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제2장 고대의 유적 (3/84)

제2장 고대의 유적

1

화려한 침실.

청금석을 깐 바닥이 잔잔한 빛을 뽐내고 사방의 새하얀 벽은 우아한 그림과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다. 비단 카펫이 깔린 침실 한쪽 귀퉁이엔 백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테이블이 자리한다.

침실 중앙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안고 몸을 뉘이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의 잘생긴 중년 남자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눈부신 미모의 엘프 여인이었다.

엘프 여인은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베고 손끝으로 가슴팍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문득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왜 자꾸 더듬는 게냐?”

“그냥 좋아서요.”

엘프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은빛 자수로 장식한 비단이 그녀를 덮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감추진 못했다. 사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삐쩍 마르기만 한 이 몸이 뭐가 그리 좋단 말이냐?”

여인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스르륵 어깨 아래로 미끄러진다. 잔잔한 조명 아래, 잘 닦은 청동 거울 같은 매끈한 피부가 드러난다.

“섬세하고 날카로워 보이잖아요. 한 자루 잘 벼린 칼 같은…….”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그는 그냥 삐쩍 마른 것이지 한 자루 칼날이니 하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사내의 두 뺨을 어루만지며 엘프 여인이 얼굴을 가져갔다.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그녀가 속삭였다.

“그냥 엘프 남자들 같아서 좋아요. 그리고 레펜하르트 님의 가치는 그 위대한 정신에 있으니까요.”

“허허허…….”

중년 사내, 레펜하르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손짓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시리스.”

“네에…….”

청동 향로가 은은한 향을 방 안 가득 뿌린다. 부끄러워하며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의 품 안에 살며시 안겼다.

☆ ☆ ☆

바실리 왕국 남부, 크롬 시.

푸른 갈기 여관 2층 객실.

그곳에서 웃통을 벗은 한 청년이 방에 비치된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 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해, 시리스…… 나, 이런 몸이 되어 버렸어…….”

35년 전의 기억 속 과거이자 25년 후의 미래인 그 시절을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 벼린 칼은 고사하고, 우악스러운 스톤 골렘을 연상케 하는 이 최종 병기 같은 육체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거, 시리스를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날 좋아해 주려나 몰라?’

그래도 마음에 드는 점도 없진 않았다. 원래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평균 신장이 큰 편이다. 여성인 시리스도 마찬가지라 전생의 그녀는 8등신의 완벽한 몸매에 훤칠한 키의 소유자였다.

쉽게 말해서 시리스가 전생의 레펜하르트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컸다. 물론 그는 이미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나이였으니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다 보니 연인보다 키가 작다는 것이 은근히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이젠 내가 훨씬 더 크지, 후후후.’

좋아하다 말고, 이런 동물적인 부분에서 좋아하는 자신을 깨닫고 레펜하르트는 다시 좌절에 빠졌다. 아무래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에 너무 물든 것 같다.

‘아, 정신 차려야지.’

혀를 차며 그는 다시 옷을 걸쳤다.

하루도 안 되어 크롬 시에 도착한 그는 무려 하루에 은화 한 닢씩이나 하는 고급스러운 객실을 잡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식사도 하고 정신적 피로도 푸니 정말 세상 살 맛이 났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리로 몇몇 행인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겨울 추위에 옷가지를 여미고 종종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 특이한 점이라곤 전혀 없는 일상 풍경이지만, 산속에서 6년 가까이 살아온 그에겐 저것조차도 신기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여튼 세상에 내려오니 좋기는 좋네.”

문득 레펜하르트가 품을 뒤졌다. 그리고 돌돌 말린 작은 양피지 하나를 꺼냈다.

“그나저나…….”

근처 잡화점에서 구입한 여행자용 대륙 전도全圖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시간대라면 분명 시리스는 여기 있을 건데…….”

그의 시선이 지도 위쪽으로 향했다. 대륙 북부에 위치한 차탄 공국, 세틀라드 산맥의 지류에 자리 잡은 이 나라는 중간 무역으로 성세를 얻은 교역 국가였다. 그리고 각종 노예 매매가 대륙에서 가장 성행하는 곳이기도 했다.

‘시리스…….’

레펜하르트는 틈틈이 들었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렸다.

전생의 연인이었던 하이엘프 여인, 시리스 발렌시아.

대륙 오지의 황야에서 간신히 숨어 살던 엘프들 사이에서 자라난 그녀는 스무 살, 인간으로 치면 고작 대여섯 살 정도의 나이에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 인간들 손에 떨어졌다. 너무 어려 상품 가치가 떨어지던 시리스를 노예 상인은 일단 훈련소로 넘겼고, 노예로서 훈련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들었다.

“전생의 그녀가 백 살이 조금 안 되었었으니 지금이면 한 일흔 살 정도? 인간 기준으로 열예닐곱 살쯤 되었겠네.”

결국 나이가 차자 돈 많은 인간에게 팔려 성적 노리개로 살아가던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와 만나게 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그녀가 다시 웃게 되기까지는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떠올린 레펜하르트는 지도를 움켜쥐며 눈을 부라렸다.

“제국 재건도 좋고 마법을 되살리는 것도 좋지만…….”

이게 제일 급하다. 시리스가 앞으로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냥 놔둘 수 있겠는가? 일단은 최우선적으로 그녀부터 구해 내고 봐야 한다.

“지금이 대륙력 984년, 시리스가 팔려 가려면 1년 정도 남았으니까…… 아직은 차탄 공국에 있을 거야.”

행보는 정해졌다. 레펜하르트는 지도를 거칠게 품 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어쩔까? 당장 차탄 공국으로 가서 경매장을 박살내고 시리스를 꺼내 올까?’

예전의 레펜하르트였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덤으로 고통받는 다른 엘프들도 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위대한 마법의 힘이 없는 지금 저건 너무 부담이 컸다.

뭐, 지금도 경매장 정도야 쉽게 박살 내고 시리스를 구할 수는 있다. 마법사가 아닌 무투가의 힘만으로도 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면 항시 쫓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마법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되도록 거추장스러운 일을 피하는 게 좋다.

“아무래도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낫겠지? 쩝.”

결국 레펜하르트는 시리스를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돈 주고 산다는 생각을 하니 실로 불쾌해졌지만,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이 필요하겠군.’

