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동굴 지대(6권) (51/90)

Chapter 1   동굴 지대

파르미르 고원의 천연 동굴들이 중 한 곳, 바로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의 아지트에서 그 우두머리인 우순바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검은 로브의 소맷자락 밖으로 나와 있는 그의 앙상한 두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잠시 후, 덮고 있던 후드 아래로 두 방울의 눈물이 떨어져서 그가 쥐고 있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쥐어짜듯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브카여!”

우순바는 자신이 특히 아끼는 다섯 제자와는 서로 영혼으로 공감했다. 아지트 내에 있는 많은 믿을 수 없는 일반 제자들에게는 금제를 가했지만, 반대로 자식처럼 아끼는 다섯 제자들에게, 우순바는 자신의 영혼까지 내어 준 것이다.

그 다섯 제자는 그런 우순바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훌륭한 어둠의 주술사로 성장해 주었다. 그런데 그 영혼으로 이어진 다섯 제자 중 하나인 루브카의 영혼이 우순바와 완전히 끊어졌다.

그 말은 더 이상 이 지상에서 루브카를 볼 수 없다는 소리였다. 루브카는 죽은 것이다.

“비록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내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 그리고 너를 죽인 자들에게 깨닫게 해 줄 것이다. 내 제자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우순바의 몸에서 미증유의 힘이 뿜어져 나왔다.

우우우웅!

그 힘에 동굴이 요동쳤다.

쿠르르르! 쾅! 쾅!

실제 천연 동굴의 천장에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던 종유석들이 떨어져서 바닥에 푹푹 박혔다.

스르르르!

그때 우순바의 눈앞의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곧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자가 머리를 숙이며 다급히 외쳤다.

“스승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자의 외침에 후드 속의 우순바의 얼굴에서 두 줄기 붉은 광채가 뿜어졌다.

고오오오오.

엄청난 살기에 우순바 앞에 나타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도 움찔 몸을 떨었다.

“크로아?”

그때 우순바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를 알아보고 마구 뿜어 대던 살기를 거뒀다. 그러자 요동치던 동굴도 점차 진정되어 갔다.

얼마 뒤 이성을 되찾은 우순바는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그 엄청난 힘의 주인답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마저 떨어트린 채 힘없이 말했다.

“크로아야. 루브카가 죽었다.”

루브카가 죽었다는 말에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가 흠칫 놀랐다.

“루, 루브카가 말입니까?”

크로아는 스승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우순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나도 믿기지 않지만 그 아이와의 영혼이…….”

우순바가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것을 보고 크로아는 정말 루브카가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순바에게는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다섯 제자가 있었고 그중 크로아는 나이가 가장 많았다. 나이가 많은 만큼 크로아는 성격도 다섯 중에 가장 온화하고 침착했다.

하지만 그건 스승인 우순바의 판단이고 크로아는 오히려 다섯 어둠의 주술사 중 가장 음흉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

크로아 역시 가장 자신 있는 주술은 독과 소환술로, 루브카는 그런 그와 항상 비교의 대상이었다.

둘 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의 독과 소환술이 더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런 루브카가 죽었다니 크로아는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 탓에 섭섭한 기분도 들었다.

“잘 왔다. 크로아여. 네가 나서 주어야겠다.”

“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크로아가 우순바의 말에 놀라 그를 빤히 쳐다보자 우순바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루브카를 죽인 자들에게 알려 줘야지. 내 제자를 죽인 것이 어떤 죄인지 말이다.”

우순바는 루브카의 복수를 크로아에게 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아는 왠지 이번 일에 나서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때 우순바의 말이 이어졌다.

“놈들은 반드시 사로잡아 와야 할 것이다. 목숨만 붙여서 데려와라. 내 직접 그놈들의 숨통을 끊어 죽은 루브카의 원혼을 달랠 것이다. 그리고 놈들이 가지고 있는 검을 챙겨 오는 것도 잊지 마라.”

‘검?’

검이란 말에 크로아의 눈이 번득였다. 우순바가 말한 검은 윈스트런의 무덤을 여는 열쇠를 말했다.

