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라미셀 후작성의 대반격 (84/90)

Chapter 4   라미셀 후작성의 대반격

날이 밝았다. 간밤의 소란을 오넬 백작에게 전해 들은 마법사 가브리엘이 그 두 제자 핸슨과 푸욜을 데리고 아침부터 에반스를 찾아왔다.

“라미셀 후작령의 주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축하받기에는 아직 이르오.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고심 중이니 말이오.”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후작님께서는 그 그릇이 제국이 아니라 대륙을 포용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말입니다.”

“안드레이 공작께서 나에 대해 제자 분에게 너무 과찬을 하셨군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직접 뵙고 보니 스승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잘 봐 주니 고맙소. 안 그래도 그대들을 부르려 했는데 잘 왔소.”

“저희를 말입니까?”

“그렇소. 오늘 성문을 열고 나가 야만족을 칠 것이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성이 아닌 전면전을 벌여서 과연 저희에게 승산이 있을는지요?”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대들이 필요한 것 아니겠소?”

에반스가 가브리엘과 그의 두 제자인 핸슨과 푸욜이 해 줘야 할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에반스의 설명을 듣고 난 가브리엘이 감탄하며 말했다.

“과연 압실론 후작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지금껏 한 번도 패하지 않으신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다.”

“칭찬은 그만 됐소. 정오가 되면 성문을 열 것이오.”

에반스는 야만족의 점심시간 전에 적진을 칠 생각이었다. 물론 그 전에 라미셀 후작군은 든든히 점심을 먹여 둘 터였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굳게 닫혀 있던 라미셀 후작성의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병부대가 먼저 성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 선두에는 에반스가 있었다.

“돌격!”

두두두두!

성문을 통과한 에반스의 기병부대는 곧장 야만족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적, 적이다.”

“놈들이 성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런 기병부대의 공격에 성문 가까이 주둔해 있던 야만족 부대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이 기병에 대한 전투 준비를 할 때 빠르게 돌진해 들어온 에반스가 이끄는 기병부대가 야만족 부대를 짓밟았다.

퍼퍼퍼퍽!

“크아아악!”

말에 부딪치고 짓밟힌 야만족 병사들이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갔다. 그 말 위의 기병들도 열심히 활을 쏘고 무기를 휘둘렀고 그때마다 야만족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기병부대의 선봉에 선 에반스였다. 그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야만족 수십 명이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방책들이 세워졌지만 소용없었다. 에반스의 검에서 빛이 번쩍일 때마다 폭발이 일었고 방책들이 박살 나서 사라졌던 것이다.

에반스가 야만족 진영을 들쑤셔 놓고 있을 때 성안의 라미셀 후작군이 대형을 갖추고 성 밖으로 나왔다.

척! 척! 척! 척!

성 밖으로 나온 라미셀 후작군은 곧장 전투 대형을 갖췄다.

“단숨에 놈들을 영지 밖까지 쓸어버린다.”

라미셀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오넬 백작이 의욕에 넘쳐 큰 소리로 외쳤다.

둥! 둥! 둥! 둥!

진격의 북소리가 울리고 라미셀 후작군이 야만족을 향해 돌격했다.

“와아아아!”

돌아오기로 했던 지옥 주술사들이 깜깜무소식이자 맨도사도 점점 초조해졌다. 현재로서는 지옥 주술사들이 맨도사에게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남은 야만족 병력은 채 1만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추가 지원군은 없었다. 야만족의 두 대족장이 이끄는 지원군은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인 바룬을 점령하기 위해 남진 중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맨도사가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패배하면 야만족의 가장 가까운 퇴로가 끊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야만족 대족장이 이끄는 지원군 역시 배후에서 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맨도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해야 했다.

“아직인가?”

맨도사가 부관에게 물었다.

“네.”

“허어. 오르테 그자는 대체 어디서 뭣 하고 있는 것인가?”

