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복수의 시작Ⅱ (59/90)

Chapter 9   복수의 시작Ⅱ

테이거는 굳은 얼굴로 시스턴을 쳐다보았다. 분명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지만 시스턴은 확실히 강해져 있었다. 힘과 빠르기에서 결코 소드 마스터인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무식한 용병 주제에!’

하지만 테이거는 소드 마스터였다. 아직 그는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순간 싸움은 단숨에 그의 우세로 돌아설 터였다. 테이거는 검을 고쳐 쥐고는 시스턴의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딜…….”

시스턴은 테이거에게 먼저 공격할 타이밍을 주지 않았다.

부웅!

대검이 수평으로 뿌려졌고, 테이거는 머리를 숙이고 옆으로 계속 움직였다. 그때 시스턴의 대검이 어느새 다시 회수되어 있었고 시스턴은 움직이는 테이거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바우우웅!

무시무시한 힘이 응결된 대검은 그대로 공기를 가르며 테이거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테이거는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그 일격을 피했다. 그리고 테이거의 검에서 드디어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에 못 벨 것이 없다는 그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을 테이거는 시스턴을 향해 휘둘렀다. 테이거의 예상대로라면 시스턴은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럼 시스턴이 테이거를 쫓으면서 전세는 완전히 시스턴이 쥐게 될 터였다.

부웅!

하지만 시스턴은 제정신이 아닌 듯 빠르게 대검을 회수해서 시스턴의 검을 막았다.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선명하게 맺힌 그 검을 말이다.

‘미친 놈. 끝이다.’

테이거는 단숨에 시스턴의 대검을 자르고 그의 몸통을 두 쪽으로 갈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쾅!

하지만 그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귀로 폭발음이 들리고 강렬한 힘이 테이거의 두 팔에 전달되었다.

“헉!”

테이거는 미증유의 힘에 밀려서 그대로 뒤로 몸이 밀려났다. 테이거는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며 중심이 무너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자세를 안정되게 잡았을 때 전면을 쳐다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시스턴의 대검이 테이거의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과 부딪쳐서 무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스턴은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테이거는 십여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 있었다.

둘이 충돌한 힘에서 테이거가 현저하게 뒤로 밀린 것이다.

마치 싸움에서 패하기라도 한 듯 테이거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시스턴은 에반스의 말을 믿고 자신의 검이 테이거의 검에 잘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자신 있게 검을 들어서 테이거의 검을 막았다. 그랬더니 정말 자신의 검이 오러 블레이드에 잘리지 않았다.

힘에서 자신이 있었던 시스턴은 그대로 테이거를 밀어냈다. 그러자 테이거가 맥없이 뒤로 십여 걸음이나 물러났다. 순간 시스턴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시스턴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휘리리릭!

오러 블레이드로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거라던 테이거는 오히려 시스턴에게 일방적으로 몰렸다. 오러 블레이드가 먹히지 않자 테이거가 받은 충격은 엄청 컸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빠른 움직임으로 테이거는 시스턴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테이거는 점차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반면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번번이 공격이 실패하면서 오히려 시스턴이 조급해졌다. 그러자 점점 더 시스턴의 검의 위력이 줄어들고 빈틈들이 생겨났다.

나무 위에 선 채 팔짱을 끼고 테이거와 시스턴의 싸움을 지켜보던 에반스는 시스턴이 결국 충격에 빠진 테이거를 제압하지 못하고 점차 한계를 드러내자 약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에반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스턴이 헤맬 때 테이거가 반격에 나서면서 오히려 시스턴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면서 테이거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스턴의 빈틈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테이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시스턴의 공격을 막으면서 테이거가 시스턴의 하체 쪽 빈틈을 노리고 검을 휘두르자 시스턴이 깜짝 놀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던 것이다.

“하앗!”

테이거는 크게 기합을 넣으며 시스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테이거의 반격에 흠칫 놀란 시스턴은 두 눈을 부릅뜨며 대검을 어깨까지 끌어당겼다.

시스턴은 자신의 신체적인 장점을 이용해서 몸을 뒤로 빼면서 대검을 길게 내밀었다. 피하면서 자연스럽게 찌르기 공격을 가한 것이다.

타앙!