그것도 엄청난 금액의 돈이. 엘프 노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무일푼에 가깝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별로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체제를 바꿀 정도로 강하진 못했지만, 엘프 노예 하나 정도를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의 힘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오러를 각성한 강인한 육체와 경지에 오른 체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미래를 알고 있다!

“가만있자, 대륙력 984년이면 분명 토드가…….”

기억을 더듬던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분명 여기였어.”

바실리 왕국 중부에 위치한, 중앙 가도를 따라 차탄 공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하탄 산맥.

지도에 표시된 그곳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 ☆ ☆

하탄 산맥 기슭의 작은 산촌, 캐틀 마을.

대부분의 화전민의 마을이 그렇듯, 이곳도 악덕 영주의 가혹한 수탈에서 도망친 이들이 일군 마을이었다. 비좁은 농지를 일구어 아슬아슬하게 입에 풀칠을 해 가며, 가끔 사냥과 채집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 하지만 깊은 산속임에도 몬스터의 영역과 살짝 벗어나 있어 비교적 평화로운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빈곤한 평온 속에서 살아가던 이 캐틀 마을 사람들이 때아닌 재앙을 만난 것은 이틀 전이었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마을 회관 앞.

“위, 위험합니다, 촌장님.”

말이 좋아 회관이지 그냥 다른 집들보다 조금 더 큰 통나무집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캐틀 마을에서는 제일 화려한 이 목조 건물 앞에 네 명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 노인이 각오를 다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늙을 대로 늙어 얼굴에 삶의 풍상이 가득한, 참으로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난 괜찮네. 아무리 상대가 귀족이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촌장님…….”

걱정과 존경이 뒤섞인 시선을 뒤로하며 노인은 회관 앞에 허리를 숙인 채 말없이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번쩍거리는 갑옷을 걸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올해로 마흔셋이 되는 이 중년인은 대대로 알티온 후작가, 바실리 왕국 내에서도 유서 깊은 가문을 보좌하는 기사, 에드워드 경이었다.

“무슨 일이냐, 촌장?”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눈앞의 ‘때아닌 재앙’을 올려다보았다.

평화롭던 케틀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기사들, 화려한 갑옷에 준마를 끌고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온 이들은 자신이 왕도의 명문가, 알티온 후작가라 소개하며 대뜸 잠시 머무를 거처와 식량을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척 보기만 해도 살벌한 이 기사들 앞에서 고작 산골 촌민들이 감히 반항을 할 수는 없었다. 집 몇 채를 비우고 겨울을 날 식량을 모두 갖다 바쳤다. 스무 채도 안 되는 마을의 통나무집 중 커다란 집 다섯 채와 회관을 몽땅 차지한 뒤 이들은 계속 마을의 식량을 축내며 눌러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기사 갑옷만 걸쳤지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기사다운 점은 마을 여인들을 탐하거나 하지 않는 정도?

당연히 마을은 난리가 났다. 잘 살던 자기 집에서 쫓겨난 이들이야 다른 집에 잠시 얹혀산다 치더라도, 저들이 먹어 치우는 식량이 없으면 촌민들은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다. 여름이었다면 사냥을 하거나 나무 열매를 따서라도 어떻게든 연명했겠지만 지금은 한겨울이다.

그래서 촌장은 겁먹은 상태로도 어떻게든 이 기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저들에게서 식량값을 받아 내지 못하면 캐틀 마을은 이대로 전멸이었다.

“저기, 기사님들이 드신 식량을 값을 쳐주셔야…….”

“응? 아아.”

덜덜 떠는 촌장을 본 에드워드 경은 피식 웃었다. 위대한 기사의 행보에 한 손 거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다. 알티온 후작가의 행보가 영웅담이 되어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오르내리면 그 속에 캐틀 마을의 이름도 포함되는 크나큰 영광을 누리게 될 텐데 말이다.

‘하여튼 명예도 모르는 천한 것들이란!’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이 관대한 기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품을 뒤져 금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옜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촌장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노인의 표정에 에드워드는 턱을 매만지며 자신의 관대함을 한껏 만끽했다.

‘하긴, 이런 무지렁이 촌놈들이 어디 금화를 보기나 했겠어?’

그의 생각은 반은 맞고 맞은 틀렸다, 확실히 촌장은 금화를 처음 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금화에 대한 놀람과 감탄이 아니었다.

“기, 기사님. 이 정도로는 도저히 기사님들이 드신 밥값도 안 나옵니다요…….”

“뭣이라?”

순간 에드워드는 두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천한 것이 지금 기사를 상대로 흥정을 하려 한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 분노가 일었다.

원래 이런 화전민의 마을은 정식으로 영지에 포함되지도 않은 시골 중의 시골, 그러므로 기사가 아무 말 없이 촌민들을 싹 죽이고 약탈해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영주의 보호를 버리고 도망간 것들이니 바실리 왕국의 법도 그들을 가호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더니 이것들이 감히 흥정을 하려 해?

“네 이놈! 내가 귀족이라 시세도 모를 줄 아느냐?”

그가 이 마을에서 거둔 식량은 극히 질이 떨어져 고작해야 은화 백 닢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금화 한 닢이면 실로 자비를 베푼 것이다.

“예,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노인을 보며 에드워드는 확신했다. 이 더러운 늙은이가, 자신들 같은 화려한 기사들을 보니 아주 한밑천 단단히 뜯어내려는 비열한 생각을 품은 것이 틀림없었다. 감히 천민 주제에 귀족에게 바가지를 씌우려 해?

“기사를 우롱하려 하느냐!”

버럭 화를 내며 에드워는 노인을 한 대 후려쳤다. 뭐, 세게 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어리석은 촌민이라 해도 바실리 왕국의 국민인 것은 틀림없으니 죽일 순 없었다. 그냥 가볍게 주제 파악을 할 정도면 된다.

“에구구구구!”

비명과 함께 노인이 얼굴을 감싸며 쓰러졌다.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줄줄 흘러나왔다.

“촌장님!”

“아이고, 촌장님!”

떨어져 있던 촌민들이 허겁지겁 노인을 부축한다. 그 소란에, 회관 안에서 잘 생긴 20대 후반의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인가, 에드워드 경?”

