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제3장 크고 아름답다! (4/84)

제3장 크고 아름답다!

1

“후우우…….”

레펜하르트는 호흡을 골랐다. 워낙 서둘러서 왔더니 단련된 그라도 호흡이 꽤 가빠져 있었다. 일부러 트랩 안 건드리고 마물들 눈 피해서 오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움직임이 많았던 것이다.

느닷없는 그의 등장에 타그렐도 당황했는지 공격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난다. 그 틈에 레펜하르트는 슬쩍 일행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스테반과 다른 기사들은 여기저기 찌그러진 깡통이 되어 나뒹굴고 엘프 여인은 부서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나마 토드와 실란, 오크 노예들은 다치지 않은 것 같지만 반쯤 넋이 나간 상태다.

‘쩝,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비참한 모습이로세…….’

등 뒤에서 실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당신은 길잡이 씨님?”

그냥 길잡이 씨라고만 부르다 존칭을 붙이니 꽤나 괴상한 칭호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알려 준 적도 없었구나. 뭐, 다들 물어보지도 않았으니까.’

피해 있으라며 대충 손을 저어 준 뒤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악마를 노려보았다.

이계 중에서도 어비스의 악마, 타그렐.

‘저거 어떻게 잡는 거더라?’

그는 재빨리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원래 악마를 상대할 때는 성직자의 신성 주문 계열이 제일 좋고, 그게 아니면 생명 계열 마법이나 아예 동류의 사령술 계열 마법이 제일 잘 먹힌다. 물론 왕년의 레펜하르트는 양쪽 모두 극한까지 익혔으니 이따위 악마 한둘쯤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으, 죄다 마법으로 처리해 버려서 근접전 약점 같은 거 모르는구나, 나.’

레펜하르트는 신중한 태도로 주먹을 쥐고 자세를 취했다.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타그렐 정도면 다른 오러 유저가 쉽게 잡는 걸 본 적이 있으니 자신이 당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투가로서의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방심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크아아아!”

잠깐 주저한 타그렐이 다시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돌진해 온다. 제라드와의 대련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신중하게 상대의 주먹을 오른 팔뚝으로 튕겼다. 혹시 몰라서 오러를 끌어내 회전시키는 최강의 가드 스킬, 스파이럴 가드까지 구사했다.

우우웅!

황금빛 오러가 회전하며 악마의 주먹을 막아 냈다. 하지만 튕겨 내지는 않았다.

드드드득!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회전 실린 오러가 타그렐의 주먹을 팔뚝까지 갈아 버렸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허공 가득 피안개가 자욱하게 맺힌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쿨럭!’

그냥 막으려고 한 것뿐인데 이런 잔혹한 결과가? 아니, 사부는 이런 흉악한 수법을 방어 기법이랍시고 가르쳤단 말인가! 당황하면서도 그는 무심코 텅 빈 타그렐의 안면에 펀치를 꽂아 넣었다. 그야말로 무심코, 6년 넘게 들들 볶이다 보니 허점을 본 순간 몸이 알아서 반응해 버렸다.

파아앙!

가공할 파열음과 함께 타그렐의 상반신이 사라져 버렸다.

“……얼레?”

뭉개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살이 난 것이다. 처음이다 보니 진지하게, 그러니까 제라드를 때린다는 느낌으로 (안 그래도 덩치도 비슷했다.) 있는 힘껏 주먹을 내뻗었더니 지나치게 파괴력이 좋았다.

“…….”

어두운 통로 가득 침묵이 흘렀다. 상체가 날아간 타그렐의 시체가 기우뚱하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레펜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하하…….”

질렸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사람 상대할 때는 진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상대가 이계의 마물이라 다행이지, 자칫했으면 전설적인 살인마로 이름을 남길 뻔했다.

‘이러니 내가 테스론의 주먹 한 방에 사경을 헤맸지…….’

과거의 죽음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있는데 다시 통로 저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침입자의 존재를 느끼고 던전의 다른 마물들이 속속들이 모이는 것이다.

‘일단 얘들을 안전한 데로 옮겨 놔야겠다.’

실란과 오크 노예를 흘겨보며 그는 다시 자세를 취했다. 이내 악마들이 속속 나타나 덤벼들기 시작했다. 황금빛 오러로 몸을 감싼 채 레펜하르트도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 ☆ ☆

실란은 그저 멍하니 레펜하르트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수많은 악마들을 잔혹하게 분쇄하고 있는 저 청년은 분명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던 무명의 여행자였다. 별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엄청난 무인이었다니!

악마가 이빨을 드러내고 흉악하게 돌진해 온다. 달려드는 상대의 모가지를 붙잡고 가볍게 비틀어 뽑아 버린다. 피 분수 사이로 재차 몸을 날리며 다음 악마의 쇄골에 수도를 내려친다. 기사들이 그토록 찔러 대도 끄떡없던 강철의 육체가 치즈처럼 뭉개지며 좌우로 쪼개진다.

“크아아악!”

악마 하나가 포효하며 불길을 내뿜었다. 하지만 저 지옥의 불길도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태울 순 없었다. 마치 이 화염이 환영이라도 되는 양, 그는 가볍게 불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물론 그가 입은 상의는 그냥 천이므로 당연히 불에 탔다. 새삼 코트 벗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불타는 상의를 북 찢어 던졌다. 잘 단련된 구릿빛 근육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악마의 복부에 단순한 앞차기를 찔러 넣었다. 공성추에라도 맞은 것처럼 악마가 뒤로 날려 가 벽에 파묻혔다. 우르릉 하며 통로가 흔들리고 흙먼지가 가득 떨어져 내렸다.

‘우와…….’

감탄과 경외, 동경의 시선으로 실란은 계속 눈앞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악마 하나가 두꺼운 팔뚝으로 레펜하르트의 팔을 붙잡는다. 그 순간, 강철 같은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이 불끈거리며 악마를 한 팔로 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메치기! 패대기쳐진 악마의 머리통을 질끈 밟자 그대로 터지면서 피 웅덩이가 가득 고인다.

정말이지 굉장하다는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마치 투신처럼 용맹하고 잔혹한 전투,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련된 저 거대한 근육질의 육체!

‘우와아……!’