시스턴의 대검은 그대로 테이거의 머리를 노렸고 테이거는 검으로 시스턴의 대검을 쳐 내며 계속 시스턴의 몸 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오러 블레이드가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남은 것은 테이거의 실전 경험과 검술로 시스턴을 제압해야 했다. 하지만 테이거는 오러 블레이드를 배제한 채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난전의 실전 경험은 오히려 시스턴이 더 많았다.

쉬릭릭!

시스턴의 몸 쪽으로 파고든 테이거의 검이 섬광을 내뿜으며 시스턴의 목을 향해 날았다. 테이거의 공격은 일격필살로 그 뒤가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면 사실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뭐든 다 잘라 버리니 상대인들 살아남을 리 없었던 것이다. 테이거는 그런 버릇이 완전히 습관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커억!”

그때 정작 신음을 흘리며 뒤로 한참을 날아 나가떨어진 것은 일격필살의 공격을 가했던 테이거였다.

“젠장!”

테이거가 비틀거리며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런 그의 입에서 걸쭉하니 피가 흘러나왔다. 내상이 심각해 보였다.

반면 시스턴의 오른쪽 어깨에는 길게 그어진 혈선에서 선혈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테이거가 뛰어들자 시스턴은 그 공격을 몸을 뒤틀면서 오히려 테이거의 배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하지만 테이거의 빠른 일격을 완전히 피해 내지 못한 것이다.

둘 다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누가 더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잠시 후 가려졌다.

시스턴은 왼손으로 대검을 고쳐 쥐었다. 반면 내상이 심한 테이거는 서 있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시스턴은 오른쪽 어깨에서 피를 흘리면서 테이거에게 달려들었다.

“타앗!”

그리고 그의 대검이 크게 호선을 그리며 테이거를 향해 휘둘러졌다.

“헉!”

내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원활치 않은 테이거는 체면 불구하고 바닥을 뒹굴면서 시스턴의 대검을 피했다.

하지만 역시 경험이 문제였다. 소드 마스터인 테이거가 언제 이런 악조건에서 싸움을 해 봤겠는가? 반면 용병으로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시스턴은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싸워 살아남았다. 시스턴은 테이거가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헉헉!”

테이거는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잊고 오직 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테이거가 싸우고 있는 곳은 정리가 잘된 연무장이 아니었다. 당연히 주위에는 돌부리도 많았고 땅이 움푹 파인 곳도 있었다.

턱! 비틀!

한쪽 다리가 돌부리에 걸린 데 이어서 다른 발마저 구덩이에 빠지면서 테이거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털썩!

테이거는 오로지 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섬뜩한 느낌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푸슉!

시스턴의 대검이 가슴을 뚫고 심장에 틀어박혔다.

“크으윽!”

테이거는 세차게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몸부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심장이 파열된 이상 죽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채 즉사한 테이거는 대검을 가슴에 박은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테이거의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지만 시스턴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거의 어깨를 발로 걷어차며 가슴에 박아 넣었던 대검을 뽑았다.

피슈욱!

테이거의 가슴에서 분수 뿜듯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 죽은 테이거의 시체가 맥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공터를 가로질러 도망친 콥스 부족 사람들은 테이거와 시스턴이 싸우는 광경을 풀숲에 숨은 채 손에 땀을 쥐고 계속 지켜보았다.

둘 다 워낙 빨라서 그들의 눈으로는 제대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마침내 시스턴의 대검이 테이거의 가슴을 꿰뚫는 것을 보고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그들은 거의 눈물까지 글썽이며 서로를 껴안았다. 그때 가장 먼저 달아나면서 일행들과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콥스 부족 사람도 좋아서 함성을 지르고 있는 일행 쪽으로 움직였다.

“하하하하.”

그는 두 팔을 번쩍 든 채 기뻐 크게 웃으며 뛰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그가 막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그의 몸이 강한 힘을 받아 허공에서 찢겨졌다.

촤아악!

피투성이 된 내장과 살점들이 바닥으로 흩날렸다. 콥스 부족 사람을 찢어 버린 그 두 손의 주인이 자신의 손 주위에 묻은 피를 핥았다. 그때 서로 껴안고 있던 콥스 부족 사람 중 한 명이 그 모습을 보았다.

“괴, 괴물이다.”

“뭐? 헉!”

콥스 부족 사람들이 놀라며 일제히 그쪽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 그들 주위로 소리 없이 괴물들이 나타났다.

덥석!

