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때가 성곽 위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에게는 가장 추울 때이기도 했다.
대개 그렇듯 압실론 후작령의 레아드 성도 파르미르 고원 아래 여러 국경성들처럼 새벽 무렵이면 고원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풍에 오들오들 몸을 떨어야 했다.
“으으으. 추워. 호오.”
“조금만 참아. 곧 날이 밝아 올 테니.”
고참 병사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창을 옆구리에 낀 체 연방 얼은 두 손에 ‘호호’ 입김을 불어 넣는 신참 병사를 보고 말했다.
“형님은 춥지도 않으시오?”
신참 병사가 신기하다는 듯 고참 병사를 쳐다보자 고참 병사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입고 있던 군복 상의를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자 군복 안감에 양털이 가득했다.
“에이. 어쩐지…… 누가 만들어 준 겁니까?”
부럽다는 듯 신참 병사가 묻자 고참 병사가 목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루이나가 만들어 줬다.”
“헉! 루이나라면 국경 마을에서 제일 예쁘다는 그 과부?”
신참 병사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경성의 병사들 중 나이가 있다는 병사들은 모두 루이나를 노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병사들은 헛물을 켠 것 같았다. 이곳 국경성에서 여자가 남자의 옷을 지어 준다는 것은 지아비로 섬기겠다는 뜻이었다.
“대단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면 오늘 여러 형님들이 피 눈물을 흘리겠군요?”
“뭐 어쩔 수 없지. 사랑도 쟁취하는 것이니 말이야.”
고참 병사는 창을 껴안고 누구를 생각하는지 입가에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런 고참 병사를 부러운 눈으로 신참 병사가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신참 병사 뒤로 뭔가가 나타났다.
“헉!”
놀란 고참 병사가 막 손짓으로 신참 병사 뒤를 가리켰을 때였다.
서걱!
고참 병사의 팔이 잘렸다. 자신의 팔이 잘리는 것을 보고 고참 병사의 입이 벌어질 때 뭔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웁!”
그때 고참 병사의 눈앞에 신참 병사의 목이 잘려 그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
두두둑!
고참 병사의 얼굴이 그대로 등 뒤로 돌아간 채 길게 혀를 빼물고 맥없이 쓰러졌다. 잘린 그 병사의 팔에서 흘러나온 피가 군복 안으로 쓰며 들었다.
두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레아드 성의 성곽 위에 보초를 서던 수십여 명의 병사들이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서 성곽 위에는 야만족 병사들 수십 명의 모습이 으스름하니 여명 속에 보였다.
그들은 서로 손짓으로 수신호를 주고받더니 곧바로 성곽 아래로 내려갔다. 이어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레아드 성 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야만족이다. 야만족이 쳐들어왔다.”
땡! 땡! 땡!
비상 타종 소리가 잠든 성내 사람들을 깨웠다. 이어 다급한 소리가 울렸다.
“성문이 열린다. 막아라.”
쿠우우웅!
이어 성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 비명 소리가 중첩되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거대한 함성에 묻혔다.
“와아아아!”
“맙소사. 저기다.”
“야만족이 몰려온다.”
성문이 열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야만족들이 우르르 성안으로 짓쳐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성문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던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병력을 다섯으로 나눠서 동시다발적으로 트렌시아 제국의 국경지대를 침공한 야만족 선발대는 각자 제국의 국경지대 국경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 마을을 빠르게 점령했다.
선발대의 목적은 후발대, 즉 본대를 위해 적진 내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유스마가 이끄는 선발대는 폭넓게 다섯 곳에 걸쳐서, 제대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조용히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서 국경 지역을 급습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이로써 야만족은 고원 아래 다섯 곳의 교두보를 두고 대대적으로 트렌시아 제국을 침공할 수 있게 되었다.
야만족이 크렌시아 제국을 침공할 때 대부분 중앙에 위치한 압실론 후작령이나 라미셀 후작령, 또는 콘라드 후작령을 선택했다.
때문에 이들 대영지에는 국경성 뒤쪽에 전략적인 군사 요새들이 있었다. 그 군사 요새가 압실론 후작령에서는 바로 카라스 영지성이었고, 라미셀 후작령에는 루드실 영지성, 그리고 콘라드 후작령은 포드넨 영지성이었다.
