 엘프 노예가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구려?”
그리고 순순히 물러선 것이다. 일행을 이끌고 중년 사내가 그대로 발길을 돌려 거리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오만한 말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뭐야, 저놈?”
레펜하르트가 허탈해하며 웃음을 흘렸다. 긴장했던 실란도 기가 막혀 피식거렸다.
“별 웃긴 양반 다 보겠네요.”
☆ ☆ ☆
제플린 시외의 롤페인 저택.
테리크가 인상을 쓰며 중년 사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뭐야? 왜 빈손이냐, 로마드!”
로마드가 고개를 숙이며 차분히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덩치 큰 뜨내기 모험가를 만나고, 그자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 설명을 마치며 로마드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애송이입니다. 돈을 얼마를 주건 팔 놈이 아닙니다. 세상 물정을 몰라요.”
“그렇다면 대충 패 버리고 환어음 던져 주고 오면 될 것 아닌가?”
“그, 그건 좀…….”
로마드는 쩔쩔매며 머리를 긁었다. 돈 많은 테리크야 백주 대낮에 사람을 패도 금화로 무마가 되지만, 그는 그저 고용인일 뿐이다. 그럴 돈 따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 테리크가 수하의 패악까지 돈으로 덮어 줄 만큼 관대한 놈도 아니다. 오히려 쓸데없는 지출 따위 필요 없다며 자신을 내칠 가능성이 훨씬 컸다.
그가 말을 이으며 테리크를 달랬다.
“괜히 보는 눈 많은데 난리 피우면 돈 들잖습니까? 그냥 상도에 따라 해결을 보시지요.”
돈 든단 소리에 씩씩대던 테리크가 조금 진정을 했다. 생각해 보니 로마드의 말이 옳았다. 불필요한 지출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상도에 따라 해결하면 된다.
“그냥 그 슬레이어를 잡아 온 다음에, 죽었다고 하고 배상금으로 두 배를 건네면 됩니다. 그래 봤자 금화 육백 닢이니 제대로 된 슬레이어로 바꿔 주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된 상인이 들으면 비분강개할 상도(?)였지만 테리크는 만족했다. 확실히 차탄 공국의 법상으로는 저것이 제일 저렴하고 뒷문제도 없었다. 뭐, 슬레이어 빼앗긴 그 뜨내기 놈이 난리 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때는 그냥 부담 없이 패 버려도 이쪽이 정당방위이므로 벌금 따위 낼 필요가 없다.
아주 만족스러운 아이디어였다. 테리크가 흡족해하며 웃었다.
“괜찮군. 적당히 처리하도록. 믿겠다.”
“네, 도련님.”
방을 나서려는 로마드를 향해 테리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란타스 경도 좀 데리고 가. 그 양반 요새 놀기만 하는데 이렇게라도 월급 좀 뽑아 먹자.”
로마드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안 그래도 그 역시, 엄청난 보수를 받음에도 그저 매일같이 놀고만 사는 란타스 경에게 불만이 있는 상태였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고개를 숙이며 로마드가 피식 웃었다.
☆ ☆ ☆
여관으로 돌아온 레펜하르트는 한창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거, 돈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비싼 옷 사고 비싼 밥 먹고 비싼 무기만 골라 샀어도 돈이 남았다. 애초에 그는 시리스 구입 대금으로 금화 이천 닢을 각오하고 엘븐하임을 갔다. 그런데 고작 삼백 닢으로 해결을 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물품 구입비를 빼고도 현재 금화가 천육백 닢 가까이 남아 있었다.
‘그냥 들고 다니면서 여행 경비로 써도 되기야 하겠지만…….’
솔직히 아무리 사치를 하고 다녀도 금화 백 닢이면 뒤집어쓴다. 그만큼 슬레이어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사실 금화 천육백 닢이면 야심 있는 상인이 팔자를 바꿔 볼 만큼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가만있자, 이걸 굳이 들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레펜하르트 개인이 쓰기에 저 금액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큰돈이다. 하지만 그는 안타레스 제국을 재건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는 몸! 한 나라를 세우려면 자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적당히 여행 경비를 제외하고는 재투자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이곳은 대륙의 쟁쟁한 상회들이 모두 모여 있는 제플린이었다. 적당한 투자 대상을 찾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자, 그럼 무엇에 투자를 해야 할까?’