네 마리 괴물들이 가차 없이 거대한 입으로 네 명의 콥스 부족 사람들의 상반신을 물었다.

“크아아악!”

괴물의 입안으로 들어간 콥스 부족 사람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괴물이 질끈 턱에 힘을 주고 깨물자 녀석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면서 사람들은 몸을 축 늘어트렸다.

괴물들은 입안의 사람들이 죽자 느긋하게 그들을 씹었다.

와드득 와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리고 괴물들은 허겁지겁 사람들을 집어삼키며 굶주린 배를 채웠다.

그때였다.

쾅!

제일 먼저 콥스 부족 사람을 찢어 죽인 괴물의 몸이 강한 섬광과 함께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났다.

후두두둑!

사방으로 놈들의 살점과 내장 덩어리들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에반스가 서 있었다.

“이놈들이 감히…….”

에반스의 눈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보고 괴물들은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괴물들을 향해 분노한 에반스가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에반스의 손을 통해 뿜어졌다. 에반스가 마력을 사용한 것이다.

펑! 펑!

마력에 맞은 괴물 두 마리가 머리통이 박살이 난 채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하며 남은 두 마리 괴물이 도망을 쳤다.

“어딜!”

하지만 그 괴물들을 그냥 내버려 둘 에반스가 아니었다. 에반스가 다시 손을 내밀자 어둠의 기운이 일어나며 도망치는 괴물들에게 날아갔다.

콰쾅!

열심히 도망치던 두 괴물의 몸통이 폭발과 함께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몰골로 변해서 널브러졌다.

괴물들을 처리한 뒤 에반스의 얼굴은 침통했다. 콥스 부족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일부러 독수리로 변해서 빨리 날아왔는데 그들을 한 명도 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스르르르!

에반스 앞에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들이 수십 명이나 모습을 드러냈다.

바바리안들의 주술은 인간들의 마법 못지않게 오랜 세월 발전을 이뤄 왔다. 그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어둠의 주술사들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어둠의 주술은 오랜 세월 야만족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어둠의 주술은 랄트족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랄트족에서 제2의 윈스트런이라 불리는 걸출한 인재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우순바였다.

우순바로 인해 다른 어둠의 주술사들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특히 고란족의 어둠의 주술사들은 감히 자신이 어둠의 주술사라고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언제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해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우순바는 야만족에서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 이외에 어떤 존재도 어둠의 주술사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은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을 피해 숨을 곳이 필요했다.

그런데 예상밖에 그들이 선택한 곳은 의외로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의 아지트가 있는 파르미르 고원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 대담하게 파르미르 고원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파르미르 고원의 동굴 지대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고원의 한쪽 지류에 위치한 남쪽 숲에서 가장 끝자락에 그들의 새로운 아지트를 마련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 나지 않게 철저히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존재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계속 자신들이 정한 영역 주위를 철저히 경계했다. 그 결과 그들은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평소와 다름없이 그들의 영역 주위를 지키던 어둠의 주술사 중 한 명이 그들 영역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인간들을 발견했다.

어둠의 주술사는 납빛 같은 얼굴로 천천히 앙상한 팔을 들어 올리며 음산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전면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검은 점이 생기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 점은 순식간에 주먹만 해졌다가 금방 어른의 머리만큼 커졌고 곧 큰 동혈만큼 커졌다.

“마계의 괴수여. 나와라.”

잠시 후 어둠의 주술사가 계속 주문을 외어 대자 크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안에서 굶주린 포효를 터트리며 괴수들이 튀어나왔다.

마계의 하위 괴수 코라질이었다. 녀석은 인간보다 대체로 다섯 배 정도 컸다. 녀석은 작은 드래곤과 같이 생겼는데 실제 드래곤처럼 지성을 갖추지는 못했다.

녀석들은 주로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마계에서 활동했는데 난폭하고 잔인해서 웬만한 중급 괴수도 녀석들을 보면 피할 정도였다. 괴수는 모두 다섯 마리로 한 번에 그 정도 괴수를 불러낼 정도면 꽤 실력 있는 어둠의 주술사로 볼 수 있었다.

“시끄러운 인간들을 잡아먹어라.”