반면 제국의 동서 끝에 위치한 기온 후작령과 카라엔 후작령의 경우는 그런 군사 요새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바로 그런 점을 랄트족 대족장인 우툴라의 최측근인 맨도사는 방관하지 않았다. 본대 병력 중 절반을 둘로 나눠서 각자 기온 후작령과 카라엔 후작령으로 먼저 보낸 것이다.
고란족과 랄트족 연합군의 본대 규모는 고란족이 6만에 랄트족이 10만이었다. 16만 병력에서 8만 병력이 둘로 나뉘어 각기 4만의 병력들이 먼저 기온 후작령과 카라엔 후작령 방면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8만 병력을 이끌고 맨도사가 직접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 고원 아래 평원으로 진출했다. 선발대를 이끌었던 유스마는 이때 점령한 라미셀 후작령의 국경성에 머물고 있었다.
“지휘관들에게 본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성을 지키고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전했느냐?”
유스마의 물음에 그의 부관이 즉시 대답했다.
“네. 모두 움직이지 말고 본대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콘라드, 압실론, 라미셀 후작령의 병력을 묶어 두는 것이다. 그사이 본대 병력 절반이 기온 후작령과 카라엔 후작령으로 밀고 들어가서 곧바로 제국의 수도 바룬을 압박하게 될 것이다. 그럼 콘라드, 압실론, 라미셀 후작령의 병력이 수도를 지키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될 것이고, 그때 우리가 일제히 중앙을 뚫고 밀고 들어가는 것이지.”
이미 작전 계획까지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작전에 최대한 변수가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변수가 있더라도 이제는 그 변수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 나가야 했다. 그것이 또한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이었다.
선발대 지휘관으로 유스마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해냈다. 이제 그도 본대 병력과 합류해서 제국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임해야 했다. 그런데 그 전에 그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라미셀 후작군의 공격으로부터 점령한 국경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유스마는 성을 뺏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귀찮았다. 생각 같아서는 적이 나타나면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서 싸우고 싶었지만 야만족을 이끌고 있는 총사령관 맨도사는 야만족 병력 손실을 우려해서 절대 성 밖으로 나가 싸우지 말 것을 명했다.
불만스러웠지만 전쟁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곧 대족장의 명령과 같았다. 그 명령을 어길 시 즉시 참수되니 유스마도 별수 없었다.
“수성 준비를 갖춰라.”
유스마와 야만족들이 국경성에서 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라미셀 후작령의 루드실 영지성에서는 국경성과 그 인근 마을을 점령한 후 야만족들이 더 이상 남하해 내려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겼다.
즉시 척후병을 그쪽으로 보냈더니 야만족들이 그곳에 아예 진을 쳤다는 것이다. 야만족이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이렇게 되면 라미셀 후작군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라미셀 후작군 3만 병력은 즉시 루드실 영지성을 나와 국경성으로 움직였다. 잃은 국경성과 그 인근 마을을 수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국경지대에 위치한 레아드 성과 그 주위 마을들이 야만족의 수중에 넘어갔을 때 압실론 후작령의 전방 군사 요새인 카라스 영지성에서는 긴급회의가 연일 열리고 있었다.
이때 대영주인 에반스의 명령을 받은 카라스 영지성과 가까운 인근 영주들이 적게는 2백여 명에서 많게는 5백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속속 카라스 영지성으로 입성하고 있었다.
회의장에는 에반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카라스 영지성의 영주인 라르손이 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놈들이 레아드 성을 점령하고 꿈쩍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라르손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영주들이 모두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때 에반스가 나타났다.
“다행은 무슨. 놈들은 지금 본대 병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라르손, 현재 성내 병력이 얼마나 되지?”
에반스의 물음에 라르손이 바로 대답했다.
“카라스 영지군 1만에 지금까지 영주들이 데려 온 병력이 4천 정도 됩니다.”
라르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반스가 명령했다.
“카라스 영지군 2천을 남기고 나머지는 지금 당장 출전 준비를 시켜.”
“네. 즉시 준비시키겠습니다.”
명을 내린 뒤 에반스는 카라스 영지성에서 자신이 임시로 사용 중이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레아드 성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제자들인 루미나와 시스턴이 그의 방을 찾아왔다.
“소식 들었습니다.”
“출정하신다면서요?”
