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도 중앙 정계의 기존 귀족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해서 그들과 일단 손을 잡았다.
에반스는 먼저 야만족과의 전투로 징병된 군대를 해산시켜 그들이 바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배려했다.
이어서 제국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조세에 대해서 비교적 탄력적인 운영을 해 나갔다.
세금을 10퍼센트 낮추는 대신 모자라는 세금을 이웃 나라와의 교역과 광산을 통해 해결했다. 대개 광산의 소유자는 그 영지의 영주였다. 하지만 광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대신 광산 개발에 드는 비용은 모두 중앙 정부에서 지출했다.
광산에서 생긴 수입이 고스란히 국가 재정이 되면서 제국의 경제도 약간 숨통이 트였다. 그런 가운데 백성들에게 주어진 10퍼센트의 세금 감면은 제국민들이 다시 살림을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에반스는 수도와 그 주위에 대규모 공사를 벌여 일자리를 늘였다. 그 공사비는 에반스에게 중앙 귀족들이 바친 뇌물로 해결했다.
수도로 통하는 길들이 늘어나고 또 강에 다리가 놓이면서 교역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자 수도를 비롯한 주변 도시들도 발전해 나갔다.
에반스가 재상을 맡고 반년 동안 제국은 어느 정도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발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죽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국에서 가장 바쁜 인물인 친왕 에반스였다.
에반스는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제국의 정무를 처리했다. 그런 에반스에 못지않게 바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곤잘레스였다.
“내가 미쳤지.”
곤잘레스는 에반스의 수하가 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 동안 곤잘레스는 잠 한숨 자지 못했다.
돈을 벌겠다고 에반스의 수하가 되었는데 돈은커녕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곤잘레스는 에반스의 재정 고문이었다. 돈에 관한 한 에반스는 주로 곤잘레스와 상의해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에반스가 추진하는 일들 중 돈에 관련되지 않은 일은 없었다. 때문에 곤잘레스는 항상 에반스와 붙어 다니며 그를 보좌해야 했다. 휑한 얼굴에 살이 쪽 빠진 곤잘레스는 살아 있는 송장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이 곧 쓰러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무리를 해도 말이다. 곤잘레스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다 에반스 때문이었다. 에반스가 주술로 곤잘레스의 피로를 풀어 주었고 그의 건강도 챙겨 주었던 것이다.
물론 순전히 곤잘레스를 부려 먹기 위해서 베푼 호의였지만 말이다. 에반스의 이런 노력으로 인해 제국은 전란을 극복해 냈다. 이제 제국민들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에반스도 이제 정무에서 서서히 손을 놓고 있을 무렵 뜻밖의 손님들이 그를 찾아왔다.
“누구라고?”
“베일리 후작과 아놀드 후작입니다.”
바로 렉터 공작을 살해한 배은망덕한 다섯 제자들 중 둘이었다.
‘드디어…….’
수도에 있으면서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다. 렉터 공작의 다섯 제자들에 대한 응징 말이다. 이미 다섯째 제자인 카베인은 죽였지만 나머지 넷이 남아 있었다. 에반스는 이제 렉터 공작의 일을 처리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제 렉터 공작도 그 영혼이 편안히 영면할 때가 된 것이다.
“그들을 후원으로 안내하라.”
에반스가 집사에게 말했다.
“후원 말입니까?”
지금껏 에반스는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았다. 손님 접견 뒤 바로 정무를 돌보러 가기에는 응접실이 제일 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원에서 손님을 만나겠다니 집사도 의외였다.
“그들을 후원으로 안내하고 누구도 후원 근처에 들이지 말라.”
에반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 전하.”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령에서는 물론 자신이 아는 그 누구도 재상부에 데려오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도 모두 압실론 후작성에 있었다.
재상의 자리를 맡은 반년 동안 에반스는 곤잘레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새로 뽑았다.
에반스는 제국이 안정되면 언제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측근들을 굳이 수도로 데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가족과 같은 안드레이 공작, 프레드릭 백작, 라르손과 라일라. 그리고 그의 두 제자인 시스턴과 루미나, 루크 등등 압실론 후작성에 있는 그들이 보고 싶었다.
“이제 돌아가야겠군.”
제국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이제 에반스가 없더라도 새로운 재상이 충분히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터였다.
에반스는 렉터 공작의 복수를 끝내면 황제에게 얘기해서 재상의 자리를 내놓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전하. 손님들을 후원으로 모셨습니다.”
그때 집사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알았다.”