어둠의 주술사의 명령에 코라질들이 바로 움직였다. 놈들은 순식간에 다섯 명의 인간들을 잡아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인간 한 명이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다섯 코라질들을 다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도 마력을 사용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마력이 너무 엄청났다. 놀란 어둠의 주술사는 동료 주술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수십 명의 어둠의 주술사들이 합심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반스는 많이 화가 난 상태라 주위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사이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수십 명이나 모여들었고 에반스가 그들을 눈치챘을 때 그들은 쪽수를 믿고서 에반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누구냐?”

수십 명의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에반스에게 물었다. 에반스가 살피니 모두들 마력을 가진 어둠의 주술사들이었다. 하지만 그 마력이며 주술력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에반스다. 너희는 어째서 너희 영역에도 들어가지 않은 사람을 해친 것이냐?”

혼자임에도 에반스가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자 고란족 주술사들은 서로 수군댔다. 그리고 다들 탐탁지 않은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을 에반스 역시 마땅찮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죽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한 어둠의 주술사가 외쳤다.

“너는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인가?”

그 물음에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가 아니다.”

그 말에 어둠의 주술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가 아닌데 그런 엄청난 마력과 주술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맞아. 너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어둠의 주술사들은 모두 의심스런 눈으로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때 에반스가 그들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믿건 말건 그건 너희 자유다. 하지만 난 지금 너희들에게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겠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을 것이다.”

에반스의 말에 어둠의 주술사들 중 일부가 코웃음을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에반스가 아무리 마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수십 명의 주술사들을 상대로 싸워서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둠의 주술사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 한 명과 수십 명의 병사들이 있다고 치자. 그들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야 당연히 소드 마스터가 이길 것이다. 어둠의 주술사들은 아직 에반스가 자신의 마력을 1/10도 사용하지 않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헛소리 말고 어서 사실이나 말해.”

“너 랄트족에서 보낸 첩자지?”

어둠의 주술사들은 철저히 에반스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자 에반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희들이 정히 이렇게 나오겠다면 어쩔 수 없군.”

에반스는 일부러 금제시켜 둔 자신의 마력의 일부와 주술력의 일부를 풀었다.

우우우웅!

에반스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어둠의 기운이 에반스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고오오오오!

어둠의 기운이 퍼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대기가 광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둠의 주술사들은 머리가 쭈뼛하게 곤두서고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리고 곧이어 미증유의 힘이 그들을 향해 휘몰아쳐 왔다.

“허억!”

그 힘에 수십 명의 어둠의 주술사들은 몸을 움직일 수도 숨도 제대로 내쉴 수도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 앞에 어둠의 주술사들은 절망했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어둠의 주술사들 뒤쪽에 한 어둠의 주술사가 달려왔다. 그를 보고 에반스가 그자마저도 제압하려 했는데 그자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오오. 윈스트런의 후계자시여.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윈스트런이란 말에 에반스가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안 거지?”

에반스가 묻자 그 어둠의 주술사가 소리쳤다.

“어젯밤 별자리를 보고 알았습니다. 윈스트런 님의 후계자께서 저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에반스 앞에 무릎을 꿇은 어둠의 주술사는 미래를 점치는 자였다. 에반스는 점을 믿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여기 올 줄 알았다고 말한 어둠의 주술사를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은 했다.

에반스는 어둠의 주술사들을 압박하던 마력을 거뒀다. 그러자 어둠의 주술사들이 일제히 에반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오. 윈스트런의 후계자시여.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여. 당신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

좀 전까지 자신을 무시하던 어둠의 주술사들이 갖은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서 에반스를 숭배하기에 급급했다.

에반스가 그들을 쳐다보며 어떻게 할까 고심할 때 대검을 든 채 시스턴이 나타났다.

“뭡니까? 헉! 저들은…….”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들을 보고 시스턴이 놀랄 때 에반스가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어둠의 주술사들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너희는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아니로구나?”

“그러하옵니다. 저희는 고란족 출신 어둠의 주술사들입니다.”

그 말에 에반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저들을 잘 이용하면 야만족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에반스는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을 자신이 거두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저들이 내 정체를 알 것도 아니고 연락이야 얼마든지 주술로도 가능하지 않은가?’

에반스는 자신이 충분히 저들 어둠의 주술사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잘 통하지 않으면 우순바처럼 저들에게 금제를 가하는 것도 가능했다.

“좋다. 내 너희들을 거두겠다. 더불어 너희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 우순바는 죽었다. 바로 내 손에 의해서 말이다.”

