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소방대-120화 (120/235)

<강철 소방대 120화>

120화. 방법 (2)

“예, 예능국이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물어봤지만, 김원영은 그 대답을 지갑에서 꺼낸 종이 한 장으로 대신했다.

“네, 여기.”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 명함이었다.

MBS

김원영 PD

예능 2본부

지상파 방송국인 MBS는 물론, 예능국 소속 PD라는 것까지 확실하게 찍힌 명함이었다.

“잠깐만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성하는 바로 양해를 구하고 잠시 회의실 밖으로 나섰다.

일단 김정호와 통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아, 진짜 뭐하는 거야!’

이야기도 없이 이런 사달을 만든 김정호에게 정확한 상황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김정호와의 전화 연결은 되지 않았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대기음은커녕 전화를 걸자마자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 바로 튀어나왔고, 그에 이성하는 짜증 난 표정으로 머리를 박박 긁었다.

[일부러 껐네……]

‘아, 이 아저씨 진짜.’

렉스의 말처럼 자신이 전화할 걸 눈치채고 미리 핸드폰을 꺼 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 때문에 이성하는 힘없는 표정으로 회의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

꼼짝없이 낚였을 뿐 아니라,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이야기를 정확히 못 들어서 어떤 프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찾아온 성의가 있기에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김원영에게 프로그램을 물었고, 그에 김원영이 환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일단 가제이긴 하지만 프로그램 이름은 위 워 솔져스(We Were Soldiers)입니다.”

“위 워 솔져스요?”

“네, 영화로 나왔던 제목이기도 한데, 한국말로 풀이하면 우리는 한때 군인이었다 정도가 되겠죠.”

“군인이요?”

난데없는 군인이라는 말에 이성하가 김원영이 내민 서류를 황급히 살폈다.

정말 서류에는 김원영의 말처럼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모습이 첫 장부터 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서류에 적힌 내용에 이성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전역자들끼리 대결을 펼친다고요?”

방금 김원영이 말한 것처럼 한때 군인이었던 이들이 경쟁을 펼치는 프로였다.

“네. 우리나라가 휴전 국가다 보니, 대한민국의 남자 대부분이 군대를 다녀오잖아요. 그 때문에 남자들이 항상 술만 먹으면 말하는 게 내가 있던 곳이 가장 빡세다. 우리 부대가 전군에서 최고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요. 그래서 기획한 프로그램입니다.”

“한마디로 최고의 부대가 어딘지를 가리는 겁니까?”

“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전 군에서 내로라하는 병과의 부대들이 제대로 한판 붙는 거죠.”

그것도 개인전이 아닌 각 병과의 부대들끼리 승부를 겨뤄, 최고의 부대를 가리는 프로그램.

하지만 그 말에 이성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디님, 뭔가 착각하신 거 같은데 전 여기에 해당이 안 되는데요.”

서류에 적힌 부대의 네임들은 대부분 특수전을 지향하는 부대였다.

- 특전사

- 해병대 수색대

- UDT (해군 특수전전단)

- SSU (해군 해난구조전대)

- 육군 정찰수색대

- SDT (군사경찰 특수임무대)

일반적인 부대가 아니라 각 군에서 엄선된 정예들로 손꼽히는 부대들이 서류에 적힌 부대였고, 아쉽게도 이성하는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너 그냥 육군 아니었냐?]

‘네, 하염없이 걷고 걸어서 알 배긴다고 알 보병이라고 하죠.’

렉스가 서류를 보자마자 부대명이 아닌, 육군이라고 크게 범위를 잡아 이야기하는 모습처럼, 가장 많은 남자들이 배치되는 병종이 이성하가 근무했던 보병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말에 김원영이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네?”

“알고 있다고요. 성하 씨가 일반 보병으로 근무한 거. 그래서 저도 고민했는데 의외로 문제가 쉽게 풀렸어요.”

“풀려요?”

의아해하는 이성하의 말에 김원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보니까 성하 씨 근무한 부대가 26사단 불무리더라고요. 그리고 이중 육군 정찰대와 수색대 대원들이 전부 불무리 부대 출신이에요. 성하 씨와 같은 부대였던 거죠.”

“……불무리요?”

“네, 제가 듣기로는 훈련 같이 받는다는데 아니에요? 부대원들 말로는 26사단 기계화 보병은 정찰대와 수색대 훈련을 다 받는다던데요?”

그 역시도 이 문제로 골치 좀 썩혔는지 밝은 기색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틀린 말이 없는 말에, 이성하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끄응…….”

김원영의 말처럼 불무리 부대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자신이 예전 구조대로 발령되며 1팀 팀장인 정철호에게 자랑스럽게 불무리 출신이라고 밝힌 것처럼, 이성하가 근무했던 불무리 부대는 훈련, 양만큼은 모든 군대를 통틀어 빡세기로 유명했다.

“공격!”

“공격!”

전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공격이라는 경례 구호를 사용할 정도로 가장 공격에 특화된 부대가 26사단 불무리였고, 그 때문에 불무리 부대의 기계화 보병은 방금 김원영이 말한 정찰, 수색만이 아닌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편제 훈련까지 모두 수료했다.

‘매일 피고름만 흘렸지…….’

순간적으로 떠오른 군 생활의 기억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힘들기로 유명한 부대가 이성하가 근무한 불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성하를 김원영이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훈련을 안 받았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만약 문제가 되면 부대 명을 불무리로 바꿔 버리면 되니까요.”

“…….”

