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고란족의 이변 (65/90)

Chapter 5   고란족의 이변

케이런을 죽인 뒤 에반스는 앨빈의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케이런과 그 난리를 떨었는데도 정작 주위에서는 그 모습도 그 소리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다 에반스가 안개에 주술을 걸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앨빈의 막사에 도착한 에반스가 막사 밖에서 외쳤다.

“나와라. 앨빈.”

그러자 잠시 뒤 앨빈이 검을 들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누구…… 헉. 당신은……?”

케이런에 이어서 앨빈 역시 눈앞의 압실론 후작 에반스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앨빈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케이런은 죽었다. 이제 너만 죽으면 이 숲에서 나갈 수 있다.”

에반스의 말에 앨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는지 연방 눈알을 굴려 댔다. 그런 앨빈을 보면서 에반스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괜히 머리 굴려 봐야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뭐 나를 죽인다면 가능도 하겠지만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니 네가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에반스가 앨빈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했다. 순간 당황하며 주춤하던 앨빈이 뭔가 생각을 하고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뽑았다. 검집 역시 옆으로 던졌다.

케이런이 당했다면 앨빈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잘 닦인 앨빈의 검날이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거의 매일 검술을 수련을 해 온 앨빈은 검 자루를 움켜쥐자 마음이 차분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앨빈이 에반스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외쳤다.

“검을 뽑아라.”

그러자 에반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하면 내가 알아서 뽑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 넌 살아남으려면 어쨌든 나를 쓰러트려야 한다.”

그 말에 앨빈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래도 명색이 소드 마스터다. 그런 자신에게 무기도 들지 않고 덤비라고 하다니…… 분노로 인해 앨빈은 상대가 케이런을 죽였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앨빈의 깨문 입술 사이로 노기 가득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회하지 마라.”

“…….”

에반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검지를 펴서 까닥일 뿐이었다. 그것을 본 앨빈이 이성을 잃어버렸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그의 장검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파츠츠츠!

점점 짙게 물들어가던 검에서 시퍼런 기운이 자라났다. 소드 마스터의 상징과도 같은 오러 블레이드였다.

“이야압.”

기합성을 터뜨린 앨빈이 달려들어 에반스를 내려쳤다. 시퍼런 기운이 돋아난 장검이 에반스의 어깨를 후려쳐 갔다. 검이 가차 없이 에반스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순간 앨빈의 얼굴에 환희의 빛이 번져 갔다.

하지만 이내 얼굴은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베었지만 검에 걸리는 감각이 아무것도 없었다. 앨빈의 검이 파고드는 순간 상대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스의 눈에 어리는 날카로운 빛을 본 순간 앨빈은 복부를 파고드는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퍽!

“크윽!”

에반스가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음에도 그리 작지 않은 체구의 앨빈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쿵!

뒤로 나가떨어진 앨빈은 마치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상태로 괴로워했다. 마치 내장이 뒤틀리는 듯했다. 주먹에 마나도 싣지 않았건만 에반스의 맨주먹에 복부를 강타당하고 앨빈은 숨도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검공의 검술을 마스터한 후, 에반스는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에반스는 굳이 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앨빈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앞서 케이런을 상대할 때는 오직 머릿속에 주술밖에 없었기 때문에 몰랐는데 검을 들고 대하니 앨빈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시스턴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앨빈의 검이 에반스의 어깨를 파고드는 순간 에반스의 몸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이동하며 허공을 베느라 균형을 잃은 앨빈의 복부를 가볍게 주먹을 박아 넣는 장면을 본 것이다.

에반스의 몸은 소드 마스터인 앨빈이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볍게 날린 주먹이 당당한 체격의 앨빈을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그것을 지켜본 시스턴은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 앨빈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토록 강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그는 검을 놓지 않았다.

그를 향해 에반스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잇!”

입술을 질끈 깨문 앨빈이 에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에 오러가 돋아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다 보니 속도에서 상대에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사람의 몸을 베는 것쯤은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고도 가능했다. 그 때문에 앨빈은 일단 속도로 에반스와 승부를 보고 자신이 유리해지면 그때 결정적인 순간 다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쐐애애액!

