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도사에게 라미셀 후작성을 맡기고 수도로 진격해 들어간 야만족 지원군 병력은 제국 수도와의 접경인 부르나크 강에서 국방장관인 레이놀드 후작이 이끄는 제국의 중앙군에 가로막혔다.
야만족을 이끌고 있던 랄트족과 고란족의 대족장인 우툴라와 수아레스는 야만족의 명장인 쿤다를 선봉에 내세워 부르나크 강을 건너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 바룬을 공략케 했다.
하지만 트렌시아 제국의 중앙군은 제국 최고 정예병들답게 강했다.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부르나크 강은 제국군이 흘린 피와 야만족이 흘린 피로 피의 강으로 변했다.
중앙군 8만을 이끌고 부르나크 강에 포진한 레이놀드 후작은 야만족과 싸워 보고 그들의 강함에 혀를 내둘렀다.
병력면에서 중앙군이 우위에 있으니 야만족들로 하여금 강을 건너게 한 후 괴멸하는 방법까지 생각했던 레이놀드 후작이었다.
하지만 야만족 개개인의 강함을 보니 그랬다가는 중앙군만 전멸당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레이놀드 후작은 악착같이 부르나크 강에서 야만족을 막았다.
부르나크 강이 뚫리는 순간 수도 바룬도 무사하기 어렵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양쪽 모두 매일같이 피해가 늘어 갔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북부의 대영주인 압실론 후작이 기온 후작성과 카라엔 후작성까지 함락하고 야만족의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소식에 레이놀드 후작을 비롯한 중앙군은 환호했다.
“압실론 후작. 대단한 자로군.”
레이놀드 후작도 압실론 후작 에반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압실론 후작은 전쟁 영웅으로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진출할 것이 분명했다.
하긴 제국의 열 곳 대영지 중 무려 셋을 차지하고 동서의 두 대영지의 중심인 기온 후작성과 카라엔 후작성까지 차지한 압실론 후작이었다.
그의 앞으로 행보에 따라 제국의 권력 판도가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압실론 후작이 넘어야 할 난관들이 많았다.
트렌시아 제국에는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영웅들 중 권력을 손에 쥔 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만큼 권력을 쥐는 것은 영웅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이다.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며칠 뒤 레이놀드 후작은 놀란 만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압실론 후작이 기온 후작령과 카라엔 후작령을 장악하고 북부에 이어 동서 두 대영지의 주인임을 천명했다고?”
한마디로 제국의 영토 절반을 압실론 후작이 자신의 것이라 공표한 것이다. 이는 자칫 제국 내 큰 불화를 야기할 수 있었다. 제국의 절대자 황제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다음 날 황제가 압실론 후작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황제는 다섯 대영지의 주인으로 압실론 후작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에게 황제의 형제인 친왕의 자리를 내렸다. 황제의 형제라면 제국의 영토 절반을 자지해도 제국 법상 문제가 없었다.
황제의 이러한 결정에 레이놀드 후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친왕 에반스가 북부군을 이끌고 참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레이놀드 후작을 비롯한 중앙군은 모두 환호했다.
북부군이 야만족의 배후를 쳐 준다면 야만족은 더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라미셀 후작성으로 북부군이 소집되었다.
그 병력 규모가 5만으로 그들을 친왕인 에반스가 직접 이끌고 라미셀 후작성을 출발해서 빠르게 남하를 시작했다.
그 속도가 빨라 사흘이면 부르나크 강 근처 지류까지 도달할 것 같다는 급보가 부르나크 강에 주둔 중인 야만족 진영에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야만족은 크게 동요했다. 야만족은 즉시 대책 회의를 열었다. 그 대책 회의에서 야만족의 명장 쿤다가 말했다.
“모든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부르나크 강을 건너 수도 바룬을 점령하든지 아니면 북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
부르나크 강을 건너 수도를 점령하는 것도 야만족에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북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뭐 하나 야만족에게 유리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야만족 지휘관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북부군을 상대로 싸우게 되면 일방적인 대승을 거둬야 합니다.”
쿤다가 야만족의 두 대족장 우툴라와 수아레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야만족에 강한 북부군이었다. 그 말에 우툴라와 수아레스뿐 아니라 야만족 지휘관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야 다시 북상해서 퇴로와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북부군을 이기고 그렇게 북상해도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는 점입니다.”
쿤다가 계속해서 절망적인 말만 내뱉자 우툴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자리는 대책을 세우기 위한 자리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말하라.”
