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소피아와의 재회 (74/90)

Chapter 4   소피아와의 재회

콘라드 후작의 명에 따라 임시로 콘라드 후작성에 대한 방어 책임이 콘라드 후작군에게서 압실론 후작군에 넘어갔다. 그리고 야만족을 상대로 싸워 온 콘라드 후작군 병사들에게 휴식과 함께 술과 음식이 내려졌다.

이어 콘라드 후작군의 지휘관들도 후작가로 불려 가서 콘라드 후작이 연 만찬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무엇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야만족을 상대로 싸우며 피 묻은 검을 쥐었던 손에 술잔이 들려 있는 것이 많이 어색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서 그들의 긴장했던 얼굴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독 콘라드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제이슨 백작의 얼굴만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부관과 휘하 지휘관들이 그에게 다가가 얼굴 표정에 신경 좀 쓰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이슨 백작은 묵묵히 술만 마시며 굳은 얼굴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 콘라드 후작은 자신을 돕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와 준 압실론 후작 에반스에게 계속 술을 권하고 있었다. 에반스는 콘라드 후작이 권하는 대로 술을 마시고 또 콘라드 후작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기도 했다.

술이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았던 콘라드 후작도 에반스의 주량은 감당을 못 했다. 에반스가 마시는 술은 모두 주술로 다 물로 변한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마셔도 취할 리 없었다.

반면 에반스와 같이 계속 술을 마신 콘라드 후작은 서서히 취기가 오르면서 에반스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드로를 불렀다.

콘라드 후작의 장남인 페드로는 야만족이 침공하기 전까지 콘라드 후작령을 통치하던 실세였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서 그의 부족한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해서 지금은 콘라드 후작이 직접 모든 것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마무리되면 페드로가 다시 콘라드 후작령을 이끌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허허허. 나는 이제 다 늙은 모양이야. 잠시 쉬어야겠네. 여기 내 아들이 내 대신 손님을 접대할 것이야.”

콘라드 후작이 만찬장을 떠나며 말했다. 에반스는 아쉬워하면서 콘라드 후작을 만찬장 밖까지 배웅했다.

“들어가시지요.”

콘라드 후작 대신 만찬을 주재하게 된 페드로가 웃는 얼굴로 만찬장 안으로 에반스를 다시 안내했다.

“자. 한잔 받으십시오.”

나이는 페드로가 많았지만 그는 아직 콘라드 후작이 아니었다. 때문에 압실론 후작인 에반스에게 말을 놓지 못했다. 에반스는 콘라드 후작에 이어 나타난 그 아들에게 술을 받으며 이제 슬슬 만찬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만찬에 참석한 콘라드 후작군의 지휘관들 중 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에반스가 자신을 위한 만찬에 콘라드 후작군 지휘관들을 전부 불러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콘라드 후작령의 주인도 아닌 그가 굳이 콘라드 후작군 지휘관들을 챙길 이유가 없었다. 에반스가 그들과 같이 술을 마신 것은 그들이 과연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에반스는 술을 마시면서 귀를 열고 콘라드 후작군 지휘관들이 서로 은밀하게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경청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얘기하던 콘라드 후작군 지휘관들도 술이 들어가자 차츰 흉금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 대화 내용에서 에반스는 콘라드 후작이 후작군은 물론 후작령 내 영지민들에게도 크게 인심을 잃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지금 에반스에 시시덕거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콘라드 후작의 후계자인 페드로 때문이었다.

지휘관들이 가장 불만스러워 한 것은 페드로가 지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처남을 군사 요새 포드넨 영지성의 수성을 맡긴 일이다.

만약 그때 포드넨 영지성을 지금의 총사령관인 제이슨 백작이 맡았다면 야만족이 콘라드 후작성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휘관들의 주관적이 판단일 뿐이었다. 에반스가 보기에는 제이슨 백작도 별거 없어 보였다.

그가 제대로 된 지휘관이었다면 난공불락의 성인 콘라드 후작성을 지켜 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에반스가 압실론 후작군을 이끌고 오지 않았다면 콘라드 후작성은 야만족에 함락되었을 터였다.