“아, 별것 아닙니다, 스테반 공자님.”

청년이 나오자 에드워드 경이 흠칫 놀라며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알티온 후작가의 차남이자 레판토 자작의 작위를 지닌 이 청년, 스테반 폰 레판토 알티온은 귀족으로서도 그가 섬겨야 할 이였고 기사로서도 그의 상관이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놀라운 검술을 지녀 ‘단호斷乎의 기사’란 칭호마저 얻은 이 청년은 이미 바실리 왕국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하게 고했다.

“아니, 천한 것들에게 금전을 좀 하사했더니 모자라다고 난리지 않습니까?”

“얼마나 주었기에?”

스테반은 의아해했다. 그가 아는 에드워드 경은 호탕한 기사여서 결코 사례금을 인색하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산골에서 힘들게 사는 이들이 가여워 금화 한 닢을 내려 주었습니다.”

“응?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현명한 스테반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듣고 보니 실로 괘씸했다. 청년의 얼굴에도 분노한 기색이 떠올랐다.

“허, 우리가 취한 분량이면 금화 한 닢으로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참으로 비열한 것들이로다.”

스테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고도 감사를 받지 못한 수하 기사를 위로했다.

“이래서 천한 것들에게 함부로 자비를 베풀면 안 되는 법이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려 하니까.”

“공자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기사를 보며 노인은 눈물을 흘렸다.

아니! 운송비랑 인건비는 계산 안 하냐? 니들이 사는 도시에서야 이 정도가 금화 한 닢으로 충분했겠지만 여기서 식량값은 그 스무 배도 넘는단 말이다! 게다가 한겨울이라 식량 구입하려면 목숨 걸고 눈보라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고!

하지만 촌장은 항변할 수 없었다. 두꺼운 강철 건틀릿에 강타당해 그나마 몇 안 남은 이빨이 몽창 나가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데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실신한 촌장을 마을 촌민들이 울며 데리고 갔다. 무심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보다가 스테반은 다시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통나무로 대충 지어진, 휑하기만 한 회관 안에 놓인 가구는 볼품없는 침대와 테이블, 의자가 전부였다. 전부 이 마을에서 공수한 것이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스테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도에 있는 그의 침실과 비교하면 이건 창고나 다름없다.

‘하지만 진정한 기사라면 흙탕물 속에서도 잠들 수 있는 법이지.’

아, 이런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되다니! 스테반은 뿌듯해했다. 진정한 기사가 되어 가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항시 이런 곳에서 산다는 점은 싹 무시했다.

회관 안쪽에 로브를 걸친 30대 중반의 사내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스테반이 그를 불렀다.

“마법사 토드여.”

사내가 눈을 뜨고 잽싸게 고개를 조아렸다.

“예, 공자님.”

“유적의 위치는 아직이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산세가 험하고 겨울이다 보니 마나 기류가 고르지 못하여…….”

난처해하는 토드를 보며 스테반은 한숨을 쉬었다.

“빨리 좀 찾아 주시오.”

“예, 공자님.”

마법사를 한차례 더 닦달한 뒤 그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틀에 몸을 기대 눈 덮인 산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분명 이곳이 맞겠지?”

“확실합니다, 공자님.”

어느새 곁에 다가온 에드워드 경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꾸했다.

“이곳이 바로 위대한 검사, 클로드 폰 레오타스 알티온 경께서 묻힌 곳입니다.”

☆ ☆ ☆

크롬 시를 출발한 지 사흘째, 레펜하르트는 등에 작은 배낭 하나를 짊어진 채 중앙 가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좌우로 펼쳐진 눈 덮인 들판, 간간히 보이는 나무들도 가지가 앙상하다. 바실리 왕국을 십자 형태로 횡, 종단하는 이 중앙 가도는 한겨울이라 그런지 다른 이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경험 많은 행상들이라도 겨울에 자칫 눈보라를 만나면 길 위에서 객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감히 이 계절에 길을 걷는 여행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 미친 몸뚱이야 체력 하나는 끝내주니까.”

신경 쓰지 않는 것치고는 꽤나 복장이 충실하다. 그는 두꺼운 털가죽 코트에 목도리까지 두른, 겨울 길을 걷는 모범적인 여행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현재 그의 육체라면 이 정도 추위쯤은 산들바람이나 다름없으니 굳이 이렇게 방한에 대비한 복장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겨울에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면 얼마나 눈길을 끌 것인가? 역대 권왕들이야 근육미도 자랑할 겸 한겨울에도 웃통 벗고 싸돌아다녔다곤 하지만, 인간미가 남아 있다고 자부하는 레펜하르트는 되도록 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코트값은 조금 아깝군.”

이 옷값으로 은화 열 닢을 내고, 이것저것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났더니 이제 제라드에게 받은 여비는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이제 돈이야 금방 벌 수 있을 테니까.”

레펜하르트는 실실 웃었다. 전생의 그는 젊은 시절, 대륙 각지를 떠돌며 유적 탐사자로 이름을 드높였다. 그리고 그 정보는 고스란히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즉, 그는 향후 30년 이내에 새롭게 발견되는 모든 유적의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 유적에서 어떤 물품이 나오는지도 다 알고 있다! 한마디로 돈 되는 유적만 골라 다니며 쏙쏙 알맹이만 빼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것 참 우연이구먼.’

뺨을 긁으며 레펜하르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델피아의 마탑에서 한창 마법을 익히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마탑에 소속되어 있던, 유적 탐사를 전문으로 하는 토드란 마법사가 있었다. 어린 레펜하르트를 상당히 귀여워한 그는 마탑에 돌아올 때마다 자신의 무용담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그 속에는 알티온 후작가와 함께 탐사한 하탄 산맥 근처의 유적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날짜가 하필 내 하산 날짜랑 딱 겹친단 말이야.’

지금의 빙풍좌의 달 14일이니 토드라면 하탄 산맥 근처 산촌에 머물고 있을 시기였다. 하도 옛날 일이다 보니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는 건 무리였지만, 희대의 비기 ‘인공 주마등’이 있는 한 레펜하르트는 언제든지 과거의 일을 정확히 끄집어내 확인할 수 있다.