우툴라의 말에 쿤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맨도사 님이 이끌었던 아군 8만이 괴멸되었습니다. 바로 북부군에 의해서 말입니다. 퇴각은 없습니다. 부르나크 강에서 전멸을 각오하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 아직 우리에게는 사흘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사흘 안에 부르나크 강을 건너 제국의 수도를 점령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살 길입니다.”
쿤다의 말에 우툴라와 수아레스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둘이서 눈빛을 교환하더니 결심한 듯 쿤다를 쳐다보며 말했다.
“좋다. 여기서 우리가 전멸하든 아니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든 둘 중 결판을 내자. 나 우툴라도 여기에 뼈를 묻겠다.”
“나 수아레스도 마찬가지다.”
두 대족장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하니 야만족 지휘관들의 얼굴도 비장하게 변했다. 그런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쿤다가 외쳤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우리는 쉬지 않고 강을 건널 것이다. 각 부대 지휘관들도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뭣들 하느냐? 어서 도강 준비를 하지 않고.”
쿤다의 외침에 야만족 지휘관들이 우르르 지휘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야만족 진영이 이내 시끌벅적해졌다.
“우리도 나서야겠군.”
그때 지휘 막사에 남아 있던 우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수아레스도 몸을 일으켰다.
야만족의 대족장들이 직접 참전하겠다는 말에 쿤다가 감격해 하며 말했다.
“두 분께서 나서 주신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입니다.”
잠시 뒤 야만족의 두 지배자가 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내가 나서지.”
우툴라가 앞으로 나섰다.
“와아아아!”
우툴라가 부르나크 강에 모습을 드러내자 도강 준비를 마친 야만족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단숨에 강을 건너 적들을 쓸어버려라.”
우툴라는 직접 도강하는 배에 올랐다.
“위험합니다.”
쿤다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나의 병사들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
우툴라의 외침을 들은 야만족 병사들의 소리쳤다.
“대족장님을 지켜라. 적들을 물리쳐라. 와아아아!”
야만족의 기세가 단숨에 강을 건너 그 건너편의 트렌시아 제국의 중앙군을 집어삼킬 듯했다.
야만족과 달리 사흘 뒷면 북부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트렌시아 제국의 중앙군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야만족들이 전투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는 소식에 중앙군 지휘부도 서둘러 지휘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중앙군의 총사령관인 레이놀드 후작이 말했다.
“사흘이다. 사흘만 더 버티면 된다. 무슨 수를 쓰든 야만족의 도강을 막아라. 알겠느냐?”
“네.”
중앙군 지휘관들은 추가로 지원군을 더 강가에 배치했다. 그때 도강 준비를 마친 야만족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평소의 야만족과 달랐다.
“저자는 야만족의 대족장이다.”
그때 강가에 세워 둔 감시 망루에서 병사가 소리쳤다.
“뭐? 야만족의 대족장이라고?”
야만족의 대족장이라면 야만족에게 있어서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진의 왕이 직접 참전했다는 것은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지휘관은 즉시 그 사실을 총사령관인 레이놀드 후작에게 알렸다.
“야만족의 대족장이 참전해?”
“놈들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할 모양입니다.”
중앙군의 작전 참모인 세이버 백작이 말했다.
“어쨌으면 좋겠나?”
레이놀드 후작이 국방장관이지만 직접 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한 적은 없었다. 소드 마스터인 그는 제국군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일선 전투 지휘 능력까지 갖추길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반면 작전 참모인 세이버 백작은 젊어서부터 군대에서 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중앙군이 야만족으로부터 부르나크 강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세이버 백작의 지휘 때문이었다.
“적진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나왔다면 우리도 그만한 존재가 전투에 나서야겠지요.”
세이버 백작의 눈이 레이놀드 후작에게 향했다. 그러자 레이놀드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나보고 직접 참전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기에서 자칫 우리가 밀릴 수 있습니다.”
“끄응.”
레이놀드 후작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검에 야만족의 피를 묻혀야 한다는 사실이 레이놀드 후작은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였고 그도 이제 권력의 전면에 나서려면 그럴듯한 전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드디어 내 힘을 세상에 드러낼 때가 온 것인가?’
그의 스승이었던 렉터 공작이 죽은 뒤 세상에서 그의 검을 받아 낼 자는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껏 묵묵히 수련하며 검술을 연마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제 레이놀드 후작 본인도 알지 못했다.
레이놀드 후작은 자신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 섰다고 생각했다. 그 말은 곧 그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그랜드 마스터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는 없었다. 그러니 그가 그랜드 마스터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것만큼은 확실했다.