그런데 둘 다 이미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에반스와 같이 가겠다는 소리였다. 에반스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장은 위험하다. 항시 조심하고 내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즉시 후방으로 보낼 것이다. 알겠나?”
“네!”
누구보다 루미나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에반스는 위험한 전장에 여제자 루미나는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루미나만 남겨 두고 시스턴만 데려가게 되면 그녀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해서 이번에는 그녀를 데려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장은 시스턴이 잘 아니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네.”
기분이 좋아진 루미나는 에반스가 뭐라고 하던 몽땅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때 라르손이 에반스를 찾아왔다.
“준비됐습니다. 지금 바로 가실 거지요?”
“응. 그런데 넌 왜 갑옷을 입고 있지?”
“네? 그야 저도 같이 가야지요.”
“무슨 소리야? 넌 여기 남아서 각 지역에서 집결 중인 후작군을 정비해야지?”
에반스는 후방 일을 자신의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라르손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반스의 말이라면 뭐든 잘 듣던 라르손도 이번에는 고집을 피웠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이렇게 영지성에 갇혀 지내다가는 미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라르손의 말에 루미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어제 라일라 언니하고 대판 싸우더니 혹시 사랑의 도피행?”
그 말에 라르손이 흠칫 놀랐다.
“그, 그게 아니라…….”
“어? 목에 핏자국이 보여요?”
루미나의 말에 에반스가 라르손의 목을 보자 목에 선명하니 손톱 자국이 보였다. 소드 마스터는 아니지만 뛰어난 기사인 라르손의 목에 손톱 자국을 새길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라르손의 부인인 라일라 말이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루크를 데리고 나타났다.
“여기들 있었군.”
그리고 맨 먼저 안쓰러운 듯 라르손을 쳐다보고 말했다.
“어제…… 맞았다면서?”
“네?”
화들짝 놀란 라르손이 루크를 도끼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루크가 한 손을 내밀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말한 게 아닙니다. 그녀가 공작님을 찾아와서는…….”
루크가 미주알고주알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털어놨다. 그런 눈치 없는 루크를 보고 에반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튼 결론은 어젯밤 라르손과 라일라가 대판 부부 싸움을 했고, 라르손은 라일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이번 출정에 꼭 따라가야겠다는 것이었다.
“후방은 내가 맡을 테니 데려가게.”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도 어쩔 수 없이 라르손을 데려가기로 했다. 신이 난 라르손이 에반스의 방을 나갔을 때였다.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에게 슬쩍 말했다.
“라일라도 데려가게.”
“라일라도요?”
“그래. 전장에 나가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법이지.”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전장으로 데려가서 화해시켜 오라는 소리였던 것이다.
출정 준비가 모두 끝나자 에반스는 즉각 1만 2천의 병력을 이끌고 레아드 성으로 출발했다.
에반스는 이미 독수리로 변해서 레아드 성을 먼저 시찰한 터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야만족 본대 병력을 기다리며 수성 준비를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만약 이 사실을 빨리 알아내지 못했다면 에반스도 다른 곳처럼 며칠의 시간을 그냥 허비한 후 레아드 성을 수복하려 했을 터였다.
에반스의 빠른 정찰로 인해 압실론 후작군은 다른 대영지보다 사흘이나 더 빨리 레아드 성에 도착했다.
당연히 정오 무렵 불쑥 나타난 적군의 출현에 레아드 성의 야만족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 그러게 말입니다.”
“허어. 우리가 성을 함락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놈들이 이곳으로 온단 말이냐?”
레아드 성을 함락한 야만족의 지휘관 군나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부관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척후들을 전방에 배치시키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 터였다. 적들이 성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부관은 척후들로부터 어떤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척후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들은 에반스의 주술에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압실론 후작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 있었다.
아무튼 제대로 수성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난 압실론 후작군의 등장에 레아드 성을 함락한 채 그 안에 운집해 있던 1만의 야만족 연합군들은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야만족의 지휘관인 군나르는 곧 그런 소음을 진정시키고 수성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사이 에반스는 1만 2천의 압실론 후작군으로 레아드 성을 포위했다.
“적은 1만이 조금 넘는다. 우리보다 고작 2천밖에 많지 않다. 겁낼 것 없다.”