에반스는 장식장에 걸린 세 자루 검을 챙겨 들고 후원으로 향했다.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은 친왕 에반스를 만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재상이 된 친왕 에반스는 너무 바빴다. 그래서 그 접견이 하루 이틀 미뤄지다가 어느 새 반년이나 지난 것이다.
오늘도 허탕을 치고 물러나야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에반스가 그들을 만나 주겠다고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에반스가 재상이 되고 중앙 정계가 재편되면서,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도 맡고 있었던 수도 방위군의 총사령관의 자리와 황궁 수비대 총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대신 그들은 새로 재편된 중앙군의 군단장 자리에 올랐다.
에반스가 소드 마스터인 그들의 능력을 인정해서 군부의 요직을 맡겼던 것이다. 레이놀드 공작도 계속 국방장관의 자리에 두었고 데보라의 아비인 도널드 후작은 수도 방위군의 총사령관을 맡겼다.
에반스도 데보라의 죽음을 전해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에반스의 손에 제거되어야 할 배덕자들이었다.
에반스는 그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그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계속 요직에 두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은 에반스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뇌물까지 챙겨서 에반스를 찾아왔다.
“이쪽으로…….”
친왕부로 들어선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은 당연히 친왕부 내부로 들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친왕부의 집사는 그들을 후원으로 안내했다.
친왕부의 후원은 널찍했고 주위로 나무도 많았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집사는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을 남겨 두고 친왕부 내부로 들어갔다.
“뭐지?”
“그러게 말입니다. 왜 여기서…….”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이 어리둥절해 할 때 친왕부에서 친왕 에반스가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의 손에 검이 세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뒤 에반스가 그들 앞에 섰다.
“반갑소.”
에반스가 먼저 말을 하자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이 일단 에반스에게 허리를 숙였다.
“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베일리 후작이 대표로 에반스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에반스가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왜 나를 보자고 하셨소?”
에반스의 물음에 베일리 후작은 친왕이 성질 꽤나 급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중앙군의 군단장이 된 뒤 한 번 뵈올 기회가 없어서 이렇게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중앙군의 군단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친왕 에반스 때문이었다. 그들도 군부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누가 그들을 군단장으로 추천했는지 정도는 잘 알았다.
“이건 약소하지만…….”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이 가져온 선물을 에반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들고 있던 세 자루의 검을 내려놓고 그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선물을 한쪽에 두고서 세 자루의 검 중 두 자루를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에게 건넸다.
“이걸 왜…….”
에반스로부터 검을 받아 든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이 어리둥절해 할 때 에반스가 말했다.
“아마 내 말을 듣고 나면 왜 내가 그 검을 그대들에게 줬는지 알 수 있을 거요.”
그 말을 하며 에반스도 남은 검 한 자루를 챙겨 들었다.
어리둥절한 채 에반스를 쳐다보고 있는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을 향해 에반스가 말했다.
“그대들의 자식인 케이런과 페이슨을 죽인 게 바로 나요.”
“지, 지금 뭐라고 했소?”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이 깜짝 놀라 에반스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에반스가 태연하게 웃으며 반말로 말했다.
“케이런과 페이슨은 내가 죽였다.”
순간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바우우웅!
그 살기에 땅이 진동하며 후원 주위 나무들이 흔들렸다. 그만큼 소드 마스터인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의 분노는 대단했고 그들이 은연중 내뿜는 기운도 엄청났다.
에반스는 그들이 내뿜는 살기를 통해 그들이 이미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대단하군.’
에반스가 예상했던 대로 렉터 공작의 제자들은 강했다. 그때 살기를 억누르며 베일리 후작이 에반스에게 말했다.
“왜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하는 것이냐?”
베일리 후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바로 대답했다.
“그래야 당신들이 검을 뽑을 테니까.”
“왜지? 왜 내 아들을, 페이슨을 죽였나?”
그때 격분한 아돌프 후작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당신들은 어째서 그대들의 스승인 렉터 공작님을 죽였소?”
에반스의 물음에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이 깜짝 놀랐다.
“헉! 너, 너는 누구냐?”
“나도 당신들처럼 렉터 공작님의 제자요.”
에반스가 대답하자 베일리 후작이 에반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 그랬군. 그래서 그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었군. 너도 검공의 검술을 익혔나?”
“…….”
에반스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아돌프 후작이 굳은 얼굴로 베일리 후작에게 말했다.
“사형. 내가 맡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아돌프 후작이 먼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감히, 네놈이 내 아들을 죽여? 흐흐흐. 이놈, 곧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아돌프 후작이 검 끝을 에반스에게로 향하자 에반스 역시 주저하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아돌프 후작의 검은 흘러드는 햇빛을 반사하며 하얗게 빛을 뿜었다.
