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위기의 콘라드 후작성 (73/90)

 Chapter 3   위기의 콘라드 후작성

에반스는 부서진 성문을 다시 만들게 하고 후작군을 재정비했다. 승리는 했지만 아군의 피해 역시 컸다.

3천여 명이 전사하고 2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전사자와 부상자를 즉시 후방으로 옮기게 한 에반스는 남은 7천여 병사들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적진을 살폈다.

에반스는 독수리로 변해 상공에서 재공격을 위해 전열을 정비하는 야만족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지휘 망루로 돌아와서 루크와 시스턴을 불렀다.

“너희 둘이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에반스의 말에 루크와 시스턴이 눈빛을 빛냈다.

“말씀만 하십시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거렸던 참입니다.”

시스턴의 말에 에반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에 적진으로 들어가서 놈들을 좀 휘저어 줘야겠다.”

에반스의 말에 루크가 물었다.

“저희 둘만 가야 합니까?”

“필요한 인원은 알아서 차출해 가도록.”

에반스의 명령을 받고 루크와 시스턴이 지휘 망루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흩어졌다가 밤이 되자 성문 앞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둘 다 자신들이 데려온 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루크는 라일라를 데리고 나타났고 시스턴은 라르손과 같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저 좀팽이는 왜 데려가는 거야?”

먼저 라일라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시스턴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라르손도 지지 않고 루크를 향해 한마디 내뱉었다.

“루크. 저 사고뭉치를 데려갔다고 우리가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뭐 사고뭉치?”

“그러는 넌, 나보고 좀팽이라고?”

라일라와 라르손이 으르렁대고 있을 때였다.

“아직 안 나갔군. 잘됐어.”

그들 앞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루미나가 나타났다. 루미나를 보고 루크와 시스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둘 다 루미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지만 그런 둘의 노력에도 수포로 돌아갔다.

둘이 수상쩍게 군 것을 눈치 빠른 루미나가 이미 눈치채고 벌써 그 둘을 미행했던 것이다. 루크와 시스턴이 어떻게 루미나를 떼어 놓고 나갈지 고심하고 있을 때 루미나가 말했다.

“자. 어서 나가죠.”

“루, 루미나…….”

루크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루미나가 그 말을 딱 잘랐다.

“딴소리 말아요. 지금 당장 안 나가면 소리를 지를 거예요.”

루미나가 내지른 소리를 야만족이 듣기라도 한다면 오늘 밤 야습은 실패로 돌아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에반스가 루크와 시스턴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아, 알았다. 대신 시스턴 옆에 꼭 붙어 다녀라.”

루크가 루미나라는 불똥을 시스턴에게 떠넘겼다. 그러자 시스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루미나가 시스턴을 보고 한마디 하자 시스턴이 이내 손을 내저었다.

“사제. 내가 옆에 있는 게 싫어?”

“그, 그럴 리가요. 같이 가시지요.”

별수 없이 시스턴이 루미나를 떠맡았다. 잠시 후 성문이 살짝 열리고 위장복을 갖춰 입은 다섯 인영이 성 밖으로 나왔다.

“조용히 하고 따라 와.”

특급 어쌔신답게 라일라가 선두에서 움직였다. 그러자 그 뒤를 나머지 일행들이 조용히 뒤따랐다. 그들은 곧 어둠에 동요되어 모습을 감췄다.

압실론 후작군이 성 밖으로 나와 야습할 것을 대비해서 야만족은 숙영지 주위로 보초들을 꽤 많이 세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압실론 후작군이 밤에 급습할 가능성은 낮았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성에 의지하지 않고 야만족과 싸우는 것은 압실론 후작군에게 불리했다. 병력이라도 많다면 또 모르겠지만 수적으로도 압실론 후작군이 2배가 적었다.

그래도 유스마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평소보다 배는 많은 보초들을 숙영지 주위에 세웠다. 하지만 그런 유스마의 수고를 몰래 성 밖으로 나온 다섯 인영이 이내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보초들만으로 마법사 루크가 포함된 다섯 인영이 야만족 숙영지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루크가 그들의 흔적을 모두 지웠기 때문에 그들이 침투한 것을 야만족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놈들의 식량과 무기들을 다 없앨 테니 너희들은 여기 지휘관들을 제거해.”