‘윈스트런의 검이라면 나서 볼 만하겠군. 하지만 혼자 갈 수는 없지. 내가 충분히 제어가 가능한 그 녀석을 데려가 이용해 먹고 나서…….’

크로아는 욕심이 많았다. 그리고 윈스트런의 무덤을 반드시 우순바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도 얼마든지 윈스트런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크로아는 우순바의 다섯 제자 중에 가장 잔머리가 뛰어났다. 그리고 가장 악독했다. 그는 오직 자신밖에 몰랐다. 그의 스승인 우순바도 그보다 나이가 어린 사제들도 그에게는 이용물에 불과했다.

“스승님. 아시겠지만 루브카의 능력은 결코 저의 아래가 아닙니다. 그런 루브카가 당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제자들 같으면 알았다며 바로 나섰을 텐데 갑자기 엉뚱한 소릴 내뱉는 크로아를 쳐다보며 우순바가 사납게 외쳤다.

“크로아.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저야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로브카를 해친 자들을 놈들을 처단하고 검을 찾아오고 싶지만 그랬다가 저마저 죽게 되면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사제인 구르탄을 데려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구르탄을?”

구르탄은 우순바의 다섯 제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어둠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변신술에 능했다. 하지만 그는 약간 지능이 떨어지고 성격이 급해서 웬만해서 우순바는 그에게 혼자 일을 맡기지 않았다.

잠시 고심하던 우순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아라면 사제인 구르탄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크로아와 구르탄이라면 제아무리 놈들이 강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확실한 게 좋겠지.’

“구르탄을 불러와라.”

우순바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잠시 후 크로아보다 훨씬 큰 체구를 가진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가 석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찾으셨습니까?”

굵직한 목소리가 석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자는 덩치만큼이나 목소리도 크고 힘이 넘쳤다.

“어서 오너라. 구르탄.”

우순바는 크로아처럼 루브카의 죽음을 구르탄에게 알렸다. 그러자 급한 성격의 구르탄이 소리쳤다.

“뭐라고요? 그놈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성격 급한 구르탄은 우순바가 무슨 말도 하기 전에 루브카를 해친 자들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기세였다. 그런 구르탄을 겨우 진정시킨 뒤, 우순바가 크로아를 쳐다보며 구르탄에게 명령했다.

“크로아와 같이 가서 놈들을 잡아 오너라.”

“크로아 사형과 같이요? 뭐 하러 번잡스럽게. 저 혼자 해도 될 것을…….”

구르탄이 우순바의 결정이 불만스러운지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자 우순바가 확실하게 구르탄을 쏘아보며 말했다.

“너 혼자 나서지 말고 반드시 네 사형인 크로아와 같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만약 너로 인해 이번 일을 그르치게 된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우순바의 말에 구르탄이 힘없이 대답했다.

“네.”

한 번 미쳐 날뛰면 통제가 불가능한 구르탄도 그의 스승인 우순바는 무서워했다. 그래서 비교적 구르탄은 우순바의 명령이라면 잘 따랐다.

크로아는 구르탄이 순순히 자신을 따르겠다고 스승인 우순바에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놈들은 파르미르 고원에 있다. 찾아서 잡아 와라.”

루브카가 마지막으로 우순바와 연락을 취한 것이 아직 산을 넘지 못한 파르미르 고원 중턱 어디쯤이었다. 그렇다면 놈들은 지금쯤이면 파르미르 고원을 넘었을 가능성이 컸다. 우순바의 말에 크로아는 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파르미르 고원은 어둠의 주술사들에게는 고향과도 같았다. 그곳에 놈들이 알아서 기어 들어와 주었으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일이 수월해지겠군.’

“알겠습니다.”

앞서와 달리 토 하나 달지 않고 크로아가 바로 대답했다. 그런 크로아를 쳐다보며 우순바가 사뭇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심하고 윈스트런이 죽은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서둘러라.”

