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프롤로그 (1/84)

1권

프롤로그

대마궁 가이라크의 심장부, 심연의 전당.

지상 최대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홀 안에 한 무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모인, 모두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결코 부서지지 않는다는 강철의 육체를 지닌 근육질의 중년 사내, 권왕拳王 테스론.

검 한 자루만 들면 영혼조차 가른다는 대륙 최강의 검사, 검성劍星 사이러스.

무한한 신성력의 소유자, 주신 세이어의 성녀 엘린.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위대한 빛의 마도사, 제이드 아크라이트.

그리고 이들 앞에 선 금발 벽안의 청년, 할라인 왕국의 왕자이며 검과 마법, 신성력에 모두 능통해 세상으로부터 용사라 불리는 이, 알렉스 폰 할라인.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반대편 계단 위로 향해 있었다. 피처럼 붉은 로브를 걸친 채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인상의 중년 사내, 그를 향해 알렉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대의 악행도 이제 끝이다, 마왕 레펜하르트!”

마왕 레펜하르트.

암흑제국 안타레스의 제왕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강, 최악의 마도사.

백만의 어둠의 군세를 거느리고 강력한 어둠의 마법을 사역하여 대륙 절반을 불태우고 수백만을 학살한, 그야말로 인세에 강림한 진정한 마신.

저 사악한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만의 군대가 생명을 던지며 어둠의 군세 사이로 길을 뚫었다. 피를 강처럼 흘리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도 그들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영웅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인류가 선택한 최강자들은 이곳 대마궁 가이라크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했고,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결국 마왕의 앞에 섰다.

인류가 선택한 용사, 알렉스 폰 할라인은 벅찬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어서 외쳤다.

“이제 어둠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사악한 마왕이여!”

사실 마왕 레펜하르트는 무심한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원체 타고난 인상이 차가워 별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지금 그는 대단히 허탈한 눈으로 알렉스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성 사이러스가 푸른빛이 감도는 롱 소드, 일루미네이터를 빼 들고 소리쳤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그대를 없애고 이 암흑제국의 역사를 끝내겠다!”

억울했다. 열심히 고생 고생해 가면서 세운 제국이었다. 사흘 동안 고심한 끝에 성좌의 이름을 따 안타레스란 멋진 국명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왜 멀쩡한 이름 놔두고 음침하게 암흑제국이라고만 부른단 말인가? 평범하게 아침 되면 해 뜨고 밤 되면 달 뜨는 곳이구먼.

권왕이라 칭송받는 근육질의 중년 거한이 말을 잇는다.

“그대가 없어지면 타락한 몬스터들의 마성도 사라지겠지!”

사라지긴 개뿔. 걔들은 원래 그랬다. 아니, 오우거나 놀, 고블린 같은 놈들이 평소에 착하게 살다가 레펜하르트 때문에 타락한 줄 아나? 그저 예전엔 뭉치지 못해서 감히 인간들을 습격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한 짓은 그들을 거두어 ‘인간들이 쓰는 전술’을 가르쳐 준 것뿐이었다.

평소에는 보이는 족족 도망가거나, 혹시 덤벼들어도 쉽게 죽일 수 있던 놈들이 갑자기 군대처럼 단체 전술을 펼치니까 그걸 가지고 타락했다느니 마성에 젖었다니 하며 난리 치는 모양인데 사실은 전부 인간들이 먼저 하던 짓이거든?

레펜하르트가 지친 목소리로―물론 알렉스 일행은 과연 마왕다운 음침하고 사악한 어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을 열었다.

“……나의 사천왕들은 모두 쓰러졌나?”

레펜하르트를 따르던 네 종족의 강자들. 오래전부터 그를 따르며 충성과 신뢰를 바쳐 왔던 소중한 부하들. 그들의 안위가 걱정된다.

검성 사이러스가 자랑스레 검을 들고 대꾸했다.

“그렇다. 그 더러운 오크 놈은 내 검의 적수가 되지 못했지.”

그토록 용맹하고 전사의 긍지가 드높았던 오크 대전사 타시드를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탄식했다.

