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드 후작 저택 안에서 한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자 주위로 수십 마리의 마계 괴물들이 보였다.
“이것들이 해치우라는 괴물들은 죽이지 않고 나한테로 죄다 몰아넣어?”
씩씩거리며 라일라가 혼자서 이리저리 날뛰며 마계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특급 어쌔신답게 그녀의 몸놀림은 눈부시게 빨랐다.
마계 괴물들이 그녀를 공격해도 그때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인간이었다. 수십 마리의 마계 괴물들을 상대하면서 그녀도 지쳐 갔다.
“헉헉. 이 늙은 홀아비 같으니라고. 분명 루크 그 인간의 농간이 분명해. 에잇!”
라일라는 거칠게 호흡하며 마계 괴물의 가슴에 박아 넣은 자신의 검을 힘겹게 빼냈다. 그때 숨어서 지켜보던 루크가 라일라의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호호호. 늙은 홀아비…… 크큭!”
루미나가 배를 잡고 웃음을 참고 있을 때였다.
“루미나 그년도 마찬가지야. 언니, 언니 할 때는 언제고 늙은이와 붙어서는 나를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만들어? 엉덩이에 손톱만 한 종기가 있다는 걸 다 까발릴까 보다.”
라일라의 외침에 루미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신 얼굴을 붉히고 있던 루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루미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루미나, 너 엉덩이에 종기가 있었니?”
루크의 시선이 루미나의 엉덩이 쪽으로 향하자 루미나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라일라 언니. 어떻게 그런 말을…….”
숨어 있던 루미나가 정체를 드러내자 라일라가 그녀를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호호호. 루미나 거기 있었구나. 엉덩이 종기 가지고 뭘 그러니? 그보다 너의 가슴…….”
라일라가 루미나의 신체에 대한 폭탄 발언을 더 하려 하자 루미나가 먼저 꽥 소리쳤다.
“언니!”
그러자 라일라가 힘겹게 마계 괴물의 공격을 피하며 외쳤다.
“루미나. 이 언니가 너무 힘드네. 그런데 입이 왜 이리 간질거릴까?”
그 말에 루미나가 이를 갈며 검을 뽑아 들고 마계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라일라가 누구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이 늙은 홀아비. 어서 못 나서? 안드레이 공작님이 아끼시던 마법서에 물을 엎지른 게 누구더라?”
그 말에 숨어 있던 루크가 버럭 소리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냐? 네가 밀치는 바람에 그런 거지.”
루크가 모습을 드러내자 라일라가 마계 괴물의 다리를 자른 뒤 외쳤다.
“빨리 도와줘. 그럼 참한 여자 소개시켜 줄 테니.”
“뭐? 여자?”
루크의 눈에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콰콰쾅!
이어 콘라드 후작 저택 내부에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콜록콜록. 이 빌어먹을 늙은 홀아비. 우릴 죽일 셈이냐?”
라일라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루크 아저씨. 어디 있어요?”
이어 루미나도 루크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연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나자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라일라에게 덤벼들던 수십 마리의 마계 괴물들이 연이은 폭발에 모두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마계 괴물들 사이에 지옥 주술사의 시체도 보였다.
“어디 있는 거야?”
헝클어진 머리칼에 온몸이 시커멓게 변한 라일라와 루미나가 두 눈에 불을 켜고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
“저기에요. 저 기둥 뒤에 뭐가 있어요.”
루미나가 소리치자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루크가 화들짝 놀라며 밖으로 도망쳤다.
“거기 서.”
“거기 서요.”
잔뜩 화난 라일라와 루미나가 검을 든 채 루크를 뒤쫓았다.
에반스의 손속은 잔인했다. 하지만 그런 에반스를 보고 콘라드 후작성의 영지민들과 병사들은 환호했다. 에반스의 손에 도륙되어 쓰러지는 존재들이 바로 마계의 괴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반스는 마계 괴물들을 제거하며 주술로 콘라드 후작성 주위에 변화를 살폈다. 그러자 콘라드 후작성에서 한참 물러나 있던 야만족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것들이…….”
주술사들을 동원한 것까지는 에반스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주술로 불러낸 마계의 괴물들을 성안에 풀어 놓아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려 한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에반스는 서둘러 마계 괴물들을 제거하며 압실론 후작군의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때 후작 저택에서 마계 괴물들을 다 해치운 루크와 라일라, 루미나가 나타났다. 에반스를 발견한 루크가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로 다가서며 말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그러자 에반스가 루크에게 말했다.
