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족의 칼에 맞아 내장을 쏟은 채 꼬꾸라진 제국군의 젊은 병사가 자신이 만들어 낸 피 웅덩이에서 절규했다.
“어머니! 어머니!”
그러나 다음 순간, 야만족이 모는 말이 그 위를 지나가자 뼈가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냘픈 절규의 외침마저 사라져 버렸다.
“크아아악!”
차차차창!
전장을 가득 메운 비명과 금속성, 그리고 피 냄새가 야만족과 제국군 병사들을 미치게 했다.
“크흐흐흐. 죽어!”
죽음을 본 자의 광기와 피를 본 자의 살의가 어우러져 더욱 많은 수의 죽음을 불렀다. 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질긴 놈들…….”
자신을 향해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야만족을 베어 내며 레이놀드 후작이 치를 떨었다. 죽이고 죽여도 야만족들은 계속 덤볐다.
한 제국군 병사가 내지른 창에 의해 복부를 관통당한 야만족이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겨 들고 있던 도끼로 그 병사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 야만족은 자신의 몸을 관통한 창을 뽑아내어 그를 향해 달려들던 제국군 병사를 향해 던진 후에야 숨을 거두었다.
“이얍!”
수많은 창칼에 난자당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야만족이 쥐어짜는 듯한 기합과 함께 몇 명의 제국군 병사들을 더 베어 죽였다.
화살에 맞아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린 또 한 명의 야만족은 제국군 궁수들을 향해 검을 치켜든 자세 그대로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쓰러졌다.
야만족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 제국군 대여섯 명이 희생되었다. 그 소름 끼칠 정도로 가공할 투지에 제국군이 압도되었다.
하지만 제국군에는 또 한 명의 전쟁 영웅 레이놀드 후작이 있었다. 그의 활약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전투 초반기 야만족은 지옥 주술사들이 마계 괴물들을 소환해서 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레이놀드 후작 앞에 마계 괴물은 얌전한 애완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놀드 후작이 마계 괴물을 비롯해 지옥 주술사들의 목을 다 날려 버리면서 전투는 다시 제국에 유리해졌다.
하지만 야만족은 그야말로 악착같이 싸웠다. 그 기세에 밀려 곳곳에서 제국군의 전열이 붕괴되었다. 그때마다 언제 나타났는지 레이놀드 후작이 그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일방적인 도살극을 펼치며 야만족들을 쓸어버렸다.
제국군에 악귀 같았던 야만족들도 레이놀드 후작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하지만 레이놀드 후작도 혼자서 야만족들을 전부 상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야만족과의 전투가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빌어먹을…….”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덤벼드는 야만족의 발악에 4만의 중앙군의 피해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2만의 야만족을 상대로 두 배나 많았던 중앙군은 이제 절반인 2만으로 확 줄어 있었다. 그에 비해 야만족은 아직 그 수가 만여 명에 달했다.
이대로라면 야만족을 괴멸하고 나서 중앙군 병사가 얼마 남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놀드 후작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바우우웅!
레이놀드 후작이 내뿜는 시뻘건 오러 블레이드에 수십 명의 야만족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아, 악마다.”
제국군을 질리게 만들었던 야만족들이 오히려 레이놀드 후작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쳤다. 그 정도로 야만족에게 레이놀드 후작은 악신의 강림이나 다름없었다.
레이놀드 후작의 이런 노력이 제국군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레이놀드 후작을 보고 힘과 용기를 얻은 제국군이 야만족을 몰아붙이면서 전황은 급격히 제국군에 기울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났을 때 살아남은 제국군 병력은 채 1만이 되지 않았다. 최후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던 야만족은 결국 전멸을 면치 못했다.
야만족의 지휘관 쿠레트와 그의 동생인 티에고는 최후까지 발악을 하다가 제국군의 궁수들에 의해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 고슴도치와 같은 모습으로 쓰러졌다.
“헉헉! 이겼다.”
야만족과 전투를 시작한 후 내리 사흘을 싸워 레이놀드 후작은 드디어 승리를 거뒀다.
“와아아아!”
살아남은 제국군이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4만의 중앙군 중 무려 3만이 넘은 제국군이 야만족에 희생되었다. 승리는 했지만 딱히 이긴 것 같지 않은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그때 레이놀드 후작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뭐, 뭐라고?”