심지어 저 뚜렷한 식스팩 복근은 칼날도 씹어 먹고 있었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복근 사이로 악마 칼 하나를 붙잡더니 그대로 부러뜨려버린 레펜하르트였다. 꽁꽁 묶여 늑대굴에 던져졌을 때 익힌 요령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 중엔 정말로 근육으로 이빨 부수는 용법도 있었던 것이다.

“우와아아!”

긴장이 풀려서인지 속으로만 하던 감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실란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했다. 소년은 그만큼 저 눈앞의 저 근육질 청년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약동하는 근육, 섬세한 힘줄, 딱 벌어진 어깨, 첨탑처럼 굳건한 육체.

실란이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크고…… 아름다워…….”

☆ ☆ ☆

‘응?’

문득 소름이 돋아 레펜하르트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육체를 단련한 후 온갖 기척을 느껴 보았지만, 이렇게 요상 야릇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대체 어떤 가공할 마물이 나타났기에 이런 감각이?

그런데 막상 돌아보니 악마는 없고 대신 얼굴을 한껏 붉힌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계집애 같은 소년이 있을 뿐이다.

‘컥! 저 새끼 표정 왜 저래?’

순간 레펜하르트는 전신에 개미로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에 치를 떨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이상하게 좋지 않다. 뭐랄까, 덤벼드는 악마들보다도 저 얼굴 붉히는 예쁘장한 소년이 더 무섭달까?

뭐, 실란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내뱉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가 남들과 다른 성적 취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소녀 같아 보이는 소년은 순수하게, 정말 순수하게 남성적 향기가 풀풀 넘치는 레펜하르트의 몸을 보고 감탄한 것뿐이었다.

실란 필 마르시스.

필라넨스 교단의 고위 성직자인 이 소년은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운 좋게 교단의 고아원에 거두어져 유년기를 보냈다.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여자애처럼 생겼던 덕분에 다른 고아들의 놀림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어린 실란은 은근히 독종이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고, 두 대 맞으면 세 번 물고 늘어지는 독사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성깔 덕분에 실란은 그럭저럭 평온했던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10대라면 누구나 미래의 꿈을 가지는 시기다. 그리고 교단의 고아들 대부분이 그렇듯, 실란의 꿈 역시 필라넨스를 섬기는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다른 소년들과는 조금 달랐다.

워낙 여자 같다는 소리만 듣고 자란 실란은 교단의 무투승, 육체로 신앙을 증거하는 몽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남성미 가득한 육체, 호탕한 웃음소리, 굵은 음성, 모든 것이 그가 갖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사랑과 미의 여신, 필라넨스 교단 내에서 몽크의 지위는 꽤나 낮은 것이었지만 (아름답지 않으니까!) 어린 실란에겐 그들이야말로 이상형 중의 이상형이었다.

그런데 다들 성장기로 들어서며 문제가 생겼다.

2차 성징, 사춘기에 들어선 남자애라면 당연 키가 숙숙 크고 골격이 커지며 몸이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좀 이른 아이들은 거뭇하게 수염이 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남자다운 몸이 되고 변성기가 찾아올 때에도 실란은 여전했다. 얇고 부드러운 몸매, 가는 목소리, 여전히 미모의 소녀처럼만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열두 살이 된 실란은 신성력의 소질을 보여 견습 신관으로 필라넨스 교단에 입교하게 되었다. 신관의 위계를 받은 그는 모든 고아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남들 모두 축하한다며 기뻐할 때, 실란 혼자 좌절하며 몰래 울었다. 그토록 꿈꾸던 몽크로의 길이 아득히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실란은 그저 좌절하고만 있지 않았다.

여신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세상은 노력하는 자에게 보답하는 법이라고.

그는 진취적인 성격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자신도 근육질의 남자다운 몸매로 변할 것이라 생각했다.

틈만 나면 몰래몰래 몽크들이 훈련하는 곳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근육 트레이닝을 열심히 보고 배웠다.

그리고 배운 대로 행했다. 허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죽어라 근육 단련에 힘을 쏟았다. 매일매일 근육 트레이닝을 하고 몸이 망가지면 그때마다 신성력으로 다시 치유하며 또 오버 트레이닝을 해 갔다.

그러기를 5년째, 과연 여신께서 빈말하시진 않았다. 그의 노력은 확실한 보답으로 돌아왔다.

단, 그 보답이 꼭 원하는 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정작 늘라는 근육은 안 늘고, 대신 매일매일 필사적으로 시전해 온 신성력이 어마어마하게 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고작 10대 나이에 가공할 신성력을 가져 고위 성직자가 된 실란의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런 실란의 눈에 지금 이제껏 봐 왔던 몽크승조차도 아득히 능가하는 완벽한 몸이 나타난 것이다. 원체 허구한 날 남의 근육 부러워하며 몸 좋은 사람만 나타나면 뚫어져라 쳐다보던 실란이었다. 근육은 없어도 보는 안목만은 날로 늘어, 레펜하르트의 몸이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완벽한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실란의 저 기나긴 과거지사 따위 레펜하르트는 전혀 모른다. 당연히 기분이 찜찜할 수밖에 없다.

‘끄응…….’

한창 자신이 익힌 무술의 위력을 실험하며 갈고 닦는 재미에 빠져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흥분한 나머지 꽤나 정신없이 날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저 눈빛을 보니 바로 등골이 시원해지며 머리가 차가워진다.

그는 혀를 찼다.

‘끙, 마법사는 언제나 냉정해야 하거늘 이 무슨 추태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실란은 레펜하르트에게 도움을 준 셈이 되었다. 냉정을 되찾은 그가 간결한 동작으로 남은 악마들을 분쇄해 가기 시작했다.

☆ ☆ ☆

악마들을 처리한 뒤, 레펜하르트는 남은 일행을 이끌고 안전 구역으로 향했다.

던전 내에 정해진 안전지대라는 것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중간중간에 차원 간 기류의 흐름이 꼬여 마물들이 가까이 하기 꺼려하는 구역은 분명 있다. 이미 이곳 팔톤의 모든 시스템을 다 파악하고 있는 그였다. 쉽게 근처에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기절한 토드와 에드워드 경을 레펜하르트가 짊어지고, 오크 노예 셋이 각자 스테반과 살아남은 두 기사를 한 명씩 옮겼다. 석실 안으로 들어와 부상자들을 뉘이고 모닥불을 피워 온기를 확보하고 나니, 그제야 기사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으으음…… 대체 여기는?”

