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와 1천 기의 기병들이 라미셀 후작성 근처에 도착한 것은 야만족들이 후방에서 몰래 공성병기를 운반하고 있던 그 밤이었다. 덕분에 야만족 진영은 초비상 상태였고 밤새도록 빈틈없이 꼼꼼하게 주위 정찰이 이뤄졌다.
결국 에반스도 야습을 통해 야만족의 식량과 무기들을 태워 버리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에반스는 라미셀 후작성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야영하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 혼자서 적진을 정찰하러 나섰다.
그때 에반스도 라미셀 후작성 주위에 운반된 공성병기들을 보았다.
“허어. 저것들 때문이었나?”
에반스도 왜 어젯밤 야만족 진영이 그렇게 초비상 상태였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쩝. 그런 줄 알았으면 어젯밤 저것들을 없애 버렸을 텐데.”
에반스는 어젯밤에 적진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왕 벌어진 일이었다. 에반스는 과연 라미셀 후작성에서 공성병기들까지 갖춰진 야만족을 어떻게 막아 낼지 궁금했다.
“오넬 백작이라고 했던가?”
에반스는 조용히 말을 몰면서 야만족 진영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혹 야만족 정찰병들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에반스는 주술로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그렇게 들키지 않고 에반스가 야만족 진영을 모두 살피고 나서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야만족들이 본격적인 공성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투석기를 성문에 집중 배치시키는 것이었다.
“허어. 단숨에 성문을 부숴 버릴 심산인가?”
어떻게 보면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만큼 야만족의 총사령관인 맨도사가 라미셀 후작성을 빨리 함락시키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 라미셀 후작성에서는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에반스가 팔짱을 끼고 라미셀 후작성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야만족에서 투석기의 배치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라미셀 후작성이 열리고 그 안에서 100여 기의 기병들이 달려 나왔다.
성문에서 투석기까지 거리는 250여 미터 정도. 기병이 돌격하면 순식간에 투석기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다렸다는 듯 야만족에서도 기병을 투입시켰다. 그런데 그 수가 50여 기로 라미셀 후작군 기병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에반스가 살펴본 라미셀 후작군의 선두에는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반면 야만족의 기병에 대해서는 에반스도 아는바가 없었다. 두 기병은 바로 맞붙었다. 그만큼 두 기병 간의 거리가 짧았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야만족 기병들과 부딪친 라미셀 후작군의 기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던 것이다.
“오오. 맨도사가 제법이로군.”
에반스가 야만족의 총사령관인 맨도사를 극찬했다. 놀랍게 야만족 기병들은 전부 소드 익스퍼트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라미셀 후작군은 기병 구성 시 소드 익스퍼트급의 기사들을 배제시켰다.
이는 오넬 백작의 지시였다. 투석기를 부수는 일에 아까운 소드 익스퍼트급 기사를 투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기병 간의 전투는 야만족의 압승으로 끝나 있었다. 수가 두 배나 많았지만 근본적인 실력 차이마저 극복할 순 없었다.
라미셀 후작군의 100기 기병들 중 선두의 기사들은 이미 첫 교전에 다 죽었고, 나머지 기병들도 대부분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야만족 기병들의 실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괴멸되어 버린 것이다.
살아남은 기병은 고작 다섯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 야만족 기병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크아아악!”
운 좋게 살아남은 기병 다섯도 하나씩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기병의 목도 달아났다. 라미셀 후작군의 기병 100기가 전멸당한 것이다.
기병이 전멸하자 라미셀 후작성의 지휘 망루가 발칵 뒤집어졌다.
“이, 이럴 수가…….”
“기병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오넬 백작이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전장을 쳐다보았다. 라미셀 후작군의 기병이 전멸한 데 비해 야만족 기병들의 희생은 전무했다.
“와아아아!”
야만족 기병들은 야만족의 환호 속에 당당히 야만족 진영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맨도사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됐다. 오늘에야말로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하고 말 것이다.”
맨도사는 바로 이런 날을 위해 특별히 선별한 50명의 병사들을 소드 익스퍼트로 키웠다. 물론 그들을 가르친 것은 트렌시아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제국에서 은퇴한 기사들을 맨도사가 몰래 영입해서 20년 동안 공들여 키워 낸 것이 바로 조금 전 선보인 야만족 기병들이었다.
“투석기를 쏠 준비는 되었느냐?”