부족 단위를 이루며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오크들, 야만적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만큼 배신을 모르는 순수한 이들. 거친 자연과 용맹하게 싸우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와 맞서는 것을 긍지로 아는 이 전사의 종족이 왜 몬스터 취급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뭐, 워낙 안 씻고 살기는 하니까 더럽다는 건 딱히 부인 못 하겠지만.

권왕 테스론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을 받았다.

“그 추악한 괴물 트롤은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받았소.”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롭던 대주술사, 구루guru 아틸카도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솔직히 트롤들이 좀 무섭게 생긴 건 인정한다. 우둘투둘한 푸른 피부에 툭 튀어나온 상아 같은 어금니, 레펜하르트조차도 밤길에 아탈라 만나면 흠칫흠칫 놀라곤 했으니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추악한 괴물이라 불리는 건 어처구니가 없다. 산속 깊은 곳에서 주술 신앙 아래 살아가는 트롤들. 자연이 준 것만을 최소한으로 이용하며,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 영혼을 갈고 닦는 그들은 비록 원시적으로 보이긴 해도 뛰어난 정신문화를 지닌 종족이었다. 결코 괴물이라 불릴 이유가 없었다.

성녀 엘린이 조용히 입을 연다.

“암흑신을 섬기던 그 사악한 드워프도 정명한 흐름 속으로 돌아갔지요.”

알 포트(AL-Fort)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도 결국은 죽었나 보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언제부터 드워프들의 종족신, 알 포트가 사악한 암흑신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인간을 가호하는 주신 세이어와 열두 신들 외엔 전부 사악한 존재로 취급하는 저 오만함이라니!

빛의 마도사, 제라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타락한 다크엘프는 나와 싸웠소.”

타락한 다크엘프라…… 그래, 그녀의 피부가 좀 까무잡잡하긴 하다. 원래 살던 엘프들의 숲을 인간이 모조리 파헤치고 베어 넘기는 바람에, 쫓기고 쫓기다 결국 황량한 황무지까지 가서 살다 보니까 황야의 땡볕에 좀 많이 그을리긴 했다. 선탠 좀 했기로소니 순혈純血의 하이엘프를 다크엘프 취급해 버리냐?

“그리고 내 마법의 적수가 되지 못했지. 후후후.”

이어진 제라드의 목소리에 결국 레펜하르트는 두 눈을 감았다.

아, 시리스…….

결국 너마저도…….

☆ ☆ ☆

원래 레펜하르트는 평범한 대마도사였다. 아니, 대마도사란 시점에서 이미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엔 지금처럼 상식 밖의 어마어마한 마법을 구사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변한 것은 새로운 마법의 경지를 찾아 인간 이외의 종족, 그들의 문화로 눈을 돌렸을 때였다.

주신主神 세이어가 인류를 창조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이미 세상은 인간의 것이었다.

한때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이종족들, 엘프며 트롤, 드워프, 오크 들은 모두 그 힘을 잃고 쇠퇴할 대로 쇠퇴한 후였다. 인류는 이종족을 모두 인간들의 체제하에 포함시켰고, 그 결과는 가혹한 것이었다.

인간은 이 이종족들을 자신들과 동일한 지성체로 보지 않았다.

숲의 요정이라 불리던 엘프들은 예쁘고 오래 사는 시종으로 인기가 높았다.

강인한 대지의 아들, 드워프들은 땅 잘 파고 손재주 좋은 노예로 쓸모가 많았다.

긍지 높은 전사의 종족, 오크들은 힘 좋고 무식한 머슴으로 제격이었다.

그나마 트롤들은 그 놀라운 재생력 때문에 노예도 되지 못했다. 잡히는 족족 회 쳐져 힐링 포션의 재료가 될 뿐이었다.

모든 자존심도 긍지도 잃어버린 노예 종족들. 그들의 잊힌 문화 속에서 위대한 비의가 잔뜩 숨어 있다는 걸 깨닫고 레펜하르트가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는 곧 이종족의 옛 자취를 좇았다. 다행히 모든 이종족들이 인류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니었다. 소수긴 해도, 인간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오지에 모여 힘겹게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 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그 속에서 엘프의 정령술과 트롤의 주술을 마법과 결합한 레펜하르트는 마법의 새로운 경지를 창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10서클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가 되었다.