곧게 세워진 아돌프 후작의 검이 아주 천천히 각도를 바꾸며 움직이는 순간, 에반스는 그 폭발하는 듯 붉게 흔들리는 검광에 감탄했다.
소드 마스터답게 아돌프 후작은 시작부터 오러 블레이드를 쓰려 하고 있었다.
파팟!
눈 깜짝할 사이 아돌프 후작의 모습이 사라졌다. 동시에 에반스도 언제 사라졌는지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터엉!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아돌프 후작과 에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너무 빠르다 보니 눈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몸동작이 그렇게 빠른데 검속은 어떻겠는가?
촤차차차창!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들 몸 주위로 불똥이 튀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는데 그들이 움직인 뒤에 이어 그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검속이 소리보다 빨랐던 것이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는 베일리 후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사제인 아돌프 후작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했다.
그런데 그런 아돌프 후작을 상대로 젊은 에반스가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베일리 후작에 비하면 약간 실력이 떨어지는 아돌프 후작이었지만 그도 명색이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실력자였다.
에반스와 아돌프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가 충돌할 때마다 그들의 머리카락도 한 올, 한 올 위로 솟구쳤다.
그만큼 둘은 근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뭐든 다 잘라 낸다. 때문에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소드 마스터끼리 접근해서 싸우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웃!”
아돌프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 때문에 직접 닿지도 않았는데 에반스의 옷자락이 휘릭 베여 휘날렸다.
에반스의 머리칼도 몇 가닥 끊겨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살아 있는 듯 윙윙대는 아돌프 후작의 검을 바로 코앞에서 보며 에반스는 겁 없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아돌프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가 순식간에 대기를 가르며 에반스를 향해 날아왔다. 에반스는 뒤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피할 사이도 없었다.
스팟!
에반스의 앞섶이 그대로 잘려 나가고 화끈한 감각이 가슴에서부터 일어났다. 하지만 그 핏방울이 흘러내릴 사이도 없이 에반스가 검을 돌려 아돌프 후작의 무시무시한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 냈다.
촤창!
에반스의 검이 아돌프 후작이 오러 블레이드를 튕겨 내자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금방 펼쳐 보인 검술은 아돌프 후작이 자신보다 더 강한 두 사형을 상대하기 위해 창안해 낸 검술이었다. 그런데 에반스가 그 검술을 막아 냈던 것이다.
당혹한 얼굴의 아돌프 후작을 보고 에반스가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아돌프 후작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에반스는 그 순간 오히려 두 걸음 앞으로 다가들었다.
에반스가 그의 몸을 아돌프 후작의 몸과 거의 붙을 정도로 바짝 가까이 들이대자, 아돌프 후작이 검 끝을 들어 에반스의 접근을 막았다.
서걱!
그때 에반스의 검이 아돌프 후작의 검과 부딪쳤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아돌프 후작의 검이 에반스의 검에 사악 잘려 나갔다.
“헉!”
아돌프 후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얼굴이 굳었다. 물러날 곳도 피할 방법도 없었다. 이미 에반스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돌프 후작의 몸에 닿아 있었다. 아돌프 후작이 제아무리 빨라도 에반스의 검속보다는 빠를 수 없었다.
번쩍!
에반스의 검이 빛나고 오러 블레이드가 아돌프 후작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돌프 후작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아돌프 후작의 입술이 달싹거리자 동시에 그의 허리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이어 그의 가슴 위로 다시 하나의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오러 블레이드도 그 수준이 있는 법!”
에반스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아돌프 후작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순간 아돌프 후작의 목에도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에반스는 분명 한 번 검을 휘둘렀는데 아돌프 후작의 몸에는 세 곳에 검상 흔적이 남았다.
츄아아악!
허리와 가슴, 그리고 목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이어 아돌프 후작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그의 몸이 땅바닥에 엎어졌다. 순간 그의 가슴 위 상체와 허리 위 몸통이 분리되어 그 안의 장기들이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일리 후작의 얼굴이 급격히 싸늘하게 굳었다.
에반스의 검에는 아돌프 후작의 피 따윈 묻어 있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가 감싸고 있는 그의 검에 핏방울이 묻을 리 없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요.”
에반스가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들어 베일리 후작을 가리켰다. 그러자 베일리 후작이 검을 뽑았다.
베일리 후작도 보았다. 에반스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돌프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를 잘라 버리는 것을 말이다.