맨도사의 물음에 그의 부관이 바로 대답했다.
“투석기에 사용될 돌들을 지금 나르고 있습니다.”
“준비되면 바로 쏴라. 그리고 언제든 성안으로 난입할 수 있게 전 병력에 전투 명령을 내리고.”
야만족들이 배치한 투석기로 돌덩이들이 운반되어 오는 것을 보고 라미셀 후작성의 지휘 망루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실려 온 돌덩이가 투석기 위에 오르는 즉시 투석기들이 발사될 것이고 돌덩이들이 성문을 향해 날아올 것이 자명했다.
“틀린 것인가?”
지휘 망루 위 지휘관들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고 있을 때였다.
“파이어 볼!”
화르르르!
불덩이가 날아가서 10기의 투석기 중 중앙에 배치된 투석기에 명중했다.
쾅!
활활활!
화염 마법에 명중된 투석기는 바로 불길에 휩싸였다. 그 모습에 라미셀 후작성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이어서 두 개의 불덩이가 더 날아가서 투석기에 명중했다. 순식간에 10기 중 3기의 투석기가 불길에 휩싸여 망실되었다.
마법사 가브리엘에 이어서 그 제자들인 핸슨과 푸욜이 화염 마법으로 투석기를 파괴시킨 것이다.
하지만 투석기를 불태워 망실시킬 만큼의 위력적인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 마나가 많이 소모되었다. 때문에 마법 실력이 떨어지는 가브리엘의 두 제자들은 화염 마법을 시전하고 나서 거의 탈진 지경에 처했다.
“파이어 볼!”
가브리엘도 두 번째 화염 마법을 시전하고 비틀거렸다.
쾅!
화르르르!
가브리엘이 시전한 마법은 그대로 투석기에 적중하면서 4기째 투석기가 망실되었다. 하지만 그때 야만족의 맨도사는 투석기가 불타는데도 웃고 있었다.
“이제 끝이군.”
맨도사는 라미셀 후작성에 세 명의 마법사가 있으며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간파하고 있었다.
투석기를 망실시킬 정도의 마법을 시전할 경우 그들은 두 시간 이상 마나 수련법으로 마나를 모아야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타고 있는 4기의 투석기가 아깝기는 했지만 앞으로 두 시간은 마법사들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맨도사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불붙은 투석기는 그냥 두고 나머지 투석기들을 발사하라.”
맨도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야만족들이 운반해 간 돌덩이들을 투석기 위에 올렸다.
“발사!”
그리고 6기의 투석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사되었다.
투투투투투퉁!
6개의 돌덩이가 라미셀 후작성을 향해 날았다.
슈슈슈슈슈슝!
하지만 그 돌덩이가 날아간 거리는 제각각이었다. 가장 멀리 날아간 돌덩이가 성벽을 넘어 성곽으로 떨어지고 나머지 세 개의 돌덩이가 성벽을 강타했다.
콰콰콰쾅!
명중된 성벽이 푹 꺼져 들어가면서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나머지 두 개의 돌덩이는 성벽 아래 해자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쿵!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맨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면 성곽 위 지휘 망루의 오넬 백작과 라미셀 후작군 지휘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빌어먹을. 똑바로 조준해서 발사하란 말이다.”
다시 투석기가 발사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투석기가 한 기씩 발사를 했다.
쉬이이이! 쾅!
돌덩이가 성문 옆 성벽을 강타했다. 그러자 맨도사의 일그러진 얼굴이 펴졌고 반면 오넬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만족들은 투석기의 위치를 조금씩 조절해 나갔다.
쉬이이이! 쿠쾅!
그리고 마침내 투석기에서 발사한 돌덩이가 성문 아래쪽에 맞았다. 다행히 땅에 맞으며 그 위력이 현격이 떨어진데다가 성문 밑을 때렸기 때문에 성문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덩이가 정확히 성문 쪽으로 날아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야만족들은 다른 투석기는 내버려 두고 그 투석기에 돌덩이를 실었다. 이제 그 돌덩이가 날아가서 성문을 때린다면 성문이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발사!”
야만족 부장의 발사 명령이 내려지자 투석기의 활강대가 하늘로 향하면서 받침대에 올려 두었던 돌덩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뭔가가 먼저 투석기로 날아왔다. 그것이 투식기의 지지대에 정확히 맞았다. 그러면서 투석기의 방향이 틀어졌다.
