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는 더 이상 성문 밖으로 나오는 야만족 전사가 없자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벌써 끝인가? 뭐, 그럼 이제 시작해야겠군.”
말이 끝나자 에반스는 곧장 레아드 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저, 저런…….”
그 모습에 영주들과 압실론 후작군들이 모두 경악했다. 그리고 성곽 위의 야만족들도 잠시 어이없이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완전 미쳤군.”
“죽고 싶다는 데야…….”
성곽 위의 야만족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성문을 향해 돌진해 오는 단기의 말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슈슈슈슝!
화살비가 에반스와 그가 탄 말 위로 쏟아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티티티팅!
에반스가 타고 있던 말 주위로 둥글게 투명한 막이 형성되더니 그 막에 화살들이 다 튕겨 나는 것이 아닌가? 에반스가 방어 주술로 자신과 말 주위로 방어막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헉!”
화살이 통하지 않자 오히려 성곽 위의 야만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사이 빠르게 돌진해 들어간 에반스는 불과 성문과 십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검 끝을 성문을 향해 겨눴다.
츠츠츠츠!
에반스의 검에서 푸른빛이 강하게 내뿜어지고 잠시 후 그 푸른빛이 성문을 향해 날아갔다.
“맙소사. 검탄!”
그 모습을 보고 기사 출신의 영주 한 명이 탄성을 터트리며 외쳤다.
바우우웅!
에반스의 검에서 뿜어져 나간 푸른빛의 검탄은 대기를 가르며 곧장 성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화려하게 폭발했다.
콰쾅!
폭발과 동시에 카라스 영지의 영주인 라르손이 맨 앞으로 뛰어 나가며 외쳤다.
“사다리는 버리고 성문을 향해 돌격하라.”
그 명령에 맨 앞에서 사다리를 들고 대기 중이던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이 사다리를 팽개치고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아아!”
에반스는 애초부터 사다리를 타고 성곽에 오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에반스는 이제 자신의 본모습을 세상에 보이자고 작심을 했다.
때문에 이제 자신이 소드 마스터인 것도 더 이상 쉬쉬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힘을 만천하에 선보일 필요성도 느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한 편의 활극을 펼쳐 보인 것이다. 이 일로 휘하 영주들도 에반스에게 충성을 다할 터였다.
물론 병사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기껏 수성을 위해 성곽 위에 돌덩이와 통나무를 잔뜩 올려놓았는데 성문이 깨져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자 야만족은 적잖게 동요했다.
“빌어먹을…….”
성문이 깨진 이상 성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성안에는 아직 생생한 1만의 야만족들이 있었고 그들이라면 고작 1만 2천에 불과한 압실론 후작군을 상대로 백병전을 펼쳐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군나르도, 부장들도 성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압실론 후작군에 대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문제라면 성문을 깨부순 그 무시무시한 소드 마스터인데…….
“주술사를 불러와라.”
군나르가 이번 전투에 종군하고 나선 주술사들을 다급하게 불러오게 했다. 그때 지휘 망루의 부장 하나가 외쳤다.
“왜 화살을 쏘지 않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압실론 후작군이 성문 쪽으로 돌진해 오는데도 성곽에서 화살을 쏘는 야만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때 주술사 하나가 헐레벌떡 지휘 망루 위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조금 전 성에 엄청나게 강한 저주가 걸렸습니다.”
“저주라니?”
“누가 무기를 들면 무기력해지는 저주가 걸린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으냐?”
“이는 선별적으로 병사들에게만 걸린 저주입니다.”
그 저주 탓인지 성곽 위에 무기를 든 야만족 병사들은 무기력하게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압실론 후작군은 무기력한 야만족들은 간단히 제압했다.
레아드 성은 거의 피를 보지 않고 에반스가 이끌던 압실론 후작군이 다시 수복했다. 이를 두고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피를 보지 않고 야만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 순전히 에반스의 주술 때문이라는 것을 영주들과 기사들, 그리고 압실론 후작군은 알지 못했다.