그렇게 계속 이종족들과 교류하는 동안 자연히 레펜하르트의 가치관도 변해 갔다. 더 이상 그에게 이종족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도저히 인간 사회에서 만연하는 참혹한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 족족 이종족 노예들을 구해 냈다. 열심히 힘닿는 대로 살 길도 마련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숨어 사는 이종족의 마을이 점점 커져 인간의 눈을 속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노예로 살던 놈들이 건방지게 마을을 꾸미니 인간의 왕이며 귀족들이 바로 눈독을 들였다. 당장 창칼을 들고 기사단을 앞세워 쳐들어왔다.

공격을 받았으니 당연히 반격을 했다. 이미 상식을 초월해 버린 레펜하르트의 강대한 마법은 군대면 군대, 성벽이면 성벽을 모조리 날릴 수 있었다. 쳐들어온 놈들은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먼저 죽이려 들다 죽은 것이니 자업자득이었다. 동정해 줄 이유가 없었다.

적들을 해치우고 나니 죽은 놈들이 보유하던 땅이 놀았다. 그래서 마을을 넓히고 그쪽에도 이종족들을 옮겨 살게 했다.

자꾸 쳐들어오고, 자꾸 쳐부수고, 자꾸 땅이 비고, 자꾸 이사하고.

그러다 보니 슬슬 마을이라기보다는 국가 단위가 되었다. 레펜하르트의 명성이 대륙 전체에 울려 퍼지니 오지에서 숨어 살던 다른 오크나 트롤, 엘프, 드워프 부족들도 좀 얹혀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마다하지 않았다. 오는 대로 순순히 다 받아 주었다.

그렇게 4년 정도가 지났다.

바실리 왕국, 테이칸 왕국, 라스틸 공국. 세 나라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안타레스 제국이 생겨났다.

어쩌다 보니 이종족의 나라를 건국하게 된 레펜하르트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인간을 증오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모든 지성체는 평등하다고 믿을 뿐.

그래서 인간을 노예로 삼는다든가 하는 보복성 정책을 펴지는 않았다. 그냥 다른 이종족과 동등하게 국민으로 대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봐 주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인간을 증오해 어둠의 군세를 모아 인류를 멸망시키고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믿었다. 정작 안타레스 제국민들은 오히려 살기 좋아졌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레펜하르트가 사악한 마법으로 국민들을 미혹시켰다고 주장했다.

제국을 세우자 아예 본격적으로 국가 단위의 침략이 이어졌다. 처음엔 한 나라였는데 다음엔 두 나라가 연합하고, 다음엔 아예 3개국 연합군이 쳐들어왔다.

그때마다 레펜하르트는 강대한 마법으로 침략군을 물리쳤다. 점점 인간들의 군세가 늘어나니 상대하기가 힘이 부쳤다. 그래서 지능이 떨어지는 오우거나 놀, 고블린 같은, 사람들로부터 몬스터라 불리는 하위 종족들에게도 손을 뻗어 자신의 군세에 집어넣었다. 다른 이종족들에 비해 지나치게 흉폭하고 제어가 힘든 이들이었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들을 군대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광범위 정신 제어 마법과 풍족한 식사 제공으로 해낸 일이었다.

이종족의 군세가 날로 불어났다.

전쟁도 점점 스케일이 커져갔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그는 마왕이라 불리며 대륙의 모든 인간들로부터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 ☆ ☆

레펜하르트는 눈을 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빛을 담은 다섯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로 올곧은 눈빛이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신념을 가득 담은 좋은 눈빛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보기엔 그것은, 자신들이 정의라 믿어 의심치 않는 지독한 독선과 아집의 눈빛이었다.

금발의 청년, 알렉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화려한 장식이 붙은 왕가의 보검을 겨누며 그가 외쳤다.

