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산속의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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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잠된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단절되었던 감각이 다시 깨어난다. 레펜하르트는 눈을 떴다. 어둡던 시야가 밝아지고 흐릿하게나마 사물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련히 귓가를 간질인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얼굴을 매만진다. 몸을 감싼 포근한 천의 촉감이 생생하다. 이 소리, 이 따스함, 이 포근함…….
‘나, 아직 살아 있는 건가?’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난 듯한 평범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머리가 맑아지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권왕 테스론에 의해 다 죽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전신에 활력이 넘칠 리가 없었다.
확실했다. 자신은 살아 있었다.
‘맙소사, 정말 성공한 건가?’
반도 채 해독하지 못했던 시공 회귀 주문이었다.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라 무턱대고 시전하긴 했지만, 레펜하르트 본인도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마법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면 꽤나 훌륭하게 성공한 것 같지 않은가!
“우와, 내가 아무리 천재라지만 그래도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오만한 건지 겸손한 건지 모를 애매한 대사를 내뱉으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과연 얼마나 과거로 되돌아온 건지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런데…….
“대체 여기가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던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어째 주변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통나무로 지은 넓은 방에 가구라고는 옷장 하나와 책상 하나, 그리고 레펜하르트가 누워 있던 커다란 침상이 전부였다. 여기까지는 그냥 소박한 침실처럼 보이겠지만 특이한 것은 방은 싸구려인데 들여놓은 가구들은 하나같이 고급이라는 것이었다. 옷장도 책상도 귀족들이나 쓸 법한 고급스러운 물품이었고 침상도 박달나무로 튼튼하게 짜 맞춰 질 좋은 면을 씌우고 멋지게 금박까지 한 호화품이었다. 심지어는 워낙 고가라 귀족들이나 쓴다는 유리거울마저도 벽 한쪽에 매달려 있었다.
‘뭐야, 이건?’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장소는 기억에 없었다. 시공 회귀 주문이 성공했다면 그는 과거의 어느 한 지점으로 돌아와 있어야 했다. 어린 시절이건 젊은 시절이건 간에, 돌아왔다면 그 장소가 기억 속에 있어야 했다.
단언컨대, 이렇게 언밸런스한 인테리어 속에서 살았던 기억은 결코 없었다.
“끄응…….”
레펜하르트는 미간을 짚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혼란 속에서 그는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어쨌거나 주문이 먹힌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고…… 그럼 문제는 과연 자신이 몇 년이나 과거로 회귀한 건지, 지금이 대체 몇 살 때인지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선 순간.
“커억!”
레펜하르트는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저놈?”
거울 너머로, 갈색 머리를 짧게 깍은 건장한 체구의 소년이 웃통을 벗은 채 자신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열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 얼굴이 너무 앳되어 소년이라고 하긴 했는데, 사실 체구만 보면 어지간한 장정도 울고 갈 거구였다.
키는 족히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고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는 투박한 손에 근육질 팔뚝. 두꺼운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은 돌처럼 단단해 서로 부딪치면 불꽃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고 복근은 아주 네모반듯하게 윤곽이 뚜렷한 것이 이게 정말 사람 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리석으로 조각을 해도 저 정도까지 식스 팩을 선명하게 나눠 놓으면 비현실적이라고 욕먹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저렇게 근육질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8등신의 균형 잡힌 몸을 하고 있어 뚱뚱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무인의 육체랄까?
물론 이상적인 마법사를 추구하는 레펜하르트 눈에는 그저 단순 무식하고 우락부락한 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뺨에 손을 올렸다. 거울에 비친 소년도 뺨에 손을 올렸다.
“하…… 하하…….”
패닉에 빠진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거울 속의 소년도 헛웃음을 흘렸다.
틀림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근육질 소년이 바로 자신이었다!
기가 막힌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누구냐…… 너…….”
☆ ☆ ☆
레펜하르트는 연신 거울 앞에서 얼굴을 만져 보았다. 거울 속 순박한 인상의 근육 소년이 자신을 따라 하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린 시절의 그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상당히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이기도 했다. 늙어서는 중후한 멋을 풍기는 로맨스 그레이가 되어 숫한 엘프 미녀들의 마음을 홀렸던 전적도 있었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결코 저렇게 미련한 얼굴이었던 적은 없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거울 속의 저 소년도 그리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미남형이 아니라 호남好男형이랄까? 하지만 원체 본체의 미모도가 높았던 레펜하르트의 눈에는 그냥 머슴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역시 시공 회귀 주문이 실패한 건가? 그래서 과거의 자신이 아닌, 엉뚱한 놈의 육체로 들어간 건가? 아니, 그럼 아예 여기가 과거가 아닐 수도 있잖아? 혹시 미래의 누군가에게로 영혼만 바뀌어 들어온 건가?
아무리 추리를 해 보려 해도 단서가 전무하니 답이 나올 리 없다. 그렇게 낑낑대고 있는데 문득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이색을 띠었다.
‘그러고 보니 어째 얼굴이 좀 낯익은 것 같기도…….’
이상하다. 왠지 어디선가 본 얼굴인 것 같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분명 생소한데도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저 짙은 갈색 눈썹, 강인해 보이는 눈매, 고집스럽게 닫힌 입가.
그래, 저기서 덩치가 더 커지고, 근육이 더 부풀고, 철사 같은 수염이 턱을 뒤덮으면…….
“권왕 테스론?”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웅장한 목소리가 그의 추론을 확실히 뒷받침해 주었다.
“테스론, 이놈아! 해가 중천에 떴다! 어서 나오지 않고 뭐 하는 거냐!”
고개를 돌린 순간, 레펜하르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허어억!’
소리친 것은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신장 2.5미터에 터질 듯한 근육이 온몸을 뒤덮어, 저게 사람인지 아니면 석상에 살색 칠한 건지 구분조차 안 가는 저 괴수를 노인이라 칭할 수 있다면 말이다.
