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소방대-188화 (188/235)

<강철 소방대 188화>

188화. 시민의 영웅 (2)

“에이, 설마…….”

잘못 봤나 하는 마음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봤지만, 정말 앞에 있는 사람은 김민정이 맞았다.

씨익.

그것도 살기가 느껴지는 웃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하하, 민정 씨. 그게…….”

그에 당황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해 본 이성하였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상태였다.

“행복해 보이던데요.”

“윽…….”

김민정의 날카로운 비수가 바로 심장에 꽂혀 들었다.

“팔짱까지 끼고.”

“끄응…….”

그것도 그냥 꽂혀 들어온 게 아니라, 들어와서 아예 심장을 후벼 파고 있었고.

‘데일, 루벤. 제발 도와줘!’

그 때문에 건너편 테이블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던 데일과 루벤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건 오히려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행위였다.

“성하야, 이 분은 누구야? 혹시 어제 클럽에서 만난 그분?”

“……!”

“역시 이성하. 아무튼 능력도 좋다니까.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자가 몇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래서 남자는 잘생겨야 한다니까. 부럽다, 리.”

“야이, 미친놈들아. 무슨 개소리야!”

방금 전 자신들을 외면한 사실을 마음에 담아 뒀는지,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내며 김민정의 앞에서 음해를 했던 것이다.

“민정 씨. 저, 절대 아니에요. 저 맹세코 미국 와서 클럽 따위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요. 쟤들이 지금 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장난을…….”

이대로 흘러가면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김민정에게 상황을 이해시켜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이성하의 편은 없었다.

“미스터 리, 즐거웠어.”

와락.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로렌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성하를 가볍게 포옹하고는 보란 듯이 윙크를 보냈다.

“나도 즐거웠어, 아까 알려 준 번호로 연락해. 기다릴게.”

그 옆에 있던 제시 역시 따라서 포옹하고는 연락하라며 손가락을 흔들었고, 그에 이성하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시간 되시면 잠깐 둘이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목이 좀 타서요. 호호호.”

누가 봐도 억지웃음으로 걸음을 옮기는 김민정의 모습에.

‘끄응…….’

오늘 이 고비를 넘기는 게 쉽지 않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사실이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미국에 왔는데, 다른 여자들이랑 신나게 놀고 있어?’

원래 김민정은 미국에 올 계획이 없었지만, 이성하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병원에서 진행하는 미국행에 자원한 상태였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에 준비하는 논문 때문에 2개월 정도는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야. 혹시 나랑 같이 갈 레지던트 있나?”

“교수님 제가 가겠습니다!!”

담당 교수가 미국에 있는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2개월 동안 함께할 레지던트를 구한다는 소리에 번쩍 손을 들었고.

“자네가? 김 선생 자네는 내년 3월부터 펠로우 근무잖아. 가게 되면 다녀오자마자 바로 근무 붙어서 지옥일 텐데, 그래도 가겠다고?”

“넵! 예전부터 시카고 의대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근무에는 지장 없게 할 테니 꼭 데려가 주세요, 교수님!”

미국에 다녀오면 근무가 꼬여서 힘들 거라는 교수의 말에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하 씨 보는데 그게 대수겠어? 수틀리면 야근 몇 번 하면 되는 거지, 뭐.’

이성하가 미국으로 떠난 지 한 달이 채 안 됐음에도, 그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생할 모든 손해를 감수할 마음을 먹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미국행을 이성하에게는 비밀로 했다.

‘알면 깜짝 놀라겠지? 엄청 좋아할 거야.’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연인들의 모습처럼, 깜짝 이벤트를 할 생각이었다.

“교수님, 시카고에 도착하면 말씀하신 호텔로 갈게요. 그때 뵐게요.”

“그때 말했던 남자 친구?”

“네, 아직은 아니지만요. 헤헤.”

그 때문에 교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며칠 먼저 출발해 이성하가 있다는 LA카운티로 날아왔고.

“됐어, 이 정도면 완벽해. 내가 봐도 예쁘다, 김민정!”

깜짝 이벤트인 만큼 예약한 호텔로 일단 이동해서 꽃단장을 마치고 이성하를 찾아간 거였는데, 그 깜짝 이벤트는 자신이 당해 버리고 말았다.

‘고생하는 줄 알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여자랑 놀고 있어?’

빠드득.

안 그래도 이번 산타클라리타 화재에서 이성하가 활약한 기사를 보고 혹시 다쳤나 하고 걱정을 하던 상태였는데, 다치기는커녕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정신을 못 차리는 이성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민정 씨, 아까 본 건 동료들이 장난친 거예요. 절대 아닙니다. 민정 씨가 본 게 사실이 절대 아니에요!”

이성하가 카페로 들어가 앉자마자 김민정의 오해를 풀기 위해 구구절절한 표정으로 방금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김민정으로서는 기도 안 찰 말이었다.

“사실이 아니라고요?”

“네, 아까 그 친구들은 같이 일하는 동료…….”

“아, 동료요? 미국 소방관들은 동료끼리 포옹을 하나 봐요. 게다가 윙크까지 주고받던데요?”

해명을 하는 이성하의 말을 단번에 자르며 살기 어린 웃음을 지었고, 그 모습에 이성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억울하긴 했지만, 지금의 위기를 넘기려면 변명보다는 사과가 먼저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야, 억울할 건 아니지 않냐? 너 진짜 좋아했잖아.]

‘아, 시끄러워요!’

눈치 없는 렉스가 옆에서 툭 치고 들어왔지만, 지금은 렉스와 다툴 때가 아니었다.

“진짜 미안한 거 맞아요?”