“남은 마계 괴물들을 부탁하지.”
그때 루크를 쫓아왔던 라일라와 루미나를 향해 에반스가 말했다.
“둘은 나를 따라와.”
그러자 루크가 라일라와 루미나를 향해 혀를 쏘옥 내밀었다. 발끈한 두 여자가 루크를 향해 가려 할 때 에반스가 소리쳤다.
“뭐해. 어서 따라오지 않고.”
그 말에 라일라와 루미나가 분통을 터트리며 에반스를 쫓아갔다. 에반스는 성문 쪽으로 달려가며 라일라와 루미나에게 성곽 위에 있는 괴물들을 제거하라고 명했다.
성문이 떨어져 나간 성곽 위에는 아직 마계 괴물들이 있었다. 키케로가 만약을 대비해서 마계 괴물들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한 것이다.
혹시 콘라드 후작성에서 성문을 복구하려 하더라도 그 성문 위 성곽을 마계 괴물들이 장악하고 있으면 야만족들이 몰려올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쿼워어어!”
마계의 하급 괴물과 달리 마계 괴수는 강했다. 특히 우르크는 지능은 떨어지지만 힘 하나는 결코 상위의 마계 괴수에 뒤지지 않았다.
부웅!
우르크가 거대한 돌망치를 휘둘러 대면 시스턴과 라르손, 그리고 압실론 후작군의 기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돌망치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시스턴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우르크를 자극했다. 그러자 지능이 떨어지는 우르크가 화가 나서 시스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키케로의 발목이 성문에 묶였다.
“그놈은 무시하고 성안으로 들어가라.”
키케로가 재차 명령을 내렸지만 우르크는 너무 화가 나서 그 명령도 들리지 않는지 콧김을 내뿜으며 시스턴을 향해 돌망치를 휘두르고 주먹과 발길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쿤다, 그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지금쯤 야만족들이 성문 쪽으로 밀고 들어와야 했다. 키케로가 떨어져 나간 성문 너머를 쳐다보았지만 야만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에반스가 성문 쪽에 나타났다.
“저건…….”
에반스가 한눈에 마계 괴수 우르크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마계 괴수를 조종하는 주술사 키케로를 쳐다보았다. 순간 에반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에반스의 눈에 키케로 주위로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는 원혼들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 원혼들의 주인은 바로 부상당했다가 지옥 주술사들의 제물이 되어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야만족 병사들이었다.
에반스는 주술을 통해 그 원혼들을 불러서 그들에게서 키케로와 주술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어찌 그런 참담한 짓을…….”
에반스는 비록 적이기는 하지만 부상당한 무고한 야만족 병사들을 희생시켜 마계 괴물들을 소환한 야만족 지휘부와 주술사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케스피 나와라.”
에반스가 지면에서 마계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땅속에서 마계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쿼어어!”
우순바가 마계 괴수를 교잡시켜 탄생한 최강의 마계 괴수 케스피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저, 저건 케스피!”
키케로가 한눈에 케스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쿼억!”
마계에서 소환된 케스피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우르크를 발견하고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우르크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우르크가 케스피에 겁먹은 모양이었다. 에반스가 케스피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케스피가 우르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쿼어!”
“크르!”
우르크가 놀라서 들고 있던 돌망치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 돌망치를 케스피가 손을 내밀어 잡아챘다. 그리고 나머지 손을 우르크를 향해 내뻗었다.
푹!
케스피의 날카로운 손톱이 우르크의 질긴 가죽을 간단히 뚫고 녀석의 몸속에 파고 들어갔다.
“케에에엑!”
우르크가 고통에 진저리를 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 케스피의 입이 우르크의 목을 물었다. 강철 같은 케스피의 이빨과 턱이 우르크의 목을 뜯어냈다.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우르크가 애처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목이 절반이나 뜯겨 나가고 속으로 목뼈가 훤히 드러난 우르크는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때 케스피가 키케로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우르크가 맥없이 케스피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잠시 넋을 놓고 있던 키케로는 케스피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자 놀라 도망치려 했다.
덥석!
하지만 케스피의 손이 더 빨랐다. 케스피의 손이 키케로의 몸을 낚아챘다.