투툭!
지지대를 맞힌 뭔가는 아이 주먹만 한 돌멩이였다.
쉬이이이! 쾅!
투석기에서 날아간 돌덩이는 성문에서 벗어난 그 옆 성벽에 맞았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야만족의 입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오고 성곽 위에서 가슴 졸이고 있던 라미셀 후작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야만족 진영에서 단기의 말이 뛰쳐나왔다. 그런데 그 위에는 야만족이 아닌 트렌시아 제국의 기사가 타고 있었다.
네 차례 마법 공격 이외에 야만족 투석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라미셀 후작성의 반응에 결국 에반스가 나섰다.
에반스는 일단 조용히 야만족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투석기가 비교적 가까운 진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투석기 한 대가 비교적 정확히 라미셀 후작성의 성문 아래를 맞추는 것을 보고 급히 타고 있던 말에서 몸을 숙여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달리던 말에서 에반스가 발사 준비가 끝난 투석기를 향해 돌을 던졌다. 마나가 실린 돌은 빠르게 날아가서 운 좋게 투석기의 지지대를 때렸다.
투석기는 발사되었지만 지지대가 움직이면서 돌덩이는 성문을 부수지 못했다. 그때 에반스가 야만족 진영 앞쪽, 라미셀 후작성과 야만족이 대치하고 있는 그 빈 공간으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리고 투석기가 있는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헉! 막아라.”
맨도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다행히 투석기 주위는 야만족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중에는 궁수들이 절반가량 섞여 있었다.
슈슈슈슝!
먼저 화살이 에반스를 향해 빗발치듯 쏟아졌다. 에반스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타고 있는 말에도 주술로 방어막을 형성시켰다.
티티티팅!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던 화살들은 투명한 에반스의 방어막에 죄다 튕겨 났다. 계속 화살이 쏘아졌지만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반스는 빗발치는 화살 세례를 고스란히 튕겨 내며 투석기로 돌진했다.
화살이 통하지 않자 야만족들이 투석기 앞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때 에반스가 묘기를 선보였다. 말 위에 올라서서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던 것이다.
에반스의 몸이 훨훨 하늘을 날아서 투석기를 에워싼 야만족들 머리를 타고 넘어 투석기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에반스의 발이 정확히 투석기의 지지대를 밟았다. 순간 마나가 실린 에반스의 발이 지지대를 부러트려 버렸다.
우지끈!
에반스의 묘기에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야만족들은 에반스가 투석기 하나를 망실시키자 놀라 그를 잡으려 했다.
그때 에반스는 벌써 그 옆의 다른 투석기를 부수고 있었다.
퍽!
에반스가 다리로 걷어차자 투석기의 활강대가 간단히 박살이 났다. 그런데 에반스의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이쪽에서 나타났다가 이내 저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때마다 에반스의 앞에는 투석기가 있었다. 그가 발로 툭툭 찰 때마다 투석기들이 박살 나자 기겁하며 놀란 야만족들이 에반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저, 저놈을 잡아라.”
우르르!
야만족들이 에반스를 잡으려 덮쳤을 때 에반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때 6기의 투석기는 모두 박살 난 상태였다.
스르르르!
에반스의 모습이 그가 타고 왔던 말 위에 나타났다.
“하하하. 투석기 없이 공격해 봐.”
에반스가 야만족을 향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말 머리를 돌려서 말을 몰려 할 때 50여 기의 야만족 기병들이 에반스를 에워쌌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가 피식 웃었다.
“지금 나하고 한번 싸워 보자는 건가?”
에반스가 검을 뽑자 야만족 기병들 중 두 명의 기병이 에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랴!”
두두두두!
자신들이 소드 익스퍼트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이 들고 있는 검에는 푸른빛이 서려 있었다.
맨도사는 두 기병들이라면 에반스를 베어 버릴 거라 여겼다. 원래는 에반스를 저지시키기 위해 50명의 기병들을 불렀는데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에반스가 남은 6기의 투석기를 박살 내 버렸던 것이다.
투석기를 박살 낸 녀석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맨도사는 50명의 기병들로 하여금 반드시 에반스만큼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상황은 맨도사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크아악.”
난데없이 울려 퍼진 비명 소리에 야만족 기병들은 깜짝 놀랐다. 에반스를 베러 나섰던 두 명의 기병들이 격돌하는 순간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히히히힝!”
