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소방대 103화>
103화. 세계의 지붕 (8)
잘못 들었나 싶어 어느샌가부터 손에 쥐고 있던 무전기를 다시 봤지만, 나오는 음성은 엄마가 맞았다.
- 아, 아들. 괜찮니?
“……엄마 맞아요?”
- 흐윽, 그래. 엄마야…… 우리 아들 괜찮니?
“하하하…… 정말 엄마 맞네.”
자신을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림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피식 웃었으니까.
하지만 웃을 만큼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던 건가.’
의식을 잃던 순간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휘이이이잉.
매서운 눈보라에 무릎을 꿇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로 인해 현재 눈 속에 파묻힌 상태였다.
[씹어 먹을 새끼. 일단 눈부터 파헤치고 나와. 그대로 있으면 체온 계속 떨어진단 말이야!]
렉스의 고함처럼 몰아치던 눈보라에 몸이 눈으로 뒤덮여, 그대로 눈 속에 방치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이성하의 몸은 마음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제길, 안 돼요.’
오랜 시간 눈 속에 파묻힌 덕분인지, 온몸이 동상으로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팔에 힘을 주는 건 포기했다.
[동상 때문이야. 그거론 안 돼. 일단 몸부터 굴려.]
‘굴려요?’
[그래, 혈액 순환부터 시켜야 돼. 어떻게든 반동을 줘서라도 빠져나와.]
‘알겠어요. 으으으으!’
렉스의 말처럼 그나마 힘이 전달되는 상체에 반동을 줘서 몸을 뒤집으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몇 번의 노력 끝에 몸을 뒤집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퍼걱.
“끄응…….”
꽤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얼굴에 눈을 파묻긴 했지만, 온몸을 덮고 있는 눈만을 털어 내는 데만은 성공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빠져나와 다시 무전을 시도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지금 네팔이에요?”
방금까지 애타는 목소리로 자신을 걱정하던 엄마를 향한 무전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들려오는 무전은 엄마가 아니었다.
- 이성하, 양유철이야. 상태는 어때?
“팀장님이십니까?”
- 그래. 어머니와의 대화는 나중에 해. 지금 위치 어디야? 다들 움직일 수는 있는 거야?
심각한 목소리로 상황을 묻는 양유철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에 이성하는 잠깐 앞을 보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저는 가능할 거 같지만, 동료들은 힘들 거 같습니다…….”
쓰러진 동료들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 뭐?
“다들 코마 상태입니다……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할 거 같아요.”
정신을 차린 자신과 달리, 지독한 탈진으로 간신히 숨만 쉬는 게 동료들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무전을 보내던 양유철은 자연히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길…….”
이성하 외에 전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라면, 구조팀 스스로 산을 내려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좌절은 짧았다.
“근석아, 장비 준비하자.”
곁에 있는 박근석을 향해 굳은 표정으로 장비를 챙길 걸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우리가 가자.”
그에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박근석을 향해 담담한 웃음을 지었고, 이내 결심했다는 듯 다시 무전을 보냈다.
“이성하, 지금 있는 위치 어디야?”
- ……네?
“너희들 있는 곳 말이야. 어딘지를 알아야 우리가 구하러 갈 거 아냐?”
직접 구조팀을 조직해, 움직일 수 없는 너희들을 구하겠다고.
“미스터 양. 혹시 지금 올라가시려는 겁니까?”
그런 한국 팀의 분위기에 미국 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양유철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네, 현재 한 명밖에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올라가야죠. 그게 구조대 아닙니까.”
처음 고립된 미국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미국 팀이 단독으로라도 구조를 결정한 것처럼, 자신 역시 구조를 기다리는 부하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 직접 산을 오를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양유철의 말에 반대를 하는 건 미국 대원도, 막 장비를 챙겨 텐트로 돌아온 박근석도 아니었다.
- 콜록, 콜록. 무리입니다……
양유철의 말에 무리라는 이성하의 무전이 들려왔고.
“쓸데없는 소리. 그건 우리가 정해. 그러니까 정확한 위치부터 말해.”
그에 쓸데없는 소리라며 양유철이 위치부터 말하라고 윽박질렀지만, 이어지는 이성하의 말에 양유철은 아무 말을 못했다.
