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소방대-211화 (211/235)

<강철 소방대 211화>

211화. 약속 (4)

무거워진 분위기 탓에 술자리는 빠르게 정리됐다.

“술은 여기까지만 하죠. 더 이상 술을 마실 분위기가 아닌 거 같네요.”

오랜만에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느라 기분이 울적해진 라이언이 눈앞의 잔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일찍 끝냈고.

‘흠…… 어떻게 하지? 일단 내일 다시 와서 이야기를 해 볼까?’

그 때문에 이성하는 이 민망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내일 다시 찾아와야 하나 고민했지만, 렉스의 딸인 메리의 배려 덕분에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참, 미스터 리. 여행 중이라고 하셨죠? 호텔이 있는 시내까지는 거리가 꽤 먼데. 괜찮으시면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아, 그래도 될까요?”

“네. 2층에 안 쓰는 빈방이 있거든요. 금방 이불 준비해 드릴 테니까 괜찮으시면 거기서 주무세요. 불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메리. 덕분에 신세 좀 질게요.”

“아니에요. 엄마를 뵙기 위해 온 손님인 걸요.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다행히 이성하가 여행 중이라는 걸 기억한 메리가 호텔이 있는 시내까지의 거리를 걱정해, 하루 자고 갈 수 있도록 빈방을 안내해 줬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렉스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게 됐음에도 왠지 모르게 전날 서먹해진 라이언과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라이언.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미스터 리. 아 참, 메리! 혹시 내 지갑 못 봤어?”

“지갑?”

“어, 주머니에 넣어 놨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은근히 말을 피하는 라이언이었다.

“본부에 두고 왔나. 요즘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미스터 리. 편하게 있다 가요. 저는 근무가 있어서 먼저 나가 볼게요.”

“벌써요?”

“네, 아침 청소가 있거든요. 그럼.”

분명히 소파에 앉아서 쉬는 걸 봤는데 이성하가 내려오자마자 불편한 듯 바로 짐을 챙겨 나가는 라이언이었고.

띵동.

“누구세요?”

“이성하예요. 라이언. 어제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아서. 떠나기 전에 저도 한 끼 대접하려고 들렀어요.”

그 때문에 전날 식사에 대한 보답을 핑계로 다시 저녁에 집을 방문했지만, 라이언은 여전히 이성하와 대화하는 걸 불편해했다.

“참, 라이언. 어제 해 주신 이야기 말인데요.”

“죄송해요, 리. 아버지 이야기라면 더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

“어제도 사실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아버지를 존경해서 소방관이 된다고 생각하신 거 같아서 말씀드린 거예요. 아버지에 관련된 기억은 제게 너무 불편해서요.”

렉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라이언이 바로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덕분에,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렉스에 관련된 이야기를 안 꺼낼 순 없었다.

[…….]

전날 라이언의 이야기를 듣고 부쩍 말이 없어진 렉스 때문이었다.

[여기야, 성하. 여기가 내가 자라고 내가 지켰던 마을이라고.]

오랜만에 가족들의 얼굴을 본다며 그렇게 신나 하던 렉스였지만.

[리나가 나 때문에…….]

‘아니에요, 렉스 잘못 아니잖아요.’

[아니야…… 어떻게든 돌아왔어야 했어…… 그랬다면 리나도 죽지 않았고, 라이언도 고통받지 않았을 거야…….]

‘하…….’

정작 자신의 죽음으로 가족들이 힘든 생활을 겪게 된 걸 알고 자책하는 렉스 때문에 마음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게다가 라이언이 알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더 그런 것도 있었다.

‘그게 왜 렉스 잘못이에요. 도망친 게 아니잖아요. 마을을 구하기 위해 선택한 거였잖아요.’

라이언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렉스는 현장에서 도망친 적이 없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어.]

‘마을이요?’

[굴뚝효과 때문에 갑자기 불길이 미친 듯이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쪽으로 번졌거든. 그래서 선택해야 했어.]

도망을 친 게 아니라, 마을을 구하기 위해 이동한 거였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불길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응. 능선 쪽으로 방화선을 구축하지 않으면 마을까지 불길이 번질 상황이었거든. 그래서 불길 속으로 들어갔지. 마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구하기 위해 메이닌 마운틴의 다섯 대원이 본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불길 속으로 들어갔고, 그 결과가 가족들의 안전이었다.

‘그래서 후회는 안 해요?’

[그럼~ 가족을 지켰잖아. 그때 물러났다면 로키산맥 전체가 불바다가 됐을 거야. 그걸 생각하면 우리의 목숨은 값진 거지.]

비록 약속대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마을을 구해 낸 게 메이닌 마운틴의 다섯 대원이 이루어 낸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그 과정을 라이언에게 설명할 순 없었다.

‘제길, 조사관은 조사를 제대로 한 게 맞는 거야? 도대체 방화선을 왜 발견 못 한 거야?’

현장 조사관도 메이닌 마운틴이 구축한 방화선을 발견하지 못해, 그들의 순직 이유를 지시 불이행으로 결론 내린 사고가 벨로우 화재였다.

‘그걸 죽은 렉스에게 들었다고 할 수도 없고, 도대체 말할 방법이 없네.’

그런 사고의 경과를 그 당시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겨우 걸어만 다니던 이성하가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결정적으로 그 진실을 라이언에게 알려 주는 걸 렉스가 반대했다.

[말하지 마.]

‘렉스!’

[라이언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야. 난 라이언에게 약속을 못 지켰어. 결과적으로 리나도 못 지켰고. 그래서 할 말이 없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내가 나쁜 놈이야, 성하야.]

자신이 잘못했다고.