주인 잃은 말만이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소드 익스퍼트급의 야만족 기병 둘을 단숨에 꺼꾸러트린 에반스는 머뭇거림 없이 포위하고 있던 기병들 좌측으로 말을 몰았다.
“만만찮은 녀석이다. 포위해서 공격하라.”
기병 대장의 명령에 나머지 기병들이 일제히 에반스를 향해 말을 몰았다. 제아무리 강해도 소드 익스퍼트 48명의 검을 피해 낼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적인 우위는 에반스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에반스의 검이 번쩍하는 순간 가장 근접하게 접근했던 기병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기병의 목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리며 핏줄기가 쭉 뿜어져 나왔다.
이어 에반스에게 접근했던 기병 한 명이 또다시 방패와 함께 두 토막이 나 버렸다. 에반스의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는 방패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반스의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를 알아본 기병 하나가 소리쳤다.
“조심해라. 놈은 소드 마스터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란 것이 판명 나자 기병들이 에반스를 둥그렇게 포위했다. 사방에서 포위 공격을 하다가 드러난 빈틈에 검을 찔러 넣으려는 것이 기병들의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법에 당할 에반스가 아니었다.
에반스는 옆과 뒤는 무시하고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자 그의 옆과 뒤에서 기병들이 공격했지만 에반스의 몸 주위에는 방어막이 펼쳐져 있어 그들의 검은 모두 튕겨 났다.
그때 에반스의 검이 앞을 향해 내뻗었다. 그러자 검에서 빛이 번쩍였다.
파파파팟!
핏줄기와 함께 비명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미간이나 목, 그리고 심장 부위에 구멍이 뻥 뚫린 기병들이 피를 콸콸 쏟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검탄의 위력을 줄여서 대신 한 번에 십여 개의 검탄을 쏟아 낸 것이다. 순간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기병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리고 앞쪽에 길이 생겨났다. 에반스가 곧장 말을 몰았다.
기병들의 포위망이 뚫린 것이다. 에반스가 앞으로 말을 달리자 그 뒤를 기병들이 쫓았다. 에반스는 과감하게 말 머리를 돌려서 성을 포위한 야만족 진영 안으로 뛰어들었다.
“저, 저놈이…….”
기병들도 곧장 에반스를 쫓았다. 하지만 야만족 진영으로 뛰어든 에반스는 주술을 사용해서 어둠의 장막 뒤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헉! 어디 갔지?”
“뭐야? 놈이 어디로 간 거야?”
그 주위를 뒤지던 기병들은 결국 에반스를 찾지 못하고 맨도사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기병들이 사라지고 나자 모습을 드러낸 에반스는 빠르게 말을 몰아 야만족 진영을 벗어났다.
그리고 1천 기의 압실론 후작군 기병들이 주둔 중인 야영지로 달려갔다.
라미셀 후작성의 성곽 위 지휘 망루는 축제 분위기였다. 투석기가 다 부서져 버렸기 때문에 야만족이 더 이상 성문을 부술 수 없게 된 것이다.
“허어. 그 기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오넬 백작은 갑자기 나타나서 투석기를 부수고 사라진 트렌시아 제국의 기사가 누군지 궁금해 했다.
“분명히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소드 마스터란 얘긴데…….”
“소드 마스터라면 혹시…….”
성곽 위의 지휘관들은 모두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 전쟁 영웅 압실론 후작인가?”
오넬 백작의 말에 지휘관들이 모두 눈빛을 빛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콘라드 후작성에 있지 않나?”
그때였다. 안전한 성 아래에서 마나 수련법으로 마나를 회복하고 있던 마법사 가브리엘이 성곽에 나타났다. 그리고 오넬 백작에게 말했다.
“그는 아마도 압실론 후작이 맞을 것입니다.”
“뭐라고요?”
“압실론 후작성에 계시는 제 스승님께서 좀 전에 제게 연락하셨습니다. 압실론 후작이 지금쯤 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오넬 백작을 비롯한 라미셀 후작군의 지휘관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어떻게. 그럼 콘라드 후작성은?”
“콘라드 후작성을 공격하던 야만족을 압실론 후작군이 괴멸시켰다고 합니다.”
“오오!”
“과연 전쟁 영웅답군.”
“그럼 야만족을 상대로 지금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거잖아?”
“맞아. 정말 대단하군.”
순식간에 지휘 망루의 지휘관들이 압실론 후작을 극찬하기 바빴다.