- 저희 아직 캠프3 도착도 못했습니다……
“뭐?”
대원들이 아직도 정상이나 다름없는 캠프3의 위쪽에 있다는 말에, 당황해 할 말을 잊은 것이다.
하지만 이내 양유철은 이성하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고함을 질렀다.
“너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왜 캠프2가 아니고 캠프3이야? 너 지금 혼동하는 거 아냐?”
구조팀이 하산을 시작하겠다며 무전을 보낸 게 벌써 11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그 까마득한 시간을 생각하면 구조팀의 위치는 아무리 늦어도 2캠프 중간에는 위치해야 하는 게 맞는 상황.
하지만 양유철은 구조팀이 중간에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겪은 걸 모르는 상태였다.
- 콜록, 콜록. 중간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크레바스에 빠지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어요. 마음은 고맙지만 팀장님, 구조는 무리입니다…… 캠프1에서 캠프3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시는지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포기하세요. 저희 구하러 오는 구조팀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이성하가 힘겨운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며 구조팀을 파견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고, 그에 양유철은 저도 모르게 손에 있던 무전기를 떨어트렸다.
‘8시간…….’
구조팀이 캠프1에서 캠프3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머릿속으로 떠올라서였다.
무사히 캠프3까지 도달한다 해도 부상자의 수가 여럿이라는 걸 생각하면 돌아오는 데 배의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성하의 말처럼 구조는 무리였다.
‘올라가는 구조팀도 위험해질 수 있다…….’
이성하의 말처럼 자칫하면 추가로 조직되는 구조팀마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무전은 잠시나마 조용해졌다.
“제길…… 왜 캠프2가 아니고 3이야……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분통을 터뜨리는 양유철의 목소리에, 이성하는 조용히 웃음 지었다.
‘어쩔 수 없어…….’
미친 듯이 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능성이 보인다면 살려 달라고.
고함을 지르면서라도 구조팀을 보내 달라고 애원하고 싶지만, 그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렉스…… 여기서 끝이겠죠?’
[제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든든하게 조언하던 렉스마저 아무 말을 못할 정도로, 답이 없는 게 지금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이성하는 필사적으로 무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밑에 있는 선배들이라도 살려야 해.’
안 그래도 몸도 성치 않은 선배들까지 이런 위험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무전에만은 그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 아들. 아니야. 할 수 있잖아. 힘내. 약한 소리 하면 안 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으려는 엄마의 무전이었다.
- 어떻게든 돌아와서 엄마 봐야지…… 응? 아들. 듣고 있어? 아들?
최대한 담담하게,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에 이성하는 차마 답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미안해 엄마…….’
차마 대답이라도 했다간 구조팀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속으로만 눈물을 흘리며 무전을 참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 양 팀장. 나 아까 통화했던 권일섭 대장인데. 지금 미국 구조대도 옆에 있나?
익숙한 권일섭의 목소리가 무전을 통해 흘러나왔다.
- 네, 옆에 있습니다. 선배님. 말씀하시면 됩니다.
- 그래? 안녕하십니까. 한국 소방관 권일섭이라고 합니다. 혹시 의견 있는데 하나 건의해도 되겠습니까?
미국대원들이 바로 옆에 있다는 양유철의 대답에, 권일섭이 바로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며 의견 하나를 내도 되냐며 미국 구조대에 물었고.
- 네, 말씀해 주십쇼.
그에 미국팀장 카일이 괜찮다고 대답하자 권일섭이 바로 의견 하나를 꺼냈다.
- 감사합니다. 제가 현장에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에베레스트 쪽 기상을 체크해 봤는데요. 이 정도면 헬기가 뜨는 거 가능하지 않습니까?
- 뭐라고요?
- 헬기 지원 말입니다. 직접 올라가는 게 안 된다면 헬기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미국 쪽에서 보유하는 헬기 말입니다.
헬기 지원이었다.