체력 좋은 에드워드 경이 먼저 일어나 주위를 살핀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실란이 잽싸게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허어!”

에드워드 경은 감탄을 터트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두껍게 옷을 껴입고 있어 그냥 덩치 좋은 정도로만 봤는데, 지금 보니 전신이 극한까지 단련된 것이 결코 예사로운 몸이 아니었다.

“무인을 몰라 뵈었군.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육포를 뜯으며 쉬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시큰둥한 얼굴로 중년 기사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 레펜…….”

막 이름을 말해 주려는데, 생각해 보니 이미 토드에게 이 이름을 말해 버렸다. 아무래도 수상쩍게 여길 것이 뻔하다. 그는 슬그머니 뒷말을 흐렸다.

“……이다.”

반말로 끝맺은 말투였지만, 너무 자연스러워 에드워드 경은 미처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던 바실리 왕국 내의 무투가들을 떠올려 보았다.

‘레펜……이라?’

레펜이라는 무투가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진정한 강자라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때 의식이 돌아온 스테반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스테반은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아직도 골이 울렸다. 그토록 호쾌하게 날아가 돌벽이랑 포옹을 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는 것이다. 미스릴 합금 갑옷이 박살 날 정도의 위력이었다. 큰 부상이 없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가 얼마나 단련된 기사인지 증명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테반 공자님!”

“아, 에드워드 경. 상황이 어찌 된 거요?”

에드워드가 그를 부축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이야기를 들은 스테반이 인상을 쓰며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대의 가문을 물어도 되겠나?”

“가문? 그딴 것 없는데.”

“……평민이었나?”

혹시 귀족가의 무인이 수행차 여행을 다니는 것인가 했더니 그냥 야인野人이었나 보다. 스테반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고귀한 기사가 야인의 도움을 받다니, 있을 수 없는 수치였다.

수치와 함께 혼란이 찾아왔다. 뿌리도 없는 평민이 위대한 무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한 악마들을 홀로 해치웠다고?

‘아무래도 우리가 다 해치워 놓은 그 악마 놈을 마무리만 했나 보군.’

스테반은 힐끔 실란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저 어린 성직자 소년이 무인의 전투를 제대로 볼 안목 따위 있을 리 없다. 그저 죽을 뻔하다 구원을 받았으니 어설픈 주먹질, 발길질도 투신처럼 보였겠지. 이후에 나타났다는 악마는 전부 하급한 놈들이었을 테고.

공격 한번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했던 주제에 스테반의 머릿속에 타그렐은 어느새 자신들이 거의 다 해치운 악마로 둔갑해 있었다.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리자 스테반의 표정이 풀렸다.

“한 수 재간이 있었던 모양이군. 도움이 되었다.”

뿌리 없이 떠도는 야인이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하니, 기사로서 그 공을 인정해 줄 아량은 있었다.

물론 스테반 딴에는 감사를 표한 것이지만 듣는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그게 아니다.

자연히 대답이 퉁명스러워졌다.

“그러는 그 쪽은 그 한 수 재간도 없었나 보군.”

“뭣이?”

기사의 감사를 듣고도 감격하진 못할망정 저런 태도라니! 발끈하며 스테반이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아차했다. 그의 검은 조금 전 타그렐에게 처맞을 때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에드워드 경이 나섰다.

“무례하오! 알티온 후작가에 경의를 갖추시오!”

“…….”

들은 척 만 척 레펜하르트는 육포만 뜯었다.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혹시나 저들이 열 받아서 공격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이 몸뚱이는 칼도 튕기는데, 뭘.’

그래도 에드워드 경은 은인에게 칼질할 정도로 몰상식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꽤나 경우가 바른 인간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경이 스테반을 돌아보며 그를 달랬다.

“야인이 어찌 제대로 된 예법을 알겠습니까? 참으시지요.”

문제는 그 경우라는 게 기사 기준이라는 것이지만.

“어쨌건 저자가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신음을 흘리며 스테반은 고개를 돌렸다. 듣고 보니 에드워드 경의 말이 옳았다. 진정한 뒤 그는 눈앞의 야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무지가 죄는 아닐 테지. 공이 있으니 그대의 무례, 관대하게 용서토록 하겠다.”

“……그러시든가.”

다시 스테반이 발끈했지만 레펜하르트는 무시했다. 솔직히 건방진 귀족가 기사가 설치는 꼴은 전생에도 수두룩하게 봐 와서 그리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까놓고 말하면…….

‘나도 어릴 적엔 저랬으니까.’

너무 어린 놈이 재능을 타고나서 주위에서 마냥 떠받들어 주면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된다. 레펜하르트 자신도 나이 먹고 철들기 전까진 한없이 오만불손한 놈이었다. 남 탓할 자격이 없달까?

‘나이 먹으면 철들겠지.’

안 들면 말고. 자기 새끼도 아닌데 왜 신경 쓰나? 저렇게 살다 죽겠지.

더 이상 레펜하르트와 상종하기 싫었는지 스테반이 렐시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반면 에드워드 경은 눈앞의 이 여행자에게 계속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경험 많은 기사인 그에겐 레펜하르트의 저 탄탄한 몸이 단순 노동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아볼 안목이 있었다.

“가문이 없다라. 그렇다면 어느 분에게 가르침을 받았는지는 알려 줄 수 있겠소?

“그냥 오며 가며 익힌 정도다.”

레펜하르트는 굳이 제라드의 이름을 숨겼다. 제라드의 명성은 너무 높다. 마법의 힘을 되찾기 전에 과하게 주목받는 상황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인간에게 내 행적 알리고 싶지 않아!’

혹시나 사부란 작자가 ‘제자야! 새로운 수련법을 개발했다!’라며 찾아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도 고생을 해서인지 레펜하르트의 제라드 기피증은 거의 피해망상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아아, 신경 끄고 부상자나 돌보지? 지금 저들이 더 급하지 않나?”

귀찮아진 레펜하르트가 말을 막고 손사래를 쳤다. 안 그래도 아직 살아남은 기사 두 명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실란이 열심히 치유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혼절 중이다.

