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해질 무렵 변경 마을에 도착한 에반스와 시스턴은 일행들과 같이 하룻밤을 변경 마을에서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카라스 영지로 움직였다.
그렇게 이틀 뒤 에반스와 그 일행들은 카라스 영지에 도착했다. 카라스 영지의 영주이자 라일라의 남편인 라르손이 성문 앞에서 에반스와 그 일행을 맞았다.
“라르손!”
에반스가 반가워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라르손은 휑하니 에반스를 스쳐 지나서 그 뒤쪽에 있던 라일라에게 달려갔다.
“오오. 내 사랑 라일라.”
“여보오!”
둘은 격정적으로 포옹을 하고 뜨겁게 키스를 했다. 괜히 내밀었던 손이 무안해진 에반스가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 그 옆으로 루크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러니까 후작님께서도 어서 결혼을 하십시오.”
“됐어.”
화가 난 에반스는 곧장 카라스 영지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카라스의 영주인 라르손은 대영주인 에반스를 위해서 만찬을 준비했다. 하지만 역시 그날 만찬의 주인은 라일라였다. 라르손은 만찬 내내 라일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저런 팔불출 같으니라고.”
에반스는 라일라에게 붙어서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는 라르손을 불만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환영 만찬이 끝나고 나서 그다음 날 에반스는 공무로 카라스 영지의 영주인 라르손을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라르손이 나타나자 에반스는 바로 자신이 변경 마을에서 보낸 관리의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그자는 관리에서 파면시키고 1년간 노역에 처했습니다.”
그리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처결이었다. 에반스가 만족스러워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라르손이 말했다.
“영주님. 그런데 전에 같이 왔었던 일행들 말입니다.”
“일행?”
“네. 그 왜 수도에서 왔다던 그 귀족 자제들 있잖습니까?”
“그자들이 왜?”
“그자들을 안내했던 관리가 오늘 후작성으로 떠납니다.”
“그래? 그자를 불러라.”
“하하하. 그럴 줄 알고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라르손이 소리치자 렉터 공작을 해친 배덕한 제자들의 자식들인 귀족 자제들을 파르미르 고원의 남쪽 숲까지 안내한 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님을 뵙습니다.”
관리가 에반스 앞에 허리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그래. 수고 많았다. 그들은 남쪽 숲까지 잘 안내해 줬느냐?”
“네. 남쪽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까지 안내하고 돌아왔습니다.”
“별일은 없고?”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 숲에 사는 원주민들과 그들 사이에 잠시 마찰이 있었는데 돌아오느라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알았다. 오늘 후작성으로 간다고?”
“네. 출발 준비가 끝난 상태입니다.”
“좋아. 출발하도록.”
“후작님께서는?”
“나는 볼일이 있어서 며칠 더 여기 있다가 갈 것이다.”
관리가 물러나자 라르손이 눈빛을 빛내며 에반스에게 물었다.
“볼일이라니요?”
평소라면 라르손에게 비밀이 없었던 에반스였다. 하지만 어제 일 이후로 에반스는 라르손에게 상당히 실망해 있었다. 그래서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런 게 있다. 넌 그냥 네 마누라 옆에 붙어 있어라.”
그 말을 끝내고 나서 에반스는 그만 나가라고 라르손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런 에반스의 반응에 라르손도 꽤나 충격을 받았던지 멍하니 밖으로 나갔다.
라르손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에반스는 반지 속에 있던 데스 나이트 콴을 밖으로 불러냈다.
-무슨 일인가?
콴의 물음에 에반스는 렉터 공작의 배덕한 제자들의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놀랍군. 그 나이에 벌써 소드 마스터들이라니 말이야.
렉터 공작도 자신을 해친 제자들의 자식들이 그 아비들 못잖은 천재들이란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해서 어쩔 생각인가?
“그들이 보통의 자식들이었다면 살려 두었을 테지만 복수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니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반스의 말에 데스 나이트 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아비들과 싸울 때 그들이 끼어들기만 해도 문제는 복잡해지겠지.
에반스가 제거해야 할 렉터 공작의 제자들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소드 마스터 한 명이 그들과의 싸움 도중 개입할 경우 충분히 승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니 미리 그 싹을 제거해 두는 것이 좋았다.
-참 스승님께서는 어찌되셨나?
“영면하셨습니다.”