마을을 지켜 내 가족을 불길의 위험으로부터 지켜 내긴 했지만, 그로 인해 리나와 라이언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냈다고.

그랬기에 이성하는 렉스의 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하…… 진짜 답답합니다. 그래도 알려 줘야죠.’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그 진실을 알려 주고 싶었지만.

[말하지 마. 진실을 알려 줘 봤자 라이언이 오히려 상처만 받을 거야. 안 그래도 나랑 같은 소방관으로 일하는데, 잘못된 조사로 내 명예가 실추된 거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겠어? 그러니까 이대로가 좋아. 그냥 지금처럼 내가 잘못한 걸로 생각하고 있는 게 둘은 더 편할 거야. 괜히 나 때문에 라이언과 메리가 눈물을 흘리길 원하지 않아.]

그 진실을 알고 괴로워할 아들과 딸을 보기 싫다는 게 렉스의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렉스가 고향에 돌아와 마음에 상처만 얻은 건 아니었다.

[내가 죄인이야…… 미안해, 리나. 미안하다, 라이언.]

아내인 리나가 세상을 떠난 것과 자신을 미워한다는 라이언의 말에 며칠을 계속 자책하긴 했지만.

[고맙다, 성하야. 그래도 난 만족해.]

렉스는 어느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웃음을 지었다.

‘뭘 만족해요?’

[리나는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잘 큰 라이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잖아. 그리고 내 딸인 메리의 존재도.]

생각보다 잘 큰 아들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딸의 존재 때문이었다.

“미스터 리! 밥은 먹었어요?”

항상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성하에게 말을 건네는 딸의 모습에.

[안 먹었다고 그래. 같이 먹자.]

‘엥? 아까 먹었잖아요.’

[그래도 안 먹었다고 그래. 딸이 먹고 싶다잖아.]

흐뭇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고, 그 때문에 이성하는 매일같이 렉스의 집을 방문해야 했다.

[성하야, 얼른 일어나. 메리 보러 가자.]

“네? 이렇게 일찍요?”

[뭐가 일찍이야? 이미 해가 중천에 떴는데. 빨리 가. 메리 보고 싶어.]

“하…….”

처음으로 알게 된 딸의 존재에, 렉스가 매일 같이 그 얼굴을 보고 싶다며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이성하는 렉스를 대신해 라이언에게 진실을 알려 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하하, 미스터 리. 혹시 제 동생에게 관심 있어요?”

매일 같이 꾸준히 집을 찾아오다 보니 어느새 라이언이 다시 편하게 말을 걸어와서였다.

“에이, 아니에요. 그냥 이 마을에 제 친구라고 할 사람이 메리랑 라이언밖에 없잖아요.”

“정말이에요?”

“네, 저 여자 친구 있습니다.”

“이런, 메리가 슬퍼하겠네요. 그 녀석 미스터 리한테 호감 있던 거 같던데. 큭큭.”

정말 렉스의 말처럼 더 이상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안 했더니 마치 친구처럼 다가오는 라이언의 모습에.

‘렉스 말이 맞는 거 같네요. 괜히 이야기를 꺼내서 마음이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그래. 그게 나아. 괜히 옛날이야기를 꺼내서 나에 대한 진실을 알아 봤자 마음만 복잡할 테니까.]

‘네, 그래요.’

라이언과 메리가 지금처럼 진실을 모르고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때문에 이성하는 편한 마음으로 남매와 이별을 준비했다.

“라이언, 메리. 오늘이 제 마지막인데 맥주 한잔 안 할래요?”

“마지막이요?”

“네. 삼일 뒤가 복귀라서 내일은 출발해야 해요.”

슬슬 다가온 복귀 날짜에 남매와 마지막 자리를 가졌다.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그럼요. 한국에 가기 전에 다시 한번 들를게요.”

“약속한 겁니다.”

“네, 꼭 들를게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어머, 저도 거기에 포함되는 건가요?”

“당연하죠. 우리가 며칠을 함께 했는데. 하하.”

어느새 친해진 두 사람과 꼭 다시 볼 것을 약속하며 마지막 술잔을 기울였고, 그렇게 이성하는 다음 날 후련한 마음으로 마을을 떠나는 버스에 탈 수 있었다.

‘정말 안 남아도 되겠어요? 원하면 놓고 가도 되는데.’

혹시나 렉스가 자식들과 남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갑을 두고 가냐고 물었지만.

[됐어, 인마. 이렇게라도 얼굴 봤으니까 됐어. 어차피 한국에 가기 전에 한 번 들른다며. 그럼 어차피 또 볼 텐데 뭐.]

“하하하. 그래요, 그럼.”

쿨하게 다음에 올 때 보면 괜찮다는 렉스의 말에 씨익 웃었고, 그 때문에 마을을 떠나는 이성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즐거웠죠?’

[그래, 즐거웠어. 한국 가기 전에 꼭 다시 한번 오자.]

‘그럼요. 렉스를 위해 꼭 다시 올게요. 저도 라이언과 메리가 보고 싶기도 하고요.’

비록 렉스에게 아내인 리나를 보게 해 주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장성한 아들과 몰랐던 딸의 존재를 보게 해 줬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덜컹덜컹.

올 때와 같이 요동치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화아아아악.

창밖으로 보이는 산 너머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개인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뿌연 연기만 보이는 것에 아침 안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 검은색?”

시간이 지날수록 검게 물들어 가는 연기에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다급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사, 산불…….”

어느새 산 위로 빨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화르르르르르!

갑자기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불길이 산을 넘어 그 아래로 번지는 모습이었으며, 그 산 밑으로는 방금 이성하가 떠나온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 마을이…….]

“젠장!”

흉악한 불길이 렉스의 고향을 향해 무섭게 번져 가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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