원래대로라면 오르테와 지옥 주술사들은 다들 어제 돌아왔어야 했다. 그리고 어젯밤 마계 괴물들을 소환해서 라미셀 후작성을 공격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제는커녕 오늘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그들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부관이 황급히 맨도사에게 달려왔다.

“오오. 드디어 온 것인가?”

맨도사는 부관이 오르테와 지옥 주술사들이 왔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성문이 열리고 기병들이 돌격해 오고 있습니다.”

“기병?”

순간 야만족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1천 기의 기병들이 떠올랐다.

“젠장, 하필 이럴 때…….”

지금 야만족의 전력으로는 그들 1천 기의 기병들을 막기에도 벅찼다.

“방책으로 길을 막고 활을 쏘고 창을 투척해서라도 어떻게든 놈들을 막아라.”

“네.”

부관이 황급히 달려 나가 야만족 진영에 그 명을 전달했다. 하지만 라미셀 후작성에서 나온 1천 기의 기병은 야만족 진영을 잘도 쑤시고 다녔다. 야만족들이 이를 막으려 들었지만 그 결과 희생자만 늘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저, 저것은…….”

부관을 비롯한 야만족들 모두 놀라운 광경에 잠시 넋이 나갔다.

“서, 성안에서 라미셀 후작군이 나왔다.”

부관은 다시 허겁지겁 맨도사에게 달려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또 뭔가?”

“성 안에 있던 라미셀 후작군이 나왔습니다. 지금 성문 앞에서 대행을 갖추고 있습니다.”

“뭐라고?”

기병부대가 들쑤셔 놓은 야만족을 라미셀 후작군이 공격해 온다면 야만족으로서 그들을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아아. 틀렸다.”

맨도사가 절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부관이 외쳤다.

“일단 퇴각해서 레이든 협곡으로 들어가시지요. 그곳이라면 기병들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좁은 협곡이라면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더욱이 기병들은 협곡 안에서 전혀 활동할 수 없었다. 기병과 라미셀 후작군을 동시에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라.”

워낙 다급한 터라 맨도사도 거기서 더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맨도사의 명에 따라 야만족에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어떻게는 버텨야 한다. 대족장들께서 제국의 수도 바룬을 점령할 때까지 말이다. 레이든 협곡으로 빠르게 퇴각한다.”

비록 라미셀 후작성은 점령하지 못하더라도 라미셀 후작군이 두 대족장이 이끄는 야만족 지원군의 배후를 공격하게 해서는 안 됐다.

맨도사는 레이든 협곡으로 물러나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라미셀 후작군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야만족은 에반스의 예상보다 훨씬 약했다. 그래서 에반스는 마법사 가브리엘과 두 제자들에게 준비시켜 둔 대규모 살상 마법을 취소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에반스와 기병부대가 적진을 휘젓고 적들이 전열을 갖춰 기병부대를 잡으려 할 때 밖에 나와 있던 라미셀 후작군이 기병부대에 호응해서 야만족을 치게 되어 있었다.

라미셀 후작군이 총공격에 나섰을 때 가브리엘과 두 제자들은 야만족이 뭉쳐 있는 쪽으로 대규모 살상 마법을 시전해서 야만족 진영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야만족은 에반스와 기병들만으로도 진영이 붕괴되었다. 어떻게 기병들을 막아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싱겁게 끝나겠군.”

기병부대를 이끌고 맨 앞에 서서 야만족을 유린하던 에반스는 생각보다 쉽게 야만족들을 물리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 시간 끌 것도 없이 에반스는 라미셀 후작군에 총 공격을 가하도록 명을 내렸다. 전령이 달려가고 에반스의 공격 명령을 전해 들은 오넬 백작은 라미셀 후작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와아아아!”

성 밖에 전투 대행을 갖추고 있던 라미셀 후작군이 야만족 진영을 향해 노도와 같이 돌진해 들어갔다.