“으으으으!”
케스피의 커다란 눈과 그 아래 우르크의 피와 살점이 묻은 입을 보고 키케로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크륵!”
그때 케스피의 거대한 이빨이 드러나자 시퍼렇게 질린 키케로가 딴엔 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 정도로 케스피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케스피는 그대로 키케로를 입속으로 넣었다.
“아, 안 돼!”
키케로가 케스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애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 소리와 동시에 케스피의 입이 다물어졌다.
으드득! 으드득!
케스피의 강철 턱이 입안의 키케로를 잘근잘근 씹었다. 순간 녀석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케스피는 키케로를 잡아먹은 뒤 주위에 있는 마계 괴물들을 다 잡아 먹었다. 이어 마계 괴물들을 조종했던 지옥 주술사들도 다 씹어 먹었다. 그리고 에반스가 다시 마계의 문을 열어 주자 쩝쩝 입맛을 다시며 마계로 돌아갔다.
그때 성곽 위의 마계 괴물을 제거하러 간 라일라와 루미나는 성곽 위의 병사들과 같이 마계 괴물들을 전부 제거했다. 그리고 마계 괴물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최후까지 버티던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 두 명도 죽였다. 그리고 한 명은 생포했다.
쿤다는 주술사들이 괴물들을 이끌고 새벽에 떠나고 나자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그때 주술사들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던 부장이 허겁지겁 쿤다에게 달려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그것이…….”
부장의 말에 화들짝 놀란 쿤다가 직접 주술사들의 치료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에 있어야 할 부상병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그때 쿤다의 뇌리에 어제 그가 생각했던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서, 설마 그들이 부상병들을 마계의 제물로 넘기고…….”
쿤다는 즉시 주위를 뒤져서 부상병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로 솟구쳤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허어!”
쿤다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콘라드 후작성 쪽을 쳐다보았다.
“가서 직접 물어봐야겠다.”
쿤다가 이끄는 야만족 1만 2천 병사들은 그제야 콘라드 후작성으로 진격했다.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콘라드 후작성의 성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쿤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두두두두!
성문 안에서 기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야만족 진영을 꿰뚫으며 수많은 야만족 병사들을 짓이겼던 그 기병들이었다.
그러나 그때 기병과 지금 기병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바로 기병의 선두에 에반스가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는 쿤다가 이끄는 야만족에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서지 않아도 될 싸움에 이렇게 직접 나선 것이다.
주술사들에 의해 성문이 열려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온 기병들로 인해 야만족들도 꽤 많이 놀랐다. 특히 쿤다의 놀람은 더 컸다.
에반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힘을 바로 사용했다. 하지만 대량 살상이 가능한 주술의 힘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드 마스터인 그의 힘만으로도 위력은 엄청났다. 에반스의 검에서 푸른빛이 뿜어질 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에반스가 쏘아 내는 검탄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야만족에서 기병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세운 방벽도, 장창 부대도, 궁수 부대도 모두 그 폭발에 휘말려 붕괴되었고, 기병은 그대로 야만족 진영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난무하고 야만족들이 우왕좌왕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성안에 있는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파이어 버스트!”
그들의 선두에서 루크가 대량살상 마법을 시전 했다.
휘이이잉!
커다란 불덩이가 야만족들이 뭉쳐 있는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야만족 백여 명이 그 폭발에 휩쓸렸고 그 주변의 야만족 수백여 명이 비명과 함께 후폭풍에 밀려 쓰러졌다.
슈슈슈슝!
성문을 나선 병사들은 대형을 갖추고 바로 화살을 쏘아 댔다.
후두두둑!
화살비가 야만족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퍼퍼퍼퍽!
“아아아악!”
기병의 공격에 진형이 붕괴된 야만족들이 우왕좌왕하다가 하늘에서 쏟아진 화살 비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수백 명의 야만족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와아아아!”
궁수들의 공격에 이어서 전투 대형을 갖춘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이 장창 부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야만족을 향해 돌격했다.
이에 야만족들이 이를 막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지만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회한 기병들이 그 야만족 병사들의 측면을 쳤다. 바로 진형이 무너진 야만족들은 변변하게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의 장창에 찔려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역시 전장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것은 에반스였다. 그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야만족들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나갔다.