‘분명 토드 이야기 듣고 나이 먹은 다음 나도 직접 탐사 가 봤었지. 음.’

원래 고대의 유적은 대부분 지형이 복잡하기 마련이라 이미 탐사되었다 해도 놓친 부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하탄 산맥의 유적 역시 마찬가지여서, 토드 일행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쳤던 지하의 ‘진짜’ 유물들을 챙겨 꽤 큰돈을 만졌던 기억이 났다.

“나온 거 다 팔아서 거의 금화 이천 닢 넘게 벌었으니 꽤 짭짤한 유적이었지, 후후후.”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일부러 이쪽으로 행로를 잡았다.

하산 시기가 늦어져 이미 토드 일행이 유적을 털었다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지하 쪽 유적은 미탐사되었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유적 찾아가면 그만이다. 차탄 공국으로 가는 길목엔 레펜하르트의 기억 속에만 미발굴된 고가의(?) 유적이 네 개나 더 있었다. 시기가 안 맞았다 해도 돈 버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굳이 토드의 과거에 끼어들려는 이유는…….

‘이 기회에 이 시대의 내 몸에 대한 상황도 알아봐야지.’

토드는 어렸던 자신과 상당히 친했으니 이 시대의 레펜하르트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 그를 만나면 어느 정도 정보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계속 걷던 중이었다. 슬슬 지평선 너머 새하얀 산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 덮인 하탄 산맥이었다.

“슬슬 목적지가 보이는군.”

레펜하르트는 이동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무지막지한 도약력으로 가도를 순식간에 가로지르며 그는 하탄 산맥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레펜하르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으로 언덕 위에서 작은 산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도에서 한참 떨어진 이 하탄 산맥까지 가로지르는 데 30분, 그리고 이 험한 산을 타고 캐틀 마을까지 오는 데 30분 정도밖에 안 걸린 것이다. 말을 타고 달려도 이렇게까지 빨리는 못 온다. 마법사였던 시절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이동 속도였다.

살짝, 아주 살짝 제라드에게 감사하며 레펜하르트는 마을을 살펴보았다.

“기억 그대로네.”

캐틀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여전히 허름하고 여전히 초라한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20년 뒤에나 이곳에 오게 될 텐데 그때 기억과 지금 광경이 거의 차이가 없다니, 정말 깡촌은 깡촌이다.

들짐승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마을을 두른 부실한 목책, 그 안에 통나무집이 스무 채 정도 있고 한 가운데 커다란 회관이 세워져 있다. 그 회관을 노려보며 그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랄 타라 사키타 본. 매의 눈이 창공을 누빈다. 더블 와처.”

시야를 두 배로 늘려 주는 1서클 원견遠見 주문, 더블 와처를 구사하니 회관 내 정경이 꽤 가까이까지 보였다. 좀 더 높은 서클의 주문을 구사했다면 회관 안쪽도 투시해 살필 수 있었겠지만, 아직 그 정도 수준에 오르진 못했다. 대신 레펜하르트는 그 상태로 기척을 감지했다.

‘전사의 기운을 가진 인간 남자가 둘, 그리고 보통 남자가 둘. 하나는 소년이군. 그리고 오크가 셋이군. 노예겠지? 그리고 여자의 기척이 하나,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이 느껴지는 걸 보니 엘프 여성이군. 이놈, 슬레이어Slayer도 데리고 다니나?’

자고로 미녀이면서 전투에도 강한 여검사는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다. 하지만 인간 여인의 경우 아무래도 수준급 전사가 되고 나면 남잔지 여잔지 영 구별이 안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엘프의 경우는 다르다. 남자건 여자건, 어지간한 전사가 되어도 인간 기준으로 볼 땐 야리야리하고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법. 노예상들이 엘프들 중 재능이 있는 이들을 선별해 특별히 전투 훈련을 시켜 팔기 시작했다.

그것이 ‘슬레이어’였다.

미모의 여검사 엘프, 밤에는 성노로 쓰고 낮에는 호위로 쓸 수 있으니 효용도도 높고 무엇보다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다! 그렇다 보니 어지간히 고위 귀족이라면 슬레이어 하나쯤은 데리고 사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긴, 후작 가문 정도 되니 전용 슬레이어 하나쯤은 데리고 다니겠지.’

그는 계속 마을을 살폈다. 캐틀 마을 간의 거리는 거의 3~400미터, 이 정도면 아무리 그의 감각이 예민해도 기척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현재의 마법 역시 초보적 수준이라 저기까지는 닿지 않는다. 하지만 무인 특유의 감각과 마법이 결합하니 어지간한 중급 이상의 원견 주문 효과가 나왔다.

‘집집마다 전사의 기운을 가진 놈들이 다섯이 더 있군. 들었던 대로네.’

예상대로 알티온 후작가는 저 캐틀 마을에 묵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는 턱을 매만졌다. 단지 돈을 챙길 목적이면 저들을 앞질러 먼저 유적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떠나길 기다려 나중에 가거나 하면 되겠지만 그는 지금 토드에게 정보를 얻어 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나 당신들 일행에 좀 끼워 주쇼.’라고 해 봐야 미친놈 취급을 당할 뿐이다. 핑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 핑계를 생각해 두었다.

‘어디 보자…….’

레펜하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마을 외곽의 그럭저럭 큰 통나무집, 그곳에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과 분노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캐틀 마을에서 제일가는 사냥꾼, 테드의 오두막에 지금 십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오?”

모두들 얼굴 가득 수심이 깃든 모습이었다. 마을을 점거한 저 알티온인가 뭔가 하는 후작가가 식량과 물품을 빼앗아 가고 촌장님을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다시 과도한 요구를 해 왔던 것이다.

“죽음의 골짜기는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곳인데…….”

캐틀 마을로부터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죽음의 골짜기’라 불리는 금지된 계곡이 하나 있다. 실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지명이지만 촌사람들이 붙인 이름에 대단한 것을 바라면 안 되는 법이다. 하여튼 근처만 가도 사람들이 족족 죽어 나가다 보니 캐틀 마을 내에선 벌써 몇 세대째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단단히 박힌 곳이었다.