“그런데 그가 왔다면 왜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는 거요?”
오넬 백작이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실은 콘라드 후작성에서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좋지 못한 일이라니요?”
오넬 백작의 물음에 가브리엘이 콘라드 후작과 후작성의 귀족들의 모의해서 에반스를 인질로 잡고 압실론 후작군을 차지하려 했던 음모를 얘기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오넬 백작을 비롯한 라미셀 후작군의 지휘관들은 모두 경악했다. 그들은 에반스가 왜 바로 라미셀 후작성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들을 콘라드 후작군과 같이 취급하는 것에 대해서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불식시킬 일이 일어났다.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에반스의 서신을 던져 놓고 사라진 것이다.
그 서신에는 에반스가 1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라미셀 후작성 주위에 있다는 것과 자신이 투석기를 부순 장본인이라는 것을 밝혔다.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은 어젯밤에 도착했고 야만족의 식량과 무기를 불태우고 라미셀 후작성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사정상 그러지 못하면서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오넬 백작은 이 소식을 즉시 라미셀 후작에게 전하고 그 뒤에 지휘관들로 하여금 라미셀 후작군에게 알리게 했다.
“하하하. 전쟁 영웅인 압실론 후작이 우리를 도우러 왔다.”
“이제 성을 지킬 수 있다.”
전쟁 영웅 압실론 후작이 라미셀 후작성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라미셀 후작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고 불안에 떨던 영지민들도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이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투석기가 부서졌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야만족에게는 투석기 말고 다른 공성병기가 있었다.
투석기가 모두 부서지면서 성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난입해 들어가는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맨도사에게는 아직 4기의 공성탑이 남아 있었다.
공성탑은 높이가 성벽보다 높고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이 자유로웠다. 몸체에는 강철판이 덧대어져 있어서 불화살이 먹혀들지 않았다.
공성탑의 아래에는 입구가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계단을 오르면 맨 위에 상부실이 있고 그 입구에 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 다리가 성곽 위로 놓이며 상부실에 대기 중인 병사들이 곧바로 성곽 위로 난입할 수 있었다.
공성탑은 아래로부터 지속적으로 병사들이 계단을 통해 상부실로 올라가서 성곽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공성탑이 성곽 위에 걸쳐지는 순간 야만족들은 사다리보다 안전하게 성곽으로 지속적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투석기의 공격 실패로 오전 공격은 취소되었다. 대신 맨도사는 서둘러 야만족에게 점심을 먹인 뒤 일찌감치 오후 공격을 시작했다.
와아아아!
무서운 기세로 야만족들이 라미셀 후작성을 향해 돌격해 왔다. 야만족의 공세는 언제나 파상적이었지만 라미셀 후작군은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10차례, 투석기 공격까지 11차례에 걸쳐서 야만족을 막아 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라미셀 후작군은 벌 떼처럼 사다리를 걸치고 달려드는 야만족을 향해 필사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화살과 돌, 끓는 물은 기본이었다. 공성전을 펼치는 야만족 병사들은 시뻘건 쇳물과 끓인 기름을 흠뻑 뒤집어쓰고 길길이 날뛰어야 했다.
성벽을 사이에 둔 혼전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양 진영 병사들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상대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때 큼직한 공성탑이 굉음을 울리며 라미셀 후작성을 향해 전진했다.
쿠르르르.
“공성탑이 온다.”
마법사 가브리엘이 화염 마법을 사용해서 공성탑을 공격했다.
쾅!
화르르르!
하지만 철판이 덧대어져 있는 공성탑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그리고 뼈대도 투석기와 달리 굵었기 때문에 웬만한 충격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공성탑이 마침내 라미셀 후작성의 성벽에 닿았다.
쿠르르르! 쿵!
굉음과 함께 공성탑 상부실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야만족들이 성곽 위로 쏟아져 나왔다.
“막아라.”
라미셀 후작군의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격려하며 외쳤다. 공성탑을 통해 4곳에서 야만족들이 성곽 위로 계속 기어올랐다.
성곽 위에서 라미셀 후작군이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성곽에 오른 야만족의 수가 늘어나면서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서로 성곽을 장악하기 위해 양쪽 모두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전황은 야만족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공성탑으로 인해 성곽 위가 혼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성곽 여기저기로 사다리가 놓였고 그 빈틈으로 야만족들이 기어 올라갔다.