닷새가 훌쩍 흘러 검공 라마스의 영혼은 에반스에게 자신이 창안한 검술을 완벽하게 전수하고 나서 에반스의 몸에서 떠난 상태였다. 즉 지금 에반스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완벽하게 마스터 한 에반스는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대로라면 며칠 내 에반스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설 것이 자명했다. 검술을 사용하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궁극의 경지인 그랜드 마스터를 바로 눈앞에 둔 것이다.
-스승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데스 나이트 콴을 보고 에반스가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제가 반드시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에반스는 데스 나이트 콴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다시 반지 속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고심에 잠겼다.
“이번 일은 가능한 조용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남쪽 숲에서 나왔을 때 처리하는 것보다는 그 안에 있을 때 제거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
아직 압실론 후작령은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앙의 권력자들인 그 네 배신자들의 자식들이 압실론 후작령에서 죽게 되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파르미르 고원에 속한 남쪽 숲에서 행방불명이 된다면 그 일로 인해 압실론 후작령에서 책임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 그럼 남쪽 숲에는 나 혼자 가도록 하자.”
결심을 한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을 먼저 찾아갔다.
“어서 오게.”
안드레이 공작이 자신에게 배정된 객방에서 에반스를 맞았다.
“안 그래도 오늘쯤이면 자네가 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네.”
“며칠 어딜 좀 다녀올까 합니다.”
“혹시 그들을 제거할 생각인가?”
눈치 빠른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가 뭘 할지 예측하고 물었다. 에반스는 따로 둘러대지 않고 바로 말했다.
“네. 아무래도 그들을 남쪽 숲에서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에반스의 대답에 안드레이 공작이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은 생각이군. 남쪽 숲에서 제거하면 압실론 후작령에서 책임질 일도 없을 테고 말이야.”
“공작님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수도로 가시겠다면 제가 채비를 하도록 지시해 두겠습니다.”
에반스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수도로 가 봐야 딱히 내가 할 일도 없고. 당분간 여기 있었으면 좋겠군. 어떤가?”
압실론 후작령에 있겠다는 소리였다. 안드레이 공작과 같이 뛰어난 마도사가 있어 준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저야 고맙지요. 최고 귀빈으로 대접할 테니 부디 오래 있어 주십시오.”
“허허허. 환영해 주니 고맙군.”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과 만난 후 루크와 라일라를 만나고 이어서 루미나를 만났다. 에반스는 루미나에게 먼저 후작성으로 가라고 했지만 루미나는 에반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어 에반스가 마지막으로 시스턴을 찾아갔을 때 시스턴은 이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시스턴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에반스가 시스턴의 용병 수하들을 죽인 그 젊은 소드 마스터들을 제거하러 떠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시스턴은 에반스를 보고 자신 없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제 힘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소드 마스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깨달았는데 말이죠.”
아마도 동굴에서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의 활약을 보고 다소 기죽은 듯 보이는 시스턴에게 에반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너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내 장담컨대, 네 손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반스의 말에 시스턴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스승님만 믿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냐?”
에반스가 시스턴이 챙긴 커다란 짐 가방을 보며 물었다.
“그곳에 가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자 에반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우린 시간이 없다. 며칠 안에 그자들을 다 처치해야 해. 그러니 걷거나 말을 타고 가서야 어느 세월에 그들을 찾고 제거하겠느냐?”
“그럼 어떻게 가시려고…….”
시스턴이 묻자 에반스가 주술을 외웠다.
펑!
“끼악!”
시스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독수리로 변신한 에반스와 시스턴은 하늘을 날아서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아 남쪽 숲에 도착했다.
펑!
독수리로 변신해 있던 시스턴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아. 정말 신기하군요?”
독수리로 하늘을 난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시스턴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런 시스턴에게 에반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방심하면 우리가 당할지 모른다. 그러니 이 일에 좀 더 집중해라.”
에반스의 말에 시스턴은 왜 자신이 여기 왔는지 상기하며 흥분한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에반스가 시스턴과 안착한 곳은 예전 에반스가 남쪽 숲에 왔을 때 야영을 했던 그 공터였다. 즉 에반스와 시스턴은 남쪽 숲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저쪽으로 이동하면 남쪽 숲에 사는 숲의 부족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인 콥스 부족이 사는 마을이 나온다.”
에반스는 일단 원주민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에반스와 시스턴이 콥스 부족의 마을인 자카로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집들은 모두 불에 탔고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에반스의 뇌리에 그들을 남쪽 숲까지 안내해 준 관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원주민과 마찰이 있었다더니 그럼 이게…….’