뭐든 못 자를 것이 없다는 오러 블레이드가 같은 오러 블레이드에는 잘렸다. 베일리 후작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 말을 믿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튼 에반스의 오러 블레이드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런 에반스를 상대하기 위해서 베일리 후작은 어떻게 싸워야 할지 빠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세를 낮추어 잡았다. 그가 자세를 잡는가 싶은 순간 그는 이미 에반스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에서 빛이 번쩍였다.
파파파팟!
쏘아진 화살처럼 조금도 군더더기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 오는 빛은 바로 검탄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4개의 검탄이 에반스를 노리고 날아왔다.
에반스가 들고 있던 검을 회전시키자 원형의 검막이 형성되었다.
콰쾅!
두 개의 검탄을 피하고 나머지 두 개의 검탄이 에반스가 만들어 낸 원형의 검막에 맞아 폭발했다. 검탄을 쏘아 낸 뒤 베일리 후작은 에반스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그러자 에반스도 베일리 후작이 다가서는 만큼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에반스와 베일리 후작은 쫓고 쫓기는 한 덩어리의 고리가 되어 후원 주위를 빙빙 돌았다.
“놈. 서라.”
베일리 후작이 빠르게 에반스를 쫓자 에반스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어리석은…….”
에반스가 베일리 후작을 향해 검을 겨눴다.
번쩍!
그리고 그의 검에서 섬광이 일었고 동시에 그의 검에서 검탄이 발출되었다.
“헉!”
에반스를 쫓던 베일리 후작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검이 다급히 회전했다. 에반스와 같이 검막을 만들어 에반스의 검탄을 막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반스가 내뿜은 검탄은 그 개수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또한 그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검탄이 시간차를 두고 베일리 후작에게 날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콰쾅!
먼저 베일리 후작의 가슴으로 날아간 검탄들이 베일리 후작이 만들어 낸 검막에 맞아 폭발했다. 그 후 폭발에 베일리 후작의 몸이 들썩였다.
“크윽!”
그때 간발의 시간차로 베일리 후작의 하체 쪽으로 검탄이 날아들었다.
“젠장!”
베일리 후작이 다급히 소리쳤다. 베일리 후작이 회전시켜 만들어 낸 검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베일리 후작은 다급히 들고 있던 검으로 날아오는 검탄을 막았다.
쾅! 쿠앙!
“크아아악!”
하체로 날아든 검탄 두 개는 어떻게 검으로 쳐 냈지만 나머지 검탄은 막지 못했다. 검탄이 폭발하며 베일리 후작의 하체를 휩쓸었다. 비명과 함께 하체가 피투성이가 된 베일리 후작이 뒤로 휘잉 하니 날아가 쓰러졌다.
털썩!
무릎 아래 두 다리가 사라진 베일리 후작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상체를 일으켜 두 다리의 상태를 보고 절망했다.
“잘 가시오.”
그때 에반스의 말이 베일리 후작의 귀에 들렸다. 그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베일리 후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쉬리릭!
에반스의 검에서 발출된 검탄이 베일리 후작의 머리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퍼엉!
폭발과 함께 베일리 후작의 머리통이 터졌다.
털썩!
머리가 사라진 베일리 후작의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런 베일리 후작과 앞서 죽은 아돌프 후작의 시신을 쳐다보며 에반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늘 복수를 끝낸다.”
에반스는 들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후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집사를 불렀다.
“국방장관 레이놀드 공작과 수도 방위군 총사령관인 도널드 후작에게 내가 급히 찾는다고 전하게.”
“네. 전하.”
친왕부에서 레이놀드 공작과 도널드 후작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먼저 에반스의 연락을 받은 것은 도널드 후작이었다.
중앙군의 시찰에 나섰던 국방장관 레이놀드 공작은 저녁이나 되어야 수도로 올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도널드 후작이 친왕부를 찾아왔다. 에반스는 도널드 후작을 후원에서 맞았다. 후원에는 먼저 죽은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후원에 널려 있는 시신을 발견하고 도널드 후작이 놀란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신 중 아돌프 후작의 머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셋째 사형이 어째서…….”
그때 도널드 후작의 눈에 또 다른 시신이 보였다. 머리통이 보이지 않는 참혹한 시신은 분명 그의 둘째 사형인 베일리 후작이었다.
아돌프 후작에 이어 베일리 후작의 시신까지 확인한 도널드 후작이 반쯤 넋이 나간 채 서 있을 때 에반스가 말했다.
“렉터 공작님께서 전해 달라는군.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렉터 공작이란 말에 도널드 후작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 너는 누구냐?”
“받아라.”
에반스는 대답 대신 검 한 자루를 도널드 후작에게 던졌다.
척!