그런데 저 기사 놈들이 거기까지 길 안내를 할 산사람 하나를 보내라며 요청을 한 것이다. 말이 좋아 요청이지 그냥 명령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절대 안 된다며 울상을 지어 보았지만…….

“놈들이 길잡이를 하나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소? 거절하면 어찌 될지 몰라서 그러오?”

얼굴 반쪽이 퍼렇게 멍든 중년인 하나가 눈두덩을 매만지며 소리를 질렀다. 마을 대표로 가서 울상 짓다가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촌장님도 저렇게 되셨는데…….”

“에잇, 더러운 귀족 놈들.”

“입조심하시오! 저들이 들었다간 어찌 될지 모르오?”

“크으윽!”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럽고 또 서러웠다. 힘이 없어 여기까지 쫓겨 온 더러운 팔자이거늘, 여기에서조차 힘이 없어 이런 꼴을 당하고 만다.

침울한 분위기가 오두막을 가득 메웠다. 한참 후, 제법 건장한 장년인 하나가 각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갔다 오겠소.”

“테드! 자네가?”

“그래도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 산을 잘 타잖소. 나 말고는 어차피 갈 사람도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소.”

그러니까 다른 집 놔두고 우리 집에서 이딴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테드는 원망의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네가 가라, 응?’이라는 티를 대놓고 내고 있었으면서 뭔 회의는 회의야?

테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어 놓았던 활을 집어 들었다. 그 당당한 모습에 곁에 서 있던 아낙네와 작은 소녀가 놀라 외쳤다.

“여보!”

“아빠!”

걱정 가득한 가족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도로 몸이 굳는다. 테드는 이를 갈았다.

“크윽…….”

분위기 타서 남자답게 일어나긴 했는데 정작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가기 싫다. 정말 가기 싫다. 마누라랑 자식 놔두고 그 위험한 곳에 가긴 절대 싫다. 그는 사냥꾼이었고, 그렇기에 죽음의 골짜기에 대한 위험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다.

활을 집으려다 말고 테드가 주저하자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더더욱 반짝반짝 빛난다. 활을 잡아, 테드! 자네는 사나이가 아닌가!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되는 법일세!

어째 슬슬 협박 분위기가 되어 가는 오두막 안, 그렇게 테드가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창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제가 갈까요?”

“누, 누구요?”

모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혹시 기사들 중 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나? 다들 안색이 새파래졌다. 안 그래도 더러운 귀족이니 뭐니 욕을 하고 있던 차였다. 저 기사들의 인격을 고려해 볼 때, 그냥 웃고 넘어갈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한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사가 아니었다. 꽤나 날카로운 인상을 한, 두꺼운 코트 차림의 못 보던 청년이었다.

창문을 통해 청년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지나가던 여행자입니다. 우연히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요.”

우연이라니? 세상 어느 여행자가 우연히 남의 집 처마 밑에 고개를 내민다냐? 말도 안 된다는 걸 마을 사람들도 알고 저 여행자도 알았지만, 다들 무시했다.

그보단 여행자가 내뱉은 말이 더 중요했다. 테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 근처 지리를 알고 계시오?”

“상당히 잘 알죠.”

이미 한 번 와 봤으니까.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인공 주마등으로 깔끔하게 되살렸으니까.

“그럼 정말 죽음의 골짜기로 가겠다는 겁니까?”

“예전에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20년 후의 미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만.

테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복 받을 거요, 젊은이.”

마을 사람들 모두 기쁜 얼굴로 레펜하르트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금만 생각이란 걸 해 보면 무지하게 수상한 상황이란 걸 바로 느낄 텐데, 경계는커녕 대뜸 믿어 버린 것이다. 역시 산골에서 순박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이라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순박한 사람들답게 바로 레펜하르트를 걱정해 주긴 했다.

“하지만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소이다. 정말 괜찮을는지…….”

“한번 가 봤다니까요?”

태연한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다들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화색이 된 테드가 허겁지겁 문으로 달려갔다.

“그, 그럼 당장 저들에게 알리겠소이다!”

아무래도 신께서 내려 주신 이 구원자가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기사들에게 알려서 기정사실로 만들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분명 순박하긴 한데, 만만찮게 치사함도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끄러미 달려가는 중년 사냥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드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저 사냥꾼은 유적 근처까지 가서 결국 몬스터의 습격을 받게 되고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저 기사들은 이런 무지렁이 촌민의 안위까지 신경 쓰진 않았던 것이다.

‘운 좋은 줄 알라고. 죽을 목숨 하나 살려 주는 거니까.’

2

대륙력으로 930년 전후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바실리 왕국 알티온 후작가에 클로드라는 뛰어난 기사가 있었다.

그는 기사도로 명성 높은 알티온 후작가에서도 특별히 강한 기사였다. 무려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해 초인적인 힘을 발하는 놀라운 검술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지금도 바실리 왕국 내에 오러를 각성한 무인은 기사단장 탈리온 경을 포함 세 명뿐이니 클로드의 무력이 어느 정도였을지 익히 짐작이 가리라.

뛰어난 능력에 걸맞게 그는 온갖 모험을 해냈고 그 영웅적 행적이 바실리 왕국 전역에 울렸다. 사람은 자고로 너무 띄워 주면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법이다. 영웅이라 떠받들리던 클로드는 점점 콧대가 높아졌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다.

하탄 산맥 인근을 지나다 우연히 주워들은 죽음의 골짜기, 그곳이 고대의 유적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대뜸 유적의 보물을 자신의 군주, 바실리 국왕에게 바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뭐, 여기까지야 기사다운 좋은 판단이겠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하도 잘났다고 주위에서 떠드니까 정말 잘난 줄 안 그는 그 유적에 종자 하나만 달랑 데리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고대의 유적, 보통 던전dungeon이라 불리는 이것은 잊힌 아득한 고대, 은銀의 시대가 남긴 잔재다.

고도의 마법 문명이 발달해 인류가 신과도 같은 힘을 얻었다던 은의 시대, 이 위대한 문명이 어떤 연유로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여러 가설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유적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의 잔재물을 손에 넣고 그 위대한 문명을 찬양할 뿐이다.