우순바의 입에서 윈스트런이란 말이 나오자 크로아와 구르탄 모두 두 눈을 번뜩였다. 그만큼 윈스트런이란 존재가 가지는 무게감은 어둠의 주술사들에게는 엄청났던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크로아가 먼저 움직이자 구르탄이 그 뒤를 따랐다.

스르르르!

우순바는 자신이 아끼는 두 제자가 석실을 나가고 나자 석실 안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순바를 만난 뒤 크로아는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랄트족 어둠의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동굴 내부는 수많은 통로가 있었고 그중 수백여 곳의 석실이 위치했다. 그 석실들은 바로 어둠의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석실을 만드는 것은 어둠의 주술사들이었다. 크로아도 소환술로 괴수들과 언데드 몬스터들을 불러내서 지금의 연구실을 만들었다.

“이야. 좋은데?”

그때 크로아의 뒤에서 구르탄이 나타나서 연구실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 구르탄을 뒤돌아보며 크로아가 말했다.

“너도 네 방에 가서 채비를 하고 와라.”

크로아의 말에 구르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준비는 무슨. 놈들도 여기 파르미르 고원에 있다며? 사형이놈들을 찾는 데 몇 시간 걸리겠어? 오늘 하루면 끝장낼 수 있는데 무슨 준비. 이대로 가도 돼.”

구르탄이 맨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크로아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알았다. 그럼 여기 잠시만 기다려라.”

“어디가려고?”

구르탄이 따라가려 하자 크로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독을 맛보고 싶다면 따라와도 좋다.”

“독!”

구르탄의 슬그머니 뒤로 발을 뺐다. 크로아의 독은 끔찍했다. 그것이 구르탄이 평가한 크로아의 독술이었다. 크로아는 구르탄이 한 발 물러나는 것을 느끼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연구실 안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작은 방에는 그동안 크로아가 채취하거나 만들어 낸 각종 독들이 있었다. 크로아는 그 독들 중 가장 독성이 강한 독이 든 작은 병 세 개를 챙겼다. 그리고 그 작은 방을 나섰다.

크로아는 신기하다는 듯 정신없이 연구실을 둘러보고 있던 덩치 큰 구르탄을 보고 말했다.

“이제 됐다. 가자.”

크로아의 말이 끝나자 먼저 크로아가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그러자 구르탄도 뒤이어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모습을 감췄다.

파르미르 고원을 넘어 윈스트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원 중턱의 동굴 지대로 내려가던 중, 에반스 일행은 날이 저물자 근처에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입구가 막힌 작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동굴 안에 불을 피우자 곧 내부 공기가 덥혀지면서 실내 온도가 상승해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동굴은 허리를 굽혀서 움직여야 할 정도로 천장이 낮았다.

그리고 내부도 그리 넓지 않아서 짐을 동굴 안쪽에 넣고 나서 나머지 공간에 일행이 다닥다닥 붙어서 발을 뻗고 누우면 적당할 정도였다. 내부가 좁은 대신 모닥불 하나로도 실내는 입김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따듯했다.

셰르파 멜란은 모닥불에 먼저 물을 끓였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한 잔씩 일행들에게 건넸다.

“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뜨거운 물을 마시며 추위를 털어 낸 라일라가 행복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라일라를 보며 루미나도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힘들진 않니?”

에반스가 자신의 제자인 루미나에게 다정스럽게 물었다.

“네. 전 괜찮아요. 사제는 어때?”

그때 루미나가 시스턴을 쳐다보며 물었다. 덩치 큰 시스턴은 안 그래도 좁아터진 동굴에서도 짐작 취급을 받으며 안쪽 구석에 쪼그리고 있었다.

“나도 괜찮습니다.”

시스턴도 막 멜란이 건넨 뜨거운 물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한 잔의 뜨거운 물을 마시며 에반스 일행은 한숨을 돌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멜란이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그때 루크가 동굴 안쪽의 자신의 짐 가방에서 앞서 먹다 남은 요크 고기를 꺼냈다. 그때 루크의 가방에서 약병 한 개가 동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약병은 깨지지 않고 데구루루 굴러서 루미나 앞까지 굴러 왔다.

