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스노우 맨Ⅱ (48/90)

Chapter 8   스노우 맨Ⅱ

에반스 일행 앞에 나타난 스노우 맨의 수는 모두 10마리였다.

그런데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에반스는 스노우 맨들이 특히 쏘아보는 대상이 셰르파 멜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멜란은 스노우 맨들의 등장에 놀라 있으면서도 여전히 손에 머리통을 들고 있었다.

에반스가 멜란에게 외쳤다.

“멜란. 그 머리통을 내려놔라.”

“네?”

에반스의 말에 멜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에반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반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서 그 머리통을 내려놔.”

“아,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멜란이 들고 있던 머리통을 눈밭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 에반스가 멜란에게 물었다.

“스노우 맨들이 우리 말을 알아들을까?”

“그, 글쎄요. 전설에 따르면 스노우 맨의 우두머리는 인간의 말을 할 줄 안다고 하더군요.”

‘전설이라니!’

에반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10마리의 스노우 맨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시스턴이 나서서 소리쳤다.

“뭐 바로 물어보면 알겠지요. 어이! 너희들 중에 내 말 알아듣는 녀석 있나?”

시스턴의 단순 무식한 행동에 에반스도, 나머지 일행도 다소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의외의 성과가 있었다.

“죽은 자들과 아는 사인가?”

스노우 맨 중 한 마리가 너무도 정확히 인간의 말을 했던 것이다.

스노우 맨들은 일제히 멜란을 쏘아보았다. 스노우 맨의 살기에 멜란이 흠칫 놀라고 있을 때, 에반스가 멜란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전설이 사실인 모양이군. 우린 죽은 자들과 잘 모르는 사이다.”

에반스의 말에 스노우 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의 뒤에 그자는 분명 저 머리통의 주인과 아는 사이가 분명하다.”

스노우 맨의 말에 에반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기 이자는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는 셰르파다.”

에반스가 자신의 뒤에 있던 멜란을 자신의 옆으로 당겨 세우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내가 말했다시피 죽은 자들과 모르는 사이다.”

“셰르파?”

그때 다른 스노우 맨들이 인간의 말을 하는 스노우 맨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잠시 후, 스노우 맨이 멜란이 내려놓은 머리통을 가리키며 멜란에게 물었다.

“셰르파란 인간이여. 그 죽은 자는 너와 같은 셰르파인가?”

“네. 저와 같은 셰르파입니다.”

멜란은 자신이 내려놓은 머리통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과 너희들이 모르는 사이가 맞군.”

스노우 맨의 말에 에반스가 스노우 맨을 보고 물었다.

“그런데 이자들은 왜 죽인 것인가?”

“…….”

에반스의 물음에 스노우 맨이 대답 대신 격분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른 스노우 맨들 역시 분노한 듯 살기를 내뿜었다.

그때 에반스의 눈에 스노우 맨의 뒤에 숨어 있는 작은 스노우 맨이 보였다. 그런데 그 작은 스노우 맨은 에반스 일행을 보고 잔뜩 겁먹은 듯 보였다. 에반스가 옆에 서 있던 멜란에게 조용히 물었다.

“스노우 맨 새끼를 팔면 비싼 가격에 팔릴까?”

에반스의 물음에 멜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스노우 맨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알고 보니 멜란이 아는 셰르파는 스노우 맨 새끼를 잡으러 온 자들과 같이 몇 달 전부터 스노우 맨들을 추적했다고 했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끼 스노우 맨을 무리에서 유인해서 납치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스노우 맨들이 얼마나 무서운 종족인지 몰랐다.

들켜도 새끼 스노우 맨만 돌려주면 별일 있을까 생각했던 납치범들은, 분노한 스노우 맨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지고 머리통이 뜯겨진 채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납치범들로 인해 에반스와 그 일행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보이는 스노우 맨들이었다. 하지만 스노우 맨들은 소문처럼 이유 없이 인간을 상하게 하진 않았다.

“너희들은 죽은 자들과 상관이 없으니 가던 길을 계속 가도 된다.”

