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고란족의 공주Ⅰ (66/90)

Chapter 6   고란족의 공주Ⅰ

고란족 대족장인 수아레스의 여식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 맨도사는 브리테를 데리고 랄트족의 중심지로 움직였다. 목책으로 두른 거대한 야만족의 대도시로 브리테를 태운 마차가 당도하자 그녀를 환영 나온 젊은 랄트족 전사들이 그녀를 맞았다.

바로 랄트족 대족장인 우툴라의 아들들이었다. 우툴라는 브리테가 도착하기 전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들을 모아 놓고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했다.

아무리 약탈혼이라고 해도 고란족 대족장의 딸과 신분이 어울리지 않는 자는 아예 결혼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때문에 브리테의 짝은 오직 랄트족의 대족장인 우툴라의 아들들 중에서 골라야 했다. 게다가 먼저 결혼한 아들들도 역시 배제되었다. 기혼자 역시 고란족에게 결혼 무효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

다행히 랄트족 대족장인 우툴라에게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들이 많았다. 그 아들들에게는 이건 부친인 우툴라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모두 다 안달이 나서 브리테를 기다렸다.

달칵!

마차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브리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 모습을 보고 우툴라의 아들들이 모두 넋을 잃었다. 아름답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처럼 아름다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 뇌리에는 어떻게 하면 브리테에게 잘 보일까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브리테의 실물을 보고 우툴라의 아들들은 그런 생각조차 망각하고 브리테를 보는 데만 열중했다.

자신을 보고 턱을 쩌억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는 우툴라의 아들들을 보고 브리테가 살짝 볼이 부풀렸다. 그 모습도 너무 귀여워서 오히려 우툴라 아들들이 더 브리테에게 넋이 나갔다.

“공주님. 어서 오십시오. 저는 모둘라라고 합니다.”

그때 우툴라의 아들 중 하나가 나서서 브리테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 그를 지켜보고 맨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툴라의 아들들 중 가장 우툴라와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모둘라였던 것이다. 모둘라는 맨도사와도 친분이 깊었다.

“공주라니요. 과분하신 말씀이십니다.”

모둘라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브리테가 말했다. 하지만 자신을 공주라 불러 준 모둘라에게 관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고란 족의 대족장이신 수아레스 님께서는 가히 왕이라 불려도 좋으실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그분의 여식이신 브리테 님께서도 공주님으로 불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칭찬은 오우거도 춤추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브리테도 자신에 이어서 자신의 부친인 수아레스까지 왕으로 추켜세워 주는 모둘라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모둘라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시다면 여기 계신 분들도 모두 왕자님들이시군요. 랄트족의 대족장님께서도 왕이라 불리실 만큼 영웅이시니 말이에요.”

브리테의 말에 주위 우툴라의 아들들이 모두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들이 왕자라니 말이다.

그때 브리테가 모둘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모둘라 님. 저를 부디 랄트족의 대 영웅이신 우툴라 님께 안내해 주시겠어요?”

브리테의 요청에 모둘라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물, 물론이지요. 저를 따르시지요.”

모둘라가 앞장을 서서 우툴라가 있는 랄트족의 궁으로 브리테를 안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우툴라의 아들들은 질투 섞인 눈총으로 모둘라를 쏘아보았다.

반면 모둘라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오시느라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가는 도중 모둘라가 브리테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브리테는 가볍게 미소만 지어 보이고 모둘라의 대답에 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모둘라의 얼굴에 다시 긴장감이 흘렀다.

브리테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모둘라가 골머리를 아파하고 있을 때 어느덧 랄트족의 대족장이 기거하고 있는 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란족의 중심지에 무사히 도착한 에반스와 일행은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오오. 윈스트런의 후계자시여.”

에반스를 발견한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일제히 에반스 앞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최고의 존경을 몸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었다.

“됐다. 그만들 일어나라.”