단지 에반스가 소드 마스터의 검탄으로 성문을 부수는 것을 보고 야만족들이 그 능력에 지례 겁을 집어 먹고 무기력하게 항복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모두들 그 일을 천운이라 여겼던 것이다.
어째든 야만족은 모두 맥없이 압실론 후작군에 포로로 잡혔고 지휘 망루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군나르와 부장들은 에반스의 손에 죽고 말았다.
병력 손실 없이 야만족 1만의 포로를 잡은 채 에반스는 잃었던 자신의 국경성과 마을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른 대영지들은 그 사정이 달랐다.
에반스가 레아드 성을 수복하고 닷새 뒤, 라미셀 후작군과 콘라드 후작군은 각기 잃은 성을 되찾기 위해 공성전에 나섰고 그 결과 야만족에 대참패를 하며 각기 패잔병들을 이끌고 군사 요새인 루드실 영지성과 포드넨 영지성으로 퇴각했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야만족 8만 본대 병력 때문이었다. 그 병력이 오기 전에 잃은 국경성을 수복하기 위해 너무 서두르다 보니 수성전을 대비하고 있던 야만족에 크게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참패 소식 뒤에 더 황당한 소식이 전해져 왔다. 기온 후작령과 카라엔 후작령으로 쳐들어간 야만족이 기온 후작성과 카라엔 후작성을 함락했다는 것이다.
그 일로 트렌시아 제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후작성은 후작령의 심장이었다. 그 심장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야만족이 사실상 기온 후작령과 카라엔 후작령을 점령했다는 말과 같았다.
문제는 그 일로 인해 수도 바룬이 야만족에 당장 위협받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도 주위로는 루터슨 후작령과 로토스 후작령이 있었고 수도 방어를 위한 요새들도 많았다. 하지만 기온 후작성과 카라엔 후작성이 야만족 침공 뒤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함락된 사실 때문에 수도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이에 황제는 직접 변방의 콘라드 후작령과 압실론 후작령, 라미셀 후작령에 연락해서 즉시 수도를 지킬 구원병을 보낼 것을 명했다.
하지만 압실론 후작령을 제외하고 이미 야만족에 한 차례 대패한 콘라드 후작령과 라미셀 후작령은 수도로 구원병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이때 야만족 침략군의 총사령관인 맨도사가 본대 8만의 병력을 이끌고 유스마가 점령한 라미셀 후작령의 국경성에 들어섰다.
“잘 싸웠다. 유스마.”
맨도사가 유스마를 극찬했다. 맨도사는 오는 도중 콘라드 후작령에서도 후작군을 맞아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하하하. 우리 계획대로 모든 일이 착착 잘 진행되어 가는군. 그런데 군나르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가?”
맨도사의 물음에 그제야 유스마도 바로 옆 압실론 후작령의 국경성을 장악한 군나르로부터 며칠째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즉시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 보겠습니다.”
레아드 성으로 즉시 야만족 연락병이 달려갔다. 그런데 하루도 못 되어서 그 연락병이 허겁지겁 돌아와서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뭐, 뭐라고? 군나르와 부장들이 죽고 병사들이 전부 포로로 잡혔다고?”
“그렇습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소리였다. 야만족은 죽었으면 죽었지 항복해서 포로로 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런데 1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적에게 고스란히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그 말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는 소리인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맨도사와 유스마가 압실론 후작령의 국경성의 일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각기 측면으로 돌아 들어간 4만 병력이 선발대와 합류해서 기온 후작성과 카라엔 후작성을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됐다. 이제 정면으로 압박해 들어가면 된다.”
맨도사는 즉시 본대 병력에 출정을 준비케 했다. 그리고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중 3만 병력을 콘라드 후작령의 국경성으로 보내고 나머지 5만 중 2만 병력을 유스마에게 주며 말했다.