그 약병을 루미나가 챙겨 들었다.

“이게 뭐죠?”

루미나의 물음에 요크 고기를 멜란에게 건네던 루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그거. 아까 그 주술사의 몸에서 나온 거야. 무슨 약병 같은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직 몰라.”

루크의 말에 한가롭게 뜨거운 물을 마시고 있던 안드레이 공작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주술사의 몸에서 나온 약병이라고?”

“네. 제가 아까 주워 왔습니다.”

루크의 대답에 안드레이 공작이 루미나에게 소리쳤다.

“루미나. 그거 조심해서 들고 있어.”

그러고는 직접 루미나에게 다가가서 루미나가 들고 있던 약병을 받았다. 그리고 버럭 루크에게 화를 냈다.

“이 바보 멍청아. 어둠의 주술사들이 이 병에 무슨 약을 넣고 다니겠느냐?”

“네? 그, 그건…….”

그제야 루크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 안에는 분명 극독이 들어 있을 거다. 자칫 약병이 깨졌다면…….”

안이 밀폐된 좁은 동굴을 둘러보며 안드레이 공작이 갑자기 진저리를 쳤다. 그런 안드레이 공작을 보며 루크가 미안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행들에 얘기했다.

“주술사들의 독은 대개 해약이 없어. 때문에 독에 당하면 아주 위험하지.”

그런 루크를 보고 라일라와 루미나가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어휴. 자칫 우릴 다 죽일 뻔했잖아요?”

“앞으로는 아무거나 줍지 마세요.”

안드레이 공작은 약병 주위에 강화 마법을 걸고 동굴 밖으로 내던지려고 했다. 그때 에반스가 말했다.

“잠시만요. 독이라고 했습니까?”

에반스의 물음에 독이 든 병을 동굴 밖으로 던지지 못하고 손에 쥔 상태에서 안드레이 공작이 대답했다.

“그러네. 어둠의 주술사가 소중하게 품속에 지니고 있을 정도라면 아주 지독한 독일 게 분명하네.”

“그거 저를 주십시오.”

“뭐라고?”

안드레이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럽니다.”

에반스는 안드레이 공작 앞에 손을 내밀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잠시 주춤하다가 무슨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고 독이 든 병을 에반스에게 건넸다.

“약병에 강화마법을 걸었네. 웬만해서 깨지지는 않을 거야.”

안드레이 공작의 말에 에반스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병에 강화마법이 걸린 것과 약병 뚜껑을 여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때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 냄새에 에반스와 그 일행들은 허기를 느꼈다.

구운 요크 고기에 고소한 수프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자 에반스와 그 일행들은 노곤하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가 지킬 테니 모두들 쉬어라.”

에반스가 나섰다. 에반스는 스노우 맨들이 선물한 마나 스톤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 마법사인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는 소중하게 마나 스톤을 자신들의 아공간에 보관하고 있었다. 때문에 마나 스톤이 지니고 있으면 피로를 풀어 준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피곤했던지 일행은 곧 잠들었다. 에반스는 동굴 입구에 앉아서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밖을 내다보았다. 산 중턱이라 주위에 눈은 없었지만 산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 부는 바람은 매섭고 차가웠다.

부우우우웅!

바람 소리를 들으며 어두운 밖을 쳐다보며 가만히 앉아 있던 에반스는 뭔가 생각이 난 듯 품속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약병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에게서 받은 독이 든 그 병이었다.

“어둠의 주술사들의 힘은 마력과 독이라고 했다. 마력은 나와 상극이니 무서울 것이 없지만 독은 다르다.”

에반스는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어둠의 주술사가 독을 사용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 끝에 독에 강한 내성을 지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씩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에반스는 독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은 소드 마스터였다. 체질적으로 웬만한 독으로는 소드 마스터를 중독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웬만한 독이 세상에는 많다는 사실을 에반스가 간과한 것이다.