마을은 모조리 불탔고 마을 안에는 생명체라고는 발견할 수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때였다.
휘익!
바람 소리인지 아니면 새 소리인지 그것도 아니면 인위적인 휘파람 소린지 모를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숲 속에서 십여 명의 콥스 부족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중에는 에반스와 안면이 있는 콥스 부족 사람도 있었다.
콥스 부족 사람들도 에반스를 알아보고 그가 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온 듯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반스가 묻자 콥스 부족 사람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수도에서 온 젊은 사람들이 우리 터전을 이렇게 만들었소.”
“우리 보고 무조건 숲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아내라고 했소. 우린 그럴 수 없다고 했고. 그랬더니 그자들이 사람들을 잡아가고 이곳을 불 질렀소.”
아무래도 그들은 죽은 카베인을 찾으려고 무리하게 콥스 부족 사람들을 전부 동원하려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콥스 부족이라도 카베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죽어서 그 시신마저 숲에 사는 짐승들의 배 속으로 사라진 그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콥스 부족 사람들이 일제히 서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기요. 저쪽으로 갔소.”
그러자 에반스가 호주머니 속에 돈주머니를 꺼내서 콥스 부족 사람들에게 건넸다.
“얼마 되지 않지만 마을을 재건하는 데 사용해 주십시오.”
돈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가득했다. 그것을 보고 콥스 부족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에반스를 향해 뭐라고 떠들면서 머리와 허리를 계속 굽실거렸다.
이미 문명의 세계와 손을 잡은 콥스 부족은 그 정도 돈이면 충분히 마을을 재건하고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콥스 부족의 마을인 자카로를 떠난 에반스는 시스턴을 데리고 숲의 서쪽으로 움직였다.
부스럭!
인기척 소리에 시스턴이 외쳤다.
“누구냐?”
숲 풀에서 콥스 부족 사람이 나타났다.
“당신은?”
에반스도 잘 아는 콥스 부족의 숲 안내인이었다. 예전 에반스를 숲으로 안내했던 그 안내인이었다. 숲의 길에 대해서는 자신의 안방처럼 잘 아는 자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에반스의 말이 끝나자 콥스 부족 안내인이 숲 속 길로 에반스와 시스턴을 안내했다.
바로 그때 카베인을 찾아 나선 다섯 젊은 귀족들은 다섯으로 나뉘어서 숲을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하루도 되지 않아서 그들은 숲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깨닫고 다시 모여서 함께 움직였다.
그래도 숲은 위험했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긴 소드 마스터가 다섯인데 어떤 존재인들 두렵겠는가?
다섯 귀족 일행의 우두머리 격인 앨빈은 일단 카베인이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숲의 서쪽부터 뒤지기로 하고 길잡이로 콥스 부족 사람들을 앞장세웠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서쪽 숲을 뒤졌지만 카베인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숲에는 안개가 자주 끼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그리고 하루 종일 후덥지근하고 습도가 높았으며 특히 벌레가 많았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들이라고 해도 날씨와 벌레들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다섯 귀족들도 점차 지쳐 갔다. 그리고 그만큼 신경도 예민해졌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언제 폭발할지 모를 정도로 다섯 귀족들은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빌어먹을. 씻은 지가 언제야?”
케이런의 말에 그 옆에 있던 페이슨이 온몸을 긁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모기 때문에 미치겠어.”
하지만 그들보다 더 미칠 지경인 사람은 바로 다섯 귀족들 중 유일한 여자인 데보라였다. 아무래도 여자인 데보라는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숲에서의 생활이 악몽 같았다.
그나마 앨빈은 우두머리라고 티를 내지 않았고 테이거야 자신의 실종된 아버지를 찾는 일이니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혈안이 되어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데보라. 조금만 더 참아. 오늘까지만 더 살피고 내일은 강이 있는 동쪽으로 갈 테니 말이야.”
강으로 가면 적어도 몸은 씻을 수 있을 터였다. 그 말을 듣고 데보라가 조금은 기력을 되찾았다. 그때 앨빈의 옆에 있던 페이슨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자 그 뒤의 케이런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뭐가?”
“뭐랄까? 왠지 음침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기분 나쁜 곳이야. 그러니 내일 일찍 떠나자고.”
