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과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에반스는 지혈을 하고도 계속 움직였다.
“조금만 기다리게.”
그런 에반스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어떻게든 마나를 회복하려고 안드레이 공작은 노력했다. 그렇게 몇 분 뒤 안드레이 공작은 겨우 치료 마법을 시전할 정도의 마나를 마나 홀에 모을 수 있었다.
“리커버리.”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를 향해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화아악!
에반스의 몸에 하얀 기운이 서리고 괴물들이 할퀴었던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들 중 에반스는 은연중에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에반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살아서 여기서 나갈 수 없을지 몰랐다. 일행은 자신들이 괴물들의 먹이가 되는 모습을 떠올리며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고맙습니다.”
에반스가 안드레이 공작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안드레이 공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말 말게. 지금까지 자네가 없었다면 우린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그 말을 듣고 에반스가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밝은 점들을 따라 움직인 지 한 시간 뒤, 에반스와 그 일행은 넓은 석실에 도착했다. 그 석실은 천장만 10미터는 되었고 그 크기도 웬만한 병사들의 연무장만 했다.
사방의 벽은 모두 커다란 암석을 반듯하게 자른 뒤, 서로 엇갈리게 쌓아 만들었는데 이끼가 잔뜩 낀 모습이 오래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천장과 벽에는 밝은 빛을 내는 구슬들이 박혀 있어서 석실 내부는 환하니 밝았다.
“여기가 마지막 관문인가?”
루크가 조심스럽게 석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때 이미 에반스는 앞서 석실 내부로 들어서서 그 중앙까지 이동해 있었다. 일행들이 에반스가 있는 석실 중앙으로 모여 들었을 때였다.
-여기까지 잘 왔다. 거기 숨어 있는 자도 그만 나와라.
앞서 괴물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목소리가 석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에반스 일행들이 왔던 통로 쪽에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가 나타났다.
“헉! 뭐야?”
에반스와 그 일행은 불청객의 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 그 불청객은 묵묵히 걸어서 에반스와 그 일행이 있는 쪽까지 걸어왔다. 그가 에반스 일행과 불과 서너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을 때였다.
-마지막 관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풀어야 할 숙제는 바로 너희 발아래 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의 발아래에서 밝은 빛과 함께 숫자 ‘1’이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불청객이 큰 소리로 웃었다.
“크하하하. 여기까지 고마웠다. 마지막 관문은 너무 쉽군.”
불청객의 말에 에반스가 물었다.
“뭐가 쉽다는 거지?”
“그야 간단하지 않은가? 1의 의미는 여기서 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단 소리다. 즉 윈스트런의 후계자는 하나란 소리지.”
불청객의 해석에 에반스와 일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로 너희들은 모두 내 손에 죽어 주어야겠다.”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어둠의 주술사의 말에 에반스와 그 일행은 잠시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루크가 대표로 말했다.
“이봐. 시커먼 놈. 너처럼 말한 녀석들이 지금 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
“다 우리 손에 죽었단 말이야. 그러니 좀 긴장하는 게 어때?”
루크의 말에 불청객이 석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크하하하. 내 제자들 몇 명 죽였다고 지금 내 앞에서 큰소리치는 것이냐?”
불청객의 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안드레이 공작이었다.
“제자? 그렇다면 네놈이 혹시 우순바인가?”
안드레이 공작의 물음에 불청객이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여전히 자신감에 넘쳐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맞다. 내가 바로 장차 대주술사가 될 우순바 님이시다.”
안 그래도 찾고 있던 제자를 죽인 원수의 등장에 안드레이 공작의 두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우순바의 등장에 에반스는 긴장한 채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우순바 이외에 다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에반스는 우순바를 살폈다. 지금껏 상대해 왔던 다른 어둠의 주술사들과 우순바의 차이점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우순바를 살핀 에반스의 얼굴은 점점 굳었다. 그동안 상대해 온 모든 어둠의 주술사들의 특징이 우순바에게 모두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상대한 어둠의 주술사들에게 그 능력을 전수한 것이 우순바란 소리였다. 그 말은 앞서 상대한 어둠의 주술사들보다 우순바가 월등히 강하다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순바가 갑자기 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와 일행들은 긴장한 채 움찔거렸다. 우순바가 마력을 사용해서 공격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자 우순바가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흐.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겁을 내서 어쩌나. 나와라. 콴!”