레펜하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미래를 알고 그것을 이용해 한몫 챙겨 보겠다는 상상쯤은 누구나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진짜로 그 미래를 알고 있는 몸이다.
‘지금 시기가 아마 그때지?’
과거 크로방스 왕국에 심각한 기근이 든 적이 있었다. 원래 크로방스 왕국은 대지의 여신, 레단티의 축복을 받아 거의 흉년이 없는 비옥한 땅이었다. 봄의 보리, 가을의 추수 양쪽 모두 풍성한 수확을 자랑해 남은 곡식을 수출하는 농업 국가였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누구도 흉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덮친 대기근, 예상했던 보리 수확이 전멸해 버리고 겨우내 비축한 곡식을 모두 먹어 버린 크로방스 왕국의 운명은 뻔했다. 수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고 왕국 전역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그것이 딱 이번 겨울 후의 봄이었다.
‘곡식 쪽을 투자하면 되겠군.’
그는 빙그레 웃었다. 안 그래도 어릴 적에, 저 기근 이야기를 미리 알았더라면 크게 벌 수 있었을 거라고 어른 마법사들이 술 먹고 떠들던 걸 들은 기억이 있었다. 돈도 벌고 사람들도 구하고 일석이조다.
잽싸게 머릿속으로 곡물을 전문으로 다루는 차탄 공국의 상회 리스트를 넘겨 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롤페인 상회였지만, 솔직히 그는 롤페인 상회에는 악감정이 많았다. 시리스를 학대하던 전생의 주인이 바로 롤페인 상회의 회주였으니까. 그렇다 보니 그쪽으로는 발 디디기도 싫었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롤페인 상회와 경쟁하던 또 다른 곡물 전문 상회였다. 롤페인 상회의 자금 압박에도 불구, 훌륭히 상회를 경영해 결국 대륙 3위의 대상회까지 올라갔던 곳이다.
‘이름이…… 타오반 상회였지, 아마?’
결정을 내리고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둘러보니 시리스는 방 안에서 새로 구입한 무기들을 손에 익도록 이리저리 다뤄 보고 있었고, 실란은 사 준 단검을 들고 어설프게 그걸 따라 하고 있었다.
‘굳이 쟤들을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고.’
시리스는 오늘만이라도 편한 여관에서 푹 좀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길을 걷는 강행군을 해야 할 테니까.
“실란, 시리스랑 쉬고 있어. 나 좀 나갔다 올게.”
한참 신나게 단검으로 허우적대던 실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어딜 가요?”
“상회 좀 들를 곳이 있다.”
코트를 챙겨 입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은 잠시 따라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방금 제플린을 한 바퀴 돌았더니 피곤하기도 했고 또 단검 가지고 노는 재미가 쏠쏠해 굳이 나가고 싶진 않았다. 시리스야 굳이 명령이 없었으니 따라나서겠다는 생각도 안 했고.
“다녀오세요.”
손 흔드는 실란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첨언했다.
“혹시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얼마든지 시켜. 시리스 것도 빼놓지 말고!”
시리스 성격에 자기가 룸서비스를 시킬 리는 절대 없으니 실란에게 당부한 것이었다. 실란이 혀를 찼다.
“지극 정성이다, 정말. 걱정 말고 갔다 와요.”
그렇게 두 사람을 여관에 놔두고 레펜하르트는 다시 상회 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 ☆ ☆
회반죽으로 벽을 칠한 작은 방, 목재 책장과 테이블이 전부인 그 간소한 방 한가운데서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서류를 붙잡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남자 앞에는 이미 수많은 서류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연신 서류에 사인하고, 또 고뇌하며 한창 계산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방 밖에서 비슷한 연배의 사내가 들어와 울상을 지었다.
“시볼트 회주님, 롤페인 상회가 밀과 보리를 반값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타오반 상회의 회주인 30대의 사내, 시볼트 타오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크윽, 빌어먹을 놈들.”
현 타오반 상회는 롤페인 상회와 곡물로 경쟁 중이었다. 공정 거래법 따위는 개념도 없는 시대다. 큰 쪽이 손해를 감수하고 돈으로 밀면 자연스럽게 작은 상회는 말라 죽기 마련, 그래도 상도를 안다면 그렇게까지 비열하게 나오진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역시 롤페인 상회의 악명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타오반 상회는 모든 거래처를 빼앗기게 된다.