스노우 맨의 말에 멜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그리고 루크와 시스턴은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신기하다는 듯 설인들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스노우 맨들은 그런 부담스런 눈빛에 속이 다 거북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쿼어어어어!

스노우 맨들 뒤쪽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스노우 맨들이 소리가 울린 쪽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스노우 맨들을 만나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할 판에, 에반스와 그 일행들은 엉뚱한 짓을 했다.

“가 보자.”

에반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행은 사라진 스노우 맨들의 뒤를 쫓았다.

“어디 가는 겁니까?”

멜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에반스 일행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스노우 맨들을 쫓아갔다.

“다들 왜 저러는지…….”

셰르파 멜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에반스 일행의 뒤를 쫓았다. 어쨌든 그들은 그의 고객이었다. 그들을 무사히 데리고 셰르파 마을로 돌아가야 남은 잔금 50골드도 받을 수 있었다.

***

주술사들을 베어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를 쫓아서 카라스 영지로 간 루브카는 그 자들이 이미 파르미르 고원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 자들이 갑자기 인원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파르미르 고원의 지류인 남쪽 숲으로 갔고, 또 한쪽은 파르미르 고원의 셰르파 마을로 향했다는 것이 아닌가?

‘뭐지?’

같이 잘 다니다가 왜 인원을 둘로 나눴을까?

루브카는 고심, 또 고심했다.

“이것들이 아주 날 가지고 놀고 있군.”

어떻게 할지 고심하던 루브카는 일단 셰르파 마을로 가기로 결정했다.

남쪽 숲의 경우, 랄트족 주술사들의 비밀 아지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셰르파 마을에서는 그 산을 넘으면 그 산 중턱의 천연 동굴 지대에 랄트족 주술사들의 비밀 아지트가 있었다.

아무래도 비밀 아지트 근처에 접근한 자들부터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루브카는 파르미르 고원의 남쪽 숲으로 간 자들 역시 감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루브카는 독수리 한 마리를 사로잡아 주술을 걸었다.

독수리의 눈을 통해서 남쪽 숲으로 간 자들을 계속 지켜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세르파 마을로 간 자들을 조사해 보고 만약 그자들이 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즉시 남쪽 숲으로 간 자들에게 달려갈 생각이었다.

“가라.”

퍼드드득!

주술에 걸린 독수리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어서 가 봐야겠군.”

다시 주술을 사용해서 까마귀로 변신한 루브카가 곧장 셰르파의 마을로 날아갔다.

그가 막 셰르파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이미 에반스 일행은 파르미르 고원으로 떠난 뒤였다.

“한발 늦었군.”

하지만 셰르파 마을 유일한 여관에는 그들의 일행 둘이 남아 있었다. 루브카는 그들을 잡아서 자신이 쫓고 있는 자들의 정체부터 알아낼 생각이었다.

한편, 라일라는 정오가 지난 뒤부터 왠지 계속 기분이 찜찜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어 기분이 더 나빴다.

특급 어쌔신인 라일라는 에반스만은 못해도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루미나는 에반스를 따라가지 못한 것 때문에 단단히 삐져 있었다.

“그만 화 풀어. 곧 돌아오실 테니 그 때까지만 나하고 여기서 기다리자.”

“쳇, 좋은 건 자기들끼리만 다 하고.”

“위험해서 너와 날 여기에 두고 간 거잖니. 너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라일라는 에반스의 부탁대로 루미나를 잘 다독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루브카는 여관에 남은 두 사람이 여자인 것을 알고 간단히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두 여자 중 하나가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았다.

‘으음, 소드 마스터는 아닌데 대단하군.’

루브카는 별 수 없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어둠의 주술사는 낮엔 그 힘의 십분지 일밖에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밤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라일라는 먼저 루미나를 재웠다.

그리고 자신도 막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할 때였다.

“헉!”

촤라락!

그녀가 누운 침대에서 넝쿨들이 튀어나와 그녀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라일라는 특급 어쌔신의 습성상 잘 때도 무기를 소지하고 잤다. 바로 검을 뽑은 그녀가 자신을 휘감으려던 넝쿨을 베고 침대 밖으로 몸을 날렸다.

“차앗!”

휘릭!