“이 검으로 그대로 인해 죽어 간 사람들의 넋을 달래겠다!”

레펜하르트가 침울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럼 죽어간 엘프나 오크들의 원혼은 누가 달래 주지?”

어이없어하며 알렉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증스럽구나, 레펜하르트! 그대의 사악한 힘이 아니었다면 그것들이 타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평화롭게 자기 본분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죽인 것 또한 그대가 아니냐!”

소용없다.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다.

저들 눈에 자신은 사악한 마왕일 뿐. 감히 노예의 분수에서 벗어난 이종족은 모두 마성에 젖어 타락한 어둠의 종족일 뿐.

레펜하르트의 검은 눈동자 위로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피처럼 붉은 로브 위로 보랏빛 영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라는 대로 마왕이 되어 주마!”

레펜하르트는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전신을 회오리치며 용솟음친다. 보라색 마력의 빛이 기둥이 되어 하늘을 꿰뚫고 오른다.

동시에 알렉스 일행도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권왕과 검성의 전신에서 푸른빛과 황금빛의 오러가 피어올랐다. 제이드도 마력을 끌어 올렸고 엘린 역시 성스러운 기운을 방출해 일행을 감쌌다.

알렉스가 검을 들고 마왕에게 돌진하며 기합을 외쳤다.

“타아아앗!”

대륙의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마법의 힘이 사방을 깨부수고 푸른 검광과 황금빛 투기가 폭풍처럼 불어닥쳤다. 그 여파만으로도 홀 천장이 통째로 날아가고 굳건하던 화강암 벽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렸다. 대리석 바닥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갈라지고 곳곳에 마법의 여파로 불길이 일어 뜨거운 열기를 뿌렸다.

그렇게 반시간쯤 지났을 때, 채 공격을 피하지 못한 알렉스가 제일 먼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용사인 주제에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것이 좀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검도 잘 쓰고 마법에도 능통하고 신성력마저 보유한 알렉스를 보고 감탄하며 용사란 칭호를 붙여 주었지만 사실 이게 알고 보면 그리 좋은 의미인 것만도 아니다. 한마디로, 세긴 센 것 같은데 저거 대체 뭐가 전공인 건지 영 애매하니까 붙은 칭호라 할 수 있겠다. 좋게 말하면 만능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잡다한 놈. 영웅담에서야 용사가 최후까지 남아 마왕의 마지막 숨통을 끊곤 하지만 현실에선 뭘 하든 한 우물만 파는 놈이 대성하는 법이다.

알렉스가 쓰러져도 남은 이들은 계속 전투에 임했다. 과연 이들은 ‘한 우물만 판 놈’들 답게 레펜하르트라도 쉽사리 쓰러뜨리기가 힘들었다. 전투가 길어지며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극의를 본 이들이 모든 기량을 다해 레펜하르트를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무한의 마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그는 차분하게 모든 공격을 받아넘겨 연신 치명적 일격을 가했다. 이윽고 성녀 엘린이 쓰러지고, 빛의 마도사 제이드가 혼절하고, 검성 사이러스의 검마저 부러지니 홀 내엔 단 두 사람만 서 있게 되었다.

권왕 테스론, 누구보다도 강력한 육체와 지구력을 가진 그는 홀로 남아도 포기하지 않고 레펜하르트와의 전투를 이어 갔다.

그의 육체는 실로 가공했다. 그의 의지 또한 무시무시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궁극 마법을 피하고, 비껴 내고, 가끔은 전신으로 받아 내 피를 토하고 상처 입으면서도 그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결국 여명의 빛이 머리 위로 비출 때쯤, 무한할 것 같은 레펜하르트의 마력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륙의 운명을 건 사투의 승패가 갈렸다. 더 이상 마나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레펜하르트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고, 테스론은 빈사 상태이나마 아직도 한 방을 날릴 여력이 남아 있었으니까.

“쿨럭, 쿨럭…….”