에반스의 말에 어둠의 주술사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얘기는 들었다. 이곳 고란족 대족장의 여식이 랄트족에 납치되었다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 일로 대족장인 수아레스가 주술사들을 소집시켰고 저희 어둠의 주술사들도 그 부름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납치된 브리테의 스승인 어둠의 주술사가 나서서 에반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에반스가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대주술사의 후계자인 자신 앞에서 마치 그 수하들이 고란족의 대족장의 수하인 것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어둠의 주술사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후계자님께서 오셨으니 이제 모든 것은 후계자님의 뜻에 다르겠습니다.”

그 말에 에반스가 나머지 어둠의 주술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나 아닌 그 누구 앞에서도 머리를 숙여서는 안 될 것이다.”

에반스의 말에 어둠의 주술사들이 모두 감동받은 듯 감격 어린 눈으로 에반스를 우러러보았다. 에반스의 발언은 다분히 위험스런 소리였지만 대주술사의 후계자다운 말이었다.

대주술사 윈스트런이 누구던가? 그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바바리안이었다. 지상의 어떤 왕도 그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당시 주술사들의 입지가 어떠했을지는 굳이 말로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주술사의 시대가 다시 오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반스는 시스턴과 같이 어둠의 주술사들을 데리고 고란족의 대족장이 있는 궁으로 움직였다.

“아니 저들은…….”

사라졌던 어둠의 주술사들의 등장에 다른 주술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 몇몇 주술사들은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아마도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심어 놓은 첩자들인 모양이었다.

일반 주술사들과 어둠의 주술사는 그 영향력이 달랐다. 어둠의 주술사들의 등장에 당장 수아레스의 궁이 발칵 뒤집어졌다. 궁 주위로 수천 명의 고란족 전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만큼 어둠의 주술사들은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긴장시킬 정도로 강했다.

이어서 궁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나는 대족장이신 수아레스 님의 수하인 레고르다. 어둠의 주술사들이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인가?”

레고르는 어둠의 주술사들을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자들로 대했다. 하긴 그동안 레고르가 상대했던 주술사들은 모두들 레고르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러니 레고르로서는 당연한 말과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의 주술사들, 특히 그들의 주군인 에반스에게는 상당히 신경 거슬리는 행동이었다. 에반스가 아무 말 없이 한 손을 내밀었다.

펑!

하얀 연기와 함께 레고르가 사라졌다.

개골개골!

레고르가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개구리가 한 마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헉!”

주위 주술사들과 고란족 전사들 모두 경악하며 놀랐다.

“서, 설마…….”

그때 에반스가 어둠의 주술사 샘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샘이 나섰다.

“저 개구리를 당장 치우고 다른 예의를 아는 자를 나오라 하라.”

샘의 말에 고란족 전사들이 개구리를 들고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나는 대족장의 신하인 무스구다. 어찌 대족장의 신하를 개구리로…….”

펑!

무스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커다란 뱀이 똬리를 틀고 혀를 연방 내밀고 있었다. 그때 샘이 다시 나섰다.

“고란족은 예의란 것을 모르는 구나.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만약 이번에도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면 다음은 고란족 대족장이 개로 변할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 주위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어졌다. 병사들은 뱀으로 변한 무스구를 들고 다시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궁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고란족 대족장의 아들인 유스마입니다. 부친께서 귀인을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유스마는 고란족 대족장인 수아레스가 특별히 아끼는 아들이었다. 그래서 차기 대족장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유스마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개구리나 뱀으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때 에반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샘이 대답했다.

“갑시다.”

다행히 이번엔 상대가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샘이 유스마와 같이 앞장을 섰다. 그리고 시스턴이 에반스의 호위를 자처했다.

“크루. 그대만 나를 따라오라.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려라.”

어둠의 주술사들을 우르르 다 데리고 궁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납치된 브리테의 주술 스승이었던 크루를 데리고 에반스는 고란족 대족장의 궁 안으로 들어갔다.

고란족 대족장의 궁은 겉보기와 달리 그 안은 화려했다. 특히 그 내부는 무장한 고란족 전사들 이외에 모두가 다 여자들이었다.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말이다.

유스마의 안내를 받은 에반스 일행은 금과 은으로 장신된 하얀 문 앞에 섰다. 유스마가 뭐라 얘기하자 문이 열렸다.