공중에서 한 바퀴 몸을 튼 라일라가 안정된 동작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착!

짝짝짝!

그런 라일라의 앞에 루브카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단해. 하지만 어쩌나. 여긴 이미 나의 공간인 것을…….”

루브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라일라가 딛고 있던 바닥에서 검은 연기처럼 넝쿨이 피어올랐다.

라일라는 몸을 날려 넝쿨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날린 쪽 벽면에서 또다시 넝쿨이 나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타앗!”

라일라는 검을 휘둘러 그 넝쿨을 베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넝쿨에 이어서 가시덤불이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또 불덩이가 그녀를 노렸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시달리고 나자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도 뼈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었다. 한 시간 동안 공격당하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헉헉!”

갑자기 공격이 멈추자 라일라는 호흡을 고르며 휴식을 취했다. 바로 그때, 방 안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있던 루브카가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더 독한 여자군. 하지만 더는 시간이 없다. 순순히 항복해.”

그렇게 말한 루브카가 짝짝하고 박수를 쳤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고 루미나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헉!”

그녀를 보고 라일라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성이 새어 나왔다. 루미나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방 안으로 들어와 루브카를 향해 걸어갔다.

“루미나! 안 돼!”

다급하게 소리친 라일라가 루미나 쪽으로 몸을 날렸다.

휘리리릭!

그런 그녀의 앞을 가시덤불과 넝쿨들이 가로막았다. 라일라가 악을 쓰며 검을 휘둘러 댔지만 장해물은 쉽게 통과할 수 없었다.

그사이 루미나는 루브카의 앞에 다가섰다.

루브카가 루미나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자 라일라가 소리쳤다.

“항복, 항복할 테니 그 아이를 죽이지 마라.”

라일라가 들고 있던 검을 버렸다. 그것을 보고 루브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진작 그럴 것이지.”

루브카가 쥐고 있던 루미나의 목에서 손을 놓자 라일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스노우 맨들이 언제부터 만년설로 덮인 파르미르 고원에서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야만족의 주술사 중에서는 스노우 맨들이 바바리안의 선조들이라고 믿는 자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스노우 맨들도 수만 년 전부터 대륙에서 살아왔을 가능성도 높았다.

스노우 맨들은 어느 한 산에 머물지 않고 산맥에서 산맥으로 옮겨 다니며 파르미르 고원 전역에서 사냥을 하고 살았다.

그래서 누구도 정확히 스노우 맨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아는 존재는 없었다. 한때 바바리안들이 대륙을 지배할 당시, 스노우 맨들의 가죽은 지배층 바바리안들이 원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바바리안과 스노우 맨 간에 다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스노우 맨의 수는 급감했다.

바바리안들은 주술사들까지 동원해서 스노우 맨들을 사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스노우 맨은 더 이상 파르미르 고원 전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존재들이 되었다.

파르미르 고원에서 살고 있는 스노우 맨의 수는 현재 100마리도 되지 않았다. 그런 스노우 맨을 이 드넓은 파르미르 고원에서 운 좋게 마주쳤는데 그냥 이대로 그들과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스노우 맨 중에는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스노우 맨도 있었다.

‘스노우 맨에 대해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런 기회는 그들 살아생전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안드레이 공작과 루크는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로 스노우 맨들의 뒤를 쫓았다. 이 당시 마법사들은 학자들 못지않게 다방면에 걸쳐 연구를 했다.

스노우 맨에 대한 연구는 분명 마법 학회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반면 에반스는 스노우 맨들의 지능이 인간 못지않다는 것을 알고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을 생각이었다.

파르미르 고원은 아직 개척하지 않은 천혜의 자원 보고였다. 스노우 맨들은 그런 파르미르 고원을 구석구석 다 돌아다녔다. 그렇다면 어디에 어떤 자원이 있는지 다 알고 있을지 몰랐다.

‘반드시 스노우 맨들과 친해져야 한다.’

에반스는 스노우 맨들을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스노우 맨들의 뒤를 바짝 쫓았다.

단지 시스턴만 별생각 없이, 에반스가 뛰니까 그를 쫓아 뛰고 있었고, 그들 맨 뒤에는 그들의 셰르파인 멜란이 뒤따랐다.