보아하니 야만족에 의해 갈수록 상황이 불리해지자 불안해진 지휘관들과 영지민들이 그 모든 책임을 대영주인 콘라드 후작에게 묻지는 못하고 괜히 그 후계자인 페드로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야만족 침공 이전에 콘라드 후작령을 통치했던 페드로에게 그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술잔이 오가는 동안 에반스가 최대한 정중히 페드로를 대하자 페드로도 에반스가 편했던지 술기운을 빌어 슬슬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에반스는 이쯤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농담을 받아 주지 않았다.

“먼 길을 달려왔더니 피곤하군요.”

그만 쉬고 쉽다는 뜻을 페드로에게 전했다. 그러자 페드로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페드로가 에반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자신으로 인해 에반스가 기분 상한 것이 아닌지 안절부절못하자 에반스가 바로 말했다.

“정말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술도 많이 마셨고 여기서 더 마셨다가는 저도 실수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에반스가 끝까지 정중하게 페드로에게 말했다. 그러자 페드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아버님께서 후작님을 잘 모시라고 했는데 내가 결례라도 저지른 줄 알았습니다. 쉬시겠다니 그렇게 하십시오.”

페드로가 에반스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비켜.”

술에 만취한 제이슨 백작이 휘하 지휘관들을 뿌리치고 페드로와 에반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제이슨 백작. 무슨 일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제이슨 백작을 보고 페드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제이슨 백작이 손가락으로 에반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뭘 그렇게 졸아 계십니까? 후작님이나 페드로 님이나 저 새파란 애송이가 병사 좀 데려 왔다고 아부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닥쳐라. 이 무슨 결례인가?”

페드로가 만취한 제이슨 백작에게 호통을 치며 주위 지휘관들을 훑어보았다. 어서 무슨 조치를 취하라고 말이다. 그러자 지휘관들이 제이슨 백작을 만류하고 나섰는데 그때 에반스가 말했다.

“잠깐. 제이슨 백작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그냥 두시오.”

에반스의 말에 지휘관들이 놀라며 페드로를 쳐다보았다. 페드로가 안 된다며 턱짓으로 제이슨 백작을 끌어내라고 지휘관들에게 신호를 보낼 때 제이슨 백작이 말했다.

“어이. 잘난 척하지 마. 운 좋게 야만족 좀 막아 냈다고 거만을 떨기는…….”

그 말에 에반스의 얼굴이 굳었다. 에반스의 눈치를 보고 있던 페드로가 버럭 화를 내며 외쳤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제이슨 백작을 데려 나가지 않고?”

그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명의 지휘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제이슨 백작의 사지를 붙잡고 만찬장 밖으로 들고 나갔다.

“이거 놔라. 노고를 치하하는 만찬 좋아하시네. 잘난 척하려고 우릴 불러 모은 것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제이슨 백작은 만찬장 밖으로 내쳐질 때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에반스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런 에반스의 눈치를 살피며 페드로가 전전긍긍하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이슨 백작이 원래 술에 약해서…… 하하하.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저지른 결례입니다.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페드로의 말에 에반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술에 취하면 원래 본심이 드러나는 법이 아닙니까?”

에반스의 말에 페드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아닙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만약 에반스가 화가 나서 데려온 병력을 빼기라도 한다면 콘라드 후작성은 끝장이었다.

그때 놀란 페드로의 얼굴을 보고 굳어 있던 에반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제이슨 백작이 많이 취한 모양이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에반스가 만찬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페드로가 황급히 에반스 옆으로 달려가서 그를 마중했다.

만찬의 주인공인 에반스가 돌아가자 만찬은 바로 끝이 났다. 하지만 페드로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콘라드 후작의 집무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 압실론 후작이 괜찮다고 했지만 제이슨 백작이 저지른 결례가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제이슨 백작, 내 그자가 사고를 칠 줄 알았다.”

