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고란족의 공주Ⅲ (68/90)

Chapter 8   고란족의 공주Ⅲ

에반스가 다시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의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사위는 어두웠다. 에반스는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까지 자지 않고 시스턴이 에반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지 않고…….”

에반스는 피곤하다는 듯 들고 있던 검을 시스턴에게 넘기고 대충 손을 씻고 세수를 한 뒤 마련된 자신의 간이침대에 누웠다.

에반스도 사람이었다. 특히 주술의 경우 정신력을 많이 소진시켰다. 정신력을 회복하는 데는 잠이 최고였다. 눈을 감자 곧 잠이 쏟아졌다. 에반스는 해가 뜨고 나서 잠에서 깼다.

서둘러 씻고 시스턴이 건넨 아침을 먹은 뒤 에반스는 일행과 함께 랄트족의 중심지로 움직였다.

어제 일로 더 이상 에반스 일행의 뒤를 쫓는 무리는 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에반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틀을 더 이동하자 드디어 랄트족의 대족장인 우툴라의 궁이 있는 중심지에 도착했다. 야만족은 수시로 중심지를 옮겼다. 때문에 그들의 중심지를 수도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수도는 한 나라의 중심으로 그 중심이 움직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야만족은 아직 중앙 집권 국가로서 그 기틀이 잡혀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랄트족의 중심지라 불릴 만큼 거대한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에반스와 일행이 나타나자 주위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여기서 어둠의 주술사들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에반스와 일행들이 중심지에 들어서고 나서 어둠의 주술사로 보이는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들을 몇 명이나 보지 않았던가?

어둠의 주술사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경비를 서던 랄트족 전사들도 경외 섞인 얼굴로 그들을 바로 도시 안으로 통과시켰다.

에반스와 일행들은 곧장 도시 번화가로 들어가서 여관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 에반스가 자신의 방으로 크루와 샘, 데릭을 따로 불렀다.

“크루. 납치된 공주의 행방부터 찾도록 하시오.”

“네.”

“샘과 데릭은 이곳에 대한 정보를 알아 와라. 세세한 것까지 놓치지 말고.”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에반스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방을 나가고 나자 에반스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에반스의 옆에서 그를 경호하던 시스턴이 물었다.

“어디 가실 겁니까?”

“그래. 여기를 한 바퀴 둘러보고 싶구나.”

그렇게 말한 뒤 에반스는 어둠의 주술사들의 전유물인 후드 달린 검은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 시스턴에게 상인들이 주로 입는 옷을 구해 오게 했다. 에반스가 그 옷을 입자 제법 그럴듯한 상인처럼 보였다.

“가자.”

에반스가 여관을 나섰다. 그런 그를 보고 어둠의 주술사들은 그가 에반스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시스턴을 보고 그가 에반스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봤다.

“에반스 님께서 어디 가시는 거지?”

“그러게.”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은 갑작스런 에반스의 외출에 의아해 했지만 그러려니 생각했다. 대주술사 윈스트런의 후계자의 일에 그들이 감히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여관을 나선 에반스는 랄트족 중심지를 돌아다녔다. 상인 복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특히 야만족의 상거래가 에반스 눈에 더 잘 띄었다.

그런데 그때 에반스의 눈이 번뜩였다. 야만족과 한창 거래를 하던 상인들 중 에반스가 아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는 즉시 그쪽으로 움직였다.

“아니, 이게 무슨 금화 하나란 거야?”

제국의 상인으로 보이는 자가 담비 가죽을 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랄트족 상인이 그 가죽을 바로 뺏었다.

“사기 싫으면 마슈.”

“쳇!”

제국의 상인은 화가 난 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때 랄트족 상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놈. 어디 아무 데나 가 봐라. 너처럼 어리바리한 놈에게 제값에 가죽을 팔 상인이 있나.”

혼잣말로 조용히 말했지만 그 소리를 못 들을 에반스가 아니었다.