야만족 부장들이 어떻게든 에반스를 막아 보려 했지만 야만족이 달려들면 그 즉시 오러 블레이드로 토막을 내어 놓으니 더 이상 에반스에게 접근하는 야만족들은 없었다.
“으아아아!”
오히려 에반스가 나타나면 야만족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무기까지 버린 채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전황은 이미 압실론 후작군 쪽으로 완전히 기운 뒤였다.
“퇴각하라.”
도저히 어떤 식으로 막아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자 쿤다는 후퇴를 명했다. 그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야만족들은 죽어라 뒤로 도망을 쳤다. 에반스는 굳이 야만족의 뒤를 추격하지 않았다.
1만 2천의 야만족들 중 7천을 잃은 쿤다는 남은 5천 병력을 정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쿤다와 야만족 부장들은 콘라드 후작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콘라드 후작성에서 백기를 든 기사가 뒤에 누군가를 태운 채 야만족 진영을 찾아왔다. 콘라드 후작성에서 사자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 사자는 에반스가 보낸 한 장의 서신과 콘라드 후작성에서 라일라와 루미나가 사로잡은 주술사를 데리고 쿤다 앞에 섰다.
“저희 후작님께서 이 서신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자가 전하는 서신을 쿤다가 직접 받아 읽었다.
“역시…….”
그 서신을 읽던 쿤다가 침울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콘라드 후작성에서 보내 온 주술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너는…… 지옥의 주술사인가?”
쿤다의 물음에 그 주술사가 바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 대답에 주위 야만족 부장들이 깜짝 놀랐다.
“지옥의 주술사라니?”
“그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주술사가 왜?”
“뭐, 뭐야? 설마 본대에서 보내 온 주술사들이 전부 지옥의 주술사들이었단 건가?”
“맙소사. 그럼 부상병들은…….”
야만족 부장들도 그제야 사라진 부상병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에반스가 보낸 서신에는 지옥 주술사들이 저지른 참혹한 짓에 대한 얘기가 적혀 있었다.
에반스는 사로잡은 지옥의 주술사를 심문해 본 결과 야만족 지휘관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서신과 함께 그 증인인 지옥의 주술사를 같이 보냈던 것이다.
놀랍게도 지옥 주술사들은 콘라드 후작성을 점령하고 나면 그 포로들과 점령한 콘라드 후작성의 영지민들을 제물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지옥 주술사의 만행을 알게 된 야만족들은 완전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제 틀렸다.”
쿤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야만족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지휘관들인 부장들도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되자 쿤다도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라미셀 후작성으로 간다. 가서 맨도사에게 따질 것이다.”
쿤다와 부장들은 그들의 총사령관인 맨도사가 왜 그들에게 지옥의 주술사들을 보냈는지 그것을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얼마 뒤 야만족들은 자신들의 숙영지를 버리고 떠나기 시작했다.
에반스는 성곽의 지휘 망루에서 야만족들이 북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라르손에게 명했다.
“지금 즉시 압실론 후작성으로 움직인다.”
쿤다와 패잔병들이 라미셀 후작령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북쪽 국경 지대로 이동해서 파르미르 고원 아래 평원을 거쳐서, 라미셀 후작령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움직일 경우 쿤다와 패잔병들이 제아무리 빠르게 이동해도 맨도사의 본대와 합류하는 데 족히 닷새는 시간이 걸렸다.
이게 다 에반스가 압실론 후작령을 지켜 냈기 때문이었다.
반면 에반스는 콘라드 후작성으로 올 때 이용했던 짐수레를 이용해서 반나절 만에 압실론 후작성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압실론 후작성에서 라미셀 후작성까지 짐수레와 도보로 이동 시, 하루면 도착할 수 있었다.
에반스는 압실론 후작군 중 4천을 콘라드 후작성에 남겼다. 그리고 라르손으로 하여금 콘라드 후작성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1천 기의 기병과 5천 병력을 짐수레에 실어서 곧장 압실론 후작성으로 향했다. 라일라는 남편인 라르손과 같이 있겠다고 해서 콘라드 후작성에 남겨 두고 나머지 일행은 에반스를 따라 압실론 후작성으로 움직였다.
이때 소피아와 그녀의 아들 마테오도 에반스가 데리고 갔다.
콘라드 후작성을 지키고 돌아온 압실론 후작 에반스는 이미 트렌시아 제국의 최고 영웅이었다.