노인이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눈앞을 뒤덮는 근육의 먹구름에 레펜하르트는 기겁했다. 오우거나 미노타우르스 같은 거대 몬스터도 숫하게 다뤘던 그였지만 이 노인은 차원이 달라 보였다. 적당히 지방도 끼고 똥배도 나와 준 그놈들의 육체는 비록 덩치는 커도 그럭저럭 인간미가 있었다. 반면 이 노인은 정말이지 전신이 네모반듯하고 근육선이 뚜렷해 한 치의 불필요한 지방도 없다. 그놈들이 푸석한 사암이라면 이쪽은 단단한 거암 같달까? 그토록 우락부락해 보였던 현 레펜하르트의 육체, 어린 테스론조차도 저 노인에 비교하면 깡마르고 초췌한 소년이었다. 이래서 상대 평가란 무서운 것이다.
눈부신 백발에 은색 수염을 휘날리며 노인이 호쾌하게 웃었다.
“자,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시작해 보자꾸나, 허허허허!”
한때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대명사, 마왕 레펜하르트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그는 미처 몰랐지만 노인의 정체는 소년 테스론의 사부이자 대륙 최강의 무투가로 이름 높은 당대의 권왕, 제라드 크롬 프로테이스였다.
☆ ☆ ☆
제라드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테스론을 수행시키기 위한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평소와 달리 테스론이 수련장으로 기어 나오질 않았다. 분노한 그는 바로 이 불초 제자를 잡으러 달려갔다. 시간은 금이거늘 어찌 1분인들 낭비할 수가 있단 말인가?
바로 제자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제자가 거울 앞에서 몸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라드의 기분은 바로 풀렸다. 아침부터 저렇게 전신 근육을 점검하는 모습을 보니 실로 흐뭇했다. 보다 아름다운 육체를 가꾸기 위해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기도 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소리쳤다.
“자,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시작해 보자꾸나, 허허허허!”
그런데 어째 제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처럼 이를 득득 갈며 무서운 불길을 피우는 눈이 아니었다.
“누, 누구세요?”
“음? 오늘따라 왠지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구나?”
제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자가 다시 말한다.
“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데…….”
제라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테스론아, 테스론아. 기억상실 핑계는 벌써 두 번이나 써먹지 않았느냐. 그 정도로 안 통한다는 것쯤은 알 텐데? 쯔쯔.”
제자가 입을 쩍 벌린다. 기가 막힌다는 표현인 듯했다. 이번엔 제법 표정이 생생한 것이 꽤 실감이 났다. 연기력이 많이 는 것 같았다.
제라드는 혀를 찼다. 하지만 제자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무문武門, 짐 언브레이커블Gym unbreakable의 수행법이 가혹하다는 것은 제라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한창 사부 밑에서 수행할 땐 온갖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도망가려고 수를 썼으니까.
하지만 결국 경지에 오르고 나면 다 이 수련법의 효과를 몸소 느끼며 사부의 심모원려한 뜻에 감동하기 마련이다. 그때까진 억지로라도 제자를 상승의 경지로 이끄는 것이 사부의 책임인 법!
제라드는 바로 손을 뻗어 제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미 성인 장정의 체구를 능가한 제자였지만 신장 2.5미터의 그에겐 여전히 작은 소년이었다. 쉽사리 뒷목을 ‘한 손으로’ 붙잡고 들며 제라드가 유쾌하게 말했다.
“자, 수련장으로 가자꾸나!”
☆ ☆ ☆
깊은 산속, 온갖 활엽수가 우거진 그 산 능선 중간쯤에 두 채의 통나무집과 커다란 공터가 하나 있다.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대로 대륙 최강의 무투가를 배출해 낸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이 자리한 곳이다.
레펜하르트는 노인, 제라드에게 뒷목이 잡힌 채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 자세로 공터로 실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미에게 물려 이동하는 새끼 고양이의 심정을 절실하게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발버둥 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이 근육 노인네는 그저 한 손만으로도 모든 발버둥을 가뿐히 제압하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레펜하르트의 입은 쉬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였고, 마법사는 모든 일처리를 주둥이로 하는 습관이 깊게 배어 있다.
“이, 이보시오, 노인장!”
“저기요, 영감님!”
“제발 잠시만 제 말 좀 들어 주시면…….”
“이봐요! 귀머거리입니까!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 좀 해 봐요!”
소용없었다. 이 근육질 노인네는 뭔 소리를 해도 전부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공터에 도착하자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언반구도 없이 대뜸 공터 한가운데 박힌 거대한 나무 말뚝에 묶었다.
“에? 에에?”
두 팔을 뒤로한 채 말뚝에 묶인 레펜하르트는 연신 당황하며 눈을 껌벅였다. 어째 자세가 영 불길해 보였다. 보통, 죄수들 처형할 때 이런 모습을 시키지 않던가?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막 소리를 지르려던 차였다.
“옜다.”
간략한 한마디와 함께 제라드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려 버렸다.
“읍읍?”
입이 막힌 채 공포에 질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제라드가 푸근하게 웃었다. 그리고 공터 저편으로 가더니 커다란 대나무 줄기를 한 아름 들고 왔다.
“자, 그럼 수련을 시작하자꾸나!”
그러더니 대나무 하나를 움켜쥐고 양손에 침을 뱉는다. 레펜하르트의 공포가 더더욱 짙어졌다.
“으으읍!”
제라드가 대나무로 레펜하르트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빠악!
“……!”
죽도록 아팠다. 비명을 못 지르니 몇 배는 더 아픈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는 벌벌 떨며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도대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곧바로 매질이 이어졌다. 대나무가 허벅지를 때렸다. 역시 죽도록 아팠다. 이번엔 옆구리를 때렸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남부 할라인제 대나무는 강철의 강도와 고무의 탄력성을 모두 겸비해 명성이 드높다. 그 흉악한 물건으로 제라드가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퍼퍼퍼퍽!
“……으아아으아으압압!”