‘가격 담합이 이뤄지고 있나 보군.’

그 제국 상인이 사라지고 나서 다른 제국 상인에게 랄트족 상인은 그 사분의 일 가격에 담비 가죽을 팔았다.

한마디로 그 제국의 상인에게만 가격을 높여 부른 것 같았다. 에반스는 즉시 그 상인을 따라갔다. 그런데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 제국 상인이 가격을 물으면 랄트족 상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격을 몇 배 더 불렀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 그 제국의 상인이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에반스가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제너럴 상단의 한스 님이 아니십니까?”

제국의 상인의 정체는 바로 제너럴 상단의 주인 로드릭의 셋째 아들이자 다이안의 오라비인 한스였던 것이다.

“나, 나를 아시오?”

한스가 에반스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상인 복장의 에반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하. 잘 알지요. 왜 몇 년 전 카라스 영지에서 야만족과 거래할 때…….”

“아아. 그때 말이로군. 자네도 그곳에서 장사를 한 모양이군.”

에반스가 자신보다 젊어 보이자 한스가 대뜸 말을 놓았다. 에반스는 이왕 한스와 대화를 시작한 김에 궁금한 것을 바로 물었다.

“다이안 님은 잘 계시지요?”

에반스의 물음에 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대뜸 버럭 화를 내며 에반스의 멱살을 잡았다.

“너 지금 나를 놀리는 거냐?”

에반스는 먼저 자신을 경호하고 있던 시스턴부터 말린 뒤 한스에게 말했다.

“놀리다니요? 저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겁니다.‘

“뭐? 너 그럼 수도에서 일을 모른단 말이냐?”

“네. 전 이곳에서 주로 거래를 하고 살아서 수도의 일은 잘 모릅니다.”

에반스의 말에 한스가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미안하군. 난 또 나를 놀리는 줄 알고…….”

에반스는 한스에게 잡혀 구겨진 옷을 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한스가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리고 슬쩍 에반스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보며 말했다.

“크음. 목이 말라서 영…….”

에반스는 근처를 살펴보고 술집이 보이자 한스를 그쪽으로 데려갔다. 술이 들어가자 한스가 입이 쉽게 열렸다.

“그러니까 제너럴 상단은 풍비박산 나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단 말이군요?”

“그렇지. 흑흑흑. 상단만 건재했어도 내가 지금 이 꼴은 아닐 텐데. 벌컥벌컥!”

한스는 계속 술을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하지만 다이안이 있었다면 제너럴 상단이 이렇게 쉽게 무너졌을 리 없었다.

“다이안 님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아이고. 내가 미쳤지. 그 애가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나와 다른 형제들이 그자의 말만 믿고…….”

“그자라니요?”

그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지 한스가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루키아 상단의 곤잘레스! 바로 그놈이지.”

“곤잘레스!”

곤잘레스라면 루키아 상단의 상단주이면서 에반스도 잘 아는 산체스의 아들이었다. 에반스는 왜 랄트족 상인들이 한스에게 몇 배나 비싼 가격을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이게 다 루키아 상단의 짓이 분명했다.

곤잘레스라면 제너럴 상단이 다시 재건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제너럴 상단 측 사람들이 거래하려 하면 아마도 이런 식으로 가격을 높게 부르게 만든 모양이었다.

한스가 당시 상황을 에반스에게 설명했다. 황궁에 납품되는 물건을 두고 제너럴 상단과 루키아 상단이 경쟁하게 되었고 다이안의 기지로 사실상 제너럴 상단이 납품하기로 거의 확정된 순간에 곤잘레스가 다이안의 오라비들을 끌어들여서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안 그래도 제너럴 상단의 후계자로 유력했던 다이안이 이번 거래까지 성공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제너럴 상단을 뺏기게 생긴 다이안의 오라비들이 결국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납품할 물품들에 장난을 쳤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일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서 황궁에서 제너럴 상단을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상단주인 로드릭과 그 일을 주관했던 다이안을 비롯해서 그 식솔들 모두가 잡혀서 황궁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상단주인 로드릭은 자신의 재산 전부를 황제에게 헌납하기로 하고 식솔들의 생명을 구했다.