레아드 성의 지휘 망루에서 군나르가 야만족들을 독려하며 외쳤다.
“와아아아!”
그러자 야만족들도 이내 안정감을 되찾았다. 비록 수성 준비가 완벽히 갖춰지지 않았지만 성곽 위에는 성벽 아래로 투척한 돌덩이나 통나무로 가득했다. 그 정도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지키기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적의 병력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 야만족들을 안심케 했다.
대개 공성전에는 적어도 3배, 많게는 10배 이상의 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적군은 고작 1만 2천밖에 되지 않았다. 그냥 싸워도 적군은 야만족의 상대가 아니었다.
개개인의 전투력에서도 일반 병사들은 야만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두 명이서 덤벼야 겨우 야만족 하나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성에 의지해서 싸우는데 야만족이 패하려야 패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군나르님. 성을 지킬 것이 아니라 나가서 놈들을 쓸어버리지요?”
“맞습니다. 저 정도면 한 시간이면…….”
군나르의 부장들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울 것을 군나르에게 주장했다. 하지만 군나르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안 된다.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다. 우리는 본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성안에서 적을 상대한다.”
군나르의 뜻이 강경하니 더 이상 성 밖으로 나가서 싸우자고 떠드는 부장은 없었다.
에반스는 레아드 성을 포위하게 하고 주술로 독수리로 변해서 성안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서 지휘 막사로 들어갔다. 지휘 막사에는 이번 전투에 참여한 십여 명의 영주들이 대영주인 에반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이 성문을 닫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공성전은 피할 수 없겠다.”
에반스의 말에 끝나기 무섭게 영주 중 한 명이 말했다.
“서, 설마 지금 이 병력으로 레아드 성을 치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그 영주의 말에 에반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공격하면 안 되나?”
“네? 성안은 온통 야만족으로 득실대고 있습니다. 그 병력이 1만은 족히 된다고 하는데 고작 1만 2천인 우리 병력으로 어떻게 성을 공략한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이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입니다.”
에반스의 말에 영주들이 모두 얼굴에 난색을 드러낼 때였다. 카라스의 영주인 라르손이 태연하게 말했다.
“언제 공격할까요?”
그런 라르손을 영주들이 일제히 성난 얼굴로 쏘아보았다. 그때 에반스가 더 황당하게 말했다.
“병사들에게 식사부터 시켜라. 배가 든든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법이다.”
마치 레아드 성쯤은 간단히 점령할 수 있다는 그런 태도였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영주들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뭣들 하고 있는 건가? 어서 나가 병사들 밥부터 먹이지 않고?”
영주들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지휘 막사를 나갔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휘하 병사들에게 식사부터 하게 했다.
병사들의 식사가 끝나자 에반스는 즉시 압실론 후작군에게 전투 준비를 명했다.
“허어. 정말 이대로 저 성을 공격하실 생각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됩니다. 고작 사다리 수십여 개로 어떻게 저 성을 함락시킨단 말입니까?”
레아드 성을 치기 위해 준비된 공성용 도구는 기다란 사다리가 다였다. 성곽 위에는 돌덩이와 통나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안 그래도 힘이 좋은 야만족들이 돌덩이와 통나무를 성곽 아래로 던진다고 생각해 보라. 전투 시간이 다가오자 영주들뿐 아니라 병사들의 얼굴도 사색이 되어갔다.
그런데 그때 단기의 말이 압실론 후작군 진영에서 나와 레아드 성의 성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화살 사정거리쯤에서 그 단기의 말이 멈춰 섰다.
“야만족은 들으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그 성에서 나와 너희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럼 모두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단기의 말에는 바로 에반스가 타고 있었다. 음성을 확장시키는 주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에반스의 말은 레아드 성의 야만족들은 물론, 성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압실론 후작군들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에반스의 말에 즉각 레아드 성의 지휘 망루에서 야만족이 답변을 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덤빌 테면 덤벼라.”
그 말이 끝나자 에반스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야만족들이 용맹하다고 하더니 순 거짓말이로군. 쥐새끼들처럼 그 안에 숨은 꼴 하고는. 그래도 입은 살아서 잘도 나불대는구나.”
에반스의 말에 성 주위 압실론 후작군이 배를 잡고 웃었다. 반면 성곽 위의 야만족들은 수치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너나 그 입 닥치고 공격하려면 하고 말 거면 썩 물러가라.”
