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제4장 엘븐하임 (5/84)

제4장 엘븐하임

1

거대한 대리석으로 된 저택, 규모만도 3층 높이에 수많은 별실들이 딸린 그 화려한 저택의 한 침실에서 청년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젠장! 아직도 이년 태도가 그대로잖아! 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킨 거야?”

청년 앞에 무릎 꿇은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쩔쩔매며 변명을 해 댔다.

“죄송합니다, 베레트 도련님! 저도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

사내가 이를 갈며 옆을 돌아보았다. 침실 한구석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미모의 엘프 소녀가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청년, 베레트가 보름 전 구매한 슬레이어였다.

이미 많은 엘프 노예들을 가지고 놀아 본 베레트였지만 슬레이어만큼은 손에 넣지 못했다. 안 그래도 엘프 노예는 다른 노예들에 비해 눈 돌아갈 만큼 비싼데, 슬레이어는 그 엘프 노예들 중에서도 엄청난 고가를 자랑하는 것이다. 차탄 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상단 카론의 후계자인 베레트였지만 그래도 슬레이어를 구입하는 것은 정말 크게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때마침 슬레이어치곤 이상할 정도로 싼, 평범한 엘프 노예 수준의 매물이 나온 것이다. 너무 싸기에 좀 수상하게 여겨서 물어봤더니, 성격이 너무 까탈스러워서 잘 팔리지 않은 엘프였단다.

그래도 슬레이어답게 전투력도 확실하고 성노로 쓰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외모여서 그냥 속는 셈 치고 구입했다. 까탈스러운 성격 정도는 직접 교육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엘프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베레트였기에 별 걱정을 하진 않았다. 성격이 까칠해 봤자 노예 아닌가? 명령에만 충실히 복종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막상 사 와 보니, 왜 그리 싼지 바로 이해가 가 버렸다. 이 엘프 소녀는, 기가 세도 너무 셌다.

“아, 저 재수 없는 눈깔…….”

이름도 붙이지 않은 저 슬레이어 소녀를 노려보며 베레트는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발가벗은 전신을 얇은 홑이불로 감싼 채 차가운 눈으로 청년을 직시하고 있었다. 무심하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은은한 경멸을 담은 눈초리였다. 그래서 지금도 성질이 뻗쳐서 확 강간해 버리려다 흥이 식은 베레트였다.

이 엘프 소녀가 딱히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놓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엘프 주제에 마치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도도한 표정이라니? 엘프라면 당연히 주인께 충성하고 애교를 부리며 몸도 마음도 모두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일부러 비싼 돈 주고 구입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수하를 시켜 ‘교육’도 시도해 보았다. 밥도 굶기고 즉신 두들겨 패기도 했다. 보통 이 정도 하면 어지간히 말 안 듣던 노예라도 금방 꼬리를 내리며 노예다운 모습을 되찾곤 한다.

하지만 이 소녀에겐 교육이 영 효과가 없었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 사흘을 내리 굶으면서도 도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뭐, 이대로 시간을 두고 구슬려 천천히 마음을 열게 한다는 선택지도 있기야 하겠다만, 베레트는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연애를 하지 뭐하러 노예를 비싼 돈 주고 사냐?

베레트가 열불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놈의 눈깔 좀 어떻게 해 보라니까?”

엘프 소녀가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타고난 눈입니다.”

말투는 무심하지만 누가 들어 봐도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완연하다.

“엘프 주제에 이년은 도대체 왜 이리 건방진 거야?”

“타고난 성격입니다.”

노예 주제에 주인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데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 댄다. 울화통이 터져 베레트는 엘프 소녀를 후려갈겼다.

퍼억!

소녀의 가녀린 몸이 고급 양탄자 위를 뒹군다. 하지만 비명은 없다. 입안이 터졌는지 핏물이 흘렀지만, 슥 닦을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베레트를 노려볼 뿐.

“아으…….”

얼굴이 시뻘게진 베레트를 곁에 있던 두 명의 엘프 노예들이 열심히 말렸다.

“주인님, 진정하세요. 저 아이가 너무 어리석어 주인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요, 주인님. 저런 불량품 엘프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저희를 사랑해 주세요.”

둘 다 얇은 천으로 비부만 간신히 가린 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애교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는, ‘바람직한’ 엘프다운 모습을 보이는 두 노예의 태도에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후우…….”

베레트가 씩씩대다가 소리를 질렀다.

“집사!”

문 밖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년인이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왔다.

“예, 도련님!”

“저거 반품해 버려. 젠장, 싼 맛에 샀더니 완전 불량품이잖아?”

원래 슬레이어는 가격에 비해서 사실 실질적으로 큰 쓸모는 없다. 성적 노리개의 용도라면 그냥 보통 엘프 노예를 사면 된다. 호위 용도라면 검투사 출신의 오크 투사들을 거두면 된다. 주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미모의 여검사라는 마초적 망상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집사가 쓰러진 엘프 소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내심 안도했다.

‘반품하라 하시는 걸 보면 덮치진 않았나 보군. 다행이다, 돈 굳었네.’

처녀성을 잃은 슬레이어는 반품 불가다. 애초에 남자들의 멍청한 로망 때문에 태어난 직종(?)이다 보니 처녀가 아니면 팔리지도 않는 것이다. 노예상들은 특히나 엘프들의 처녀성에 민감하다. 몰래 덮치고 슬쩍 반품하려는 얌체 손님들이 많다 보니 다들 그쪽 감별안은 신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래서 열이 뻗친 베레트도 결국 이 엘프 소녀를 건드리질 못했다. 아무리 싸게 샀다곤 해도 슬레이어치고 싸단 소리지, 거액인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역시 돈 좀 더 보태서라도 제대로 된 걸 사야겠어.”