루크의 말에 나머지 네 인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섯 인영이 뿔뿔이 흩어졌다. 루크는 투명 마법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유유히 야만족 보급 부대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쾅!

화르르르!

군량이 보관되어 있던 막사 주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야!”

“헉! 식량들이 다 탄다. 어서 불을 꺼라.”

자신의 지휘 막사에서 나온 보급 부대의 부장이 기겁하며 외쳤다. 그러자 야만족 보급 부대원들이 모포와 식수로 급한 대로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불을 지른 루크가 뒤로 물러나며 바람을 불게 했다. 그러자 불길이 강해지고 다른 막사로도 불똥이 튀면서 불길이 주위로 번져 나갔다.

불로 인해 야만족 숙영지가 발칵 뒤집어졌다. 야만족 지휘관들인 부장들이 일어나서 즉시 병사들의 동요를 막으려 했다.

“놀라지 마라. 적이 기습한 것도 아니다. 단지 불이 났을 뿐이다.”

“진정들 해라.”

부장들이 나서자 혼란스럽던 야만족 진영도 차츰 진정이 되어 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컥!”

갑자기 부장 하나가 목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런 부장의 입과 목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헉! 부장이 당했다.”

“크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그런데 그 비명의 주인공들은 바로 야만족 병사들의 지휘관들인 부장들이었다. 지휘관들이 돌연 죽어 나가자 야만족 진영은 다시 발칵 뒤집어졌다.

그 소식이 야만족의 최고 지휘관인 유스마에게도 전해졌다.

“놈들이다. 이건 놈들의 농간이야.”

유스마가 격노하며 레아드 성을 쏘아보았다.

“부장들을 모두 한자리로 모이게 하라. 그리고 병사들은 조장들이 진정시키게 해.”

야만족은 부장 밑에 조장들을 두었다. 그 조장들은 병사들 중 선임자들이었다. 때문에 암살자들도 같은 병사들 중 누가 조장인지 알 수 없었다.

유스마의 명령대로 부장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또 조장들이 나서자 야만족 숙영지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유스마가 부장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큰 실수였다. 유스마의 조치로 더 이상 은밀히 지휘관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라일라와 라르손, 시스턴과 루미나는 숙영지를 벗어났다. 그리고 루크와 다시 합류했다.

충분히 목적한 바를 이룬 일행이 레아드 성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잠시 적진을 살피던 루크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지휘관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저기 모여 있군. 정말 고마운 일이야.”

루크가 망설일 것 없이 모여 있는 야만족 부장들을 향해 대량 살상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버스트!”

강력한 폭발을 동반한 화염 마법이 야만족 부장들을 휩쓸었다.

투툭!

그 폭발 이후 남은 것은 야만족 부장들의 무기와 갑옷들뿐이었다. 그때 루크와 그 일행들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레아드 성으로 움직였다.

야습으로 인해 야만족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타격은 지휘관들인 부장들을 대부분 잃었다는 점이었다.

유스마는 즉시 조장들 중에서 최고참들을 부장으로 승격시켰지만 그들이 과연 지휘관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군량과 무기들이 다 불타면서 병참 상황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대로라면 하루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유스마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최후의 결전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레아드 성을 쳐야 하는 유스마로서도 어제처럼 참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최고 지휘관부터 자신 없는 전투였다. 야만족 병사들의 사기가 좋을 턱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아침부터 야만족이 레아드 성을 공략했지만 성이 그리 쉽게 함락될 리 없었다.

정오 무렵 유스마는 다시 후퇴를 명했다. 오전에 5천의 병력을 잃은 유스마는 남은 식량을 탈탈 털어서 야만족들에게 먹이고 최후의 일전을 재개했다.

콰앙!

“크아아악!”

여기저기서 폭발이 이어졌다. 마법사가 가세하고 성곽에서도 야만족이 사다리를 걸치면 얼마 가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사다리가 뒤로 넘어갔다.