“그건 그렇구려. 다시 한 번 알티온의 이름으로 도움에 감사하는 바이오.”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에드워드 경은 손을 가슴에 올려 예의를 보였다. 그리고 물러나며 미심쩍은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슬슬 그도 이 여행자 청년이 반말로 기사인 자신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지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군.’

일단 마각을 드러내니 엄청나게 오만한 말투. 게다가 본인은 자신의 말투가 오만하다는 자각도 없어 보인다. 마치 스테반 같달까? 저건 높은 자리에서 아랫것들만 부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다.

‘하지만 젊은 놈이 저렇게까지 오만할 수 있나?’

저 스테반조차도 에드워드 경에겐 반공대를 한다. 일단 나이가 있으니까.

그런데 저놈은 20대 초반인 주제에 마흔이 넘은 에드워드에게도 막말을 하는 것이다. 나이조차 무시할 정도면 엄청나게 막돼먹은 인간이거나…….

‘혹시 다른 나라 왕족 정도 될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건 상대해 봐야 피곤할 뿐이다. 적어도 저 청년이 자신들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악마를 처리할 만큼 강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지금 상황에서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스테반과 달리 꽤나 주제 파악을 하고 있는 에드워드 경이었다.

‘하지만 저 말투는 오만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래, 뭔지 알 것 같다. 저건 자신보다 나이 어린 이를 대하는 말투다.

신기한 자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드워드는 육포를 뜯고 있는 레펜하르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 ☆ ☆

실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치유술을 쓴 덕분에, 기사들도 슬슬 정신을 차렸다. 죽어 간 동료들을 생각하며 기사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스테반 공자님!”

“크윽! 베르토 경이 죽다니!”

“이 더러운 악마 놈들!”

슬퍼하는 기사들을 보며 스테반이 부하들을 위로하고 독려한다.

“슬퍼 마라. 그들은 기사답게 싸우다 죽었다. 그들의 용맹함을 아레스께서 기억하실 테니 그 넋이 구원받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용기를 알티온 후작가가 세세토록 기릴 것이다. 그들은 죽었으되, 기사의 명예는 영원하리라.”

주군의 위로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고, 공자님!”

“알겠습니다, 흐, 흐흑!”

살아남은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투신 아레스에게 기도를 올리고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토드도 한숨을 쉬며 명상에 잠겨 마력을 다시 채웠다. 전체적으로 침울한 분위기가 석실을 가득 맴돌았다.

‘으음…….’

실란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치유술을 다 쓰고 나자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주신 세이어나 투신 아레스의 신관이었다면 저기서 예배를 주관, 죽어간 기사들의 영혼을 기리는 미사를 올렸겠지만 실란은 사랑과 미, 자애의 여신 필라넨스를 섬기는 성직자였다. 여인의 죽음이라면 모를까 전사의 죽음 앞에서는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저 사이에 껴서 같이 슬퍼하자니 또 이상하고.’

사람이 죽었는데 너무 태연해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만, 실란은 저 기사들의 죽음에 별 감흥이 없었다. 직업상 원체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봐 온 데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이들이다. 죽은 이들이 필라넨스를 섬기는 신도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기사들은 보통 투신 아레스를 섬긴다.

그리고 그에겐, 아까부터 관심이 지대해 어떻게든 말 걸 기회만 노리고 있는 대상이 있었다. 실란이 슬그머니 레펜하르트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레펜 씨라고 하셨죠?”

“응? 왜?”

갑자기 다가와 질문을 하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그래도 아까의 그 이상야릇한 느낌 때문에 영 꺼려지던 놈이었다.

‘얘가 왜 이렇게 갑자기 친한 척을 하지?’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실란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키가 얼마나 되세요?”

“192쯤 될라나…….”

“체중은요?”

“그, 글쎄 제대로 안 재 봐서 그건 잘…….”

음, 한 110에서 120 정도는 되겠지? 대충 바위 같은 거 들다 보면 신체 균형 잡으면서 자기 체중이 대충 감이 온다. 겉으로는 전혀 살쪄 보이지 않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이 알차게 박혀 있어 보기보다 훨씬 더 나가는 몸이었다.

‘우와, 내 몸이지만 정말 우악스럽구나.’

막상 수치로 옮기고 나니 실감이 난다. 체중이 0.1톤이 넘다니! 왠지 사람 몸무게 같지 않잖아? 이 정도면 예전 몸의 두 배에 가깝다.

“어떤 수련을 해서 그런 몸을 만드신 건가요?”

“그냥…… 많이 맞고 많이 먹고 많이 들었는데?”

진실을 꿰뚫는 솔직 담백한 답변이었지만 실란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무인들은 자기 수행법을 함부로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더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굳이 시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애들도 대충 구출했으니 이제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해야 할 차례다.

‘돈 벌어야지, 돈!’

그래야 사랑스러운 시리스를 데리고 올 수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돈독이 올라 벌게진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겉보기론 참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럼 난 출구를 정찰하고 오겠다.”

그러자 기사들 대부분이 감탄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이 위험한 마굴 속에서 동료를 위해 척후라는 위험한 역할을 자청하다니! 천한 혈통인 주제에 제법 기사의 도리를 알고 있지 않은가?

실란이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뭔 일 생겨서 여기 부상자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시큰둥한 대꾸에 실란이 풀 죽어 다시 주저앉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치유술사는 본진에 있어야지 척후를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이들 몰래 던전을 털 생각이었으니 누군가 따라오면 곤란해서 한 소리였지만.

그때, 스테반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지, 렐시아는 여기서 이들을 돕거라.”

“네, 주인님.”

엘프 여인이 공손이 고개를 숙인다. 스테반이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문제없겠지?”

‘얘는 왜 갑자기 따라오겠다는 거야?’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여기서 딱히 스테반을 제지할 핑계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는 머리를 긁다가 대충 대꾸하며 몸을 돌렸다.

“뭐, 좋을 대로.”

2

스테반이 굳이 레펜하르트를 따라나선 것은 혼자 정찰을 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 돕겠다든가, 아니면 수하들을 지위하는 몸으로서 직접 위험한 곳을 앞장선다든가 하는 그런 대견한 이유가 아니었다.

‘야인에게 도움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순 없다!’