여유가 있는 곳은 그 사다리를 밀쳐 내거나 사다리로 올라선 야만족을 공격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야만족들이 하나둘씩 성곽을 오르면서 라미셀 후작군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또한 파성퇴를 든 야만족들이 성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흙들을 야만족들이 실어 날라 해자를 메우자 파성퇴를 든 야만족들이 성문으로 다가가서 성문을 두들겼다.
쿵! 쿵! 쿵!
성문 위의 성곽에서는 파성퇴를 든 야만족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성곽을 지키려다가 성문이 깨지게 생긴 것이다. 투석기에 이어서 라미셀 후작성이 위기에 봉착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야만족의 배후에서 1천여 기의 기병 부대가 나타났다.
“쓸어 버려!”
그런데 그 기병 부대의 선두에 야만족들도 잘 아는 자가 있었다. 바로 투석기를 다 부숴 버리고 사라진 그 기사였다.
“저, 저놈은…….”
야만족 부장들 중 에반스를 알아본 자들이 놀라 두 눈을 부릅떴을 때, 에반스가 이끄는 1천 기의 기병들이 야만족을 짓밟았다.
“크아아악!”
이미 여러 차례 야만족을 상대했던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야만족을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퍼퍼퍼퍽!
말에 튕겨 나고 밟혀서 죽어 나가는 야만족이 부지기수였다. 기병 부대의 난입으로 성벽 아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공성탑이나 사다리를 통해 성벽을 올라가는 야만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타앗!”
에반스는 곧장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야만족들이 파성퇴로 열심히 성문을 부수고 있었다. 그사이 성문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성문이 박살 날 것 같았다.
에반스의 검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졌다. 그 빛이 파성퇴로 날아가서 폭발했다.
쾅!
파성퇴의 몸체인 커다란 나무가 박살이 났고 폭발에 피투성이로 변한 야만족들이 애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파성퇴가 박살 나고 더 이상 성벽을 오르는 야만족이 없자 전황이 다시 라미셀 후작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밀어붙여라.”
수적인 우위를 내세워 라미셀 후작군이 방패를 앞세우고 야만족을 내몰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야만족들이 공성탑으로 넘어가서 성 아래로 내려가는 황당한 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공성탑으로 넘어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공성탑에 설치된 계단이 너무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성탑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결국 성벽 아래로 내몰리는 야만족이 늘어났다.
“으아아악!”
20미터가 넘는 성벽에서 떨어지면 무사하기 힘들었다. 특히 라미셀 영지성의 해자는 깊었다. 특출하게 수영을 잘하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갑자기 나타난 적 기병 부대로 인해 우세했던 전황이 순식간에 뒤바뀌자 맨도사의 두 눈이 뒤집어졌다. 그런 맨도사의 눈에 선두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에반스가 보였다. 그의 검이 번쩍거릴 때마다 수십 명의 야만족 전사들이 쓰러졌다.
“저, 저놈이 또…….”
에반스를 알아보고 맨도사가 입에 거품을 물 때였다.
“당장 퇴각해야 합니다.”
부관이 외쳤다. 적 기병 부대는 야만족들을 휘젓고 다니고 성곽 위로 올라갔던 야만족들은 비명과 함께 성 아래로 추락했다. 게다가 성곽을 다시 확보한 라미셀 후작군은 화살을 쏘고 돌덩이를 투척했다.
그 때문에 성곽 아래 야만족의 피해가 더 늘어났다. 하지만 맨도사는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공성병기까지 투입시켜서 라미셀 후작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부관이 맨도사에게 말했다.
“저희들에게는 주술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주술사?”
순간 맨도사의 뇌리에 지옥의 주술사들이 떠올랐다. 지옥의 주술사들을 부른 것은 맨도사였지만 그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모든 일에서 그들을 배제해 왔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제 맨도사도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라.”
맨도사가 힘없이 부관에게 명했다. 부관이 즉시 야만족 부장들에게 퇴각을 명했다.
“물러난다. 후퇴해.”
야만족 부장들의 명령에 야만족들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에반스와 압실론 후작군의 기병 부대는 악착같이 야만족을 쫓으며 전과를 늘렸다.
하지만 먼저 퇴각한 야만족들이 화살을 쏘아 대자 에반스와 기병 부대는 곧장 라미셀 후작성의 성문 쪽으로 움직였다.
쿠우우웅!