에반스의 측근들이 전투에 가세하자 압실론 후작군의 전투력이 급격이 늘어났다. 에반스에 이어 그 측근들까지 엄청난 위력을 선보이자 압실론 후작군의 사기는 더욱더 높아만 갔다. 반면 계속된 패배에 야만족은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더는 안 되겠다. 물러나라.”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3천의 희생자가 나자 유스마는 더 이상 공성전으로 레아드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보고 즉각 병력을 물렸다.

아무래도 부장들의 부재가 영향이 컸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싸워 봐야 패할 것이 자명한데 더 싸울 이유가 없었다. 유스마는 레아드 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때 유스마의 부관이 말했다.

“이대로 물러나면 맨도사 님께서 유스마 님을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들을 다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지 않느냐?”

유스마가 연이은 패배로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야만족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제 생각인데…….”

그때 부관이 자신의 의견을 유스마에게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듣고 유스마가 눈빛을 빛냈다.

“으음. 그거 좋은 생각이다. 만약 놈들이 속아만 준다면…….”

유스마는 즉시 레아드 성을 포기하고 퇴각할 것을 야만족 병사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숙영지를 버리고 퇴각을 시작했다. 성곽에서 퇴각하는 적을 보고 압실론 후작군이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이제 막 몸이 풀린 시스턴과 루미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고 루크와 라일라 역시 싱겁게 전투가 끝났다고 투덜거렸다.

“제가 놈들을 추격하겠습니다.”

그때 라르손이 에반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에반스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너무 조급하게 굴 거 없다.”

그렇게 말한 뒤 에반스는 아무도 모르게 독수리로 변신해서 상공을 날며 퇴각하는 야만족들을 찾았다. 그런데 야만족들이 그들의 숙영지 뒤쪽 숲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에반스는 야만족들이 물러나는 것처럼 하면서 매복해 있다가 성안의 병력이 밖으로 나오면 치려는 꽁수를 알아내고 곧장 레아드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용히 라르손을 불렀다. 에반스가 귓속말로 라르손에게 뭐라고 얘기하자 라르손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루크를 데리고 즉시 성곽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성문이 열리고 라르손이 이끄는 3천여 병력이 야만족이 버리고 간 숙영지 근처로 움직였다.

그리고 숙영지로 들어선 라르손은 병사들을 그 반대 숲을 향해 줄지어 늘여 세웠다. 그런 병사들의 손에는 활과 화살이 쥐어져 있었다.

“준비가 다 됐으니 시작해도 되오.”

라르손의 말에 루크가 바로 화염 마법을 숲을 향해 퍼부었다.

콰콰콰쾅!

폭발과 함께 숲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때 갑자기 숲으로 강하게 바람이 불었다. 바로 성곽 위에서 에반스가 주술로 바람을 불게 한 것이다.

화르르르!

숲이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 야만족이 숙영지로 삼은 곳의 뒤쪽 숲은 그리 크지 않았다. 또한 다른 숲과도 이어져 있지 않아서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질 위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숲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크아아악!”

불길이 숲을 집어삼킨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길에 휩싸인 야만족들이 숲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것을 보고 라르손이 명했다.

“쏴라.”

슈슈슈슝!

퍼퍼퍼퍽!

“크아아악!”

숲의 불길에 쫓겨 뛰쳐나온 야만족들이 속절없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숲 밖으로 나온 야만족보다 숲 안에서 불에 타 죽은 야만족들이 더 많았다.

“콜록콜록!”

유스마는 휘하 부장들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서 숲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압실론 후작군의 화살 세례였다.

퍼퍼퍽!

십여 발의 화살을 몸에 맞고 유스마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야만족의 초대 황제가 되려 했던 그의 야망도 이제 한낱 꿈이 되고 말았다.

털썩!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간 유스마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숲은 하루 동안 계속 타다가 이튿날 비가 오면서 불길이 잡혔다.

유스마가 이끄는 야만족 3만 병력이 레아드 성에서 전멸당했을 때 맨도사가 이끄는 3만 병력은 라미셀 후작령의 군사요새인 루드실 영지성을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 그리고 콘라드 후작령의 포드넨 영지성 역시 4만의 야만족에 결국 점령되고 말았다.