스노우 맨들은 눈에 덮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한 동굴로 우르르 들어갔다. 에반스 일행도 그 뒤를 따라 그 동굴로 뛰어들었다.

동굴은 엄청나게 크고 넓었다. 에반스는 기감을 최대한 끌어 올려서 스노우 맨들을 놓치지 않고 계속 쫓았다. 그렇게 10여 분을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동굴 안쪽에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퀘에에엑!

귀청을 찢기라도 하듯 시끄러운 괴성이 동굴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스노우 맨들도 큰 덩치인데 그보다 다섯 배는 더 큰 거대한 괴물이 괴성을 내지른 것이다.

놀라운 것은 스노우 맨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큰 괴물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괴물은 커다란 애벌레처럼 생겼는데 스노우 맨들이 공격할 때는 몸을 웅크렸다가, 갑자기 몸을 펴면서 몸속에 숨겨져 있던 다리들로 스노우 맨들을 공격했다. 그 다리에는 마치 잘 갈아 놓은 갈고리 같은 날카로운 두 개의 발톱이 있었다.

머리가 좋은 스노우 맨들은 괴물이 웅크릴 때 주로 공격하고 서둘러 물러났다. 하지만 스노우 맨 한 마리가 돌부리에 걸리면서 제때 피하지 못할 때 괴물의 공격을 받았다.

쫘아아악!

무방비 상태로 괴물의 무시무시한 손톱에 당한 스노우 맨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워어어!”

괴물의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손톱이 훑고 지나간 스노우 맨의 가슴에는 10센티가 넘게 두 개의 고랑이 파이고, 살점도 뭉텅 떨어져 나갔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가운데 스노우 맨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 괴물이 끝장을 보려는 듯 다른 다리로 스노우 맨을 공격하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괴물에게서 물러나 있던 다른 스노우 맨들이 구슬프게 우는 소리를 냈다.

우우우우!

바로 그때였다.

“파이어 볼!”

안드레이 공작이 부상당한 스노우 맨을 노리던 괴물의 다리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화르르르!

콰앙!

괴물의 다리가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그사이 언제 움직였는지 에반스와 시스턴이 부상당한 스노우 맨 옆에 나타나서 스노우 맨을 부축했다.

퀘엑!

하지만 괴물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폭발하면서 떨어져 나간 다리를 몸속으로 집어넣고 다시 몸을 웅크린 괴물이, 빠르게 몸을 펴면서 다른 성한 다리로 에반스와 부상당한 스노우 맨, 그리고 시스턴을 공격한 것이다.

“매직 실드!”

루크가 급히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콰앙!

괴물의 다리가 방어막을 때렸다. 괴물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루크가 만든 방어막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뚫렸다.

하지만 에반스와 시스턴이 스노우 맨을 부축하고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괴물의 위협적인 손톱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괴물이 재차 공격을 가하려 할 때, 안드레이 공작이 앞선 공격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일격을 괴물에게 선사했다.

“기가 파이어!”

고오오오!

엄청난 화기에 대기가 울부짖었다.

6서클의 화염 마법이 괴물의 옆구리에 직격했다.

콰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불길이 괴물의 몸을 휘감았다.

퀘에에에엑!

괴물이 비명과 동시에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괴물은 몸에 붙은 불길을 끄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때 스노우 맨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에반스가 몸을 날렸다.

파파팟!

꿈틀대며 날뛰는 괴물을 향해 뛰어든 에반스를 보며 스노우 맨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노우 맨들은 유능한 사냥꾼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용기 있는 존재는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괴물이 발광을 할 때 뛰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를 것이 없었다. 제아무리 민첩한 몸놀림을 가진 스노우 맨들도 미쳐 날뛰는 괴물의 몸통을 모두 피해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달랐다.

“타앗!”

괴물이 발광하며 만들어 낸 흙먼지에 가려 괴물의 움직임조차 잘 보이지 않을 때, 에반스가 고함과 함께 오러 블레이드를 내뿜으며 괴물의 몸통을 갈랐다.

쩌억!