재갈이 물린 채 레펜하르트는 연신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매질은 정말이지 쉴 새 없이, 강도 높게 전신의 모든 부위를 골고루, 철저히, 모질게 다지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억울하다든가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는 의문 같은 것은 모두 뇌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시, 시리스. 나 이대로 가나 보다…….’
순간 시리스가 저 푸른 하늘 저편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환영이 다 보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간신히 두 번째 삶을 얻자마자 맞아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망했다. 삶에 대한 끈적끈적한 미련을 안고 그는 애써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난 못 죽어! 이대로는 절대 못 죽어!’
한편 제라드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어째 제자를 패는 손맛이 조금 달랐다. 여느 때보다 좀 더 쫀득한 느낌이랄까? 평소처럼 육체를 단련하는 특유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맞고 있다면 이럴 리가 없다.
‘진짜로 기억 상실인가?’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법이 하도 단순, 무식, 과격한 것이다 보니 종종 단기성 기억상실증이 생기곤 했다. 제라드가 수행받을 때도 두어 번 정도 기억이 날아간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경험자답게 그는 그 해결책도 잘 알고 있었다.
‘패다 보면 다 도로 낫기 마련이지.’
기억을 되돌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기억을 날아갔을 때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다. 제라드의 손속이 더욱 매서워졌다.
퍽퍽퍽퍽퍽퍽!
맑은 하늘 아래 북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실로 심금을 울리는, 영혼이 담긴 북소리였다. 정말로 북에 영혼이 담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 사람 살려어어어어!’
☆ ☆ ☆
짐 언브레이커블은 대륙에 널린 무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사상을 지닌 무문이다.
보통 무인들, 기사가 되었건 검사가 되었건 무투가가 되었건 간에 수행 방법의 기본 골자는 변함이 없다. 호흡을 갈고 닦아 육체를 단련하며 여러 기술을 익혀 전체적인 무인으로서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 이 과정 속에서 그 방법이 천차만별로 갈리고 그에 따라 여러 유파가 생기긴 했지만 적어도 기본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은 그 기본을 부인했다.
“일단 완벽한 육체를 만들어라!”
사정없이 매질을 해 대며 제라드가 소리쳤다.
“인간이 무기를 드는 이유는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약하니 갑옷을 입고, 발톱과 이빨이 없으니 검과 창, 도끼를 들어 그것을 대신하려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맞는 와중에서도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아니, 인간이 도구를 쓰는 것이 왜 어리석단 말인가?
제라드가 바로 답을 주었다.
“그것은 도피다!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한 자의 치졸한 도피인 것이다! 무인이라면 응당 자신의 약한 부분을 단련해 극복해야 하는 법이다!”
레펜하르트는 기가 차서 입을 쩍 벌렸다. 마법사로 살아온 50 평생 이렇게 단순 무식한 사고방식은 처음 접해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재갈이 물려 있어 티가 나진 않았다. 제라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선은 부서지지 않는, 완벽한 불굴의 육체를 만들어야 한다.”
손은 쉴 새 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도 제라드는 느긋하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을 설명해 주었다. 제자가 기억상실에 걸렸으니, 익숙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면 좀 더 빨리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다른 유파처럼, 육체 단련과 기술 수련을 함께 하는 것을 거부했다. 인간의 수명은 길지 않고 도달해야 할 무의 경지는 높고 높은데, 그렇게 이거저거 찔끔찔끔 해 가지고 어느 세월에 경지에 오르겠냐는 것이다.
“자고로 세상 모든 일은 한 우물만 파는 놈이 결국 대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단은 육체부터 완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완벽한 육체로 기술 수련을 하면 그때는 육체가 최고조로 활성화되었으니 어느 기술이건 쉽게 습득할 수 있고 나쁜 버릇 들어서 수정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육체를 만드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육체를 강철로 바꾸는 것이었다.
“인간은 쇠와 같다. 쇠도 인간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왜 쇠랑 같아! 시작부터 심각하게 오류가 있어, 당신!’
레펜하르트는 절규했지만, 딱히 제라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간의 뼈는 부러질수록 더 단단해지고, 근육 역시 타격을 입을수록 더욱 두꺼워지고 내구성도 높아지는 법이니까.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다 한계가 있다. 보통 사람이면 그 전에 골병들어 관에 누울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내가 고른 제자다. 믿어라. 네 육체는 한계가 없다! 강철이 될 수 있다!”
제라드가 호쾌하게 외쳤다.
모든 인간이 이처럼 단련해서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질 좋은 쇠만이 단조하여 강철로 만들 수 있듯, 재질이 받쳐 주는 인간이어야 강철 같은 육체로 변화할 수 있는 법. 그리고 이 제자는 제라드 자신이 전 대륙을 30년 동안 뒤져서 겨우 찾아낸 완벽한 재질의 소유자였다. 인간의 한계를 가뿐히 넘어서는 뼈와 근육을 지닌, 그야말로 짐승 같은 놈이었다.
이 소년을 발견하고 제라드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미지해라. 너는 무너지지 않는 거악이다. 어떤 풍상도 너를 흔들리게 할 수 없다.”
‘아으,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네 속에 있는 대해를 연상해라.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흐르며 광포한 힘을 보여 세상을 덮는다. 그 대해가 네 속에 있다. 바다를 끄집어내라. 그리하여 변하지 않는 육체를 얻어라!”
‘바, 바다…… 대해…….’
처음에는 기가 막혀 어이가 없었지만, 정신없이 맞다 보니 정말 정신이 없어 불만을 가질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레펜하르트는 무의식중에 제라드의 말대로 이미지를 연상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아픔이 가셨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략 세 시간 정도, 태양이 정수리를 넘고서야 제라드의 몽둥이질이 끝을 맺었다. 보람찬 미소를 지으며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묶은 밧줄과 재갈을 풀었다.
“그럼 쉬고 있거라. 내 준비를 해 두마.”