“어제 아침에 북부군이 야만족을 괴멸했다고…….”
그 소식을 듣고 레이놀드 후작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그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누루마치가 이끄는 야만족 병력 2만 5천 중 쿨레기가 배신을 하고 수하들을 데리고 떠나면서 남은 병력은 2만 명이 채 못 됐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듯이 그들도 제국군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 보는 저 해가 너희들이 보는 마지막 해가 될 것이다. 모두들 잘 봐 두라.”
누루마치가 비장한 어투로 야만족 병사들에게 외쳤다. 급하게 주어진 빵과 물로 배를 채운 야만족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최후의 인사를 했다. 이제 전투가 벌어지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직 적을 죽이는 데만 집중할 터였다.
전투 준비는 갖춰졌다. 이제 누루마치의 공격 명령만 떨어지면 야만족들은 제국군, 특히 그동안 그들을 괴롭혀 온 원수 같은 북부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갈 터였다.
북부군은 강했다. 그동안 싸워 온 제국군과는 다를 터였다.
‘하루는 버틸 수 있을까?’
누루마치가 피식 웃었다. 얼마를 버티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북부군과 같이 죽느냐가 중요했다.
“아버님.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누루마치의 부관이자 그의 자랑스런 아들 누르크가 나섰다.
“그렇게 하라.”
누루마치의 허락이 떨어지자 누르크가 2천의 결사대를 준비시켰다. 결사대의 역할은 적 지휘관을 죽이는 것이었다.
“아버님. 다음 생에도 아버님의 아들로 태어나겠습니다.”
누르크가 그 말을 남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결사대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와아아아!”
누르크와 결사대가 돌진하자 누루마치도 곧장 총공격을 명했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빠르게 울리는 가운데 야만족이 일제히 북부군을 향해 달려갔다.
“우와아아아!”
야만족의 공격에 대비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던 북부군이 야만족을 향해 화살 세례를 쏟아부었다.
슈슈슈슝!
퍼퍼퍼퍽!
“크아아악!”
수백 명의 야만족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중 3분의 2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화살에 맞아 절명하지 않은 야만족들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중 절반은 몇 걸음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돌격해 들어간 야만족과 북부군이 정면을 부딪쳤다.
콰콰콰쾅!
무기와 방패가 충돌하며 귀청이 터질 듯 금속음이 터져 나왔고 뒤이어 야만족과 북부군 병사들의 함성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전투는 처음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동안 야만족을 상대로 싸워 왔던 북부군은 전혀 야만족의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투는 팽팽하게 서로 밀리지 않고 전개되었다.
헌데 이때 양군의 주력이 맞붙은 전장에서는 누루마치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만족의 좌익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친 듯이 아군들끼리 찌르고 베었고 종래에는 중앙에서 사투를 벌이고 싸우던 동료 야만족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중앙의 야만족들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겪었다. 막 북부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반격을 가하려는 순간 눈앞의 땅이 푹 꺼져 버린 것이다.
“으아아악!”
선두에 섰던 수백 명의 야만족들이 땅에 처박혀 뒹굴었고 그 뒤를 따르던 야만족들 수백 명이 쓰러진 야만족 위에 뒤엉켜 엎어졌다.
쓰러진 야만족을 향해서 재빨리 제국군의 방패부대가 달려들어서 방아 찧듯 방패로 야만족 병사들의 머리를 내리찧어 댔다.
퍼퍼퍼퍽!
“크아악!”
참혹한 비명 소리와 함께 수백 명의 야만족들이 강철 방패에 머리통이 터져 죽었다.
“저, 저럴 수가…….”
그때 누루마치의 옆에 있던 지옥 주술사가 소리쳤다.
“주술입니다. 놈들 중 주술사가 있습니다.”
“어떻게 막아 보라.”
누루마치가 소리쳤지만 소환술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지옥 주술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지옥 주술사는 다른 지옥 주술사들과 같이 마계의 괴물을 소환했다.
“쿼어어!”
화르르르!
쾅!
“쿠어어어!”
하지만 마계 괴물이 소환되는 족족 불덩이가 날아와서 마계 괴물을 불태워 버렸다. 불길에 휩싸여 몸부림치던 마계 괴물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마계로 도망을 쳤다.
“틀렸습니다.”
지옥 주술사들이 절망하며 외쳤다. 그때 지옥 주술사들의 머리 위로 불덩이가 쏟아졌다.