‘야만족의 대족장이라고 했던가?’
레이놀드 후작의 눈이 번들거렸다.
“좋아. 참전하지. 야만족에게 밀릴 수야 없지.”
레이놀드 후작이 직접 참전하겠다고 하자 세이버 백작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어서 출전 준비를 해 주십시오. 놈들이 곧 공격해 올 것입니다.”
세이버 백작의 말에 레이놀드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챙겨 들며 말했다.
“준비 다 됐네. 가지.”
레이놀드 후작은 야만족과 전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피의 강으로 변한 부르나크 강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둥! 둥! 둥! 둥!
야만족의 호전성을 극대화시키는 북소리와 함께 야만족을 실은 배와 뗏목들이 부르나크 강의 수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수십 차례 강을 건너기 위해 움직였던 배와 뗏목들이었다. 그때마다 강 건너편의 트렌시아 제국군에 의해 도강이 번번이 무산되어 되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을 건너기 전에 절대 퇴각이란 명령은 없을 거라 우툴라가 공표한 탓에 야만족들의 눈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내 명령 없이 절대 뒤돌아서지 말라. 가자. 나의 병사들이여.”
우툴라를 태운 배가 맨 앞에 섰다.
“와아아아!”
야만족 대족장이 직접 선두에 나서자 야만족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찔렀다. 그때 우툴라의 배 옆으로 빠르게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우툴라 님. 너무 앞서 가진 마십시오.”
바로 쿤다를 태운 배였다.
“알았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라.”
우툴라는 야만족의 대족장답게 전장에서 어떤 식으로 병사들을 선동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야만족이 다 보는 앞에서는 용감하게 앞장서서 움직이는 척했지만 그렇다고 우두머리가 혼자서 적진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툴라를 태운 배가 차츰 속도를 죽이면서 야만족을 태운 다른 배들이 그 배를 추월해서 빠르게 강 건너를 향해 움직였다.
그사이 우툴라를 태운 배와 쿤다를 태운 배는 아예 움직임을 멈추고 뒤쪽에서 움직이는 야만족들을 독려했다.
“나아가라. 더 힘껏 노를 저어라.”
그사이 앞선 야만족들의 배가 막 강의 중간을 지났다. 그러자 강 건너 제국군 진영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슈슈슈슝!
타타타탁!
퍼퍼퍽!
“아아악!”
화살의 절반은 강으로 떨어졌고 나머지 절반은 배와 뗏목에 박혔다. 배와 뗏목으로 날아든 화살들은 대부분 야만족의 방패에 가로막혔지만 일부는 방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야만족 병사의 몸통에 박히기도 했다.
운 나쁜 야만족은 화살을 머리에 맞아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배에서 떨어져 강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강 건너에서 쏟아진 화살 공격은 야만족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투투투퉁!
강가 뒤쪽에 길게 늘어서 있던 투석기들이 일제히 돌덩이를 강으로 날려 보냈다.
휘이이이!
첨벙!
돌덩이들이 강에 떨어지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 냈다. 그때 돌덩이 중 하나가 야만족들이 타고 있던 뗏목 위로 떨어졌다.
쾅!
“아아악!”
돌덩이에 맞은 뗏목은 바로 박살이 났고 뗏목에 타고 있던 야만족 병사들도 비명과 함께 강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야만족들은 부서진 뗏목 조각을 잡고 강 건너를 향해 헤엄을 쳤다.
우툴라의 말대로 야만족에 후퇴란 없었다. 강에 빠져 죽든 아니면 강 건너로 가야 했다.
쾅! 쾅!
“크아아악!”
야만족을 실은 배와 뗏목들이 잇달아 투석기의 돌멩이 세례에 부서졌다. 하지만 살아남은 야만족들은 악착같이 강 건너를 향해 수영을 했다.
총공격 명령을 내리기 전 우툴라가 자신의 호위 무사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우툴라에게는 12명의 호위 무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드 마스터 벤젠에 의해 훈련된 소드 익스퍼트들이었다. 그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노턴이 호위대장을 맡고 있었다. 우툴라가 노턴에게 명했다.
“노턴. 나를 지킬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9명은 이번 전투에 참전해 줘야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턴이 군말 없이 대답했다.
“너희들이 할 일은 저 강 건너에 포진한 투석기들을 부수는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목숨을 다해 임무를 완수해 내겠습니다.”
노턴은 그 길로 9명의 수하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사라졌던 노턴과 9명의 수하들을 태운 배가 투석기 공세를 피해 빠르게 강 건너로 움직였다.