그런 기분은 케이런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앨빈 역시 원주민의 안내를 받아서 숲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신경에 거슬리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 기운은 점차 강해져서 이제는 간혹 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소드 마스터인 앨빈의 감각이 여기는 위험하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앨빈이 서둘러 내일 이곳을 떠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케이런이 동조해 주니 앨빈의 얼굴에는 더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일 가다니? 아직 저 안쪽까지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잖아.”
테이거가 손짓으로 서쪽 숲의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은 절반 이상이 늪지대야. 사냥 온 네 부친이 뭐 하러 그런 진창에 들어가셨겠어?”
“그래도 모르잖아. 그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테이거가 고집을 부리자 앨빈이 즉시 중재안을 내놓았다.
“우린 더 버티기 어려워. 데보라도 더 버티기 힘들어 보이고. 그러니 이렇게 하지. 우린 내일 동쪽으로 이동하고 넌 내일 하루 더 이곳을 수색하고 동쪽으로 오는 걸로 하자. 어때. 내 생각이?”
테이거는 약간 실망한 눈초리로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일도 아닌데 이곳까지 와서 고생하는 그들을 보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만약 서쪽 숲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다음은 숲의 동쪽을 뒤져야 했다.
그때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괜히 저들의 신경을 건드려 좋을 것이 없다고 테이거는 판단했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테이거가 승낙하자 일행의 분위기가 갑자기 훈훈해졌다.
남쪽 숲은 광활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길이 있었고 또 수많은 위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남쪽 숲에서 콥스 부족은 살아왔다. 그들은 그 수도 많지 않고 또 힘도 강하지 못했다.
남쪽 숲에는 인간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들과 짐승들이 우글거렸다. 그런 남쪽 숲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에 순응했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곳은 피해 다니고 몬스터와 맹수들의 소리를 들으면 즉시 마을로 피하거나 급하면 나무에 올라가서 휘파람을 불어 근처 마을 사람들을 불렀다. 그렇게 콥스 부족은 피할 것은 피하고 숨을 때는 숨어 가며 하나로 똘똘 뭉쳐서 살아왔다.
그런 콥스 부족이 숲 밖의 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콥스 부족 사람들의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남쪽 숲의 갖은 위험들로부터도 살아남았던 콥스 부족이었지만 앞선 인간들의 문물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콥스 부족 중 절반이 발달된 문물의 인간 세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콥스 부족들도 더 이상 자연에 순응하기보다는 인간들에게 의지했다.
남쪽 숲을 찾는 인간들의 안내자 노릇이나 하고 그들이 보금자리인 자카로는 남쪽 숲을 찾은 인간들이 한 번은 들러야 할 관광 명소로 변했다. 그리고 인간들이 주는 돈이 콥스 부족의 생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콥스 부족도 반은 앞선 문물의 인간들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인간들 중에서 나쁜 인간들도 많았다. 며칠 전 수도에서 온 젊은 사람들은 그 도가 지나쳤다.
콥스 부족 사람들을 모두 한곳에 불러 모은 그들은 실종된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그것도 돈 한 푼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당연히 콥스 부족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고 했고 그러자 그들이 악마로 돌변했다.
콥스 부족 젊은 남자 다섯이 그들의 손에 도륙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수십 명의 콥스 부족 사람들이 놈들에게 사로잡혔다.
다행히 많은 수의 콥스 부족 사람들이 숲으로 도망을 쳐서 목숨을 건졌지만 놈들은 콥스 부족의 보금자리인 자카로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쑥대밭이 된 자카로를 보며 콥스 부족은 치를 떨었다.
그때 그 악마 같은 놈들에게 사로잡혀 숲으로 내몰린 콥스 부족 사람들도 자카로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콥스 부족 사람들은 그 악마들의 강압에 숲의 서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부러 위험한 곳만 골라서 움직였다. 그것도 모르고 수도에서 온 악마들은 그들을 따라왔다.
하지만 악마들은 강했다.
숲의 강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콥스 부족 사람들은 숲에서 그들만큼이나 강한 자들이 있는 곳으로 악마들을 안내했다.
숲의 서쪽 끝에는 아주 위험한 존재들이 살았다. 그들은 몬스터들을 가축처럼 키웠고, 거대한 괴물을 마음대로 부렸다. 그리고 그들이 뿜어 대는 검은 기운에 맞으면 뭐든 산산조각이 났다.
그들은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다녔다. 그래서 콥스 부족 사람들은 그들을 블랙맨이라고 불렀다.