페드로는 계속 제이슨 백작을 욕했다. 하지만 그를 욕한들 이미 벌어진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 총관이 조심스럽게 페드로에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 예전 압실론 후작이 소피아 님을 많이 좋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 그게 사실인가?”

“네. 소피아 님이 압실론 후작성에 놀러갔을 때 같이 생활했던 시녀장의 말이니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

페드로의 눈이 번들거렸다. 페드로는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했다. 지금까지 콘라드 후작의 후계자인 그가 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하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치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소피아를 데려와라.”

페드로의 명령이 내려지자 총관이 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곤 총관은 곧 소피아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총관은 나가 있어라.”

총관을 내보내고 나서 페드로가 소피아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자다 일어난 것이 역력해 보이는 소피아는 약간 질린 얼굴로 페드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또 무슨 일이죠?”

그러자 페드로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하다. 마테오는 잘 있지?”

마테오는 바로 소피아가 낳은 아들이었다. 테오르를 비롯해서 시어머니였던 후작 부인과 그 형제들이 모두 죽자 소피아는 콘라드 후작이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강제로 콘라드 후작성으로 끌려왔다.

그때 그녀의 배에는 죽은 테오르의 자식이 자라고 있었다. 바로 그 아이가 마테오였던 것이다. 페드로가 마테오를 거론하자 소피아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그런 소피아를 보며 페드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 너를 불렀다.”

“급한 일이요?”

“그래. 내가 만나 줘야 할 자가 있다. 지금.”

“네? 지금이라니요?”

“그자가 화가 많이 나 있을 거다. 네가 잘 위로해 줘야겠다.”

“뭐, 뭐라고요?”

소피아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어, 어떻게 그런…….”

하얗게 질린 소피아를 보고 페드로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너도 엄연히 콘라드 후작가의 혈족이다. 가문을 위해 그 정도 일은 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네 아들을 우리 일가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말이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소피아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그녀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누구죠?”

소피아의 말에 페드로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밖에 나가 있던 총관을 불렀다.

“소피아를 그에게 데려가라. 단장시켜서.”

“네, 저를 따라오십시오.”

총관이 소피아를 데리고 나가자 페드로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소피아가 잘해 주겠지. 자. 이제 나도 그만 자러 갈까.”

페드로는 오늘은 첩들 중 누구의 방으로 갈지 고민했다. 콘라드 후작과 마찬가지로 페드로도 여성 편력이 심했다.

아직 후작이 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첩만 10명이 넘었다. 그 이외에 그가 건드린 성내 여자들만도 수십여 명이 넘었다.

에반스가 자신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먼저 잠들어 있었다.

“이런 의리 없는 것들…….”

에반스는 투덜거렸지만 피곤한 일행들이 그를 기다리지 않고 자는 것에 사실 불만은 없었다. 에반스에게 있어 그 일행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반스는 그중 가장 어린 루미나의 방을 찾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루미나도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라일라의 말에 의하면 루미나도 이제 다 컸으니 그녀를 대할 때 조심 좀 하라고 했다.

그 생각이 나자 에반스는 루미나의 방으로 불쑥 들어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즉시 따끈한 목욕물을 준비했다.

에반스는 목욕 시중을 들겠다는 시녀들을 내보내고 혼자서 목욕을 한 후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어 누가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누구냐?”

“…….”

에반스의 물음에도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별수 없이 에반스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헉!”

에반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에반스보다는 상대가 에반스를 보고 더 놀란 듯 보였다.

에반스의 방을 불쑥 찾아 들어온 불청객은 바로 소피아였다. 그녀는 자신이 위로해 주어야 할 상대가 다름 아닌 에반스라는 사실에 놀라 두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눈가에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소피아. 당신이 어떻게?”

에반스의 물음에 소피아는 바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면 오라비인 페드로가 화를 낼 것이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인 마테오가 콘라드 후작가에서 내쳐질지도 몰랐다.

소피아는 이를 악물고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에반스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에반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에반스의 발이 그녀의 눈 아래 보이는 만큼 근접해서는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무슨 짓이오?”

