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스의 의도는 동굴 밖에서 등장한 훼방꾼들로 인해 무산되었다. 안드레이 공작과 시스턴이 팔짱을 끼고 방심하고 있던 어둠의 주술사를 건드리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안드레이 공작은 크로아를 발견하자마자 마법을 시전했다.
“기가 파이어!”
화르르르!
거대한 불구덩이가 크로아를 향해 날아갔다. 갑작스런 마법 공격에 크로아는 어둠의 장막 뒤로 숨었다.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의 화염 마법은 6서클로 어둠의 장막 안까지 태워 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갖췄다.
안드레이 공작은 화염이 어둠의 장막으로 숨은 크로아를 휘감는 것을 보고 일단 공격이 성공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크로아는 다른 어둠의 마법사들과 그 수준이 달랐다. 마력도 여타의 어둠의 마법사들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마도사급, 6서클의 화염 마법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의 마법 공격은 크로아를 놀라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안드레이 공작의 마법이 크로아에게 직격할 때 시스턴은 자신의 스승인 에반스를 구하기 위해서 거구의 미노타우로스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에반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안드레이 공작의 마법 공격으로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이 주춤했다. 에반스가 바라던 빈틈이 생긴 것이다. 에반스는 일단 미노타우로스라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동굴 벽을 타고 뛰어올랐다.
그런데 그때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시스턴이 무모하게 공격을 가했고 그것을 본 미노타우로스의 손이 시스턴을 향해 휘둘러졌다.
에반스는 공중에 솟구친 채 이대로 미노타우로스의 목을 벨지 아니면 시스턴을 구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타앗!”
에반스의 결정은 시스턴을 구하는 것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목을 베더라도 녀석의 손이 시스턴을 가격한다면 시스턴의 생명이 위험했다. 그래서 에반스는 오러 블레이드로 시스턴의 향해 휘두른 미노타우로스의 팔을 베었다.
서걱!
“쿼어어어!”
동굴의 웬만한 기둥만큼 큰 녀석의 굵직한 팔이 에반스의 검에 맥없이 잘려 나갔다. 그러자 녀석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변신해서 상처를 입으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구르탄에게 전달되었다. 구르탄은 미노타우로스의 팔이 잘리자 자신의 팔이 잘린 듯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그동안 다른 존재를 괴롭힐 줄만 알았지 자신이 이렇게 당하는 것은 처음인 구르탄이었다. 그렇다 보니 팔이 잘린 녀석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때 크로아가 소리쳤다.
“구르탄. 뭐하는 게냐?”
크로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크로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자른 에반스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뛰었다.
에반스는 미노타우로스의 팔을 자른 뒤, 땅에 착지했다가 바로 시스턴에게 뛰어갔다. 자칫 위험했던 시스턴은 에반스가 자신에게 뛰어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시스턴에게 에반스가 외쳤다.
“여기서 나가라. 어서.”
시스턴도 강하지만 어둠의 주술사들을 상대하기는 아직 벅찼다. 에반스의 외침에 시스턴은 일단 뒤돌아서서 동굴 바깥쪽으로 뛰었다.
쿵쿵쿵!
그때 에반스를 향해 한쪽 팔이 잘린 미노타우로스가 뛰어왔다.
“슬라이드!”
그때 루크의 외침과 함께 미친 듯 뛰어오느라 정신이 없었던 미노타우로스가 미끄러지며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에반스가 바라던 빈틈이 다시 생긴 것이다. 하지만 에반스는 미노타우로스의 머리 위로 몸을 솟구치지 않았다. 에반스도 단숨에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자르겠다는 욕심을 버린 것이다.
그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쓰러지자마자 미노타우로스는 남은 한쪽 팔으로 머리 위를 강하게 휘둘렀다. 돌처럼 딱딱해진 녀석의 피부 덕에 녀석이 휘두른 손과 팔에 부딪치기만 해도 인간의 몸인 에반스는 견뎌 내기 어려웠다.