그 기세에 놀란 야만족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을 쳤다. 그 과정에서 야만족 복장으로 위장하고 있던 라미셀 후작령의 백성들은 무기와 옷을 버리고 라미셀 후작군에 속속 투항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놓치지 마라.”

기세를 잡은 라미셀 후작군은 악착같이 퇴각하는 야만족의 뒤를 쫓았다. 그 과정에서 야만족의 부상자들과 뒤처진 야만족들은 라미셀 후작군의 창검에 참혹히 죽었다.

겨우 살아서 퇴각한 야만족의 수는 5천여 명으로 그들의 퇴로가 레이든 협곡 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오넬 백작이 에반스에게 달려갔다.

“놈들이 협곡 안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서 기병으로 놈들의 퇴로를 끊으십시오.”

오넬 백작의 말에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내 어제 한 말을 잊었소?”

“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지요.”

“퇴로를 막고 놈들과 싸우게 되면 놈들도 악착같이 저항할 것이고 아군의 피해도 커질 수밖에 없소.”

“하지만 놈들이 레이든 협곡으로 들어가게 되면 놈들을 없애는 데 더 많은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오넬 백작이 답답하다는 듯 에반스에게 말하자 에반스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잊었소? 우리에게는 가브리엘과 그 제자들이 있지 않소?”

“아!”

그제야 오넬 백작의 얼굴이 펴졌다. 야만족들은 지금 제 무덤을 찾아 레이든 협곡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좁은 협곡 안에 마법사들의 마법이 쏟아진다면 그 안의 야만족은 다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오넬 백작은 즉시 야만족을 추격하고 있는 라미셀 후작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야만족을 뒤쫓기는 했지만 무리해서 병력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라미셀 후작성에서 레이든 협곡까지는 걸어서 반나절 거리였다. 퇴각한 야만족이 레이든 협곡에 도착했을 때 해가 기울고 있었다.

라미셀 후작군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야만족을 쫓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야만족은 허겁지겁 레이든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입구를 다급히 틀어막았다.

5천여 야만족들을 이끌고 레이든 협곡 안으로 무사히 들어간 맨도사는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때 부관이 뛰어와서 보고했다.

“입구를 틀어막았습니다.”

“됐다. 일단 전열을 정비하고 식수와 식량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하라.”

“식수와 식량이라면 당분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보급부대를 직접 이끌고 왔으니까요.”

부관의 말에 맨도사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하하하. 수고했다. 그래,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제가 가져온 식수와 식량으로 한 달은 족히 버틸 수 있습니다.”

“한 달이나? 하하하. 됐다.”

맨도사가 손으로 무릎을 치며 크게 기뻐했다. 한 달이면 충분했다. 라미셀 후작군이 섣불리 수도로 움직이지 못하게 언제든 라미셀 후작성을 공격할 수 있다는 위협만 계속 가하며 협곡 안에서 버티면 됐다.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 안에 결판일 날 터였다. 두 대족장이 이끄는 추가 지원군이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든 아니면 패퇴하든 말이다.

최악의 경우 패배한다 하더라도 퇴로가 확보되어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었다. 파르미르 고원 너머 야만족의 영토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야만족의 침공으로 황폐화된 트렌시아 제국으로서는 도망치는 야만족을 추격하거나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놈들이 가까이 접근해도 가능한 활을 쏘지 말라.”

최대한 화살을 아끼려는 생각에서 맨도사가 부관에게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부관도 식수와 식량은 챙겼지만 무기까지는 챙길 수 없었다. 그래서 현재 야만족은 지금 지니고 있는 무기가 다였다. 하지만 그 정도 무기로도 협곡은 지킬 수 있었다.

야만족이 협곡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뒤를 쫓아왔던 라미셀 후작군은 협곡 주위를 에워쌌다. 하지만 쉽사리 협곡을 향해 공격해 오지는 못했다.

협곡의 입구는 성인 10명이 크게 팔을 벌리고 서면 될 정도의 폭이었다. 라미셀 후작성의 성문보다 두 배는 넓었지만 그 이외에 협곡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라미셀 후작성은 성곽 위로라도 기어 올라갈 수 있지만 협곡은 그렇지 못했다.