“어서 오게. 트렌시아 제국의 전쟁 영웅.”
안드레이 공작이 성문 앞에서 직접 에반스를 맞았다.
“부끄럽게 왜 이러십니까?”
에반스가 쑥스러워하자 안드레이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유명세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법이네. 그 점을 잊지 말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과 그 일행들과 같이 압실론 후작성으로 입성했다. 성내에는 그를 보기 위한 압실론 후작성 영지민들의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압실론 후작님. 만세!”
열렬한 영지민들의 환호에 에반스가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렇게 후작 저택에 도착한 에반스는 총관으로부터 라미셀 후작성의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라미셀 후작성이 아직 야만족에게 점령되지 않았단 말인가?”
에반스가 놀라워하자 그 옆의 안드레이 공작이 라미셀 후작성의 상황을 조사라도 한 듯 자세히 말했다.
“그곳 총사령관인 오넬 백작이 제법 지략가인 모양이네. 그리고 그곳에 내 제자 녀석이 하나 있는데 그 녀석과 그 녀석의 제자들이 꽤 큰 전공을 세운 모양이더군.”
그 말을 하는 안드레이 공작의 목에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자긍심이 가득한 안드레이 공작을 보고 에반스가 반짝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라미셀 후작성을 구할 시간이 있겠군요?”
“여기서 라미셀 후작성까지 하루면 이동할 수 있지 않나? 지금으로 봐선 하루 만에 라미셀 후작성이 점령될 것 같지는 않으니 그렇겠지.”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즉시 기병 1천으로 하여금 출정을 준비시켰다. 보병 없이 기병으로 이동하면 라미셀 후작성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에반스는 일행 모두 압실론 후작성에 두고 혼자서 1천 기병을 이끌고 라미셀 후작성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트렌시아 제국의 전쟁 영웅인 에반스의 결정이었다. 누구도 그의 결정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라미셀 후작성을 구하려는 그의 충정을 칭송하기 바빴다.
에반스가 막 출정 준비를 끝냈을 때였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에반스를 찾아왔다. 바로 에반스의 압실론 후작령에 새로이 상단을 세우고 재기를 위해 분주하게 노력 중이던 다이안이었다.
에반스는 그녀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심하다가 그냥 만나기로 했다.
“어쩐 일이요?”
에반스가 바쁜 듯 용건부터 묻자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바쁘신 분을 제가 붙잡은 것 같군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당신을 오래 붙잡고 있진 않을 테니까요. 우선 콘라드 후작성에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걱정 많이 했어요.”
다이안의 말에 에반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지금 나를 걱정했다고 했소?”
“네. 왜요? 제가 걱정하면 안 되나요?”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런 말은 처음 들어서 그렇소.”
모두들 전쟁 영웅의 귀환에 환영했다. 그리고 축하의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걱정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호호호. 전쟁 영웅에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게 당신은 전쟁 영웅이 아니라 진짜 영웅이세요. 그러니 제가 당신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죠.”
“내가 당신의 영웅이란 말이요?”
“그래요. 당신은 제가 다시 꿈꿀 수 있게 해 준 분이니까요.”
그때 문득 에반스의 뇌리에 ‘우리는 누군가의 영웅입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최진철의 기억에서 떠오른 문구 같았다. 바로 영웅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내용이었다.
에반스는 문득 자신의 전쟁 영웅이 된 것에 공명심도 어느 정도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기심으로 불필요한 희생도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에반스는 지금 영웅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과연 영웅이라 불려도 좋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영웅이란 뭘까?’
에반스는 다이안을 만남으로 해서 자신의 삶을 잠시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에게 새로운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영지 개혁과도 연관이 있었다.
영지민들을 위한 강한 영주! 그것이 지금까지 에반스가 생각해 온 자신의 삶의 목표였다. 그런데 그는 영지민들의 영웅이었지 그들을 영웅이라 여기지 않았다.
에반스는 겸허하게 그간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제라도 영지민들을 그의 영웅으로 여기며 강한 영주로 거듭나기로 결심했다.
“고맙소.”
에반스가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다이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네?”
정작 다이안은 에반스가 왜 자신에게 고마워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상단은 잘 운영되고 있습니까?”
에반스가 살짝 화제를 바꿔 묻자 다이안이 바로 대답했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니 아무래도 장사에도 한계가 있어요. 해서 휴전이나 전쟁이 끝날 경우를 대비해서 무기와 식량을 가능한 많이 확보 중이에요.”