밧줄이 풀리자마자 레펜하르트는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쓰러지면 코피 정도는 족히 났겠지만, 그토록 처맞고도 살아 있는 육신이다 보니 그냥 땅에 엎어진 정도론 흠집도 나지 않았다. 아픔조차 안 느껴졌다.
레펜하르트를 내버려 둔 채 제라드가 성큼성큼 통나무집으로 걸어갔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죽었다. 그렇게 맞고도 안 죽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자신을 죽인 테스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튼튼해서 고맙다. 정말 고마워! 어흐흐흑!’
애초에 이런 육체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란 사실은 이미 뇌리에 남아 있지도 않는 레펜하르트였다.
집으로 들어간 제라드는 창고에서 항시 쓰던 물건을 꺼냈다. 통째로 대리석으로 된, 성인 장정 하나가 푹 잠기고도 남을 거대한 목욕통이었다. 그리고 그는 목욕통에 물을 채웠다.
과연 당대 권왕답게 물 채우는 법도 호쾌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양동이에 물을 떠서 열심히 목욕통으로 옮겼겠지만 이 근육 노괴에게 그런 귀찮은 과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냥 목욕통을 통째로 들고 뒤쪽 연못으로 가 푹 담갔다가 꺼내면 땡이었다. 저 거대한―게다가 통째로 대리석인!― 목욕통을 세숫대야 취급하며 가볍게 들어 물을 뜬 뒤, 제라드는 거기다 웬 액체를 드럼째로 들이붓고 온갖 풀들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왔다. 제라드가 하는 짓거리를 유심히 보던 레펜하르트가 공포에 젖어 질문했다.
“뭐, 뭡니까?”
“뭐긴. 쇠를 두드렸으면 식혀야지.”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제라드는 레펜하르트의 뒷목을 잡고 들었다. 다시 예의 그 ‘어미 고양이 새끼 물어 가는 방식’이었다. 이놈의 노인네는 사람 드는 수법을 이것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근육질 노인네가 근육질 제자를 공주님 안듯이 들고 가면 그것도 나름대로 호러일 것 같기는 하다.
“자, 그럼…….”
제자의 뒷목을 잡은 채 제라드가 오러를 운용했다. 황금빛 오러가 일렁이며 솟구치더니 이내 넝마가 된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으, 으윽?”
기묘한 기분에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육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아 가는 걸 느꼈다. 예전 마법으로 비슷한 효과를 봤었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육체가 활성화되고 전신의 재생력이 증폭되며 어긋난 뼈와 늘어진 인대, 퉁퉁 부은 근육이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 가는 느낌.
쉽게 말해서, 제라드는 지금 오러로 제자의 전신을 치유 및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 짐 언브레커블 특유의 오러는 특히나 육체를 다루는 운용법에 있어 대륙 최강을 자랑해 이런 효능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오러를 흘려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돌본 뒤 제라드는 제자의 전신을 홀랑 벗겨 버리더니, 입에 커다란 대롱을 물렸다. 물론 여전히 제자의 의사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젠 반항할 기분도 안 들어 레펜하르트는 순순히 대롱을 물었다. 뭐, 목욕통에 물 받을 때 대충 짐작하기도 했고.
‘아니, 그냥 내가 벗어도 되는데 왜 굳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은 상태, 스스로 탈의할 기력조차 없다. 딱히 제라드가 어린 소년 제자 옷 벗기는 취미가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자, 그럼 한 시간 뒤에 보자꾸나.”
제라드는 레펜하르트를 머리끝까지 목욕통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덮었다. 뚜껑엔 대롱만 한 사이즈의 구멍이 나 있어 어떻게든 숨을 쉴 수는 있었다. 물속에 둥둥 뜬 채 그는 멍하니 물속을 살펴보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잘 보니 이거 내용물이 장난이 아니었다.
‘맙소사, 힐링 포션에 게렐 초에 페탈스 꽃잎에…….’
힐링 포션은 어지간한 마법사 길드에서 주먹만 한 병당 은화 열 닢은 줘야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걸로 목욕통을 채우다니? 물론 물 좀 많이 타긴 했어도 여기 들어간 힐링 포션의 양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옛 이야기 중에 피부 미용을 위해 우유로 목욕한다는 왕비 이야기가 있는데, 그 왕비가 이 모습을 보면 자신의 검소함을 만방에 자랑해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들어간 약초들도 고가품이긴 마찬가지. 하여튼 회복에 좋다는 비싼 약초란 약초는 다 들어가 있었다. 물속에 몸을 담그자 놀라운 속도로 상처가 아물고 육체가 회복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스스로가 얼마나 강인해졌는지 또한 절실하게 와 닿았다.
‘아주 근거가 없는 수련법은 아니었다 이거지…….’
죽지 않을 만큼 전신의 근골을 단련한 뒤 오러의 힘과 회복 약수로 빠르게 전신을 치유한다. 이렇게 하니 골병들기 전에 바로 육체가 재생하며 더욱 단단해진다.
‘하긴, 이렇게 했으니 소년 테스론의 육체가 지금껏 버텨 왔겠지. 사실 이 정도면 트롤도 맞아 죽을 판인데.’
확실히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만했다. 물론 절대 심정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강해져야 하는 거냐? 남들은 그냥 평범하게 해도 잘만 강해지더만.
‘아마도 테스론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수행을 반복해왔겠지?’
자신의 마법을 그토록 버텨낼 수 있었던 테스론의 저력이 단숨에 이해가 갔다.
“후우…….”
대롱 너머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회복 약수가 전신을 어루만지며 고통이 점점 옅어진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들며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생긴다.
약수 속에 동동 뜬 채 레펜하르트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일단 여기가 과거인 것은 분명하고…….’
테스론의 나이를 볼 때 한 30년 정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온 것 같다. 왜 테스론의 육체로 전생했는지도 가설은 있었다. 시공 회귀 주문이 발동하는 바로 그때 테스론의 공격이 마법 사이를 꿰뚫으며 마력이 폭주했었다. 아무래도 그 여파인 것 같다.
‘가만있자. 그럼 지금 이 시간대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레펜하르트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졌다.