“알겠습니다. 도련님.”

고개를 숙인 뒤 집사가 엘프 소녀에게 손짓을 했다.

“따라오너라.”

여전히 냉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이지만, 소녀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집사를 따라갔다.

“…….”

그렇게 차탄 공국 내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깊은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 엘븐하임에서 148번이라 불리던 이 엘프 소녀는 세 번째 반품을 당하게 되었다.

☆ ☆ ☆

회색빛 도시, 수많은 마차들이 짐을 싣고 오가고 그 사이로 행상들이 어지러이 걸음을 옮긴다. 빽빽하게 세워진 석조 건물들은 모두 1층에 상점을 열고 각종 물건들을 판다. 자신의 상점이 없는 이들도 가판대를 설치하고 호객 행위에 열심이다. 다리, 광장, 거리 할 것 없이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그 요란한 거리 위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두꺼운 코트를 걸친 덩치 좋은 청년, 레펜하르트와 새하얀 법복 차림에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소녀, 사실은 소년인 실란이었다.

“정말 혼잡한 곳이네요.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업 도시라더니…….”

실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들 추위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표정이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거리 전체가 활기로 가득 찼다.

그들은 지금 차탄 공국 수도, 제플린에 도착해 있었다.

차탄 공국은 세 왕국, 그라임과 크로방스, 바실리 왕국의 접점에서 무역으로 탄생한 나라다. 3개국 교역으로 큰돈을 번 차탄 상회의 주인이 그라임 왕국으로부터 대공의 칭호를 받고 이 땅을 구입, 공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그런 만큼 차탄 공국은 상인들에게 특히나 많은 특혜가 있었다. 등록된 상인에겐 세금도 적게 걷고 영지 통과세도 면제된다. 상업을 국가의 기틀로 내세운 차탄 공국의 수도, 제플린은 상인들에게 있어 꿈의 도시였다. 대륙을 떠도는 행상들의 대부분의 꿈이 바로 이 도시에 자신의 상회를 차리는 것일 정도였다.

“쉽게 말해 돈독 오른 동네란 소리지.”

시큰둥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었다. 하탄 산맥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열흘 정도가 걸렸다. 그 혼자였다면 사흘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실란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짐마차 하나를 얻어 타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걸렸을 것이다.

‘이곳에 시리스가 있다.’

마음이 급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실란이 허겁지겁 뒤따르며 소리쳤다.

“아유, 천천히 좀 가요! 다리 길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레펜하르트는 순순히 속도를 늦췄다.

비록 실란 때문에 좀 늦어지긴 했어도 그가 있어 득 된 것이 더 많았다. 귀족도 아닌 레펜하르트가 바실리 왕국의 국경을 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용병 길드 같은 곳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확실한 신분이 없으니 국경 경비대가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몰래 밀입국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실란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

-필라넨스를 섬기는 순례자입니다.

순례자에겐 모든 국경이 열려 있다. 간단한 치유술로 경비대원들의 고질병 몇 개를 치료해 주니 모두가 반색하며 통과를 허락해 주었다. 치유술을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관임을 증명하고도 남았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알았다, 천천히 갈게.”

다시 나란히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계속 움직였다.

할 일이 많았다. 일단 팔톤에서 얻은 기물들을 현금화해야 한다. 그래야 시리스를 구하러 갈 수 있다. 정확히는 구매하러 가는 것이지만, 역시 저 표현은 거부감이 들어 애써 무시하는 레펜하르트였다.

상인 거리를 지나 숙박 거리 쪽으로 열심히 걷던 중이었다. 거리 한쪽에 세워진 한 태버언tavern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사, 살려 주십쇼!”

웬 허름한 50대 남자가 건장한 사내 둘에게 붙잡혀 애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뚱뚱한 20대 청년이 몽둥이를 든 채 인상을 구긴다.

“야, 꼭 잡고 있어!”

버둥대는 50대 남자를 향해 청년이 연거푸 몽둥이질을 했다. 꼼짝도 못하고 남자가 계속 얻어맞는다.

“악! 아악!”

레펜하르트와 실란이 당황해 걸음을 멈췄다. 처참하게 얻어맞은 남자가 얼굴 가득 피를 흘리고 있었다.

“뭐, 뭐죠?”

둘 다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건 대낮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람이 맞아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다. 그냥 혀를 차며 제 갈 길을 갈 뿐. 상황을 모르니 끼어들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 둘은 잠시 주춤했다.

“사, 살려 주십쇼! 악! 아악!”

연거푸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안 되겠다 싶어 레펜하르트가 막 나서려던 차였다. 뚱뚱한 청년이 몽둥이질을 멈췄다. 속이 풀렸는지, 꽤나 이죽대는 표정이었다.

“이제 좀 주제 파악을 하겠나? 거렁뱅이 주제에 감히 롤페인 상회를 욕해?”

보아하니 저 남자가 롤페인 상회에 대한 욕을 했다가 저 청년에게 걸린 모양이었다. 롤페인 상회라면 공국 2위의 대상회다. 레펜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뚱뚱한 청년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의복이며 걸친 보석들이 하나같이 고가의 것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비싸 보이는 놈이랄까? 몸도 잔뜩 살이 오른 것이 비싸다면 비싼 몸이었다. 어지간히 잘 살지 않고서야 저렇게 살찌기도 힘들다.

건장한 사내들이 사내를 내팽개친다. 청년이 쓰러진 50대 남자를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웃더니, 곁에 둔 호위병에게 손짓을 했다. 호위병이 허리춤에서 돈 자루를 끌렀다.

“자, 30대 때렸으니 금화 서른 닢 주면 되겠지?”

쓰러진 남자에게 금화를 던진 뒤 낄낄대며 청년이 자리를 떴다.