에반스의 말에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은 경악하며 놀랐다.

“아! 며칠 전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더니 그럼 그것이…….”

점을 치는 어둠의 주술사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오오. 에반스 님.”

우순바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은 에반스 앞에 더욱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런 어둠의 주술사들을 보며 에반스가 말했다.

“그러니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 당장 고란족으로 돌아가라. 고란족에서 힘을 키우라. 내가 너희들을 도울 것이다.”

에반스는 어둠의 주술사들을 이용해서 고란족 내 자신의 세력을 키울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어둠의 주술사들은 신을 대하듯 경건하게 에반스를 향해 절을 했다.

“에반스 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도 이제 이 지긋지긋한 숲이 아닌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된 얼굴들이었다.

에반스와 시스턴은 별 수 없이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의 아지트에서 하루를 묵었다.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은 밤새도록 에반스에게 주술에 대해 물었고 에반스는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에반스의 주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에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은 에반스가 윈스트런의 후계자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란족 어둠의 주술사들은 고란족의 영토로 돌아갔고, 에반스가 동쪽으로 간 앨빈과 그 일행을 찾아 나서려 할 때였다.

부스럭!

풀숲을 헤치고 에반스와 시스턴의 길 안내를 맡았던 콥스 부족의 안내인이 나타났다. 그는 에반스와 시스턴을 보자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오. 신의 사자시여. 미처 알아보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에반스는 자신과 시스턴을 신이 보낸 사자라 여기는 순진무구한 콥스 부족의 안내인에게 굳이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말 대신 간단하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 부족 사람들을 잡아간 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라.”

“알겠습니다.”

콥스 부족 안내인은 신의 사자를 안내하는 것을 엄청난 영광으로 여기며 주위를 면밀히 뒤졌다.

콥스 부족의 안내인은 숲에서 최고의 추격자이기도 했다.

그는 어제 난 발자국들과 콥스 부족 사람들이 은연중에 남긴 신호들을 보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정확하게 알아냈다. 그래서 역시 그 길로 가는 가장 안전하면서도 가까운 지름길로 에반스와 시스턴을 안내할 생각이었다.

스르르르!

그런데 그때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을 보고 콥스 부족 안내인이 기겁을 하며 놀랐다.

“허억! 브, 블랙맨.”

하지만 에반스와 시스턴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특히 에반스는 그 둘을 보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떠나라고 했을 텐데?”

“네. 그러셨지요. 하지만 저희는 에반스 님을 따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지?”

“저는 어둠의 주술사지만 점술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에반스 님과 같이 다니며 점술을 더 배우고 싶습니다.”

윈스트런의 방대한 지식 중에는 점술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에반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어둠의 주술사가 말했다.

“저, 저는 소환술에 능합니다. 하지만 마력이 약해 강한 괴수를 소환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마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둘 다 에반스가 아는 어둠의 주술사였다. 점술을 배우겠다는 어둠의 주술사는 에반스가 윈스트런의 후계자란 사실을 밝힌 자였고, 마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자는 다섯 명의 콥스 부족 사람들을 잡아먹은 괴물 다섯 마리를 소환한 그 어둠의 주술사였다.

에반스는 둘 다 무모하지만 배우겠다는 각오와 그 도전 정신이 마음에 들었다. 마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어둠의 주술사는 좀 잔인한 편이었지만 에반스에게 그런 수하도 필요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게 마련이니…….’

에반스는 일단 그 둘을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좋다. 너희를 내가 거두지. 그런데 이름이 뭔가?”

에반스의 물음에 두 어둠의 주술사가 대답했다.

“저는 샘입니다.”

“저는 데릭입니다.”

그때 에반스가 시스턴을 쳐다보며 말했다.

“일행이니 서로 인사해라.”

에반스의 말에 시스턴이 샘과 데릭에게 말했다.

“시스턴이요.”

콥스 부족의 안내인은 에반스가 간단히 블랙맨 둘을 수하로 거두는 것을 보고 역시 신의 사자답다고 생각했다.

테이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앨빈과 나머지 일행들은 강가에서 한가롭게 시간들을 보냈다. 특히 목욕을 하고 난 뒤 데보라는 오랜만에 일행들에게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앨빈과 케이런, 페이슨도 오랜만에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편안하게 잠을 잤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앨빈과 그 일행들의 얼굴은 점차 굳어 갔다.