“아아!”
지옥 주술사들은 뻔히 보면서도 불덩이를 피하지 못했다.
쾅!
화르르르!
불길에 휩싸인 지옥 주술사들은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다 쓰러져 움직임을 멈췄다. 지옥 주술사들의 생명이 끊어지고 나자 그들의 몸에 붙은 불길도 저절로 꺼졌다.
지옥 주술사들이 모두 죽고 나서 야만족들의 머리 위로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불비를 뒤집어쓴 야만족 병사들은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져 갔다.
하늘에서 쏟아진 불비는 야만족 병사들의 일부에만 떨어졌고 희생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본 미신에 약한 야만족의 병사들을 놀래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사기 충전한 북부군은 일거에 야만족을 전멸시킬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때 야만족의 다른 쪽에서 땅이 쩌억 갈라지고 대지가 화염을 토해 내기 시작하였다.
경악한 야만족 병사들이 다른 길을 찾아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곧이어 하늘에서 우박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후두두둑!
“으아아아!”
겁에 질린 야만족들이 우왕좌왕했다. 야만족의 목숨까지 내건 결연한 의지도 이런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는 무력했다.
만약 야만족이 주술에 의한 일부 희생을 감수하면서 용감하게 싸웠더라면 비참하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반스의 주술에 기세가 꺾인 야만족은 더 이상 용맹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야만족들은 미지의 힘에서부터 도망치기에 바빴고 북부군은 힘들이지 않고 야만족을 죽였다.
에반스의 주술에 사기가 꺾이고 진형이 무너지면서 야만족은 북부군의 먹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정오가 되기 전에 싱겁게 끝이 났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누르마치의 주위에 있던 야만족 병사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그의 아들인 누르크는 북부군의 지휘관을 향해 돌격하다 쏟아지는 불덩이에 맞아 불타 죽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2만에 달하던 야만족들이 불과 두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전멸했다. 전장에 살아남은 야만족은 누루마치를 비롯한 100여 명뿐이었다.
“항복하라.”
북부군 지휘관이 의무적인 목소리로 누루마치와 야만족에게 항복을 권했다.
“웃기지 마라.”
“어서 덤벼!”
살아남은 야만족들이 으르렁대며 소리치자 그 북부군 지휘관은 두 번 다시 항복을 권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궁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을 보고 야만족 전사들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수백 발의 화살을 야만족들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곧 죽음이 그들을 찾아들 터였다. 살아남은 야만족들이 서로 눈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동료들에 대한 자긍심과 또 같이 죽는 것에 대한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조준!”
지휘관의 명령에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이제 발사 명령이 떨어지면 남은 야만족들은 모두 죽음의 문턱을 넘을 터였다.
“멈춰라.”
그때 후방에서 전령을 달려와서 외쳤다. 궁수들의 발사가 취소되었다. 좀 전까지 죽음의 문 앞에 서 있던 야만족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북부군의 지휘관이 도착했다.
젊은 지휘관이 살아남은 야만족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야만족을 향해 말했다.
“누가 지휘관인가?”
누루마치가 나섰다.
“나다.”
“…….”
젊은 지휘관이 말없이 한동안 누루마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살려 주겠다.”
“뭐, 뭐라고?”
“너희들은 살려 야만족의 땅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
이번에는 누루마치와 생존한 100여 명의 야만족들이 할 말을 잃었다.
“저들을 파르미르 고원까지 데려가라.”
그때 젊은 지휘관이 명했다. 누루마치가 다급히 물었다.
“왜냐? 왜 우리를 살려 주는 것이냐?”
누루마치의 물음에 젊은 지휘관이 대답했다.
“그래야 알 것이 아닌가? 가서 너희들이 겪은 것을 얘기해 줘라.”
그 말을 하고 젊은 지휘관은 떠났다.
“잠깐, 너는 누구냐?”
누루마치가 소리쳤지만 그 젊은 지휘관은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누루마치가 북부군 병사에게 손짓으로 젊은 지휘관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자는 누구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부군 병사가 누루마치에게 호통을 쳤다.
“저자라니? 감히 친왕께.”
“친왕?”
“그렇다. 저분이 바로 친왕 에반스 님이시다.”
“에반스?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압실론 후작?”
“허어. 이자가 그래도…….”