이로써 라미셀 후작령과 콘라드 후작령은 동시에 위기에 봉착했다. 북방의 군사 요새인 루드실 영지성과 포드넨 영지성이 함락된 이상 야만족의 다음 목적지는 바로 라미셀 후작성과 콘라드 후작성이 될 테니 말이다.

라미셀 후작령에서 루드실 영지성을 함락시킨 맨도사는 유스마로부터 승전보가 전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자 압실론 후작령의 국경성인 레아드 성으로 전령을 보냈다.

그랬더니 전령이 다음 날 급히 돌아와서는 믿기지 않는 비보를 맨도사에게 전했다.

“유스마의 병력이 어떻게 되었다고?”

“전멸당했습니다.”

“…….”

한동안 맨도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트렌시아 제국 침공에 대한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압실론 후작령만큼은 그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변수가 생긴 것이다. 안 좋은 일은 연달아 찾아온다고 했던가? 랄트족 대족장인 우툴라와 고란족 대족장인 수아레스로부터 동시에 좋지 않은 소식이 맨도사에게 전해졌다.

어둠의 주술사들이 끝내 참전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야만족의 주술사들 중 어둠의 주술사들이 가장 강했다. 때문에 그들이 참전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후 트렌시아 제국의 소드 마스터나 마법사들에 대해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별수 없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맨도사는 즉시 야만족의 주술사들 중 어둠의 주술사 다음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지옥의 주술사들에게 즉시 연락을 취했다.

지옥의 주술사들은 소환술을 주로 쓰는 주술사들이었다. 그들은 마계의 괴물들을 소환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했다. 특히 살아 있는 생명들을 괴물들에게 먹이로 제공하며 그들을 조종했다.

때문에 같은 주술사들조차 그들을 경멸했고 특히 어둠의 주술사들은 같은 마계의 괴물을 소환하는 자신들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며 그들을 보면 제일 먼저 죽이려 들었다.

그래서 어둠의 주술사들이 있는 곳에 지옥의 주술사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환술밖에 쓰지 못하는 그들은 어둠의 주술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은둔해서 살던 지옥의 주술사들을 맨도사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고 지금까지 그들을 숨겨 왔던 것이다.

맨도사는 출정할 때 지옥의 주술사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만약을 위해 그들을 이용할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같이 파르미르 고원을 넘었다.

지옥의 주술사들은 트렌시아 제국을 치는 데 도움을 줄 경우 점령지 중 한 곳을 지옥의 주술사들에게 주겠다는 맨도사의 말에 혹해서 참전을 결정했다.

지옥의 주술사들은 현재 유스마가 함락시킨 라미셀 후작령의 국경성에 있었다. 맨도사의 부름을 받은 지옥의 주술사들은 즉시 루드실 영지성으로 달려왔다.

지옥의 주술사의 수는 52명이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오르테란 자로 마계 괴물 중에서도 서열 안에 들어간다는 괴수를 소환할 수 있는 대단한 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오느라 수고했다. 이제 너희들이 나서 주어야겠다.”

“우리가 할 일이 뭐요?”

오르테의 물음에 맨도사가 바로 대답해 주었다.

“너희들이 트렌시아 제국의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들을 상대해 줘야겠다. 들었겠지만 어둠의 주술사들이 이번 전투에 참전을 포기했다.”

“알고 있소. 좋소. 싸우도록 하겠소. 단 우리와 약속한 것은 꼭 지켜 주기 바라오.”

“그 점은 염려 마라. 너희들이 살 수 있는 제법 큰 영지를 넘겨줄 테니.”

맨도사의 대답에 오르테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영지 따위로는 안 되겠소.”

오르테의 말에 맨도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린 카라엔 후작령을 원하오.”

카라엔 후작령이라면 트렌시아 제국 열 곳의 대영지 중 한 곳이었다. 그곳을 달라는 소리는 제국 영토의 십분의 일을 달라는 말과 같았다. 그 정도라면 맨도사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옥의 주술사들을 끌어들인 것을 랄트족의 대족장인 우툴라와 고란족의 대족장인 수아레스가 안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지옥의 주술사들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언제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크렌시아 제국의 수도를 점령해야 하는 맨도사에게 당장 지옥의 주술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차피 수도만 점령하고 나면 어둠의 주술사들도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럼 어둠의 주술사들을 이용해서 지옥의 주술사들을 제거해 버리면 그만이다.’