“지금 즉시 자네 휘하 1만 병력과 본대 2만 병력을 데리고 압실론 후작령의 레아드 성으로 가라. 가서 잡힌 1만 아군과 레아드 성을 다시 되찾고 곧장 카라스 영지성으로 밀고 들어가게.”
“알겠습니다.”
군나르가 맡은 일을 유스마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유스마의 일은 어쩔 수 없이 맨도사가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네 대신 이 길로 3만 병력을 이끌고 루드실 영지성을 칠 것이다.”
맨도사는 유스마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레아드 성으로 출정하는 것을 지켜본 뒤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트렌시아 제국의 대표적인 군사 요새인 루드실 영지성을 향해 출발했다.
유스마가 이끄는 3만 병력은 그날 라미셀 후작령과 압실론 후작령의 경계를 넘어 압실론 후작령의 최북방에 있는 레아드 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중간에 레아드 성은 무시하고 곧장 카라스 영지성을 치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 경우 아무래도 후방이 불안했다.
유스마는 맨도사의 지시대로 먼저 레아드 성을 빼앗고 난 후 카라스 영지성을 치기로 결정했다. 서둘렀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밤에는 근처 마을을 장악하고 그곳에서 보낸 뒤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해서 그날 오후쯤 레아드 성에 도착했다.
그때 에반스는 카라스 영지에서 보낸 추가 병력으로 하여금 사로잡은 야만족 1만 포로들을 카라스 영지로 끌고 가게 한 뒤였다. 그래서 레아드 성에는 1만 2천의 병력이 주둔 중이었다.
야만족이 국경성들을 점령할 때 그들은 어두운 밤에 갈고리와 밧줄을 이용해서 성을 점령했다.
위장한 상태로 어둠을 틈타 성벽까지 몰래 접근한 후, 밧줄에 연결된 갈고리를 던져서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을 제거해서 먼저 성곽을 완전히 장악한 후 아래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성 주위에 숨어 있던 야만족이 우르르 성문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때 성곽 아래로 내려간 야만족들이 성문마저 열었고 밖에 대기 중이던 야만족들이 우르르 성안으로 난입해 들어오게 되면서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다. 그렇게 성들이 함락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쉽게 성을 점령할 수는 없었다. 성곽에서 순순히 갈고리를 걸게 해 줄 리도 없었고 그렇다 한들 밧줄을 끊어 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야만족들도 성 위에 오르기 위한 사다리를 만들고 성문을 부술 파성퇴도 제작해야 했다.
유스마는 레아드 성을 겹겹이 포위한 후 성 주위 마을을 뒤져서 공성 무기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집 문짝이 모두 뜯겨졌고 마을 한가운데 서 있던 아름드리나무가 잘렸다. 그리고 마을의 동산 주위의 대나무들이 대거 베어졌다.
그렇게 하루 동안 야만족들은 사다리와 파성퇴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사다리와 파성퇴의 제작이 끝나자 야만족은 바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뿌우우우!
둥! 둥! 둥!
뿔 나팔을 불고 북을 울리며 그들의 야만족의 호전성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유스마는 고란족 대족장의 아들답게 머리 쓰는 것도, 싸우는 것도 제법 능했다. 그는 이번에 크게 전공을 세워 고란족 대족장의 후계자로서 그 입지를 다시금 세울 생각이었다.
어둠의 주술사로 인해 유스마는 생명뿐 아니라 후계자로서의 자리까지 위협을 받았다. 그때 유스마는 자신이 부친인 대족장 수아레스의 궁에서만 있어서는 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직접 고란족들을 이끌고 위험한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전장이란 것을 말이다.
유스마는 타고난 전투 능력을 백분 발휘해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바로 그런 점이 감안되어 고란족의 대족장인 수아레스와 랄트족의 대족장 우툴라가 유스마를 지휘관으로 삼은 것이었다.