다이안의 말에 에반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빠른 시일 내에 끝이 날 것이요. 전후는 당신이 재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 같구려.”
에반스의 말에 다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후작님께서 상인이 되셨다면 제국 최고의 거상이 되셨을 거예요.”
에반스는 다이안과 몇 마디 말을 더 나눴다. 다이안은 주로 에반스의 상재를 극찬했고 에반스도 다이안의 현명함을 칭찬했다.
그때 소피아가 에반스가 떠나기 전 그에게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전하러 왔다가 다이안과 다정하게 서서 대화하는 그를 보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소피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럴 줄은 모르고 에반스는 다이안과 같이 1천 기병들이 기다리는 성문 쪽으로 움직였다. 성문 앞에서 에반스는 다이안과 작별을 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고맙소. 그리고 자금 문제는 총관에게 가면 그가 해결해 줄 것이요.”
말을 마침 에반스는 곧장 1천 기병을 이끌고 라미셀 후작성으로 출발했다.
맨도사는 또 패퇴해서 병력을 물리며 이를 악물었다. 벌써 10차례나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지만 라미셀 후작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라미셀 후작성의 군사요새인 루드실 영지성을 함락시킬 때까지만 해도 곧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막상 라미셀 후작성을 치자 그곳의 수성 준비가 너무도 완벽했다. 라미셀 후작성은 견고한 성채에 해자가 넓고 그 깊이 또한 깊었다. 또한 라미셀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오넬 백작은 수성전에서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견고한 성채 안에서 최고 지휘관이 라미셀 후작군 병사들을 지휘하자 라미셀 후작성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기라도 하듯 라미셀 후작성은 야만족의 공격을 전부 다 막아 냈다.
맨도사는 이에 후방에서 은밀하게 공성병기를 제작시켰다.
“어디 내일도 막을 수 있나 두고 보자. 빠드득!”
맨도사는 내일은 반드시 라미셀 후작성을 함락시킬 생각이었다. 그가 이토록 자신하는 것은 바로 그가 후방에 준비시킨 공성병기, 즉 투석기와 공성탑이 오늘 밤 드디어 완성된다는 소식을 후방에서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맨도사는 날이 어두워지면 후방으로부터 완성된 투석기와 공성탑을 은밀히 라미셀 후작성까지 운반해 와서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오전의 일전 이후 야만족은 라미셀 후작성을 공격하지 않고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러자 라미셀 후작성의 지휘 망루에서 오넬 백작이 의심스런 눈으로 적진을 주시했다.
“놈들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한데…….”
그때 그 옆에 있던 검은 로브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저도 이상해서 조금 전 인근을 탐지 마법으로 살폈지만 의심 살 만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마법사 가브리엘이었다. 그는 라미셀 후작의 전속마법사였으며 바로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였던 것이다. 가브리엘의 옆으로 젊은 마법사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가브리엘의 제자들인 핸슨과 푸욜이었다.
“으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오넬 백작은 왠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그런 기분을 털어 내며 말했다.
“보아하니 오늘은 전투가 없을 것 같으니 병사들을 좀 쉬게 해야겠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법으로 적진의 움직임을 세세히 살펴 주시오.”
오넬 백작의 부탁에 가브리엘이 바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기 있는 핸슨과 푸욜이 돌아가며 적진의 움직임을 살필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 오넬 백작은 성곽에 주둔 중인 병력의 절반을 성곽 아래로 내려가게 해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그렇게 밤이 되자 먼저 쉬게 했던 절반의 병력이 충분하게 휴식을 취한 뒤 남은 성곽의 병력과 교대를 했다.
그렇게 밤이 깊었고 오넬 백작의 예상대로 더 이상 야만족의 공격은 없었다. 그래서 방심한 가브리엘의 두 제자는 그날 밤 마법으로 적진을 살피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으스름하니 날이 밝아 올 때였다.
성곽의 감시 망루에서 라미셀 후작군의 병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야만족의 진영에서 커다란 구조물을 발견했던 것이다.
“헉! 저것은…….”
놀란 라미셀 후작군 병사가 황급히 그 사실을 지휘관에게 보고했다. 지휘관은 곧바로 총사령관인 오넬 백작에게 달려갔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적진에 공성탑이 있다니.”