슈리리릭!
강에 근접하면서 강가에 대기 중인 제국군의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댔다. 하지만 노턴과 그 수하들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강가로 접근했다. 그리고 배 바닥이 강바닥에 닿자 바로 배에서 뛰어내렸다.
첨벙첨벙!
노턴과 9명의 수하들은 강물을 헤치고 강가로 뛰었다. 그때 강가에 대기 중이던 제국군이 그들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차창!
노턴과 9명의 수하들은 간단히 그 창들을 검으로 쳐 내고 강가에 세워 둔 방책 쪽으로 뛰었다. 제국군은 야만족의 상륙을 막기 위해 강가에 뾰쪽하게 깎아 날을 세운 방책을 세워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소드 익스퍼트들인 노턴과 9명의 수하들에게 그 방책은 무용지물이었다.
서걱!
간단히 방책을 둘로 갈라 버린 노턴과 9명의 수하들은 방책 뒤에 있던 제국군을 가차 없이 벴다.
“아아악!”
일반 병사들로서는 소드 익스퍼트인 노턴과 9명의 수하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노턴과 그 수하들로 인해 강가의 제국군 진영이 무너졌다.
“저, 저런…….”
제국군의 지휘관이 즉시 노턴과 그 수하들을 막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노턴과 그 수하들의 목적은 제국군을 베는 것이 아니었다.
“가자.”
노턴이 앞장서서 투석기가 배치된 쪽으로 몸을 날렸다.
“헉! 놈들이 투석기 쪽으로 간다. 막아라.”
강가에 포진하고 있던 제국군이 노턴과 그 수하들을 쫓았다. 이어서 투석기 주위에 배치된 궁수들도 노턴과 그 수하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콰라라락!
화살이 빗발치듯 노턴과 그 수하들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노턴과 그 수하들은 방패로 막고 또 검으로 그 화살들을 다 쳐 냈다. 그리고 빠르게 가장 가까운 투석기 쪽으로 움직였다.
“막아라.”
궁수에 이어 투석기를 지키던 병사들이 노턴과 그 수하들을 막았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그들에게 곧 도륙되었다. 그때 노턴이 제국군 병사 중 하나가 휘두르던 도끼를 검을 쥔 반대 손으로 낚아챘다.
그리고 그 도끼를 투석기를 향해 휘둘렀다.
콰직!
노턴의 도끼질 한 방에 투석기의 활강대가 박살 났다. 연이어 도끼를 휘둘러 대자 투석기 몸체가 견뎌 내지 못하고 부서졌다. 군데군데 강철로 보강된 견고한 투석기의 몸체도 노턴의 마나가 실린 도끼질을 감당해 내진 못했다.
노턴이 여세를 몰아서 남은 투석기를 향해 달려들 때였다.
“마, 막아라.”
제국군 병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투석기는 야만족의 도강을 막아 낼 없어서는 안 될 무기였다.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필사적으로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노턴과 그 수하들 입장에서는 야만족들이 무사히 도강하기 위해서 투석기는 반드시 부숴야 했다.
제국군은 끊임없이 달려들었고 노턴과 그 수하들은 악착같이 그들을 베었다. 그런 가운데 노턴이 들고 있던 도끼를 발사 준비가 끝난 투석기를 향해 던졌다.
휘리리릭!
퍽! 콰지직!
빠르게 대기를 가르며 날아간 도끼가 투석기의 활강대를 정통으로 꺾어 버렸다. 시위가 끊어진 반동으로 투석기 발사대의 병사들이 맥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노턴에 이어 그의 수하들도 투석기를 부쉈다. 순간 강가에 포진했던 20대의 투석기 중 8대가 박살 났다.
하지만 아직 남은 투석기는 많았다. 노턴과 그 수하들이 남은 투석기를 부수기 위해 제국군들을 베어 내며 미친 듯 날뛸 때였다.
“물러나라.”
제국군의 기사 하나가 나섰다. 그런데 기사의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였다. 투구도 쓰지 않고 갑옷도 지금까지 노턴과 그 수하들이 보아 온 제국의 다른 기사들에 비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들고 있는 검과 착용하고 있는 갑옷이 너무 깨끗했다. 마치 장식용 갑옷을 착용한 듯 보였다. 그 기사가 노턴과 그 수하들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야만족치고는 제법이군. 우툴란가 뭔가 하는 놈의 목을 치기 전에 가볍게 몸을 풀 수 있겠어.”