아무리 우연이라고는 해도, 자신이 비천한 혈통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가 버리면 저 야인은 자신이 정말로 기사에게 도움을 준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혼자 척후를 나가겠다는 것부터가 기사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 증명해 주고 있다.

안 그래도 인간이 건방지게 변해 버린 것이 영 거슬리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경우 바른 기사, 여기서 저놈의 무례함을 직접 징치하는 것은 기사답지 못했다. 그래서 따라왔다. 악마를 만나 허우적대는 저놈을 구해 주고, 주제 파악을 시켜 줄 생각이었다.

검을 쥔 채 (에드워드 경이 챙겨 둔 예비 검을 들고 온 상태였다.) 스테반은 연신 속으로 되뇌었다.

‘어서 아무 악마나 하나 나와라. 잽싸게 해치워 주마.’

물론 레펜하르트는 스테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도 없었다.

그저 예전의 기억을 따라 돈 되는 석실을 열심히 찾을 뿐이었다.

횃불을 든 채 어두운 통로를 조심조심 이동한다. 그러던 중 문득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저기군!’

통로 왼쪽에 반쯤 무너진 암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물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스테반이 반색을 하며 검투 자세를 취했다.

“나왔구나!”

알티온 가문의 화려한 검술을 보여 주마! 라며 스테반이 막 몸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퍽!

뒷목에 강렬한 충격이 오며 바로 의식이 흐려졌다.

‘뭐, 뭐지?’

☆ ☆ ☆

‘좀 자고 있어라.’

가벼운 뒷목 치기 한 방으로 레펜하르트는 이 귀찮은 짐덩이를 혼절시켰다. 그리고 덤벼드는 마물들도 마저 처리했다. 전투랄 것도 없었으니 묘사할 것도 없다. 대충 퍽퍽 패 버리고 그는 바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석실은 반쯤 허물어져 있고 사방에 금속으로 된 옷장 비슷한 것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고대에 창고로 쓰이던 곳인 듯했다. 규모가 상당해, 베이스캠프로 삼았던 그 석실의 열 배도 넘는 곳이었다.

제일 먼저 문 옆에 쌓인 상자들부터 까 본다. 오랜 세월 많은 것들이 풍화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좋아, 좋아. 은의 시대 금화가 쉰 닢에…….”

은의 시대 금화는 순도가 높은 데다 고고학적 가치가 있어 현 시대 금화의 대여섯 배 가격으로 거래된다. 슥슥 쓸어 모은 뒤 레펜하르트가 금속 테이블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분명 여기였는데…….”

잠시 후,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있다! 무한의 주머니.”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백 팩 하나를 들고 레펜하르트는 싱글벙글 웃었다.

은의 시대 기물 중에서도 특히 고가에 거래되는 유물. 무한의 주머니.

정확히는 무한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그 안에 공간 왜곡이 걸려 있어 원래 주머니 부피의 열 배까지 물품을 넣을 수 있었다. 무게 역시 10분의 1로 줄어드는 이 마도구는 현 시대의 마학으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현 시대의 마법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신에게만 허용된 영역이 있으니 바로 시간과 공간, 물질에 직접 개입하는 부분이다.

은의 시대에는 시간도 되돌리고 공간을 뛰어넘고, 물질 그 자체를 변화해 새로운 형질로 변하는 엄청난 마법이 흔했다고 하지만 9서클이 한계인 현 대륙의 마법학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왕년 10서클의 경지에 올랐던 레펜하르트만이 몇 년을 연구한 끝에 간신히 부분 공간 왜곡으로 부피를 두 배로 늘려 주는 무한의 주머니를 만들어 본 정도다.

“흐흐, 분명 이 옆에 하나 더 있었는데?”

방을 마저 뒤져 레펜하르트는 백 팩을 더 찾아냈다. 이 무한의 주머니가 엄청난 마도구이긴 하지만 아티팩트(단 하나밖에 없는 유물)라 할 정도는 아니고, 어지간한 던전이면 한두 개씩은 나오는 물건이었다. 은의 시대에선 모든 군인들에게 기본 장비로 제공된 탓이다.

레펜하르트는 허리 뒤춤에 무한의 주머니를 착용했다. 그리고 근처 굴러다니는 천으로 허리를 감싸 백 팩을 감췄다. 자신이 몰래 유물들을 챙긴 것이 들통 나면 안 되는 것이다. 손바닥만 한 백 팩이라―그의 손바닥은 어린아이 머리통보다 크다― 천으로 감싸니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전투 중에 바지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기에 허리에 천을 두른다 해도 어색하게 여길 사람은 없었다.

준비를 마치고 다시 열심히 방 안을 뒤적뒤적. 석실이 넓다 하지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으니 뒤지는 속도도 장난 아니게 빨랐다.

‘천상의 화로에, 회수의 단검에, 마정의 사파이어에…… 후후, 비싼 거 많구먼.’

은의 시대 유물들을 보이는 대로 챙겨 허리 뒤의 백 팩에 넣는다. 원래대로라면 잡동사니나 좀 넣고 말 사이즈이지만 사실은 어지간히 큰 배낭보다도 부피가 더 크다. 넣는 족족 쏙쏙 들어갔다.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유물들을 쓸어 담았다. 이 방 안에 있는 것만 갖다 팔아도 어지간한 엘프 노예 대여섯 명은 살 수 있을 거금이 되겠지만…….

‘이왕이면 시리스 좋은 거 먹이고 예쁜 거 입혀야지. 좀 더 챙기자.’

다음 장소로 향하기 위해 석실을 나서는데, 때마침 으으 하는 신음과 함께 스테반이 몸을 일으켰다.

“무, 무슨 일이지?”

레펜하르트가 천연덕스럽게 바닥을 가리켰다. 조금 전 그에게 덤벼들었다 뼈와 살이 분리된 악마들의 잔해가 흥건히 고여 있는 곳이었다.

“이놈들이 그쪽 뒤통수를 치더라고. 한 방에 기절했어, 댁.”

“으윽…….”

스테반은 신음을 흘렸다. 이 악마들이 비겁하게 뒤에서 기습을 했다니! 절로 이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야인에게 도움을 받아 버렸다. 수치로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젠장, 오늘따라 왜 이리 일이 꼬이는지 모르겠네.’