그리고 이 던전 탐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의 시대 마법 문명이 지닌 놀라운 힘은 현세를 일그러뜨릴 정도라 남겨진 유적 대부분이 차원 간에 걸쳐져 심각하게 공간 왜곡이 되어 있었다. 노출된 마력은 평범한 짐승을 가공할 괴물로 바꾸고 차원 틈새로 스며드는 이계의 기운은 각종 마물과 사령들을 이끄니, 유적을 한 번 탐사하기 위해선 제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홀로 발 디뎌서는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곳을 제 잘난 맛에 종자만 데리고 홀랑 들어갔으니 그 결과가 실로 뻔하다. 클로드는 죽도록 싸웠고, 정말로 죽어 버렸다. 문제는 그가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알티온 후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강력한 마검 ‘알티온’을 들고 가서 죽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마검 알티온은 검에 걸린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알티온 후작가의 상징이었다. 그걸 들고 가서 잃어버렸으니 후작가에서 난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도 클로드가 대체 어디서 죽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단서라고는 간신히 살아남은, 하지만 극심한 공포로 미쳐 버린 그의 종자가 떠듬떠듬 내뱉는 헛소리가 전부였다.

몇 마디 안 되는 헛소리에 의지해 알티온 후작가는 50년에 걸쳐 클로드의 묏자리를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결국 대륙력 984년, 이곳 하탄 산맥에 그 유적이 있음을 알아내고 바로 가문의 보검을 회수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그 손자뻘 되는 게 저 녀석이라…….’

레펜하르트는 토드에게 들었던 옛이야기를 떠올리며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앞에 화려한 갑옷을 걸친 채 산길을 걷고 있는 잘생긴 청년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스테반 폰 레판토 알티온. 그는 여섯 명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인상을 쓰며 걷고 있었다. 이런 산속에서 말을 몰 수는 없으니 캐틀 마을에 맡겨 놓고, 걸어서 ‘죽음의 골짜기’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사는 말 위에 올라야 진정 기사인 법, 화려한 갑옷을 입고서 걸어서 움직이는 자신이 한심스러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애교 어린 얼굴로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엘프 여인이 한 명.

“주인님, 말을 타지 않아도 주인님의 우아함은 전혀 퇴색되지 않으세요. 과연 기사 중의 기사세요.”

“하하, 그 말을 들으니 좀 기분이 나아지는구나, 렐시아.”

스테반이 실실 웃으며 엘프 여인의 엉덩이를 쓰다듬는다. 백주 대낮에 여성을 희롱하고 있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는 놈이나 당하는 년이나 보는 놈들이나,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다.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레펜하르트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륙 전체의 가치관이 저러니 어쩌겠냐마는.’

저런 광경에 일일이 화를 내면 아예 세상을 돌아다닐 수도 없다. 그나저나 저 스테반이란 놈도 웃긴다. 노예인 렐시아가 오로지 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말만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히히덕거리고 있다.

‘애송이구만.’

레펜하르트는 바로 스테반에게서 신경을 껐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 명의 오크 노예들이 기사들의 물건을 짊어지고 산길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 옆에 두 사람이 뭔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 토드와 붉은 머리를 길게 기른 예쁘장한 소년이었다.

‘이름이 실란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그냥 여자애인 줄 알았다. 그만큼 저 실란이란 소년의 미모는 장난이 아니었다. 왕년, 소년일 적의 레펜하르트도 예쁘장하다는 소리 꽤나 들었지만 (물론 전생일 때 이야기다.) 저렇게 성별이 구별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단련된 무인으로서의 감각이 남자임을 알려 주고 있을 뿐, 눈으로 보면 여전히 미모의 소녀로만 보였다.

그리고 저 소년은 미와 자애,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의 성직자이기도 했다. 클로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알티온 후작가는 가문의 강한 기사들을 대거 내보내는 한편, 유적 탐사가인 경험 많은 마법사와 성직자도 동원한 것이다. 신의 축복을 받아 각종 치유술과 강화술을 구사하는 성직자의 존재는 유적 탐사에 있어 필수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저 나이에 제대로 된 신성 주문을 쓸 수 있나?’

토드를 상대로 화사하게 웃으며 계집애처럼 떠들고 있는 실란을 보니 영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알티온 후작가에서 어설픈 성직자를 받아들였을 리는 없으니 꽤 실력은 있을 것이다.

뭐, 나이 어리다고 꼭 약하란 법도 없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도 소년 시절 이미 어지간한 정식 마법사 수준이었고, 지금의 그도 고작 20대 초반에 이미 오러 유저가 아닌가?

레펜하르트는 곧 토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이 일행에 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토드에게 현세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적당히 기회를 봐서 말을 붙여 봐야겠는데…….’

아까부터 계속 저 계집애 같은 성직자 소년과 쉴 새 없이 떠들다 보니 통 기회가 안 온다. 마치 어릴 적 자신에게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제3자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어째 기분이 묘한 것이…….

‘헉! 토드 저 인간, 혹시 남색에 취미 있었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칫했으면 어릴 적 자신도…… 실제로 남성 비율이 높은 마탑에서는 온갖 괴이한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레펜하르트는 다행히 그런 경험이 없었지만 그래도 막상 생각해 보니 소름이 끼친다.

‘에이, 설마. 토드 저 사람, 꽤 좋은 양반이었어. 그럴 리 없을 거야.’

애써 가설을 부인하며 고개를 젓고 있는데 에드워드 경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참으로 훌륭한 선택을 하셨소, 여행자여.”

“길 안내하는 것이야 별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요.”

대수롭잖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에드워드 경은 후후 웃었다.

그는 호감 가득한 얼굴로 이 용감한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저 어리석은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지인 고대의 유적 ‘팔톤’으로 길 안내를 하는 걸 극도로 거부했던 것이다.

솔직히 에드워드 경은 설마 거부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니, 같이 유적에 들어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근처까지만 안내해 달라는 건데 그것도 무서워서 못 하겠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엄살 피우는 중년인 한 대 툭 쳐 주고 내심 고민도 했었다. 지리를 아는 자가 길 안내를 해야 헤매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고, 그래야 그가 섬기는 스테반 공자님이 흡족해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싫다는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가기엔 또 기사도에 어긋난다. 기준이 좀 편협하긴 해도, 기사도에는 엄밀히 약자를 보호하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힘으로 누르는 것은 기사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 전에 한 대 툭 친 것은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이에 대한 가벼운 가르침이지, 힘으로 누른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에드워드 경이었다.