우순바의 명령이 내려지자 우순바가 끼고 있던 반지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 피어오르더니 우순바 앞에서 사람의 형체로 변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거무튀튀한 갑옷을 걸치고 있으며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사람의 심혼을 뽑아 버릴 듯 강렬한 안광을 내뿜고 있는 한 기사였다.
그 기사를 보고 안드레이 공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데스 나이트!”
안드레이 공작의 외침에 루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흑마도사나 소환할 수 있는 그 데스 나이트를 무슨 주술사가 불러낸단 말입니까?”
루크의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같은 소환술이니까. 저자의 능력이 흑마도사 이상이라면 데스 나이트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마계의 존재를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데스 나이트! 원한 때문에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기사의 영혼에다 어둠의 힘을 불어넣어 탄생시킨 언데드였다.
그 힘은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상회한다고 했다. 해서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소드 마스터 두 명이 필요했다.
데스 나이트의 등장에 에반스는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이쪽은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와 마도사인 안드레이 공작이 있었다. 전력상으로 데스 나이트 하나쯤은 상대할 수 있었다.
우순바가 불러낸 데스 나이트는 마계의 문양이 선명한 투구와 갑주를 입었다. 그것에는 어둠의 기운이 칙칙하게 배어 있었다. 에반스와 그 일행을 보자 데스 나이트는 서슴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갑주와 마찬가지로 거무튀튀한 검신에서는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콴! 처치해라.”
우순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스 나이트가 에반스와 그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천장에서 에반스가 두 번째 관문, 공중 광장에서 버린 무기들이 떨어졌다.
그러자 시스턴이 자신의 검을 찾아 들고 앞으로 나갔다.
“타앗!”
시스턴이 기합성과 함께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바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은광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런 시스턴의 검을 향해 데스 나이트가 시커먼 검을 쑤욱 내밀었다. 시스턴의 검과 데스 나이트의 검이 부딪쳤다.
처엉!
맑은 금속 소리와 함께 시스턴의 검이 유리 파편처럼 박살 나서 주위로 흩어졌다. 동시에 데스 나이트와 검을 부딪친 시스턴이 뒤로 훌러덩 나자빠졌다.
“크윽!”
그리고 시스턴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한 번의 격돌로 심하게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것을 보고 우순바가 비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데스 나이트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소드 마스터나 마도사가 아닌 자는 절대 데스 나이트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말이 끝나자 우순바가 힐끗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만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이 나서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앞서 괴물들과의 싸움에서 기력을 많이 소진했기 때문에 에반스도 안드레이 공작도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는 것이 거북했다. 하지만 상대인 우순바는 이미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순바는 숨어서 에반스 일행을 지켜봐 왔고 그들이 괴물과 싸울 때 체력의 9할과 마나의 7할 이상을 소진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그 둘이 나서도 데스 나이트인 콴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순바가 내세운 데스 나이트 콴은 보통의 데스 나이트와는 달랐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눈치 빠른 안드레이 공작은 바로 에반스의 계획을 알아챘다.
에반스가 싸우면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사이 안드레이 공작이 마도사급의 공격 마법을 준비해서 깔끔하게 한 방에 데스 나이트를 처치하자는 뭐 그런 계획 말이다. 그래서 에반스가 먼저 데스 나이트 앞을 막아섰다.
에반스가 사용하던 검은 석관 안에 있었다. 해서 에반스는 대신 루미나의 검을 뽑아 들었다. 에반스와 데스 나이트 콴이 서로 마주보고 섰다.
쿠우우우.
장내는 곧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최강자들인 소드 마스터와 데스 나이트가 대결을 시작하려고 하니 당연한 일이다.
먼저 선공을 가한 쪽은 데스 나이트 콴이었다. 시커먼 어둠을 머금은 콴의 검은 검이 대기를 갈랐다. 그러자 에반스가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을 가볍게 휘둘러 콴의 검의 경로를 막아 갔다.