뒤에 모든 것이 루키아 상단의 곤잘레스의 음모임을 알게 된 로드릭은 화병으로 드러누웠고 며칠 뒤 죽고 말았다.

상계의 거두였던 로드릭이 죽자 제너럴 상단도 완전히 기울었다. 그렇게 제국 수도의 상권은 완전히 루키아 상단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다이안을 비롯한 제너럴 상단 식솔들이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노력했지만 제국에서는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바로 제국 제일 상단인 루키아 상단이 그들의 장사를 방해했던 것이다. 결국 다이안은 제국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키아 상단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이제 재기할 가능성도 사라졌단 말이로군요?”

에반스가 머릿속에 쾌활했던 그 다이안을 떠올리며 한스에게 물었다.

“재기? 크크크. 웃기는 소리지. 젠장…….”

술에 취한 듯 한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때 에반스가 한스에게 슬쩍 물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응?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전에 다이안 님께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아까 보아하니 가죽을 사시려고 하시던데. 제가 싼 가격에 가죽을 구입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네. 필요하신 가죽 양이 얼마입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한스가 황급히 자신이 사려는 가죽 품목을 얘기했다. 그 품목을 듣고 기억한 에반스가 웃으며 한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그 품목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오. 신이시여. 고맙네. 정말 고마워.”

술이 다 깬 듯 한스가 에반스의 손을 잡고 울면서 고개를 숙였다.

한스와 헤어진 에반스는 아까 담비 가죽을 몇 배나 비싸게 불렀던 랄트족 상인의 가게로 향했다.

“이거 담비 가죽 맞나?”

에반스가 담비 가죽을 들어 보이자 랄트족 상인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요. 최고급 담비…… 헉!”

그런데 에반스의 손에 들린 담비 가죽이 싸구려 쥐 가죽으로 변했다. 에반스는 그 쥐 가죽을 휙 던져 놓고 다른 비싼 가죽을 챙겨 들었다. 하지만 에반스가 손에 쥐면 그 가죽은 쥐 가죽으로 변했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랄트족 상인은 그제야 에반스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자네는 평생 싸구려 쥐 가죽이나 팔아먹고 살아야겠군.”

“헉!”

그 말에 랄트족 상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 제발. 뭐든 다 할 테니…….”

랄트족 상인이 애원을 하자 에반스가 술집에서 한스가 말한 가죽 품목을 읊었다.

“내일 아침까지 준비되지?”

“다, 당연하지요. 그런데…….”

“다 얼마야?”

“잠시만요.”

서둘러 그 품목의 가죽 가격을 계산한 후 상인이 가격을 말했다.

“금화 다섯 개하고 은화 두갭니다.”

“금화 다섯 개!”

“네?”

“싫어?”

“아, 아닙니다.”

금화 5개면 정확히 원가였다. 상인에게 남는 것은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인은 차마 싫은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에반스는 그 상인에게 금화 5개를 주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한스가 있는 여관으로 그 가죽들을 배달해 줄 것을 지시했다.

묵묵히 에반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시스턴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 상인과 정말 아는 사이입니까?”

“응. 카라스 영지에서 본 적이 있다.”

“다이안이란 여자도 말이죠?”

시스턴이 다이안을 거론하자 에반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래. 꽤 괜찮은 여자였지. 똑똑하고 이해심도 깊고…….”

“예쁘고 말이죠?”

시스턴의 말에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아닙니다. 특별히 신경을 쓰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시스턴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시스턴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에반스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니다.”

“네. 네.”

시스턴이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에반스는 좀 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날이 저물려 하자 묵고 있던 여관으로 움직였다. 에반스가 여관에 도착하자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 3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반스는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됐지?”

에반스의 물음에 먼저 크루가 대답했다.

