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소방대 196화>
196화. 어떤 이유라도 (7)
“자, 잠깐 망원경 좀요.”
잘못 봤나 싶어 옆에 있던 대원의 망원경을 빌려 다시 확인해 봤지만, 창가 앞에는 정말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방화복 색깔이 아냐. 모두 입고 있는 옷들이 달라.]
렉스의 말처럼 방화복을 입지 않은 요구조자들이었다.
‘두려워하고 있어…… 전부 겁을 먹고 있다.’
그것도 무언가에 쫓기는지 다들 하나같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고, 심지어 몇 명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버지니아 팀, 도대체 뭐 하려는 겁니까? 창문은 왜 부순 거예요? 앞에 보이는 요구조자들은 뭐고요!”
다급히 무전기를 들어 고함을 지르는 시카고 소방국 부국장의 모습처럼, 45층 상공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전에 답하는 패트릭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작전 지휘 중입니다.
그저 지휘 중이라는 대답이었다.
“지휘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 현 상황에서 우리가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요구조자들을 건물 밖으로 빼내는 작전을 지휘 중입니다.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요구조자들을 건물 밖으로 빼내기 위해 작전을 지휘 중이라는 대답이 무전을 통해 흘러나왔고, 그에 부국장은 이성하를 바라봤다.
으쓱.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패트릭 대장의 무전에, 같은 특수재난구조대 출신인 이성하에게 그 답을 요구한 상황.
하지만 이성하도 패트릭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요구조자들을 건물 밖으로 빼내는데, 왜 창문을…….’
현 상황에서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방법은 계단을 통해 이동하는 방법뿐인데, 버지니아 카운티의 대원들은 한 행동은 그와 상관없는 창문을 깨는 일이었다.
[혹시 로프 탈출을 계획하는 거 아니야?]
‘로프요?’
[그래. 예전에 네가 아파트 화재에서 구상한 방법처럼 말이야.]
그 모습에 렉스가 예전 아파트 화재 사고에서 이성하가 사용했던 로프 탈출 방법을 거론했지만.
‘아니요, 불가능해요.’
이성하는 그 말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45층이면 120미터가 넘어가는 높이야. 주거 공간이 아니라 빌딩이라는 걸 감안하면 현재 높이는 최소 150미터 이상이다.’
로프 사용은 절대 꿈도 꿀 수 없는 층수가 현재 요구조자들이 있는 45층의 높이라서였다.
반면 현직 소방관들이 사용하는 로프의 길이는 보통 30미터짜리였고, 가장 긴 것도 최고 50미터밖에 안되기에.
‘제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입술을 깨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창문에 늘어선 요구조자들의 모습을 바라봤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성하의 생각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 구조 사다리차 준비해 주십쇼.
구조 사다리차를 준비해 달라는 패트릭의 무전이 뒤를 이었다.
“구조 사다리차?”
- 네, 제가 알기로 시카고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 브론토의 F112를 6대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건물 근처까지 바싹 붙여서 리프트를 올려 주십쇼. 로프를 이용해 사다리차의 리프트로 요구조자들을 내려보내겠습니다.
사다리차의 리프트를 건물에 바싹 붙여서 올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그거라면 말이 되는 상황이었다.
‘F112…… 현존하는 세계 최고 높이의 사다리차.’
패트릭이 요구한 사다리차가 세계 최고 높이의 기록을 달성하고 있는 브론토사의 최신 사다리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다리차의 높이는 세계 기록을 달성했다는 위명답게 어마어마했다.
[F112면 그 112미터 높이 사다리차 맞지?]
렉스의 말처럼 모델명과 같이, 무려 112미터의 높이까지 리프트가 올라가는 사다리차가 F112였다.
‘네, 그 높이까지 올리는데 40초 만에 가능한 것도 놀라운데, 그 상태로 리프트가 완전히 안정화되는 괴물 사다리차예요.’
심지어 그 높이까지 확장되는데 단 40초 만에 가능한 괴물 같은 능력을 보유한 사다리차였고, 그에 이성하의 눈빛엔 확신이 어렸다.
‘그래, 확실히 F112라면 가능하다. 그 높이까지 올린다면 가능하겠어.’
만약 한국의 아파트로 가정한다면, F112는 무려 35층까지 커버할 수 있는 엄청난 높이의 사다리차였으니까.
하지만.
‘짜, 짧다?’
생각보다 가동된 F112 사다리차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F112 전부 올려! 건물 근처로 바짝 댄다!”
“옛썰!”
현장을 지휘하는 부국장의 지시에.
위이이이잉.
6대의 F112가 웅장한 소리를 토하며 단번에 건물 가까이로 리프트를 올렸지만.
[70? 아니야. 80미터는 더 올려야 돼.]
실망해하는 렉스의 말처럼 펼쳐진 리프트의 높이는 겨우 목표인 45층 중의 반을 넘긴 게 한계였다.
“맙소사…….”
“안 돼…… 저 높이면 로프를 내리는 건 불가능해…….”
시카고의 소방관들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낙담하는 표정을 지은 것처럼, 로프를 이용해 요구조자를 내리기에는 높이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로프를 묶어서 내리면 되지 않을까? 매듭을 단단히 하면 되잖아.”
“그, 그래. 로프를 묶어서 내리면 돼. 30미터짜리 두 개, 아니 세 개 묶으면 될 거야. 그 정도면 가능해.”
어떻게든 긍정회로를 돌리고 싶었는지 바로 로프를 묶어서 내리면 안 되냐는 소방관들이 있었지만, 그 말에 이성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큰 방법이야. 요구조자 무게 때문에 중간에 로프가 풀릴 위험이 있어.’