“와도 벌써 와야 할 시간 아니야?”

시간이 벌써 오후였다. 그런데도 테이거가 오지 않자 케이런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냐?”

페이슨의 말에 앨빈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하고 케이런이 테이거를 찾아 볼 테니 너희는 여기를 지키고 있어.”

앨빈의 말에 페이슨과 데보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테이거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면 중간에 만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늘 중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그러니 저들을 잘 지키고 기다려.”

앨빈이 턱짓으로 원주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가 주위에는 여러 개의 천막이 쳐져 있었다. 그중 네 개는 앨빈과 케이런, 페이슨, 데보라의 천막이었고 나머지 천막은 원주민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걱정 마. 잘 지키고 있을 테니.”

페이슨과 데보라는 강가에서 앨빈과 케이런을 보낸 뒤 원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어디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너희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페이슨이 그들에게 잔뜩 협박을 했다. 그러자 데보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원주민들에게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모두 살려 줄 테니 협조해 주기 바란다.”

원주민들에게 그들은 악마였다. 그러니 애당초 원주민들은 무서워서 악마로부터 도망칠 생각 따윈 하고 있지도 않았다. 괜한 페이슨과 데보라의 협박에 원주민들은 더욱 겁에 질려서 천막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못했다.

원주민들의 천막에서 나온 페이슨과 데보라는 자신들의 천막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데보라가 걱정스런 어투로 말했다.

“테이거에게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 마. 중간에 만나서 오늘 중에 앨빈과 케이런과 같이 돌아올 테니.”

하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테이거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페이슨과 데보라는 테이거를 걱정하며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섰다.

“캬아아악!”

“사, 사람 살려!”

원주민들의 천막 쪽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침번을 서던 페이슨이 즉각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천막 밖으로 핏덩어리가 튕겨지듯 나왔다. 원주민의 시체였다. 페이슨이 즉시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덩치 큰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아니었다. 괴물인데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괴물이 막 천막 안에 있던 원주민의 머리통을 잡더니 그대로 박살 내 버렸다. 가공할 힘이었다.

“저건 원숭이?”

“쿼어!”

원숭이란 말에 녀석이 괴성을 내지르며 페이슨에게 덤벼들었다. 녀석의 긴 팔이 양쪽에서 페이슨의 몸을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페이슨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녀석의 긴 팔을 슬쩍 피한 뒤 페이슨이 검을 뽑아서 녀석의 다리를 벴다. 급한 터라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아서 녀석의 다리를 잘라 버리지는 못했다.

“케에에엑!”

녀석은 예상 밖으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세상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괴성을 내지른 후, 절뚝거리며 천막 밖으로 도망쳤다. 그때 자다가 깬 데보라가 천막 쪽으로 뛰어오다가 거대한 원숭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건 혹시 증인들이 말한 그 거대 원숭이?”

카베인이 실종될 당시 그는 거대한 원숭이를 사냥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원숭이와 함께 카베인도 사라졌다. 그런데 사라졌던 거대 원숭이가 발견된 것이다.

그때 천막 안에서 페이슨이 거대 원숭이를 뒤쫓아 천막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데보라를 발견하자 큰 소리로 외쳤다.

“데보라. 여길 지켜. 나는 저놈을 따라가 볼 테니.”

데보라도 페이슨과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알았어.”

데보라가 대답하자 페이슨은 사라진 거대 원숭이를 쫓았다. 그렇게 한 시간 뒤 지친 기색의 페이슨이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데보라의 물음에 페이슨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뒤쫓는 데 실패했어. 하지만 녀석 말고 다른 거대 원숭이를 봤어.”

“뭐?”

“우리가 아까 본 건 새끼 원숭이였어. 그 녀석의 옆에는 엄청나게 큰 어미 원숭이가 있었어.”

“그럼 그 원숭이가 카베인 님과 연관이 있는 거대 원숭이 일까?”

“몰라. 이건 앨빈과 케이런, 테이거가 오면 그때 얘기해 보자.”

“그래. 고생했어. 여긴 내가 지킬 테니 넌 씻고 쉬어.”

“고마워.”