“아가씨께서는 랄트족의 대족장인 우툴라의 궁에 계신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궁에 있단 말이지?”

“네.”

“그 궁의 배치도와 병력 상황은?”

“여기 있습니다.”

크루가 자세한 궁의 그림이 그려진 지도를 에반스에게 건넸다. 그 지도에는 랄트족 전사들이 어디에 얼마씩 배치되어 있는지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지도를 펼쳐 보고 에반스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됐군. 수고했소.”

에반스가 크루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어 샘과 데릭을 쳐다보자 샘과 데릭이 꽤 많은 양의 서류를 에반스에게 내놓았다.

“최근 여기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 서류들을 보고 에반스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큰 건수들만 간추려서 얘기해 봐.”

에반스의 말에 샘이 최근 랄트족 중심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몇 가지 에반스에게 얘기했다. 에반스는 그중에서 브리테가 환영 나온 우툴라의 자식들 중 직접 선택했다는 모둘라란 자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 자에 대해 알아봐. 그리고 가능한 빨리 알려 줘.”

“네.”

에반스는 세 사람을 내보낸 뒤 시스턴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막 끝났을 때 샘이 에반스를 찾아왔다.

“이것이 모둘라란 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에반스는 샘이 건넨 서류를 살폈다. 그리고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쓸 만한 녀석이로군.”

에반스가 말하는 쓸 만하다는 소리는 이용 가능성이 많다는 소리란 것을 시스턴도 잘 알았다. 에반스를 따라다니면서 시스턴도 그 정도 눈치는 생긴 것이다.

“준비할까요?”

시스턴의 물음에 에반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준비해라.”

잠시 뒤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두 사람이 여관 밖으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랄트족 대족장 우툴라는 성인이 되면 자식들을 궁 밖으로 내보냈다. 모둘라 역시 성인이 되자마자 궁을 나와서 지금의 저택을 마련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외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 모둘라는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다른 형제들보다 더 빨랐다. 그래서 랄트족 권력자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모둘라도 잘 알았다. 이게 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모둘라는 뒷배경이 없었다. 그러니 권력자들은 모둘라를 밀어줘도 그만큼 남는 것이 많다는 생각에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다음에는 내가 내 집으로 초대하도록 하지.”

“불러만 주십시오.”

모둘라는 오늘도 자신을 찾아온 한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이 대족장만 될 수 있다면 머리 조아리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모둘라였다.

특히 오늘 모둘라가 만난 인물은 부친인 우툴라가 최근 가장 신임하는 수하였다. 바로 브리테를 납치하는 데 성공한 맨도사였던 것이다. 맨도사 역시 모둘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맨도사가 이렇게 직접 모둘라를 직접 찾아온 것은 다 브리테 덕분이었다. 브리테가 모둘라와 같이 궁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되고 나서 궁 내부에 벌써 브리테가 모둘라와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브리테와 결혼하게 되면 일단 우툴라의 신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란족의 일은 전부 모둘라가 전담하게 될 테니 그 위상 역시 우툴라 못잖을 테고 말이다. 사실상 우툴라의 후계자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앞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브리테의 마음만 잘 잡게. 그럼 대족장의 자리는 자네 것일 테니 말이야.”

맨도사가 떠나기 전 의미심장한 말을 모둘라에게 건넸다. 모둘라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맨도사가 떠나고 나자 모둘라의 웃고 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제 놈이 나에게 대족장 자리를 내줄 것처럼 얘기하는군. 퉤!”

어차피 서로 이용하는 관계였다. 신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모둘라는 맨도사가 떠난 방향을 향해 시원하게 침을 뱉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랄트족의 대족장인 우툴라의 궁만큼은 아니지만 모둘라의 저택도 꽤 훌륭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어디 끝이 있던가? 오늘따라 자신의 저택이 좁게 느껴지는 모둘라였다. 그때였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모둘라에게 다가가서 빨간 쪽지를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

“그, 그것이 궁에서…….”