야만족으로서는 그 입구에서 라미셀 후작군을 맞아 싸우기만 하면 됐다. 개개인의 전투력에서는 단연 야만족이 강했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라미셀 후작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잘 알았던지 라미셀 후작군도 협곡 안으로 바로 공격해 오지 못했다.

협곡 입구의 바로 위는 기암들이 서로 맞물려 있었다. 때문에 라미셀 후작군이 화살을 쏘아도 그 기암들에 맞을 뿐 협곡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야만족에게는 그야말로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여기라면 한 달이 아니라 두 달도 버틸 수 있다.”

맨도사의 말처럼 식수와 식량을 아낀다면 두 달도 너끈히 버텨 낼 수 있었다. 맨도사는 퇴각해 온 레이든 협곡이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협곡에 들어섰을 때부터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잘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뭐지?”

맨도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해가 지면서 협곡 안으로 어둠이 찾아들었다. 부관은 협곡 입구에 불을 밝히게 했다.

다행히 협곡 안에는 마른 풀과 작은 나무들이 많았다. 그 나무들로 불을 밝히고 저녁 식사 준비까지 했다.

퇴각하기 바빠서 점심을 거른 야만족들은 음식 냄새가 나자 주린 배를 잡고 배급이 이뤄질 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협곡 입구를 지키는 병력을 제외하고 나머지 야만족들은 따끈한 저녁을 먹었다. 비록 배불리 먹지는 못했지만 살아서 이렇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야만족들은 기뻤다.

해가 지고 곧이어 협곡 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것을 보고 오넬 백작이 어이없다는 듯 에반스에게 말했다.

“놈들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마법사 가브리엘과 그 두 제자는 언제든 협곡 안을 향해 대량 살상 마법을 시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반스의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대재앙이 야만족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터였다.

“놔두시오. 저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이 아니오? 그보다 우리도 식사를 해야 하지 않겠소?”

에반스의 명령에 라미셀 후작군도 막사를 세우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이어 레이든 협곡을 에워싼 라미셀 후작군 진영에서도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라미셀 후작군 병사들의 식사가 끝나자 에반스는 가브리엘과 두 제자 핸슨과 푸욜을 불렀다.

“식사는 했습니까?”

“네. 그보다 언제 공격하실 생각이십니까?”

공격 시기에 맞춰 마법을 준비할 생각으로 가브리엘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공격은 하지 않습니다.”

“네?”

놀라는 가브리엘과 핸슨, 푸욜을 보고 에반스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놈들에게 있어서 결코 잊지 못할 밤이 될 것입니다. 단 세 사람 때문에 말입니다.”

에반스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가브리엘과 두 제자에게 에반스가 오늘 밤 그들이 해 줘야 할 일을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고 가브리엘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과연 야만족들에게는 절대 잊히지 않을 악몽 같은 하룻밤이 되겠군요.”

에반스와 그 문제를 두고 좀 더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누던 가브리엘과 두 제자가 밤이 깊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브리엘은 두 제자를 데리고 에반스의 지휘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협곡 쪽으로 움직였다. 협곡은 입구를 지키는 야만족들을 제외하고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 시간 간격이면 되겠지?”

가브리엘의 물음에 두 제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마나를 회복해서 다시 마법을 시전하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가브리엘의 입에서 마법 주문이 흘러나왔다. 이어 마법 주문이 완성되자 가브리엘이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볼!”

가브리엘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생성되었다. 그 불덩이는 곧장 협곡 쪽으로 날아갔다.

화르르르!

불덩이의 불길이 대기를 불사르며 협곡으로 날아가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콰앙!

쿠콰콰쾅! 쿠쿠쿠쿵!

불덩이는 협곡 위를 막고 있던 기암들에 맞아 화려하게 폭발했다. 그 폭발에 기암들이 부서지며 그대로 협곡 입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악!”