수십 번의 검격이 에반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앨빈이 내려치고 올려친 검이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검영을 흩뿌렸다. 소드 마스터답게 그의 검은 충분히 매서웠고 또한 날카로웠다. 하지만 상대의 몸놀림은 그 이상으로 빨랐다.

앨빈의 검은 에반스의 몸에 닿지도 않았다. 에반스는 최소의 움직임으로 앨빈의 검을 피해 냈다. 살짝 젖힌 고개 옆으로 검이 지나갔고, 숙인 어깨 위를 푸르스름한 검날이 스쳤다.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마스터 한 에반스였다. 이 정도의 공격쯤은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이때 문득 에반스는 거대 원숭이로 있을 때 데보라의 검을 팔에 끼운 것이 생각났다. 거대 원숭이의 몸으로도 성공시켰다. 당연히 자신의 몸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성공할 것이 분명했다.

결심을 굳힌 에반스가 슬쩍 손을 내밀자 앨빈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을 자르려 했다. 하지만 에반스가 팔을 빼내면서 절묘하게 팔을 접어 그 안에 검을 끼웠다.

“헉!”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앨빈이 검을 회수하기 위해 힘을 썼다. 그러나 팔에 끼인 검은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휘웅!

그때 앨빈의 활짝 열린 가슴으로 주먹이 파고들었다.

퍽!

“컥!”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앨빈의 입에서 비명이 울리고 그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볼썽사납게 사지를 활짝 펼친 채 바닥에 떨어졌다.

철퍼덕!

꼼짝도 하지 않은 앨빈은 에반스의 주먹에 맞아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에반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장난 그만 치고 본색을 드러내지?”

에반스의 말에 엎어져 있던 앨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들켰나?”

그렇게 말하는 앨빈의 모습에서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해 보이는 곳은 없어 보였다. 에반스는 앨빈을 상대하면서 앨빈이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일부러 에반스도 공격을 가할 때 주먹에 마나를 싣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주먹 공격이 가슴을 쳤을 때도 앨빈은 교묘하게 마나로 가슴을 보호했었다. 그러니 애당초 앨빈이 에반스의 공격에 피해를 입은 것은 없는 셈이었다.

“실력이 대단하군.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내 본 실력을 드러내야겠군.”

그렇게 말하면서 앨빈이 자신의 두 발목에 차고 있던 마나 제어기를 풀었다.

앨빈과 그 일행들은 남쪽 숲에 들어서면서 각자 손에 차고 있던 마나 제어기를 풀었다.

그런데 앨빈은 그 마나 제어기 말고도 발목에 두 개나 더 마나 제어기를 차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나 제어기까지 풀리자 앨빈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도 허리에 차고 있던 드워프의 검을 천천히 뽑았다.

스릉!

에반스가 검을 뽑자 앨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좋아. 오랜만에 싸울 만한 상대를 만났군.”

앨빈이 만족스런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자 에반스는 뽑아 든 드워프의 검을 바닥으로 늘어트린 채 고요히 서 있기만 했다. 마치 어떤 상황에서도 앨빈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건방진 놈! 오늘 가장 처참하게 죽여 주마.’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그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에반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앨빈의 눈에 살기가 일렁거렸다.

그 상태로 둘은 잠시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서로를 쏘아보며 언제 공격할지 가늠하고 있던 두 사람은 누구도 섣불리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팽팽하게 대치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상황은 사실 정반대였다. 에반스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 그대로였지만 앨빈은 아니었다.

주르르!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려왔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앨빈이 제아무리 노려봐도 에반스를 뚫고 들어갈 만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서서 한없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앨빈이 먼저 살짝 입술을 깨물고 발을 내밀며 찌르기 공격에 들어갔다.

휘리릭!

본격적인 공격이라기보다는 견제하면서 상대의 공격을 유발시키려는 성격이 강한 선제공격이었다.

앨빈은 아직 에반스가 검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그 대처도 가능한 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앨빈의 이런 도발적 선제공격은 상당히 모범적인 해답이었다.

타앙!

에반스가 검을 세워 그 찌르기 공격을 가볍게 튕겨 냈다. 밀려난 검이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다시 에반스의 어깨를 파고 들어왔다.

순간 앨빈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가만히 서 있을 때에는 빈틈없었지만 움직이기 시작하자 검을 찔러 넣을 틈이 보였다. 그가 몸을 틀며 연거푸 검격을 날렸다.