“궁?”

의아해 하던 모둘라가 쪽지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곧 심각하게 변했다. 쪽지에는 궁에 있는 모둘라가 잘 아는 여인이 그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그의 집 근처에 와 있다는 것이다. 고심하던 모둘라는 일단 그녀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가 쪽지를 건넨 시종에게 말했다.

“조용히 내 방으로 모셔 와라. 그리고 이후 누구도 저택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네.”

그 시종이 나간 뒤 얼마 후 붉은 천으로 몸 전체를 감싼 여인이 모둘라의 저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곧장 모둘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듯 자연스럽게 방 안에서 붉은 천을 벗어 소파 위에 던지며 말했다.

“오랜만이죠?”

“그, 그렇소. 유레카.”

그녀는 여전히 모둘라의 가슴을 뛰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냘픈 여린 몸매에 백색의 투명한 피부, 장밋빛 입술은 한때 그가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부친인 우툴라의 첩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처음 그녀가 모둘라를 유혹했을 때 모둘라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는 그녀의 깊은 유혹의 늪에 빠진 뒤였다.

“다,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구려.”

모둘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붉은색은 확실히 그녀와 가장 잘 어울렸다. 마치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색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 모둘라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뱀보다 차갑고 교활하며 냉정하다는 것을 모둘라도 잘 알았다. 이미 그도 몇 차례 그녀에게 이용당해서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또 그녀를 보게 되면 그런 그녀의 단점은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호호호. 고마워요. 모둘라 당신도 이제 제법 멋진 남자가 되었군요. 소문은 잘 듣고 있어요. 고란족 대족장의 여식과 아주 친하다면서요?”

약간 질투 섞인 그녀의 말에 모둘라는 자신도 모르게 희열마저 느꼈다.

“뭐 좀 아는 사이일 뿐이요.”

모둘라가 겸손을 떨자 유레카가 눈빛을 빛내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그녀에게서 모둘라는 끈적끈적한 유혹의 눈길을 느꼈다.

스르륵!

어느 사이 그녀가 입고 있던 붉은 드레스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 안 마법 등불 아래에서 아름다운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하지만 모둘라도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 순진했던 그가 아니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그 용건부터 듣고 싶소.”

모둘라가 그녀의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잉. 모둘라. 너무한 거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말이에요.”

그녀가 모둘라에게 안겨 왔다. 그녀의 살결이 그의 손을 스치면서 모둘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유혹의 향기가 진하게 그의 코를 후벼 팠다.

“왜 이러는 거요. 만약 이 사실을 아버지께서 알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대산 대신 그녀의 몸이 더욱더 모둘라에게 밀착되었다. 그녀의 밝은 금발머리가 그녀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에서 평소 모둘라가 좋아하는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 냄새에 모둘라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점차 달아오른 그녀의 몸을 모둘라가 거칠게 껴안았다.

“아이. 천천히…….”

그녀가 애교 넘치는 콧소리에 모둘라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긴 열락의 시간이 스치듯이 지나고 거친 숨소리와 비릿한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잠시 뒤 유레카가 모둘라가 가슴을 다시 파고들자 모둘라가 물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요?”

대답 대신 그녀가 되물었다.

“오늘 맨도사를 만났죠?”

“그렇소.”

모둘라가 대답하자 그녀가 모둘라의 가슴을 만지며 말했다.

“당신이 제 오라비를 도와서 맨도사를 처단해 줬으면 좋겠어요.”

“미쳤군.”

발끈하며 모둘라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유레카가 먼저 두 손으로 모둘라의 목을 감쌌다. 결국 모둘라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유레카와 서로 마주 보았다.

“나를 파멸시키고 싶소?”

모둘라의 말에 유레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뇨. 당신을 위해 이러는 거예요.”

유레카의 말에 모둘라가 기가 차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나를 위해?”

“그래요. 당신을 대족장으로 만들어 줄게요.”