쿵! 쿵! 쿠쾅!

“크악!”

협곡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야만족들에게는 대재앙이었다. 순식간에 협곡 입구가 부서진 기암들에 의해 막혔고 그 바위 아래에 수백 명의 야만족들이 깔려 죽었다. 협곡은 이제 야만족이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됐다.

바위에 의해 완벽하게 틀어막히게 된 것이다. 마법을 시전하고 난 가브리엘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그의 두 제자인 핸슨과 푸욜이 어느새 마법 주문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이어 두 개의 커다란 불덩이가 협곡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 불덩이는 협곡의 좌우 절벽을 강타했다.

쾅! 쾅!

화려한 불꽃과 함께 협곡 좌우 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쿠르르르!

콰콰콰쾅!

협곡 안이 시끄럽게 요동쳤다.

어두워지자 맨도사는 협곡 입구를 지킬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야만족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갈 때 피곤했던 맨도사도 부관과 같이 협곡의 벽에 기대서 깜빡 졸고 있었다.

쾅!

그런데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뭐야?”

놀란 맨도사와 부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르르 쾅쾅!

폭발에 이어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며 협곡을 울리는 소리에 맨도사의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부관은 반사적으로 폭발음이 들린 쪽으로 달려갔다. 맨도사도 부관을 따라 움직였다.

폭발이 일어난 것은 협곡의 입구 쪽이었다.

“으으으으!”

그리고 협곡은 흙먼지로 엉망이었고 다 죽어 가는 야만족의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맨도사의 귀로 들려왔다.

“맙소사!”

잠시 뒤 흙먼지가 가라앉고 나서 맨도사와 부관은 끔찍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협곡 입구를 지키고 있던 수백 명의 야만족들이 무너진 바위 아래 깔려 참혹히 죽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그때였다.

화르르르!

두 개의 커다란 불덩어리가 협곡 밖에서 안으로 날아와서 협곡 좌우 절벽을 강타했다.

콰쾅!

연속적으로 폭발이 일어나고 이어서 협곡 양쪽 절벽이 허물어지며 바위 덩어리들을 협곡 아래로 쏟아 냈다.

“안 돼!”

맨도사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협곡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바위 소리에 묻혔다.

쿠콰콰콰쾅!

“크아아악!”

바위가 떨어지며 지면을 울리는 소리와 그 바위에 맞아 내지르는 야만족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협곡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잠시 뒤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협곡 입구로 달려갔던 맨도사와 부관은 운 좋게 바위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가, 가서 살펴보고 오라.”

맨도사는 겁이 나서 협곡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부관에게 명했다. 부관 역시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부관이 돌아왔다. 잔뜩 굳은 얼굴의 부관을 보고 맨도사가 힘없이 물었다.

“피해는?”

“3천여 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남은 야만족의 수가 2천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마법. 그래, 마법이었어.”

맨도사가 절망하며 외쳤다. 협곡으로 들어오면서 계속 찜찜했던 이유가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맨도사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며 비통하게 외쳤다.

“내가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죽은 내 수하들은 어찌할꼬.”

그 말에 맨도사에게 레이든 협곡을 추천했던 부관도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한 번의 마법 공격으로 협곡 안 야만족이 입은 피해는 극심했다. 이는 에반스도 생각지 못한 바였다.

에반스야 가브리엘과 핸슨, 푸욜에게 마법 공격을 맡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브리엘과 핸슨, 푸욜이 협곡 안의 야만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그 좌우 절벽에 마법 공격을 가하면서 그 피해를 극대화해 버린 것이다.

에반스의 애초 계획은 마법으로 야만족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해서 밤새 잠도 자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야만족을 괴롭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야만족을 섬멸한다는 것이 에반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에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죽더라도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자.”

맨도사가 살아남은 야만족들을 규합해서 외쳤다.

“와아아아!”

야만족들도 협곡 안에서 바위에 짓이겨져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맨도사의 뜻에 동조했다.