휘익! 휘리릭!

그러나 에반스의 몸에 스치는 검은 하나도 없었다. 최적의 간격만으로 검을 흘려 보내고 몸의 중심을 노리는 검격은 들고 있던 검으로 간단히 막아 냈기 때문이다.

앨빈은 계속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내지 않았다. 지금과 같이 상대가 빠른 상황에서 오러 블레이드는 마나만 소모시킬 뿐이었다.

앨빈은 무턱대고 오러 블레이드를 퍼붓고 보는 초짜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에반스가 상대해 보니 확실히 케이런보다는 앨빈이 한 수 위의 소드 마스터였다. 하지만 둘 다 에반스와 검을 섞을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슬슬 끝을 내야겠군.’

그때 에반스가 힐끗 시스턴이 서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시스턴은 완전히 넋이 빠진 상태에서 에반스와 앨빈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반스는 앨빈에게 진정한 검탄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지금이 바로 그 약속을 지킬 때였다. 생각을 마친 에반스가 검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파츠츠츠!

에반스의 검에 오러 블레이드가 돋아났다. 그것을 본 앨빈이 놀라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순간 앨빈의 검에도 순차적으로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올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에반스도 역시 소드 마스터였던 것이다. 앨빈이 긴장한 채 에반스의 검을 쏘아보고 있을 때 에반스의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가 서서히 그 빛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에반스의 오러 블레이드가 약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고도로 집약되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그 증거로 에반스의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의 색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소드 마스터가 검탄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준비 과정이었다.

스윽!

살짝 눈매를 좁힌 에반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발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검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바우우웅!

그 위력이 대단하다고 느낀 앨빈이 감히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옆으로 피했다. 그것을 본 에반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선으로 길게 베었다.

휘릭!

대각선으로 그어져 내려오는 검을 앨빈이 살짝 검을 가져다대며 몸을 돌렸다. 검에 실린 힘을 흘려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검에 와 닿는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타아앙!

“크윽!”

앨빈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쭉 물러났다. 검 손잡이를 쥔 오른손이 얼얼했다. 격돌로 인해 눈에 띄게 줄어든 오러 블레이드가 다시금 돋아났다. 이 한 판의 격돌로 서로 간의 우열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어느새 검을 회수한 에반스가 다시 수평으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대지를 훑듯 쪼개어 가는 에반스의 수평 베기에 앨빈이 이를 악물며 검에 최대한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카캉!

폭음과 함께 오러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껏 농축된 에반스의 오러는 앨빈의 오러를 산산이 흩어 버린 뒤 검까지 쪼개어 버렸다.

“이, 이렇게 강하다니…….”

사색이 된 앨빈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에반스는 이미 검탄을 사용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런 상대에서 거리를 준다는 것은 검탄을 사용하라고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반스의 검 끝이 앨빈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의 검에서 빛의 뿜어졌다. 그 빛이 그대로 앨빈을 향해 날아갔다.

“검탄!”

한눈에 에반스가 검탄을 시전한 것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앨빈이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에반스의 검탄이 앨빈의 왼쪽 어깨에 맞았다.

쾅!

“크아아악!”

폭음과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검탄에 앨빈의 왼쪽 어깨가 폭발하며 그의 왼팔이 떨어져 나갔다. 피가 튀고 이어 그의 왼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철퍽!

앨빈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으로 바뀌었다. 당장 출혈부터 막지 못한다면 앨빈은 살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앨빈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검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검으로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장 검을 버리고 떨어져 나간 왼쪽 어깨를 지혈하지 않는다면 그는 살 가능성이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눈을 빠르게 굴리던 앨빈이 재빨리 검을 땅에 박았다.

푹!

그리고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입으로 뚜껑을 열고는 왼쪽 어깨 상처 부위에 약을 뿌렸다.

치이이이익!

앨빈의 왼쪽 어깨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어서 앨빈이 남은 약을 입으로 가져가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약병을 아무렇게나 뒤로 던지고 잽싸게 검을 고쳐 쥐었다. 그것을 에반스는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앨빈에게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다. 약을 뿌리자 지혈이 되었고 마신 약의 효과 덕분에 하얗게 질렸던 앨빈의 얼굴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보면서 에반스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검지를 까닥거렸다.