수도에서 온 그 젊은 악마들에게 인질로 잡힌 콥스 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불태운 악마들을 블랙맨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블랙맨들의 영역인데 악마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갑자기 동쪽으로 움직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콥스 부족 사람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다 가지 않고 악마 중 하나가 남아서 블랙맨들의 영역을 뒤지겠다고 했다.
그리고 콥스 부족 사람들 중 다섯 명의 젊은 남자들이 남아서 그 하나 남은 악마에게 길 안내를 하라고 했다.
블랙맨의 영역에 들어가면 그땐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다섯 명의 젊은 콥스 부족 남자들은 비장한 얼굴로 동쪽으로 떠나는 콥스 부족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와 같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에반스와 시스턴의 길 안내를 맡은 콥스 부족 길 안내자는 최대한 위험하지 않으면서도 최단 거리로 에반스와 시스턴을 이끌었다. 지름길로 이동하니 수도의 귀족 자제들이 닷새 동안 이동한 거리를 에반스와 시스턴은 불과 이틀 만에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한나절 뒤 에반스와 시스턴은 숲의 서쪽 끝이 눈에 보이는 곳까지 이동했다.
“잠깐!”
앞서 가던 콥스 부족 안내인이 갑자기 길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쪽으로 가서 뭔가를 발견한 듯 말했다.
“놈들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콥스 부족 안내인의 말에 에반스와 시스턴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때 에반스가 주술로 주위에 있던 새들을 자신에게 불러 모았다.
파다다닥!
갑자기 새들이 에반스에게 모여들자 콥스 부족 안내인이 깜짝 놀랐다.
“흩어져서 인간들을 찾아라.”
에반스의 명령이 내려지자 새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일부는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에반스는 놀란 콥스 부족 안내인에게 자신이 새들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콥스 부족 안내인은 놀랍다며 신기한 척 에반스를 계속 쳐다보았다. 얼마 뒤 새들 몇 마리가 에반스에게 날아와서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 소리를 듣고 에반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동쪽으로 떠나고 한쪽은 남아서 계속 숲의 끝자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말에 콥스 부족 안내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라고요? 지금 남은 자들이 숲의 끝자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했습니까?”
“그렇소.”
“그곳은 블랙맨들이 영역인데.”
“블랙맨?”
“네. 아주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살아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때 시스턴이 불쑥 말했다.
“그런 위험한 곳을 그들이 왜 가는 겁니까?”
그 말을 듣고 콥스 부족 안내인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소리쳤다.
“큰일입니다. 부족 사람들이 그자들에게 복수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복수라니요?”
“자카로가 불타고 사람들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더라도 그들을 블랙맨의 영역으로 데려가고 있는 겁니다.”
에반스는 블랙맨이 어떤 존재들인지 모르지만 일단 그들이 위험한 자들이라면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 콥스 부족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시스턴!”
에반스가 시스턴을 쳐다보자 시스턴이 에반스의 의중을 간파하고 준비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반스가 주술을 외며 시스턴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검은 연기와 함께 ‘펑’ 소리를 내며 시스턴이 먼저 독수리로 변했다.
그러자 뒤이어서 에반스가 자신의 몸을 독수리로 변신 시켰다.
파다다닥!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에반스와 시스턴이 거침없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헉!”
그것을 보고 콥스 부족의 안내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지, 지금 내가 뭘 본 건가?”
콥스 부족 안내인은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자 두 마리 독수리가 유유히 서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정말로 사람이 독수리로 변했다.”
콥스 부족의 안내인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오오. 신이시여.”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숲의 지배자인, 그가 믿는 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앨빈은 준비가 끝나자 혼자 남을 테이거에게 다가갔다.
“그럼 내일 보자.”
숲을 가로지르는 강까지는 여기서 불과 반나절 거리였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남은 숲의 끝자락을 뒤지고 나서 내일 출발해도 내일 중에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테이거는 일행이 자신을 두고 떠나는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그것을 표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웃으면서 그들을 보내 줄 수는 없었던지 다소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알았다. 먼저 가서 씻고 쉬어라.”
테이거는 앨빈과 나머지 일행들을 직접 배웅했다. 일행들이 모두 동쪽 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테이거가 자신의 길잡이로 남은 다섯 명의 원주민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움직여라.”