그러자 제법 널찍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렌시아 제국 황제의 대전에 버금갈 정도로 잘 지어진 공간이었다. 그 안에는 수십 명의 고란족 전사들이 있었고 그들 맨 위 옥좌에 고란족 대족장인 수아레스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 커다란 개구리와 뱀이 있었다. 에반스가 개구리와 뱀으로 만든 레고르와 무스구였다.

“가시지요.”

유스마와 함께 에반스 일행이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화려한 하얀 문이 다시 닫혔다. 유스마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수아레스가 말했다.

“너는 또 뭐로 변해 올지 궁금했는데 다행이로구나.”

수아레스의 말에 유스마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님. 어둠의 주술사를 데려왔습니다.”

유스마가 옆으로 물러나자 에반스와 그 일행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어둠의 주술사들 중 누구도 대족장인 수아레스를 보고 머리를 숙이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배포 좋은 고란족 한 전사가 나섰다.

“무슨 짓이냐? 여기가 어느 안전인 줄 알고. 어서 무릎을 꿇지 못…….”

펑!

“까악까악!”

고란족 전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까마귀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헉!”

그것을 보고 대전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동시에 대족장의 호위들이 옥좌에 앉은 수아레스 주위를 에워쌌다. 그때 샘이 대전에 대고 외쳤다.

“여기 계신 이분은 대주술사 윈스트런 님의 후계자이시다. 감히 누가 그분과 그분의 수하인 주술사에게 반말을 지껄인단 말이냐?”

대주술사 윈스트런이란 말에 대전이 다시 웅성댔다.

“미친놈들이군. 윈스트런의 후계자라니!”

그때 옥좌에 앉은 수아레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펑!

“멍멍멍!”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아레스가 사라지고 옥좌에 웬 늙은 개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순간 대전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이놈들. 어서 대족장님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지 못하겠느냐?”

수아레스를 호위하던 고란족 전사가 에반스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 결과 그 전사도 개로 변했다.

“이놈들. 그래도 모르겠느냐? 이분이 윈스트런 님의 후계자임을.”

샘이 단호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고란족 전사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반가량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에반스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반스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꿇어라!”

그의 절대 명령이 떨어지자 에반스를 제외한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에반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개로 변해 있던 고란족 대족장 수아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옥좌에서 내려온 수아레스는 그 옆에 주저앉았다.

에반스는 천천히 대전을 걸어 옥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비어 있던 옥좌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퍼퍼퍼펑!

에반스에 의해 변해 있던 고란족들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수아레스만 빼고 말이다. 수아레스는 옥좌에 앉은 에반스 옆에 마치 애완견처럼 앉아 있었다.

“나를 시험하려 들지 마라. 두 번 용서는 없을 것이다.”

에반스가 대전에 대고 경고했다. 그러자 대전에 있던 고란족들이 모두 움찔하며 에반스 눈치 보기 바빴다.

얼마 뒤 에반스는 수아레스에게 건 주술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수아레스에게 옥좌도 돌려주었다. 대신 수아레스의 옆자리에 에반스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딸이 납치되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에반스와 수아레스는 서로 존대를 했다. 대전을 차지하고 옥좌에 앉았다고 해서 에반스가 고란족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어째든 지금의 고란족을 지배하는 자는 수아레스였다.

에반스는 그 수아레스를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러기 위해서 수아레스가 원하는 것 정도는 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걱정 마시오. 내가 데려올 테니.”

“오오. 그래 준다면야 큰 근심을 덜게 되었소. 하하하.”

자신 있게 대답하는 에반스를 보고 수아레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윈스트런의 후계자가 나섰으니 이제 브리테를 데려오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귀인들을 궁의 별관으로 안내해라. 내 연회를 베풀 것이다.”

별관이 어딘지 모르지만 에반스 일행은 객실로 보이는 화려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연회는 몇 시간 뒤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여기서 쉬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유스마가 나가자 에반스가 브리테의 주술 스승이었던 크루에게 물었다.

“수아레스는 어떤 자인가?”

“대족장 수아레스는 의심이 많은 자입니다. 그리고 속도 좁은 편입니다.”

브리테를 가르치며 수아레스를 가까이서 지켜본 크루는 비교적 정확히 수아레스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가만있지는 않겠군.”