그것의 의미를 모를 앨빈이 아니었다. 앨빈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마나를 검에 주입시켰다.

우우우웅!

그것을 보며 에반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검탄을 사용할 줄 아는군.”

에반스의 말에 앨빈이 소리쳤다.

“몇 번 시전 한 적은 있지만 그때마다 만족할 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알 수 있다. 다 네 덕분이다.”

에반스가 사용한 검탄을 보고 자신의 검탄에서 모자란 부분을 보완했다는 소리였다.

“대단하군. 그럼 너의 검탄을 볼까?”

에반스의 말이 끝나자 앨빈이 기합과 함께 에반스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러자 그의 검 끝이 번쩍이며 푸른 검탄이 에반스를 향해 날아왔다. 그것을 보면서 에반스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헉! 위험해!”

그때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두 어둠의 주술사가 기겁하며 외쳤다. 시스턴도 에반스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서 있자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에반스의 검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자 검에 맺힌 마나를 따라 그를 보호하는 푸른 방패가 만들어졌다.

콰앙!

앨빈의 검탄이 맹렬한 기세로 푸른빛의 방패에 부딪혀서 소멸되었다.

“맙소사. 검으로 실드를 만들다니!”

앨빈은 경악스러워 폭발 뒤 바로 푸른 섬광이 번쩍인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자 앨빈이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소드 마스터인 앨빈도 피하기 늦은 시간이었다.

에반스가 검막으로 앨빈의 검탄을 막아 내고 바로 검탄을 내뿜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검탄과 검막 같은 최상승의 검술 경지에 익숙하지 않은 앨빈으로서는 경험 미숙으로 크나큰 실수를 저 지른 것이다.

하지만 그 실수의 끝은 처참하면서도 허무했다.

쾅!

짧은 폭음과 함께 앨빈의 머리가 검탄에 박살이 났다. 머리통이 사라진 앨빈의 몸은 잠시 뒤 힘없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털썩!

앨빈을 죽인 뒤 에반스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데보라가 있는 막사 쪽으로 움직였다.

케이런이 나간 뒤 둘만 남게 된 데보라와 레이나 사이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트린 것은 울고 있던 레이나였다.

“훌쩍. 미안해요.”

“뭐가?”

“못난 모습 보여서요.”

“화나니?”

“네. 하지만 어쩌겠어요? 제가 언니처럼 강한 것도 아니고.”

레이나의 말에 데보라가 허탈하게 말했다.

“강하긴. 이제 병신에 불과한걸.”

“무슨 말씀이세요? 언닌 반드시 일어나실 거예요. 그리고 전보다 더 강해지실 거라 전 믿어요.”

레이나의 말에 데보라가 가볍게 웃었다.

“고맙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왠지 네 말은 위로가 되네.”

“다행이에요. 제가 도움이 된다니.”

“레이나. 넌 좋은 여자야. 앨빈 같은 놈 말고 괜찮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어.”

“하지만 전 이 아이를 없애고 싶지 않아요.”

레이나가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레이나의 말에 데보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모르겠다. 네가 그 아이를 낳게 되면 넌 혼자 그 아이를 키우며 살아야 할 거야. 아마 가문에서도 널 모른 척할 테지. 많이 힘들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이 아이와 같이 극복해 낼 수 있어요.”

철이 없는 것인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데보라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그녀가 레이나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더 문제였다. 소드 마스터였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미래는 산산조각 났고 가문에서도 더 이상 그녀를 곱게 보지 않을 터였다.

레이나는 아이라도 낳을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럴 처지도 못 되었다. 데보라가 그렇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을 때 레이나가 구세주처럼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니. 걱정 마세요. 언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렇게 믿으세요.”

“레이나.”

레이나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자신이 다시 건강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내가 검을 잡았을 때도 모두가 반대했었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모두 나를 비웃었지. 하지만 나는 이뤄냈다. 이런 난관쯤 극복할 수 있어.’

레이나의 말로 자신감을 회복한 데보라가 레이나를 보고 말했다.