그 기사의 입에서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인 우툴라의 이름이 거론되자 노턴과 그 수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들 눈에서 살기가 내뿜어졌다. 하지만 그 기사는 오히려 웃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성질머리는…….”
“쳐라.”
노턴의 입에서 살상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두 명의 수하가 그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
살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소드 익스퍼트의 실력을 갖춘 노턴의 수하 둘이 그 기사를 향해 막 검을 휘두를 때였다.
“잘 가라.”
싸늘한 일성과 함께 시뻘건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을 갈랐다.
촤아아악!
기사를 공격하던 노턴의 두 수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토막이 났다.
노턴과 남은 7명의 수하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방어 대형을 갖췄다. 상대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소드 마스터였다.
그들을 가르쳤던 검술 스승 벤젠 역시 소드 마스터였다. 소드 마스터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노턴과 그 수하들은 잘았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고 그들은 임무가 있었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죽을 자격도 없었다.
노턴이 소리쳤다.
“겁먹지 마라. 놈은 혼자다. 포위해서 공격한다.”
소드 익스퍼트 8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소드 마스터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노턴과 7명의 수하들이 일제히 소드 마스터인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촹! 차창! 촹!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마나가 맺힌 검끼리 부딪치며 스파크가 튀었다.
소드 마스터인 기사와 검이 부딪쳐도 자신의 검이 견뎌 주자 노턴과 7명의 수하들은 용기백배해서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때 기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레이놀드 후작은 야만족들이 배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오는 것을 강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강가의 제국군 궁수들이 야만족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화살 공격은 배와 뗏목을 타고 움직이는 야만족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화살 공격에 이어서 투석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투석기는 세이버 백작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였다.
그 투석기 때문에 야만족은 부르나크 강을 건너지 못했다. 세이버 백작이 제작한 20기의 투석기에서 돌덩이들이 강 위 야만족의 배와 뗏목으로 쏟아졌다.
순식간에 야만족의 배와 뗏목들이 박살 났다. 그런데 강에 빠진 야만족들이 이번에는 악착같이 강가를 향해 헤엄을 쳤다. 그만큼 이번 공격에 야만족이 사활을 걸었다는 뜻이었다.
투석기의 돌 세례를 뚫은 야만족들의 배와 뗏목이 강가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양 진영 간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가장 빨리 강가에 상륙한 자들이 소수의 병력으로 제국군이 세워 놓은 방책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방책 너머에서 즉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그런데 그 화살 세례를 그 소수 병력이 간단히 막아 내고 방책으로 뛰어들었다.
방책을 가볍게 갈라 버린 그들은 방책 뒤의 제국군을 도륙하고 곧장 투석기 쪽으로 움직였다.
“저, 저런…….”
세이버 백작의 입장에서 투석기가 파괴되면 강을 지켜 내는 것이 사실상 힘들어진다.
“놈들이 투석기를 노리고 유격대를 보낼 줄이야…….”
그때 당혹해 하는 세이버 백작을 보고 레이놀드 후작이 말했다.
“저들은 내가 처리하지.”
“네?”
그 말을 듣고 세이버 백작이 옆에 있던 레이놀드 후작을 봤을 때 이미 레이놀드 후작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놀란 세이버 백작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레이놀드 후작은 이미 투석기가 있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의 빠르기는 이미 인간의 눈으로는 식별해 낼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때 레이놀드 후작의 앞에서 제국군 병사들이 야만족 유격대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로는 야만족 유격대를 막아 내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야만족 유격대에 의해 투석기 8대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레이놀드 후작은 안 되겠다 싶어서 병사들에게 물러나라고 명한 후 야만족 유격대를 상대했다.
8명의 야만족 유격대는 놀랍게도 소드 익스퍼트의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마저 넘어선 레이놀드 후작에게 그들은 별 대수로울 것 없는 상대에 불과했다.
레이놀드 후작은 야만족 유격대에 포위 공격을 당하면서도 틈틈이 반격을 가했고 그때마다 꼭 한 명씩 야만족이 치명상을 입었다.
“크헉!”
심장을 꿰뚫린 야만족이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그 옆의 야만족이 동료를 부축했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이런 개자식.”
동료를 잃은 야만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지만 레이놀드 후작을 어쩌지는 못했다. 다시 포위 공격하는 야만족을 레이놀드 후작은 여유 있게 상대했고 그가 내뻗은 검에 또 한 명의 야만족이 쓰러졌다.
이에 야만족 유격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레이놀드 후작에게 강한 일격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그자가 야만족 유격대의 대장임을 눈치챈 레이놀드 후작이 오러 블레이드로 그의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거의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노턴이었지만 레이놀드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 내지는 못했다. 노턴의 검이 박살 나며 그의 몸이 둘로 잘렸다.