특히 어둠의 주술사들은 새로운 독을 만들었다. 그 독은 당연히 해약도 없었고 그 독에 중독되면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에반스는 겁도 없이 어둠의 주술사가 남긴 독이 든 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독 기운이 흘러나와 에반스의 코를 통해 몸속으로 흡입되었다.

“컥!”

순간 에반스는 목이 막혔다. 다행히 에반스는 본능적으로 열린 병의 뚜껑을 닫았다. 때문에 독 기운이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잠깐 열린 그 순간 밖으로 나온 독 기운은 에반스의 코와 그의 피부를 통해 에반스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어둠의 주술사 루브카의 독은 병뚜껑이 열리면 기체로 화해서 약병 주위의 생명체에게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상당히 활발한 공격성을 지닌 독들이었다.

에반스가 서둘러 병뚜껑을 닫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만약 좀 더 시간을 지체했다면 그 독은 동굴 안의 일행들마저 중독시켰을지 몰랐다.

“크윽!”

독 기운을 흡인한 뒤 에반스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순식간에 독이 온몸에 퍼지면서 에반스는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 검붉은 반점들이 생겨났다. 온몸이 개미에게 뜯어 먹히는 것처럼 따갑고 간지러웠다.

하지만 에반스는 손으로 온몸을 긁고 싶었지만 억눌러 참았다. 그랬다가는 더 위험하다는 것을 에반스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에반스는 경솔하게 독이 든 병의 뚜껑을 연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았다.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에반스는 여기서 더 지체하면 사태가 더 악화될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체내 마나로 독 기운을 몰아내려 했다.

서둘러 정좌하고 앉은 에반스는 마나 로테이션을 시도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열이 나면서 땀구멍을 통해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상을 치료할 때 사용하던 마나 로테이션으로 독을 빼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우우웅!

에반스의 품속에 들어 있던 마나 스톤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에반스 몸속의 독 기운을 마나 스톤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아!”

에반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나 스톤은 마나 증진과 체온 유지 이외에도 피로 회복과 독 기운을 빼내는 효험도 있었던 것이다.

에반스는 마나 스톤의 무궁한 효능에 다시 한 번 마나 스톤을 선물한 스노우 맨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에반스는 마나 스톤의 도움을 받아서 체내에 흡입된 독 기운을 모두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휴우. 죽을 뻔했다.”

에반스는 이 일로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능한 어둠의 주술사들이 독을 풀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 에반스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독이 든 병을 보고 생각했다.

“내성이 생겼을까?”

또 위험한 호기심이 일었다. 밤은 길었고 에반스는 결국 호기심에 굴복했다. 그래서 에반스는 또 마나 스톤을 믿고 독약 뚜껑을 열었다.

스르르르!

검은 기운이 병에서 나와 에반스의 코로 흡입되었다.

“크윽!”

역시 독 기운을 흡입하는 순간 목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에반스는 급히 뚜껑을 닫았다. 독이 빠르게 에반스의 몸으로 퍼졌다. 하지만 앞서보다 에반스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에반스의 예상대로 독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독은 여전히 무서웠다. 또한 앞서 흡입한 양보다 독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에반스의 몸에 생긴 검붉은 반점들은 부풀어서 기포가 되었다.

에반스는 그 기포들이 터지기 전에 서둘러 마나 로테이션을 시도했고 기대했던 대로 마나 스톤 역시 빛을 발하며 독을 흡수했다. 그러자 곧 터질 것 같았던 기포들이 가라앉으며 독이 에반스의 체내에서 빠져나갔다.

에반스의 몸에 침투했다가 빠져나간 독은 그 독성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에반스의 몸이 거름망 역할을 한 것이다. 대신 독 기운은 에반스의 몸에 남아서 독에 대한 그의 내성을 키워 주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에반스는 뚜껑을 열었다 닫으면서 독과의 사투를 벌였고 날이 밝을 때쯤 에반스가 독을 흡입해도 그의 몸에는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완전히 독에 대한 내성이 생겨 버린 것이다.

아침에 에반스의 얘기를 듣고 안드레이 공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어떻게 그런 무식한 방법을……. 자네 목숨이 몇 개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게 말한 뒤 안드레이 공작은 혹시 에반스의 몸에 여분의 독이 있을까 걱정해서 마법을 시전했다.