맨도사는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산으로 거짓말을 했다.

“좋다. 카라엔 후작령을 통째 넘기도록 하지.”

“됐소. 계약은 성사되었소.”

오르테는 지옥의 주술사들 중 10명씩을 먼저 야만족이 점령한 기온 후작성과 카라엔 후작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콘라드 후작령의 포드넨 영지성으로 10명의 주술사를 보냈다. 그 뒤 자신과 나머지 21명의 지옥의 주술사들은 계속 루드실 영지성에 남아 맨도사를 돕기로 했다.

군사 요새인 루드실 영지성과 포드넨 영지성이 불과 이틀밖에 버티지 못하고 야만족의 수중으로 들어가자 라미셀 후작령과 콘라드 후작령이 발칵 뒤집어졌다.

무엇보다 루드실 영지성과 포드넨 영지성의 후작군 병력이 괴멸하면서 라미셀 후작성과 콘라드 후작성을 지킬 병력이 부족해졌다.

라미셀 후작과 콘라드 후작은 즉시 징병해서 병사들을 끌어 모았지만 그 병력이 채 1만이 되지 못했다.

두 후작들 모두 지원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트렌시아 제국에서 그들에게 병력을 보내 줄 곳은 없었다.

중앙군 역시 수도 바론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남부와 중부 대영주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와 제국의 수도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콘라드 후작령이나 라미셀 후작령과 같이 북방의 대영지가 무너지면 야만족은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 바로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다. 때문에 수도 방어 못지않게 북방의 대영지를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트렌시아 제국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맨도사의 계획대로 측면으로 파고 들어간 야만족으로 인해 트렌시아 제국의 중부와 남부 병력이 수도 바론을 지키기 위해 꼼짝없이 발목을 잡힌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북방의 세 곳 대영지가 붕괴된다면 트렌시아 제국은 지붕을 잃은 격이었다. 지붕도 없이 어떻게 야만족의 매서운 한파를 견뎌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콘라드 후작령과 라미셀 후작령 사이에 위치한 압실론 후작령이 놀랍게도 침공한 야만족들 괴멸시키며 영지를 지켜 낸 것이었다.

그 소식에 라미셀 후작과 콘라드 후작은 동시에 전령을 보내서 압실론 후작에게 자신들의 영지에 구원군을 보내 달라고 했다.

두 곳 모두 압실론 후작령과 이웃하고 있어서 이틀 정도면 지원군이 라미셀 후작성과 콘라드 후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아드 성에서 승리한 에반스는 카라스 영지에서 모여든 영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압실론 후작성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콘라드 후작성과 라미셀 후작성의 전령들을 만났다.

두 곳 모두 급하니 서둘러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압실론 후작령이 지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후작성을 지킬 최소 병력 1만을 제외하고 1만 정도였다.

그 1만의 병력을 둘로 나눠서 각각 5천씩 콘라드 후작성과 라미셀 후작성으로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얘기는 에반스가 바로 묵살했다.

“그러면 두 곳 모두 지키지 못할 뿐더러 우리가 보낸 지원군마저 야만족에 잃고 말 것이다. 두 곳 후작성이 점령되고 나면 그 병력이 어디로 향할 것 같은가?”

그야 당연히 압실론 후작성일 터였다.

“그럴 바에야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해서 한 곳이라도 제대로 지켜 내는 것이 낫다.”

에반스는 심사숙고 끝에 콘라드 후작성으로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에반스가 그렇게 결정한 것은 거리상 콘라드 후작성이 압실론 후작성에서 더 가까웠고 도로 상황도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밤새 행군을 한다면 하루면 콘라드 후작성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야만족의 공격이 어제부터 시작되었기에 오늘이 고비라면 고비일 수 있었다.

콘라드 후작성을 먼저 돕기로 결정한 에반스는 즉시 짐수레를 준비시켰다.

후작성과 인근 영지에 있는 수레들이 모두 끌어 모으자 1,000여 대의 수레가 모였다. 에반스는 그 수레에 각기 10명씩 병사들을 태웠다. 그리고 후작성에 보유 중인 1천 기의 말을 내서 그 수레를 끌게 했다.