그럼 이 시간대에는 어린 시절의 레펜하르트도 있는 건가? 한 시공간에 동일한 두 영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법의 상식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의 상식으로는 시공을 뒤트는 것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 이미 레펜하르트가 시간을 거스른 시점에서 그 상식이란 것도 믿을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왕년 궁극을 바라보았던 마법사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무래도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겠군.’
첫 번째는 미래의 레펜하르트의 영혼을 지닌 이 육체와 현재의 소년 레펜하르트가 공존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어쩌면 지금 내 육체에 권왕 테스론의 영혼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마법의 극에 달했던 그라 할지라도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는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양쪽 모두 그가 익혀 온 마법의 상식 밖의 일이니까.
‘문제는 이것이 현재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이냐로군.’
일단 또 하나의 자신이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동일한 두 영혼이 서로 접촉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혼의 정체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불변의 법칙, 재수 없을 경우 둘 중 한 명의 영혼이 소멸해 버릴 가능성도 있다. 마법사인 레펜하르트는 이 정도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 레펜하르트가 정식 마법사로 활동하게 되는 건 적어도 10년 후에나 일어날 이야기. 과거를 되새겨 보면 지금의 그는 시기상 델피아의 마탑에서 죽어라 공부만 파고 있을 시기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 테스론이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차지했다면?
테스론 역시 회귀 전생했다면 과거의 기억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처지에서 레펜하르트의 처지 역시 유추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자신을 노릴 것이다.
‘음, 이쪽 역시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려나?’
테스론의 강함은 그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 그러나 지금 그의 육체는 레펜하르트가 차지했다. 아무리 테스론이 왕년의 경지를 기억하고 있다 해도 기반이 되는 육체가 빈약한 어린 소년 레펜하르트의 것인 이상 당장 권왕으로 돌아오진 못할 것이다.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 아니, 여기 수련하는 꼴을 보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은 절대적으로 스승의 도움이 필수다.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아니야, 테스론 정도의 경지라면 그 상태에서도 스스로 수행법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무래도 어느 쪽이건 확인을 해야 제대로 대처법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일단은…… 이 지옥에서 도망치는 게…… 급선무인데…….’
레펜하르트의 상념이 점점 끊기기 시작했다. 계속 생각을 하고 있자니 육체가 너무 피로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
정확히 한 시간 뒤, 제라드는 레펜하르트를 목욕탕에서 꺼내 주었다. 그리고 마른 옷가지를 던져 주며 외쳤다.
“제자야! 밥 먹자!”
안 그래도 육신이 낫고 나니 미칠 듯한 허기가 밀려오고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그래서 그는 반색을 하며 옷을 걸치고 제라드에게 달려갔다. 도망은 도망이고, 지금 당장은 배 속에 뭔가를 넣어 줘야지 안 그러면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선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은 놀랄 일이 없을 거라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놀라 버렸다.
‘밥? 이게?’
제라드의 요리는 호방했다. 그것은 실로 남자의 요리였다.
그냥 돼지 한 마리를 퍽퍽 썰어 솥에 넣고 각종 채소며 곡류 등도 대충대충 솥에 때려 부은 다음 푹 삶는 것이 전부였다. 웬 국자를 하나 던져 주며 제라드가 말했다.
“숟가락 받아라.”
밥 먹으라며 내미는 저 솥 안의 액체와 건더기의 무자비한 조합, 스튜인지 뭔지도 의심스러운 물체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심각하게 갈등했다. 이걸 과연 먹어야 하나?
‘아니 그보다 이게 지금 1인분인가?’
이 거대한 솥의 내용물을 제라드와 둘이서 먹는 것도 아니었다. 제라드는 이미 자기 앞에 따로 상을 차린 후였다. 그것은 빵과 스프, 고기와 채소가 어우러진 평범한 식단이었다. 양 역시 그냥 평범한 성인 장정 3, 4인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뭐, 사실 저것도 엄청난 양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제라드의 덩치를 보면 저 정도 먹는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다.
그에 비해 레펜하르트 앞에 놓인 솥은 분량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이 정도면 안타레스 제국 시절, 휘하 오크 소대 하나 정도는 족히 먹이고도 배 두드릴 것 같았다. 설마 이걸 다 먹어야 하나? 남기면 또 아까처럼 패는 거 아냐?
‘그, 그래도 일단 먹자…….’
기가 막혔지만 레펜하르트는 아무 말 없이 국자(!)를 들었다. 그런데 먹고 나니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딱히 제라드의 솜씨가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장이 반찬이란 말을 몇백 배로 불리면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억상실증인 제자를 위한 제라드의 친절한 설명이 뒤를 이었다.
“네 육체는 한계까지 혹사당한 상태다. 그러니 그만큼 보충해 줘야 하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스튜를 퍼먹었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혼자 먹나 싶었는데, 일단 수저를 대고 나니 먹어도 먹어도 자꾸 들어갔다. 끝없이 음식을 퍼 넣는 자신의 상황에 스스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질량 불변의 법칙은?’
마법사의 상식이 깨지는 걸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솥을 싹싹 비웠다. 그야말로 먹는 것과 동시에 소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제라드가 솥을 치우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자, 그럼 소화도 시킬 겸 가볍게 뛰자꾸나.”
그리고 오후 수련이 시작되었다.
오후 수련은 마법사인 레펜하르트가 보기에도 꽤나 정상적이었다.
우선 한 시간가량 전신에 무거운 쇠뭉치를 달고 산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푸시 업, 아령 물고 윗몸 일으키기, 바위 짊어지고 앉았다 일어나기 등 평범한 건지 아닌지 애매한 육체 단련이 뒤를 이었다. 그 강도가 무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는 수련이어서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물론 그 와중에 몇 번이나 정신을 놓을 것 같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팔다리가 후들거려도 제라드의 한마디에 바로 기운이 솟았다.
“음? 힘드냐, 제자야? 그냥 오전 수련을 계속 할까?”