대신 에반스는 땅으로 뛰어서 녀석의 잘린 팔 아래 옆구리에 길게 검을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가 맺힌 검은 주술로 돌처럼 딱딱해진 녀석의 피부도 간단히 갈라 버렸다.
녹색의 핏물이 튀고 쩍 벌어진 녀석의 옆구리에서 장기가 흘러나왔다.
“쿼어!”
녀석은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옆구리에 흘러나온 장기를 남은 한 손으로 몸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변신을 풀고 바로 트롤로 변신했다. 그러자 녀석의 잘린 팔과 옆구리 상처가 아물었다. 또한 잘린 팔에서 다시 팔이 재생했다.
그것을 보면서 에반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구르탄이 트롤로 변했을 때가 기회였다. 제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이라도 목이 잘리고 심장이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미노타우로스와 트롤은 천지 차이였다. 에반스는 재생이 진행되고 있던 구르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엄청난 위력이 실린 마력이 에반스를 덮쳤다. 위기의 순간 크로아가 구르탄을 구하기 위해 에반스를 공격한 것이다.
“이런!”
에반스는 트롤로 변신한 구르탄을 베지 못하고 그대로 검의 방향을 바꿔서 검을 회전시켰다. 오러 블레이드로 만든 푸른 원형의 방패가 마력과 부딪쳤다.
콰앙!
그 폭발력에 에반스가 뒤로 밀렸다. 에반스는 마력을 막고 나자 다시 검을 들고 트롤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좀 전까지 있었던 트롤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의 머리 위에 둥실 떠 있는 덩치 좋은 검은 로브의 후드를 덮어쓴 자를 발견했다. 그자의 후드 안에서 자줏빛으로 빛나는 두 개의 눈이 에반스와 마주쳤다.
“이놈. 죽어라.”
마력에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구르탄은 변신을 풀고 자신의 마력으로 에반스를 상대하기로 했다.
구르탄이 두 손을 내뻗자 강력한 두 개의 마력이 에반스를 향해 날아갔다. 에반스는 마력을 막는 대신 몸을 날렸다.
콰쾅!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에반스는 이미 그 폭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에반스가 구르탄을 상대로 비교적 우위에서 싸우고 있다면 안드레이 공작은 크로아의 공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애당초 화염 마법을 너무 맹신한 것이 잘못이었다.
어둠의 장막에서 마력을 동원해서 안드레이 공작의 화염 공격을 별 피해 없이 막아 낸 크로아는 이후 안드레이 공작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주술로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런 크로아의 공세에 안드레이 공작은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다.
하지만 이쪽에는 에반스 말고도 루크라는 마법사가 있었다. 에반스를 도와서 미노타우로스를 미끄러지게 만든 뒤 루크는 안드레이 공작을 돕기 위해 나섰다.
“썬더 볼트!”
파지지직!
5서클의 전격 마법이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크로아에게 직격했다. 기습적인 마법 공격에 몸에 겹겹이 주술로 방어막을 쳐 둔 크로아는 별로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꽤 많이 놀랐다.
그러면서 안드레이 공작을 향해 쏟아 내던 공격이 주춤 하는 사이 안드레이 공작도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기가 파이어!”
화르르르!
다시 6서클의 화염 마법이 시전되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크로아의 마력으로 얼마든지 방어가 가능했다.
크로아가 한 손을 내뻗자 검은 연기가 뭉클 피어올라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어리와 부딪쳤다.
콰앙!
폭발과 함께 불덩이가 검은 연기를 휘감았다. 하지만 검은 연기는 불길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불길을 뒤덮었다. 잠시 뒤 안드레이 공작의 화염 마법은 검은 연기에 의해 사그라지고 말았다.
“헉!”
자신의 화염 마법이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안드레이 공작은 꽤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것이 다시 위기를 자초했다. 멍하니 서 있던 안드레이 공작을 크로아가 마력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위험합니다.”
루크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안드레이 공작이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실드!”
쾅!
하지만 실드가 다 쳐지기 전에 마력이 폭발했고 안드레이 공작의 그 충격에 입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공작님!”