에반스가 콘라드 후작성을 선택한 것은 도로 사정이 좋아서 그곳까지 이렇게 수레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천의 기병들도 일단은 수레에 태워서 이동시키기로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수레를 끌던 말들이 기병들에게 돌아가서, 1천 기의 기병대로 활약할 수 있게 말안장이며 말에 필요한 것들은 기병들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다 챙기게 했다.

수레가 동원되면서 콘라드 후작성까지 하루 걸리던 시간이 반나절로 축소되었다. 에반스는 즉시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을 수레에 태우게 하고 그들을 이끌고 이번에도 직접 출정했다. 역시 압실론 후작성은 안드레이 공작에게 맡기고 일행들은 모두 데리고 움직였다.

에반스와 압실론 후작군이 콘라드 후작성 근처에 도착했을 때 야만족들은 콘라드 후작성을 포위하고 공격 중이었다.

콘라드 후작성은 성벽 높이만도 20미터가 넘고 해자가 길고 깊은 거대한 요새였다. 하지만 성을 지키는 병력이 채 1만도 되지 않아서 계속된 야만족의 공세에 점점 더 지쳐 갔다.

그렇게 하루를 겨우 버텼는데 그사이 성을 지키던 병력의 절반이 죽었다. 남은 5천의 병력으로 겨우 버텨 내고 있었지만 언제 성이 함락될지 모를 위기의 순간이었다.

“지원군이다.”

“와아아아!”

그때 압실론 후작성에서 기적적으로 지원군을 보내 온 것이다. 콘라드 후작군은 힘을 내서 악착같이 싸웠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지원군에 놀란 야만족들이 결국 후퇴를 했다. 성을 공략 중 적이 배후를 칠 경우 야만족의 피해도 엄청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콘라드 후작성을 공략 중인 야만족의 지휘관은 랄트족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쿤다였다. 쿤다는 랄트족 대족장인 우툴라가 가장 아끼는 지휘관으로 수많은 전장에서 우툴라를 모시고 싸워 온 백전노장이었다.

전투에 잔뼈가 굵은 그는 공격할 때와 물러날 때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압실론 후작성에 심어 둔 첩자에 따르면 분명 오늘 전투가 시작되기 반나절 전까지 압실론 후작성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 뒤는 전투를 지휘하느라 알 수 없었지만 반나절 만에 압실론 후작군이 이곳까지 나타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어. 어떻게 저들이 압실론 후작성에서 불과 반나절 만에 여기로 올 수 있었단 말이냐?”

쿤다는 경이적인 속도로 달려온 압실론 후작군에 대해 경계심을 가졌다. 그래서 조금만 더 밀어붙여도 함락될 콘라드 후작성을 두고 물러났던 것이다.

“어서 전열을 가다듬어라.”

쿤다는 일단 야만족을 정비한 뒤 정찰을 통해 압실론 후작군에 대해 알아본 뒤 재차 콘라드 후작성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비록 압실론 후작군이 콘라드 후작성에 들어가면 그만큼 함락하기가 어려워지겠지만 쿤다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언제 만나도 만나서 싸워야 할 적들이란 것이 쿤다의 생각이었다. 병력이 부족하면 지원군을 부탁해도 되고 아니면 적들을 콘라드 후작성에 묶어 두는 것으로도 그가 할 몫은 다하는 셈이었다.

지금 쿤다가 이끄는 야만족은 포드넨 영지성과 어제 오늘 콘라드 후작성을 공략하면서 1만이 넘는 병력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때문에 지금 쿤다 휘하의 야만족은 3만여 명 정도인데 그중 5천은 부상병으로 실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2만 5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2만 5천의 병력으로 지원군 1만이 보충된 콘라드 후작성을 공략하는 것에 대해 쿤다는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야만족들은 한번 돌격하면 후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물러날 줄 몰랐다. 그렇게 싸워 왔고 콘라드 후작성을 거의 점령할 뻔했던 야만족들이었다.

지원군이 보강되었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단지 쿤다가 신경 쓰이는 것은 그 지원군에 대한 것이었다.