유스마에게 이번 전투는 그의 인생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만약 그가 트렌시아 제국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다면 그가 야만족을 전부 아우르는 초대 황제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유스마는 그런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이번 레아드 성 공략에 나섰다. 뿔 나팔과 북소리로 인해 야만족들의 전투 본능이 모두 깨어나자 유스마는 망설이지 않고 공격을 명했다.
“돌격!”
“와아아아!”
사다리를 든 야만족들이 일제히 레아드 성을 향해 돌진했다. 그때였다.
슈슈슈슝!
성 위에서 화살 비가 쏟아졌다.
퍼퍼퍼퍽!
“크아아악!”
화살은 사다리를 든 야만족의 머리와 목, 몸통, 팔다리 가릴 것 없이 박혔고 비명과 함께 야만족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진 야만족의 자리는 다른 야만족이 재빨리 메웠고 사다리를 든 야만족들은 계속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 야만족을 향해서 성 위에서는 계속 화살을 쏘았고 꽤 많은 병력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 야만족은 결국 레아드 성의 성벽 아래에 도착했다.
차차차착!
성벽 주위로 백여 개도 넘는 사다리가 빙 둘러졌다. 그리고 그 사다리를 타고 야만족들이 빠르게 성벽 위를 기어올랐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성곽 위에서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이 돌덩이와 통나무를 떨어트렸다.
“헉!”
퍽!
“아아악!”
묵직한 돌덩이가 머리를 때리자 야만족 병사들도 비명을 내지르며 맥없이 쓰러졌다. 야만족 병사들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그 투구가 묵직한 돌까지 막아 낼 순 없었다.
떨어지는 돌의 무게 때문에 목뼈가 부러져 죽는 야만족들이 부지기수였다. 이어 떨어진 통나무를 껴안고 야만족이 사다리 아래로 연쇄적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때도 성곽 위의 궁수들의 화살이 야만족에게는 가장 치명적이었다.
슈슈슈슝!
퍼퍼퍼퍽!
“아아악!”
화살이 얼굴에 박혀서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사디리를 기어오르던 야만족 병사가 사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야만족은 계속 사다리 위를 기어올랐다.
사다리 주위에 쓰러진 야만족들은 옆으로 치워지고 그 자리는 다시 생생한 야만족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사다리를 올라타기 위해 기다렸다.
그때였다.
촤아아악!
성곽 위에서 끓는 물과 기름을 끼얹었다.
“아아악!”
뜨거운 기름과 물을 덮어쓴 야만족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져 버르적거렸다. 벌겋게 익은 피부에선 기포가 보글보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고통도 잊고 사다리에 매달렸다.
야만족들이 성벽 아래에서 계속 사다리를 통해 기어오를 때 야만족 일부 병력이 성문 쪽으로 움직였다.
야만족들 중에서도 특히 힘이 좋은 자들 중 고르고 고른 병사들이 커다란 나무의 앞쪽을 뾰족하게 깎아서 그 앞에 철심을 박아 만든 파성퇴를 들고 성문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 만들기 쉬운 파성퇴는 역대 성을 공략하는 데 있어서 사다리만큼이나 많이 사용된 공성 무기였다.
하지만 파성퇴를 들고 성문을 부수려는 야만족을 성문 위 압실론 후작군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슈슈슈슝!
파성퇴를 들고 돌진하는 야만족들을 향해 헤아릴 수 없는 화살 세례가 퍼부어졌다.
퍼퍼퍼퍽!
“크아아악!”
화살을 맞은 야만족 병사들이 쓰러지면서 더 이상 파성퇴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방패를 든 야만족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파성퇴를 다시 들고 성문 쪽으로 움직였다.
슈슈슈슝!
티티티팅!
화살이 쏟아졌지만 방패에 가로막혔고 얼마 뒤 파성퇴를 든 야만족이 성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들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돌과 끓는 기름 세례가 퍼부어졌다.
“으아악!”
성곽 위의 집중 공격으로 인해 파성퇴를 든 야만족이 완전히 괴멸되었다. 그러나 야만족을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파성퇴로 야만족 병사들을 보냈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몰려오는 야만족으로 인해 성문 위의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은 치를 떨었다.