레펜하르트는 기침을 토했다. 폐를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시뻘건 핏덩어리가 기침 사이로 섞여 나왔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권왕 테스론의 주먹은 단 일격으로도 그의 육체 기능 대부분을 정지시키는 데 충분했다. 마력으로 간신히 죽음을 미루고는 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무너진 벽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레펜하르트는 회한 어린 시선으로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점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후회가 밀려왔다. 이종족을 도운 것에 대한 후회는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엘프들, 믿음직한 드워프들, 용맹한 오크들, 현명한 트롤들을 도운 사실은 지금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았다.

후회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너무 수동적으로만 모든 것을 대처했다. 그토록 침략 받아 오면서도 그는 그때마다 반격만 할 뿐, 작정하고 타국을 침공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 탓에 다른 나라로 하여금 재침공하도록 정비할 여유만 잔뜩 주었다. 경각심을 느낀 나라들이 서로 손잡을 여유도 잔뜩 주었다. 전 대륙이 담합해 자신을 노리는 그때까지도 레펜하르트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들 이해해 주지 않겠냐는 낙관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 대가가 이것이었다.

도우려면 제대로 도왔어야 했다. 인간들의 반발을 예상하고, 대륙 전체가 자신을 적대할 것임을 예상했어야 했다. 어쩌다 보니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확실하게 계획을 잡아 이종족들을 보호할 강인한 국가를 세웠어야 했다.

마왕이라 불렸다면, 마왕답게 처신해야 했다!

‘뭐,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만…….’

흐릿한 웃음을 짓는 레펜하르트의 눈에, 기둥에 기대 몸을 일으키는 테스론의 모습이 비쳤다. 그 역시 상처투성이에 피를 가득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자신처럼 죽어 가고 있지 않았다.

테스론이 피 묻은 입술을 훔치며 근엄하게 말했다.

“우리의 승리다, 마왕 레펜하르트여.”

그래, 너희들이 이겼지. 좋겠다. 승리해서.

비웃을 기운도 없어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냥 이대로 편안해지고 싶었다.

그때 테스론이 말을 이었다.

“……이제 다른 놈들도 마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크윽!”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저 말을 듣고 나니 도저히 그렇겐 못 하겠다. 마성? 본래의 모습?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본래의 모습이란 말이냐?

빠드득.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체념했던 그의 눈빛에서 정체 모를 열기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못 죽겠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이대로는 못 죽겠다!

남은 힘을 쥐어짜 내 레펜하르트는 품에서 작은 보석을 하나 꺼냈다.

이것은 잊힌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마도구, 10서클을 개척한 그조차도 해독을 다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담겨 있는 아티팩트다.

시공 회귀 주문. 시공을 뒤틀어 시전자의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보내 주는, 신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은 세계의 근원을 뒤흔드는 마법.

서클의 개념조차 초월한 마법이다 보니 제대로 발동할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실패할 경우 시공이 뒤틀려 대륙 전체가 날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다 죽어 가면서도 감히 쓸 생각을 못 했다. 하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빠득빠득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가 천천히 주문을 외웠다.

“라 페르트 뎀 이스테드 사피아…… 나, 정명한 법칙을 비틀어 운명의 눈을 속일지니…….”

테스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설마 이 와중에서까지 레펜하르트가 수작을 부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흐름을 거슬러 역천의 법 아래 머물러…….”

“어림없다, 이놈!”

다급해진 테스론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코앞을 쇄도하는 저 무식한 주먹에 레펜하르트는 다급해졌다. 캐터펄트를 연상케 하는 저 주먹이라면 스치기만 해도 그는 골로 갈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주문을 끝맺었다.

“……나, 시공을 뒤트는 자가 되리라!”

보석으로부터 눈부신 빛이 솟구쳤다. 동시에 테스론의 권격이 빛을 뚫고 들어와 레펜하르트의 마력장을 파헤쳤다.

“타아아앗!”

강대한 마력과 황금빛 오러가 뒤섞여 거대한 파문이 되었다. 정명하게 흘러야 할 마력이 오러의 방해로 제멋대로 터져 나가 폭주한다. 마력에 휩싸여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가며 레펜하르트는 되뇌고 또 되뇌었다.

못 죽는다.

절대 이대로는 못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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