첩자들로부터 압실론 후작군에 대해 알게 된 쿤다는 콘라드 후작성의 공격을 중단시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유스마까지 당했다면 압실론 후작군은 우습게 볼 병력이 아니었다. 만약 계속 공격했다면 압실론 후작군의 배후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자명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출정을 준비하라.”

쿤다는 황급히 휘하 2만 5천 병력으로 콘라드 후작성을 포위하게 했다.

“트렌시아 제국의 최대 변수는 내 손으로 막겠다.”

쿤다는 알게 된 것이다. 에반스가 이끄는 압실론 후작군이 이번 트렌시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최대 변수라는 사실을 말이다. 압실론 후작군에 의해 맨도사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그것으로 맨도사가 골머리를 앓고 있음을 쿤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쿤다가 압실론 후작군이 콘라드 후작성에 들어가자마자 즉시 성을 포위한 이유는 성을 점령하는 것보다 성을 포위해서 압실론 후작군이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그의 그런 생각은 즉각 야만족의 총사령관인 맨도사에게 전해졌다. 맨도사는 그 압실론 후작군에 압실론 후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쿤다에게 어떻게든 콘라드 후작성을 틀어막고 있으라고 전했다.

그리고 자신은 휘하 3만 병력을 이끌고 라미셀 후작성으로 공격했다. 맨도사는 라미셀 후작성을 점령한 뒤 그 길로 남하해서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 바룬을 향해 진격해 들어갈 셈이었다.

좌우에서 야만족을 막기에 급급한 트렌시아 제국의 중앙군과 중부, 남부군은 북에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맨도사의 야만족 병력에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맨도사 휘하의 병력만으로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야만족의 영역에서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까지 직선 최단 거리가 확보된 셈이었다.

고란족과 랄트족의 추가 지원군이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 일주일이면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고란족의 대족장인 수아레스와 랄트족의 대족장 우툴라가 직접 추가 지원군을 이끌고 며칠 내 파르미르 고원을 넘을 것이라는 소식이 맨도사에게 전해졌다.

맨도사의 예상대로라면 그가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 근방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사흘 정도만 버티면 추가 지원군과 합류할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트렌시아 제국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야만족과 콘라드 후작성의 예상을 뒤집고 훨씬 빨리 콘라드 후작성에 나타난 에반스는 바로 콘라드 후작성을 공략 중인 야만족의 배후를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야만족들이 먼저 콘라드 후작성에서 병력을 빼냄으로 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야만족이 물러난 콘라드 후작성으로 에반스와 압실론 후작군이 접근했다.

쿠우우웅!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콘라드 후작성의 성문이 바로 열렸다. 에반스는 직접 1만 압실론 후작군을 이끌고 콘라드 후작성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

지원군의 도착에 콘라드 후작성에 남은 영지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환영했다. 콘라드 후작군에서는 콘라드 후작가의 기사단장이자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제이슨 백작이 지원군을 마중 나왔다.

그런데 압실론 후작이 직접 지원군을 이끌고 있음을 알게 된 제이슨 백작은 즉시 영주관으로 사람을 보내는 한편 압실론 후작인 에반스를 맞았다.

“이렇게 후작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활한 지휘를 위해 어쩔 수 없었소.”

“잠시만 기다리시면 저희 후작님께서 오실 겁니다.”

제이슨 백작의 말처럼 잠시 후 화려한 마차 한 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그 마차 안에서 콘라드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압실론 후작. 이렇게 나를 구해 주러 달려와 주다니 정말 고맙네.”

그사이 마음고생이 심한 듯 콘라드 후작의 얼굴에 안 보이던 주름이 가득했다.

“별말씀을. 이웃이 위험에 처했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이웃끼리 돕고 살아야지. 아차. 손님을 길에 세워 두다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후작가로 가세.”

콘라드 후작이 에반스를 데리고 후작가로 가려 할 때였다. 콘라드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제이슨 백작에게 다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고 제이슨 백작이 콘라드 후작과 에반스에게 뛰어가서 보고했다.

“야만족들이 다시 성을 에워싸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놈들이 아주 미쳤군. 지원군이 성내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성을 포위하다니. 어디 공격만 해 봐라. 따끔한 맛을 보여 줄 테니. 그렇지 않나? 압실론 후작?”