놀란 에반스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자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이 원하는 건 제 몸이잖아요? 그냥 저를 가지세요. 저를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요.”

울부짖듯 소리친 그녀가 맥없이 에반스의 품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에반스는 소피아를 위해 그의 가슴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잠시 뒤 그녀가 진정이 되자 에반스는 소피아를 침대에 앉게 했다.

“괜찮소?”

에반스의 물음에 흘릴 만큼 눈물을 흘린 듯 소피아가 고개를 푹 숙인 체 대답했다.

“미안해요. 당신을 보니 옛일이 생각나서…….”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요?”

아무래도 첫사랑이었던 여자요, 또 이복동생이었던 테오르의 부인이었던 여자를 이런 늦은 시간에 그의 방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에반스에게는 거북스러운 일이었다. 에반스의 물음에 소피아가 처연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당신이 원한 건 아니었군요.”

“그게 무슨 말이요?”

소피아는 사실대로 오라비인 페드로가 에반스를 위로해 주라면서 보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에반스가 많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 누군가 오라버니한테 당신이 한때 저를 좋아했다고 말한 모양이에요.”

소피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소피아를 보며 에반스가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이렇게 살고 있었소?”

에반스의 말에 소피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살고 있을 거라 여겼나요? 남편을 잃은 귀족가의 여자가 뭘 할 수 있죠?”

오히려 소피아가 반문했다.

“…….”

그러자 에반스도 말문이 막혔다.

“그 처지에 놓여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한 소피아가 앉아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를 원치 않으신다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어요.”

소피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에반스의 방을 나갔다.

에반스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제이슨 백작은 긴장이 풀리자 평소보다 빨리 술에 취했다. 그가 막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만찬장 밖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저지른 실수를 휘하 지휘관들에게 듣고 얼굴을 붉혔다. 문제는 상대가 압실론 후작이란 점이었다.

이 사실이 콘라드 후작에게 알려졌다면 후작도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제길. 그때 말리지 않고 뭣들 한 건가?”

제이슨 백작은 오히려 휘하 지휘관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제이슨 백작은 당장 압실론 후작을 찾아가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휘하 지휘관들이 피곤하다고 쉬러 간 압실론 후작을 괜히 깨워 봐야 좋을 것 없다며 그를 말렸지만 아직 술이 덜 깬 제이슨 백작은 막무가내로 압실론 후작과 그 일행이 묵고 있는 후작가의 귀빈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제이슨 백작은 암실론 후작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피아를 발견했다. 순간 제이슨 백작은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저, 저년이…….”

소피아는 사실 제이슨 백작의 정부였다. 이는 콘라드 후작과 그 후계자인 페드로도 아는 바였다. 콘라드 후작과 페드로는 제이슨 백작이 소피아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소피아를 이용해서 지금껏 제이슨 백작을 이용해 왔던 것이다.

제이슨 백작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 있는 기사로 콘라드 후작성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귀족이었다.

그런 제이슨 백작을 이용해서 콘라드 후작과 페드로는 후작령의 귀족들과 영주들을 잘 다독이며 지금까지 콘라드 후작령을 잘 통치해 왔다.

사실 야만족이 침공하기 전 제이슨 백작은 소피아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으려 했다. 그를 위해 시녀에게 자신의 부인의 차에 독을 타게 한 제이슨 백작이었다. 그 결과 제이슨 백작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상처한 제이슨 백작은 주위 눈치를 살피며 때가 되면 소피아를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피아가 야심한 시간에 다른 남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으니 피가 거꾸로 돌 만했다.

제이슨 백작은 소피아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귀빈실을 막 벗어났을 때 그녀 앞에 그가 불쑥 나타났다.

“헉! 다,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제이슨 백작과는 여러 차례 관계를 가졌던 소피아였다. 그때 제이슨 백작이 분노한 얼굴로 소피아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거든 조용히 하고 따라와.”

제이슨 백작의 말에 소피아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순순히 제이슨 백작을 따라 움직였다.

제이슨 백작은 소피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소피아는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그 방은 왜 간 거지?”