“난 할 수 있어. 반드시 예전으로 돌아가 보일게. 그러니 너도 힘을 내. 세상은 혼자 아이를 낳고 기르는 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거야. 하지만 너라면 그 아이를 잘 키워 낼 거야. 난 믿어.”

“고마워요. 언니.”

둘은 서로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화제를 바꿔서 좀 더 밝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케이런이 죽고 앨빈마저 죽었다. 그리고 데보라의 막사 앞에 에반스가 도착했다.

“호호호. 그래도 그건 너무했어요.”

“뭐가?”

“이름이 블록이 뭐예요?”

“남자아이면 블록, 여자아이면 나탈리. 둘 다 괜찮은 이름 같은데?”

“나탈리는 괜찮은데 블록은 좀 이상해요.”

“그런가? 그럼 에릭은 어때?”

“에릭이요? 음. 그 이름은 괜찮네요. 에릭아. 이름이 마음에 들어?”

막사 안의 대화를 듣고 에반스가 흠칫 놀랐다. 대화 내용이 마치 두 여자 중 하나가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에반스는 잠시 더 두 여자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 레이나가 앨빈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반스는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 막사 안으로 들어가서 데보라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임신과 아이란 말을 들으면서 에반스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아이라…….”

에반스는 잠시 뒤 그 막사를 떠났다. 그리고 이어 자욱하던 안개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케이런과 앨빈의 시신이 보초를 서고 있던 두 기사들의 눈에 띄었다.

잠시 뒤 막사에서 나온 레이나가 오라비인 케이런과 사랑했던 연인 앨빈의 시신을 보고 졸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오 무렵 레이나와 두 기사가 만든 들것에 실린 데보라가 강가에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숲을 벗어나서 다시 수도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스턴이 살기 띤 눈으로 들것에 실린 데보라를 쏘아보았다. 그때 에반스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그냥 가게 내버려 둬라.”

에반스의 명령이었다. 시스턴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때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 중 하나인 샘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바로 대답했다.

“우리도 여기서 나가야지.”

그 말을 하고 나서 에반스가 숲 속으로 먼저 걸어갔다. 그러자 그 뒤를 시스턴과 샘과 데릭이 뒤따랐다. 에반스는 숲에서 콥스 부족의 안내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안내를 받으며 숲 밖으로 움직였다.

그날 오후 무렵 에반스와 일행은 콥스 부족의 마을인 자카로에 도착했다. 먼저 콥스 부족에 도착한 부족민들이 마을 재건에 힘을 쏟고 있었다.

에반스와 그 일행은 하룻밤을 자카로에 머물렀다. 콥스 부족 사람들이 생명의 은인이라며 에반스와 그 일행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에반스도 이날은 긴장을 풀고 콥스 부족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열어 준 파티를 즐겁게 즐겼다. 야자수로 만든 술은 달콤했고 사냥으로 잡은 사슴고기는 연하고 맛이 있었다.

파티는 자정 무렵 절정에 이르렀다. 모두 어우러져 춤을 추고 놀았다. 그리고 얼마 후 콥스 부족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잠을 자러 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소 싱겁게 파티가 끝이 났다. 하지만 에반스도, 그 일행도 즐거웠다.

모닥불 가에 에반스와 그 일행이 드러누웠다. 아무래도 이렇게 노숙을 해야 하지 싶었다. 그때 불쑥 시스턴이 에반스에게 물었다.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있을까요?”

“글쎄. 아마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고서야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있을까 싶군.”

제국에도 경치가 아름답고 사냥하기 좋은 곳이 많았다. 그러니 이곳처럼 멀고 위험한 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죽기 전에 꼭 다시 와 보고 싶은 곳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고서 시스턴이 말했다. 그러자 그 옆의 두 어둠의 주술사 중 샘이 말했다.

“확실히 아름다운 곳이긴 하죠. 단지 좀 위험하다는 게 문제지만. 저도 주술사로서 마지만 노후는 여기서 보내고 싶습니다.”

그때 샘의 옆에 있던 데릭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아니야. 여긴 다신 찾지 않을 거야.”

일행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에반스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별똥별이 나타났다. 에반스와 일행 모두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잠시 뒤 샘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소원을 비는 걸 까먹었다.”

그러자 비웃듯 데릭이 말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소원은 무슨…….”

그때 에반스가 불쑥 말했다.