페이슨은 곧장 강가로 가서 땀에 젖은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페이슨이 발견한 거대 원숭이 두 마리는 카베인을 죽인 거대 원숭이와 연관이 있는 거대 원숭이들이었다. 카베인과 싸웠던 거대 원숭이는 당시 암컷과 떨어져 있었다. 암컷이 새끼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수컷 거대 원숭이가 죽으면서 암컷은 혼자서 새끼를 낳고 지금까지 길러 왔다. 콥스 부족민의 천막으로 뛰어들어 사람들을 죽이고 난동을 부린 거대 원숭이는 바로 그 새끼였다.

그사이 부쩍 성장한 새끼 거대 원숭이는 그 키만도 3미터가 훌쩍 넘었다. 그런 새끼 거대 원숭이의 다리를 벤 페이슨은 그 뒤를 쫓았다.

“놈. 놓치지 않는다.”

다리를 절뚝이는 새끼 거대 원숭이가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진 숲으로 뛰어들기 전에 페이슨은 녀석을 잡을 생각이었다.

원숭이가 숲으로 들어가고 나면 나무를 타고 도망치는 녀석을 잡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는 페이슨도 알고 있었다. 숲에서 일반 원숭이들이 나무를 타고 날 듯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그도 봤으니 말이다.

파파파팟!

페이슨이 빠르게 움직여 다리를 다친 새끼 거대 원숭이를 거의 다 따라잡았을 때였다.

휘이잉!

뭔가가 페이슨의 얼굴로 날아왔다.

“헉!”

놀란 페이슨은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쾅!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어났다. 페이슨이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바위가 땅속 깊이 박혀 있었다. 놀란 페이슨이 앞을 쳐다보자 숲 속의 커다란 나무 사이에서 거대 원숭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그때 다친 새끼 거대 원숭이가 숲으로 들어섰다.

“젠장…….”

페이슨은 아쉬워하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숲 속으로 뛰어갔다. 그때 거대 원숭이 두 마리가 나무와 나무를 타고 숲 속으로 움직였다. 페이슨은 그 두 거대 원숭이를 쫓아서 숲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뒤 페이슨은 거대 원숭이의 추격을 멈췄다. 더 이상 숲 안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그도 깨달은 것이다. 숲에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이 많았다. 그것을 직접 경험했던 페이슨은 숲 속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았다.

“일단 돌아가서 일행과 같이 오자.”

그렇게 결심한 페이슨이 방향을 틀었다. 그때 커다란 나무와 그 나무 가지 사이에 숨어서 페이슨을 지켜보던 거대 원숭이 두 마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어미 거대 원숭이는 새끼 거대 원숭이가 다친 것을 보고 많이 흥분했다. 하지만 녀석은 영악했고 강한 상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잘 알았다.

어미 거대 원숭이는 새끼 거대 원숭이를 데리고 숲 속으로 도망쳤다. 새끼 거대 원숭이를 다치게 한 인간을 숲 속 깊숙이 유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어미 거대 원숭이의 계획은 페이슨이 마음을 바꿈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미 거대 원숭이는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감히 금쪽같은 자기 새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만든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쿼어어어!”

쿵쿵쿵쿵!

어미 거대 원숭이가 괴성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만큼 어미 거대 원숭이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남쪽 숲의 최고 포식자인 거대 원숭이의 포효에 숲이 벌벌 떨었다.

잠시 후 그 근처에서 배회하던 웨어 베어를 잡아서 그 몸을 쥐어뜯은 어미 거대 원숭이가 살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웨어 베어의 다리 하나를 새끼 거대 원숭이에게 건넸다.

피를 흘린 만큼 보충을 시켜 주려는 어미 거대 원숭이 마음을 아는지 새끼 거대 원숭이는 허겁지겁 그 다리를 받아 뜯어먹었다. 그것을 보며 어미 거대 원숭이도 흐뭇한 얼굴로 웨어 베어의 몸통을 물어뜯었다.

웨어 베어를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운 두 거대 원숭이는 인간이 사라진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에반스와 시스턴, 그리고 두 명의 어둠의 주술사들은 콥스 부족의 안내인을 따라 숲을 가로지르는 강이 흐르는 동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콥스 부족의 안내인은 강으로 가는 최단 거리의 지름길로 에반스와 그 일행을 안내했다. 때문에 중간에 앨빈과 케이런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서로 길이 엇갈린 것이다. 날이 저물어도 에반스와 그 일행들은 계속 강행군을 했다.