유레카의 오라비인 호레비는 개혁 성향이 강한 맨도사와 달리 트렌시아 제국과 다분히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야만족이 트렌시아 제국을 침공하려는 것이 탐탁할 리 없었다.

하지만 맨도사가 고란족의 대족장인 수아레스의 여식인 브리테를 납치해 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대로라면 야만족이 곧 트렌시아 제국을 침공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호레비는 모둘라와 손잡을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란 거요?”

“그녀를 고란족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좀 도와주세요.”

유레카의 말에 모둘라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순간 할 말도 잊었다. 그때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형인 우순바가 죽고 나서 요즘 대족장이 많이 힘들어 하고 있어요. 건강 상태도 나빠지고 있고 말이죠. 이러다 덜컥 죽기라도 한다면…….”

“무, 무슨 소리요?”

“궁은 이미 나와 내 오라비 쪽 사람들로 장악된 상태에요.”

“지, 지금 나를 대족장의 자리에 올려 주겠다는 거요?”

그녀의 제안이 너무 파격적이었다.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유혹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다시 뜨거워진 유레카의 몸이 모둘라를 감쌌다.

“저, 정말이요?”

모둘라의 물음에 유레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 그녀의 손이 모둘라의 몸을 애무했다.

“그, 그만.”

모둘라가 몸을 뒤틀며 말했다. 하지만 전혀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모둘라의 아랫도리로 내려갔다.

“헉!”

“호호호.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녀의 몸이 부드럽게 꿈틀거리자 뜨거운 열기가 다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두 나신이 축 늘어져 잠들었을 때였다.

스르르르!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두 사람이 모둘라의 방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둘 중 덩치가 더 큰 자가 입을 열었다.

“아깝군요.”

“뭐가?”

“좀 더 빨리 바꿨으면 스승님께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덩치 큰 자가 침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 옆의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가 혀를 찼다.

“쯧쯧. 생각하는 것 하고는…….”

하지만 정작 그 남자 역시 늘씬하게 뻗은 유레카의 아름다운 몸매에서 잠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스승님. 어서 바꾸시죠. 시간 없습니다.”

그때 덩치 큰 남자가 말했다.

“알았다.”

두 침입자는 바로 에반스와 시스턴이었다. 에반스는 모둘라의 저택으로 가는 도중 자신의 계획을 시스턴에게 얘기해 주었다. 바로 자신이 모둘라로 변해서 브리테를 탈출시킬 계획을 말이다.

모둘라가 맨도사를 만나고 나서 에반스는 그 계획을 시행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유레카가 찾아오면서 일이 꼬인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에반스와 시스턴은 아주 찐한 베드신을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구경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 과정에서 에반스는 유레카가 제시한 조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지금 모둘라로 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가 눈짓을 보내자 시스턴이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볍게 주먹으로 모둘라의 머리를 내려쳤다.

퍽!

모둘라는 그대로 기절을 했고 그런 발가벗은 모둘라를 시스턴이 들쳐 멨다. 그리고 에반스를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잘해 보십시오.”

장난스러운 시스턴의 표정에 에반스가 발끈하며 주술로 그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헉!”

그런데 시스턴이 모습을 드러낸 곳이 하필 돼지우리가 있는 지붕이었다. 짚으로 대충 덮여 있던 지붕이 두 사람의 무게를 견뎌 낼 리 없었다.

“으아아악!”

시스턴과 벌거벗은 모둘라는 그대로 돼지우리 안으로 추락했다.

철퍼덕!

돼지 똥오줌이 가득한 우리에 떨어진 시스턴을 돼지들이 반겼다.

“꿀꿀꿀!”

“끄응!”

괜히 에반스를 놀렸다가 봉변을 당한 시스턴은 앞으로 입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돼지 똥오줌에 범벅이 돼서 그 모습도 알아볼 수 없게 된 모둘라를 들쳐 메고 묵고 있던 여관으로 향했다.