안드레이 공작이 당하는 것은 보고 루크가 기겁을 하며 놀라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런 루크를 보고 크로아가 비릿하게 웃었다.
크로아가 그 두 사람을 향해 두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마력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휘리리릭!
그때 흐릿하니 뭔가가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 앞에 불쑥 나타났다.
콰쾅!
크로아가 쏘아 보낸 마력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에 부딪쳐서 폭발했다. 그리고 그 폭발이 사그라지자 검을 든 에반스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반스가 오러 블레이드로 원형의 방패를 만들어서 크로아가 쏘아 보낸 마력을 막아 낸 것이다.
구르탄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에반스의 등장에 크로아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뒤쪽을 두리번거리던 크로아가 동굴의 천장을 보고 절로 탄식했다. 그의 사제인 구르탄이 동굴 천장에 박제처럼 매달려 있었다. 고개를 축 늘어트린 구르탄에게서 이미 생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반스는 구르탄을 상대하면서 윈스트런이 말했던 어떤 부정한 존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라는 약속이 왜 지켜지지 않는지 의아했다. 윈스트런의 말대로라면 어떤 주술도 에반스에게는 통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구르탄은 그런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는 듯 에반스 앞에서 변신도 막 해 댔고 마력으로 마구 공격까지 해 댔다. 하지만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에반스가 어둠의 주술사 로브카를 죽일 때도 그 약속은 지켜졌었다.
‘뭐가 문제지?’
에반스는 의아해 하면서 어제와 오늘의 자신이 뭐가 다른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쾅!
구르탄의 마력이 에반스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그 뒤에서 폭발했다. 아무리 에반스라도 구르탄의 마력에 직격당한다면 몸이 남아날 리 없었다.
에반스는 이리저리 몸을 피하면서 구르탄의 마력을 피해 냈다. 그런 에반스를 내려다보며 구르탄이 소리쳤다.
“어디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두고 보자.”
구르탄의 마력은 아직 생생했다.
그때 몸을 움직이던 에반스는 품속에 있는 뭔가가 자꾸 거슬렸다.
‘뭐지? 아! 마나 스톤!’
그때 에반스는 자신이 어제와 다른 것이 뭔지 비로소 깨달았다. 에반스가 어둠의 주술사 로브카를 제거할 때 마나 스톤은 에반스의 짐 가방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뒤 에반스는 짐 가방보다 자신의 몸에 마나 스톤을 지니고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지금까지 품속에 넣고 있었다. 그 덕에 어제 밤에는 독으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설마 마나 스톤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나 스톤을 빼고 나면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는 에반스였다. 에반스는 만약 마나 스톤 때문에 주술에 천적인 자신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일단 마나 스톤을 몸에서 떼어 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품속에서 마나 스톤을 꺼내서 한쪽에 던져두었다. 그랬더니 공중에 뜬 채 에반스를 향해 무차별하게 마력을 쏘아 대던 구르탄이 갑자기 경악했다.
“뭐, 뭐야?”
좀 전까지 가득했던 그의 체내 마력이 갑자기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마력을 쏘는 것은 고사하고 공중에 몸을 띄울 마력조차 없었다. 그래서 몸이 막 아래로 추락하려 할 때였다.
“헉!”
어느새 에반스가 몸을 솟구쳐서 구르탄과 마주보고 있었다. 놀란 구르탄이 에반스를 향해 몸을 덮치려 했다. 어차피 마력이 없이 추락할 바에야 에반스를 덮쳐서 같이 동반 추락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푹!
하지만 덮치는 구르탄의 배에 에반스가 주먹을 찔러 넣었다. 그것도 마나를 실어서 말이다. 그 여파로 구르탄의 몸이 뒤로 날아갔고 천장에 강하게 부딪쳤다.
퍽!
“컥!”
비명과 함께 구르탄이 입에서 피를 내뿜었다. 에반스의 주먹에 실린 마나가 구르탄의 내부 장기를 휘저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장에 부딪쳤다가 추락하는 구르탄을 에반스가 다시 발로 걷어 찼다.