하지만 막힐 것처럼 보이던 콴의 검이 경로를 바꿔 현란하게 움직였다.
파파파팟.
어지럽게 시꺼먼 검영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확실히 마계의 최강자인 데스 나이트다웠다. 그러나 에반스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에반스의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이며 일일이 시꺼먼 검영을 격파했다.
차차차창!
검과 검이 연거푸 격돌하며 부서진 오러가 산산이 흩뿌려졌다. 둘은 서로의 병기를 연이어 가격하며 탐색전에 들어갔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에반스는 꽤나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검끼리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에반스의 손목은 물론 팔까지 얼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에반스의 품속에는 마나 스톤이 있었다.
그 정도 피로는 마나 스톤이 충분히 풀어 주었다.
에반스는 줄곧 마지막 관문의 숙제인 ‘1’이란 숫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이 우순바가 말한 석실 안의 마지막 살아남은 1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윈스트런의 숙제가 간단할 리 없다는 것이 에반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에반스는 윈스트런이 자신에게 준 부정한 자들과 주술사에 천적인 힘을 배제한 채 데스 나이트와 싸우고 있었다.
‘만약 1이란 숫자가 더 큰 의미라면…….’
에반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서로를 탐색하기 위해 시작된 격돌은 점점 도를 더해 갔다. 둘 다 한껏 검에 최대한 기운을 불어넣었기에 검끼리 충돌할 때마다 굉음이 일었다.
콰콰쾅!
눈부신 섬광과 함께 사방으로 박살 난 에반스 오러 블레이드와 데스 나이트의 어둠의 기운이 흩뿌려졌다. 지켜보던 시스턴과 라일라, 루미나는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저, 저게 소드 마스터인가?”
“정말……. 대단하군.”
싸움은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열세인 에반스는 수비 위주로 데스 나이트를 상대했다. 그렇게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갑자기 데스 나이트의 투구 안에서 섬뜩하니 붉은 눈빛이 빛을 내뿜었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데스 나이트 관의 신형이 잔영을 남기고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눈으로는 도저히 데스 나이트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런 데스 나이트의 움직임에 상황이 판이하게 바뀌었다. 더불어 데스 나이트의 검 역시 몇 배는 더 빨라졌다.
“헉!”
에반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갑자기 데스 나이트 콴의 공격이 에반스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워진 것이다.
특히 데스 나이트가 기이하게 스텝을 밟는 순간 공격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이, 이 검술은…….’
에반스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데스 나이트 콴은 검의 궤적을 절묘하게 틀어서 에반스를 공격했다.
그 공격에 에반스는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도저히 데스 나이트 콴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서걱!
에반스의 왼팔이 데스 나이트의 검에 베였다.
“크윽!”
어둠의 기운이 베인 에반스의 팔을 타고 그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참기 힘든 고통을 만들어 냈다. 그 통증에 에반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비명을 내지른 후 에반스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경악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데스 나이트를 쳐다보며 외쳤다.
“너, 너는 누구냐?”
에반스의 말에 데스 나이트 콴의 뒤에 서 있던 우순바가 큰 소리로 웃었다.
“크하하하. 이제 깨달았느냐? 콴은 그냥 데스 나이트가 아니다. 콴은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다.”
“아아!”
우순바의 말에 몰래 마나를 끌어모으고 있던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란 데스 나이트가 생전에 소드 마스터였단 소리였다. 그냥 데스 나이트도 강한데 소드 마스터가 데스 나이트가 되었으니 얼마나 더 강하겠는가?
‘위기다.’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릴 때 데스 나이트 콴의 살벌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콴이 검을 휘두르자 대기가 찢겨 나갔다.
바우우웅!
그리고 허공으로 무수한 검은 선들이 생겨났다.
쐐애애액
그 검은 선들은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에반스의 몸을 난자해 들어갔다. 데스 나이트 콴의 검이 워낙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다.
에반스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데스 나이트 콴은 너무도 간단히 에반스의 검을 쳐 냈다.
“컥!”