“크아악!”
노턴의 입에서 죽음을 예감케 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헉! 대장…….”
그들의 우두머리인 노턴이 레이놀드 후작의 검에 죽고 나자 남은 야만족 유격대의 사기는 급속히 곤두박질쳤다. 아무리 포위공격을 가해도 먹히지 않는 데다 죽어 나가는 것은 동료들뿐이었다.
하지만 야만족 유격대는 누구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죽어도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일념으로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털썩!
마지막 야만족 유격대원이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널브러지는 것을 끝으로 우툴라가 보낸 야만족 유격대는 전멸했다.
그때 세이버 백작이 투석기가 배치된 쪽으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투석기를 발사하지 않고.”
세이버 백작의 명령에 제국군 공병들이 투석기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던 투석기가 다시 강을 향해 돌덩이를 쏘아 올렸다.
세이버 백작이 투석기에 이어서 배와 뗏목을 타고 강가에 도착한 야만족들을 막아 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레이놀드 후작이 움직였다.
“이제 내 할 일을 하러 가야겠군.”
레이놀드 후작은 곧장 강 쪽으로 걸어갔다. 지휘관 급 기사를 보고 야만족들이 레이놀드 후작에게 덤벼들었다.
서걱!
하지만 그들은 레이놀드 후작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몸이 토막 나서 강가에 널브러졌다. 레이놀드 후작이 오러 블레이드로 야만족들이 자기 근처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레이놀드 후작을 향해 달려들던 야만족들이 쓰러졌다. 그때 강가에 도착한 레이놀드 후작이 야만족이 타고 온 배를 밀어 강에 띄우고 그 배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노를 들어 배를 저었다.
강가로 야만족을 태운 배들이 속속 들어오는 가운데 역으로 배를 몰아 강 한가운데로 나간 레이놀드 후작의 눈에 야만족 대족장인 우툴라가 탄 배가 보였다.
“저기 있었군.”
레이놀드 후작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레이놀드 후작이 빠르게 그쪽으로 노를 저었다.
“웬 놈이냐? 헉! 저자는 제국군 기사가 아닌가?”
“적이다. 막아라.”
“대족장님을 지켜라.”
레이놀드 후작이 탄 배가 우툴라가 탄 배에 접근하자, 야만족의 배에서 레이놀드 후작을 향해 화살을 쏟아부었다.
슈슈슈슝!
주위 배에서 레이놀드 후작이 탄 배를 저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 댔다. 하지만 레이놀드 후작은 화살 공격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레이놀드 후작이 몸속의 마나를 갑옷에 한껏 집중시키자 그의 갑옷에서 시뻘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파파파팟!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던 화살들은 레이놀드 후작의 몸을 감싼 그 시뻘건 기운에 가로막혀 전부 튕겨 났다.
레이놀드 후작은 빗발치는 화살 세례를 고스란히 퉁겨 내며 빠르게 노를 저어 배를 몰아 계속 우툴라의 배 쪽으로 돌진했다.
그러자 야만족들이 배의 방향을 틀어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레이놀드 후작이 들고 있던 노를 버리고 소리쳤다.
“고맙다.”
그 말과 동시에 레이놀드 후작이 배 바닥을 힘껏 박차고 몸을 솟구쳤다.
휘리릭!
레이놀드 후작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야만족의 배들을 징검다리 삼아 우툴라의 배를 향해 달려갔다.
“헉!”
놀란 야만족들이 그를 막으려 했지만 워낙 높이 솟구친 터라 레이놀드 후작을 잡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레이놀드 후작은 마지막 배에서 무려 10미터 이상을 뛰어 우툴라가 타고 있는 배에 내려섰다.
“마, 막아라.”
배에 타고 있던 야만족들이 레이놀드 후작을 향해 덤벼들었다. 우툴라를 살리기 위해 죽음까지 도외시한 공격이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레이놀드 후작 같은 최강의 존재에게 숫자란 무의미했다. 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야만족들은 피를 뿌리며 강으로 떨어졌다.
배에 타고 있던 야만족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배 위에는 창백한 얼굴의 우툴라와 그를 지키는 두 호위 무사들밖에 없었다.
촤륵!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떨어 내며 레이놀드 후작이 말했다.
“그러게 그냥 군영에 얌전히 있을 것이지 왜 기어 나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냐?”
그 말과 동시에 레이놀드 후작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우툴라 바로 앞에 나타났다.