“이제 좀 주제 파악을 했을 것이다. 거렁뱅이.”

레펜하르트는 입을 쩍 벌렸다. 전생에 온갖 잡놈들 많이 만나 본 그였지만, 저런 개잡놈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죽도록 패고 돈 던져 주고 떠나 버려? 후환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기막혀하는 동안, 실란이 재빨리 쓰러진 남자를 부축하며 치유술을 펼쳤다.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울먹이며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니 예쁜 얼굴이 팍 일그러진다. 실란이 화를 내며 일어났다.

“뭐예요, 저 인간? 당장 치안대를 찾아가죠!”

백주 대낮에 사람을 팼으니 증인도 수두룩하다. 아무리 저 뚱뚱한 청년이 고위 귀족이라 해도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래도 이것이면 자리 잡을 밑천이 되어 줄 겁니다.”

아파하면서도 남자가 떨어진 금화를 열심히 줍는다. 그 모습이 너무도 비굴해 실란은 말을 잃었다. 금화를 다 줍더니, 남자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났다.

실란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럼 돈 받았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이 동네가 원래 그래.”

기막혀하는 실란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납득이 안 가요.”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도 실란은 연신 투덜대고 있었다.

높은 신성력을 가진 덕에, 어린 나이지만 실란은 꽤 세상을 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었다. 너무 어리다보니 나이 많은 다른 신관과 함께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바실리 왕국 남부 지역은 꽤 많이 가 본 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힘없는 이들이 당하는 모습도 많이 봐 왔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횡포는 세상 어디가나 마찬가지였다. 손 닿는 대로 그들을 돕고, 가능하면 억울함을 풀어 주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 실란의 사고방식으로는, 저 얻어맞은 사내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권력자라지만 이 정도 상황이면 충분히 고발할 수 있었다. 당당히 자신의 피해를 알리고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권력자가 무슨 큰 처벌을 받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억울함을 풀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저 남자는 그저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 억울함을 풀 생각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이 동네는 그 처벌이란 것도 벌금이거든. 돈 내면 그냥 해결돼. 감옥에 가지도 않아.”

그리고 그 벌금은 국가가 날름 먹는다. 얻어맞은 이에겐 땡전 한 푼 안 돌아간다. 남자 입장에서 그나마 치료비라도 건지려면 돈을 줍는 쪽이 더 나은 것이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요?”

“그래서 말했잖아, 돈독 오른 동네라고.”

“거참…….”

씁쓸한 기분을 안은 채 두 사람은 숙박 거리로 들어섰다. 길 좌우로 온갖 여관들이 성업 중이었다. 적당한 숙소를 찾아 걷던 중, 문득 실란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레펜 씨, 이 도시엔 대체 무슨 일로 온 건가요?”

그동안은 조금 서먹서먹해 상대의 일을 묻는 것이 좀 꺼려졌다. 하지만 함께 여행하며 꽤 친해지기도 했고 목적지에도 이미 도착했으니, 슬슬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레펜하르트가 잠깐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를 사러 왔다.”

“네?”

“엘프를 사러 왔다고!”

순간 실란의 눈초리가 요상하게 변했다.

“흠, 레펜 씨도 결국 남자였군요.”

솔직히 엘프 노예 탐내는 놈들은 목표가 다 똑같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지도 알겠고, 솔직히 그렇게 보인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런 건 아니야.”

“아니면 뭔데요?”

“으음…….”

차갑게 되묻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더더욱 머리를 세차게 긁었다. 전생을 설명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변명을 할 수가 없다.

“그래, 그런 거 맞아. 그냥 그렇다고 해 두자고.”

“으이그, 하여튼 남자들이란.”

“꼭 자기는 남자가 아니란 것처럼 말한다, 너?”

“윽? 그런가요?”

여자 같다는 점이 지극히 콤플렉스인 실란은 당황해 중얼거렸다. 그런가? 남자라면 당연히 여자를 대하며 껄떡대야 정상인 건가? 그러고 보니 무투승 아저씨들도 치마 두른 여자만 보면 쉴 새 없이 껄떡댔었어. 아, 혹시 내가 근육이 안 불어나는 이유가 껄떡댐이 부족해서였나!

엉뚱한 데서 요상하게 자아비판을 해 대는 실란을 내버려 둔 채 레펜하르트는 계속 거리 좌우를 살폈다. 2층으로 된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그가 손가락질을 했다.

“아, 저기 괜찮아 보인다.”

상당한 고급 석재로 지어진, 입구에 ‘황금의 휴식처’란 간판이 걸려 있는 여관이었다.

여관은 깔끔했다. 그리고 화려하기도 했다. 이름부터가 황금의 휴식처더니, 정말 주머니에 황금 좀 두둑하지 않으면 들어올 엄두도 안 날 곳이었다. 1층 홀의 테이블들도 모두 정교하게 세공된 고급품이었고 벽에 걸린 그림도 우아했다.

실란이 두리번거리며 혀를 찼다.

“엄청 고급스러운 곳인데요? 아무리 팔톤에서 돈 많이 벌었다지만 아껴 쓰지 않으면 금방 거덜 날 텐데…….”

레펜하르트가 본 실력을 보인 후, 에드워드 경은 그에게도 따로 팔톤에서 건진 기물들을 몇 개 나눠 주었다. 실란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 기물들의 가격이면 어지간한 중산층 1년 생활비가 나올 정도의 금액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치하면 얼마 못 간다. 실제로 물어보니 이곳의 하루 숙박비는 은화 열 닢씩이나 되었다.

“괜찮아, 괜찮아.”

물론 따로 두둑하게 챙겨 둔 레펜하르트에게야 무시할 수준의 금액이다. 은의 시대 금화로 통 크게 실란 몫까지 계산한 뒤, 그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의외로 돈 많은 집안이었나 보다고 혀를 내두르며 실란도 뒤를 따랐다.