에반스의 손아귀가 터져 나가며 피가 치솟았다. 그럼에도 에반스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에반스가 진짜 놀란 것은 데스 나이트가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라서가 아니었다. 그 데스 나이트가 에반스의 검술을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서, 설마 저 데스 나이트가 검공 라마스?’
에반스는 검술을 변화시켜 검공 라마스의 검술서 상의 검술을 사용했다.
흠칫!
그러자 데스 나이트가 놀라며 공격을 멈추고 수비 위주로 전환했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는 상대가 검공 라마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렉터 공작!’
제자들의 손에 비운의 운명을 맞은 렉터 공작이 눈앞의 데스 나이트라면 렉터 공작의 운명이 너무 가혹했다.
“렉터 공작님!”
에반스가 데스 나이트에게 말했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가 움찔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괴로운 듯 검을 들지 않은 손을 검은 투구에 올렸다.
“맙소사. 정말 렉터 공작님이었다니.”
에반스가 반쯤 넋이 나갔을 때 데스 나이트가 에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빠르기에 차이가 있었다. 데스 나이트는 에반스에게 접근해서 에반스와 마주 보고 서로 검을 마주 댔다.
-나를 아는가?
그때 검은 투구 속에서 데스 나이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스 나이트 콴은 마스터급 데스 나이트답게 죽기 전 자신이 누군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공작님께서 안배하신 검공의 검술서 주인입니다.”
-오오! 신께서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셨구나.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데스 나이트는 힘으로 에반스를 밀어 냈다. 그리고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에반스에게 접근해서 계속 말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헌데 어째서 이런 위험한 곳에 온 것이냐?
“저 역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사정인지 서로 대화를 나눌 그런 시간 말이다. 하지만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지금 한가하게 그런 얘기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 데스 나이트 콴이 뭔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좋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네.”
에반스는 데스 나이트가 시키는 대로 싸웠다. 그러다가 에반스의 검이 데스 나이트의 가슴에 꿰뚫었다. 아니 꿰뚫린 것처럼 에반스와 데스 나이트가 연기를 한 것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정말 데스 나이트가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끼아아아!”
데스 나이트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이어서 데스 나이트의 검은 투구의 눈구멍에 서린 안광이 잦아들면서 데스 나이트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저, 저런…….”
누구보다 데스 나이트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은 우순바였다. 아니 분명 잘 싸우던 콴이 왜 쓰러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슈우욱!
데스 나이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우순바는 데스 나이트 콴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데스 나이트 콴의 영혼이 소멸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 콴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게끔 데스 나이트 콴이 연기를 한 것뿐이었다.
데스 나이트 콴이 당하자 우순바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케스피를 소환했다. 소환 대상 1호였던 케스피는 우순바가 소환술을 펼치자마자 소환되어 우순바 앞에 나타났다.
“쿠워어어!”
마계괴수를 교잡시켜 만들어 낸 케스피가 에반스와 그 일행들 앞에 등장했다.
“크하하하. 어떻게 운 좋게 데스 나이트를 쓰러트렸다만 케스피는 다를 것이다. 내 자식 케스피야. 마음껏 포식해라.”
우순바가 에반스와 그 일행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케스피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케스피가 그 말을 알아듣고 큰 소리로 포효했다.
“쿠어어어!”
녀석의 흉측한 모습과 그 포효 소리에 에반스와 그 일행들은 모두 등골이 오싹해졌다.
간혹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었다. 에반스와 그 일행은 케스피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랐다. 마계 괴수가 얼마나 강하며 그런 마계 괴수들을 교잡시켜 탄생한 케스피가 얼마나 무서운 녀석인지 에반스 일행이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케스피를 그냥 동굴에서 상대했던 몬스터들과 별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에반스는 데스 나이트와 싸우다가 다친 손을 루크에게 치료받았다.
“크륵!”
케스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나 자신을 보면 두려워했는데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인간들을 보고 케스피는 상처를 입었다. 녀석의 지능은 인간과 비슷했다. 때문에 녀석의 감수성은 인간만큼이나 예민했다.
한마디로 단단히 삐친 케스피는 그 분노를 터트리며 인간들을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부웅!
“허억!”