에반스의 도발에도 야만족 지휘부는 비교적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한번 싸워 볼까 해서 나왔는데 틀렸군. 야만족들은 다 겁쟁이들이니 말이야.”
그 말을 하고 에반스가 보란 듯 성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 모습에 성곽 위의 야만족들은 더 화가 났다. 그중 일부는 화살을 쏘고 또 들고 있던 투척 무기를 에반스를 향해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에반스는 화살 사정거리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화난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우우우우!”
야만족이 혼자인 에반스를 향해 활을 쏘고 무기를 던지는 것을 보고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압실론 영지군이 성 위의 야만족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야만족들이 더 흥분했다.
이때 레아드 성의 지휘 망루 위에서 군나르의 부장들이 군나르를 향해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냐고 성토를 했다.
“아군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습니다.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단 칼에 저놈의 목을 날려 버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군나르의 부장들이 너도 나도 자신이 성 밖으로 나가서 성 아래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에반스를 상대하겠다고 나섰다. 군나르 역시 적의 야유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별안간 나타난 적 하나 때문에 야만족이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되었던 것이다.
“위그른, 자신 있느냐?”
제일 처음 에반스의 목을 날려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부장을 보고 군나르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두 번도 필요 없습니다. 한 번에 놈을 토막 내 놓겠습니다.”
부장 위그른이 자신의 무기인 커다란 칼을 한 손에 들어 보이며 자신 있게 외쳤다. 믿음직한 부장의 모습에 군나르가 만족스런 표정과 함께 명했다.
“나가라. 가서 놈의 목을 가져오라.”
“존명!”
부장 위그른이 황급히 지휘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에반스가 말장난으로 레아드 성의 야만족들을 화나게 만드는 동안 압실론 후작군의 지휘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런 그들의 대영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카라스 영지의 영주인 라르손만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결국 안 나올 모양이군. 알았다. 그 안에서 나오지 마라. 이 겁쟁이들아.”
그렇게 말하고 에반스가 막 말 머리를 압실론 후작군 진영 쪽으로 돌리려 할 때였다.
쿠우우웅!
성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단기의 말이 뛰어나왔다.
다다다다!
그 말을 보고 에반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말은 빠르게 에반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에반스와 불과 10여 미터 앞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히히히힝!
“워워!”
말을 세운 뒤 말 위의 야만족이 커다란 칼을 들어 에반스를 가리키며 외쳤다.
“나는 위대한 바바리안의 대전사 위그른이다. 네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 나왔다.”
위그른의 외침에 이번에는 성채에서 떠나갈 듯 함성이 울렸다.
“와아아아!”
“위그른 만세.”
그 상황에서 에반스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성채 위의 함성이 잦아들자 입을 열었다.
“입만 살아서는. 어서 덤벼 봐. 내 머리통이 날아갈지 네놈 머리통이 날아갈지 결판을 내야 하지 않겠어?”
“저놈이…….”
발끈한 위그른이 말 머리를 돌려 성을 보고 30여 미터 정도 달렸다가 말을 멈춰 세우고 다시 머리를 에반스를 향해 돌렸다.
그때 에반스도 말 머리를 돌려 20여 미터 정도 뒤로 물러났다. 마상에서의 전투는 역시 돌진하는 말 위에서의 승부가 백미였다. 둘 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말이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벌린 것이다.
“이놈. 머리를 내놔라.”
잔뜩 화가 난 위그른이 먼저 말을 몰아 돌진했다.
두두두두!
맹렬히
맹렬이 달려오는 야만족 전사를 보며 에반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에반스를 태운 말도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그때 에반스도 비로소 검을 뽑아 들었다.
그 크기가 위그른이 한 손에 든 커다란 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척 봐도 두 무기가 부딪치면 에반스의 검이 박살 날 것처럼 보였다.
60여 미터의 거리가 곧 좁혀졌고 맹렬히 달려온 야만족 전사 위그른과 에반스의 검이 맹렬히 맞부딪쳤다.
촤촹!
그런데 놀랍게 에반스의 검이 위그른의 그 커다란 검을 받아 냈다. 한차례 검을 나누고 엇갈려 지나간 둘은 다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접근한 둘은 매섭게 서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촤차차창!