“헉!”
놀란 우툴라가 배 위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우툴라의 양옆에 있던 두 명의 호위 무사가 동시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털썩!
우툴라가 좌우로 고개를 돌려보자 두 호위 무사의 이마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머리는 내가 잘 가져가지.”
그 말과 동시에 우툴라의 목에 혈선이 그어졌다. 이어 레이놀드 후작이 우툴라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잡아당기자 우툴라의 머리통이 몸통에서 분리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머리통이 잘렸는데도 우툴라의 잘린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 점이었다. 또한 우툴라의 몸도 배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목이 잘린 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말이다.
“용무를 마쳤으니 난 가 보겠다.”
우툴라의 머리통을 챙겨 든 레이놀드 후작이 다시 몸을 솟구쳤다. 레이놀드 후작의 몸은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야만족의 배 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순식간에 강가에 도착한 레이놀드 후작은 우툴라의 머리통을 제국군 군기에 꽂았다.
제국군의 군기에 꽂힌 야만족의 대족장 우툴라의 머리통을 보고 야만족은 주춤거리며 강가에서 물러났다.
퇴각 명령은 없었지만 그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던 우툴라가 죽었으니 후퇴해도 그들을 처벌한 자가 없는 것이다. 퇴각하는 야만족을 보고 쿤다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쿤다가 우툴라의 배에 올랐을 때 우툴라는 이미 머리가 없는 상태였다.
“퇴각한다.”
우툴라가 죽은 마당에 더 이상 전투는 무의미했다. 쿤다의 명령에 야만족을 태운 배와 뗏목들이 뱃머리를 돌렸다. 이미 강가에 상륙했던 야만족들도 서둘러 배를 타고 물러났다.
퇴각한 야만족은 즉시 긴급회의를 열었다. 우툴라의 빈자리를 보고 야만족 지휘관들은 할 말을 잊었다. 그때 야만족의 또 다른 대족장 수아레스가 말했다.
“너무 기죽을 것 없다. 대족장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전장에서의 죽음이다. 우툴라 대족장은 전사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내일 하루는 전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 시간이 하루밖에…….”
쿤다가 다급히 말했다. 그러자 수아레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전투는 하루면 족하다. 모레는 내가 진두지휘를 할 것이다. 그때도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이는 신이 우리에게 대륙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을 하고 수아레스가 회의장을 나갔다. 잠시 뒤 백기를 든 한 척의 배가 제국군 진영으로 움직였다.
야만족의 사신이 제국군 진영을 찾은 것이다. 사신은 정중히 우툴라의 머리를 내어 줄 것을 요청했다.
“줘.”
제국군의 총사령관인 레이놀드 후작은 흔쾌히 우툴라의 수급을 야만족 사신에게 내어 주었다.
다음 날 우툴라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날 하루 야만족은 대족장 수아레스의 지시대로 제국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야만족은 제국군을 향한 마지막 총공격에 나섰다. 야만족의 대족장 수아레스가 우툴라에 이어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우툴라 대족장과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라. 공격하라.”
수아레스 역시 우툴라처럼 배에 올라 야만족을 독려하며 도강을 시도했다.
제국군도 빈틈없이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가 야만족이 새벽에 공격 준비에 나서자 비상 체제로 들어갔고 야만족이 총공세로 나오자 즉시 화살을 쏘고 투석기를 발사했다.
휘이잉!
철퍽!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덩이들은 강물에 빠지며 포말과 함께 하얀 물기둥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중 거의 절반은 야만족이 타고 있던 배와 뗏목에 맞았다.
콰앙!
그중 배와 뗏목에 타고 있던 야만족을 직접 강타한 돌덩이들도 있었다.
“크아악!”
하지만 돌덩이에 맞아 전복된 배와 뗏목에 탔던 야만족들은 대부분 헤엄을 치거나 부서진 배와 뗏목의 파편을 잡고 강가로 움직였다. 때문에 직접적인 전투는 강가에서 벌어졌다.
“방책을 뚫어라.”
“와아아아!”
촤차차창!
퍽! 푹!
“으아아악!”
부르나크 강이 또다시 피의 강으로 변했다. 어렵사리 강에 상륙한 야만족은 강가에서 제국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끝에 한때 강 유역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레이놀드 후작이 전면에 나서면서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죽어라.”
휘릭!
“컥!”
레이놀드 후작의 검에서 빛이 번쩍이고 나면 야만족 지휘관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야만족 지휘관들의 머리를 보면 동전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레이놀드 후작이 검탄을 쏘아 야만족 지휘관들을 사냥했던 것이다.