도널드 후작이 그 검을 잡자 에반스가 먼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도널드 후작에게 말했다.
“내가 공격하면 넌 공격할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덤벼라.”
에반스의 말에 신중한 성격답게 도널드 후작의 두 눈이 빠르게 이리저리 돌아갔다. 시신이 있고 그 자리에 에반스가 있다는 것은 그가 직접 두 사형을 죽였다는 소리였다.
두 사형 모두 도널드 후작보다 검술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 두 사형이 당했다면 도널드 후작이 에반스를 이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널드 후작은 살고 싶었다. 아니, 살아야 했다.
도널드 후작은 살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다.
‘여기만 벗어나면 된다.’
후원에서 친왕부의 건물은 그리 멀지 않았다. 또 친왕부 건물에서 바깥까지도 먼 거리는 아니었다.
‘싸우는 척하다가 도망친다.’
결심을 굳힌 도널드 후작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주입시켰다. 자줏빛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검을 휘감았다.
우우우웅!
“타앗!”
먼저 움직인 것은 도널드 후작이었다. 그는 에반스를 향해 강하게 일격을 가하고는 바로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쪽 방향이 바로 친왕부 건물이 있는 쪽이었다.
“두고 보자.”
그 말을 하고 몸을 돌린 도널드 후작이 휑하니 친왕부 건물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그런 도널드 후작을 쳐다보고 있는 에반스의 얼굴에 비릿하니 조소가 어렸다.
타타타탓!
도널드 후작은 흐릿하니 잔상을 남기고 에반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에반스는 별로 놀라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스르르르!
그때 에반스 앞에 도널드 후작이 다시 나타났다.
“헉!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도널드 후작은 친왕부 건물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뛰어도 친왕부 건물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걸음을 멈췄을 때 그의 눈앞에 에반스가 서 있었다.
휘이이익!
그때 에반스가 한 발 내디디며 도널드 후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에반스의 오러 블레이드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휘익 휘어지며 도널드 후작의 어깨를 후려갈겼다.
“헉!”
그러자 도널드 후작이 다급히 검을 들어 에반스의 검을 막았다.
촤앙!
도널드 후작이 에반스의 검을 막아 내는 순간, 도널드 후작의 검에서 검탄이 뿜어져 나왔다.
워낙 근거리라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지만 에반스는 잽싸게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에반스의 검에 부딪친 도널드 후작의 검탄이 쩡쩡대는 소리와 함께 일체 폭발 없이 간단히 막혔다.
그런데 그때 도널드 후작의 검탄을 막기에도 급급해 보였던 에반스의 검이 되레 검탄을 뿜어냈다. 그러자 도널드 후작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워낙 근접해 있던 터라 에반스의 검탄이 그대로 도널드 후작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크윽!”
도널드 후작의 옆구리에서는 핏줄기가 흘렀지만 그것을 지혈할 사이는 없었다. 반격의 기회를 잡은 에반스가 도널드 후작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촤차차창!
막느라 정신없었던 도널드 후작의 목덜미를 노리며 에반스가 그대로 달려들었다. 도널드 후작은 옆구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에반스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막아 낸 것인가 하는 순간, 에반스의 검이 쭈욱 미끄러지면서 도널드 후작의 검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는 도널드 후작의 오른팔을 그대로 휘젓고 지나갔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도널드 후작이 반쯤 잘린 팔뚝을 움켜쥐고 뒤로 단숨에 물러섰다. 하지만 에반스는 그대로 도널드 후작의 움직임을 따라 달려들었다.
파파팟!
잠깐 사이 도널드 후작은 팔뚝과 허벅지, 옆구리에서 피를 흘렸다. 피잉 소리를 내면서 다시 한 번 도널드 후작의 가슴팍에 길고도 긴 상처가 생겨났다.
“타앗!”
부상에도 도널드 후작은 괴성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가 휘두른 곳에는 에반스가 없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도널드 후작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에반스의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목을 향해 그대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서걱!
도널드 후작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털썩!
먼저 도널드 후작의 몸통이 쓰러지고 나서 그 위로 도널드 후작의 머리통이 떨어졌다.
데구루루!
도널드 후작의 머리가 앞서 잘린 아돌프 후작의 머리 옆으로 굴러갔다.
친왕 에반스가 제국의 중앙 정계를 장악한 지 어느새 반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새파란 재상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친왕 에반스는 보란 듯 중앙의 귀족들을 잘 아우르며 전란으로 피폐해진 제국을 재건해 냈다.