저 여행자 청년이 저리 간단히 처리한 걸 보면 보나마나 저급한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 저급한 악마가 자신을 한 방에 기절시켰다는 점은 싹 무시했다. 그저 자신이 방심한 탓이라고만 여겼다. 당연히 자신을 기절시킨 게 저 야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존재치도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앞장서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며 스테반이 계속 이를 갈며 띄엄띄엄 말했다.

“도, 도움에 감사한다.”

어떤 경우에도 도리는 지켜야 하는 법, 그것이 그가 배운 기사도였다. 후딱 인사하고 스테반은 통로를 앞장서 나갔다. 역시나 또다시 마물들이 나타났다. 그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이놈들을 해치워 진정한 기사의 힘을 보여 주겠다!

“아니, 뭐 별로…….”

앞장서는 스테반과 나타난 악마들을 번갈아 보며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자기가 후려갈겨 놓고 감사 인사를 받자니 참 겸연쩍었다. 특히나…….

‘또 기절시켜야 하는 판에 말이지.’

퍼억!

“꾸에엑!”

다시 스테반은 혼절해 버렸다. 나타난 악마의 등 뒤에 새로운 석실, 레펜하르트의 다음 목적지가 있었던 것이다. 응당 시선 차단하고 물건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뭐, 자꾸 이렇게 연수에 충격을 주다 보면 척추 신경 쪽에 흔적이 남아 어디 잘못될 가능성도 많지만…….

‘잘사는 놈이니까 별문제 없겠지.’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다시 지하 2층을 싹싹 뒤져서 쓸 만한 것들을 건져 냈다. 그 와중에 스테반은 세 차례나 더 기절해야 했다. 이 정도 당했으면 슬슬 의심할 법도 하건만 이 자신만의 세상에서 사는 청년 기사는 ‘이상하다. 방심도 안 했는데 왜 기척을 못 느끼지? 요새 내가 몸이 허한가? 돌아가면 보약 좀 지어 먹어야겠군.’ 정도의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2층을 반쯤 돌자 백 팩이 꽉 찼다. 일부러 비싼 것들만 챙겼는데도 그렇다. 아무리 무한의 주머니라지만, 원체 기본적으로 작은 백 팩이라 허용 용량이 얼마 안 되었던 것이다. 예전에야 스무 배까지도 들어가는 커다란 무한의 배낭을 짊어지고 와 별문제 없이 다 챙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더 이상은 숨길 방도가 없다.

‘나중에 다시 오지, 뭐.’

레펜하르트는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지금도 목표 금액은 한참 초월했다. 게다가 이곳 지하 3층은 시리스와의 추억이 어린 곳이었다. 나중에 둘이 다시 탐사하면서 과거의 추억을 재현하는 것도 나름 로맨틱하지 않겠는가!

살벌한 던전 한복판에서 로맨틱을 찾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레펜하르트는 발걸음을 돌렸다.

‘슬슬 얘들도 밖에 내보내 줘야지.’

“대충 통로가 확보된 것 같군. 돌아가자.”

“그, 그러지.”

한 것이라곤 기절뿐인 스테반이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어두운 통로 사이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이어진다. 기사들이 앞장서고 토드며 실란, 레펜하르트와 오크 노예들이 뒤를 따르는 대형이었다. 비록 레펜하르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 유적 탐사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알티온 후작가였다. 정체 모를 뜨내기에게 전방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후위에서 실란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 미소녀틱한 미소년은 아까부터 계속 그를 살갑게 대하며 이것저것 물어 그를 귀찮게 하는 중이었다.

“레펜 씨. 혹시 어느 나라 왕족이신가요?”

“아니, 그냥 평민인데?”

“그래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왜? 평민이 실력이 높은 것이 이상한가?”

얘도 계급의식이 뿌리까지 박혀 있는 놈인가 싶어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려던 차였다. 실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레펜 씨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요.”

“응?”

“무인이니까 자신감이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래서 스테반 경에게 하대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실란이 본 레펜하르트의 무위는 단호의 기사라는 저 스테반보다도 훨씬 위였다. 높은 경지에 오른 비천한 출신의 무인이 귀족 출신의 하수를 대할 때 무례해지는 것은, 흔하다 할 정도는 아니어도 그렇게 보기 드문 일만도 아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경을 대할 때도 하대하는 것은 좀 어색했다. 성직자인 자신에게 하대하는 것이야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 쳐도, 나이 많은 에드워드 경에게 반말할 정도로 막 사는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런가?”

새삼 성찰의 기회가 되어 레펜하르트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죽을 때 그의 나이가 이미 50대, 그렇다 보니 저 중년의 에드워드 경도 어려 보였다. 그래서 평소처럼 대했는데 생각해 보니 얼마나 어이없어 보였을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 난 이제 스물두 살이지.’

그는 순순히 실란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대충 핑계를 댔다.

“내가 워낙 사람을 안 만나고 살아서 예법에 좀 약해서 그래. 앞으론 조심해야겠네.”

다행히 실란도 별 의심은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래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스테반 일행은 조심스레 팔톤 유적, 지하 2층을 탐사하며 지나갔다. 그 와중에 레펜하르트가 ‘버리고’ 간 유물들을 챙기며 돈 벌었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살짝 아까운 기분도 들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알맹이는 다 챙겼고, 이것들도 본전은 뽑아야지.’

레펜하르트가 쓸어버린 지역을 지나니 다시 마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이번엔 방심치 않고 침착하게 악마들을 상대하며 길을 뚫었다. 딱히 그가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이미 지하 2층에서 제일 강한 베이터나 타그렐이 처리되어 급수가 낮은 악마들만 남아 있었던 덕이었다.

마침내 통로 끝에 커다란 문양이 새겨진 금속의 문이 나타났다.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 곳이었다.

스테반이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고, 다른 기사들도 한껏 경계하며 안을 살핀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저 안이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에엥?’

안을 들여다본 레펜하르트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크아아아!”

위로 향하는 계단, 바로 앞에 거대한 염소 머리의 악마가 빛의 사슬에 묶인 채 포효를 터트리고 있었다.

☆ ☆ ☆

염소 머리의 악마가 머리를 흔든다. 굽어진 두 뿔 사이에서 푸른 전격이 방전한다. 악마가 몸부림칠 때마다 주위로 선홍색 화염이 일어나 화끈한 열기를 뿌렸다. 오른손에 든 검에서 시꺼먼 연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크오오오!”