괴물의 몸통이 반듯하게 둘로 잘렸다. 괴물의 단단한 가죽도, 튼튼한 뼈도, 에반스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쿠쿠쿠쿵!

퀘에에엑!

몸이 토막 나면서 괴물의 비명은 절정에 이르렀다. 둘로 나뉜 괴물은 몸이 잘린 지렁이 마냥 각자 잘린 몸통들을 꿈틀거렸다.

에반스는 꿈틀대는 괴물의 잘린 몸통에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괴물의 몸이 순식간에 토막이 났다. 괴물은 어느새 십여 토막이 났고, 비명 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우우우우!

그런 에반스를 향해서 스노우 맨들이 일제히 똑같은 음성에 각기 다른 목소리 톤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동굴 안이 은은하게 울렸다.

마치 합창을 하듯 울리는 스노우 맨들의 장엄한 목소리에는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그 울림이 끝나자 스노우 맨들이 에반스에게 달려가서 그를 포위했다. 하지만 에반스는 전혀 놀라거나 당혹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살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 같은 행동이 호감의 표현이라는 것이 바로 느껴진다.’

에반스를 포위한 스노우 맨들이 내뿜고 있는 기운은 따스했다. 그때 스노우 맨들이 에반스를 향해서 뭐라 말을 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다가 모두 다 한소리로 외쳤다.

“베르타! 베르타!”

베르타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그 소리를 듣는 에반스는 왠지 절로 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이 스노우 맨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다른 스노우 맨들과 같이 에반스를 포위하고 있던,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스노우 맨에게 물었다.

“도대체 에반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안드레이 공작의 물음에 다른 스노우 맨들과 같이 베르타를 연호하던 스노우 맨이 대답했다.

“우린 강한 존재를 숭배한다. 저 인간은 강하다. 우리들은 지금 그의 강함에 경의를 표하고 존경의 뜻으로 그에게 우리 스노우 맨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스노우 맨의 이름?”

“그렇다. 베르타는 스노우 맨 중 가장 용감하고 힘 센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그때였다.

스노우 맨들이 갑자기 에반스의 포위망을 풀고 이번에는 안드레이 공작을 에워쌌다.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을 향해 소리쳤다.

“화이더! 화이더!”

안드레이 공작이 의아한 눈으로 좀 전의 스노우 맨을 쳐다보자, 스노우 맨이 곧 인간의 말로 말했다.

“화이더란 불을 뿜는 자를 뜻한다. 스노우 맨들은 당신의 강함에도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이어서 스노우 맨들은 루크에게도 ‘브렌트’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브렌트란 용기 있는 자를 뜻했다. 아마도 자신들의 일족인 스노우 맨을 구하는데 몸을 던진 루크의 용기 있는 행동을 높이 평가한 듯 보였다.

“프렌자!”

스노우 맨들이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루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스노우 맨이 그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일족의 목숨을 구해 준 당신들은 이제 우리 스노우 맨들의 친구다.”

그 말을 듣고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루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스노우 맨을 구하고 괴물을 처치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

제대로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라일라와 루미나는 검은 루브카에게 떠밀려 파르미르 고원을 올랐다.

“당신은 누구죠?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러는 거죠?”

“…….”

라일라는 시간 날 때마다 루브카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루브카는 묵묵부답, 대답하지 않고 그녀들을 차가운 산바람과 경사지 산비탈로 내몰았다.

“헉헉, 더는 못 가겠어요.”

루미나가 지친 기색으로 루브카를 향해 애절한 눈빛을 지어 보였지만, 돌아온 루브카의 목소리는 냉혹했다.

“더 못가겠다면 이곳에서 널 죽이고 갈 것이다.”

라일라는 그 목소리에서 루브카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결코 허언을 할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루미나. 힘을 내라. 여기서 널 잃을 수는 없다.”

라일라가 루미나를 부축했다.

자신 때문에 라일라가 더 힘들어 질 수 있었기 때문에 루미나도 이를 악물고 힘을 냈다.