하지만 성곽에는 아직 많은 돌덩이와 통나무가 있었고 끓는 물과 기름도 계속 성곽 위로 공수되면서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레아드 성의 지휘 망루에서 에반스는 수성전을 직접 지휘했다. 앞서와 달리 이번 전투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에반스는 성을 지키는 데는 한 명의 절대적인 무력보다는 여러 병사들의 단합된 힘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론 위기의 순간이 되면 에반스가 직접 나서게 될 테지만 지금까지 전황은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야만족은 성곽 위를 오르지 못하고 있었고 성문을 노리는 파성퇴는 번번이 아군에 의해 괴멸되었다.
하지만 야만족은 계속 공세의 끈을 놓지 않았다. 때문에 수성하는 압실론 병사들이 먼저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다리를 통해 성곽으로 올라오는 야만족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그로 인해 야만족의 사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이때 에반스가 아껴 두었던 기사들을 성곽으로 내보냈다. 사다리를 타고 성곽을 올라와도 기사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가 그 야만족을 베어 버리자 상황은 다시 수성군인 압실론 후작군에 유리해졌다.
하지만 기사의 수는 한정적이었다. 때문에 모자라는 기사의 수를 채우기 위해 에반스도 검을 뽑아 들어야 했다. 에반스는 특히 야만족이 많이 기어 올라오는 쪽을 맡았다. 때문에 한 손보다는 두 손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검을 쥔 반대 손에 창을 하나 들었다.
푹!
검이 성벽 위로 올라선 야만족의 목을 꿰뚫었을 때 그 반대 손에 쥔 창대가 옆에서 슬그머니 기어오르던 야만족을 향해 날았다.
부우웅!
퍽!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창대에 스치는 순간 야만족의 투구가 움푹 함몰되었다. 물론 속의 두개골은 산산조각이 났을 터였다.
얻어맞은 야만족 병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성벽 밖으로 거꾸로 떨어졌다. 에반스는 바로 앞쪽 사다리는 발로 걷어차고는, 창대를 다시 한 번 휘둘러 성벽에 걸쳐진 다른 사다리를 후려갈겼다.
파악!
묵직한 굉음과 함께 사다리가 사정없이 뒤로 퉁겨졌다. 두 사다리에는 모두 많은 야만족 병사가 매달려 있어 무게가 만만치 않았지만 마나가 실린 에반스의 다리와 창대의 실린 괴력을 감당할 순 없었다.
“으아아아!”
성벽 밖으로 곤두박질치는 사다리 뒤로 처참한 비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추락 시 뼈가 부러질 수 있을 만큼 높이가 높았기 때문에 떨어진 야만족들 중 무사한 자는 드물 터였다.
“야만족 놈들, 질기긴 질기군.”
어느새 다시 사다리가 놓이고 야만족들이 다시 기어올라 왔다. 에반스의 손에 들린 검과 창이 다시 움직였다.
에반스의 검에 목이 찔리고 창대에 머리통이 박살 난 야만족들이 처절하다 못해 애절한 비명과 함께 성벽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에반스는 계속해서 사다리를 걷어차고 후려쳐서 적들은 추락시켰다.
그러자 이내 에반스가 있는 성곽 주위가 조용해졌다. 에반스 혼자서 거의 백 사람의 몫을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성곽은 치열한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독 에반스가 있는 성곽 아래 야만족의 시체가 제일 많았다. 야만족들도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면 처절한 비명이 울리고 이내 사다리가 뒤로 넘어가는 에반스 쪽으로는 겁을 집어먹고 아예 사다리를 갖다 대지도 않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에반스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알게 된 압실론 후작군들은 그들의 대영주인 그를 특별히 존경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에반스는 대영주라고 몸을 사리는 법이 없었다.