“치워라.”

맨도사가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들을 치우게 했다. 협곡의 폭발은 야만족뿐 아니라 라미셀 후작군 병사들도 깨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바로 에반스에게 보고되었다.

“협곡 안의 야만족들이 바위를 치우고 있습니다.”

“뭐?”

그 보고에 에반스는 지휘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 뒤 자신을 주시하는 눈이 없자 주술을 사용해서 까마귀로 변신한 후 하늘을 날았다.

하늘에서 협곡 내부를 살핀 에반스는 한 번의 마법 공격에 초토화된 야만족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리고 협곡을 막고 있는 바위를 치우는 야만족들에게서 살기를 감지했다.

다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간 에반스는 즉시 라미셀 후작군에 긴급 지휘 회의를 열었다. 지휘관들이 속속 지휘 막사로 들어오고 잠시 뒤 에반스가 그들에게 명했다.

“야만족들이 곧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 협곡 밖으로 나올 것이다. 정면으로 놈들을 상대하면 우리 측 피해도 클 수밖에 없다. 방패부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로 창병들, 그리고 그 뒤로 궁수들을 포진시켜라. 놈들이 다 나오면 활을 쏜다.”

사실상 야만족에 대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뒤 협곡의 바위를 치운 야만족들이 협곡 밖으로 나왔다. 라미셀 후작군은 2천여 야만족들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만약 살아남는 자가 있다면 전하라. 우리가 어떻게 최후까지 싸웠는지 말이다.”

“와아아아!”

맨도사가 남은 야만족들에게 전의를 돋웠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기정사실화 된 상태였다.

방패로 협곡 주위를 촘촘히 에워싼 라미셀 후작군은 그 뒤로 장창들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병들 뒤로 늘어선 수천의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길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준비!”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협곡 쪽을 향해 활을 겨눴다.

“가자. 먼저 죽은 동료들을 만나러. 공격하라.”

맨도사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와아아아!”

야만족 2천여 병사들이 일제히 돌격했다. 그때 라미셀 후작군 진영에서도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슈슈슈슝!

어두운 밤하늘을 수천 개의 화살이 가득 메웠다.

후두두둑!

퍼퍼퍼퍽!

“크아아악!”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내린 화살 비가 야만족 병사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포위한 라미셀 후작군을 향해 돌격하던 전열의 야만족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와아아!”

하지만 야만족 병사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동료 병사들을 밟고 그들은 계속 돌진했다. 그런 야만족 병사들에게 다시 화살이 쏟아졌다.

퍼퍽!

“아악!”

얼굴과 가슴에 화살을 맞은 야만족 병사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퍼퍼퍼퍽!

앞가슴과 다리에 10여 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맞은 야만족 병사가 애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팔과 다리에 화살이 박힌 야만족 병사는 이를 악물고 앞만 보고 계속 뛰었다.

“사격 중지!”

야만족이 라미셀 후작군에 근접하자 화살 공격이 중단되었다.

“와아아아!”

화살 공격에 2천여 야만족 병사들 중 절반 이상이 쓰러졌다. 겨우 1천여 명도 남지 않은 야만족이 라미셀 후작군을 향해 돌진해 왔다.

견고하게 포위망을 구축한 라미셀 후작군의 전열에는 방패부대가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그 방패를 든 병사들 사이에는 창병들이 대기 중이었다.

야만족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라미셀 후작군에게 덤벼들자 라미셀 후작군의 방패 병들이 방패를 내밀어 야만족과 맞섰다.

콰콰쾅!

야만족의 무기와 라미셀 후작군의 방패가 충돌하며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슈슈슝!

방패들 사이에서 장창들이 튀어나왔다.

푸푸푸푹!

“커억!”

장창은 야만족의 배와 가슴, 그리고 목을 꿰뚫었다.

슈슈슈슉!