북부군 병사가 뭐라고 떠들었지만 누루마치의 귀에는 이미 그 병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누루마치와 살아남은 야만족 전사들은 포로로 결박된 채 바로 북쪽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들은 파르미르 고원을 넘었다. 그들이 바로 야만족의 제국 침공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전쟁터는 매우 참혹한 곳이다. 시체 썩는 냄새와 피 냄새로 범벅이 된 전쟁터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극히 힘들다.
때문에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어느 정도의 환락을 허용한다. 병사들이 미쳐 버리거나 탈영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이유로 군대 주둔지 부근에는 언제나 환락가가 형성되기 마련이었다. 전투에 지친 병사들에게 술과 여자를 제공하고 돈을 긁어내려는 상인들이 목숨의 위협을 감수해 가며 주점을 차리기 때문이었다.
트렌시아 제국군의 주둔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주둔지 바로 옆에는 허름한 주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천막에다 탁자 몇 개 놓은 것이 전부였지만 이따금 큼지막한 창고를 통째로 빌려 주점을 차린 곳도 있었다. 지금 에반스가 들어선 주점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자 고약한 냄새가 풍겨 왔다. 질펀한 술 냄새에 섞인 퀴퀴한 땀 냄새와 함께 정체불명의 냄새도 풍겼다.
바닥은 이미 토해 낸 음식물로 질퍽질퍽해 있었다. 드루바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약하군.”
하지만 에반스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드루바의 뒤를 따라 안으로 쓱 들어섰다. 주점 내부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술에 취해 탁자에 코를 박고 뻗어 버린 녀석은 차라리 나았다. 주점 곳곳에서 호통소리와 함께 주먹다짐이 오가고 있었다.
전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폭력으로라도 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마치 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한 잔의 술로 전쟁의 참혹함을 날려 버리려는 듯 그들은 연방 술잔을 기울였다.
“이쪽으로…….”
드루바가 술집의 카운터 쪽으로 움직이며 에반스에게 손짓을 보냈다. 에반스가 카운터에 도착하자 카운터에 있던 자가 말했다.
“따라오시오.”
에반스와 드루바는 그자를 따라 주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주점 뒤쪽에 작은 창고가 있었다. 그 창고 안으로 카운터에 있던 자가 들어갔다. 잠시 후 그 창고 안에서 상인 한 명이 나왔다.
그 상인을 보고 드루바가 허리를 굽혔다.
“상단주님.”
바로 루키아 상단의 상단주인 곤잘레스였다. 야만족과의 전쟁으로 상단의 기반을 잃은 곤잘레스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 바로 군대의 주점 사업이었다.
‘역시 대단한 자다.’
에반스도 곤잘레스의 사업 수완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요?”
곤잘레스가 에반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드루바에게 물었다. 그러자 드루바가 황급히 곤잘레스에게 다가가서 귓속말로 뭐라고 했다.
“헉! 몰라 뵀습니다. 친왕 전하.”
곤잘레스가 에반스의 정체를 알고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비록 위험한 자이나 이만한 인재도 없다.’
에반스는 곤잘레스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에반스가 해야 할 개혁에는 엄청나게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 자금을 곤잘레스를 통해 확보할 생각이었다.
에반스에게는 상재가 뛰어난 다이안이 있었다. 물론 그녀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곤잘레스는 바로 그런 일을 위해 필요했다.
제국의 새로운 권력의 실세인 에반스가 손을 내밀자 곤잘레스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이 곤잘레스, 친왕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에반스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곤잘레스에게 말했다.
“아버님은?”
“네?”
“산체스는 어디 있나?”
“아버님께서는 며칠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산체스가 죽었다는 말에 에반스가 애석해 하며 말했다.
“너의 부친이 네게 한 마지막 말이 있지 않나?”
에반스가 아는 산체스라면 분명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식인 곤잘레스에게 충고를 했을 터였다. 에반스의 물음에 곤잘레스는 에반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 하며 대답했다.
“돈보다는 사람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하하하. 돈보다 사람이라. 과연 자네 부친은 현명한 분이시군. 부디 그 말을 잊지 말게.”
며칠 뒤 곤잘레스는 모든 일을 정리하고 수도로 향했다. 그리고 수도에서 황궁 다음으로 큰 저택인 친왕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친왕 에반스를 위해 황궁에 딸린 거대한 저택을 하사했다. 실제 황제의 동생이었던 그루브 왕이 살았던 곳으로 그루브 왕이 전염병으로 죽고 나서 비어 있던 저택이었다.