그렇게 라일라와 루미나는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져도 루브카는 라일라와 루미나에게 계속 산을 오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라일라와 루미나를 죽이겠다고 하니, 라일라와 루미나는 별 수 없이 어둠 속에서도 계속 산을 올랐다.

루브카는 두 여자를 이용해서 에반스 일행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두 여자는 단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때문에 루브카는 앞서 간 에반스 일행을 따라 잡기 위해 밤새 그녀들로 하여금 산을 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인간이었다. 산을 오르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기온은 낮보다 수십도 더 떨어지니, 그녀들의 몸이 견뎌 낼 리 없었다.

결국 두 여자가 쓰러지자 루브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약해 빠져서는. 이래서 여자들은 싫다니까.”

루브카는 주술을 사용해서 두 여자가 얼어 죽지 않게 그녀들의 몸을 덥혀 주었다. 그러자 쓰러졌던 라일라와 루미나가 정신을 차렸다.

‘죽지 않았다.’

이제 얼어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루브카는 결국 라일라와 루미나가 그대로 죽지 않게 살려 냈다. 그 말은 라일라와 루미나가 어느 정도 인질로서 가치가 있다는 소리였다.

라일라의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저자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우릴 인질로 잡았다. 그렇다면 그 목적한 바를 이루기 전에 우릴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요.”

라일라가 절망스런 표정으로 루브카를 보고 말했다. 그러자 루브카가 라일라를 향해 손을 내뻗었고, 라일라는 곧 피로가 가시고 몸에 활력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루미나 역시 체력이 회복되었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라일라는 루미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끗거렸다. 루브카가 기껏 호의를 베풀었는데 지금 그를 자극시켜 좋을 것은 없었다.

라일라와 루미나는 서로에 의지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라일라가 한 번 쓰러지고, 뒤이어 루미나가 쓰러지면서 둘은 최대한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렇게 되자 짜증나는 것은 루브카였다.

‘이것들이 진짜. 확 죽여 버리고 혼자 놈들을 쫓아?’

하지만 루브카는 그러지 못했다. 만약 앞서간 자들이 모두 소드 마스터라면 루브카 혼자서 무슨 수로 그들을 제압하고 검을 되찾는단 말인가?

하지만 두 여자가 그의 인질로 붙잡혀 있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그럴 경우, 적어도 두 여자와 드워프의 검을 맞교환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는 셈이었다.

‘참자. 그자들을 만날 때까지만…….’

루브카는 속으로 꾹 화를 참으며 두 여자가 조금이라도 더 산을 오를 수 있게 주술을 사용했다.

***

관리를 따라 남쪽 숲으로 향하던 다섯 귀족 일행은 예전에 카베인과 그 일행들이 머물렀던 헤산 마을에 다다랐다. 관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마을 쪽으로 손짓을 하며 말했다.

“저 마을이 남쪽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입니다.”

관리의 말에 데보라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제 편안한 여행은 끝난 거로군요.”

“네. 앞으로는 계속 야영을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쳇. 이제부터 고생이로군.”

케이런이 투덜대자 그 옆의 페이슨이 한소리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잊었나? 우린 여기에 여행 온 게 아니란 말이야. 테이거가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와?”

실종된 부친, 카베인 후작을 찾으러 온 테이거는 남쪽 숲에 가까워질수록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고, 점차 말수도 줄어든 상태였다. 그런 테이거를 보면서 나머지 네 명의 귀족들의 마음도 많이 무거웠다.

페이슨의 말에 무안해진 케이런이 슬쩍 테이거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테이거는 딴 생각에 빠져 있어 케이런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보였다.

그때였다.

“누가 우릴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군.”

앨빈이 말했다.

“뭐? 누가?”

케이런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집중해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주위에 위험한 요소는 없었다.

그때 앨빈이 손가락으로 하늘 위를 가리켰다. 일행들이 모두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향했다.

하늘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독수리가 마치 보란 듯이 그들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저게 지금 우릴 감시한다는 거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케이런이 앨빈에게 말했다. 그러자 앨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부터 나타나서 지금까지 계속 우릴 따라오고 있다.”

앨빈의 말에 데보라가 자신이 타고 있던 말 등에서 활을 꺼내들었다.