마치 노예 부리듯 테이거는 거칠게 원주민들을 다루었다. 원주민들은 증오를 담아 테이거를 힐끗 쳐다보고는 화를 억누르고 숲의 끝자락을 향해 움직였다.
그때 그들 머리 위로 독수리 두 마리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마리가 숲 아래로 내려가자 나머지 독수리도 그 뒤를 따랐다. 테이거는 원주민들을 앞장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서 느긋하게 뒤쫓았다.
앞에서 위험한 일이 생기면 테이거는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움직였다.
이제 얼마 후면 블랙맨들의 영역이었다. 그 영역에 발을 내딛는 순간 콥스 부족 사람들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죽음을 앞둔 그들의 머리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장 앞서 걷고 있던 콥스 부족 사람의 입을 뭔가가 가로막았다.
텁!
놀란 콥스 부족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그의 눈앞에 에반스가 있었다.
“쉬잇!”
에반스가 손가락을 입에 대자 콥스 부족 사람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반스가 막고 있던 콥스 부족 사람의 입에서 손을 치웠다. 다행히 그 콥스 부족 사람도 에반스와 안면이 있었다.
그는 바로 상인인 산체스의 길 안내인으로, 산체스의 호위였던 에반스를 기억했다.
“놈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놈을 저쪽 공터로 데려오시오.”
에반스가 그 콥스 부족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자 콥스 부족 사람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에반스와 시스턴은 콥스 부족 사람들이 블랙맨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제지할 수 있었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콥스 부족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좌측으로 틀자 그 뒤쪽의 콥스 부족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앞쪽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때 앞장서서 가던 콥스 부족 사람이 왼손을 들어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것을 보고 콥스 부족 사람들이 일제히 눈빛을 빛냈다. 콥스 부족 사람들은 사람을 부를 때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주로 죽은 사람을 떠나보낼 때 왼손을 사용했다. 때문에 숨겨야 할 일이 있으면 콥스 부족 사람들은 왼손을 썼다.
앞장서서 가던 콥스 부족 사람이 왼손을 사용한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래서 나머지 콥스 부족 사람들은 군말 없이 묵묵히 그 콥스 부족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걸었을까? 꽤 널찍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앞장섰던 콥스 부족 사람이 갑자기 공터를 가로질러서 뛰었다. 그러자 나머지 네 명의 콥스 부족 사람들도 그 뒤를 쫓아 뛰었다.
테이거는 일정 거리를 두고 콥스 부족 사람들을 따라가면서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여 부친이 남긴 흔적이라도 찾을지 모른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움직이던 원주민들이 뛰는 것을 느끼고 테이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들이…….”
소드 마스터인 자신을 두고 도망치려는 원주민들이 가소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무모함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본보기로 한두 명 정도 목을 잘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테이거가 움직였다.
파파팟!
한 마리 맹수가 움직이듯 테이거는 순식간에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죽어라 공터를 가로지르며 달아나는 원주민들을 보고 그쪽으로 막 달리려 할 때였다.
흠칫!
뭔가 강렬한 기운이 테이거를 붙잡았다.
‘위험하다.’
테이거의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테이거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좌측 수풀에서 웬 덩치 큰 자가 한 손으로 대검을 든 채 살기를 뿌리며 테이거를 향해 걸어왔다.
테이거는 좀 더 자세히 그자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서 본 자다.’
테이거는 그 덩치 큰 자의 얼굴이 안면이 있자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아!”
최근 테이거가 만난 덩치 큰 자는 한 명뿐이었다. 어떤 마을의 술집에서 만났던 덩치 큰 용병 말이다.
하필 혼자 남은 자가 테이거임을 알고 에반스는 콥스 부족 사람들로 하여금 공터로 테이거를 유인해 오게 만든 뒤, 시스턴에게 말했다.
“넌 소드 마스터만큼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너의 힘과 움직임, 그리고 파괴력은 결코 소드 마스터의 아래가 아니다. 그러니 기죽을 것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에반스는 시스턴의 대검에 한 손을 올리며 주술을 외웠다.
“적어도 이 검이 놈의 검에 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에반스의 말에 용기를 얻은 시스턴은 공터로 테이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시스턴은 테이거에게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파파파팟!
그때 에반스는 공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로 가볍게 올라갔다.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모두 마스터한 에반스는 어제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경지마저 초월했다.