둘의 무기가 부딪칠 때마나 불똥이 튈 정도로 둘은 치열하게 싸웠다. 위그른은 단칼에 에반스를 벨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에반스가 강하자 약간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야만족을 대표할 만한 전사답게 위그른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에반스에게 커다란 칼을 마구 휘둘러 댔다.
반면 에반스는 시종일관 느긋하게 위그른의 칼을 막아 내면서 빈틈이 보이면 즉시 반격을 가하며 위그른이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팽팽하게 싸움을 이어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쪽 병사들은 어느새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그만큼 보기에 누가 이길지 모를 정도로 둘의 싸움은 백중지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헉헉!”
위그른의 얼굴은 어느 새 붉게 상기되었고 입에서 연방 거친 호흡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반면 에반스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위그른이 공세를 멈추면 즉시 반격을 가해서 위그른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 기세 좋게 에반스를 공격했던 위그른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에반스가 자신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애당초 위그른은 에반스의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위그른은 절망했다. 하지만 야만족을 대표하는 전사로서 이대로 맥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에반스를 공격했는데 그의 투지만큼이나 그의 체력은 무한하지 못했다.
“헥헥!”
지친 기색이 역력한 위그른을 보고 에반스가 차갑게 말했다.
“이제 놀 만큼 놀았으니 죽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반스가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위그른도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앙!
두 무기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맹렬히 스파크가 튀었다. 그때 위그른이 든 커다란 칼이 튕겨 나며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자연스럽게 타고 있던 말도 뒷걸음질을 쳤고 에반스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따라붙었다.
위그른은 위기의 순간 말이 뒤로 움직여 주면서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고 둘은 계속 말 머리를 맞댄 상태로 매서운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접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쨍!
맑은 소리와 함께 위그른이 들고 있던 커다란 칼이 두 토막으로 부러져 버렸던 것이다. 놀란 위그른이 자신의 부러진 칼을 쳐다보고 있을 때 에반스의 검이 위그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에반스의 검은 위그른의 갑옷을 가볍게 가르며 그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털썩!
생명이 사라진 위그른의 몸이 말 위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동시에 압실론 후작군 진영에서는 함성이, 야만족 진영에서는 실망의 탄식이 흘러 나왔다.
“와아아아!”
“이겼다. 최고다.”
승리를 거둔 에반스는 성채 위의 야만족들이 보란 듯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장검을 하늘로 곧추세웠다. 그런 그의 검신을 따라 죽은 위그른의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때 에반스가 압실론 후작군을 보고 외쳤다.
“봐라. 야만족들도 별거 아니잖으냐?”
그 소리에 압실론 후작군이 큰 소리로 웃었다.
“와하하하!”
반면 성곽의 야만족들은 굳은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불끈 쥐었다.
부장 위그른의 죽음으로 레아드 성 지휘 망루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허어. 위그른이 죽다니…….”
누구보다 군나르의 충격이 커 보였다. 위그른은 군나르와 같이 수많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야만족 최고의 전사였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저놈을 죽여 위그른의 복수와 바바리안의 진정한 힘을 놈들에게 보여 주겠습니다.”
평소 위그른과 친했던 부장 세네갈이 나섰다. 세네갈은 창을 잘 다루는 야만족 전사였다. 세네갈의 창은 보통의 창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달랐다. 세네갈이 창대를 나무처럼 보이게 칠을 해서 그렇지 그의 창은 통 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묵직한 쇠창을 휘두르는 세네갈은 위그른과 함께 군나르가 가장 아끼는 야만족 전사였다.
“…….”
군나르가 묵묵부답 대답이 없자 세네갈이 알아서 자신의 창을 챙겨 들고 성문이 있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성문이 열렸다. 세네갈이 빠르게 열려진 성문 사이로 빠져나가 곧장 에반스를 향해 말을 달렸다.
‘단숨에 놈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다.“
돌격 창의 자세로 창끝을 에반스에게 향한 채 세네갈이 빠르게 말을 몰았다.
두두두두!
자신을 향해 창을 겨누고 달려오는 또 다른 야만족 전사를 보고 에반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앞서 위그른을 빨리 죽이지 않고 백중지세를 유지해 가면서 싸운 것도 야만족 전사들을 더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야만족의 땅을 누비고 다녔던 에반스는 누구보다 야만족에 대해 잘 알았다.