거구로 유명한 몬스터, 오우거보다도 더 거대한 육체에서 검붉은 마기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구체화된 어마어마한 마기였다. 마의 기운이 해일처럼 스테반 일행을 덮쳐 가자 다들 비명을 질렀다.

“으힉!”

“으아악!”

그 가공할 마기에 싸이니 절로 공포가 일어난다. 실란이 재빨리 기도를 해 일행의 정신을 보호했다. 덕분에 패닉에 빠지진 않았지만, 다들 두려움에 젖어 뒷걸음질을 쳤다. 이미 오크 노예들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고 기사나 토드도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는 것이 전부였다. 신성력의 주체이기에 남들보다 공포에 강한 실란조차도 이빨이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스테반이 경악에 차 소리쳤다.

“그렐비스트!”

이계의 마물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악마 중의 악마가 그들의 출로를 막고서 포효하고 있는 것이다. 잘 보니 사지에 빛의 사슬이 묶여 있고, 그 사슬이 계단 뒤쪽의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렐비스트는 스테반 일행에게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그저 울부짖으며 분노만 터트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경이 상황을 파악하며 외쳤다.

“크윽! 저 악마가 이곳의 수호자였나!”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어라? 저게 왜 여기 있지?’

차원 틈새에서 고장 나 버린 은의 시대 유적은 가끔 그 강력한 마력으로 차원 간의 존재를 끌어당겨 방어 시스템에 흡수시키는 경우가 있다. 원래는 시스템 상의 모자란 부분을 자체적으로 보충하는 마법적 기능인데, 이것이 오작동되어 이계의 마물을 붙잡아 그 자리를 채워 버리는 것이다.

은의 시대에 잘 모르는 보통 유적 탐사자들은 유적을 지키려는 그 존재들을 던전의 수호자라 부르며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레펜하르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저놈들, 사실은 잘 살다가 덥석 납치되어 무보수로 부려 먹히는 꽤나 서글픈 신세다.

‘분명 예전에 왔을 땐 저런 놈이 없었는데?’

문득 그의 표정이 굳었다.

‘아, 지금은 저게 아직 퇴치가 안 된 시간대구나!’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뚫고 가야 하나? 저 악마는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유적의 시스템과 결합되어 버린 악마는 그냥 나타나는 마물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존재가 된다. 그렐비스트 자체도 타그렐보다 훨씬 고위의 악마인데, 수호자가 된 지금은 더더욱 가공할 마기를 뿜고 있었다.

게다가 저놈은 과거에 오러 유저였던 클로드 경을 죽인 악마이기도 하다. 자신과 클로드 경 사이에 얼마나 실력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러를 각성했다는 것만으로 속 편히 덤빌 상대는 아닌 것이다.

‘으음…….’

고민은 잠시 뿐, 레펜하르트는 깔끔하게 이쪽 길을 포기했다.

딱히 건질 것도 없는데 굳이 저놈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안 되면 그가 들어왔던 쪽으로 그냥 나가도 된다. 그쪽은 지하 1, 2층과 달리 직접 탐사했던 지역이라 마물들의 출현 조건이나 위치에 빠삭했다. 잘만 하면 전투 한번 안 하고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갑시다. 이 전력으로 저놈을 상대하긴 힘들어요.”

갑자기 도로 존댓말을 쓰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에드워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태도가 바뀌었지? 어쨌거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경험 많은 기사답게 에드워드 경도 저 악마의 기세가 보통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마기부터가 비에타나 타그렐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스테반조차도 차라리 다른 출구를 찾자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레펜하르트와 스테반 일행의 생각이 일치했다. 다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려던 차였다. 그때 기사 중 하나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저 악마가 든 검을 보십시오!”

“응?”

의아해하며 스테반이 무심코 수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순간이었다. 그렐비스트가 든 한 자루 롱 소드를 본 그가 경악하며 외쳤다.

“마검 알티온!”

검신을 장식한 보석과 세밀한 세공, 미스릴을 제련해 세운 섬세한 칼날. 검은 연기를 끝없이 내뿜고 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알티온 가문의 보검이었다.

스테반이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찾아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오오……!”

주저 없이 스테반이 검을 뽑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에드워드 경이 놀라 물었다.

“공자님? 설마 저 악마와 대적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하, 하지만…….”

에드워드 경은 다시 그렐비스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공할 마기였다. 사슬 덕에 무사한 것이지, 만약 저놈이 자유로웠다면 자신들은 한순간에 전멸했을 것이란 확신이 들 정도다.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일단 위치를 파악했으니 가문으로 돌아가서 좀 더 전력을 갖추는 것이 어떨지요?”

주군의 안위를 염려하는 충정의 목소리에 스테반이 버럭 성을 냈다.

“무슨 소리인가? 설마 그대는 저 악마의 손에 위대한 기사의 검이 더럽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보겠단 말인가!”

스테반은 두 눈을 불태웠다. 이대로 가문으로 돌아가 손을 벌리자고?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이 영광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지금, 여기서 저 보검을 들고 귀환해야 진정한 명예와 영광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물러설 수 없다.

절대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

반드시 저 검을 되찾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절대적 죽음의 손에 들려 있을지라도!

“다들 검을 들어라!”

항명을 용납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가 기사들의 귓가를 때렸다. 기사들이 머뭇거린다. 겁쟁이들 같으니!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스테반이 말을 이었다.

“저 괴물은 사슬에 묶여 있다. 위험하다면 안전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다. 네놈들은 묶여 있는 상대조차 두려워하는 겁쟁이란 말이냐!”

비록 욕심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는 상태긴 하지만, 그래도 스테반은 유능한 기사였다. 그는 저 악마가 사슬에 묶여 행동반경이 좁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주군의 외침에 기사들도 용기를 얻었다. 다들 싸울 준비를 한다. 레펜하르트가 기가 막혀 에드워드를 말렸다.

“이봐요, 정말 저 괴물과 싸울 작정입니까?”

아무리 저 악마가 묶여 있다 해도, 사람의 목숨은 정작 전투에 들어가면 앗 하는 순간에 날아가는 법이다. 위험을 인지하고 도망갈 여유를 저 악마가 줄 것 같은가?

“승산이 없어요. 다들 죽을 텐데요?”