우두둑!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에 마나가 실렸고 그 발에 얼굴을 맞은 구르탄은 코뼈가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면 뼈 전체가 으스러져서 뇌수를 흘리며 천장으로 날아갔다.
푹!
그리고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있던 뾰족한 종유석에 박혔다. 이미 얼굴을 발에 걷어차일 때 구르탄은 즉사한 터였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어둠의 주술사를 처단한 에반스가 시선을 남은 어둠의 주술사에게 돌렸을 때, 고전하고 있던 안드레이 공작이 위기에 처했고, 그런 안드레이 공작을 구하겠다고 루크 역시 무모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저런…….”
에반스는 즉시 그쪽으로 몸을 날렸고 우선 오러 블레이드로 크로아의 마력을 막아 냈다.
크로아도 에반스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천장에 박힌 채 죽어 있는 사제 구르탄을 보고 다시 에반스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크로아는 자신의 마력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체내에 마력이 전부 사라진 것을 알고 경악했다.
하지만 크로아는 루브카와 달랐다. 루브카는 경황 중에 자신에게 독이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지만 크로아는 아니었다.
크로아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에반스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에반스라도 크로아가 품속에서 뭘 끄집어내는 것까지는 제지하지는 못했다. 크로아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루크가 루브카에게서 발견한 그 독이 든 약병이었다.
“루크. 어서 공작님을 데리고 동굴에서 나가.”
다행히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가 서 있는 방향은 동굴 입구 쪽이었다. 에반스의 외침에 안드레이 공작이 크로아를 쳐다보았고 그의 손에 들린 약병을 알아보았다.
“저건 독!”
“어서 나가라.”
에반스가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안 돼. 저건 독이다. 어둠의 주술사의 독은 해약도 없단 말이다.”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가 재차 큰 소리로 외쳤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어서 나가십시오.”
“하지만…….”
“반드시 살아 나갈 테니 나가십시오.”
에반스가 자신 있게 외쳤다. 그 말에 안드레이 공작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루크의 부축을 받으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멈춰!”
그때 독을 들고 있던 크로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에반스가 크로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상관 말고 어서 나가십시오.”
“이놈. 죽고 싶으냐?”
크로아가 독이 든 병을 금방이라도 깨 버릴 듯 행동하며 에반스를 겁박했다. 하지만 에반스는 태연하게 대응했다.
“그 약병이 깨지면 너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텐데. 뭐 그 독에 해약이 있다면 할 말 없지만. 내가 알기로 너희 어둠의 주술사들은 해약 없는 독을 만드는 게 특징이라며? 어디 죽고 싶거든 그 약병을 깨 봐라.”
“뭐, 뭐라고?”
오히려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에반스로 인해 크로아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에반스의 말대로 약병이 깨지면 동굴 안쪽에 있는 크로아는 바로 독에 중독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해약 따윈 크로아에게 없었다.
병이 깨지면 근방 10미터 안에 있는 생명체는 무조건 독에 중독되었다. 크로아의 독은 공기에 노출되면 즉시 연기로 변해 생명체를 중독시켰다. 때문에 에반스 주위 어디라도 10미터 안에서 독이 든 병이 깨지면 에반스는 무조건 중독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위치가 안 좋다.’
지금 크로아는 어떻게든 동굴 입구 쪽에서 있는 에반스와 위치를 바꿔야 했다. 그래야 10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에반스에게 독이 든 병을 집어 던진 후, 동굴 밖으로 달리면 독에 중독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크로아는 에반스의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든 동굴 입구 쪽에 서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허락할 에반스가 아니었다.
“움직이지 마라.”
에반스가 살기를 내뿜자 크로아는 움찔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크로아도 대범하게 독이 든 병을 내밀며 동굴 벽을 따라 동굴 입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베어 봐라. 내 손이 잘리면 이 병 역시 무사하진 못할 테니.”