“아닙니다아아아아!”
죽도록 처맞느니 바위를 드는 것이 백배 나았다. 레펜하르트의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 ☆ ☆
해가 지고, 고달픈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녹초가 된 레펜하르트를 들어 방 안에 던져 넣은 뒤 제라드가 흐뭇한 얼굴로 밤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수고했다, 제자야. 내일 보자꾸나.”
“아, 안녕히 주무세요…… 사부…….”
“오냐, 오냐…….”
흐뭇한 얼굴로 문을 닫는 제라드를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푸근한 표정이었다. 제자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눈빛이었다.
‘저걸 보면 절대 나쁜 사람은 아닌데…….’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머릿속에 처박힌 사상이 악랄하기 짝이 없는데!
‘당장 도망간다! 오늘 밤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간다!’
레펜하르트는 일단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로지 제라드의 방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녹초가 된 육체가 맹렬히 수면을 요구했지만 그는 가공할 정신력으로 참고 또 참았다. 그는 마법사, 정신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종이었다.
제라드의 방 불은 금방 꺼졌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깊이 잠들기 전에 함부로 움직일 수야 없지.’
그렇게 한 시간가량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버틴 후, 드디어 그는 움직였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창문을 열고 조심조심 마당을 지나 건물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제라드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없으니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하나를 넘은 그 시점.
‘뛰자!’
레펜하르트는 산기슭을 향해 맹렬히 달렸다. 과연 단련될 대로 단련된 육체인 덕에 그토록 혹사당하고도 일단 뛰기 시작하니 금방 속도가 붙었다. 어지간한 산짐승도 울고 갈 무서운 속도로 그는 산길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저 무식해 보이는 수행이 사실 합리적이라도 그에겐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그는 무인이 될 생각이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대 가장 강력했던 마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대로 다시 한 번 10서클의 궁극 마도사가 되어 안타레스 제국을 재건해야 할 그가 지금 근육 키우고 있을 때냐?
얼마나 뛰었을까? 정신없이 달리는 레펜하르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아! 자유다! 드디어 벗어났다!’
드디어 안도감이 막 가슴 벅차게 올라오려는 바로 그 때!
“제자야, 어디 가니?”
길 앞에서 거구의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컥!”
저런 괴물 같은 노인네! 대체 언제 여기 미리 와 있었던 거야!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제라드가 빙글빙글 웃었다.
“한 두어 달 도망 안 가더니 결국 가는구나. 이걸로 아홉 번째인가? 한 번만 더 도망가면 두 자리 채울 수 있겠구나.”
제자가 도망가도 전혀 놀랍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테스론도 도망 자주 간 모양이었다. 레펜하르트의 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보시오, 영감님. 진지하게 할 말이 있소.”
제라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해 봐라.”
“난 사실 테스론이란 소년이 아니오.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마법사이외다.”
그러며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어떻게 이 소년의 육체로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사실은 절대 밝혀선 안 될 이야기다. 하지만 이미 지옥을 맛본 레펜하르트는 이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이곳을 벗어나는 것, 그뿐이었다.
“……이렇게 된 것이오. 그러니 난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소…….”
이야기를 마친 뒤 제라드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이 이야기를 저 노인이 믿을까? 그리고 만약 믿는다면, 제자의 영혼을 강탈한 사악한 마법사의 존재를 과연 저 노인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런데 의외로 테스론은 이번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 이번엔 그런 설정이냐?”
“네?”
“전에는 무슨 이계에서 온 이계인이라며. 그래서 그 몸에 들어갔다며. 드래곤도 만나고 신도 만났다더니.”
“에엥?”
“그리고 그 전엔 뭐더라? 전설의 동대륙이란 데서 활약하던 고수였는데 여기로 환생했다고 그러기도 했었지 아마?”
그리고 한 걸음에 레펜하르트의 뒤로 돌아가더니 대뜸 뒷목을 잡고 들어 버렸다. 2.5미터의 거구가 움직이는데도 채 보이지도 않았다. 과연 당대의 권왕다운 무시무시한 몸놀림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설정이 좀 더 디테일하구나. 많이 늘었네. 취미로 음유시인 노릇 하는 것도 괜찮겠구나, 제자야.”
허공에 들린 채 레펜하르트는 좌절했다. 이것조차 소용이 없다니! 제라드는 연신 피식거리고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테스론이 이빨을 열심히 까서 비슷한 거짓말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자, 어서 돌아가서 자자꾸나. 푹 자야 내일 수련도 버틸 것이 아니냐!”
호탕하게 제자를 들고 돌아가는 노인의 표정에 레펜하르트가 진짜 테스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제라드에겐 별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가 원한 건 짐 언브레이커블의 단련법을 견뎌 낼 튼튼한 몸뚱이, 그것뿐이다. 그 내용물이 뭐가 되었든 별 상관없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그 사실을 깨닫고 레펜하르트는 절망했다. 도무지 이 지옥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질 않았다. 세상이 모두 암흑이었다. 한밤중이니 당연하지만.
대롱대롱 매달린 채 지옥으로 돌아가며 레펜하르트는 생각을 바꿔 먹었다. 단 하루 동안의 만남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제라드란 노인네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용히 통나무집으로 돌아가며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고 다짐, 또 다짐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반드시 도망친다!’
그래, 오늘의 탈옥(?)은 실패했다. 인정해 주마. 하지만 계속 여기에 갇혀 살 거라 생각하진 마라. 잠자리에 내던져지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도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전생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너무 포기를 몰라서 마왕으로 불리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순 없다!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지옥의 아침이 밝아왔다.
“아으아으아아아아아!”
청명한 산속 하늘 위로 소년의 비명이 오늘도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 ☆ ☆
레펜하르트의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밥부터 먹는다. 전생한 첫날엔 레펜하르트의 태도가 영 이상하다 보니 벌주는 의미로 그냥 굶기고 수련부터 들어간 제라드였지만, 일단 레펜하르트가 고분고분해지자 착실하게 제자의 몸을 챙겨 주었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에는 식사 역시 중요한 수행의 일부였다. 고단백 고칼로리에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이곳의 식사는 영양학적으로 완벽했다. 문제는 맛에 있어서는 전혀 배려를 안 했다는 것이지만.