“카운트렉트(중화)!”

‘빌어먹을.’

순간 에반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독을 중화시키는 마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에반스를 보고 루크가 말했다.

“마법으로 어느 정도 마법의 내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독이 체내에 침투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고 말입니다. 안티 포이즌이라고 하는데, 물론 그 마법은 마도사급 마법사들만 사용할 수 있지만 말이지요.”

결국 간밤에 에반스가 내성을 키우겠다고 독을 흡입한 것은 미친 짓이란 소리였다.

셰르파 멜란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에반스와 일행은 떠날 채비를 하면서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목적지인 동굴 지대로 움직였다.

“이 동굴입니다.”

정오가 되기 전 에반스와 그 일행은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가 머물렀던 그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가 여기에 있을 때 그분께서 이 주위를 돌아다니셨습니다.”

결국 이 동굴 주위에 윈스트런의 무덤이 있다는 소리였다. 루크와 안드레이 공작이 마법으로 주위를 탐색했다. 하지만 동굴 주위에 동굴이 너무 많았고 그 동굴 안에 다양한 생명체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 말은 동굴 속에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동굴 안에는 다양한 몬스터들이 서식하며 그들은 대부분 위험한 포식자들이었다. 동굴 속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에반스와 그 일행을 잡아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 덤빌 터였다.

문제는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가 머물렀던 그 동굴 안에도 그사이 주인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크르르르!”

커다란 입에 톱처럼 촘촘하게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앞발이 짧고 뒷발로 선 채 움직이는 괴물들이 굶주린 얼굴로 에반스와 그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뚝뚝!

녀석들이 흘리는 검푸른 타액이 끈적끈적하게 동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치이익!

그런데 그 타액이 바닥에 닿자 강한 산성에 의해 바닥이 타들어 갔다.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지만 에반스와 그 일행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일행 중 두 여자인 라일라와 루미나도 괴물의 등장에 그리 놀란 얼굴들이 아니었다.

“시스턴.”

그때 에반스가 시스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스턴이 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괴물들을 향해 다가갔다.

괴물들은 덩치도 자신들보다 작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가지고 있지 않은 먹잇감들이 자신들을 보고 도망치지 않자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며칠을 굶은 그들은 이내 그런 생각 따윈 잊었다.

그때 도망쳐도 시원찮을 판에 웬 녀석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괴물들은 빠르고 민첩했다. 단숨에 먹잇감의 몸을 절반으로 잘라 버릴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도 가지고 있었다.

“콰륵!”

맨 앞의 괴물이 거대한 입으로 시스턴의 상체를 덥석 베어 물었다. 원래라면 와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진한 핏물이 녀석의 입안으로 흘러들어 왔어야 했다. 그런데 녀석의 입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섬뜩한 느낌이 목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입 큰 괴물의 머리가 녀석의 육중한 몸통에서 분리되었다.

쿵!

쏴아아악!

머리가 잘리면서 녀석의 몸통에서 노란 피가 뿜어졌다. 그때 시스턴이 괴물의 머리통 옆에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괴물이 덤비자 간단히 그 공격을 피한 시스턴이 검을 뽑아서 단숨에 괴물의 머리를 자른 것이다.

“쿼어어어!”

괴물들은 동료의 죽음에 격분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검을 든 시스턴이 괴물들이 다시는 소리를 내지르지 못하게 앞선 동료와 같이 그들의 머리통과 몸통을 따로 분리시켜 버렸던 것이다.

힘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던 시스턴은 에반스에게 검술을 전수받으며 눈부시게 성장했다. 시스턴의 움직임은 괴물들보다 훨씬 빨랐고 그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시스턴은 전혀 마나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오오!”

이를 지켜보던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 그리고 라일라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사제의 눈부신 활약을 지켜보던 루미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미나도 현재 실력으로 충분히 괴물들은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스턴처럼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단숨에 괴물들의 목을 날려 버릴 힘은 갖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시스턴이 곧 검술에서 그녀를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자인 루미나는 검술 수련 중 최근 자주 벽에 부딪쳤다. 늘어나는 검술 실력에 비해 체력적인 한계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런 루미나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 있었던 에반스가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턱!