큰 거실과 작은 방 두 개가 딸린 화려한 룸에 여장을 푼 뒤, 레펜하르트가 백 팩을 챙기며 실란에게 말했다.

“아, 그럼 나 잠시 좀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어.”

“응? 그냥 같이 가죠?”

“아, 이건 좀 같이 가기 곤란해서…….”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말미를 흐렸다. 지금 그는 팔톤에서 몰래 챙긴 기물들을 싹 팔러 가는 것이다. 몰래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절대 실란을 데리고 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핑계를 대야 하나?’

레펜하르트가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리고 있는데, 의외로 실란이 더 캐묻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다녀오세요.”

웬일로 순순히 넘어간다? 내심 안도한 레펜하르트가 손을 흔들며 잽싸게 방을 나섰다.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실란이 갑자기 법복을 벗고 늘씬한 상체를 드러냈다. 몸을 풀며 실란이 싱긋 웃었다.

“그럼 난 방에서 운동이나 해야겠다.”

굳이 실란이 따라가겠다고 나서지 않은 이유였다. 그동안은 이동하느라 바빠 채 운동할 시간을 못 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레펜하르트는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기만 했던 것이다. 신성력으로 계속 체력을 보충하지 않았다면 따라갈 수도 없을 만치 강행군이었다. 그러고 숙소 잡으면 바로 잠들어 버렸으니 운동할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자고로 몸을 만들려면 이미지 트레이닝도 중요한 법, 레펜하르트의 멋진 몸매를 떠올리며 실란이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하나~! 두울~ 서이~ 너이~!”

풀썩!

고작 네 번 하자 팔이 후들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진다. 참으로 부실한 몸인 것이다. 하지만 실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성력으로 몸을 치유하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포기하지 말자! 실란! 너는 할 수 있어!”

화려한 객실 안에서 우렁찬 숫자 세는 소리가 연달아 메아리쳤다.

2

제플린 중심가의 한 카페.

대리석으로 벽을 올리고 은제 세공품으로 실내 장식을 한 이곳은 차탄 공국에서도 가장 고상한―이 동네에서 저 단어는 ‘돈이 많은’과 동일어로 쓰인다― 손님들만 들르는 곳이었다.

한 뚱뚱한 청년이 테이블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차탄 공국 2위의 대상회, 롤페인 상회의 당대 회주인 테리크였다. 오랜만에 거리를 나온 그는 홍차를 홀짝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가난한 것들의 시기심이란, 쯧.”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하던 도중인데 태버언에서 웬 나이 든 행상 하나가 롤페인 상회를 욕하는 걸 발견한 것이다. 롤페인 상회가 금력을 앞세워 중소 행상들을 등쳐 먹는다며 사내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롤페인 상회의 주인으로서 어찌 그 모습을 그냥 볼 수 있겠는가? 당연히 가르침을 내렸다. 덕분에 금화 서른 닢이라는 예상 외 지출이 있었지만 그 정도야 푼돈에 불과했다.

“억울하면 지들도 돈을 벌면 될 것을 가지고 길거리에서 욕이나 하고 있다니. 안 그러느냐?”

“그럼요, 주인님.”

곁에 앉은 엘프 소녀가 재롱을 피우며 맞장구를 친다. 호위로 데려온 사내들은 카페 분위기 흐린다는 이유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고, 전용 슬레이어만 대동한 채 차를 마시고 있는 테리크였다.

그러고 있는데 문득 카페 문을 열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카론 상회의 후계자, 베레트였다. 야시시한 옷을 걸친 엘프 노예와 함께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테리크는 잠시 의아해했다.

저 엘프 노예, 복장을 보니 결코 슬레이어가 아니다. 슬레이어라면 지금 그의 곁에 앉은 이 엘프 소녀처럼 폼 나는 검사의 복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뭐, 너무 슬레이어를 갖고 싶어서 그냥 엘프 노예를 검사 복장 시키는 바보들도 가끔 있긴 한데 그건 꼴불견이라 양식 있는 차탄 공국인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이었다.

“오랜만이군, 베레트?”

“테, 테리크?”

테리크를 본 베레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테리크가 베레트 곁에 선 엘프 노예를 보며 비웃음을 던졌다.

“뭐야, 베레트? 슬레이어 샀다더니 어디 놔뒀냐? 집에 모셔두고 치성 드리냐?”

‘젠장, 하필이면 여기서 저놈을 만나다니!’

베레트는 이를 갈았다. 그가 슬레이어를 사고 싶어서 난리친 이유 중 대부분은 사실 눈앞의 테리크가 하도 잘난 척을 해 대 꼴 보기 싫다는 점이 컸다. 그렇다고 없는 슬레이어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 베레트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거, 한 보름쯤 전에 반품했다.”

“잉? 반품?”

의아해하는 테리크에게 하소연하듯 베레트가 설명을 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테리크가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핫!”

“왜 웃어?”

“고작 엘프 노예 하나 못 길들이냐? 그래서 카론이 아직도 공국 10위를 왔다 갔다 하는구먼. 후계자가 이 모양이니.”

“크윽!”

모멸감에 베레트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틀린 말이 없으니 반박할 수가 없다. 애써 베레트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넌 뭐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알고 보니 벌써 세 번이나 반품된 물건이더라. 어쩐지 너무 싸더라니.”

테리크의 머리에 순간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베레트와 그는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해 대며 상대를 깔아뭉개려 노력하던 사이였다. 여기서 저 반품 슬레이어를 자신이 멋지게 조련해 낸다면 이놈의 표정이 과연 어떨까?

“훗, 두고 보라고.”

의기양양하게 베레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오랜만에 엘븐하임에 가 봐야겠네.”