앞서 레아드 성을 함락시킬 때도 그랬고 지금도 다른 기사들처럼 직접 성곽에서 적을 맞아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솔선수범하는 지휘관 휘하의 병사들이 약할 리 없었다. 성곽 위의 압실론 후작군들도 입에서 단내를 풀풀 풍기면서 기를 쓰고 야만족들을 막아 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쿠웅!
성문 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동시에 압실론 후작군의 외침 소리가 성곽 위의 병사들의 귀를 때렸다.
“성문이 깨졌다.”
그 말에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성문이…….”
“다 틀렸어.”
성문이 부서졌다면 성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성문으로 짓쳐 드는 수많은 야만족들을 무슨 수로 막아 낸단 말인가?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성문을 막을 테니 너희는 너희 자리를 지켜라.”
그때 에반스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음성을 증폭시키는 주술에 의해 성곽 위 모든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은 그 소리를 듣자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오히려 투지가 불끈 샘솟았다.
당연했다. 에반스가 자신의 목소리에 특별히 후작군 병사들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주술까지 함께 사용했던 것이다.
에반스는 성곽 위의 병사들을 향해 소리친 후,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계단을 통해 성 안쪽 성문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거리상으로 성벽 아래에서 성문까지의 거리가 더 짧았다. 무엇보다 깨진 성문으로 몰려드는 야만족을 사전에 막아 내기 위해서는 어차피 성 밖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성벽 아래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야만족 병사들이 운집해 있었다. 하지만 에반스에게 그들은 전혀 위협적인 존재들이 아니었다.
휘리릭!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에반스의 몸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에반스는 주술로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한 후 아래쪽에 서 있던 야만족 전사의 머리에 발을 내디뎠다.
팍!
우지근!
투구가 일그러지며 목뼈가 꺾인 병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주술로 몸을 가볍게 했지만 성곽에서 떨어져 내린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차착!
그대로 땅에 가볍게 착지한 에반스는 머뭇거림 없이 양손에 든 검과 창을 휘두르고 내찔렀다.
파파팟!
막 에반스를 발견하고 몰려들던 야만족들이 마치 비질을 당하듯 에반스의 검과 창에 우수수 쓰러졌다.
에반스의 검에 스치기만 해도 그들의 방패와 무기들이 잘려 나갔고 피가 샘솟았다.
퍼퍼퍽!
이어서 에반스의 마나를 한껏 머금은 창대에 야만족들의 갑옷과 무기가 박살이 나고 이어서 그들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야만족 병사들을 무인지경으로 학살하며 에반스가 성문 쪽으로 돌진하자 공포에 질린 야만족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야만족 부장이 소리쳤다.
“저놈이 성문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라.”
그 명령에 야만족 병사들이 에반스를 향해 벌 떼처럼 달라붙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에반스를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에반스는 주술을 사용해서 몸 주위로 방어막을 친 채 양손의 검과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방패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베고 부수었다.
주술 방어막에 보호받고 있는 에반스를 야만족 병사들이 제아무리 공격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강철 방패도 단숨에 잘라 버리고 박살 내 버리는 에반스의 검과 창 앞에 야만족 병사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야만족 병사들 사이로 피 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 야만족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에반스의 앞을 가로막고 무기를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의 공격은 에반스의 주술 방어막도 뚫지 못했다.
에반스는 거침없이 야만족들을 쓰러트리며 성문 쪽으로 빠르게 쇄도해 들어갔다. 에반스가 성문 쪽에 도착했을 때 완전히 깨져 있는 흉물스러운 성문의 모습이 보였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돌격을 거듭한 야만족의 파성퇴가 결국 성문을 박살 낸 모양이었다. 에반스는 성문 위쪽으로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성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성문 위쪽의 병사들도 인간이었다. 체력에 한계가 있었을 터였다.
어떻게든 성문을 지켜보려고 압실론 후작군들이 성문 사수에 나섰지만 이미 상당수의 야만족들이 성문 안으로 파고든 상태였다.