놀란 그녀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스승인 에반스가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의 벽은 네가 만든 것이다. 그러니 네 힘으로 언제든 부술 수 있다. 시스턴은 남자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힘을 타고났다. 하지만 마나 수련은 그런 것이 없다. 누가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수련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 넌 너만의 장점이 많다. 그것으로 너의 단점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

에반스가 말을 끝냈을 때 시스턴이 검에 묻은 괴물의 피를 떨고서 에반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리했습니다.”

시스턴의 말에 에반스가 수고했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굳어 있던 시스턴의 얼굴이 펴졌다. 그동안 에반스는 거의 시스턴에게 칭찬을 해 주지 않았다. 그만큼 엄하게 시스턴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하지만 좀 전에 보여 준 시스턴의 움직임은 에반스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에반스도 그동안 시스턴이 정말 열심히 검술을 연마해 왔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파르미르 고원을 오를 때나 스노우 맨들을 만났을 때도 에반스는 시스턴이 나서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스노우 맨들의 동굴에서 케이브 웜을 상대할 때도 시스턴은 셰르파 멜란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시스턴이 에반스에게 찾아와서 자신도 싸울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 에반스는 바로 이 동굴에서 그런 시스턴에게 그동안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 줄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시스턴은 확실하게 그 기회를 잡았고 에반스는 그런 시스턴의 숨은 노력과 그 실력을 인정한 것이다.

마법사인 루크가 시스턴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시스턴이 죽은 괴물의 사체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면서 미안해하는 눈짓으로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루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법을 시전했다.

“클린!”

루크의 마법이 시전되자 괴물의 피로 얼룩진 동굴의 벽면에 금방 깨끗해졌다. 하지만 괴물의 피가 묻은 동굴의 벽면은 아직도 많았다. 괴물을 처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괴물로 인해 동굴이 너무 오염된 것이 문제였다.

안드레이 공작과 에반스는 다른 동굴로 가는 것보다 내부를 치우는 쪽으로 선택을 했고 루크와 시스턴이 그 일을 떠맡은 것이다.

“어머. 지금 우리보고 저 괴물을 치우란 건 아니죠?”

“설마요.”

평소 남자보다 더 괄괄한 두 여자가 이럴 때는 꼭 여자라서 못하겠다고 발뺌을 했다. 그렇다고 안드레이 공작과 에반스에게 도와 달랠 수도 없고 루크와 시스턴 둘이서 죽은 괴물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청소는 두 시간이나 걸렸다. 그사이 안드레이 공작과 에반스는 근처 동굴을 살피고 다녔고 라일라와 루미나는 셰르파 멜란을 데리고 근처에서 야생 요크를 사냥을 했다.

루크와 시스턴이 동굴 내부를 모두 치우고 나자 라일라와 루미나가 멜란과 같이 사냥한 요크를 손질까지 해서 가져왔고, 안드레이 공작과 에반스도 자신들이 살핀 동굴은 알아볼 수 있게 표식을 해 두고 돌아왔다.

“자넨 몇 군데나 살폈나?”

안드레이 공작의 물음에 에반스가 손가락 7개를 펼쳐 보였다.

“많이 했군. 나는 다섯 군데를 살폈네.”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가 머물렀던 이곳 동굴 주위는 수백 개의 동굴이 위치했다. 그중에서 대략 반나절 거리 안에 있는 동굴은 모두 80여 곳이었다. 안드레이 공작과 에반스는 오늘 아니면 내일 안에 윈스트런의 무덤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에반스 일행은 그렇게 늦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인원을 셋으로 나눠서 에반스와 루크가 한 조를 이루고, 안드레이 공작과 시스턴이 한 조를 이뤄 윈스트런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셰르파 멜란과 라일라, 루미나는 남아서 이제 일행의 아지트가 된 동굴을 지키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