에반스 일행이 황급히 몸을 피하면서 케스피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케스피의 위력적인 공격에 에반스 일행은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 위력이나 빠르기가 동굴의 몬스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화들짝 놀라는 인간들을 보며 케스피는 기뻐서 입을 쩍 벌리고 괴성을 내질렀다.
“쿠워어!”
그때 에반스가 품속에서 네 개의 독이 든 병 중 하나를 꺼내서 녀석의 입속에 던졌다. 에반스가 그렇게 한 것은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우순바가 내세운 데스 나이트도 제압하지 못한 마당에서 녀석이 그보다 더 강하다고 떠들어 댄 괴물을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윈스트런의 힘을 사용하자니 자칫 케스피가 죽기라도 한다면 마지막 관문의 숙제인 ‘1’의 해답을 밝혀낼 수 없을지 몰랐다.
‘내가 생각한 숫자 1의 의미가 하나라는 큰 뜻이라면…….’
에반스는 고심하며 어둠의 주술사 크로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독을 괴수에게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이라도 상대적으로 덩치가 훨씬 더 큰 괴수에게는 그렇게 치명적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케스피의 덩치에 비하면 작은 약병은 녀석의 눈에 띄지도 않았다.
팅!
독이 든 병은 녀석의 이빨에 맞아서 독 기운이 그대로 녀석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것도 모르고 케스피는 드디어 인간들이 자신을 두려워하자 기꺼워하며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서려 했다.
꾸룩!
그때였다. 갑자기 케스피의 배 속이 요동을 쳤다.
“쿠워어어!”
그리고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이 인상적인 녀석의 손이 녀석의 배를 잡았다. 그리고 앞발을 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스피! 왜 그러느냐?”
우순바가 소리쳤지만 케스피는 그 소리도 들은 척 만 척하고 석실 한쪽 구석으로 움직였다.
뽀오옹! 푸지지직!
요란한 소음과 함께 잠시 후, 고약한 냄새가 석실 내 가득했다. 설사를 하고 난 케스피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괴성을 내질렀다.
“쿼어어어!”
그리고 설사까지 했으니 그만큼 배가 고파진 녀석은 인간들을 잡아먹기 위해 움직였다.
“쿠륵!”
하지만 얼마 움직이지 못해서 녀석은 다시 새하얗게 질려서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을 보고 우순바가 에반스와 그 일행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네 이놈들. 케스피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우순바의 그 말을 듣고 에반스 일행은 기가 찼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성격 급한 라일라가 버럭 화를 낼 때 안드레이 공작이 나섰다. 직접 제자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에반스가 나섰다.
“저자는 지금까지 상대한 어둠의 주술사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자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내 죽은 제자의 복수를 하지 말고 꽁무니라도 빼란 소린가?”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에게 좀 격하게 말했다. 하지만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불과 어제 공작님께서는 저자의 제자에게 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지금 나선다면 공작님의 생명도 위험합니다. 과연 그것이 죽은 제자 분께서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공작님의 복수와 윈스트런의 마지막 관문까지 한꺼번에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둘을 한꺼번에?”
안드레이 공작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 안드레이 공작의 옆으로 루크가 다가섰다. 그리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하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가 아닙니까?”
루크의 하나라는 말에 안드레이 공작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 ‘1’이란 의미가…….”
에반스도 안드레이 공작이 숫자 1의 큰 의미를 깨달았음을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순간 안드레이 공작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영혼이 소멸되어 갑옷만 남은 데스 나이트를 쳐다보았다.
그때 자신을 앞에 두고 에반스 일행이 속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다가 미소까지 짓는 것을 보고 우순바가 울컥해서 말했다.
“흥. 어디 그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지고 나서도 그렇게 웃는지 두고 보자.”
우순바는 자신의 모든 마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그 엄청난 마력에 석실이 요동쳤다.
쿠르르르!
그때 에반스가 품속에 넣고 있던 마나 스톤을 슬그머니 꺼내서 옆에 살짝 던져두었다.
우순바는 온몸에 마력이 넘쳐 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뭐, 뭐야?”
좀 전까지 넘쳐 나던 마력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순바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마력이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그 마력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언제 움직였는지 에반스가 우순바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헉!”