크로아의 말대로 에반스가 검을 휘둘러서 자칫 크로아의 손이라도 베게 되면 녀석이 쥐고 있던 독이 든 병이 자칫 깨질 수 있었다. 때문에 에반스도 동굴 입구 쪽으로 움직이는 크로아를 베지 못하고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그래. 가만히 있어라.”
크로아는 천천히 동굴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에반스가 서 있는 쪽에서 좀 더 안쪽, 그러니까 크로아가 있는 곳보다 더 안쪽에 에반스가 던져둔 마나 스톤이 보였다. 에반스는 마나 스톤을 믿고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크로아는 이대로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에반스는 독의 든 병을 들고 있는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독이 든 병이 깨지는 순간 에반스도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타앗!”
에반스가 아직 동굴 안쪽에 있는 크로아를 덮쳤다.
“미친 놈!”
검을 휘두르는 에반스를 향해 크로아가 독이 든 병을 쥔 손을 쑤욱 내밀었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만약 에반스가 검을 휘둘렀다면 크로아의 손은 잘릴 것이고 잘린 손과 함께 땅에 떨어진 독이 든 병은 깨질 터였다. 그럼 모든 게 끝이었다.
‘뭐, 뭐야?’
그런데 고통이 없었다. 눈을 뜨니 독이 든 병을 쥔 손이 아직 무사했다.
“휴우!”
크로아는 먼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을 덮치려 했던 에반스를 찾았다. 그때 에반스는 크로아를 베는 척 하다가 방향을 틀어서 마나 스톤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고 무사히 마나 스톤을 품속에 챙겨 넣었다.
크로아는 에반스가 뭔가를 챙겨 품속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때 크로아는 자신과 에반스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10미터!’
크로아와 에반스 사이의 거리가 얼추 10미터는 됨직했다. 크로아는 들고 있던 독이 든 병을 에반스에게 던지려 했다. 그런데 에반스가 그것을 눈치채고 먼저 움직였다.
파팟!
에반스가 남긴 잔상이 사라지기 전 이미 5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이런…….”
크로아가 놀라며 동굴 입구 쪽으로 뛰려 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에반스가 빨랐다. 다급해진 크로아는 다시 독이 든 병을 에반스를 향해 내밀었다. 어떻게든 에반스를 저지시켜 계속 동굴 안쪽에 그를 가둬 두려는 속셈이었다.
당연히 에반스는 그 독이 든 병을 들고 있는 크로아의 손을 베지 말고 동굴 안쪽으로 물러나야 옳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서걱!
“크악!”
크로아의 손목이 잘렸다. 피가 뿜어지고 잘린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
그리고 독이 든 병이 깨졌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크로아와 에반스의 코와 입, 그리고 피부로 침투해 들어갔다.
“컥!”
먼저 강한 독 기운에 목이 잠겼다.
“크으으윽. 미, 미친 놈.”
크로아가 겨우 에반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에반스도 괴로운 듯 몸을 떨면서 말했다.
“크윽. 너, 너는 죽고 나, 나는 산다.”
에반스가 아직 살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존경스럽기까지 한 크로아였다. 크로아가 만든 이 독은 해약이 없었다. 중독이 되면 크로아도 무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크로아는 에반스보다 빨리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에반스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다. 어제 밤에 했었던 독에 내성을 키우겠다고 벌였던 그 무모한 짓이 지금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독의 성질은 달랐지만 루브카의 독도 크로아가 만든 독 못지않게 지독했던 탓에 독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은 한 번 겪어 봐서 견딜 만한 에반스였다.
잠시 뒤 현기증과 함께 에반스와 크로아의 몸에 검붉은 반점들이 생겨났다. 그때 크로아는 에반스가 자신과 비슷하게 독의 증상이 일어나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크로아는 독을 연구하며 독에 대한 내성이 강했다. 하지만 에반스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에반스는 벌써 독이 뇌와 심장에 작용해서 죽었거나 그대로 목을 쥐어뜯으며 쓰러졌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에반스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독으로 인한 고통이 대단할 텐데도 말이다. 잠시 후 피부에 생긴 반점들이 부풀어 오르며 기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나둘이던 기포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 조금 뒤에는 에반스와 크로아의 온몸을 덮어 버렸다.