성문이 열리자 에반스와 기병 부대가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곽에서 완전히 야만족을 몰아낸 라미셀 후작군은 서둘러 전열을 정비했다. 또 언제 야만족이 공격해 올지 모르니 말이다. 이때 라미셀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오넬 백작과 그 휘하 지휘관들은 전쟁 영웅 압실론 후작을 만나고 있었다.
“이렇게 후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넬 백작이 에반스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에반스도 작위는 자신보다 낮지만 존경의 의미로 살짝 머리를 숙이며 오넬 백작에게 말했다.
“내가 오히려 그대를 만나 영광이요.”
격식을 갖춘 인사가 끝나자 에반스가 먼저 오넬 백작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오넬 백작이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에반스와 악수를 나눈 뒤 오넬 백작은 자신 휘하의 지휘관들을 에반스에게 소개시켰다. 라미셀 후작군 지휘관들은 모두 전쟁 영웅인 에반스를 흠모와 존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에반스는 그런 그들과 기꺼이 악수를 나눴다.
지휘관들의 소개가 끝나자 오넬 백작이 자신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마법사를 에반스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마법사 가브리엘입니다.”
“아! 당신이었군요. 공작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에반스가 반가워하며 가브리엘과 포옹했다. 가브리엘도 안드레이 공작으로부터 에반스가 자식과 마찬가지란 말을 들은 터라 기꺼이 에반스를 껴안았다.
가브리엘은 직접 자신의 두 제자를 에반스에게 소개시켰고 에반스는 가브리엘의 두 제자인 핸슨과 푸욜도 가족처럼 꼭 안아 주었다.
에반스가 대충 주위 사람들과 인사가 끝나자 오넬 백작이 에반스에게 정중히 말했다.
“저희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후작가로 모시도록 하지요.”
오넬 백작이 직접 에반스를 후작 저택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총관의 안내를 받아서 라미셀 후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에는 40대 중반의 초췌한 모습의 귀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총관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나며 에반스에게 말했다.
“반갑소. 압실론 후작.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명성이랄 것도 없습니다. 소문은 원래 다 부풀려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에반스가 겸손하게 말하자 라미셀 후작이 희미하게 웃으며 에반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앉으시오. 보시다시피 내가 몸이 불편해서 오래 서 있지 못한다오.”
에반스는 라미셀 후작이 앉을 수 있게 서둘러 그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총관. 차를 내어 오게.”
라미셀 후작은 총관을 내보내고 나서 에반스와 오넬 백작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내 영지성을 지켜 주어 고맙소.”
“과찬이십니다. 모든 것은 여기 계신 오넬 백작께서 이뤄 낸 전공입니다.”
에반스가 그 공을 모두 오넬 백작에게 돌리자 오넬 백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압실론 후작님께서 돕지 않았다면 성을 온전히 지켜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전공은 모두 압실론 후작님과 그 휘하 기병들이 세웠습니다.”
에반스와 오넬 백작이 서로 전공을 미루자 라미셀 후작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서 내가 두 사람 모두에게 고맙다고 한 것 아니겠소.”
잠시 뒤 총관이 차를 내어 오자 라미셀 후작이 차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에반스에게 말했다.
“콘라드 후작성에서의 일은 나도 전해 들었소.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탐욕이 결국 화를 부른 것이지요.”
에반스가 비교적 담담하게 말하자 라미셀 후작이 감탄 어린 시선으로 에반스를 보며 말했다.
“압실론 후작은 나보다 어린데 어떻게 된 것이 나보다 더 철이 든 것 같소.”
“네?”
에반스가 어리둥절해 하자 라미셀 후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이요. 이곳 라미셀 후작성에서는 나 때문에 신경 쓸 일은 없을 것이요. 나에게는 자식도, 형제도 없으니 말이요.”
병색이 완연한 라미셀 후작이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에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콘라드 후작성을 점령했다고 들었소. 그 말은 콘라드 후작령을 집어삼키겠다는 뜻이요?”
라미셀 후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바로 대답했다.
“내가 비록 훌륭한 영주는 아니지만 나쁜 영주는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변화시키기로 결심했으니 그 크기가 좀 더 넓어졌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요.”
에반스의 말에 라미셀 후작이 물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하셨소?”
“네.”
“어떻게 말이요?”
“내가 영지민들을 주인으로 섬긴다면 세상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에반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라미셀 후작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