☆ ☆ ☆

여관을 나선 레펜하르트는 바로 상업 거리로 향했다.

은의 시대 기물은 워낙 고가이다 보니 어지간한 곳에선 구입할 엄두도 못 낸다. 하지만 이곳은 차탄 공국의 수도 제플린이다. 금화 몇천 닢쯤 바로 지급할 수 있는 현금 동원력을 가진 대상회가 수두룩한 곳이다.

적당히 근처의 큰 상회나 들어가 레펜하르트는 바로 보물들을 현금화했다. 과연 닳고 닳은 상인답게 상대도 열심히 흥정을 했지만 그에겐 씨도 먹히지 않았다. 이 기물들은 이미 전생에도 팔아 본 물건이었다. 적정가쯤은 뻔히 꿰고 있었다.

차탄 금화로 이천 닢에 달하는 거액을 들고 희희낙락하며 레펜하르트는 상회를 나왔다. 보통 이 정도 금액이면 환어음으로 대신 처리하곤 하지만―금화 이천 닢이면 보통 사람이 쉽사리 들고 다닐 무게는 아니다― 그는 모조리 현금으로 받았다. 금화 이천 닢 무게쯤이야 그거 소년 시절 한 손으로 들던 바위만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무한의 백 팩까지 있으니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후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백 팩을 만지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전부 현금화하는 짓은 잘 안 하지만, 보통 슬레이어의 평균가가 금화 천 닢 정도다. 반드시 시리스를 구해야 하니 싹 다 돈으로 바꿔 넉넉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바로 시리스를 만나러 갈까 하다가, 그래도 동행이 있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아니다 싶어 일단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막 객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응?”

측백나무로 된 질 좋은 마루 위에서 실란이 땀을 뻘뻘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물이라도 쏟은 것처럼 바닥이 땀으로 흥건한 것이 이미 한참 동안 한 모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들어오자 실란이 일어나지도 않은 채 고개만 까닥거렸다.

“왔어요? 볼일 다 봤나 보네요?”

“……너 뭐 하냐?”

“운동하잖아요?”

보면 모르냐는 듯 실란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앙상한 팔로 푸시 업에 열중한다. 그 모습을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함께 동행하며 실란이 남자다운 몸을 얼마나 동경하는지 익히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어이고, 저거 진짜 말랐네.’

실란이 왜 저리 근육 마니아가 되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정말이지, 전생의 자신과 비교해도 진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몸이었다. 여린 팔다리에 얇은 어깨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목, 법복을 벗은 차림인데도 남자애 몸이 아니라 너무 말라 가슴이 없는 여자애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전생의 그는 그럭저럭 마른 소년 수준이긴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굉장히 열심히 하잖아?’

문득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원래 근육이란 누구나, 어떻게 해도 가장 확실하게 늘어나는 것 중 하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무리 몸이 부실한 이라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5년 넘게 매일매일 운동했는데도 근육이 안 붙는다기에, 속으로 끽해야 팔굽혀펴기 몇 번 하고 말았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걸 보니 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보통 노력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근육이 안 붙지?’

진짜 여자애라도 이 정도로 열심히 트레이닝하면 제법 근육선이 나와 줘야 정상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실란은 열심히 팔을 굽혔다 폈다 하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팔이 아니라 전신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꼭 간질 환자 같다. 아무리 봐도 오버 워크라 레펜하르트가 그를 말렸다.

“야야, 몸에 무리가 가면 역효과야.”

열심히 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저런 허약한 몸에 무리하다간 골병들기 십상이다. 바닥에 풀썩 쓰러진 실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부축해 주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근육통 때문에 며칠 꼼짝도 못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여정에 지장이 생기진 않을 테니까.”

숨을 몰아쉬면서 실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동행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 소년이었다. 다 생각해 둔 바가 있는 것이다.

실란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핑크색 성광이 반짝 빛났다. 지친 소년의 전신을 여신의 가호가 어루만진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너 지금 뭐해?”

잠시 후, 산뜻해진 얼굴로 실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금 전의 피로한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어때요, 말끔해졌죠?”

“…….”

순간 레펜하르트는 왜 이 꼬맹이가 그토록 열심히 운동했는데도 근육이 안 붙었는지 확실하게 이해해 버렸다.

‘야, 이 등신아! 기껏 운동하고 신성력으로 치유해 버리면 뭔 의미야, 그게!’

원래 신관의 치유 주문과 마법사의 힐링 주문은 그 체계가 전혀 다르다.

마법사의 힐링 주문이나, 트롤의 피를 정제해서 만든 힐링 포션, 그리고 의사나 연금술사들이 쓰는 회복용 약초는 육체가 지닌 자체 치유력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즉, 내버려 두면 나을 것을 빨리 낫게 하는 개념에 가깝다.

그에 비해 신관의 치유 주문은 인간이 가져야 할 원래의 모습을 되돌려주는, 어떻게 보면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개념이 비슷했다.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기 전으로 돌이키는 것이 신관의 치유 주문이었다.

‘즉, 이 녀석은 5년 내내 뻘짓만 했다는 소리네?’

원래 근육이란 잔뜩 혹사당하고 파괴된 부분이 재생하며 더더욱 크고 굵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그걸 신성력으로 원상 복귀시킨다? 그럼 운동하기 전으로 돌아갈 뿐인 것이다.

신성력으로도 육체를 단련할 수 있었으면 짐 언브레이커블이 뭐하러 그 비싼 돈 들여 가며 힐링 포션이며 회복 약초를 잔뜩 사다 제자를 담궜다 뺐다 하겠는가? 그냥 고위 신관 한 명이랑 계약해서 치유시키지. 그게 훨씬 싼데.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

실란의 무지에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 신관의 치유술을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는 대륙에서도 레펜하르트 한 명 정도였다.