그 점만은 레이놀드 공작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왕 에반스는 너무 바빠서 레이놀드 공작도 대전 회의 때가 아니면 그를 만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몇 차례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려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했던 친왕 에반스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그것도 황궁에서도 아니고 친왕부에서 보자고 했다. 중앙군을 시찰하고 해가 질 무렵 수도로 돌아온 레이놀드 공작은 대충 옷만 갈아입고 친왕부로 향했다. 그때는 이미 해가 졌고 사위는 어두웠다.
그가 친왕부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그를 맞았다.
“친왕께서는 어디 계신가?”
“저를 따라오십시오.”
집사가 그를 데리고 향한 곳은 친왕부 건물 뒤쪽이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레이놀드 공작의 물음에 집사가 손짓으로 후원 쪽을 가리켰다. 그때 후원에 불을 밝힌 채 혼자 서 있는 친왕 에반스의 모습이 보였다.
“됐네. 자네는 그만 가 보게.”
레이놀드 공작은 곧장 에반스가 있는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어서 오시오.”
에반스가 레이놀드 공작을 맞아 주었다.
“친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여러 가지로 복잡한 얼굴로 레이놀드 공작이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반스가 대답 대신 후원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테이블이 있고 그 테이블 위로 두 개의 술잔과 두 자루의 검이 올라 있었다. 에반스가 먼저 두 개의 술잔을 들어 그중 하나를 레이놀드 공작에게 건넸다.
레이놀드 공작은 에반스가 건네는 술잔을 일단 받아 들었다. 그때 에반스가 술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대가 스승께 넣었던 것처럼 독을 넣지는 않았으니 걱정 마시오.”
에반스의 말에 레이놀드 공작이 흠칫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렉터 공작께서 그대를 보고 싶어 하시오.”
“너, 너는 누구냐?”
눈치 빠른 레이놀드 공작이 소리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후원 주위에 밝혀진 화톳불 주위로 눈에 익은 얼굴 두 개가 보였다.
“저, 저건…….”
나란히 땅바닥에 놓여 있는 그 두 얼굴은 바로 그의 사제들인 아돌프 후작과 도널드 후작이었다.
그때 에반스가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두 자루의 검을 양손에 챙겨 들었다. 그리고 그중 한 자루를 레이놀드 공작에게 홱 던졌다.
척!
레이놀드 공작이 보지도 않고 오른손을 뻗어 그 검을 받았다.
“무슨 의도지?”
레이놀드 공작이 눈빛을 빛내며 에반스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검을 고쳐 쥐며 피식 웃었다.
“얘기했을 텐데. 렉터 공작이 너를 보고 싶어 한다고 말이야.”
이미 죽은 렉터 공작이 레이놀드 공작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레이놀드 공작이 아니었다. 레이놀드 공작이 에반스가 던져준 검을 보고 말했다.
“내 사제들을 죽인 게 넌가?”
아돌프 후작과 도널드 후작의 수급이 널브러져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며 레이놀드 공작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렇다.”
에반스가 짧게 대답했다.
“다 죽였나?”
보이지 않는 베일리 후작도 죽였냐는 물음이었다.
“물론. 너의 사제들도 아마 지옥에서 널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에반스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런 에반스를 보며 레이놀드 공작이 피식 웃었다.
“후후후.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경지인 내 사제들을 이기다니. 대단하군. 하지만 그들과 나는 수준이 다르다.”
레이놀드 공작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실력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 보였다.
렉터 공작을 통해 검공의 검술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레이놀드 공작이었다. 그래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까지 넘어선 그가 아니던가? 그의 눈에 에반스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다.
“내게 검을 준 것을 너는 곧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레이놀드 공작이 먼저 검을 뽑았다. 그러자 에반스도 무덤덤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콰앙!
일직선의 부딪침. 검과 검이 부딪치고 오러와 오러가 폭발했다.
파파팟!
둘의 검이 교차하면서 자연스럽게 근접한 레이놀드 공작과 에반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순간 레이놀드 공작이 섬뜩한 눈동자로 에반스를 쏘아보았지만 에반스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그런 에반스를 보고 레이놀드 공작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렉터 공작이 전수한 검공의 검술은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 불완전한 검술을 익힌 레이놀드 공작과 검공으로부터 직접 완벽한 검술을 전수받아 마스터한 에반스였으니 싸움은 에반스가 유리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실제 싸움은 그렇지 못했다. 에반스가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웃는 얼굴의 입가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레이놀드 공작은 강했다. 에반스도 처음 자신이 패할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렉터 공작의 첫째 제자답다.’
자신의 검술에 자긍심을 가져도 될 만큼 레이놀드 공작은 강했다. 하지만 에반스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것은 마찬가지였다. 누가 더 그랜드 마스터에 근접했는지가 승패를 가늠할 터였다.