“네. 하지만 브리테를 구하기 전에 무슨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머리를 쓰는 건 비상하니 말입니다.”

쿠르의 말에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니 더 시험해 보고 싶겠지. 방법은 많으니까.”

대족장 수아레스 곁에는 수하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하들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까지 수아레스가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즉, 수아레스는 언제든 수하들을 이용해서 에반스와 일행들을 시험하려 들 거라는 것이 에반스의 생각이었다.

“수아레스 그자를 없애 버리고 여길 장악해 버리지요?”

시스턴의 말에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길 장악해서 뭐하려고? 지금 내 영지도 관리하기 벅찬 처지에 말이다.”

“하지만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뭐 그것까지야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파리 떼야 잡아도 되고 그냥 무시해도 그만이니.”

그렇게 말한 뒤 에반스는 샘에게 궁 밖에 있는 어둠의 주술사들에게 숙소로 돌아가서 기다릴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객실의 화려한 침대에 누워서 태평하게 잠을 잤다.

에반스가 조용히 잘 수 있게 나머지 일행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잠이 몰려오자 그들은 앉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모두들 수마에 사로잡힌 것이다.

“쿨쿨쿨!”

잠시 뒤 잠을 견디지 못한 객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들 깊이 잠들었다.

대전에서 나선 수아레스는 자신의 거처로 움직였다. 그가 기거하는 궁에는 수백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오직 그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지내고 있었다.

수아레스는 보기 드문 정력의 소유자로 매일같이 자신의 침실로 여자들을 몇 명씩 불러서 즐겼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가 나타나자 여자들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교태를 떨었다. 하지만 지금 수아레스는 여자와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리오나를 불러라.”

리오나란 말에 여자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뒤 가슴이 패이고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걸친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수아레스 앞에 나타났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리오나. 어서 오너라.”

수아레스가 두 팔을 벌리자 리오나는 알아서 수아레스의 품에 안겼다. 리오나는 15살 때부터 시작해서 무려 20년 동안 수아레스의 총애를 받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바로 브리테의 생모이기도 했다.

30대 중반의 그녀는 여전히 20대 초반의 외모로 수아레스에게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 좀 더 은밀한 곳으로 가자.”

궁에는 많은 방이 있었다. 간혹 수아레스가 그녀와 중요한 일로 둘만 대화를 나누길 원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리오나는 수아레스를 만나기 전 항시 방 하나를 따로 준비해 두었다. 수아레스의 말에 리오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따라오세요.”

리오나가 앞장을 섰다. 그리고 수아레스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 이외의 그 누구도 그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수아레스를 데리고 궁 지하로 내려간 리오나가 마법의 빛을 발하는 등불을 들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복잡한 복도를 따라 이리저리 걸어 들어가자 그 끝이 막힌 곳이 나타났다. 그리고 옆쪽에는 섬세한 세공의 은으로 장식된 문이 달려 있었다.

“드시지요.”

리오나는 문을 연 채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한쪽에 서서 수아레스가 방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수아레스가 들어가자 조용히 따라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 그들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오늘 그들이 이 방에서 묵는다는 것을 모르게 되어 있었다.

“너도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윈스트런의 후계자란 자가 나타났다. 그자에게 브리테를 구해 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더구나.”

“잘되었네요. 그자를 이용해서 브리테를 구할 수 있다면 말이죠.”

수아레스는 리오나의 도움을 받아서 웃옷을 벗었다. 리오나는 그 옷을 침대 옆에 있던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다시 수아레스가 몸을 씻는 것을 시중들었다.

“어둠의 주술사들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봐서 제법 실력 있는 자인 모양인데 그래도 랄트족에는 우순바가 있지 않은가?”

수아레스의 말에 그의 등을 씻고 있던 리오나가 말했다.

“어차피 실패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우리야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고 말이죠.”

“그렇긴 하지만 괜히 그랬다가 랄트족에서 우리 브리테를 괴롭히기라도 한다면…….”

수아레스의 말에 리오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브리테는 현명한 아이에요. 그러니 잘 처신할 거라 믿어요. 혹시 문제가 생겨 여기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그 아이라면 랄트족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아니 염려하실 거 없어요.”