하지만 새로 이룬 에반스의 경지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인지는 에반스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에반스는 무형의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검탄 역시 한 번에 십여 개를 쏘아 낼 수 있으며 검을 회전시키지 않아도 검에서 알아서 검막을 형성했다. 검술 역시 검공 라마스의 검술은 모두 완벽하게 펼칠 수 있었다. 검술이 완벽하다는 것은 그만큼 빈틈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인간들 중에서 검술로써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검공 라마스의 검술이 완벽하다는 것은 검술로 에반스가 이미 최고의 위치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에반스는 자신의 검술이 완성된 기념으로 테이거를 자신이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에반스는 그 기회를 그의 제자인 시스턴에게 넘겼다. 시스턴은 무럭무럭 커 가는 새싹이었다. 그런 시스턴에게 테이거란 상대는 더없이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줄 터였다.
얼마 후 콥스 부족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 뒤를 쫓는 테이거가 나타났다. 테이거가 콥수 부족 사람들을 쫓으려 할 때 그것을 테이거가 막았다.
테이거가 시스턴을 마주 보고 서자 시스턴을 알아본 테이거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죽고 싶어서 나를 찾은 게로구나.”
술집에서 데보라에게 동생인 반루이와 수하들이 토막 나 죽자 테이거는 반쯤 미쳐서 날뛰었다. 그런 시스턴을 간단히 제압한 것이 소드 마스터 테이거였다. 당시 에반스가 막아 주지 않았다면 시스턴 역시 그 동생과 수하처럼 토막 나서 죽었을 터였다.
테이거는 그렇게 외치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시스턴에게 또 다른 동조자가 있는지 살핀 것이다.
하지만 시스턴의 기감에 주위에서 더 이상 위험한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테이거가 안도하며 시스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때 내지 못한 승부를 이 자리에서 내 보도록 하자.”
시스턴이 한 손으로 대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 시스턴의 팔에는 근육이 불끈거렸다. 그것을 보고 테이거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덩치만 크고 근육만 많다고 다 강하다고 생각하나 보군. 그때 당하고도 아직 모르나? 무기가 크고 힘만 센 게 다가 아니란 것을 말이야. 역시 무식해.”
테이거의 무식하단 말에 시스턴이 피식 웃었다.
“후후후. 누가 무식한지는 곧 알겠지.”
시스턴의 알 수 없는 자신감에 테이거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있다는 건가?’
테이거가 신중하니 시스턴을 살폈다. 하지만 테이커는 시스턴이 예전과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꽤나 자신만만하군. 설마 네 따위 녀석이 날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지금이라면 네 녀석 정도는 토막 내서 짐승들 먹이로 던져 줄 수도 있어.”
시스턴이 정말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다는 듯 말하자 테이거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일어섰다.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덤벼 봐. 네 몸을 토막 내 줄 테니.”
테이거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시스턴에게 먼저 덤벼 보라고 손짓으로 도발을 했다. 그러나 시스턴의 꽉 다문 입 사이로 으드득하는 이빨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시스턴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뿜어져 나오자 테이거도 한 손을 늘어트려 허리에 매여진 검집으로 가져갔다.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와 닿자 테이거가 말했다.
“너 따윈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래? 어디 해보시지.”
말이 끝나자마자 시스턴이 움직였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시스턴의 움직임은 빨랐다.
바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은광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재빨리 물러선 테이거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뭐야? 달라진 것도 없잖아?”
빈정대는 테이거의 말에 시스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앗!”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시스턴이 테이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아아앙!
공기를 갈기갈기 찢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벼락 같은 일격이 아슬아슬하게 테이거의 어깨를 비껴 지나갔다. 그때 테이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시스턴은 동작이 큰 만큼 허점도 많았다. 테이거는 그 빈틈을 노려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시스턴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런데 그때였다.
싸늘한 기운이 확 하니 일었다.
“헉!”
경악성과 함께 테이거가 몸을 뒤로 눕혔다.
바우우웅!
대검이 간발의 차이로 테이거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스파파팟!
테이거의 머리카락이 대검에 잘려서 허공으로 비산했다. 테이거는 얼마나 다급했는지 땅바닥을 굴러서 시스턴으로부터 떨어졌다. 몸을 일으켜 세운 테이거가 화난 얼굴로 시스턴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놈.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그랬다. 시스턴은 자신의 힘을 숨긴 채 테이거를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들였고, 필살의 일격을 선사했다. 하지만 테이거는 역시 소드 마스터다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위기의 순간에 몸을 뒤로 눕혀 임기응변으로 피하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