“참. 한 가지 알려 주지 못한 것이 있군. 네 아들 앨빈 말인데, 내가 죽였다.”
“뭐? 이노옴…….”
레이놀드 공작도 사람이었다. 자식을 죽인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마음의 평정심이 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화가 난 레이놀드 공작이 휘이잉 소리를 내며 에반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의 오러 블레이드가 에반스의 상체를 그대로 베어 내려왔다.
에반스가 검을 들어 레이놀드 공작의 공세를 막았다.
쾅!
오러와 오러가 충돌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이어 레이놀드 공작이 휘두르던 검을 살짝 뒤틀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에반스와 검을 부딪친 후 그도 느꼈던 것이다. 에반스가 결코 자신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에반스의 검이 일직선으로 레이놀드 공작의 배를 찔러 들어갔다.
물론 유연한 레이놀드 공작의 몸은 살짝 돌아가며 무희처럼 가볍게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그때 에반스가 그 피해 내는 레이놀드 공작의 허리춤을 향해 검탄을 뿜어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무려 다섯 번에 걸쳐서 말이다.
하지만 레이놀드 공작은 춤추듯 가뿐히 에반스의 검탄을 피해 냈다. 두세 번은 몰라도 다섯 번이나 되는 검탄을 다 피해 내지는 못할 거라 여겼는데 레이놀드 공작은 에반스를 실망시키며 그저 몸을 뒤흔드는 동작만으로 에반스의 검탄을 피해 냈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레이놀드 공작이 에반스를 흥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가 검탄을 다섯 번이나 뿜어내자 레이놀드 공작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시간 끌 것 없이 단번에 승부를 봅시다.”
에반스의 외침에 레이놀드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에반스가 레이놀드 공작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타앙 하고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블레이드가 격돌했다. 순간, 두 검 사이에서 불꽃이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주변을 화염으로 뒤덮었다. 그 불길 안에서 에반스와 레이놀드 공작은 빠르게 검격을 교환했다.
그러다 둘이 동시에 떨어졌다. 10여 걸음 거리를 둔 채 둘의 검이 상대를 겨눴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검탄을 내뿜었다.
콰콰콰쾅!
둘의 검탄이 허공에서 맞부딪쳐 충돌하며 그 여파로 지축이 울리고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렸다. 에반스와 레이놀드 공작의 몸 주위에는 오러로 형성된 방어막이 쳐져 있었다.
쾅! 쾅!
서로 발출한 검탄이 허공에서 부딪치지 않고 비켜난 경우 그 검탄은 여지없이 상대의 방어막을 강타했다.
승부는 누가 더 많은 검탄을 발출해 내고 또 그 검탄을 방어막으로 막아 내는가로 결판 짓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 에반스가 움직였다. 검탄을 쏘며 몸에 방어막을 형성한 채 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에반스를 보며 레이놀드 공작의 얼굴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반스가 근접하며 레이놀드 공작이 발출해 낸 검탄을 자신의 검탄으로 막아 냈다.
세 걸음까지 근접해 들어가자 위기 의식에 레이놀드 공작이 방어막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에반스가 더 빨랐다. 에반스의 검이 막 방어막을 거둔 레이놀드 공작의 하체를 찔러 들어갔다. 에반스가 내지른 일직선의 검이 레이놀드 공작의 다리를 꿰뚫는 순간 짧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순간적으로 레이놀드 공작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오러가 약해지며 그는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에반스의 검이 단지 꽂히기만 했는데도 레이놀드 공작의 한쪽 다리는 말 그대로 잔뜩 뒤틀리며 그대로 잘려 나가 버렸다.
“……졌다.”
레이놀드 공작이 끊어질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리가 잘린 이상 둘의 싸움은 무의미해졌다. 에반스는 피를 줄줄 흘리고 넘어진 레이놀드 공작에게 다가가서 들고 있던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스팟!
레이놀드 공작의 목에 한 줄기 혈선이 그어졌다. 그때였다. 에반스의 머릿속으로 렉터 공작의 목소리가 공명했다.
-고맙구나. 이제 떠나야겠다. 부디 너의 바람대로 훌륭한 영주가 되거라.
원혼이 그 염원이 해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승천하고 있었다.
“스승님!”
에반스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묵념하며 렉터 공작을 조용히 떠나보냈다. 잠시 뒤 눈을 뜬 에반스는 검을 든 채 친왕부를 나섰다.
“피를 보는 것은 오늘이 끝이다.”