그들은 곧이어 성문에 다다를 야만족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접전을 벌였다. 일반적으로 보통 인간들보다 머리 하나씩 더 큰 야만족들을 상대하는 것이 압실론 후작군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에반스가 성문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타앗!”
그는 마치 폭풍처럼 양손에 검과 창을 들고 성문 앞에서 웅성거리는 야만족 병사들을 휩쓸어 갔다.
퍼퍼퍽!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생명이 사라진 시신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에반스가 양손을 휘저을 때마다 십여 명의 병사들이 쓰러졌다.
에반스는 검과 창에 동시에 마나를 주입시키고 마구잡이로 두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면 그의 검에 야만족의 무기와 몸이 양단 났고, 그의 창에 역시 무기가 박살 나고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순식간에 성문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던 야만족 병사들이 궤멸되었다.
에반스는 곧장 성문 앞에 버티고 섰다.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너희는 성곽으로 올라가서 동료 병사들을 지원하라.”
에반스의 명령에 급히 성문으로 달려왔던 압실론 후작군이 다시 성곽 위로 올라갔다.
야만족 중에는 에반스와 맞설 존재가 없었다. 그러니 에반스가 성문을 버티고 있으면 야만족은 더 이상 성문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에반스가 살아 있는 성문이 된 것이다.
에반스가 양손에 들린 검과 창을 휘두르자 성문 안으로 돌진해 온 야만족 병사들이 족족 시체가 되어 성문 주위로 널렸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에반스의 검과 창을 막을 병사는 야만족 내에 없었다. 간혹 용감한 야만족 병사들이 무모하게 달려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에반스는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라도 보이겠다는 듯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몸이 토막 난 야만족 병사들이 맥없이 우수수 쓰러졌다. 어느새 성문에 야만족 병사들의 시신으로 작은 동산이 만들어졌다. 에반스 혼자서 성문 앞에서 천여 명도 넘는 야만족 병사들을 죽인 것이다.
이에 야만족은 궁수를 동원해서 활을 쏘고 창을 던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반스의 주술 방어막을 뚫을 화살과 창은 존재치 않았다.
레아드 성의 성문은 열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 들어가도 될 만큼 넓었다. 그 성문 한가운데 에반스 혼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도 야만족은 그 너머로 진입해 들어가지 못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스마는 치를 떨었다.
“저놈 하나 때문에…….”
유스마가 곧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에반스를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뾰족한 대안이 유스마에게는 없었다. 덤벼드는 족족 시체가 되어 버리니 야만족 병사들도 더 이상 성문 쪽으로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야만족 부장들도 더는 야만족 병사들에게 성문 쪽으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성곽 위의 상황도 수성군인 압실론 후작군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성문이 열렸다는 소리에 야만족 병력이 일시에 성문 쪽으로 집중되면서 성곽의 상황이 훨씬 여유가 있어진 것이다.
성곽 위의 기사들이 성곽 위로 난입한 야만족들을 다 베어 버리면서 성곽 위에는 더 이상 야만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전열을 정비한 성곽 위의 압실론 후작군이 반격을 가했다. 화살을 쏘고 돌덩이와 통나무를 투척하며 끓는 기름과 물을 성채 아래로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야만족에 피해가 속출하자 유스마도 결국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라. 더 이상 병사들을 잃을 수는 없다.”
유스마의 명령에 야만족 부장들이 적잖게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단숨에 레아드 성을 점령하기 위해 3만 병력 모두를 쏟아부은 전투였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다시 공격한다고 해도 성을 점령할 수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런 부장들의 심정을 안다는 듯 유스마가 말했다.
“여기서 버텨 봐야 병력 손실만 커질 뿐이다. 물러나서 다른 길을 모색해 보는 것이 낫다.”
그렇게 말하며 유스마가 성문 쪽을 쏘아보았다. 그곳에는 에반스가 여전히 성문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한 공성전이 달랑 한 사람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유스마의 명령에 부장들이 한숨을 내쉬며 퇴각 명령을 내렸다.