깜짝 놀란 오넬 백작이 곧장 지휘 망루를 올랐다. 그리고 적진에 서 있는 공성탑과 그 주위에 투석기를 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언제 저것들을 다 준비했단 말인가?”
오넬 백작이 반쯤 넋이 나가 있을 때 소식을 들은 듯 마법사 가브리엘이 지휘 망루로 달려왔다. 그리고 야만족 진영을 보고는 경악했다.
“맙소사.”
가브리엘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야만족 진영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그 두 제자인 핸슨과 푸욜이 나타났다.
“너희들 어젯밤에 대체 뭘 한 것이냐?”
가브리엘이 두 제자를 힐책하자 오넬 백작이 말했다.
“그만두시오. 그들을 나무란다고 저 공성병기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요.”
“하지만 먼저 알았다면 대책을 세울 시간을 최대한 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넬 백작의 말처럼 자신의 두 제자를 나무란다고 해서 눈앞의 공성병기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서 대책 회의를 소집하라.”
라미셀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오넬 백작의 명령에 아침 일찍부터 라미셀 후작성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젯밤 후방에서 제작된 공성병기들이 무사히 라미셀 후작성까지 운반되었다. 맨도사는 상기된 눈빛으로 라미셀 후작성을 쳐다보았다.
투석기 10대에 공성탑 4기가 준비되었다. 라미셀 후작성의 병력은 1만여 명 정도였다. 반면 야만족은 그동안 입은 병력 손실을 빼고 1만 5천의 병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투석기로 성문만 부순다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성문만 깨뜨린다면 곧장 야만족들이 투입될 것이고 전투력에서 월등한 야만족 병사들이 성안으로 난입해 들어가면 라미셀 후작성은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가지, 맨도사가 걱정하는 것은 투석기를 성문 앞에 배치시켰을 때 성안에서 적들이 몰려나와 투석기를 부수는 것이었다.
“투석기가 배치되는 것을 보면 놈들이 무슨 수를 쓰든 투석기를 부수려 할 것이다. 그것을 막아 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니 투석기 주위로 겹겹이 병력을 배치시켜라.”
아침 식사를 마친 야만족들은 투석기 10대를 성문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것을 보고 라미셀 후작성이 발칵 뒤집어졌다.
맨도사의 생각대로 오넬 백작은 기사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기병 100기를 투입시켜 투석기를 부술 계획을 짰다.
기병들은 투석기의 배치가 끝나는 대로 바로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성문 앞에 대기했다.
맨도사는 성문 바로 앞쪽에서 혹여 불화살에 투석기가 불타는 일이 없게 화살 사정거리 밖에 투석기를 배치시켰다. 그렇게 막 10대의 투석기가 라미셀 후작성의 성문을 보고 나란히 배치되었을 때였다.
쿠우우웅!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기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갖춰 성 밖으로 움직였다.
다그닥! 다그닥!
빠르게 성문을 빠져나온 기병들은 기사들이 선두에 선 채 빠르게 투석기가 있는 전면으로 내달렸다.
두두두두!
말발굽이 맹렬히 대지를 박찼다. 흙먼지를 흩날리며 기병 100기가 화살처럼 빠르게 돌격할 때, 그 모습을 지휘 망루에서 지켜보며 오넬 백작과 라미셀 후작군 지휘관들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두두두두!
야만족들이 말을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서 기병을 운용함은 전술의 기본이었다. 야만족도 그 기본에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야만족 기병은 처음 접하는 터라 성곽 지휘 망루의 오넬 백작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라미셀 후작군의 기병 선두의 기사들은 머뭇거림 없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야만족 기병의 수는 채 50기에 불과했다. 힘에 있어 야만족이 더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 상대가 기사라면 얘기가 달랐다. 라미셀 후작군의 기병에는 기사들이 2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 기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랴.”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 나왔다.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두 기병 간의 격돌은 금방 이뤄졌다.
선두의 기병들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라미셀 후작군 기사들은 빠르게 돌진해 온 야만족 기병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야만족들 역시 검을 휘둘렀다.
촤촤촤촤앙!
그때 선두에 돌진했던 라미셀 후작군 기사들의 검이 잘려 나가고 이어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갑옷이 쩍 벌어지며 핏줄기가 솟구쳤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생을 마감한 기사들이 거꾸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