신성력을 가진 신관 본인조차도 그냥 ‘신의 기적으로 사람이 나았다.’ 정도로만 이해하지 그 치유 개념까지 신경 쓰진 않는다. 마법사야, 힐링 주문 자체가 7서클의 고위 주문이니만큼 거기까지 이른 자 자체가 별로 없다. 짐 언브레이커블도 초기에 신성 주문으로 제자들 치료해 보다가, 영 효과가 안 나와서 관뒀을 뿐이지 저 개념을 이해하고 그런 수련법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삶에서 성녀라 불렸던 엘린은 그 가공할 신성력으로 잘린 팔다리조차도 되돌리는 이적을 보였다. 그 위력에 놀란 레펜하르트는 마법으로도 저 신성 주문의 효과를 내 보려고 한동안 연구했었고, 그러다가 결국 이 개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실란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왜 근육이 안 붙는지, 왜 실란이 열아홉이나 되는 나이에 아이처럼 작은지 전부 이해가 갔다. 열두 살부터 매일 저 짓을 했으면 그나마 저만큼 큰 것도 용하다. 레펜하르트는 이걸 설명해 줘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에이, 내버려 두자.’

어쨌거나 저 짓 해서 신성력이 펑펑 늘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실란에게 원하는 것은 저 강력한 신성력이지 근육 따위가 아니다.

어째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어 있으니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그래요? 뭐 잘못됐어요?”

레펜하르트는 잽싸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응? 아냐, 생각보다 굉장히 열심히라 조금 놀라서 그래.”

“으히히.”

칭찬해 주니 좋다고 웃는다. 슬쩍 양심이 찔러 레펜하르트는 실란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내버려 두긴 좀 그렇고, 틈틈이 지도나 좀 해 줘야겠다. 그냥 신성력으로 몸 치유하는 것만 그만두게 시켜도 금방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호감도도 올라가겠지? 드디어 근육이 생기기 시작할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실란 정도의 고위 성직자는 이래저래 쓸모가 많으니 친하게 지내서 손해 볼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좀 더 효과 좋은 단련법을 아니까, 나중에 가르쳐 줄게.”

“앗! 정말요? 고마워요!”

음흉한 속생각도 모른 채 실란이 좋다고 날뛴다. 다시 한 번 양심이 찔려 레펜하르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아, 그리고 나 노예 경매장 좀 다녀올게.”

“응? 이번에도 혼자 가려고요? 저도 같이 가요!”

실란이 법복을 걸쳐 입으며 달라붙었다. 운동도 할 만큼 했으니 수도 구경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뭐, 이건 굳이 몰래 처리할 일도 아니니 반대할 필요도 없다. 레펜하르트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같이 가자.”

☆ ☆ ☆

자고로 노예 종족 중 최강의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단언컨대 엘프다. 일단 오크나 드워프에 비해 인간의 미적 기준을 충실히 만족시켜 주니까, 성능은 둘째 치고 그 미모만으로도 당연히 값어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입으로 한 말과 행동이 항상 다른 법인지라, 외모 지상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는 지성인도 ‘엘프랑 오크 중 누구를 택할래?’라고 물으면 무조건 엘프를 택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인 것이다.

그리고 엘프 노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지간한 오크 검투사 열 명 가격을 합쳐 봐야 제일 싸구려라는 어린 엘프 소년 가격이 되지 않았다.

엘프는 특유의 긴 수명 때문에 인기가 있지만, 그 긴 수명이 바로 상품화하는 가장 큰 단점이기도 했다. 엘프의 수명은 인간의 네 배, 게다가 그 성장 비율이 인간과 똑같아 유년기 역시 네 배로 길었다. 어린 엘프를 키우고, 어느 정도 상품 가치가 생겨 쓸 만한 노예가 되려면 족히 몇 십 년은 걸린다. 어리석은 상인 하나가 돈 벌어 보겠다고 엘프 경매장을 세우고 아기 엘프들 젖병 물리다 늙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차탄 공국 내에서 유명한 농담이다.

그래서 엘프를 다루는 노예 경매장은 대부분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곳이 대부분이었다.

엘븐하임은 차탄 공국 내에서도 3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실로 유서 깊은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이었다. 엘프를 노예로 파는 경매장 이름을 엘프들의 낙원, ‘엘븐하임’이라고 짓다니,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에 달한 명칭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경매장 입장에선 진짜로 진지하게 붙인 이름이었다. 엘븐하임은 오랜 역사와 전통이 쌓아 온 노하우로 가장 건강하고 성능 좋은 최상의 엘프들을 길러 낸다는 높은 자부심이 있었다. 가끔 엘프 암컷들을 자신들이 강간한 뒤 처녀인 척 훈련시켜서 판매하는 악덕 경매장도 있는데, 엘븐하임은 언제나 우량 처녀 엘프 암컷만을 팔아 신용도가 높았다.

충실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높은 교육을 받게 하고 건강 상태 또한 최선을 다해 살피며 성실하게 최상의 엘프 노예를 생산하는 곳, 엘븐하임의 노예상들은 이곳이야말로 엘프들의 낙원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는 점이 정말 무섭지.”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 그는 한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금박을 입힌 가구와 실크로 된 양탄자, 화려한 세공이 된 기둥들로 둘러싸여 무슨 귀빈이라도 대접하는 곳인가 싶을 정도지만, 엘븐하임 경매장에서는 평범한 접대실일 뿐이었다. 애초에 엘프 노예를 살 정도의 재력가라면 모두가 귀빈인 것이다. 이 정도 대접은 당연했다.

소파에 앉은 실란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 엘프 경매장은 처음 와 봐요.”