아무리 매듭을 단단히 묶는다 하더라도, 로프를 연장하는 매듭의 경우라면 백여 명의 요구조자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 매듭이 풀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버지니아 팀은 정말 그 미친 짓을 감수하려는 듯 보였다.
“어! 내려온다! 요구조자 내려와!”
한 소방관의 고함처럼 요구조자 한 명이 로프에 묶인 채 내려오고 있었다.
“이쪽도다!”
“이쪽도 내려와!!”
그 한 명을 시작으로 창문 곳곳에서 약 스무 명에 달하는 요구조자들이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건물 밖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에 이성하는 다급히 무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패트릭 치프!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로프를 연장해서 내려올 생각이라면 너무 위험 부담이 큰 방법입니다. 자칫하다 로프가 풀리기라도 하면 요구조자가 그대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러다 중간에 사상자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겁에 질린 요구조자들이 대거 발생해 구조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잠깐만, 매듭이 없는데?]
‘뭐라고요?’
[요구조자들에 묶인 로프, 연장된 게 아니야.]
로프에 연장 흔적이 없다는 렉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게 무슨…….’
그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망원경을 이용해 로프를 살펴봤지만, 정말 로프 부분에는 연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30미터는 내려왔는데 진짜 매듭이 없어…… 어떻게 된 거지?’
설혹 버지니아 팀이 50미터짜리 로프를 챙겨 왔다 하더라도, 끝쪽으로 로프를 연결한 매듭이 보여야 하는 상황인데, 눈으로 보이는 로프 어디에도 그 연결 매듭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초부터 버지니아 팀은 로프 연장 따위의 방법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 로프를 연장해? 왜 로프를 연장하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로프는 100미터짜리 와이어로프야. 중간에 풀릴 위험 자체가 없어.
이미 건물을 올라갈 때 들고 올라간 로프부터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소방 로프가 아닌, 100미터짜리 특수 제작 로프였다.
“와이어? 설마 철심와이어 말입니까?”
- 그래. 단단한 8mm 굵기 와이어야. 그러니 절대 끊어지지 않지.
와이어라는 말에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크레인에나 쓰이는 8mm 굵기의 두꺼운 철심 와이어라는 패트릭의 무전이 이어졌고, 그에 이성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준비해 왔다고? 아니 준비를 떠나서 그걸 들고 저 층수를 올라갔다고?’
이런 상황을 예상해 철심 와이어를 챙겨 온 버지니아 팀의 준비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건 그 와이어를 들고 저 건물을 오른 대원들의 체력에 경외감이 솟았던 것이다.
[8mm에 100m짜리면 적게 잡아도 30키로. 거기에 방화복까지 하면…… 진짜 괴물들이네.]
렉스 역시 실소를 흘릴 정도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무게를 몸에 지닌 채 그냥 오르기도 힘든 건물을 뛰어서 올라온 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버지니아 카운티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는 그때처럼 넋 놓고 구경만 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911테러 당시, 같은 상황으로 피눈물을 흘린 경험이 뼈저리게 있어서였다.
“아, 불길을 견디지 못한 시민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립니다…… 소방관들도 같이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건물이 너무 높습니다. 탈출 방법이 없어요…….”
화르르르르!
먼저 출동한 동료 소방관들이 건물의 높이 때문에, 끝내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요구조자들과 화마에 휩싸이는 모습을 그저 분통에 찬 모습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게 그 당시 지원을 나왔던 버지니아 카운티였고, 그때부터 버지니아 카운티는 이런 상황이 다시 벌어질 걸 상정해 훈련을 해 왔다.
“돈이 얼마든 들어도 좋으니까. 끝에 후크를 제대로 장착해서 요구조자를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와이어로프를 제작해 주십쇼.”
어떤 일이 있어도 끊어지지 않을 와이어로프 수십 개를 준비해 놨다.
“다들 뛰어! 마천루는 기본이 100층이야. 우리 건물 정도는 네 번은 달려서 왕복할 수 있어야 돼!”
“허억, 허억.”
모든 대원들이 그 와이어로프를 들고 100층 높이의 건물을 오를 걸 대비해 체력을 길러 왔으며, 그 노력이 오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습한 대로 한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내려!”
“옛썰!”
지금껏 연습한 대로 하라는 패트릭의 고함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대원들의 모습처럼.
끼익끼익.
“내려온다!”
“가능해! 좀 더 내려!!”
수십 명의 요구조자들이 거의 200미터 가까운 상공에서 로프를 통해 건물 밑으로 내려지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지켜보던 모든 소방관들은 주먹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닿았다!”
“이쪽도 닿았어!”
요구조자들이 하나둘씩 올려진 리프트에 발을 딛는 모습이 보여서였다.
- 1호 차 요구조자 한 명 인계받았습니다.
- 3호 차도 인계받았습니다. 요구조자 상태 양호합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장면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듯, 리프트에 올라간 소방관들의 무전보고가 귓가를 울림에.
“좀만 더!”
“됐어! 사람들을 구하고 있어!”
“할 수 있어. 좀만 더 힘내!”
드디어 이 악몽 같은 테러 상황이 모두 끝났다는 기쁨의 포효를 질렀으니까.
하지만 그때였다.
“몇 명째야?”
“현재 80명 내려왔습니다. 아직 23명 남았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작업을 반복해 소수의 요구조자들만 남겨놨을 때.
콰르르르.
건물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드드드드드.
그와 동시에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이성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위를 바라봤고.
화아아악!
깨진 창문 사이로 짙은 흙먼지가 뿜어지는 광경에 다급히 무전기를 잡아챘다.
“패트릭! 안에 무슨 일입니까?”
-…….
“젠장! 패트릭!!”
아직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건물 내부에 또 다른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