그들은 전장에서 물러서는 것을 가장 수치로 여겼고 동료의 죽음은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위그른이 죽게 되면 그와 친한 야만족 전사가 달려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에반스를 향해 바로 창끝을 겨눴다는 것은 바로 싸우자는 뜻이었다. 에반스도 곧장 자신의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
두 말이 직선으로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서로 충돌 시, 긴 무기인 창이 더 유리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이번에는 앞선 위그른과 달리 사정 따윈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말은 즉 에반스가 소드 마스터로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겠다는 소리였다.
츠츠츠츠!
에반스가 치켜세운 장검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갔다. 놀랍게도 오러 블레이드가 검신을 물들이는 것도 모자라 검봉을 타고 맹렬히 뿜어지기 시작했다.
완벽히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가 휘둘러졌다.
바우우웅!
서걱!
파팟!
창을 겨눈 세네갈과 검을 휘두른 에반스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에반스의 검이 세네갈의 쇠창을 잘라 버리고 그의 목을 날려 버렸다.
잘려진 창과 세네갈의 머리가 동시에 허공을 치솟았다. 머리를 잃은 주인을 태운 세네갈의 말이 50여 미터를 더 달렸다. 하지만 주인의 낙마하자 말도 움직임을 멈췄다.
“헉! 단 일 합에…….”
야만족들은 세네갈이라면 위그른의 복수를 해 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세네갈은 더 어이없게 단번에 당하고 만 것이다.
“세네갈!”
그때 지휘 망루에서 세네갈의 친한 친구였던 무자크가 나섰다. 그의 손에는 어른 머리통만 한 철퇴가 들려 있었다. 무자크의 철퇴는 빨라서 누구도 그 철퇴를 막아 내지 못했다.
“무자크! 무자크! 무자크!”
무자크의 등장에 성채 위의 야만족들이 일제히 그를 연호했다. 성문을 나선 무자크는 천천히 에반스를 향해 말을 몰았다. 그리고 에반스와 십여 미터까지 접근한 그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밑에서 승부를 보자.”
무자크의 요청을 에반스가 간단히 승낙했다.
“좋다. 어디서 싸우던 나야 상관없으니.”
에반스가 말에서 내리자 무자크가 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무자크는 언제나처럼 첫 공격으로 에반스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의 철퇴는 정말 빨랐다. 그래서 무기로 막지 않고 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엄청난 힘이 실린 철퇴를 쳐 내려면 묵직한 중무기가 필요했다. 에반스의 손에 들린 검 따위로 그의 철퇴를 막아 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거리가 좁혀지고 철퇴의 공격 범위까지 에반스에게 접근하자 무자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뒈져!”
동시에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고 그의 철퇴가 어느새 에반스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서걱!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쿠쿵!
무자크가 휘두른 철퇴가 두 쪽이 나서 땅바닥에 떨어졌던 것이다. 어른 머리통만 한 통짜 쇠로 제작된 철퇴가 마치 과일이 두 쪽이 나듯 반듯하게 잘려진 채 바닥에 널려 있는 모습에 무자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무자크의 목이 따끔거렸다. 무자크가 자신의 손을 목에 갖다 대자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무자크의 목에 가는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에반스가 철퇴를 두 쪽으로 자를 때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보내 무자크의 목을 쳤던 것이다.
무자크가 믿기 힘들다는 듯 에반스를 쳐다볼 때 그의 목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오고 동시에 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데구르르!
잘린 무자크의 머리가 땅바닥을 굴러서 에반스의 발치까지 굴러 왔다. 무자크의 눈빛엔 여전히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무자크가 죽자 이번에는 무자크와 절친했던 야만족 전사가 나서려 했다.
“멈춰라.”
그때 군나르가 외쳤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지휘 망루의 부장들에게 외쳤다.
“놈은 소드 마스터다.”
군나르의 말에 부장들이 흠칫 놀란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군나르는 에반스가 오러 블레이드를 쏘아 내서 무자크의 머리를 베는 것을 보고 그가 소드 마스터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면 야만족 전사들만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째 큰 소리를 친다 싶더니…….”
“쳇, 저놈에게 완전히 당했군.”
군나르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지휘 망루 아래로 내려가는 야만족 전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