“뭐 의심스러우면 잡아서 살펴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활에 시위를 메긴 데보라가 하늘 위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사실 까마득히 먼 하늘 위에서 유유히 날고 있는 독수리를 화살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데보라는 그런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소드 마스터였다.

데보라는 활시위에 마나를 주입시켜서 충분한 반발력을 만든 후, 시위를 놓을 때 화살에도 살짝 오러를 주입시켰다.

쐐애액!

화살은 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중을 빙빙 돌고 있던 독수리의 한쪽 날개에 박혔다.

화살을 맞은 독수리는 공중에다 파닥거리다가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찾아오지. 이랴!”

심심했던지, 아니면 테이거를 보기 무안했던지 케이런이 독수리가 떨어지고 있는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잠시 후, 죽은 독수리를 들고 나타났다.

앨빈이 마법 스크롤 한 장을 꺼냈다.

“만약 누가 이 독수리에 마법을 걸었다면 이 탐지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 스크롤이 밝혀 줄 거다.”

그렇게 말한 앨빈이 곧장 스크롤을 찢었다.

화아아악!

마법 스크롤에서 빛이 나며 독수리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후, 그 빛이 사라지자 케이런이 앨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케이런의 물음에 앨빈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 독수리에게서는 마법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어. 남쪽 숲에 다다르자 내 신경이 좀 예민해졌나 봐.”

“뭐? 에이!

퍽!

케이런이 화를 내며 괜히 화풀이로 죽은 독수리를 걷어찼다. 한바탕 독수리로 헤프닝을 벌인 다섯 귀족 일행은, 남쪽 숲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마을, 헤산 마을로 움직였다.

***

스노우 맨의 친구가 된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그리고 루크와 멜란은 그들의 아지트로 초대받았다.

멜란은 산 정상 근처에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스노우 맨들이 어떤 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다. 그래서 내심 투덜대면서도 일행을 따라 동굴 속 깊이 들어갔다.

스노우 맨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표식으로 미로처럼 얽히고설켜 있는 동굴 속을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그 표식에 대해서 만큼은 아무리 친구라도 알려 주지 않았다.

에반스는 스노우 맨들이 산맥과 산맥을 오가며, 눈 덮인 산속에서 어떻게 세상의 이목을 피해 그토록 조용하고 은밀하게 이동해 다녔는지, 동굴 속의 길들을 보고 깨달았다.

파르미르 고원은 수많은 동굴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동굴은 대부분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산맥과 산맥을 연결한 것은 수만 년 동안 이어온 스노우 맨들의 인위적인 노력도 있었다.

스노우 맨의 안내로 따라 들어간 동굴 안에 꽤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그 곳에는 놀랍게도 움막들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움막 안에는 수십 마리의 스노우 맨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크기가 에반스 일행이 처음에 만난 스노우 맨들에 비해 약간 작았다. 그리고 그 스노우 맨들에게 한 마리에서 세 마리가량의 작은 스노우 맨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바로 스노우 맨 암컷들과 그 새끼들이었다.

처음 인간들이 그들의 아지트에 불쑥 나타났을 때, 스노우 맨 암컷과 새끼들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수컷 스노우 맨들이 나타나면서 스노우 맨의 아지트는 이내 시끌벅적해졌다.

“우리에겐 이런 아지트가 수백 개도 넘게 있다.”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스노우 맨이 그들의 동굴 속 아지트를 세 인간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서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컷 스노우 맨들은 그들의 가족들에게 세 인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그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스노우 맨의 가족들은 직접 에반스 일행을 찾아가서 고마움을 표했다.

스노우 맨 가족들은 모두 자신들의 친구가 된 에반스 일행을 환영했다.

환영의 절정은 역시 술이었다.

놀랍게도 스노우 맨들은 직접 술을 담아서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 맛이 보통 기가 막힌 게 아니었다.

“햐아! 정말 좋군. 라일라가 한잔했으면 아마 여기서 살겠다며 설쳤을 겁니다.”

루크가 술 한 병을 다 마시고 나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에반스 역시 술병을 뒤집어 병 안의 술을 남은 한 방울까지 털어서 입안에 넣었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 않던 안드레이 공작도 그 술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눈빛을 지으며 모두 마셨다.