불타오르는 제이슨 백작의 눈을 보면서도 소피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보통 성인 남자도 소드 익스퍼트의 살기를 견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연약한 여자가 그 기운을 어떻게 이겨 낼까?

거미줄에 매달린 나비처럼 그녀는 제이슨 백작의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 그녀가 말했다.

“제, 제발 내 얘기를…….”

힘겨워 보이는 소피아를 보고 그제야 제이슨 백작은 살기를 거뒀다. 그러자 그녀가 그제야 크게 호흡을 하며 말했다.

“허억!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죠?”

“왜 이러냐고? 그걸 지금 모른단 말이지?”

다시 격분한 제이슨 백작이 가냘픈 소피아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놈 방에 들어가서 뭘 한 거지? 이 더러운 창녀!”

목이 졸리자 하얗게 질린 소피아가 바동거리며 반항을 했다. 하지만 억센 제이슨 백작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피아는 눈앞이 하얘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 그녀의 아들인 마테오가 떠올랐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죽으면 그녀의 아들은 누가 돌봐 준단 말인가? 그 생각이 미치자 그녀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쥐고 있던 제이슨 백작의 팔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팔의 통증에 흥분했던 제이슨 백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목이 잡혀 곧 죽을 듯 새파랗게 질려 있는 소피아를 보고 황급히 손에 힘을 뺐다.

털썩.

소피아가 맥없이 쓰러졌다. 당장에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같이 새파랗게 질려 있던 소피아의 얼굴에 이내 한 줌의 혈색이 생겨났다.

“헉헉!”

그녀가 막혔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 그는 내 전남편의 형이에요. 그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잠깐 만난 것뿐이에요.”

소피아의 말에 제이슨 백작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저, 정말이야?”

“네. 내가 그 방에 들어가는 걸 봤다면 언제 나왔는지도 봤을 거잖아요? 전 그 방에 오 분밖에 있지 않았어요.”

소피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소피아가 압실론 후작의 방에 들어가고 나온 데 걸린 시간은 5분 정도였다.

그사이 압실론 후작과 소피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이슨 백작은 의심을 완전히 풀지 않았다.

그러자 소피아가 일어나서 제이슨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위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때문에 질투했군요?”

소피아의 말에 제이슨 백작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지, 질투는 무슨…….”

그때 소피아가 제이슨 백작에게 밀착했다. 그녀의 긴 금발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제이슨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피아도 많이 변해 있었다. 아니 살기 위해 세상이 그녀를 변하게 만든 것이다. 제이슨 백작의 몸에서 술 냄새가 강하게 났다. 붉게 충혈 된 그의 눈과 그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를 통해 그녀는 제이슨 백작이 아직 취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반짝 빛났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제이슨 백작을 유혹했다.

“당신이 직접 확인해요. 그와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발적인 그녀의 말에 제이슨 백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급히 그녀의 몸을 안았다.

“아이. 서두르지 말아요.”

그녀의 앙탈에 제이슨 백작이 더 급해졌다. 그녀를 안은 제이슨 백작이 그녀를 그의 침대에 눕혔다. 이어 제이슨 백작의 다급한 손짓에 소피아는 곧 나체로 변했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달빛 아래 은어처럼 파닥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제이슨 백작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긴 열락의 시간이 스치듯 지나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소피아의 투명한 나신에 부딪쳤다. 그것을 보고 제이슨 백작의 손이 소피아의 몸을 만지려 할 때였다. 소피아가 그 손을 제지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시오?”

완전히 정신을 되찾은 듯 제이슨 백작이 평소대로 소피아에게 존대를 했다. 그러자 소피아가 새치름하니 뒤돌아서서 제이슨 백작이 늘어놓은 자신의 벗어 놓은 옷들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저보고 더러운 창녀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 말에 제이슨 백작이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건 내 오해였소. 술에 취해 한 말이오. 부디 용서해 주시오.”

그렇게 말하며 제이슨 백작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돌려세워 거칠게 키스를 했다. 이어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유백색 투명한 소피아의 피부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왜, 왜 이러세요?”