이게 밥인지 돼지죽인지, 아니면 소가 되새김질하다 뱉은 뜨물인지 구별이 안 가는 아침을 먹고 나면 바로 맞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죽어라 맞는다. 그리고 예의 그 힐링 포션 약초 칵테일 목욕통에 죽은 듯이 담겨 있다가 또 점심을 미친 듯이 먹는다. 여기까지가 오전 수련 끝.
그리고 오후가 되면 강도 높은 근육 훈련 후 무식한 저녁 식사 시간이 이어진다. 저녁 수련 시간은 오전과 동일했다. 죽어라 맞고 목욕하고 밤 되면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죽어라 맞고 죽어라 먹고 죽어라 들고 죽은 듯이 자는 것.
마법사로 살아온 레펜하르트에겐 상상도 못할 고난의 시간이었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는 틈만 나면 도망치려 들었다. 차라리 마왕으로 불리는 것이 낫지 이런 혹독한 지옥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저 사부란 작자는 레펜하르트가 무슨 수를 써도 귀신 같이 알아내 그의 도주를 차단하곤 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제자야, 나도 사부님 밑에서 수행 받을 때 다 해 본 짓이란다. 나도 다 해 본 짓인데 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하지만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다 보답받는 법이란다.”
실제로 짐 언브레이커블에는 130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제자 도주 시도 시 사전 차단법’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다. 역대 제자치고 꾀병 안 부려 본 놈이 없고 도망 안 가 본 놈이 없는 훌륭한 무문이다 보니 어떤 색다른 시도라도 한 번쯤은 해 본 것이다. 130년어치 노하우가 제자 교육법 매뉴얼에 착실히 반영되어 있어 레펜하르트가 뭔 짓을 해도 다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뒤.
포기를 몰라서 마왕으로까지 불린 남자, 레펜하르트는 결국 도주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평생 쌓아 온 신념마저 저버리게 만들 정도로 제라드의 감시망은 집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운 좋게 도망간다 해도 저 인간 성격이면 대륙 끝까지 쫓아올 것이 뻔했다. 어차피 붙잡혀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정식으로 허락받고 하산하는 게 낫지.’
다행히 그는 미래의 테스론이 어떤 경지에 올랐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미래의 테스론이 분명히 살아 있음도 확인했다. 즉, 이 몸뚱이는 틀림없이 이 황당한 수련법을 견뎌 내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도 그냥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무의 지고한 경지, 당대 최강의 무투가가 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미래에 확실히 경지에 오를 것임을 아는데 이 정도 고난쯤 못 참을 것도 없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마법사의 길을 포기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왕이면 병약한 마법사보다 근육질의 건강한 마법사가 더 좋은 것 아니겠어?’
생각을 고쳐먹고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제라드의 가르침에 임하기로 결심했다. 뭐, 사실 진지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그저 눈 딱 감고 이 딱 악물고 죽어라 처맞는 것뿐인데.
‘게다가 사실 저 노인네가 나쁜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 말이지.’
레펜하르트가 생각을 바꾼 또 하나의 이유는 그를 대하는 제라드의 태도 때문이었다.
제라드는 진심으로, 진정으로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정말 성심성의껏 레펜하르트를 교육시키고 있었다. 비록 수련법이 무식하긴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언제나 제자에 대한 애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헌신적인 애정은 레펜하르트로서는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다.
마법사라면 도제에게 마법 한 줄 가르쳐 주며 엄청나게 생색을 낸다. 가장 기초적인 1서클 주문을 배우기 위해서도 최소 3년 동안 스승의 수발만 들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마법사다.
그에 비해 제라드는 오히려 제자의 수발까지 들어 준다. 밥도 스스로 짓고 (그걸 밥 짓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도 직접 하고 (청소 할 기운이 남아 있으면 차라리 매 한 대 더 맞고 바위 한 번 더 들라는 것이 제라드의 지론이었다.) 심지어 수업료 같은 것도 없다. 저 밥값, 목욕물값만 해도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 들어갈 것 같은데 아낌없이 자기 사재를 털어 레펜하르트를 교육시키고 있다.
너무 이상해서 제라드에게 대놓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대체 뭘 바라고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냐고.
제라드는 무슨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사부는 곧 부모이다. 그럼 자식 같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스승과 도제 관계인 마법사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부모 없이 고아로 자라나 마법사 밑에서 유년기를 보낸 레펜하르트에게 이 애정은 실로 부담스러우면서 동시에 기묘하게 좋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중엔 도망가려다가도 제라드의 눈빛, 표정을 떠올리고 스스로 접기도 했다.
뭐, 사실 제라드도 이유는 있었다. 그는 무려 30년 만에 겨우 자신의 계승자를 찾아낸 것이다. 이놈의 짐 언브레이커블은 하도 수련법이 무식해서 무문 초기엔 맞아 죽은 제자만 두 자릿수가 넘었다. 그렇다 보니 겨우 얻은 제자를 애지중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애지중지라는 게 과도한 폭력이라는 점이 레펜하르트의 슬픔이었지만, 어쨌건 제라드는 진지하게 제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지옥’ 속에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오늘도 레펜하르트는 말뚝에 묶여 맞고 있었다. 슬슬 소년의 티를 벗은 그는 육체 역시 2년 전과 차원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대나무 정도로는 맞아 봤자 시원하기만 했다. 더 이상 재갈을 물 필요도 없었다. 단련될 대로 단련된 그의 턱 힘은 어떤 재갈이건 씹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해진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구타 수련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제라드는 대나무 대신 강철 메이스로 제자를 두드려 패고 있었으니까.
“으, 으윽! 으으윽!”