그 말에 뭔가 섬뜩함을 느꼈는지 이성하가 바로 기겁한 표정을 지었지만, 김원영은 진심이었다.

‘잘하면 시작도 전에 중단될 뻔한 프로그램인데 내가 뭘 못하겠어?’

이성하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프로그램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촬영 연기를 고려하던 상황이었다.

“뭐? 교통사고?”

“네. 방금 연락 왔는데, 갑자기 신호 무시하고 뛰어드는 차를 피하지 못했답니다.”

“상태는?”

“다리가 부러졌답니다. 다른 멤버 찾아 봐야 할 거 같아요…….”

“그게 말이 되냐? 젠장!”

촬영을 며칠 앞두고 이성하가 들어갈 육군 정찰수색대의 한 출현자가 교통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기적처럼 이성하가 나타났다.

“이성하요?”

- 그래. 나 믿고 이번 프로그램에 출현시켜봐. 진짜 대박이라니까.

프로그램이 잘되려는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정호가 소문을 듣고 이성하를 추천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게 오늘의 만남이었다.

“하하하. 그럼 문제는 없는 거죠?”

김정호의 말처럼 출현만 시키면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단번에 올릴 수 있는 이성하란 보증 수표에, 흥분해 바로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성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한데 예능은 좀 나가기가 그래요.”

“……왜요?”

“지금 이거 기획안 내용대로라면 꼬박 열흘은 촬영해야 되는데 저 그렇게는 시간 안 됩니다. 가뜩이나 인원 모자라서 다들 힘들어하는데 그렇게 오래 못 비워요.”

서류에 적힌 촬영 스케줄만 봐도 열흘은 일정을 비워야 했다.

한마디로 촬영을 하려면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신청해야 가능한 상황이었고, 그건 이성하로서는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안 돼. 또 빠지면 선배들 힘들어서 죽으려고 할 거야.’

안 그래도 국제구조대로 해외에 나갔다 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또다시 선배들에게 어떻게 빈자리를 떠넘긴단 말인가?

아니, 선배들이 허락한다 해도 위에서 허락할 리 없었다.

“어차피 서장님도 허락하지 않을 거고요.”

깐깐한 성환용 서장의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 받아줄 리 없는 게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었으니까.

그 말에 김원영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허락하셨는데요?”

“네?”

“허락하셨다고요. 성하 씨 출연하는 거. 안 그래도 성하 씨 만나기 전에 공문 보내고 이미 만나고 온 거거든요.”

김원영이 다시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성하 씨는 모르겠지만, 소방서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게 우리 방송국과의 협조 문제예요. 처음에는 경쟁 프로그램이라는 말에 좀 꺼려하셨는데, 중간, 중간 소방관 이미지에 좋은 내용으로 촬영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은평 소방서 배경으로요. 하핫.”

그 말에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며 서류를 살폈지만, 김원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진짜네.’

정말 김원영이 내민 서류에는 선명한 은평서장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은평소방서장 성환용>

MBS의 협조공문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도 몇 번 본 적 있는 성환용 서장의 직인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고, 그에 이성하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씨……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 물어보지도 않고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지난번 국제구조대 차출 건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물어보기 전에 도장부터 찍어서 넘긴 성환용 서장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이성하는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안 해. 이게 뭐야. 물어보지도 않고.’

계속 이런 식으로 넘기다가는 언젠가 호구 잡힐 것 같았다.

“성하 씨가 워낙 유명한 분이셔서 저희가 출연료도 굉장히 높게 책정했습니다. 회당 100만 원. 어때요? 저희 의지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하하.”

“……!”

생각보다 높은 출연료에 깜짝 놀라 김원영을 쳐다보긴 했지만,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피디님. 예능 프로그램은 제가 힘들 거 같아요.”

“네? 아, 안 힘들어요. 저희 프로그램은.”

“아니요, 프로그램이 힘들 거 같다는 게 아니라, 국제구조대 가 있는 동안 사무실 동료들은 제 빈자리 채우느라 고생했었거든요. 근데 구조대 활동도 아니고 예능 때문에 자리 비우면, 동료들에게도 미안하고요.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해요.”

출연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본분은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이라는 생각에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물론 문득 떠오른 박민규의 징계에 잠깐 고민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각으로 예능은 절대 아니었다.

‘안 돼. 나갔다가 또 무슨 놀림을 받으라고. 절대 안 돼.’

지난 에베레스트 건만으로도 선배들과 동료들이 놀리는 상황인데, 만약 예능까지 출연했다가는 얼마나 더 놀림을 받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그때였다.

“야, 이 미친놈아!”

“그걸 거절하면 어떡해!”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선배들이 고함을 지르며 들어왔다.

“빨리 앉아!”

“아, 왜요.”

“빨리 앉아 새끼야!”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무턱대고 들어와 이성하를 다시 의자에 앉혔고, 그중 오성수의 고함에 이성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 미친놈이. 이거 우승하면 상금 2억이야! 한 팀당 다섯 명이니까 나눠도 4천인데 이걸 왜 거부해!”

“2, 2억이요?”

이성하는 몰랐지만, 경쟁 프로그램인 만큼 위 워 솔져스에는 2억이라는 엄청난 상금이 걸려 있었다.

“네. 우승 상금 2억입니다!”

그런 소방관들의 반응에 김원영이 활로를 찾은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이성하는 단번에 책상에 올려 있는 펜을 집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 선배들이 등 떠미는 상황에서.

<이성하>

조금도 고민 없이 출연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휘갈겨 적는 이성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금의 액수에 이성을 잃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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