“당신과 결혼하면 당신 아들 마테오를 내 후계자로 삼도록 하겠소.”

제이슨 백작의 그 말에 반항하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저,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제이슨 백작의 집요한 애무에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방 안은 다시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드르렁! 드르렁!”

소피아는 제이슨 백작이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의 방을 몰래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있는 그녀의 방으로 움직였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소피아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한 아이의 엄마로 그녀는 자신과 아들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강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때 그녀의 방 앞에 누가 서 있었다.

“다, 당신은…….”

밤이슬을 맞고 돌아온 그녀를 에반스가 그녀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는 그녀가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방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테오르의 아이요?”

에반스의 물음에 소피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압실론 후작가의 핏줄이로군.”

에반스의 그 말에 소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반스에게 테오르는 이복동생이기 이전에 그를 죽이려 했던 원수였다. 그런데 그 원수의 자식을 에반스는 그의 가문의 핏줄이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압실론 후작가의 핏줄이 이곳에 있어서야 되겠소? 날이 밝는 대로 콘라드 후작에게 말하겠소. 그대와 아이를 압실론 후작령으로 데려가겠다고 말이요.”

“…….”

에반스의 말에 소피아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나는 가겠소.”

에반스가 뒤돌아서자 그제야 소피아가 입을 뗐다.

“어째서죠? 어째서 저와 제 아들을 받아 주겠다는 건가요?”

소피아가 뭘 묻는지 에반스도 잘 알았다.

“다른 뜻은 없소. 내 핏줄이니 거두겠다는 것이요.”

그 말을 하고 에반스는 곧장 자신의 숙소로 걸어갔다.

에반스는 소피아가 자신의 방을 뛰쳐나간 뒤 그녀를 쫓았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첫사랑이자 죽은 이복동생의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제이슨 백작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을 알고는 그녀를 쫓은 것을 곧 후회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에반스가 막 제이슨 백작의 방을 지나쳐 가려 할 때 소피아에게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에반스가 흠칫 놀랐다.

에반스는 곧 후작가의 시녀 중 하나에게 주술을 걸어서 그녀를 통해 소피아와 그 아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으로 먼저 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사이 에반스는 고심을 했다.

그 결과 그는 이복동생 테오르의 부인인 소피아와 그 아이를 압실론 후작성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다른 것은 모두 젖혀 두고 그가 그렇게 결심한 것은 부친인 전대 압실론 후작 때문이었다.

최진철의 기억을 전부 각성한 에반스는 이복동생들과 소피아에 대해 가족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친인 압실론 후작은 달랐다. 그의 핏줄인 테오르와 테오르의 처자식을 거두는 것은 돌아가신 압실론 후작을 위해 그가 꼭 해야 할 일 같았던 것이다.

에반스는 그 사실을 소피아에게 전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 에반스의 방에 그의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시는 겁니까?”

“걱정했잖아요?”

제자인 시스턴과 루미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에반스에게 말했다.

“어이구. 아까는 잘만 자고 있더니 왜들 일어난 거야?”

“으아아암. 이게 다 루미나 때문이에요. 스승님이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라일라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자 루미나가 슬쩍 에반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게 스승님께서 잘 자는지 확인하러 제 방으로 오시지 않아서 제가 스승님의 방으로 갔는데 스승님께서 방에 안 계셔서…….”

결국 평소대로 에반스가 루미나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왔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다. 에반스는 루미나가 다 컸다고 여겼는데 정작 루미나는 아직 에반스로부터 관심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 내가 왔으니 다들 자러 가. 그리고 라르손과 라일라는 잠깐 남아.”

에반스는 등을 돌린 채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서 있던 라르손, 라일라 부부를 남게 하고 나머지 루크와 시스턴, 루미나는 자러 가라고 내쫓았다.

“왜 남으라고 한 겁니까?”

“피곤하니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세요.”

둘 다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들 모두 에반스가 뭐라고 하든 말든 절대 화해할 생각이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앉아 봐. 잠깐만 얘기하면 되니까.”

