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소방대 172화>
172화. 태양은 뜬다 (2)
병실 안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휩싸인 건 당연했다.
“바, 박철민…….”
“진짜 왔어?”
김정호의 말처럼 정말 화면에 나오는 박철민이 이곳에 나타난 모습에 다들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하지만 박철민은 그런 대원들의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앞에서 사 온 걸세. 음식은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말이야.”
한 손에 큼직한 과일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이성하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그 모습에 잠깐 당황하던 허석훈이 새빨개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겁니까!”
“허석훈!”
“아니, 그렇잖아요. 저 인간이 여길 어디라고 와요!”
징계는 그렇다 쳐도 말도,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방해해 이성하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한 인간이 염치없이 병실까지 찾아온 모습에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에 박철민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오해하지 말게. 난 정말 순수한 의도로 찾아온 거야. 이성하 대원의 부상이 걱정됐거든.”
자신은 정말 이성하의 상태를 걱정해 병문안을 위해 온 거라고.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풋.”
김정호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쳇, 그런 인간이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방해하나.”
그 옆에서 도성민이 말도 안 된다며 박철민을 노려봤고, 허석훈은 여전히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뭐? 부상을 걱정해?”
“석훈아, 좀 참으라고.”
김정호가 사전에 이야기한 건 까마득하게 잊었는지, 계속 박철민을 향해 으르렁대는 모습에 김필주가 옆에서 난색을 표하는 상황인 것이다.
권일섭 역시 그런 박철민의 말에 코웃음을 친 건 당연했다.
“용건이나 이야기하시죠. 지금 이렇게 병문안 다닐 때가 아니신 거 같은데요.”
아직 틀어져 있는 TV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 현재 우리 소방본부는 전 인력을 동원해 추가 생존자들을 수색 중입니다. 다행히 빠른 조치 아래 지하 3층까지는 모두 수색이 된 상황이고, 이 속도로 본다면…….
기자들의 질문에 진땀을 흘리며 대답하는 박철민의 모습이 아직 영상으로 나오기에, 저렇게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상황임에도 기자들이 몰려 있는 병원까지 몸소 찾아온 이유를 물었고, 폐부를 찌르는 권일섭의 말에 박철민의 인상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끄응…….’
- 도대체 그런 지시를 내린 이유가 뭡니까?
- 본부의 지시가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 전문가들의 말로는 조금만 늦었어도 사망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거라고 판단하던데요.
방금까지 현장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기자들의 질문이 메아리치듯 머릿속에 다시 떠오르는 것에.
“개 같은 기자 새끼들.”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움켜쥐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처럼 박철민은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제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겁니까?”
조금 전 기자회견을 마쳤던 그는 현장에 마련된 지휘소 막사에서, 자신의 상사인 본부장과 통화를 하며 짜증을 토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지휘권도 없는 상황인데, 제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본부로 돌아가겠습니다. 저 기자 새끼들 때문에 짜증 나 죽을 거 같아요.”
소방총감에게 털린 것도 억울한 판국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기자들 앞에서 욕받이를 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고, 그 때문에 이미 마음은 현장을 떠난 상태였다.
‘본부로 돌아가서 상황이나 살펴야겠어. 여기 있어 봤자 될 것도 안 돼.’
어차피 현장에 있어 봐야 계속 기자들에게 시달리기만 할 게 뻔했기에, 본부로 복귀할 짐을 챙기던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박철민의 기대와 달랐다.
- 아니, 본부 오지 말고 병원 가서 그 이성하란 놈이나 만나 봐.
본부장이 본부로 복귀하는 게 아닌, 병원으로 가서 이성하를 만날 걸 지시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갑자기 이성하를 만나라뇨?
- 지금 본부 앞에도 기자들이 쫙 깔렸어. 그냥 나뒀다가는 우리가 제대로 뒤집어쓸 느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그놈 좀 만나서 설득해 봐. 본부의 지시는 문제가 없던 상황이다. 뭐 그런 느낌으로 인터뷰하게 그림 좀 그려 보라고.
생각보다 여론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번 사건으로 영웅이 된 이성하를 찾아가 본부의 입장에서 인터뷰를 하도록 설득을 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지금 저보고 거기 가서 고개 숙이라는 겁니까? 거기에 은평대 놈들도 다 있을 텐데요?”
그 지시에 박철민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본부장의 말은 장난이 아니었다.
- 고개? 야이, 새끼야. 지금은 절이라도 해야 할 판국인 거 몰라? 지금 이거 잘못되면 너랑 나랑 옷 벗는 거 몰라서 그래!
워낙 전 국민의 관심이 집결된 상황이다 보니, 조금만 삐끗해도 그 책임을 몽땅 뒤집어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박철민이 다시 한번 말했지만, 본부장의 생각은 확고했다.
- 박철민이.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정말 본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거 명령이야, 명령!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며 지금의 지시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걸 강조했다.
-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설득하도록 해. 이거 간부회 결정이니까. 알았지?
심지어 지금 지시가 자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간부 모임의 결정으로 내려진 지시라는 걸 알렸고, 그래서 박철민이 이렇게 병실로 찾아온 거였다.
‘X발……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그냥 본부장의 지시였다면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간부회의 지시를 어겼다가는 그대로 본부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박철민은 방금까지 얼굴에 쓰고 있던 가짜 웃음을 바로 벗어던졌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용건이 있어서 왔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왔겠어.”
어차피 들켰다는 생각에 바로 권일섭의 말을 인정하며 이성하를 바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현재 우리 본부에 대한 여론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아. 우리 역시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건 같은 상황인데도, 국민들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고 우리의 판단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며 성토하고 있어. 그래서 그걸 돌리기 위해선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제 도움이요?”