크로아는 온몸이 개미에게 뜯어먹히는 것처럼 따갑고 간지러운 느낌, 소름이 쫙 돋는 느낌을 억눌러 참으며 독의 고통을 견뎌 냈다.
그런데 그때 에반스에게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에반스는 마나 로베이션을 하며 이제나저제나 마나 스톤이 반응해 주기를 기다렸다.
이대로 기포가 터지면 에반스도 위험했다. 다행히 기포가 터지기 전에 마나 스톤이 반응을 보였다.
우우우웅!
에반스의 품속에 넣어 둔 마나 스톤이 빛을 발하며 드디어 독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순간 에반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크로아의 몸을 뒤덮었던 기포들은 점점 더 부풀어 오르다가 누런 고름을 쏟아 내며 터져 버렸다. 그 터진 자리에 피부 조직이 뭉그러졌다.
이어서 크로아의 머리카락이 독 기운에 견디지 못하고 술술 빠졌다. 그렇게 5분여 뒤 크로아의 머리카락은 한 올도 남지 않았고 그의 검은 로브 역시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독액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안구에까지 독이 닿아 시뻘겋게 충혈된 크로아는 시력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에반스가 자신과 달리 독을 몰아내고 정상으로 몸이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크흐흐흐. 이제 죽었겠지?”
크로아는 에반스가 이미 죽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때 에반스는 온몸에 부풀어 오른 기포도 말끔하게 사라졌고, 뭉그러진 상처도 원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이미 마나 스톤도 제 할 일은 다했다는 듯 반응이 없었다.
크로아의 말을 듣고 에반스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로아는 독 기운에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마저 잃었다. 그래서 에반스가 자신에게 접근해 와도 알지 못했다.
에반스는 잠시 크로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크로아의 가슴 쪽 검은 로브가 녹아내리면서 그 안쪽에 약병이 살짝 보였다.
에반스는 손을 뻗어서 검은 로브 안쪽의 약병을 꺼냈다. 그래도 신체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크로아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크로아의 독 기운이 재차 에반스에게 침투했지만 이미 그 독 기운에 내성이 생긴 에반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에반스는 크로아의 로브 안쪽에서 네 개의 독이 든 병들을 챙겼다. 그 독들은 에반스가 앞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로아처럼 마력도 대단한 자가 이렇게 독에 죽어 갈 정도라면 에반스의 수중에 있는 네 개의 독들은 충분히 활용 가치가 있었다.
“이건 내가 잘 쓰마. 그러니 잘 죽어라.”
에반스는 마지막 남은 크로아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거뒀다. 에반스의 검이 크로아의 목을 자르자 이미 정신을 잃은 크로아는 맥없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몸과 머리는 독에 녹아 사라졌다.
에반스는 네 개의 독이 든 병을 들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때 동굴 밖에서 초조하게 에반스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 그리고 시스턴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에반스를 껴안으려 했다.
“어이. 조심해. 여기 독이 든 병이 있다고.”
에반스가 독이 든 병을 네 개나 보여 주자 그들을 기겁을 하며 놀랐다.
“헉!”
그리고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에반스를 피해서 멀찍이 물러났다. 그때 에반스가 그들에게 물었다.
“라일라와 루미나는?”
“아!”
그제야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 시스턴은 황급히 아지트로 정한 동굴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참하게 죽어 있는 셰르파 멜란과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라일라와 루미나를 발견했다.
그녀들을 살피던 안드레이 공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히 주술로 잠든 것뿐이다.”
주술에 대해 잘 아는 안드레이 공작이 잠시 뒤 그녀들에게 걸린 주술을 풀었다. 깨어난 그녀들은 일행들을 보고 안도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동굴에서 입은 내상을 포션과 마나 로테이션으로 치료한 상태였다. 그래서 무리 없이 내외상이 심한 라일라와 루미나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때 에반스와 시스턴은 비참하게 죽은 셰르파 멜란의 시신을 수습해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날이 저물었다.