야만족의 몸에 박혔던 창들이 다시 빠져나가 방패 뒤로 사라졌다. 이어 수백 명의 야만족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병력이 적은 야만족에게 한 번의 장창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한꺼번에 수백 명의 야만족 병사들이 쓰러지면서 야만족은 더 이상 파괴력 넘치는 공격이 불가능해졌다.

처처척!

그때 방패병들이 기세 좋게 전진했다. 그러자 그들 발아래 창에 찔린 야만족 병사들이 보였다.

“죽어!”

방패병들이 들고 있던 육중한 강철 방패로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야만족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콰직!

부상당한 야만족 병사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머리통이 박살 나 죽었다. 그때 야만족들 중 유일하게 라미셀 후작군의 방패병을 뚫은 자가 있었다.

바로 맨도사와 그 부관이었다. 맨도사는 방패 사이로 삐져나온 장창을 자르고 힘으로 방패병을 무너트린 뒤 그 안에 있던 창병과 방패병들을 베었다.

“와아아아!”

포위망이 뚫린 그 틈으로 살아남은 야만족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야만족에게 있어서 그쪽은 유일한 탈출구인 셈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병력이 한쪽으로 쏠리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야만족들은 알지 못했다. 아니, 그것을 생각할 시간도 여력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포위망의 일각이 무너지고 그쪽으로 야만족이 몰리자 오넬 백작이 부관을 불러 뭐라 지시했다. 그러자 부관이 달려가고 잠시 뒤 협곡을 포위하고 있던 라미셀 후작군이 움직였다. 그리고 소수의 병력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혈안이 된 야만족 뒤로 돌아 들어갔다.

라미셀 후작군이 야만족들을 에워싸 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야만족들은 악을 쓰며 싸웠다.

“쏴라.”

그것을 알려 주려는 듯 라미셀 후작군 지휘관이 등을 보이고 신나게 싸우고 있는 야만족을 향해 화살을 쏘게 했다.

워낙 근접해 있어 라미셀 후작군의 궁수들도 야만족을 조준 사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쉬리리릭!

퍼퍼퍼퍽!

“크윽!”

등에 화살을 맞은 야만족 병사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헉! 포위됐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야만족 병사들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빌어먹을…….”

라미셀 후작군 병사들의 피로 온몸이 붉게 변한 맨도사가 어느새 포위된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라미셀 후작군의 궁수들은 사격이 끝나자 뒤로 물러났고 바로 보병들이 투입되었다. 그 보병들과 싸우느라 맨도사도 그의 부관도 정신이 없었다.

그사이 포위된 야만족들은 라미셀 후작군이 쏘는 정교한 화살 공격에 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야만족의 전멸은 시간 문제였다. 그때 맨도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너희들이 말하는 야만족의 우두머리 맨도사다. 누가 나를 상대하겠느냐?”

맨도사는 죽더라도 혼자 죽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적 지휘관 하나 정도는 지옥 가는 길에 길동무로 삼고 싶었다.

맨도사의 외침에 야만족과 라미셀 후작군의 싸움이 중단되었다. 맨도사의 외침을 들은 오넬 백작이 라미셀 후작군을 뒤로 물린 것이다.

“헉헉!”

살아 있는 야만족 병사의 수는 채 100여 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라미셀 후작군 궁수들의 활시위는 이미 그들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

“활을 내려놔라.”

지휘관의 명령에 궁수들이 활시위를 놓고 활을 내렸다.

야만족의 총사령관인 맨도사는 충분히 자신의 죽음을 결정지을 자격이 있었다. 맨도사는 최후까지 싸우기를 원했다. 그 상대측 총사령관인 오넬 백작은 그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내가 나가겠다.”

오넬 백작이 직접 나서려 하자 주위 지휘관들이 말렸다. 하지만 오넬 백작의 뜻도 강경했다.

“내 손으로 끝내고 싶다.”

오넬 백작의 시선이 에반스에게 향했다. 에반스는 오넬 백작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넬 백작은 맨도사와의 싸움을 허락한 그의 새 주군 에반스에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맨도사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넬 백작을 보고 맨도사가 눈빛을 빛냈다.