바실리 왕국에도 오크 경매장은 제법 있지만, 엘프나 드워프 경매장은 없다. 인간과 수명이 비슷하고 빨리 성년이 되는 오크야 어느 곳에서건 사육, 판매할 수 있었지만 수명이 긴 엘프나 드워프는 어지간히 재력이 받쳐 주고 인정받은 곳이 아니면 힘들다. 그래서 실란도 차탄 공국에 오기 전까지 엘프 노예 경매장은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여긴 제법 잘 보살펴 주는 곳인가 보네요.”

응접실 창문을 통해 경매장 안쪽을 살펴보며 실란이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크 경매장 같은 경우는 워낙 더럽고 허름해 아무리 노예라지만 너무 막 다룬다는 느낌을 받는 곳이 많았다.

그에 비해 엘프 경매장은 건물부터가 화려하고 깔끔한 것이 무슨 왕궁이라도 온 것 같았다. 이런 곳이라면 엘프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드는 실란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갑갑한 마음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무심코 물었다.

“아무리 잘 보살펴 줘 봤자 노예의 삶이다. 그것이 진짜 행복할거라 여기는 거냐?”

“응? 원래는 숲 속에서 야생의 삶을 살던 것들이잖아요. 오히려 인간에게 길러져서 굶을 걱정, 죽을 걱정 없이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나요?”

“으음…….”

레펜하르트는 입을 닫았다. 저 착한 실란조차도 엘프가 노예로 팔리는 이 현실 자체에는 전혀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러니 전생의 그가 마왕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전생의 실수도 깨달았다.

그에게 있어 이종족은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강했고, 절대적인 마법사였으니까. 세계의 불합리함을 볼 때 바로 응징할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였으니까.

예전의 그였다면 바로 이 경매장을 날려 버리고 엘프들을 해방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마법의 힘이 없으니 불합리를 느끼면서도 참아야 한다. 그것은 분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깨달음도 안겨 주었다.

‘그래, 아무리 힘으로 눌러 봐야 사람들 인식은 바뀌지 않아. 그저 공포를 느낄 뿐.’

이종족을 품속에 넣고 보듬어 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이 노예가 아님을 주장했어야 했다. 물론 전생에서도 이종족들은 그리했지만 그 앞에 절대적인 마신 레펜하르트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레펜하르트만을 보았지, 그 뒤에 있는 이종족들을 보지 못했다.

‘다른 제국을 세워야 해. 전생과는 다른 제국을.’

마왕 레펜하르트의 암흑제국이 아니라 이종족들의 국가, 안타레스 제국이어야 비로소 사람들의 이 오랜 인식도 바뀌리라.

‘뭐, 어느 쪽이건 간에 일단은 마법의 힘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렇게 머릿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문이 열리고 중후하게 생긴 중년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곳까지 레펜하르트와 실란을 안내한 엘븐하임의 노예상 중 한 명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손님.”

그 뒤를 따라 스무 명의 엘프 여성이 차분하게 걸어 들어왔다. 엘프들을 일렬로 세우며 노예상이 자랑스레 소개했다.

“저희 엘븐하임 경매장이 자랑하는 슬레이어들입니다.”

엘프 여인들은 모두 얇은 망사 옷만을 걸치고, 간신히 비부를 가리고 있었다. 원래 슬레이어를 구입하려는 놈들의 목적이 뻔하다 보니 몸매를 보여 주는 것 역시 중요한 상도(?)인 것이다. 이 노골적인 여체의 향연에 실란이 흠칫하며 눈을 가렸다.

“으, 으힉!”

“이거, 어린 아가씨에게 너무 과한 모습이었나요? 죄송합니다.”

노예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이런 망사도 안 입히고 그냥 나체로 선보이는 것이 정석인데, 하필 이 손님이 소녀를 동행하고 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많이(?) 입혔는데도 저런 반응이다. 평소 같으면 아가씨가 아니라고 발끈할 법도 하건만, 실란은 여전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둘러볼 뿐이었다.

‘아니, 저 양반은 뭐 이런 데에 여자애를 다 데리고 온 거야?’

겉은 멀쩡하게 생겨서 은근 변태 같은 구석이 있는 손님인 것 같았다. 노예상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그래도 베테랑답게 티 내지 않고 상품 설명을 시작했다.

“하나같이 고도로 단련되었고 잡일에도 능하고 밤일에도 충실합죠. 다들 처녀인 것은 물론입니다. 저희는 차탄 공국에서도 가장 신용이 높다고 자부하는 곳이니까요.”

마치 어시장 생선들처럼 속살을 드러낸 채 수치스러운 표정조차 짓지 못하는 엘프 여인들, 그 추악한 광경에 레페하르트는 한탄했다.

‘위대한 정령의 후손인 숲의 요정이 저런 모습이라니!’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 체제를 바꿀 만한 힘은 없다. 그의 무력은 분명 강인했지만 체제 전체를 바꾸려면 보다 강대한, 마법의 힘이 필요하다.

‘일단은 시리스부터 구하고 보자.’

모든 일은 차근차근. 그렇게 다짐하며 레펜하르트는 도열한 엘프들을 살폈다. 그리고 의아해하며 노예상을 돌아보았다.

“이들이 엘븐하임의 모든 슬레이어들입니까?”

“물론입니다.”

시리스의 모습이 없었다. 분명 이 경매장의 슬레이어로 살고 있었을 텐데?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틀림없었다. 이 시기라면 시리스는 분명 이곳에 있어야 했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한 노예상이 조심스레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시리스뿐이니까.

‘하지만 대체 어떻게 시리스를 찾아야 하나?’

시리스라는 이름 자체가 그가 직접 붙여 준 것이니, 이곳에서는 그저 번호로만 불리고 있을 터였다. 고민하며 레펜하르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음, 좀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슬레이어는 없습니까?”