콥스 부족의 길 안내인은 어둠 속에서도 잘 움직였고 그런 그를 따라가는 에반스 일행도 별로 힘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어둠 속 강행군은 계속되었고 자정이 가까울 무렵 콥스 부족의 길 안내인은 앨빈과 그 일행들이 있는 강가 근처에 도착했다.

에반스는 콥스 부족 길 안내인은 남겨 두고 일행과 같이 강가로 접근했다. 두 어둠의 주술사들이 그들이 내는 인기척 소리를 지워 버렸기 때문에 강가의 앨빈 일행들은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야영을 하고 있는 강가가 보이는 수풀에 숨어서 사방을 살피던 에반스와 일행은 야영지 주위를 감시하듯 걸어 다니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을 보고 시스턴이 눈에서 살기를 내뿜었다.

“누구냐?”

그 살기를 느끼고 데보라가 정확히 수풀 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때 부스럭 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야생 여우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그것을 보고 데보라는 그 수풀에서 시선을 거뒀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해 실수를 저지른 시스턴이 에반스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데보라는 그의 동생인 반루이와 용병 수하들을 처참하게 죽인 원수였다. 그녀를 보고 그 정도 살기를 띠는 건 당연했다.

“괜찮다. 다행히 근처에 여우가 있어서 들키진 않았잖느냐.”

에반스가 시스턴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야영지 주위를 살폈다. 그 결과 에반스는 앨빈과 케이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앨빈과 케이런은 테이거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절호의 기회인 셈이군.”

에반스의 눈이 번뜩였다.

이때 에반스 일행과 마찬가지로 앨빈과 케이런도 어둠 속에서 강행군을 계속해서 테이거가 찾기로 했었던 숲의 서쪽 끝자락 근처에 도착했다.

“테이거.”

앨빈과 케이런이 테이거의 이름을 불렀지만 주위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저 안 깊숙이 들어간 모양이야.”

케이런이 숲의 끝자락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앨빈은 당장 숲의 끝자락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서 앞장서라.”

앨빈의 명령에 안내자인 원주민들이 흠칫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잔뜩 굳은 얼굴로 숲의 끝자락으로 들어갔다.

이때 콥스 부족 사람들은 앞서 남았던 부족 사람들이 테이거를 데리고 블랙맨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테이거와 다 같이 죽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제 앨빈과 케이런을 데리고 블랙맨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장렬하게 죽음으로써 그들의 보금자리인 자카로를 파괴한 악마들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비장한 표정의 콥스 부족 사람들은 블랙맨의 영역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잔뜩 긴장한 채 그들이 숲의 끝자락을 다 뒤지고 다닐 때까지 블랙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테이거는 없어.”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앨빈과 케이런은 테이거가 있어야 할 숲의 끝자락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날이 밝고 나서 앨빈과 케이런은 숲의 끝자락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연히 공터에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시신 한 구를 찾았다.

케이런은 그 시신 옆에서 한 자루 검을 발견했다.

“맙소사. 이 검은…….”

그 시신 옆에서 나온 검은 바로 테이거의 검이었다. 앨빈이 즉시 그 시신을 살폈다. 머리부터 다리까지 이미 짐승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하지만 테이거가 신고 있던 부츠는 물어 뜯겼지만 짐승들이 먹지는 않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부츠는 테이거 것이 맞다.”

테이거에게 부츠를 선물했던 앨빈이 부츠의 주인이 테이거임을 알아봤다. 그 말에 케이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정말 테이거가 죽었단 말인가?”

케이런이 반쯤 넋이 나간 채 보기에도 끔찍하게 시신 반이 짐승에 의해 뜯겨 나간 테이거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뭔가 생각난 듯 앨빈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빌어먹을. 페이슨과 데보라가 위험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페이슨과 데보라가 위험하다니?”

“만약 테이거를 해친 자들이 우리를 추격했다면?”

“그랬다면 도중에 우리와 마주쳤겠지.”

“하지만 놈들이 우릴 피했을 수도 있지.”

“그 말은 놈들이 우리를 피하고 페이슨과 데보라를 노렸을 거란 소리냐?”

“맞아.”

“젠장.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앨빈과 케이런은 그 길로 방향을 틀어서 나머지 일행들이 야영하고 있는 강가 쪽으로 움직였다. 데려왔던 원주민들은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 둔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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