“난 소원을 빌었는데.”

“네?”

일행 모두 몸을 일으켜 천진난만하게 누워 있는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샘과 데릭은 에반스가 정말 대주술사의 후계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웠고, 시스턴 역시 눈앞의 에반스가 그 대단한 마스터를 간단히 처치해 버린 그 엄청난 존재가 맞는지 의구심이 생겼다.

하지만 일행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에반스는 오랜만에 옛일을 떠올렸다. 바로 최진철 시절 별똥별과 연관된 연애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첫사랑이었던 여자와 같이 별똥별을 보면서 최진철은 소원을 빌었다. 그때의 그 설렘이 고스란히 에반스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두 눈을 감고 헤벌쭉 웃고 있는 에반스를 보고 일행은 고개를 내저으며 각자 누웠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에반스가 정상으로 돌아와 있기를 기도하며 잠을 청했다.

에반스는 일행들이 모두 규칙적인 호흡으로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반지 속의 데스 나이트 콴을 밖으로 불러냈다.

“배신자들의 자식들은 모두 처치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은…….”

-나도 이 안에서 다 지켜보았다. 여자들을 살려 준 것은 잘한 일이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아이들의 실력이 더 출중했습니다.”

-그렇더군. 이렇게 되면 방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아비들은 훨씬 더 강할 테니 말이다.

“그들의 실력이 어떨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약간 흥분해 보이는 에반스를 보고 데스 나이트 콴이 말했다.

-넌 강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알겠습니다.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에반스는 데스 나이트 콴과 검공 라마스의 검술에 대해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어느새 시간이 흘러 새벽이 다 되어 갔다.

-너도 좀 쉬어라.

데스 나이트 콴이 다시 반지 속으로 들어가자 에반스도 잠시 눈을 붙였다. 다행히 아침에 일행이 깨었을 때 에반스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콥스 부족이 가져다준 아침을 먹고 나서 에반스와 일행은 콥스 부족 사람들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남쪽 숲 밖으로 움직였다.

그날 정오 무렵 에반스와 일행은 남쪽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에 가장 가까운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 샘이 갑자기 뒤로 처졌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한참이나 하더니 잠시 뒤 에반스에게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에반스는 샘이 다른 어둠의 주술사들과 주술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심각하게 말이다.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고란족 내에 큰일이 터졌습니다.”

“큰일?”

“네. 그 일로 고란족의 대족장이 주술사들을 모두 부른 모양입니다.”

“그 큰일이 뭔가?”

“고란족 대족장이 아끼는 여식이 랄트족에 납치된 모양입니다.”

“그게 어째서 큰일이지?”

에반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샘이 고란족의 대족장 수아레스가 얼마나 그 여식인 브리테를 아끼고 신뢰하는지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고 나서 에반스가 어느 부분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납치되었으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 주고 그 여자를 데려오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러자 샘이 바바리안들의 오랜 전통인 약탈혼에 대해 에반스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랄트족의 대족장인 우툴라가 그 여자를 자신의 아들 중 하나와 결혼을 시키게 되면 고란족 대족장은 꼼짝없이 여식을 뺏기에 된단 말이군.”

“그렇지요.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부족은 자연스럽게 혈맹을 맺게 된다. 단편적으로 생각해 봐도 랄트족과 고란족이 서로 친해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에반스는 아무래도 이 일에 개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카라스 영지성의 안드레이 공작과 연락을 취했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며칠 더 늦어질 것 같습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야만족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제가 그곳을 좀 흐려 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을 다 흐려 놓듯 말이지?

에반스의 의중을 바로 간파한 안드레이 공작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런 셈이지요. 야만족이 이대로 뭉치는 건 제 영지에도 결코 유익한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알았네. 볼일 보고 천천히 오게. 이곳은 내가 잘 말해 두도록 하지.

안드레이 공작과 얘기를 끝낸 에반스는 방향을 틀어 야만족의 영토가 있는 북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시스턴과 두 어둠의 주술사를 독수리로 바꿨다.

캬아아아!

네 마리 독수리가 파르미르 고원 위를 날았다.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파르미르 고원을 넘은 에반스와 일행은 곧장 고란족의 대족장인 수아레스의 명령으로 주술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고란족의 중심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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