“젠장, 그따위 상회가 대륙 2위의 대상회라니…….”
시볼트는 두통을 느끼며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정말 세상이 얼마나 썩었는지 실감이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돌아오는 환어음만 막아도 어떻게든 살 길이 나는데…….’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참이었다. 또 다른 부하 하나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그를 불렀다.
“저기, 시볼트 회주님.”
“왜?”
심기가 불편하니 말투가 절로 퉁명스럽게 나온다. 부하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투자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돈 몇 푼 투자받아 봤자 당면한 문제는 해결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은 일거리만 늘리는 격이다. 게다가 그쪽은 부하가 전담하고 그는 보고를 받는 부분이었다. 왜 이 시기에 직접 알린단 말인가?
과연 이유가 있었다.
“그게, 금액이 자그마치 금화 천오백 닢입니다.”
“뭣이?”
대상회 기준으로 금화 천오백 닢이면 결코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타오반 상회에게는 그야말로 죽어 가는 상회를 살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일단 이 겨울만 보내고 대륙 각지의 곡물들이 현물로 들어오기만 하면 충분히 손해를 메우고도 큰 이익이 나는 것이다. 그걸 아니까 롤페인 상회도 이 겨울을 못 넘기도록 저런 출혈 정책을 쓰는 것이지만.
눈이 번쩍 뜨여 시볼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뉘, 뉘시냐! 내가 직접 만나 뵈어야겠다!”
레펜하르트는 안내한 작은 응접실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흐음, 꽤나 간소한 방이군. 별로 형세가 안 좋은가?’
사실 여기까지 찾아오기도 꽤 힘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타오반 상회는 대륙 3위의 거대 상회, 그렇다 보니 으리으리한 건물을 기대했다. 그런데 제플린 시의 타오반 상회는 고작 2층의 작은 벽돌 건물이었다. 이 동네 땅값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외곽에 저택을 세울 금액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다른 상회 건물과 너무 비교가 된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초라하지도 않았다. 괜찮은 벽지에 우아한 가구, 손님을 대하기에 부족함 없는 인테리어였다. 하지만 엘븐하임이며 여관 황금의 휴식처에서 너무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뭔가 가난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끙, 그동안 너무 호사를 부리고 다녔나? 자제해야겠네.’
내심 반성하며 레펜하르트는 타오반 상회의 회주, 시볼트 타오반을 기다렸다. 잠시 후 30대 사내가 허겁지겁 응접실로 들어왔다. 기억 속의 노인은 아니었지만, 고집스러운 입매나 또렷한 눈빛에서 바로 시볼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레펜하르트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레펜하르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금화가 가득 든 자루, 세 개를 테이블에 척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금화 천오백 닢, 모두 곡물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장소는 크로방스 왕국, 시기는 내년 봄 보리 추수 때.”
금화의 무게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시볼트가 놀라 되물었다.
“네에? 크로방스 왕국요?”
크로방스 왕국은 대륙 최대의 곡창 지대, 게다가 레단티의 축복을 받아 결코 흉년이 들지 않는 땅이었다. 거기에 곡식을 판다는 것은 열대 지방에 난로를 판다는 소리랑 같았다. 어이가 없어 시볼트가 입을 쩍 벌렸다.
“저, 손님.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습니다만 크로방스 왕국에 곡물을 판다는 건 오크에게 비누를 파는 격입니다. 도저히 팔리질 않아요.”
“오크들도 익숙해지면 비누 잘 씁니다.”
“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심코 전생 이야기를 꺼내 버렸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시볼트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그 역시 미래를 몰랐다면 이런 투자를 하겠다는 소릴 듣고 천하의 바보로 여겼을 것이다.
“망해도 내가 망하는 것 아닙니까? 반면 이득이 나면 그쪽도 꽤 이익을 건질 텐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시볼트가 난처해하며 입술을 매만졌다. 저 돈이면 확실히 현재의 고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투자자에게 맞장구치기에는 그의 상인 정신이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도 망할 것이 뻔한 투자를 손님에게 권할 수는 없습니다. 재고를 고려해 보심이 어떤지…….”
“싫으면 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