죽은 셰르파 멜란을 대신해서 시스턴이 라일라와 루미나가 잡아 온 요크 고기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멜란의 가방에 남은 호밀과 옥수수 가루로 수프를 끓였다.
“같이 다니던 일행이 죽었는데 이렇게 또 저녁을 먹어야 하다니…….”
루미나가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루미나를 달래며 라일라가 말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야. 죽음을 단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지 말고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럼 한결 나을 거야.”
라일라의 말에 루미나가 조용히 기도를 했다.
“부디 셰르파 멜란이 천국으로 가서 더 좋은 세상에 좋은 인연을 만나서 결혼하길 빕니다.”
일행은 멜란이 결혼을 하기 위해 이번 여정에 위험을 불사하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멜란에게 주기로 한 돈은 그 가족들에게 주고 따로 백 골드를 멜란의 약혼녀에게 위로금으로 주도록.”
에반스가 라일라에게 명했다. 그러자 라일라가 크게 기뻐했다. 그 후 일행은 식사를 했다. 산 자는 살기 위해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저녁 식사를 마치자 사위는 어둠에 잠겼다.
너무 힘든 하루였던지 오히려 에반스와 일행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상당했던 라일라와 루미나,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은 자기 전에 마나 로테이션으로 늦은 시간까지 치료를 하고 원기를 회복했다.
특히 안드레이 공작은 내일부터 다시 동굴을 뒤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완전히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마나 로테이션을 하고 나서 잠을 청하려는 안드레이 공작에게 루크가 불쑥 물었다.
“인생이란 뭘까요?”
“허어. 여태 안 자고 뭐한 건가?”
벌써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루크의 질문에 안드레이 공작이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잠이 안 와서요. 공작님. 진짜 인생은 뭘까요?”
“글쎄. 그건 아직 나도 답을 찾지 못한 거라서 말이야. 하지만 인생의 비결 하나는 알고 있지.”
“인생의 비결이요?”
“그래. 나도 선친께 들은 얘기야.”
안드레이 공작은 과거를 회상하며 루크에게 이야기했다.
“내 부친께서는 스무 살 나이에 고향을 떠나서 앞날을 개척하고자 하셨지. 떠나기 전 부친께서는 그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르신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네. 그러자 그 어르신이 잠시 생각하더니 글을 써서 부친께 건넸어. 인생의 비결이라면서 말이야. 하지만 반만 썼으니 나머지 반은 부친께서 돌아오면 알려 주겠다고 했지. 막 고향을 떠난 부친께서 길 가던 중 그 글을 보니 ‘서른 살 이전에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네. 부친은 감격해서 그 글을 품고 다니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글을 보며 용기를 내 대처를 하셨고 결국 상단을 차리셨고 성공하셨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신 부친께서 다시 고향을 찾았을 때 그 어르신은 돌아가신 뒤였고, 실망한 부친께서 돌아서셨을 때 누군가 부친을 불러 세웠지. ‘아버님께서 남기신 글이 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오시면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르신의 손자가 부친께서 마을에 돌아오시면 주겠다고 한 나머지 반의 글을 부친께 전했지.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을 것 같나?”
“잘 모르겠습니다.”
루크는 고개를 내저으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안드레이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 글은 ‘서른 살 이후에는 후회하지 마라.’고 적혀 있었네. 나는 부친의 그 비결을 지금까지 인생의 비결로 여기고 있네. 루크 자네도 서른이 넘었지?”
“네.”
루크의 대답에 안드레이 공작은 살짝 웃으며 루크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준 뒤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잠자리에 누웠다. 안드레이 공작이 먼저 잠들고 나서 생각에 잠겨 있던 루크도 잠이 들었다.
그런 루크의 얼굴에서 잠들기 전에 고민했던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루크는 더없이 밝게 웃는 얼굴로 기분 좋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