“네, 정말 미안해요. 민정 씨가 멀리서 절 보러 왔는데, 제가 실수를 한 거 같네요.”

살짝 화가 수그러든 것 같은 김민정의 어조에, 최대한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천천히 김민정의 눈치를 살피며 재차 잘못했다고 사과했고, 그 정성에 드디어 김민정의 목소리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쳇, 그렇게 사과하면 제가 뭐가 돼요. 저도 화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스윽.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며 고개를 숙인 이성하의 모습에, 김민정이 슬며시 손을 잡아준 것이다.

이성하로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 순간이었다.

‘예쓰! 예에쓰으!!’

못된 동료 놈들이 쳐 놓은 위험한 불장난을 드디어 성공적으로 진압한 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성하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었다.

‘그래, 초장부터 확실히 잡아야지. 내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어.’

김민정은 사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자들에 둘러싸여 실실대는 이성하의 모습에 화가 난 건 맞았지만, 그게 동료들의 장난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성하 씨가 들어온 걸 환영하는 기념으로 열린 파티라고 했으니까. 동료들이겠네.’

파티가 열린 사정을 알다 보니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성하가 연수를 받는 특수재난구조대의 소방관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김민정은 그 장난에 어울려 줄 마음을 먹었다.

‘방심하면 안 돼. 이 기회에 찜해 놔야겠어. 성하 씨가 너무 매력 있어서 어떤 여자가 뺏어 갈지 몰라.’

이번 기회에 이성하가 자신의 남자라는 걸 선포하겠다는 생각으로, 특수재난구조대의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여자 친구인 척 씩씩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지금 김민정의 마음은 솔직히 좋은 쪽에 속했다.

“그나저나 올 때 연락하지 그랬어요. 그럼 공항으로 마중 갔을 텐데.”

그 의도야 어쨌든 지금처럼 화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성하의 모습에,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그 노란 머리 애, 진심이었어.’

이성하를 껴안으며 윙크를 보냈던 여성 소방관의 존재였다.

“미스터 리. 즐거웠어.”

장난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 눈빛에 어린 게 이성하에 대한 호감이라는 걸 여자인 김민정은 알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김민정은 이성하를 향해 환하게 웃음 지었다.

“성하 씨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죠. 참, 그러면 아까 거기 계신 분들이 성하 씨 팀 동료들인 거죠? 저 좀 소개해 주세요.”

기왕 미국에 온 김에 이성하에 대한 단속을 확실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개요?”

“네, 온 김에 성하 씨 잘 부탁한다고 인사드리게요. 호호호.”

그 윙크를 한 소방관은 물론, 그 옆에 다른 여성 소방관들에게도 제대로 경고할 마음을 먹었고.

“그래요, 가요. 소개해 드릴게요. 정말 좋은 친구들이에요.”

그에 이성하는 별생각 없이 확실히 오해나 풀자는 생각에 김민정을 데리고 파티 자리로 돌아갔지만, 이어지는 자리는 이성하가 생각한 것처럼 가벼운 자리가 아니었다.

“로렌스라고 해요. 로렌스 스밋.”

“김민정이에요. 반가워요.”

악수를 하는 김민정과 로렌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술 좀 마시나 봐요.”

“좀 마시죠.”

들고 있는 잔을 털어 내며 가벼운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이었고, 그에 바로 파티는 시끌벅적해졌다.

“야, 데일. 술 좀 마신단다. 그럼 그냥 보낼 수 없지. 아이리쉬 폭탄주 하나.”

“아, 아이리쉬?”

“그래, 미스터 리 여자 친구라는데 그냥 보내면 섭섭하잖아. 제대로 손님 대접해 줘야지. 안 그래?”

난데없이 김민정과 로렌스의 술 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이성하로서는 기겁할 상황이었다.

“저, 저기 민정 씨. 아이리쉬 폭탄주는 도수가 너무 센데…….”

갑자기 벌어진 술 대결도 황당했지만, 그 대결에 사용되는 아이리쉬 폭탄주는 마신 다음 날에는 속에 있는 모든 걸 쏟아 낸다는 악명이 있을 정도로 독한 술이었으니까.

“난 아이리쉬를 마셔도 숙취가 없어. 왜냐하면 이틀 후에 깨거든, 하하!”

호탕하게 웃는 데일의 말처럼, 그만큼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

하지만 김민정은 상관하지 않았다.

“콜! 받아들이죠. 폭탄주 하면 또 제가 잘 마시거든요.”

“호오, 그래요?”

그대로 이성하를 팔로 밀어내며 당당히 승부하겠다고 말했고, 그에 파티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됐다.

“크으, 한잔 더!”

“오오오오! 로렌스!”

“저도 한잔 더요!”

“미스터 킴도 한잔 더! 빨리빨리!”

연달아서 폭탄주를 번갈아 가며 비우는 두 여성의 모습에,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흥분한 표정으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침울해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망했다…….’

이 사단이 일어나는데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는 이성하였다.

많이는 아니지만 이미 저 술을 마셔 본 경험이 있기에,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잘 알고 있어서였고, 아니나 다를까 생각하던 그 장면이 그대로 벌어짐에 이성하는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봐야 했다.

“우웨에엑.”

“우웨에에에엑.”

신나게 술을 마시던 두 여성이 그대로 입에서 갈색 액체를 뿜어내며 앞으로 거꾸러졌다.

“아…….”

당연히 가운데 껴 있던 이성하는 여성들의 입에서 뿜어진 액체를 그대로 맞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게 이성하가 처음 경험한 미국의 파티였다.

“와하하하하!”

“유고!”

“위고!”

누군가 토를 하며 쓰러지건 말건, 신나게 잔을 치켜들며 술을 부어라 마시는 곳이 바로 LA카운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