“그래. 자네 도움. 자네는 현재 국민들에게 범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 않나? 그런 자네가 나서서 우리 본부 역시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인터뷰를 해 주면, 지금 같은 분위기에 많은 도움이 될 걸세. 그러니 미안한 말인데 우리를 위해 기자회견에 나서 주면 안 되겠나?”
본부장의 지시대로 박철민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를 부탁했다.
“물론, 그냥 부탁하는 건 아닐세. 만약 그렇게만 해 준다면 앞으로 우리 본부가 자네의 그늘막이 돼 주겠네. 사실 우리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우긴 했지만, 단추 정도야 얼마든지 다시 끼울 수 있지 않나? 그러니 이번만 우리 부탁을 들어주면 과거의 일은 깔끔하게 묻도록 하겠네. 전달 벌어졌던 징계위원회의 결과를 뒤집는 건 물론, 앞으로 자네의 고속 승진도 말이야.”
부탁을 들어줬을 때의 달콤한 과실을 제시하며, 이성하에게 협력 관계를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박철민은 이성하가 그 요구를 절대 거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때? 막 심장이 벌렁거리지? 우리가 뒤를 봐준다니까.’
소방공무원의 세계에서 자신이 속한 간부회의 권력은 압도적이었다.
“어떤가? 자네도 나중엔 나와 같은 준감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 거야. 아니, 준감이 뭐야? 잘하면 청장인 소방총감까지 될 수 있을 걸세. 자네의 영웅 이미지에 우리 힘이 더해지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하거든. 하하하.”
그 때문에 큰 소리로 웃으며 이성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까지 그려 줬고, 그렇게 웃으며 내미는 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떤가? 우리와 단추를 새로 끼워 보지 않겠나? 이성하 소방교.”
공무원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막대한 보상을 제안했기에, 이성하가 자신의 손을 잡을 것이라는 것을 무조건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박철민은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이성하가 경멸이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승진? 저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뭐?”
“그딴 더러운 수작으로 승진하는 거 원치 않는다고요. 그리고 징계위원회의 결과를 뒤집어 준다고요? 징계위원회가 그렇게 간부들 맘대로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거였습니까?”
누가 봐도 공격적인 감정이 잔뜩 어린 모습이었다.
“잠깐만, 자네가 지금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나는 그저 서로 윈윈하자는 의미에서 말한 거지, 부정을 지르자는 게 아니야. 사실 나는 처음 자네를 봤을 때부터 좋게 봤었네. 누가 봐도 소방관스러운 모습에 내가 얼마나…….”
그 모습에 당황한 박철민이 어떻게든 이성하의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좋게 말을 이어 봤지만, 그 모습은 이성하에게 더 경멸을 일으킬 뿐이었다.
“아직 현장 마무리 안 됐습니다, 준감님.”
“뭐?”
“지금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고요. 소방관이란 사람이 어떻게 생존자들에 대한 걱정은 안 하십니까? 간부란 사람이 이럴 시간이 있으면 가서 돌 하나라도 더 들어야지, 승진이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생존자들의 가족들은 아직도 현장에서 생존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을 텐데. 어떻게 소방관이란 사람이 지금 여기서 그따위 소리나 하고 앉아 있냐고요!!”
아직도 현장에서는 생존자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밤새 눈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지휘자란 양반이 이곳에 찾아와 여론의 눈치만 살피는 모습에 분노를 토한 거였고.
“뭐? 그따위?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감히.”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박철민이 바로 일갈을 터트렸지만, 이내 보게 된 이성하의 눈빛에 움찔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눈빛이…….’
살기가 어린 이성하의 눈빛 때문이었다.
‘끄응…….’
금방이라도 자신을 난도질할 것처럼 노려보는 이성하의 분노어린 눈빛에, 겁먹고 아무 말을 못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새빨개진 얼굴로 고성을 터트렸다.
“하, 진짜 별게 다 X랄이네. 야. TV에서 영웅이라고 칭송해 주니까 자기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알아? 야이, 미친놈아. 너 그냥 말단 공무원이야. 지금이야 TV에서 잠깐 반짝해서 사람들이 빨아 주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그냥 손가락 하나면 좌천되는 소방교 새끼가 감히 어디서 X랄이야!”
어린 이성하에게 훈계를 들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분통을 터트렸고, 그걸 끝으로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오늘 일 기억하지. 내가 네놈만은 무조건 박살 낼 거야.”
본부장의 지시와는 전혀 상반된 결과를 얻게 된 상황이지만, 돌아가는 박철민의 걸음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건방진 새끼. 감히 우리 간부회를 무시해?’
그의 선배들 역시 지금 이성하가 한 말을 들었다면, 자신의 행동에 꾸중이 아니라 잘했다고 찬을 던질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까짓것 뭐라고 하면 옷 벗으면 그만이야. 내가 갈 데가 없겠어?’
자신 같은 고위 공무원은 퇴직해도 얼마든지 갈 곳이 널려 있었다.
산업안전에 관련된 회사부터, 건설에, 방재 등, 소방본부의 고위 공무원이라고 하면 제발 와 달라며 모셔 가는 회사만 수십 개가 넘었고, 그 때문에 지금의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쾅!
건방지게 자신을 향해 고개를 쳐든 이성하에게 보란 듯이 거세게 문을 닫고는 병실을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성하는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박살 날지는 봐야지.”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는지, 반말로 하는 말이었다.
“그럼~ 누가 박살 날지는 봐야지.”
그 말에 김정호가 씨익 웃으며 답했고, 그 손에는 미리 챙겨 뒀던 녹음기가 들려 있었다.
- 하, 진짜 별게 다 X랄이네. 야. TV에서 영웅이라고 칭송해 주니까 자기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알아? 야이, 미친놈아…….
방금까지 성을 내던 박철민의 목소리가 그대로 녹음기에서 재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