“아, 저희는 그레이 엘프 쪽은 다루질 않습니다만.”

“그레이 엘프가 아니라, 하이엘프이지만 좀 까무잡잡한…… 그런 타입은 없나요?”

어째 말하다 보니 제대로 엘프 노예 고르는 놈처럼 되어 버렸다. 과연 노예상은 참 별 놈 다 보겠다는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은근 변태 같은 구석이 있더라니.’

엘프 노예 사러 온 손님은 많고 많았지만 이렇게 괴상한 주문은 처음 들어 본 것이다. 얼마나 골수 엘프 마니아이길래 이렇게 까다로워?

“독특한 취향을 지니셨군요. 하이엘프를 원하는데, 하얀 피부는 싫으신 겁니까?”

“그, 그러니까 그건 아니고…….”

레펜하르트는 쩔쩔 매며 되도록 변태처럼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그래 봤자다. 실란이 기가 찬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아니, 엘프 노예 제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더니 이젠 타입도 따지는 거예요?”

“그, 그런 게 아니라…….”

“흥! 그럼 그렇지. 엘프 사러 온다고 할 때 알아봤어.”

실란은 레펜하르트를 흘기며 콧방귀를 흘렸다. 입으론 노예의 생활이 행복할 거냐니 어쩌니 하더니, 정작 구입 상황이 되자 제대로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필라넨스 고아원 수녀님이 하신 말이 떠오른다.

-남자는 크건 작건 모두 변태입니다.

과연 그렇구나! 득도한 기분이 되어 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좌절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애써 실란을 외면했다. 노예상이 쓴웃음을 짓다 말고 뭔가 생각난 듯 손을 쳤다.

“아, 그런 슬레이어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레펜하르트가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있습니까?”

“음, 데리고 와 보겠습니다만…… 아니, 그냥 가서 보시겠습니까? 그게 지금 데리고 오기가 좀 애매한 상태라, 오래 기다리시게 하기가 좀 그렇군요.”

“상관없습니다.”

바로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시리스를 찾고 싶었다. 노예상이 그를 안내하며 방을 나섰다.

☆ ☆ ☆

경매장 안쪽의 커다란 회랑, 레펜하르트와 실란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란은 그저 신기해서 그런 것이고, 레펜하르트는 혹시나 시리스가 보이지 않을까 해서였다.

회랑 중앙의 정원에서 어린 엘프들이 나이 든 엘프 여인을 따라 체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노예상이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어릴 적부터 적절하게 운동을 시켜 주어야 늘씬한 몸매로 자라거든요. 저희는 독자적인 운동법으로 청순가련한 타입부터 풍만한 가슴에 늘씬한 허리를 지닌 타입까지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무심코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구겼지만 앞장 선 노예상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회랑을 따라 걸었다. 회랑과 연결된 건물을 들어가니 식당이 나왔다. 노예용 식당인 듯했다. 식사 때가 아니어서 식당은 비어 있었지만, 안쪽에 몇몇 엘프 노예들이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희 엘븐하임은 언제나 신선한 채소와 질 좋은 건과류로 엘프들을 먹이고 있습니다. 질 좋은 먹이를 먹여 키워 낸 엘프들은 피부에서 은은하게 과일향이 나지요.”

“설명은 됐으니 어서 안내나 해 주시죠.”

결국 울화통이 터진 레펜하르트가 한마디 던졌다. 노예상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걸음을 빨리했다. 이윽고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지키고 있는 커다란 철문이 나왔다. 노예상이 빠르게 말했다.

“148번을 보러 왔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투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앗!”

“하압!”

낭랑한 기합 소리와 함께 금속성이 요란히 울려 퍼졌다. 투기장 안에서 십여 명의 어린 엘프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었다.

“아직 자라지 않은 슬레이어 후보들입니다. 저렇게 전투 연습을 시킨답니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투기장 한가운데, 엘프 아이들을 상대하는 무표정한 엘프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저 암컷이 그 슬레이어입니다만.”

엘프 소녀가 아이들의 칼날을 피해 몸을 튼다. 섬세한 백금발이 나부껴 빛을 낸다. 레펜하르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기억 속의 긴 머리 대신 어깨까지 닿는 단발머리였지만, 전신에 누더기를 걸친 더러운 차림이지만 그럼에도 저 눈부신 광채는 빛을 잃지 않았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영 교육에 실패해서요, 세 번이나 반품된 결함품이라 손님 앞에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엘프 아이들이 연거푸 합공을 해 간다. 아이들이 든 것은 차가운 강철의 검, 하지만 소녀가 든 것은 목검도 아닌 종이를 돌돌 말아서 붙인 몽둥이가 전부다. 귀한 상품에게 혹시 멍이라도 들세라, 목검조차 쥐여 주지 않은 것이다.

“실력은 좋은데 성격이 너무 차갑고 대가 세서 아무래도 상품성이 떨어지거든요.”

이 종이 몽둥이로는 검을 막을 수조차 없다. 소녀가 애써 피해 보지만 그때마다 전신에 칼날이 스친다. 그때마다 선혈이 흐르며 피부를 물들인다. 하지만 얼굴도 찡그리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공격을 피하고 허점을 노릴 뿐.

“결함품을 팔 순 없고, 그렇다고 돈 들여 키운 건데 처분할 수도 없어서 저렇게 애들 상대로 실전 감각을 익힐 허수아비 용도로 쓰고 있습니다요.”

제대로 먹지 못해 비틀거리는 몸으로, 지극히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엘프 소녀는 투지를 잃지 않은 채 대련에 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검술을 가르치려면 직접 살을 때리고 베어 보는 것이 중요한 경험 아니겠습니까?”

전신에 자상이 나 피 흘리면서도, 제대로 걸을 수도 없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충실히 현재에 임한다.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시, 시리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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