“물러나지 마라. 우리가 죽을 곳은 바로 여기다.”
지휘관들이 죽어 나가면서 야만족들이 우왕좌왕하자 도강한 수아레스가 나서 야만족 병사들을 독려하며 선두에 나섰다.
“대족장님. 위험합니다.”
쿤다가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차피 강을 건넌 이상 다시 배를 타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대족장이 전장에서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힘을 내라. 나의 병사들이여.”
“와아아아! 대족장님이시다.”
수아레스로 인해 야만족의 사기가 일순간에 상승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그냥 있을 레이놀드 후작이 아니었다.
파파파팟!
레이놀드 후작이 빠르게 수아레스에게로 달려갔다.
“마, 막아라.”
레이놀드 후작의 등장에 수아레스의 호위 무사들이 기겁을 하며 그 앞을 막아섰다.
바우우웅!
레이놀드 후작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앞을 막은 호위 무사들을 베어 냈다.
“크아아악!”
레이놀드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에 호위 무사 10여 명이 들고 있던 무기와 함께 몸뚱이가 두 쪽으로 잘려 나갔다.
레이놀드 후작의 움직임이 워낙 빠르다 보니 마치 레이놀드 후작이 스쳐 지나자 그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듯 보였다.
“가랏!”
호위 무사를 도륙 내 버린 레이놀드 후작은 눈앞에 보이는 수아레스를 향해 검탄을 발출했다.
“헉!”
놀란 수아레스가 검을 들어 레이놀드 후작이 쏜 검탄을 본능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일반 검으로 막힐 검탄이 아니었다.
쾅!
강한 폭발과 함께 수아레스의 검이 터지며 그 검의 파편이 수아레스의 얼굴과 몸에 잔뜩 박혔다. 폭발과 동시에 온몸에서 피를 뿌리며 수아레스가 맥없이 쓰러졌다.
털썩!
“대족장님!”
쿤다가 수아레스에게로 뛰어왔다. 얼굴부터 온몸이 피투성이인 수아레스는 잠시 몸을 떨다가 몸을 축 늘어트렸다. 죽고 만 것이다.
“이, 이놈…….”
수아레스의 죽음에 분노한 쿤다가 레이놀드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서걱!
레이놀드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에 쿤다의 몸이 수직으로 쩍 하니 갈라졌다.
철퍼덕!
두 쪽 난 쿤다의 몸이 쓰러지며 그 속의 내용물들이 바닥을 흥건히 물들였다.
수아레스와 쿤다에 이어 야만족 수장들이 대부분 레이놀드 후작의 손에 죽자, 야만족도 더 견딜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달아나자.”
그래서 어렵게 점령한 강 유역을 버리고 다시 배를 타고 부르나크 강을 건넜다.
이때 살아남은 야만족의 수는 채 1만도 되지 않았다. 부르나크 강을 건넌 야만족들은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야만족의 패잔병들은 가장 가까운 길을 통해 가능한 빨리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길에 에반스가 이끄는 북부군이 남하 중이었다.
그들은 북상 중 북부군과 떡하니 마주쳤고, 북부군이 그 패잔병들을 고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을 리 없었다.
“쳐라.”
“와아아아!”
“젠장. 달아나라.”
북부군은 평원에 매복하다 야만족을 에워싸고 화살을 퍼부으며 점차 그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야만족들은 차근차근 목숨을 잃었다.
석양에 붉게 물든 평원이 또다시 뿌려지는 야만족의 선혈을 머금고 더욱 붉게 물들어 갔다.
“크아아악!”
차차차창!
죽음을 예감케 하는 섬뜩한 비명과 고함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병장기가 맞부딪침에 따라 파생되는 금속성이 고막을 멍멍하게 뒤흔들었다.
“아아악!”
털썩!
외마디 절규를 내뱉으며 야만족들이 차례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평원에 누웠다. 그런 야만족의 시신을 그 전우들인 야만족들이 무심하게 짓밟고 도망을 쳤다.
“아악! 내 팔…….”
잘려 나간 팔목을 움켜쥐고 비명을 내지르던 야만족이 등 뒤에서 날아든 북부군의 창에 맞아 죽었다.
“이야아아!”
용맹스런 외침과 함께 달려들던 야만족 지휘관이 여기저기에서 뻗어 나온 북부군의 창칼에 찔려 무기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야만족도 최후까지 저항을 했다. 때문에 북부군도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패잔병인 야만족의 저항은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 야만족은 힘없이 전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