에반스는 로토스 후작령의 야만족을 괴멸한 후 수도 바룬으로 입성했다. 그가 바룬에 도착한 다음 날, 레이놀드 후작이 이끄는 중앙군이 수도 바룬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중앙군의 모습은 초라했다. 병사들의 수도 채 1만 명이 되지 못했다. 반면 북부군은 부상자를 제외한 4만의 병력이 수도에 입성해 있었다.
먼저 승리하고 또 대승을 거둔 친왕 에반스가 트렌시아 제국의 최고 전쟁 영웅이 되는 것은 당연했고 백성들에게도 가장 큰 환호성을 받았다.
반면 부르나크 강에서 대승을 거두고 또 루퍼슨 백작령에서도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레이놀드 후작은 그 승리가 빛을 바랜 채 자신의 저택에 칩거했다.
그런 그에게 위로차 그의 사제들이 찾아왔다.
“사형. 힘을 내십시오. 지금은 그자가 인정을 받고 있지만 중앙 정계의 귀족들이 그 애송이를 가만 내버려 두겠습니까?”
수도 방위군 총사령관인 베일리 후작이 말했다. 그러자 그 말에 동감하며 황궁 수비대 총대장인 아돌프 후작이 말했다.
“둘째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이야 황제 폐하께서 비호하며 친왕이라 부추기니 목에 힘을 주고 다니겠지만 결국 수도가 안정되고 중앙 정계의 귀족들이 힘을 되찾게 된다면 그런 애송이쯤 찍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크음. 하지만 그 애송이가 다섯 대영지를 장악하고 있는 제국 영토 절반의 주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중한 성격의 수도 자경대 총감인 도널드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베일리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넷째는 너무 조심스러운 게 문제야. 그러니 군부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거야.”
“뭐라고요? 그러는 둘째 형님께서는 그렇게 잘나셔서 이번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배제되셨습니까?”
“배제되다니? 나보다 사형께서 더 나으시니 중앙군을 맡으신 것이다.”
“그런 분이 사형께서 중앙군을 맡으시기 전에 왜 재상가를 찾아가셨을까?”
“그, 그것은…….”
“됐다. 그만해라.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것 없다. 너희들은 지금 내 앞에 싸우러 온 것이냐?”
레이놀드 후작이 베일리 후작과 도널드 후작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베일리 후작과 도널드 후작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계실 겁니까?”
그때 아돌프 후작이 레이놀드 후작에게 물었다. 그러자 레이놀드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기다릴 때다. 대세인 친왕과 대치할 필요는 없다. 괜히 나섰다가 모난 돌처럼 정에 맞을 수 있다.”
레이놀드 후작의 말에 베일리 후작이 말했다.
“맞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친왕의 눈치를 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지금은 참고 기다릴 때입니다.”
“하지만 준비는 해야지요?”
도널드 후작이 눈빛을 빛내며 레이놀드 후작을 쳐다보았다. 평소 다른 사제들에 비해 도널드 후작과 대화를 많이 나누던 레이놀드 후작이었다.
“물론이다. 안 그래도 오늘 재상부로 가기로 했다.”
레이놀드 후작은 재상인 루드리히 공작과 만날 생각이었다. 황제 다음의 권력자인 루드리히 공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제국의 최고 권력자는 황제와 친왕 에반스였다. 황제가 아닌 자가 자신보다 더 권력을 쥐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루드리히 공작이 아니었다. 루드리히 공작이라면 어떤 식으로 친왕 에반스를 처리할지 이미 계획이 서 있을 터였다.
도널드 후작만 남고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은 레이놀드 후작의 저택을 나섰다. 레이놀드 후작이 그들에게 그만 가 달라고 했던 것이다. 마치 너희는 더 필요 없으니 그만 꺼지라는 듯 말이다.
“허어. 사형께서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아돌프 후작이 흥분하며 말했다. 그러자 베일리 후작이 냉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이제 우리가 필요 없어진 것이지.”
“소드 마스터는 우리 말고도 더 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사형께서 스승님의 검술을 완성했다는 게 사실일까요?”
아돌프 후작이 불쑥 묻자 베일리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일 것이다. 사형은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섰다.”