이를 악 문 채 열심히 레펜하르트는 이미지를 연상했다. 육체를 강화하는 대해의 이미지, 그리고 특유의 호흡법. 맞으면서 이것을 쉴 새 없이 연마해야 그나마 고통이 좀 줄어든다.
그렇게 계속 맞고 있던 무렵이었다.
갑자기 전신에서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기묘한 느낌이 치솟았다.
‘헉!’
아랫배로부터 뭔가 강렬한 기운이 솟구치더니 단숨에 사지 백배를 타고 흐른다. 그 기운이 전신에 충만하며 가공할 힘이 느껴진다. 레펜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파차창!
그를 묶고 있던 굵은 쇠사슬이 (이미 밧줄 정도로는 레펜하르트의 무식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박살 나며 두 팔이 자유로워졌다. 레펜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았다. 굳건한 근육 위로 희미한 황금빛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으하하하하하!”
제라드가 통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축하한다, 제자야. 드디어 오러를 각성했구나.”
생명기生命氣, 오러aura.
경지에 다다른 무인은 세계의 기운을 느끼고 그 힘을 체내로 흡수해 자신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 달리 아우라라고도 하는 이 힘으로 강화된 육체는 능히 바위를 부수고 성벽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 오러의 운용에 따라 육체를 재생한다든가 오러 자체를 쏘아 내 원거리 타격을 가하는 등 마치 마법 같은 위력을 보이는 것도 가능하다.
대륙은 넓고 무에 뜻을 둔 무인들도 부지기수지만, 그중 오러를 다루는 경지에까지 오르는 이는 고작해야 만 명 중 하나.
가장 기초적인 오러 운용, 그저 오러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시키는 수준만으로도 능히 어지간한 소국의 기사단장급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오러 유저란 귀하고 또 강력한 존재다.
‘맙소사,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오러라는 기운인가?’
레펜하르트 본인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전신을 연신 훑어보았다. 검성 사이러스조차도 20대 후반에나 겨우 오러를 각성했다고 들었다. 그것도 대륙에 유례가 없는 엄청난 진도라며 천재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각성하다니?
하지만 제라드는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우리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 안 그래도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느니라.”
하긴, 이 정도로 효과가 좋지 않고서야 굳이 이렇게까지 무식한 단련법을 할 리가 없겠지. 내심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제라드가 들고 있던 강철 메이스로 레펜하르트의 복부를 강하게 타격했다.
퍼억!
바위도 부술 파괴력이 복근을 두드리는 걸 레펜하르트는 그저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확실히 뭐가 와서 부딪히기는 했는데…….
제라드가 빙그레 웃었다.
“어떠냐? 이제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지?”
“네, 사부…….”
얼빠진 목소리로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우와,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긴 있구나.’
이제까지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끔찍했던 지옥도 이런 보답을 받을 수 있다면 할 만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중에 경지에 오르면 사부에게 감사하게 될 거라더니, 정말 제라드가 빈말 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라드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신을 타격함으로써 육체를 단련하며 동시에 생존 본능을 계속 자극한다. 강인한 생의 의지가 자신의 생명력을 키우고, 그 커진 힘이 결국 오러로 발현되는 것이지. 비록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대륙에서 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오러를 각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떠냐, 제자야. 이제야 이 수련법의 뛰어남을 알겠느냐?”
제라드는 강철 메이스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이런 건 필요가 없었다.
“슬슬 타법 수련을 끝낼 때가 되었구나.”
드디어 아픈 시절이 끝났구나! 레펜하르트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오러를 각성한 것도 기뻤지만, 더 이상 맞을 일이 없겠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제라드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들어가자꾸나. 기술 수련을 해야지.”
아, 이제 좀 정상적인 무술을 배우겠구나. 그렇다면 곧 하산할 수 있겠지? 그는 이 2년 동안 오로지 근육 키우고 맞는 것 외에 한 것이 없었다. 주먹질, 발길질 하나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레펜하르트가 의욕에 불타며 물었다.
“기술 수련은 뭡니까, 사부?”
제라드가 히죽거리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나랑 자유 대련.”
“…….”
말문을 잃은 채 레펜하르트는 사부의 주먹을 올려다보았다. 드워프제 강철 해머를 연상케 하는 그 두 주먹에는 눈부신 황금빛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주 번쩍번쩍한 것이 때깔부터가 레펜하르트의 희미한 오러와는 질이 달라 보였다.
‘저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레펜하르트는 곧 그 해답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정신없이 급소를 파고드는 제라드의 ‘사랑의 매’를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좌절했다.
‘사랑 넘치는 지옥’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3
바실리 왕국 남부, 라키드 산맥의 깊은 험지.
깎은 듯이 거대한 절벽 아래 폭포가 떨어지고 그 밑으로 용소龍沼가 생성되어 요란한 물소리를 낸다. 소음과 물보라가 어우러진 물가 옆 공터에서 한 건장한 청년이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헙!”
간단한 기합과 함께 주먹이 대기를 찢는다. 이어서 연타가 들어간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연속 타격, 동작 또한 완벽했다. 만약 상대가 있었다면 그는 청년의 주먹이 자신의 사방을 빈틈없이 점유하는 걸 보고 좌절해야 했으리라.
이어서 발차기, 돌려차기, 지르기 등 기본 동작이 이어졌다. 연신 스텝을 밟으며 청년의 팔다리가 허공을 희롱했다. 점점 움직임이 복잡해졌다. 지르고 거두고 차올리고 쓸어내리는 그 오묘한 동작 속에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경탄해 마지않을 절묘한 수법들이 모두 녹아들어 있었다.
주먹과 발길질이 허공을 가르며 그 풍압만으로 바람이 일어나 회오리친다. 요란한 바람 소리가 공터를 가득 덮는다.
우우우웅!
그렇게 한참을 새도우(허공에 가상의 적을 상상하며 연습하는 수련법)에 투자한 청년이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제자리에 선 그가 주먹을 쥐고 절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주먹에서 눈부신 황금빛 오러가 일렁이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