그런 인간 친구들을 보고 스노우 맨들은 자신들 담은 술을 한 병씩 내어 와서 그들의 새 친구에게 권했다.

“하하하, 고마워!”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배가 불리고 질리기 마련인데, 스노우 맨들이 내놓은 술은 아무리 마셔도 배가 부르거나 질리지 않았다. 스노우 맨들도 친구들이 즐거워하자 기뻐하며 흥청망청 술을 마셔 댔다.

특이하게 스노우 맨들은 암컷은 물론, 새끼들까지도 술을 마시게 했다. 그것을 보고 루크가 묻자 즐거운 일이 있으면 모두 다 즐거워야 하는 것이 스노우 맨들의 전통이라고 했다.

그렇게 인간들의 환영식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드드드드!

미세하게 동굴이 울렸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떠들며 여흥에 겨워 춤까지 추고 있었던 스노우 맨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에반스와 안드레이 공작, 루크 역시 술을 마시고 흥에 겨워 뛰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는 스노우 맨들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반스가 토막 내 죽인 괴물은 케이브 웜이란 녀석으로, 스노우 맨과 같이 고대에서부터 파르미르 고원에서 살아온 거대한 땅속 벌레였다.

녀석들은 원래 한 쌍으로 움직이며 파르미르 공원의 동굴 속에 사는 생명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녀석들은 땅속 생명체들의 먹이 사슬에서 최고에 위치한 포식자였다.

주로 산의 만년설 위에서 살며, 매번 산을 옮겨 다니는 스노우 맨들은 녀석들에게 좋은 보양식이었다.

수컷 케이브 웜은 스노우 맨들을 발견하자 그쪽으로 암컷 케이브 웜을 보냈다. 곧 짝짓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암컷 케이브 웜에게 맘껏 스노우 맨을 잡아먹으라고 혼자 보낸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가 보니 어이없게도 암컷 케이브 웜이 토막 난 채 죽어 있었다.

수컷 케이브 웜은 분노했다.

케이브 웜들 역시 수만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 개체가 급격히 줄어든 상태였다. 케이브 웜들이 이렇게 개체 수가 줄어든 것은 바로 주술사들 때문이었다.

케이브 웜은 동굴 속에 사는 생명체는 다 잡아 먹었다. 그러니 야만족 주술사들 역시 그들에게는 먹잇감일 뿐이었다.

케이브 웜들은 본능적으로 먹잇감을 공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주술사들은 강했고, 오히려 케이브 웜들이 주술사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파르미르 고원에는 많은 주술사들이 있었다. 그 중 약한 주술사들은 케이브 웜들의 먹이가 되었지만, 강한 주술사들은 반대로 케이브 웜들을 죽였다.

그렇게 주술사와 케이브 웜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죽였다. 하지만 주술사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고, 케이브 웜의 수는 줄어들었다. 그렇게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파르미르 고원에서는 더 이상 케이브 웜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 주술사들은 케이브 웜들이 멸종되었다고도 했다. 그렇게 이제는 희귀한 존재가 되어 버린 케이브 웜들이었다.

그런 케이브 웜 한 마리가 죽었다. 그것도 곧 짝짓기를 통해서 개체 수를 늘려 줄 소중한 암컷이 말이다.

분노한 수컷 케이브 웜은 암컷 케이브 웜을 죽인 스노우 맨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근처에서 스노우 맨들의 아지트를 발견했다. 스노우 맨들은 암컷 케이브 웜을 죽여 놓고 시끄럽게 떠들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컷 케이브 웜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스노우 맨들의 아지트로 접근했다. 녀석은 스노우 맨들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잡아먹기 위해서 동굴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케이브 웜은 튼튼한 이빨로 동굴의 한쪽을 갉아서 그 흙을 입에 담아서 그 흙으로 동굴 입구들을 막았다.

그렇게 스노우 맨들이 달아날 길을 모두 막은 케이브 웜은, 유일하게 남은 출입구를 통해 스노우 맨들의 아지트 안으로 꿈틀꿈틀 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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