그래서 이 충성스러운 중년 기사가 끙끙대고 있는데 때마침 용감한 여행자가 대신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실로 반가운 일이었다.

“쯧,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겠죠.”

슬쩍 레펜하르트가 마을 사람들 편을 들자 에드워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허! 왕국의 용맹한 기사들이 함께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단 말이오? 그야말로 무지몽매한 것들이로다. 쯔쯔, 하여튼 그대의 도움에 알티온 후작가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오.”

이 용감한 젊은이에게 치하를 마친 뒤 에드워드는 다시 스테반 곁으로 걸어갔다. 땡전 한 푼 안 주고 그냥 입으로만 때우면서도 상대의 용맹을 칭송했으니 도리를 다 했다고 굳게 믿는 점이 실로 기사다웠다.

‘하여튼 기사란 것들은…….’

레펜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세상 기사들이 다 저런 건 아니지만 원래 기사란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저런 오만불손한 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기사도란 것 자체가 훌륭한 나르시시스트 육성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명예 타령하는 점부터가 이미 글렀다. 즉, 세상에 잘난 척하지 않는 기사 따윈 없다. 정말 인간이 잘나서 그게 잘난 척이 아니게 된 기사는 있어도.

물론 개중엔 현실 감각이 있어 제정신 제대로 박힌 훌륭한 기사도 제법 있지만, 아무리 봐도 저 작자들은 그 케이스는 아니다.

기사는 오만하고 마법사는 편협하며 성직자는 고지식하다.

대륙에 떠도는 이 편견 가득한 격언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것이다. 솔직히 레펜하르트 자신도 이종족들을 만나기 전엔 상당히 편협한 사고의 소유자였으므로 남 탓하기도 좀 그랬다.

그렇게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문득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뭔가가 숲 너머 하늘로부터 맹렬히 날아온다.

‘아, 이게 그거군. 사냥꾼이 죽었다는 그…….’

잠시 후, 앞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습격이다! 대열을 갖춰라!”

☆ ☆ ☆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운다. 날카로운 울음이 귀청을 찢는다. 여인의 얼굴에 새의 몸, 강철의 깃털을 가진 비행형 몬스터, 하피harpy였다. 육식을 하는 하피들은 보통 절벽 근처에서 서식하지만, 특히나 인육을 좋아해 인간만 보면 습격하곤 한다. 그 하피들이 수십 마리가 넘게 몰려와 산길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꺄아아아아!”

여인의 비명을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하피 중 하나가 스테반을 노리고 발톱을 들이댔다. 긴장한 얼굴로 스테반이 검을 뽑았다.

“더러운 마물이 어찌 세이어의 가호가 깃든 인간을 노리느냐!”

고풍스러운 말투와 함께 스테반이 사선 베기의 2연격을 날렸다. 절도 있는 자세에 빠른 검격, 단숨에 날아든 하피의 양 날개가 절단되며 피를 흩뿌렸다.

“끄아악!”

동료의 비명에 다른 하피들이 흉흉한 기세를 띄운다. 날갯짓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하피들이 일제히 스테반 일행의 머리 위로 쇄도해 왔다. 스테반이 검을 휘둘러 검신의 피를 바닥에 뿌렸다. 애교 어린 태도로 아양을 떨던 엘프 여인, 렐시아도 어느새 싸늘한 얼굴로 단검을 든 채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알티온 기사단! 적을 격퇴하라!”

스테반의 외침과 동시에 기사들의 검이 눈부신 검광을 뿌려 대기 시작했다. 선두로 돌격한 하피들이 연이어 피를 뿌리며 추락한다. 생각보다 기사들이 만만치 않자 후위에 있던 놈들이 맹렬히 날갯짓을 해 댔다. 강철 같은 깃털이 화살처럼 쏘아져 기사들을 덮쳤다.

타타탕!

격중당한 갑옷이 찌그러지는 것이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기사들이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는 동안 에드워드 경이 소리쳤다.

“토드 경!”

“알겠습니다!”

미리 마법을 영창해 놓았던 토드가 타이밍 맞춰 손을 내뻗었다.

“파이어 체인!”

불길의 사슬이 하피들을 휘감고 연달아 타올랐다. 하늘 전체가 불길로 가득 차 붉게 물들었다. 뒤이어 실란도 기도문을 외우며 기사들에게 여신의 가호를 내렸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허락하소서!”

기사들 몸 주위로 빛이 나며 기력이 솟아났다. 다시 힘을 얻은 기사들이 방패 채 하피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타아아앗!”

한편, 레펜하르트는 길가에 선 채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다들 실력이 꽤 좋은데?’

특히 저 스테반이란 애송이, 생각했던 것보다 검술이 꽤 훌륭했다. 역시 무술과 인격이 비례한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다. 하긴, 오러 유저였던 클로드 경이 죽음을 당한 유적이다. 어설픈 실력자를 보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내가 보기엔 다들 엄청 어설퍼 보인단 말이지.’

새삼스러운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기사들, 특히 스테반의 움직임을 보았다. 확실히 그는 저들 중에서도 발군,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눈엔 그야말로 사방 천지가 허점이었다. 맘먹고 붙으면 10초 내로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력이 꽤 좋다고 판단한 것은 마법사로서의 레펜하르트.

다들 엄청 어설퍼 보이는 것은 무투가로서의 레펜하르트.

‘사부가 괜히 잘난 척한 건 아니었나.’

물론 미래의 권왕이 될 육체이니 레펜하르트 자신도 스스로가 약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단 오러를 각성한 시점에서 저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하지만 제라드 외에 다른 무사를 본 적이 없는, 그리고 전생에서는 마법사였기에 상대의 수준을 정확히 알아볼 눈이 없었던 레펜하르트는 지금 처음으로 ‘무인’의 눈으로 다른 무인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자신의 강함을 처음으로 실감했달까?

‘그나저나…….’

그는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짐을 들고 있던 오크 노예들이 몸을 웅크리고 나무 밑에 그 덩치를 쭈그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야말로 독수리 만난 토끼 같은 모습이다. 아무리 용맹한 전사의 종족이라도 어릴 적부터 노예로 자라나면 저렇게 되는 것이다.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그것참, 아무도 안 챙겨 주네.’