그 말을 하고 에반스가 향한 곳은 대내궁장관 허크스 백작의 저택이었다. 친왕 에반스와 함께 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바로 허크스 백작이었다.
그동안 에반스가 지켜봐 온 허크스 백작은 제국에 있어서 불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황제와 에반스를 오가며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챙겼다. 향후 에반스가 수도를 떠나면 능히 제국을 도탄에 빠트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위험한 자를 그냥 두고 떠날 에반스가 아니었다. 검을 든 에반스가 허크스 백작의 저택을 넘어갔다.
“아아아악!”
저택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얼마 뒤 시커먼 실루엣이 저택을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유유히 모습을 감췄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개인적으로 렉터 공작의 복수까지 마친 에반스는 다음 날 황제 레온 2세를 찾아갔다.
“떠, 떠나겠다니?”
어찌나 놀랐던지 대전의 황제가 깜짝 놀라 옥좌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에반스는 차분히 말했다.
“이제 제국은 고난의 그늘에서 벗어났습니다. 새로운 재상과 폐하께서 충분히 통치해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황제와 대신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에반스는 모든 짐을 훌훌 털어 내고 대전을 빠져나왔다. 그때 허크스 백작의 측근으로 에반스도 잘 아는 대내궁의 신료가 황급히 대전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허크스 백작의 죽음을 알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날 황제는 모든 정무와 행사를 취소하고 자신의 방에 칩거했다. 제국을 이끌었던 두 기둥이 그의 곁을 떠나자 상실감이 너무 컸던 것이다.
에반스는 친왕부에 들러서 곤잘레스를 비롯한 자신과 같이 떠나기로 한 수하들과 만났다. 그리고 곧장 수도를 떠났다. 그가 막 수도의 외성을 지날 때였다. 한 상단의 무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에반스 님!”
그 상단 무리의 맨 앞에 있던 상단의 우두머리가 에반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아니, 당신은…….”
놀랍게 그 상단을 이끌고 있는 자는 바로 다이안이었다.
“에반스 님의 도움으로 제너럴 상단이 다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에반스는 자신의 대영지와 수도에서 다이안의 상단에 도움을 주었다. 제너럴 상단의 부활은 사실상 에반스의 도움이 컸다. 그것을 잘 아는 다이안이 에반스에게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에반스가 보기에 지금 다이안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안해 보였다. 한때 그녀를 마음에 두었던 에반스는 그녀를 보고 그녀가 가야 할 길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마음껏 훨훨 날아 보시오.’
상인으로 다이안은 앞으로 할 일이 많을 터였다. 에반스는 자신으로 인해 그녀의 날개를 꺾고 싶지 않았다.
“또 봅시다.”
“네. 영지에 들르게 되면 꼭 찾아뵙지요.”
다이안과 작별을 하고 에반스와 그 일행이 막 외성의 성문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저 여자는…….”
에반스가 막 외성의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사람들 속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로 남쪽 숲에서 살아 돌아갔던 레이나였다.
소문에 그녀는 죽었다고 했지만 에반스는 그녀가 어딘가에 분명 살아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 그녀를 에반스가 발견한 것이다.
수도로 들어가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속에서 레이나는 등에 아이를 업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왠지 초조해 보였다.
아마도 부친인 도널드 후작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에반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수하 중 하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수도에 남아서 저 여자와 아이를 돌봐 주어라.”
에반스는 수하 한 명을 남겨 두고 수도를 떠나 그의 영지로 향했다.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에반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이나 다름없는 안드레이 공작, 프레드릭 백작, 라르손과 라일라. 그리고 그의 두 제자인 시스턴과 루미나, 루크 등등 그의 영지에 있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힘차게 말을 몰았다.
열흘 뒤 에반스와 그 일행이 옛 압실론 후작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성문에 도착하기 전에 예상 밖의 인물들이 앞서 그를 맞아 주었다.
“칼! 엘렌!”
에반스를 도와 압실론 후작령의 정보조직을 맡아 음지에서 줄곧 일해 온 칼과, 에반스의 명령으로 여자로서는 최초로 영주가 된 엘렌이 에반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칼과 엘렌의 옆에는 각기 다른 이성들이 서 있었다. 칼의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데이지로 에반스도 잘 알았다. 그리고 엘렌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놀랍게 마법사 루크였다. 그런데 그들 모두 품에 소중히 아이를 안고 있었다.
“하하하.”
에반스는 크게 웃으며 그들을 일일이 안아 주었다. 그때 성문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거기서 뭐 하는 건가?”
“영주님!”
“스승님!”
안드레이 공작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를 불렀다. 에반스는 소중한 사람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