에반스의 말에 둘이 등을 지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에반스가 그 반대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여행을 떠났을 때 한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는 십 년을 같이 살아온 부인과 하도 사이가 좋아 보여서 내가 짓궂게 물었지. 부부 싸움 한 적이 없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더군. ‘없습니다. 한 번도.’라고 말이야.”

“에이, 거짓말.”

“말도 안 돼.”

라르손과 라일라가 동시에 외쳤다. 그 모습에 에반스가 싱긋 웃으며 계속 얘기했다.

“좀 전 두 사람의 반응처럼 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지. 그랬더니 그가 되레 내게 묻더군. ‘왜 싸움을 했으리라 생각하시죠?’ 그가 하도 맑은 눈으로 물어서 나도 당장 대답이 궁해졌지. 나는 십 년을 같이 살면 서로에게 화나는 일도 있고 오해나 갈등도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더군. ‘그럴 경우 제가 다 참습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아내는 사랑의 대상이지 싸움의 상대가 아니거든요. 사랑을 위해 참는 것 또한 즐겁습니다.’라고 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 라르손이 슬그머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라일라도 뭔가 느낀 것이 있는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잠시 뒤 두 사람이 에반스의 방을 나섰다. 그런데 라르손이 슬쩍 라일라의 손을 잡았고 라일라도 싫지 않은지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에반스의 예상대로 야만족은 콘라드 후작성을 공격해 오지 않았고 성 주위만 포위한 채 잠잠했다.

“저들의 의중을 알아낼 필요가 있다.”

에반스는 몰래 독수리로 변해서 콘라드 후작성 주위를 포위한 야만족 진영을 살폈다. 하지만 야만족 진영만 살펴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땅으로 내려간 에반스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야만족 진영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주술을 이용해서 완벽하게 야만족의 모습으로 변신한 에반스는 야만족 진영을 휘젓고 다니며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 콘라드 후작성을 포위했으며 왜 포위만 한 채 공격하지 않는지 알아보고 다녔다.

그러다 지휘관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에반스는 야만족의 의중을 어느 정도 간파해 냈다.

“계속 포위만 하고 있을 거라면서?”

“그렇다더군. 저 안에 있는 압실론 후작군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으라는 맨도사 님의 지시가 내려졌다고 해.”

“싸우지도 않고 이러고 있으니 좀이 쑤셔서 원…….”

“좀만 더 참자고. 계속 포위만 하고 있겠어? 아마 며칠 내로 공격할 거야.”

에반스는 적어도 야만족이 콘라드 후작성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더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에반스는 야만족 최고 지휘관의 막사로 접근했다.

막사 주위로 주술을 걸고 에반스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때 마침 야만족의 최고 지휘관인 쿤다가 자신의 참모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있으니 사흘만 붙잡고 있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부장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부장들에게도 입조심하라고 하고.”

“네. 그럼 사흘 뒤에는 콘라드 후작성을 공격해도 되겠군요?”

“아니.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다. 우린 맨도사 님이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하고 나면 그 병력과 합류해서 콘라드 후작성을 칠 것이다.”

쿤다가 앞에 한 말은 듣지 못했지만 에반스는 야만족들이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콘라드 후작성을 포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흘 뒤에 무슨 음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너희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에반스는 그냥 손 놓고 사흘 동안 콘라드 후작성에 갇혀 지낼 생각은 없었다. 에반스는 야만족 진영을 빠져나와 다시 독수리로 변해서 콘라드 후작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페드르와 제이슨 백작이 에반스를 찾아왔다. 그들은 어젯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고개 숙여 에반스에게 사과했다.

“그 일은 벌써 잊었습니다.”

에반스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자 페드로와 제이슨 백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어 페드로가 조심스럽게 에반스에게 말했다.

“저 그리고 말입니다. 어제 일임했던 성 방어에 대한 권한도…….”

“아, 물론 돌려 드려야지요.”

에반스는 즉시 성곽과 성문을 지키고 있던 압실론 후작군에게 그 자리를 콘라드 후작군에 도로 내어 주라고 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