뿌우우우!
후퇴를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성벽 아래 야만족들이 썰물처럼 빠르게 물러났다.
그 모습을 성곽에서 내려다보던 압실론 후작군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야만족을 물리쳤다.”
전투에서 승리한 압실론 후작군 병사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함성을 질러 댔다. 그때 지휘 망루에 있던 영주들과 성곽 위의 기사들이 우르르 성문 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성문 한가운데에는 그들의 대영주이자 성을 지켜 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영웅인 에반스가 여전히 철탑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 에반스를 보고 영주들과 기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레아드 성을 지키느라 병력 손실은 컸지만 이번 전투로 인해 압실론 후작군은 더 이상 야만족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영주인 에반스와 싸우는 한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것은 에반스가 의도했던 압실론 후작군을 하나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단지 문제라면 그 구심점인 에반스에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는 점이었다. 만약 에반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압실론 후작군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그 문제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에반스는 자기 자신의 몸 하나는 지켜 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레아드 성을 공격했던 야만족 3만 병력은 그 절반인 1만 5천을 잃고 후퇴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전열을 정비하고 죽은 야만족들의 복수를 다짐하며 재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에반스는 성문을 열게 하고 성벽 아래 야만족들이 버리고 간 야만족 시신들을 한 곳에 모으게 했다. 그리고 마법사인 루크에게 그 시신들을 태우게 했다.
“내가 시신이나 태우려고 여기 온 줄 아십니까?”
당연히 루크가 툴툴거렸다. 에반스는 이번 전투에 자신의 측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르손을 비롯한 시스턴과 라일라, 루미나 등은 지휘 망루에서 에반스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에반스가 그렇게 한 것은 이번 전투에서 자신 혼자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압실론 후작군을 확실하게 지휘하기 위해서 에반스는 자신이 영웅이 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 다른 존재들이 설친다면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지 몰랐다.
우선 자신의 제자인 루미나와 시스턴만 하더라도 웬만한 기사들보다 더 강했다. 거기다가 특급 어쌔신인 라일라에, 에반스의 특별 훈련으로 인해 라르손은 어느새 상급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거기다가 5서클의 마법사 루크도 마도사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 대단한 실력자들이 여기저기서 설쳐 대면 아무래도 에반스가 돋보이기는 어려울 터였다.
해서 에반스는 카라스 영지성을 떠날 때 그들에게 한동안 싸우지 말고 전투만 지켜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 에반스가 압실론 후작군의 영웅으로 부각된 이상 그들도 맘껏 활약할 때가 되었다.
“오늘 이후 관전이 아닌 참전을 허락하도록 하지.”
에반스의 말에 루크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진작 말씀하실 것이지. 파이어 볼!”
루크가 바로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거대한 불덩이가 산처럼 쌓여 있던 야만족 시신들로 날아갔다.
화르르르!
시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루크는 다른 쪽에 쌓여 있는 야만족 시신들에도 불을 붙였다. 얼마 후 레아드 성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루크는 에반스의 명령대로 시신들을 불태운 뒤 곧장 성으로 달려가서 이제 참전해도 된다는 에반스의 명령을 일행들에게 전해다.
그러자 시스턴과 루미나가 제일 기뻐했다. 이어 라일라도 기지개를 켰다.
“아우웅. 이제 움직여도 된단 말이지?”
그때 일행 중 유일하게 지휘관으로 활약 중이던 라르손이 누구 들으라는 듯 말했다.
“움직이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우리를 도우는 거란 걸 아직 모르나 보군.”
그 말에 라일라가 발끈했다.
“뭐라고?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한 소리지?”
“아니. 내가 뭐라고 했다고 이래? 왜, 뭐 찔리는 게 있나 보지?”
“옹졸한 자식. 너나 똑바로 해.”
“뭐 옹졸한 자식? 이게…….”
옥신각신하는 라르손과 라일라 부부는 아직까지 화해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