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소방대 193화>
193화. 어떤 이유라도 (4)
지휘권을 달라는 말은 특수재난구조대를 대표해 일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현장에 없는 특수재난구조대를 대신해, 그 지휘권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내용.
그리고 그에 대한 허가 권한은 오웬에게는 없었다.
- 잠깐만 기다려 봐.
잠깐 기다리라는 오웬의 말을 끝으로.
- 미스터 리, 나 마크야.
곧바로 팀장인 마크의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흘러나왔다.
- 방금 자네 말은 현장에서 팀을 꾸리겠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지휘권을 달라는 말이 현장에서 팀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냐고 물었고, 그에 이성하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기왕 진입로를 확보해야 한다면, 시늉만 하는 수준이 아니라 확실히 하는 게 낫습니다. 중간에 만날 시카고 소방국의 동료들의 구조를 위해서라도 그렇고요.”
기왕 건물에 들어간다면 개인이 아닌 팀으로 들어가, 건물에 고립된 시카고 소방관들의 구조 작업까지 같이 진행하는 게 낫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무전에 막 수송기에 탑승하던 마크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좋은 판단이다.’
안 그래도 바라던 바였지만, 이성하가 정식 대원이 아니다 보니 요구하지 못한 사항이었다.
엄연히 현장직으로 근무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아무리 현장직이라도 동료들의 지원 없이 건물로 진입해 구조작전을 수행하라는 말은 무리한 명령에 해당하는 상황.
하지만 이성하의 생각은 그게 아닌 듯했다.
“성하, 멋있는데?”
“허락해 주시죠. 성하가 그렇게만 해 준다면 확실히 작업 시간이 줄어듭니다.”
옆에서 듣던 오웬과 데일의 말처럼 단순한 진입로 파악만이 아닌, 시카고 소방관들의 구조를 위해 진입로를 직접 뚫겠다고 말하고 있었고, 그런 이유라면 허울뿐인 자신들의 이름 따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 좋아, 모스 대장 통해서 직접 시카고에 연락 넣도록 하지. 이제부터는 자네가 우리 LA카운티를 대표한다. 잘 부탁한다. 미스터 리.
비록 몇 달에 불과한 짧은 훈련 기간이지만, 그 모든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따라온 이성하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력을 모르는 시카고 소방국으로서는 당황할 지시였다.
- 캘리포니아 태스크포스2의 마크 조밍입니다.
“마크 조밍? 정말 CF2의 마크 캡틴입니까?”
그토록 기다리던 특수재난구조대의 모스 대장이라는 말에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지만.
“뭐요? 딱 봐도 이 어린 친구에게 현장 지휘권을 주라는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미스터 리는 우리 특수재난구조대의 에이스 대원입니다.
“아, 아무리 에이스라도 일반대원에게 어떻게 지휘권을…… 그건 무리입니다. 모스 대장 당신이라면 상관없지만, 이 친구는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까.”
그 내용이 갑자기 나타난 어린 소방관에게 현장 지휘권을 주라는 것에, 황당한 마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 그 친구가 지난번 산타클라리아 공장 화재에서 도시를 지킨 영웅입니다.
산타클라리타 참사를 막아 낸 영웅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 네, 우리 스쿼드 차량을 멋들어지게 부순 친구가 그 친구입니다. 그 차량 한 대를 희생하고 도시를 구해 냈죠.
‘이 친구가…….’
그 말에 전화를 받았던 지휘책임자가 놀라는 표정으로 눈앞에 선 이성하를 다시 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든지 시카고 소방국의 지휘권을 배정할 수 있었다.
“그 일화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문의 그 소방관이 이 친구라면, 그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죠.”
지난번 산타클라리타 재난에서 이성하가 동료들과 함께 도시를 구해 낸 이야기는, 그들 시카고 소방관들 사이에서도 떠들썩했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현장에는 이성하를 지휘관으로 한 구조팀이 빠르게 결성됐다.
“스쿼드 3! 총 두 명입니다!”
“스쿼드 25! 세 명 왔습니다.”
“트럭 47. 네 명입니다!”
.
.
.
구조대와 진압 팀을 포함해 각 소방서에서 엄선된 마흔 명의 대원들이, 건물 앞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앞에 집결했으며, 그 앞으로 나서는 건 시카고 소방국의 방화복을 입은 이성하였다.
“캘리포니아 태스크포스 2의 이성하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앞선 대원들이 진입한 경로 그대로 올라가며 길을 뚫습니다.”
이성하가 LA카운티의 특수재난구조대를 대표해, 현장에 소집된 시카고 소방관들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성하의 설명을 소집된 소방관들은 집중하는 모습으로 들었다.
“작전의 편의를 위해 여덟 명씩 5개 조로 팀을 나누겠습니다. 파이프맨(진압대원)은 앞으로 나와 주십쇼.”
“접니다.”
“저요.”
“저도 있습니다.”
이성하의 호명에 여섯 명의 대원이 깍듯한 자세로 대답하는 건 물론.
“좋습니다. 지금 앞으로 나온 분들에, 옆으로 두 분까지 포함해서 1팀으로 묶겠습니다. 1팀은 저랑 같이 선두를 맡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왼쪽부터 여덟 명씩 나눠서 순서대로 팀을 묶겠습니다.”
“저까지 2팀이군요.”
“3팀 확인했습니다.”
“4팀도 확인했습니다.”
나머지 대원들 역시 이어서 나뉘는 팀의 편제에 별다른 불만 없이 수긍했으며, 그에 이성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1팀이 먼저 길을 뚫고 그 뒤로 다른 팀이 붙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30층까지 도달하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옛썰!”