“헉, 그렇다면 사형이 그랜드 마스터?”
“그건 장담하기 어렵다. 당장 스승님께서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서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결국 우리 손에…… 스승님께서 그랜드 마스터였다면 우리에게 당했겠느냐?”
“하긴 그렇군요. 그럼 사형은 예전 스승님의 경지 정도에 오른 거로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누가 감히 사형의 상대가 되겠느냐?”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소문대로라면 친왕도 소드 마스터라면서요?”
“그렇다더군.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요.”
“뭐 그래 봐야 우리 아이들과…… 가만, 그러고 보니 친왕이 압실론 후작이었지?”
“그런데 왜요?”
“내 아들 케이런…….”
베일리 후작이 갑자기 죽은 아들을 거론하자 아돌프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당시 귀한 아들인 페이슨을 잃지 않았던가? 그때 베일리 후작이 아돌프 후작에게 물었다.
“데보라가 우리에게 압실론 후작이 소드 마스터라고 했던가?”
“아니요.”
실종된 막내 사제 카베인을 찾아 떠났던 아이들이 모두 죽었다. 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데보라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자 신세였다.
데보라는 숲에서 만난 케이런의 여동생 레이나도 거대 원숭이에 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데보라가 말한 압실론 후작은 평범한 젊은 귀족이었다. 그런 압실론 후작이 소드 마스터에 제국의 구국 영웅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섰다.
“소드 마스터가 어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경지던가?”
“그렇군요. 그렇다면…….”
“맞아. 압실론 후작은 그때 이미 아이들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그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는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았다. 아이들이 속을 정도라면 적어도 소드 마스터 중급은 넘어선 실력자였다.
“그럼 압실론 후작도 보통 소드 마스터는 아니겠군요?”
“그렇지. 얘기가 재미있어지는군.”
“맞습니다. 저는 그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가 벌써 궁금하군요.”
그때 베일리 후작이 반짝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를 만나러 가야겠어.”
“그를요?”
“그래. 우리도 사형이 아닌 다른 대안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럼 친왕 에반스와…….”
놀란 눈의 아돌프 후작을 보고 베일리 후작이 말했다.
“왜? 안 되나?”
“아니, 뭐 안 될 것까지야…….”
오늘 밤 레이놀드 후작과 도널드 후작은 재상부로 갈 터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상인 루드리히 공작을 만나서 놓친 권력을 되찾기 위한 음모를 꾸밀 터였다.
그 자리에 끼지 못하는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은 결국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인 친왕 에반스와 손을 잡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번 만나 보고 결정하지.”
만약 친왕 에반스의 인물 됨이 레이놀드 후작보다 낫다고 판단된다면 베일리 후작은 기꺼이 그와 손을 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때 눈치 빠른 아돌프 후작이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돌프 후작의 말에 베일리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하지만 친왕부로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들를 곳이요?”
잠시 뒤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을 태운 마차가 도널드 후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여긴 왜?”
어리둥절해 하는 아돌프 후작에게 베일리 후작이 말했다.
“데보라에게 압실론 후작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
베일리 후작은 데보라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도널드 후작의 저택에는 데보라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몸은 결국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물과 음식을 끊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녀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귀족의 영애가 자살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던 것이다.
“허어. 그 아이가 그렇게 죽다니…….”
“여자로서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것도 대단했는데…….”
베일리 후작과 아돌프 후작 모두 데보라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별수 없지. 며칠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에 대해 알아볼 수밖에…….”
자신과 가문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었다. 베일리 후작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친왕을 만날 때 저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나름대로 결심을 한 듯 아돌프 후작이 베일리 후작에게 말했다.
그날 밤 레이놀드 후작과 도널드 후작은 은밀히 재상부로 움직였다. 재상부에는 그들 이외에도 중앙 정계의 주요 신료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그들 역시 전후 있게 될 논공행상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자들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으로 재상인 루드리히 공작을 찾아와 있었다. 그런 그들은 모두 재상부의 대회의실로 안내되었다.
레이놀드 후작과 도널드 후작 역시 대회의실에 들어갔다. 모두들 서로 눈빛은 주고받았지만 대회의실에서 직접 얘기를 나누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재상부의 주인인 루드리히 공작이 나타났다.
“모두들 앉으시오.”