몸을 다 씻고 나서 수아레스가 침대에 눕자 곧 그 옆으로 리오나가 알몸으로 안겨 왔다. 수아레스는 리오나를 안고 가볍게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수아레스는 리오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다시 서서히 움직여 그녀의 귀를 가볍게 핥았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도 놈이 어느 정도 능력이 되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겠지?”

“네. 그러실 줄 알고 제가 이미 조치를 취해 두었어요.”

“과연 리오나로군. 그래 어떻게 했지?”

“우선 유스마에게 일을 맡겼어요. 그리고 그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암살자들도 준비해 두었고요.”

“그들이 잡히면?”

“호호호. 잘 아시면서…….”

리오나가 유혹 어린 시선으로 수아레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아래로 향했다.

“후후후. 나야 모른 척 잡아떼면 된단 말이로군.”

“맞아요.”

잠시 뒤 흥분한 수아레스가 리오나를 덮쳤다. 그리고 방 안에 한바탕 훈풍이 불어닥쳤다.

에반스와 일행들이 있던 객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유스마가 고란족 전사들과 같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에반스와 그 일행들을 객실 안까지 안내했던 친절하고 예의 발랐던 유스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시커먼 것들이 겁도 없이 잘도 이 안으로 기어 들어가더니 꼴좋다. 뭣들 하느냐? 어서 놈들을 묶어라.”

유스마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란족 전사들이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앉아서 자고 있던 쿠르와 샘, 그리고 시스턴을 잡으려 했다. 그때였다.

“경고했을 텐데.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말이다.”

“헉! 어떻게…….”

놀란 유스마가 경악에 물은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때 에반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면향 말인가?”

에반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환기구에서 뿜어져 나온 수면향으로 인해 에반스 일행들은 모두 깊게 잠든 상태였다. 하지만 수면향 따위에 당할 에반스가 아니었다. 그의 몸은 어둠의 주술사들의 극독에 면역력이 생겨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굴복했지만 어둠의 주술사들 중 누가 언제 배신할지 몰랐다. 그래서 항상 그의 몸 주위를 감시하는 주술을 걸어 둔 터였다. 그 감시 주술을 통해 천장에서 수면향을 피우는 것을 이미 에반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는 벌써 시작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수아레스가 시킨 일인가?”

에반스의 물음에 유스마가 소리쳤다.

“수면향을 마신 이상 괴이한 주술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저놈부터 잡아라.”

유스마의 외침에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십여 명의 고란족 전사들이 에반스를 잡기 위해 침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에반스도 언제까지 사람을 미물로 바꾸는 주술만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죽여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독심을 에반스는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자비를 베풀 때가 아니었다.

“여긴 좀 덥군.”

에반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일렁거렸다. 에반스의 주술이 시전 되자 방 안이 겨울이 온 것처럼 냉기가 감돌았다.

“뭐, 뭐야…….”

“으아아악!”

에반스 주위로 접근했던 고란족 전사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 몸이 바닥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사, 살려 줘.”

고란족 전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바닥부터 시작한 냉기는 삽시간에 고란족 전사들의 몸을 감싸고 온몸을 얼려 버리면서 그들의 입과 혀도 얼려 버렸다.

잠시 뒤 에반스의 침대 주위로 십여 개의 얼음 동상이 생겼다.

“헉!”

그 모습에 놀란 유스마가 객실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가 유스마의 두 다리를 얼려 버렸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위로는 냉기가 전달되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선 에반스가 유스마에게 걸어갈 때였다.

슈슈슉!

천장에서 뭔가가 쏘아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에반스의 몸에 닿기 전에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반스의 몸 주위에는 강력한 방어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주술사의 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도, 마도사나 흑마도사의 마법력으로도 뚫을 수 없었다.

“어딜…….”

파파파팟!

에반스는 유스마를 노리고 날아든 것들도 몸으로 모두 막았다.

투투투툭!

에반스의 몸에서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진 것은 얇은 바늘과 갖은 암기들이었다. 그런데 그 바늘과 암기들에 시커먼 것들이 묻어 있었다. 독이었다. 에반스가 천장을 쳐다보자 놀란 암습자들이 천장 위로 뛰어 도망쳤다.