그 말에, 무전기를 잡고 있던 양유철이 바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헤, 헬기?”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무전망이 회복돼 구조팀과 무전이 가능해진 것처럼, 어제만 해도 거세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지금은 멈춘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에 미국 팀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헬기로 대원들을 구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왜, 왜요? 이 정도 바람이면 가능한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에베레스트는 날씨와 상관없이 고도 때문에 강한 강풍이 붑니다. 6천 미터 지점을 넘어가면 강풍에 추락할 위험이 있어요. 그리고 헬기 한계고도가 애초부터 6천 미터입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희박한 공기 때문에 엔진 연소가 어렵습니다. 헬기가 가능했다면 애초부터 구조대가 모였던 베이스캠프를 더 위쪽으로 잡았겠죠.”
에베레스트는 기본적으로 헬기 진입이 불가능했다.
바람도 문제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엔진 연소 문제로 헬기가 추락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고, 그랬기에 헬기 지원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위험 부담이 너무 높습니다. 저희도 그렇지만 그래서 네팔 측도 베이스캠프 위쪽으로는 비행한 적이 없어요.”
에베레스트를 관리하고 있는 네팔에서조차 헬기 운용을 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 부담이 너무 큰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에 듣고 있던 권일섭이 코웃음 쳤다.
- 불가능한 겁니까? 아니면 위험해서 망설이는 겁니까?
“뭐라고요?”
- 헬기 운행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고도 한계가 있는 건 구형 헬기뿐입니다. 미국 측에서 가지고 있는 헬기는 아닐 텐데요. 설마 겁먹은 겁니까?
미국 측의 변명이 어울리지 않게 창피해서였다.
고도로 인해 엔진 연소에 문제가 생기는 건 맞았지만, 그건 2000년대 이후 만들어지는 신형 헬기에는 상관없었고, 그에 분노해 고함을 질렀다.
- 제가 상황을 모를 줄 아십니까? 우리 애들이 귀국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태풍 속에 목숨을 걸어 정상까지 올라가 당신 대원들을 구조했고, 그렇게 구조하다 위험에 빠졌으면 당신들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당신들이 구조대입니까? 우리가 손길을 내밀었으면 당신들도 손길을 내밀어야 정상이 아니냔 말이야!
한국의 구조팀이 미국 측을 지원하다 목숨에 빠질 위험에 처했는데도, 규정에 의거해 몸을 사리는 미국 구조팀의 모습에 분노를 참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미국 구조팀은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제길…….”
권일섭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였다.
빠드득.
한국에 있는 소방관의 말처럼 동료를 살려 달라며 구조를 청해 놓고는 몸을 사리는 자신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역겨운 행태가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헬기는 위험이 너무 많았다.
‘자칫하다 중턱에서 추락이라도 했다간 대형 눈사태가 벌어질 수 있어.’
고도 한계 문제가 아니라 강풍 때문에라도 추락할 위험이 높은 게 헬기 운용이었고, 그 때문에 카일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헬기는 힘들지만 어떻게 해서든 구해 오겠습니다.”
“티, 팀장님. 하지만 몸이.”
“시끄럽고 장비 챙겨. 한국 팀 말이 맞다. 어떻게 해서든 구해 온다. 그게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건 동료들에 대한 예의야.”
헬기는 불가능하지만 직접 구조팀을 조직해, 한국 구조팀이 보인 헌신에 보답하겠다며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 아니. 헬기로 갑니다.
영어로 울리는 무전이었다.
“대, 대장님?”
미국 측 팀장인 카일이 대장이라고 호칭하는 것처럼, 이번 미국 구조대를 지휘하는 대장 모스가 무전을 해 온 거였고, 그렇게 이어지는 내용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 미스터 권. 무전 내용 모두 들었습니다. 귀국이 보여 준 우정에 우리는 굉장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뢰에는 신뢰로 보답하는 게 우리 특수재난 구조대입니다. 귀 대원의 신변은 제가 확실히 확보해 안전하게 데려오겠습니다. 믿어 주십쇼.
미국 측 책임자인 모스가 헬기 구조를 결정하겠다고 공식 무전을 보냈으며, 그에 권일섭의 목소리가 다시 무전을 울렸다.
- 이성하. 무전 들었지? 헬기가 갈 거야. 어떻게든 동료들 책임져서 캠프3까지 이동해. 알겠어?
절대 항명은 용서치 않는다는 듯 단호한 음성이 무전을 울렸고, 그에 이성하의 눈이 불을 뿜었다.
“헬기…….”
살 수 있는 희망이 눈에 들어옴에.
꽈아악.
두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