대회의실에는 긴 테이블과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회의실 안에 있던 귀족들은 루드리히 공작의 말에 그 의자에 앉았다. 모두 의자에 앉자 루드리히 공작이 말했다.
“여러분이 여기 왜 왔는지 잘 알고 있소. 나 역시 내 자리를 지켜야 할 입장이오. 힘을 합칩시다.”
노련한 루드리히 공작은 귀족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 잘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도 원하는 바였다. 서로 지킬 것이 많은 자들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대회의실에서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하지만 사공이 워낙 많다 보니 배가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루드리히 공작이 중재에 나섰다.
“내일 대전 회의가 끝나고 나면 다시 얘기토록 합시다. 시간이 늦었소.”
어느새 시간이 자정을 훌쩍 넘고 있었다. 귀족들은 조용히 재상부를 빠져나갔다. 레이놀드 후작과 도널드 후작은 잠시라도 루드리히 공작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루드리히 공작이 피곤하다는 이유를 들어 내일 만나자고 했다.
별수 없이 레이놀드 후작과 도널드 후작은 만족스런 성과 없이 재상부를 나가야 했다.
날이 밝고 황궁에서 대전 회의가 열렸다. 이날 대전 회의의 주제는 논공행상이었다. 야만족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친왕 에반스와 레이놀드 후작이 각각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미 친왕으로 더 오를 지위가 없는 에반스에게는 황금과 보석 등이 주어졌고 레이놀드 후작은 공작으로 승작되면서 중앙의 영지와 새로운 공작 저택이 하사되었다.
하지만 이날 가장 큰 충격은 황제가 현 재상인 루드리히 공작을 후작으로 강등시키고 재상의 지위와 재상부를 거둬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와 그 일족을 변방의 작은 영지로 보내겠다고 했다. 사실상 유배나 마찬가지였다.
“폐, 폐하. 어찌 신에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루드리히 공작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그러자 황제가 비정하게 말했다.
“제국이 야만족들에 짓밟혔다. 누군가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경은 지금 나보고 그 책임을 지라 말하는가?”
“…….”
황제의 말에 루드리히 공작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유배가 아니라 그와 그의 일족은 멸족될지 모른다.
“새로운 재상이 선출될 때까지 친왕이 재상의 자리를 맡아 줘야겠어.”
황제가 에반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에반스는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그것을 보고 대전 신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제는 약속대로 에반스에게 제국의 권력을 넘겨주었다. 이때 대전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허크스 백작이었다. 드디어 에반스가 제국의 실권을 쥔 것이다.
대전 회의가 끝나고 나자 신료들이 황급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장 친왕부로 몰려갔다. 친왕부 앞에 제국의 귀족들로 길게 줄이 늘어섰다. 새로운 권력의 실세에게 빌붙어 보려는 자들이었다.
“자. 줄을 서시오.”
그런 귀족들을 향해 친왕부의 하인들이 제법 큰소리를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친왕부의 새로운 총관인 곤잘레스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곤잘레스는 귀족들이 바치는 뇌물을 아주 잘 받았다. 그 뇌물은 친왕 에반스가 권력을 유지하는 데 밑거름이 될 터였다.
반면 재상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재상부의 식솔들은 모두 내쫓겼고 전 재상 루드리히 공작을 비롯한 그 일족은 변경의 영지로 바로 떠나야 했다.
어제만 해도 재상이었던 루드리히 공작에게 간, 쓸개도 다 빼어 줄 것 같았던 귀족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루드리히 공작과 사돈인 레이놀드 후작이 그를 찾았다.
“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오.”
루드리히 공작이 자신 있게 말했지만 레이놀드 후작은 잘 알았다. 제국 역사상 한 번 내쳐진 권력자가 다시 수도로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건강하십시오.”
“딸아이를 잘 부탁하오.”
그 말을 남기고 루드리히 공작과 그 일족은 쓸쓸히 수도를 떠났다. 야만족과의 전쟁이 종결되고 제국은 새로운 재상인 친왕 에반스에 의해 새로운 중앙 정부가 수립되었다.
재상이 된 에반스는 약속한 대로 야만족 도적떼 두목인 쿨레기와 그 수하들에게 영지를 내렸다. 바로 전 재상 루드리히 공작과 그 일족들이 유배된 변경의 영지를 말이다. 이후 루드리히 공작과 그 일족을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