“내려와!”

우지끈!

에반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장이 내려앉으며 천장 위의 암습자들도 같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들은 노련한 암습자들인 듯 떨어지면서도 에반스를 향해 독침을 비롯해서 독이 묻은 각종 암기들을 뿌렸다. 하지만 에반스의 몸 주위에 형성된 방어막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암습자를 살려 둘 정도로 에반스는 자비롭지는 않았다.

에반스가 두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검은 작은 구슬 크기의 마력탄이 후드득 정면의 암습자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기습적인 데다가 워낙 빨라서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두 명의 암습자가 그들 얼굴 앞에서 폭발한 마력탄에 머리통이 날아가 버렸다.

“헉!”

놀란 나머지 암습자들이 방문 쪽을 향해 도망을 쳤다. 하지만 에반스가 손짓하자 그들 중 다섯이 한꺼번에 불길에 휩싸였다.

활활활!

“크아아악!”

몸에 불이 붙은 다섯 명의 암습자들은 바닥을 뒹굴며 어떻게든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한번 붙은 불길은 그 몸이 다 타서 없어지기 전에는 절대 꺼지지 않았다.

잠시 후 다섯 암살자들은 괴로워하다가 결국 죽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몸에 붙은 불길은 더욱더 활활 타올랐다.

순식간에 방 안에는 살아남은 두 명의 암습자와 두 다리가 얼어붙어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의 유스마만 남았다.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에 두 명의 암습자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듯 오히려 에반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싸우다 죽겠다는 뭐 그런 생각인 모양이었는데 에반스는 당장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두 암습자가 미증유의 힘에 가로막혀 움찔거리며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밀려서는 벽에 강하게 부딪쳤다.

퍼퍽!

“크윽!”

비명과 함께 강하게 뒷머리를 벽에 박은 두 암습자는 맥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기절해서 의식을 잃은 것이다. 두 암습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에반스가 천천히 유스마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에반스가 암습자들을 참혹하게 죽이는 것을 본 터라 유스마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 유스마를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내가 널 살린 건 알고 있겠지?”

“네?”

의아해 하는 유스마를 보고 에반스가 그의 주위에 널려 있는 독침과 갖은 암기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보고 유스마도 암습자들이 단지 에반스만 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습자들은 유스마도 죽이려 한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알을 열심히 굴리고 있는 유스마에게 에반스가 물었다.

“수아레스지?”

유스마가 잠시 에반스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아레스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시치미를 뗄 터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에반스가 유스마를 죽이지 않은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누가 시키는지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에반스는 유스마를 두고 이번에는 벽에 부딪쳐 기절해 있는 두 암습자들에게 다가갔다.

유스마와 달리 그들을 깨우는 에반스의 손길은 거칠었다.

퍼퍽!

“크윽!”

에반스가 둘의 다리를 걷어차자 두 암습자가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가 의식을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으윽!”

하지만 둘 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있어 제대로 두 발을 딛고 서 있지 못했다. 그런 암습자들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암살을 지시한 자에게 가서 알려라.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말이다. 셋을 세겠다. 그때까지 내 눈앞에서 사라져. 하나.”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암습자들로서 에반스가 셋을 셀 때까지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였다.

“둘, 셋!”

에반스가 바로 이어 수를 다 세고는 두 손을 내뻗었다. 두 암습자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휘잉!

두 개의 마력탄이 그런 두 암습자의 얼굴을 덮쳤다.

콰쾅!

폭발과 함께 머리가 사라진 두 암습자의 몸뚱이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유스마의 얼굴이 더욱더 하얗게 질렸다. 잠시 뒤 사람들이 와서 유스마를 데려갔다. 그리고 방 안의 시신들을 치웠다.

에반스는 잠든 일행을 깨워서 그들이 안내한 다른 객실로 들어갔다. 그 객실에서 에반스는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얼마 뒤 연회장으로 안내하기 위해 수아레스가 보낸 사람들이 에반스와 그 일행을 데리러 왔다. 에반스와 일행은 그 사람들을 따라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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