하지만 기사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물끄러미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도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결국은 명예를 모르는 야인일 뿐이구려.”

그리고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목숨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이 있는 법이오.”

‘아니, 그러니까 상대가 안 된다니까?’

타그렐도 못 잡은 것들이 저걸 무슨 수로 상대하려고? 참 말 어지간히도 안 들어먹는다.

스테반이 검을 세우고 기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알티온의 기사들아, 목숨을 걸고 그대들의 용맹을 보여라!”

“으아아아!”

“마법사 토드여, 원호를 준비하라!”

토드가 양손에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답게 안전한 원거리에서 마법만 난사하는 상황이 되니 도로 용기가 솟아난 모양이었다.

“필라넨스의 성직자여, 여신의 가호를!”

실란도 스테반의 말에 설득되었는지, 용감해진 얼굴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여신의 축복이 기사들을 뒤덮고, 강력한 마법의 수호가 그들의 갑옷에 깃든다. 그 상태로 기사들이 용맹하게 그렐비스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라져라! 이 사악한 악마여!”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한 걸음 물러나 연신 혀를 차고 있었다.

‘아, 거참. 안 된다니까 그러네…….’

☆ ☆ ☆

“우오오오!”

용맹한 외침을 터트리며 기사가 돌진한다. 사슬에 묶인 그렐비스트가 그대로 오른팔을 크게 휘둘러 친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덩치가 덩치다보니 범위가 너무 넓다. 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터어엉~!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돌진한 기세 그대로 뒤로 날아가 통통 튕긴다.

‘아이고, 또 날아간다.’

석실 구석에 숨어 레펜하르트는 한심한 눈으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나가떨어진 기사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킨다. 잔뜩 부서지고 찌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갑옷은 원형의 모습을 비교적 유지하고 있었다. 저건 갑옷 성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실란의 신성 가호의 힘이라고 봐야 했다.

“네 이놈!”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본 다른 기사가 분노하며 방패를 세운 채 달려 나갔다. 그렐비스트의 등 뒤를 노린 것인데, 아무래도 소용은 없어 보였다. 금세 접근을 알아챈 악마가 굵은 꼬리를 창처럼 휘둘러 기사의 방패를 때렸다. 방패가 쩍쩍 금이 가며 다른 기사 역시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단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펑펑 처맞는구먼.’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스테반과 다른 기사들은 잘 버티고 있었다. 덫에 걸린 호랑이를 상대하는 투견들처럼 외곽을 빙빙 돌며 계속 그렐비스트의 허점을 노린다.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니 공격을 이을 수가 없어 저 악마도 그저 울분만 삼킬 뿐이다. 그러고 보면 스테반의 판단도 아주 틀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스테반이 검을 들고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의를 잃지 마라! 우리는 알티온의 기사다! 저 악마도 우리의 용기에 겁에 질려 있노라!”

적절하게 그렐비스트의 울부짖음이 뒤를 이었다.

“크아아아!”

세상에 어느 악마가 겁에 질리면 저렇게 광포한 포효를 터트리는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기사들은 용감하게 그렐비스트를 상대하고 있었다.

저들 역시 알티온 후작가에서 고르고 고른 기사들,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첫 한 방 정도는 막을 기량의 소유자다. 보통이라면 첫 방 막아 봤자 자세가 흐트러져 이어지는 후속타의 밥이 될 뿐이지만, 지금은 데굴데굴 굴러서라도 어떻게든 악마의 공격 범위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살 수 있다. 일단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니 타그렐을 상대할 때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쉬웠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난처해했다.

‘끙, 저 애송이만 날뛰다 쓰러지면 바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동안 섞은 대화만으로도 스테반이 어떤 놈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설명해 봐야 들어 먹을 놈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저 귀족가 공자님이 쓰러지면 바로 에드워드 경을 설득해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래도 에드워드 경은 비교적 현실 감각이 있으니 그의 말을 들어 줄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저 스테반이 실력이 있어 용케 그렐비스트를 상대하는 것이다.

절묘하게 스텝을 밟으며 날아오는 공격의 틈새로 칼질을 해 댄다. 좋게 말하면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쪼잔하게 깔짝대는 것이지만 어쨌건 잘 버티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타아앗!”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그렐비스트의 좌측으로 파고들어 허벅지를 베어 간다. 희미하게 상처가 나며 피가 흐른다. 그 틈에 렐시아가 우측으로 날아올라 악마의 머리를 노린다. 그렐비스트가 팔을 들어 공격을 막는 사이, 스테반이 잽싸게 검을 올려쳐 옆구리를 베어 갔다.

꽤 깊이 들어간 듯, 검은 피가 솟구치며 그렐비스트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

재빨리 거리를 벌려 사정권 밖으로 도망치며 스테반이 칭찬을 해 댔다.

“잘했다, 렐시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레펜하르트가 문득 혀를 내둘렀다.

‘저 렐시아란 아이, 실력이 상당한데?’

스테반을 제외하면 확실히 이 일행의 2인자랄까? 에드워드 경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게다가 둘의 호흡도 딱딱 맞았다. 예전부터 서로 자주 함께 싸워 온 솜씨였다.

‘뭐, 저 애송이의 슬레이어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멀리서 원호하는 토드와 실란도 한층 냉정하게 그렐비스트를 상대하고 있었다.

“필라넨스시여, 저 사이한 존재에게 성스러운 철퇴를 내리소서!”

실란의 등 뒤로 분홍빛 망치가 형성되어 그렐비스트를 가격한다. 당연히 저 염소 머리 악마는 전신의 불꽃으로 성광의 해머를 분쇄했다. 타그렐도 할 수 있었던 일이니 그렐비스트가 못 할 리 없었다.

그러자 실란이 인상을 구기며 재차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 사이한 존재에게 성스러운 철퇴를 왕창 좀 갈기소서!”

또다시 괴상망측한 기도문이 흐르며 실란 주위로 수십 종류의 빛무리가 떠올랐다. 망치며 철퇴, 메이스 등등 참 종류도 다채로웠다. 대장간 차려도 될 것 같았다.

우두두두!

수십 개의 철퇴들이 분홍색 빛의 궤적을 남기며 악마의 전신을 연거푸 때려 댄다.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이번엔 그렐비스트도 전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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