자신을 확실히 지휘관으로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대원들의 모습에 일이 잘 풀릴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시카고는 명령 체계가 확실하네요.’
[지휘권 이양 명령이 내려왔는데 당연하지.]
‘한국이었다면 그런 명령이 떨어져도 전부 거부했을 거예요. 우리는 무조건 계급과 나이로 따지잖아요.’
렉스의 말에 바로 씁쓸히 웃으며 반박한 것처럼, 능력에 상관없이 간부 출신이 아니라면 무시하고, 그 뒤로는 들어온 기수를 따지는 게 한국의 소방관 문화였으니까.
하지만 미국은 일단 출신을 구분하는 문제부터가 없었다.
모든 소방관이 한국으로 따지면 소방사에 해당하는 Firefighter부터 출발하기에, 그에 대한 구분이 없었다.
소방국장(Chief)
소방부국장(Deputy chief)
소방방면대장(Division chief)
소방대장(Battalion chief)
소방경(Captain)
소방위(Lieutenant)
소방장(Engineer/Technician/Sergeant)
소방관(Firefighter)
가장 밑바닥인 Firefighter부터 시작해 자격증과 훈련 이수에 따라 승진하는 게 미국의 소방 시스템이었고, 그 때문에 팀장급을 제외하고는 현장에서도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현장에서는 마크와 모스만 계급으로 호칭하면 돼. 간단하지?”
“그럼 마크는 캡틴, 모스는 치프라고 부르면 돼?”
“맞아. 우리끼리 있을 땐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되고.”
현장에서도 다른 팀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름으로 불렀던 게 특수재난구조대에서 배운 미국 소방의 문화.
물론 모든 시카고의 소방관들이 현 상황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길, 이런 어린애를 팀장으로 둬야 한다고?’
상부의 지시다 보니 티는 안 내고 있지만, 1팀에 소속된 진압 팀의 케빈은 현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대 후반이야. 산타클라리타 건은 우연인 게 틀림없어.’
아무리 특수재난구조대의 소속 대원이라고 한들, 그 외모를 보면 이런 현장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을 게 분명했고, 그 때문에 같이 구조팀에 합류하게 된 팀 동료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마틴, 만약에 저 친구가 실수하게 되면 우리가 나서자.”
“뭐? 우리가?”
“그래, 한시가 급한 상황이야. 동료들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절대 실수는 용납할 수 없어.”
무엇보다 중요한 게 내부에 고립된 동료들의 구조인 만큼, 만약에 잘못된 지시라도 내려진다면 자신들이 나서서라도 그 잘못을 바로잡자고.
하지만 케빈의 생각과 다르게 지휘권을 가진 이성하는 의외로 맹탕은 아닌 듯싶었다.
‘로프 매듭.’
불길을 뚫어야 하기 위해 선두의 대원들은 관창을 들고 있었는데, 이성하가 능숙하게 호스에 로프를 걸어 안전띠에 고정했다.
촤아아악.
단순히 알고만 있는 게 아니라, 로프의 길이까지 조절해 호스를 허리 높이까지 조절하는 모습이었고, 그에 케빈은 방금까지의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두 번 다뤄 본 솜씨가 아니야. 이 자식…… 진압대 출신이다.’
단순히 멀리서 팀을 짜서 주수하는 방법이 아닌, 현장에서 직접 들어가서 불을 꺼 본 소방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매듭법이 호스에 사용되는 로프 매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일렀다.
“그럼 들어갑니다!”
이성하의 지휘하에 40명의 대원들이 건물로 진입했는데, 순간 일이 발생했다.
철컥.
화아아아악!
계단으로 향하는 비상구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바람이 소방관들을 덮쳤고, 그에 케빈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화르르르르!!
“제길, 백 드래프트! 피해!!”
아직 1층이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던 계단 내부와 밀도 차이가 발생해 그 안을 메운 불길이 흉악한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오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자신이 어리다고 얕봤던 이성하가 앞으로 나섰다.
끼긱.
“뒤로.”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라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관창의 헤드 부분을 조절하며 뒤로 누웠고, 그 뒤로 행해지는 건 분무 주수였다.
화르르르르!
단번에 주변의 모든 걸 태울 듯한 기세로 뿜어지는 거센 불길을.
쏴아아아아아!
마치 꽃을 펼치듯 물을 분사해, 그 화염을 그대로 가둬 버린 것이다.
케빈으로서는 말이 안 나올 광경이었다.
‘배, 백 드래프트를 미리 예상했다고…….’
자신도 배웠기에 가능한 주수 방법이긴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오는 불길에 반응하려면 그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야만 가능한 게 이 주수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성하로서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판단이었다.
“이제 가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나 계단 안으로 진입했다.
“불길 잡으며 올라갑니다! 따라서 주수하세요!”
지금 중요한 건 시간을 단축하는 거라고 말하듯, 뒤따르는 진압대원들에게 주수할 포인트를 짚어 주며 앞 서 나아갔고, 그러면서도 이성하는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무조건 최악을 가정해서 움직인다.’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들, 그 희박한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게, LA카운티에서 배운 구조작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망설이던 케빈의 눈빛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캡틴, 이쪽 불길 제가 잡습니다!!”
바로 이성하의 옆으로 서, 불길을 진압하기 위해 관창을 틀었다.
“캡틴, 저도 갑니다.”
“저도요!”
다른 1팀 대원들 역시 그런 이성하의 뒤를 따르며 계단을 메운 불길을 진압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그들의 앞에는 이성하가 있었다.
“오케이, 그대로 밀어내며 올라갑니다!”
“옛썰!”
이성하를 중심으로 마흔 명의 소방관들이 오롯이 하나가 되어 거침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