이때 에반스는 모둘라로 변신해서 훌러덩 옷을 벗고 모둘라 대신 침대에 누웠다. 두 차례 정사 뒤라 침대에서 비릿한 향이 강하게 났다.

“우우웅!”

그때 유레카가 모둘라의 품에 안겨 왔다. 부드러운 여체가 안겨 들자 에반스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흠칫 놀랐다. 잠시 뒤 살짝 눈을 뜬 유레카가 에반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결정했나요?”

“그, 그렇소.”

“어떻게요?”

“당신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소.”

에반스의 대답에 유레카가 큰 소리로 웃었다.

“호호호. 잘 생각하셨어요.”

유레카는 대답을 듣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치 이제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말이다. 붉은 드레스를 다시 입고 붉은 천을 챙겨 든 그녀가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그의 뺨에 뽀뽀를 하며 말했다.

“이제 갈 시간이에요. 모둘라.”

에반스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인 그녀는 바로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총총히 걸어서 모둘라의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에반스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음 날 아침 에반스는 시스턴과 만나 같이 랄트족의 궁으로 향했다.

“무슨 냄새냐?”

시스턴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자 에반스가 물었다. 그러자 시스턴이 투덜대며 말했다.

“누구 때문에 돼지우리에서 좀 뒹굴어서 그렇습니다.”

시스턴의 말에 에반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까불어.”

억울하다는 듯 무슨 말을 하려던 시스턴이 결국 참으며 말했다.

“휴우. 네. 제가 까불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죠.”

단단히 삐친 시스턴을 보고 에반스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 끝내고 영지로 돌아가면 참한 아가씨 소개시켜 주지.”

“헉! 저, 정말이지요?”

“그래.”

순간 입이 쭈욱 찢어진 시스턴을 보고 에반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뒤 에반스와 시스턴이 궁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궁을 지키고 있던 랄트족 전사들이 에반스를 보고 먼저 인사를 했다. 에반스는 여전히 모둘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고 많네.”

랄트족 전사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에반스와 시스턴은 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크루에게서 궁의 배치도를 받아 숙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에반스와 시스턴은 거침없이 브리테가 있는 궁으로 움직였다.

브리테가 기거하는 궁에는 그동안 모둘라가 많이 찾아왔는지 호위 병력과 시녀들이 먼저 인사들을 했다. 잠시 뒤 에반스가 브리테의 방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브리테가 먼저 에반스에게 인사를 했다. 에반스도 한눈에 브리테를 알아봤다. 그녀의 어미인 리오나와 브리테는 많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아. 네. 아가씨께서도 잘 주무셨습니까?”

그때 브리테가 눈빛을 빛내며 에반스에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네?”

에반스가 의아해 하자 브리테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은 모둘라가 아니에요. 소리치기 전에 당신이 누군지 밝히세요.”

브리테의 말에 에반스가 놀랍다는 눈으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소?”

“느끼한 모둘라는 저를 아가씨라 부르지 않아요. 공주님이라 부르지.”

브리테의 말에 에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시인했다.

“맞소. 나는 모둘라가 아니요.”

그 말이 끝나자 에반스가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브리테를 보고 말했다.

“반갑소. 나는 에반스요.”

“혹시 어둠의 주술사인가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고 브리테가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렇소.”

“아! 그럼 스승님께서 보내셔서 오신 건가요?”

“으음. 그건 아니요. 크루는 내 수하니 말이요.”

“네? 스승님께서 수하라면…… 헉! 서, 설마 당신이 대주술사 윈스트런 님의 후계자?”

납치되기 전 크루에게서 우순바를 죽인 대주술사의 후계자가 고란족에 올 거란 말을 브리테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소. 내가 대주술사 윈스트런의 후계자요.”

굳이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에반스가 사실대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런 에반스를 보고 브리테가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윈스트런의 후계자라면 야만족에 새로운 지배자가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란족이든 랄트족이든 윈스트런 앞에서는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바바리안의 대영웅 윈스트런의 후계자를 야만족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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