“나는 라미셀 후작군의 총사령관 오넬 백작이다. 내가 너의 상대가 되어 주마.”

맨도사는 설마 라미셀 후작군에서 총사령관이 나올 줄 몰랐던 터라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를 배려한 행동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괜찮겠는가? 목숨은 하나뿐이다.”

지금이라도 다른 자가 나서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맨도사가 원한 것은 자신과 같이 죽어 줄 라미셀 후작군의 지휘관이었다.

“내 목숨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다. 너의 실력이 나를 능가한다면 내가 죽을 것이고 내가 더 강하다면 네가 죽을 것이다. 물론 내가 너보다 더 강하겠지만.”

“흥. 목이 잘리고도 그런 말이 나올지 두고 보자.”

맨도사가 오넬 백작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타앗!”

그리고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선불 맞은 곰처럼 맨도사가 오넬 백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퍼붓는 맨도사의 공격은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오넬 백작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가 맨도사보다 더 강하다고 자부할 만큼 오넬 백작의 실력은 대단했다. 오넬 백작은 여유 있게 맨도사의 공격을 막아 냈다.

촹, 촤촹, 촹!

느긋하게 공격을 막거나 흘려보내던 오넬 백작이 갑자기 몸을 날려 맨도사의 사각을 파고들어 갔다.

“헉!”

혼비백산한 맨도사가 급히 몸을 틀었지만 이미 오넬 백작의 어깨가 가슴팍에 맞닿아 있었다.

퍽!

제법 큰 충돌음과 함께 맨도사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어깨로 가볍게 툭 건드린 것 같은데도 맨도사의 가슴팍에 두른 흉갑이 움푹 꺼져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맨도사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오넬 백작은 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달려들어 몇 차례 검을 섞은 오넬 백작이 틈을 보아 맨도사를 발부리로 잽싸게 걷어찼다.

“큭.”

맨도사의 몸이 볼썽사납게 벌렁 나자빠졌다. 급히 몸을 일으키던 맨도사는 머리에 일격을 얻어맞고 또다시 뒤로 나가떨어졌다. 오넬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무릎으로 강타해 버린 것이다.

맨도사의 입에서 질펀하게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결코 질 수 없다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근성 하나는 알아줄 만했지만 애석하게도 맨도사와 오넬 백작은 실력 차가 압도적으로 났다.

퍽! 퍽!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다. 맨도사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오넬 백작은 검의 면으로 사정없이 맨도사를 때렸다. 하지만 맨도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자 오넬 백작이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맨도사의 허벅지 안쪽을 강하게 걷어찼다.

퍽!

“크아악.”

제대로 허벅지를 걷어차인 맨도사가 비명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가운데에도 맨도사는 감각이 없는 다리를 움켜쥔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더 이상 맨도사는 오넬 백작과 싸우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의 정신력이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그런 맨도사의 얼굴에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죽여야 할 때 바로 죽여 주는 것이 적 지휘관에 대한 배려였다.

“이제 끝내자.”

오넬 백작의 냉혹한 일갈과 함께 눈부신 빛이 대기를 갈랐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맨도사의 얼굴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쿵! 털썩!

맨도사의 머리와 명령기관을 잃은 그의 몸통이 동시에 땅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아직 살아 있는 야만족들을 향해 맨도사의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맨도사 님!”

“저놈을 죽여라.”

채 100명도 되지 않는 야만족들이 맨도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쏴라.”

슈슈슈슝!

퍼퍼퍼퍽!

“크아아악!”

하지만 그들은 맨도사의 복수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움직이려 하자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쏜 것이다.

수십 발의 화살을 몸에 맞고 남은 야만족들도 죽었다. 그들의 염원대로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면 그들의 죽음을 알렸을 텐데 아쉽게도 살아남은 야만족은 없었다.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맨도사와 야만족들은 모두 전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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