열심히 싸우는 건 좋은데, 저 기사들은 오크 노예나 레펜하르트에 대해선 아예 관심을 끊고 있었다.

‘이러니 그 사냥꾼이 죽었지.’

저 인간들이 딱히 나쁜 놈들이라기보다는, 그냥 평소에 남 챙겨 주는 버릇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음,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나쁜 놈이란 소리잖아.’

그때 저만치 떨어진 실란이 멀뚱히 서 있는 레펜하르트를 보고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위험해요!”

‘쟤는 좀 낫네.’

“나무 뒤로 숨어요!”

연이어 신성 주문을 뿌리며 실란이 초조하게 외침을 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느긋하게 나무 뒤로 돌아가 슬쩍 쪼그려 앉았다. 하피들이 공격 패턴을 바꾸기로 결심했는지 일제히 날아올라 깃털을 화살처럼 날려 댔다.

“꺄아아아아!”

강철의 깃털 화살들이 시야를 전부 뒤덮는다. 그 범위는 가공해서 기사들과 토드, 실란은 물론 레펜하르트와 오크 노예들에게도 날아왔다.

슈우우욱!

날아오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레펜하르트는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툭툭툭.

코트 위로 뭔가가 슬쩍 부딪쳤다가 떨어진다. 갑옷도 우그러트리는 저 공격도 그에겐 가벼운 안마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쩝.”

입맛을 다시며 레펜하르트가 슬쩍 허공에 펀치를 날렸다. 짧게 끊어 치는 잽에 가까운 권격, 순간 권풍이 불어 오크들의 급소로 향하던 깃털들을 휘감았다. 깃털들이 죄다 궤도에서 벗어나 빗나가 버렸다.

‘뭐, 팔다리에 몇 대 맞긴 했지만 오크의 강인함이면 저 정도로 죽진 않겠지.’

잠시 후, 사방이 피가 튄 채 하피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끼익끼익!”

“꺄아아악!”

검을 거두고 숨을 돌리며 스테반이 소리쳤다.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모두 무사한가?”

에드워드 경이 호탕하게 대답했다.

“알티온 기사단은 강합니다!”

수십 마리나 되는 하피들을 상대했음에도 다들 멀쩡한 모습이었다. 개중에 화살에 스쳐 얼굴이며 팔 등에서 피를 흘리는 이도 몇 있었지만 전부 찰과상일 뿐이었다.

안도하며 스테반이 다시 물었다.

“마법사와 신관은?”

“두 분 다 무사합니다!”

“좋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테반은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호쾌하게 소리쳤다.

“이동한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휴식을 취하고 승리를 축하하자!”

“예! 공자님!”

승리는 언제나 쾌감을 준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사기가 오른 기사들이 모두 검을 들고 고함을 질렀다. 실로 호쾌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중얼거렸다.

“어이, 내 안전은 묻지도 않냐? 게다가 오크들은 꽤 다쳤는데?”

물론 작은 목소리여서, 한참 신이 난 기사들 그 누구도 그의 중얼거림은 듣지 못했다.

☆ ☆ ☆

레펜하르트는 스테반 일행을 길목에 있는 작은 공터로 안내했다. 그리고 거기서 간단히 비상식량을 꺼내 먹으며 다들 휴식을 취했다.

마법을 구사했던 토드가 들끓는 마력을 가라앉히기 위해 명상에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기회다 싶어서 레펜하르트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응? 무슨 일인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토드가 그를 노려본다. 항상 토드의 웃는 얼굴만 봐 왔던 그에겐 참 생소한 표정이었다. 조금 당황하며 레펜하르트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까 마법사님 덕분에 살아나서 감사를 표하려고요.”

생각해 보면 토드는 그를 챙겨 주지도 않았으니 감사하고 말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인사 듣고 기분 나쁜 인간은 없는 법이다. 토드의 표정이 좀 풀렸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음, 뭐. 별것 아닌 걸 가지고.”

기회다 싶어 레펜하르트는 토드 옆으로 달라붙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니 무심코 전생의 습관이 나온 것이었는데, 어째 기억과 달리 토드는 영 거북해하며 그를 피했다. 하기야 지금의 그는 신장 1.9미터의 거구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마법사님께선 델피아의 마탑에 속해 계시다는 소릴 얼핏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그런데 왜?”

“거기에 제가 아는 애가 하나 있거든요.”

“아는 애?”

“네, 친구인데…… 레펜하르트라고 혹시 아시는가 해서.”

본인을 제3자처럼 칭하자니 영 어색했지만 그는 열심히 표정을 관리하며 토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토드의 표정이 풀리며 뭔가 아련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 레펜하르트 말인가?”

그러더니 문득 쌍심지를 켠다.

“그 아이에게 자네 같은 우악스러운 친구가 있었나?”

아니, 그럼 미소년은 미소년끼리만 우정을 쌓을 수 있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토드의 발언에 순간 기가 막혔지만 레펜하르트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토드가 턱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 아이, 참 귀엽고 착한 아이지. 흘흘흘.”

어째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리는 웃음소리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왜?”

“아,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요. 별 일 없습니까?”

“응? 여전히 마탑에서 마법 배우면서 잘 지내지. 왜?”

아무래도 제대로 의사 전달이 안 된 것 같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물었다.

“아뇨, 그러니까 요 몇 년간 무슨 이상한 일 없었나 해서요.”

“이상한 일? 모르겠는데?”

다시 토드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음흉한 미소는 주로 미녀를 바라볼 때 남자들이 주로 짓는 그 표정이다!

“여전히 콧날도 오똑하고…… 눈동자도 보석 같고…… 피부도 매끈하고…… 잘 지내고 있는데 왜?”

“아니, 무슨 태도 같은 것에 변화가 있다든가 이런 건 없었습니까?”

“모르겠는데? 그 애가 뭘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어서.”

순간 레펜하르트는 깨달아 버렸다. 제라드와는 다른 의미로 육체만 중시하는 놈이다, 이놈은!

그는 고뇌했다.

‘아, 신이시여. 어찌해야 합니까? 그냥 여기서 상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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