놀란 우순바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우순바는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우순바를 따라붙으며 에반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목숨만 살려 두마.”
그리고 발로 우순바의 등 뒤를 강하게 걷어찼다. 발에 살짝 마나까지 실었기 때문에 그 파괴력은 대단했다.
빠각!
에반스의 발길질에 우순바는 등 쪽 척추가 부러지면서 맥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두 눈을 깜박이며 말하고 숨 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모, 몸이, 몸이 움직이질 않아. 으아악!”
우순바가 괴성을 내질렀지만 에반스는 그를 무시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석실의 중앙으로 가서 외쳤다.
“마지막 관문인 ‘1’은 우리 모두가 하나란 뜻이요. 하지만 사람이 다르고 그 개성이 다르니 모두가 하나가 되기란 힘든 일일 터, 하지만 지금 싸움이 없는 우리는 하나요.”
에반스의 말이 끝나자 마지막 관문의 숙제를 내어 준 그 목소리가 석실 안에 울려 퍼졌다.
-훌륭하다. 만약 너희들끼리 싸워 희생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석실 천장의 한가운데에서 작은 문이 열렸다. 그리고 빛으로 감싸인 뭔가가 그 안에서 나와서 에반스 일행이 있는 머리 위로 날아왔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이상하구나. 네가 처음 상대했던 데스 나이트는 소멸 되지 않았느냐?”
안드레이 공작도 에반스가 말한 숫자 1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염려한 것이 소멸한 데스 나이트였다. 데스 나이트가 소멸함으로써 석실 안에서 모두가 하나인 ‘1’의 의미가 깨졌다고 안드레이 공작은 생각했던 것이다.
덜컹!
그때 소멸된 줄 알았던 데스 나이트가 다시 살아났다.
“저, 저건…….”
에반스는 그런 안드레이 공작을 보고 싱긋 웃어 보였다. 그때 되살아난 데스 나이트가 에반스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저자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지상의 데스 나이트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데스 나이트가 된 렉터 공작이 손짓으로 우순바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순바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케스피도 마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일행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물체가 말을 했다.
-자, 누가 나의 소울 베슬을 가질 것인가?
빛나는 물체의 물음에 석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에반스는 자신이 알던 윈스트런과 소울 베슬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울 베슬은 윈스트런이 죽기 전 영혼의 일부였다. 그러니 그가 죽고 난 영혼과 인연을 맺은 에반스를 소울 베슬 속의 윈스트런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소울 베슬 속의 윈스트런의 능력은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소울 베슬을 자신이 차지하게 되면 윈스트런의 그 엄청난 능력의 일부를 얻게 됨도 알았다.
윈스트런이 에반스에게 약속했던 검공 라마스의 검술을 완성시켜 주겠다는 것도 아마 소울 베슬의 힘을 얻게 되면 이루게 될 터였다. 그것을 알고 죽은 윈스트런의 영혼이 에반스를 찾았을 테니 말이다.
“나요. 내가 소울 베슬의 주인이요.”
에반스의 외침에 빛나던 물체가 홀연히 에반스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나 윈스트런이 내 영혼과 힘의 일부를 남기니 부디 좋은 일에 써 주기 바란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빛나던 물체에서 한줄기 빛이 에반스의 머리 위로 비췄다. 더없이 포근한 기운에 에반스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방대한 양의 지식들이 소울 베슬에서 에반스의 뇌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서 윈스트런의 주술과 마력을 에반스는 몸으로 흡수했다. 에반스에게 그 시간이 마치 몇 년이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 에반스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채 5분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에반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머리 위에 있던 빛나던 물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의 일행과 데스 나이트들이 에반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표정의 루미나가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반스가 살짝 웃으며 루미나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다.”
에반스의 말을 듣고 루미나가 그제야 안도하며 웃었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에반스에게 물었다.
“그래, 얻은 것은 많은가?”
“…….”
에반스는 대답 대신 더없이 만족스런 미소로 화답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좋은 일인 모양이니 축하한다.
데스 나이트 콴이 에반스를 보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당분간 저와 같이 계시지요.”