콘라드 후작이 자신의 말에 동의를 구하며 에반스를 쳐다보았는데 에반스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지금 놈들이 성을 포위했다고 했소?”

에반스가 제이슨 백작에게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지 확인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성곽 위로 가 봐야겠지만 지금 포위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에반스가 다급히 콘라드 후작을 보며 말했다.

“후작님. 지금 즉시 성곽으로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제이슨 백작. 앞장서시오.”

에반스가 콘라드 후작군의 총사령관인 제이슨 백작을 독촉했다.

“아, 네.”

제이슨 백작은 콘라드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콘라드 백작이 그렇게 하라고 눈짓을 보낸 후 에반스에게 말했다.

“그럼 성곽으로 가 보게. 내 마차를 보낼 테니 그 마차를 타고 후작가로 오면 되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에반스의 말이 끝나자 제이슨 백작이 에반스를 데리고 성곽으로 향했다. 그러자 혼자 남게 된 콘라드 후작은 멀뚱히 서 있다가 자신의 화려한 마차에 도로 올라탔다. 그리고 그길로 곧장 후작가로 움직였다.

에반스는 제이슨 백작과 같이 성곽의 지휘 망루에 올랐다. 그때 에반스의 눈에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야만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병력 규모가 대략 2만 명이 넘어 보였다.

“놈들도 입은 병력 손실이 있으니 오늘 당장 공격해 오지는 않을 겁니다.”

제이슨 백작이 조심스럽게 에반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문제는 저들이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요.”

“네?”

에반스와 압실론 후작군이 콘라드 후작성에 온 것은 콘라드 후작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야만족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제이슨 백작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으음. 일단 지켜봅시다. 내일도 저들이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일이 좀 복잡해질 것이요.”

그렇게 말한 뒤 에반스는 지휘 망루를 내려갔다. 그리고 대기 중이던 콘라드 후작이 보낸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바로 콘라드 후작가로 향했다. 곧 마차가 멈춰 서자 콘라드 후작가의 총관이 입구에서 에반스를 맞았다.

“후작님.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에반스는 총관의 안내를 받으며 후작가의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콘라드 후작을 비롯한 후작 부인과 후작의 가족들이 에반스를 맞았다. 그런 그들 가족 중에는 에반스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에반스의 첫사랑이자 그의 이복 형제였던 테오르의 부인이었던 소피아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에반스를 보고 억지로 웃으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에반스는 굳이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나머지 콘라드 후작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왜 성곽으로 간 건가?”

가족 소개가 끝나고 나자 콘라드 후작이 에반스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자리에 앉으며 바로 대답했다.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확인할 것이라니?”

“저들이 왜 급히 성을 포위했는지 말입니다.”

“그야 우리 성을 점령하기 위함이 아닌가?”

“말씀하셨다시피 콘라드 후작성에 지원군이 도착했는데 저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리 압실론 후작군이 성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성 주위를 포위한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 않습니까?”

“해서 성곽에 가서 뭘 확인했나?”

“적어도 야만족이 오늘은 공격해 오지 않을 거란 정도요?”

“하하하. 그런가? 그거 잘됐군. 안 그래도 오늘은 자네와 한잔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콘라드 후작은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야만족과 대치 중에는 술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지원군도 도착했고 자신과 지위도 같은 대영주인 에반스를 만나자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에반스도 콘라드 후작의 제의를 굳이 사양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늘 밤에는 그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한잔하지요”

“하하하. 역시 대단해. 그러니 야만족들을 맞아 싸워서 영지를 지켜 냈겠지만.”

콘라드 후작이 부럽다는 듯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반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보다 이왕이면 전투를 치르느라 고생한 콘라드 후작군의 지휘관들도 같이 한잔하도록 하지요. 아니 오늘은 콘라드 후작군 모두 쉬게 하십시오. 술과 음식도 내리고 말입니다. 대신 저희 압실론 후작군이 오늘 밤 성을 지키도록 하지요.”

“오오. 그래 주겠나?”

안 그래도 싸우느라 고생한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 고심하던 콘라드 후작은 흔쾌히 에반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