데스 나이트를 소유하려면 엄청난 마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정도 마력은 윈스트런의 소울 베슬에서 흡수한 마력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마력이 더 필요하면 바로 구할 수도 있었다.
에반스는 척추가 박살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우순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우순바의 손을 잡았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우순바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우순바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윈스트런의 지식과 주술을 흡수한 에반스였다. 그중 에반스는 주술사의 마력을 흡수하는 주술을 기억해 냈다.
우순바의 몸속에 있는 막대한 량의 마력을 에반스가 흡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우우우웅!
그 주술이 시작되자 우순바의 몸속 마력이 에반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손을 놔라. 어서.”
우순바는 버럭 소리를 쳤지만 그런다고 손을 놓을 에반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십여 분을 고래고래 소리치던 우순바도 마력이 절반 이상 빠져나가자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잠잠해졌다.
그렇게 다시 십여 분이 더 흘러 우순바의 마력을 모두 다 흡수한 에반스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우순바가 끼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그 반지는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반지였다.
그 반지를 에반스가 자신의 손가락에 끼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에반스가 손을 내밀자, 데스 나이트 콴이 연기로 화해서 그 반지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 뒤 에반스는 우순바의 검은 로브를 뒤졌다. 그러자 그 안에서 독이 든 병이 하나 나왔다. 그것을 보고 에반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쭙잖게 자신이 우순바를 제압하지 않고 독하게 단번에 그의 척추를 박살 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만약 우순바가 손을 쓸 수 있어 독이 든 병을 열었다면 석실에서 살아남은 존재는 에반스와 이제 설사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마계괴수끼리 교잡해서 탄생한 케스피 뿐일 터였다.
에반스는 독이 든 병을 품속에 수습하고, 우순바가 척추가 박살 나고 마력까지 사라지자 완전히 갈팡질팡하는 케스피에게 다가갔다.
“쿼어어!”
녀석이 괴성을 내지르며 에반스에게 경계심을 드러냈지만 에반스가 우순바의 마력에 윈스트런이 남긴 마력까지 끌어 올리자 녀석은 겁을 집어먹고 에반스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혀를 내밀었다. 마치 개가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듯 말이다.
케스피도 결국 마계의 괴수였다. 마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힘에서 자신보다 우월한 에반스에게 케스피가 굴복하는 것은 당연했다. 케스피가 꼬리까지 흔드는 것을 보고 에반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부를 때까지 마계로 가라.”
에반스의 명령에 케스피는 검은 연기로 변해서 마계로 들어갔다. 케스피를 처리하고 나자 에반스는 일행에게로 갔다.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만 남겨 두고 나머지 일행들을 데리고 석실 밖으로 나갔다.
안드레이 공작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우순바에게 다가갔다. 우순바는 척추가 박살 났어도 입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에반스에게 마력을 빼앗기고 나자 그 입도 침묵했다.
“내 제자를 죽일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한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입을 꾹 닫고 있던 우순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의 제자가 그러더군. 제 스승이 자신의 복수를 해 줄 거라고 말이야. 그 말이 실현되었군.”
“내 제자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
안드레이 공작이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자 우순바가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래야지. 이 마당에 나도 더 살고 싶지 않다. 단 너의 제자처럼 나도 죽기 전에 이 말을 하고 싶군.”
“뭐냐?”
“나의 복수는 내 동생 우툴라가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닌 너희 인간들이 공포에 떨고 절망에 절규하는 대재앙이 될 것이다.”
아예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우순바를 보고 안드레이 공작의 입에서 마법이 시전되었다.
“매직 미사일!”
“컥!”
마법 화살이 우순바의 가슴 한가운데 구멍을 만들었다. 우순바는 비명과 함께 심장이 꿰뚫려 즉사했다. 우순바의 핏물이 석실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며 안드레이 공작이 죽은 자신의 제자를 위해 마지막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안드레이 공작이 석실에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에반스와 일행이 그를 맞았다.
“자 모두들 손을 잡고 눈을 감도록.”
에반스의 말에 일행들이 둥글게 서서 서로 손을 잡자 마지막으로 에반스가 양손에 각각 루미나와 시스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주술을 사용했다.
스르르르!
에반스와 그 일행은 검은 연기로 화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